소설리스트

혼불 (298)화 (298/348)

#298

“지금의 나례청은 인간적이지 않습니다.”

휘림의 말에, 수향의 눈매가 설핏 일그러졌다.

“인간적이지 않다?”

수향이 손에 쥐고 있던 술잔을 탁, 소리가 나도록 내려놓았다.

“귀신이 얼마나 많은 해악을 몰고 오는지 알고 있으면서 어찌 그런 말을 한단 말입니까? 귀신은 섭리에 어긋난 이물이거늘, 어찌 그것에 빗대어 산 자의 마음가짐을 운운합니까?”

수향이 정색하며 휘림을 응시했다.

“과일에 병충이 들면 도려내야 함이 마땅하고, 장을 담갔는데 구더기가 들끓는다면 걷어내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지요.”

“과일에 병충이 들고 장에 구더기가 끓는 것도 천지간의 조화가 빚어낸 일이니 그 자체만 놓고 본다면 어찌 옳고 그르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설마 지금 산목숨보다 귀신 따위가 더 중하다 이런 말을 하는 겁니까?”

“내 말은 그게 아닙니다.”

“휘림은 지금 나례청을 부정하고 있는 겁니다.”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내 길이 아니라고 생각할 뿐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무엇을 위해 여기까지 힘써 왔는지 잊었습니까?”

수향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식었다. 호수처럼 잔잔하던 대화는 어느덧 말다툼으로 번져 있었고,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시선은 살얼음판처럼 싸늘했다. 한때는 분명 같은 곳에 서 있었으나 어느샌가 두 사람은 서로를 그대로 지나쳐, 이제는 반대로 멀어지고 있었다.

“묘정, 뭐라 말을 좀 해보시지요.”

수향이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채로 입을 열었다. 그러나 묘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뭐라 말을 한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묘정은 그를 붙잡을 용기도, 자신도 없었다.

***

묘정은 이른 아침부터 집무실에 앉아 있었다.

오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하늘이 화창하여 유독 날이 좋았다. 묘정은 무료한 눈으로 탁자 위에 쌓여 있는 서책 더미를 바라보았다. 탁자 위에는 지방마다 횡행하는 귀신의 동향이 담긴 족자가 잔뜩 쌓여 있었고, 오후에는 나례청 원로들과 회의가 있었으며, 조만간 외국에서 사신이 온다고 하여 그날 있을 궁중 나례도 준비를 서둘러야 했다. 그리고 또…….

머릿속으로 할 일을 떠올리던 묘정은 탁자 위에 스르륵 엎드렸다.

“대감.”

그때, 부관 하나가 와서 전언했다.

“평안도 감찰부의 시무관 이치원으로부터 서한이 왔습니다. 최근 큰 기근이 들어 잡귀가 늘었고, 역병을 안은 저퀴가 기승을 부린다 합니다. 밤마다 집을 옮겨 다니며 병을 퍼트려 집집마다 병자가 속출하고 있다고 하니 속히 방비할 대책을 마련해달라 청을 보냈습니다.”

말을 마친 부관은 묘정의 대답을 기다렸으나, 묘정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묘정은 며칠 전부터 까닭 모를 무기력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정확히는 휘림이 사직하고 떠나겠노라 통보를 해 온 그날부터였다. 그날 누구 하나 물러서지 않은 상태로 언쟁은 끝이 났다. 그리고 묘정은 알았다. 휘림은 떠날 것이고, 앞으로 더 이상 셋이 함께할 날은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그 사실을 깨닫고 나니 모든 일에 의욕이 나질 않았다. 귀하다는 진미를 먹어도, 흥미롭다는 글을 읽어도, 근사한 경치를 두고도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대감, 어찌할까요?”

아무리 기다려도 윗전은 묵묵부답이니 부관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한참을 말없이 엎드려 있던 묘정은 ‘부적과 비방에 능한 이들을 꾸려 원군을 보내라’고 성의 없이 대꾸했다.

욕심을 가지지만 않는다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고, 그 이상 바라지 않으려고 했다. 이 삶의 종지부를 찍는 순간이 온다면, 그때가 바로 휘림과 헤어지게 되는 순간일 것이라고 묘정은 생각했다. 그러나 작별의 시간은 묘정의 예상보다도 훨씬 더 빠르게 찾아왔다.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름에 잠겨 끙끙대던 묘정은 고민 끝에 휘림에게 찾아갔다. 시전에 나갈 일이 있다는 핑계를 대고 함께 가겠느냐고 하자, 휘림은 흔쾌히 그러자며 고개를 끄덕였다.

묘정은 휘림과 나란히 걸었다.

“언제 떠난다고 했지요?”

“내일 갑니다.”

안 가면 안 되겠느냐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잠시 주저하던 묘정은 애써 말을 삼켰다. 머물 곳은 구했느냐고 물었다. 휘림은 지낼 곳 하나 없겠느냐며 평온하게 대꾸했다.

“참, 그 이야기 들었습니까?”

휘림은 붉은 안개를 몰고 다니는 독한 악신이 나타났다는 소문을 알려 주었다.

“어쩌면 재앙신이 아닐지요.”

“재앙신?”

“예, 평범한 역신과는 견줄 수 없을 만큼 강하다고 합니다.”

“정녕 그런 일이 있단 말입니까.”

어째서 그런 이야기가 여태껏 자신의 귀에까지 들려오지 않았는지 의문이었다. 그러자 휘림도 정말 한 번도 이 소문을 들어본 적이 없느냐며 덩달아 의아하다는 기색을 비쳤다.

“도성까지 온다면 필시 나라에 큰 변고가 있을 것이니 각별히 주의하셔야 합니다.”

휘림이 덧붙여 일러준 특이한 점은 ‘재앙신’이라고 불리는 존재가 어린아이의 외양을 하고 있다는 것, 붉은 안개를 몰고 다닌다는 것이었다. 요사한 악신이 내려왔다는 소문은 민간의 백성들 사이에서도 이미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악신이 거쳐 간 자리에는 반드시 역병과 기근이 들게 되며, 초목이 메마르고 토양이 썩어서 마을 전체가 쑥대밭이 된다고 했다.

휘림은 사뭇 심각한 어조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으나 묘정의 신경은 온통 다른 곳에 쏠려 있었다. 머릿속에는 무슨 말로 휘림을 붙잡을 수 있는지, 오로지 그 생각 하나뿐이었다.

내일이면 더는 볼 수 없게 되는데도 휘림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마음만 같아서는 나를 버리고 가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고 싶었으나 묘정에게는 휘림을 붙잡을 명분이 없었다.

“휘림은 사는 게 힘들지 않습니까?”

“갑자기 그런 건 왜 묻습니까?”

“나는 산다는 게 무언지 통 모르겠습니다.”

“무어 그런 고민을 한답니까.”

휘림이 하하 웃으며 묘정을 돌아보았다.

“산다는 게 다 그렇지요. 그래도 이렇게 태어난 데에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돌멩이나 나무로 태어났다면 이런 고통을 몰랐을 테지요. 하지만 설움과 억울함, 쓸쓸함과 슬픔을 온전히 느끼며 아파하도록 태어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잠시 말이 없던 묘정은 한참 만에 주저하며 입을 뗐다.

“…뭘 해도 벗어날 수 없는 운명 같은 게 있다면, 휘림은 어떡할 겁니까?”

묘정의 질문에, 휘림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절대적인 흐름을 따라 주어진 대로 순응하고 살아야 한다면 인간은 처음부터 그렇게 태어났을 것이다. 그러나 하늘은 인간을 이렇게나 번민하고 욕망하는 존재로 만들어냈다.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지요. 개천은 강으로 이어지고, 강의 끝에는 바다가 있습니다. 물고기는 물을 벗어날 수 없을 겁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혹시 그거 압니까?”

“무엇을 말입니까?”

“회유어라고 해서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오르는 물고기가 있습니다.”

잠시 말을 멈춘 휘림이 또렷한 눈으로 묘정을 올려다보았다.

“어쩌면 그 운명을 거스르는 일조차도 필연 아니겠습니까?”

***

한참을 걷다 보니 어느덧 시전에 도착했다. 휘림은 이리저리 좌판을 옮겨 다니며 수더분하게 흥정을 벌이기도 하고, 묘정을 향해서 “이것 좀 보시지요!” 하며 손짓을 하기도 했다.

그때, 근처에서 상인 한 명이 묘정에게 말을 걸었다.

“보는 눈이 있으시구먼요, 나리. 이게 아주 귀한 겁니다.”

시선을 내리자 좌판에 각양각색의 고운 노리개가 진열되어 있었다. 노리개는 부드러운 술이 달려 매우 아름답고 멋스러웠다. 한눈에 봐도 값진 물건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정인이 있다면 선물해 보시지요. 여인이라면 싫어할 리가 없을 겁니다!”

상인의 설명을 듣던 묘정은 저도 모르게 귀를 기울이다가, 휘림을 힐끗 돌아보았다. 휘림은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물건을 구경하고 있었다. 묘정은 노리개를 만지작거렸다.

묘정은 가장 예쁘고 값비싼 노리개를 골라 들었다. 시전 구경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묘정은 휘림에게 노리개를 건넸다. 휘림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게 무엇입니까?”

“잘 어울릴 것 같아서 하나 샀습니다.”

묘정은 얼뜨기 소년처럼 가슴이 두근거렸으나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며 입을 열었다. 휘림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노리개를 받아 들었다.

"잘 쓰겠습니다. 검집에 달면 아주 근사할 것 같습니다.”

그게 아니라 내가 그걸 준 것은…….

묘정은 입술을 달싹였다. 그런 의미로 준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여인이라면 싫어할 리가 없다는 고운 노리개라도 휘림에게는 검집에 매다는 장신구가 될 뿐이었다.

“사실은 다 알고 있으면서…….”

한 걸음, 두 걸음씩 멀어져 가는 휘림의 등에 대고 묘정이 말했다.

“알고 있으면서 일부러 모르는 척하는 거 압니다.”

휘림이 우뚝 몸을 세웠다.

“나도 모른 척할 테니, 벗으로서 계속 이렇게 같이 있으면 안 될까요?”

묘정은 자신이 많은 걸 바란다는 생각 같은 건 해본 적 없었다. 마음 가는 대로 삶을 선택할 수 있는 그의 호기와 자유가 부럽기도 했다. 만약 휘림이 모든 걸 관두고 나와 함께 갑시다, 하고 말한다면 묘정은 기꺼이 모든 걸 버리고 휘림을 따라나설 자신이 있었다.

억겁과도 같은 정적이 흘렀다. 묘정은 시선을 내렸다. 최대한 담담하게 털어놓은 진심이었으나 말을 뱉은 순간부터 감정이 소용돌이치며 목울대가 뜨거워졌다.

사실대로 털어놓을 생각이었다. 나는 어차피 오래 살지 못한다고, 주어진 시간이 그리 많지 않으니 그때까지만이라도 곁에 있어 달라고, 간절하게 청을 덧붙이려는 순간이었다.

“나는 여인이기에 벗으로서는 당신 곁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휘림이 천천히 몸을 돌리더니 묘정과 마주 보고 섰다.

“미안합니다. 내가 차라리 사내라면 좋았을 것을…….”

그가 한 마리 새라면, 묘정은 날개를 부러뜨려서 새장 속에라도 가두고 싶었다. 그러나 정말로 그를 사랑한다면 자유와 해방을 빌어주어야 한다. 묘정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가장 마음이 아픈 것은 자신의 존재가 그에게는 방해물이자 짐이나 다름없다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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