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불 (299)화 (299/348)

#299

휘림이 떠났다.

묘정은 마루에 앉아 멍하니 풍경을 바라보았다. 눈에 보이는 풍경은 변함없이 평화로웠다. 하루하루 똑같은 일상이 반복되었다.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달라진 것은 더 휘림이 곁에 없다는 것이다. 삶이 이렇게나 지루하고 무료한 것이었는지 이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다.

휘림이 곁에 없던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도성에 올라오고 나서 몇 해 동안 떨어져 지내느라 얼굴 한 번 보지 못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때는 언젠가 만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있었고, 그 기대감을 발판으로 삼았기 때문에 하루하루 성심을 다해 살아갈 수 있었다. 지금의 묘정은 그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을 만큼 메마르고 공허한 기분을 느꼈다.

‘나는 여인이기에 벗으로서는 당신 곁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 말에 무슨 함의가 담겨 있는지, 묘정은 모르지 않았다.

여인이기에 벗으로서 곁에 있을 수 없다는 말에 담긴 여지를 붙잡고, 반대로 뒤집어 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묘정은 차마 묻지 못했다. 그렇다면 여인으로서는 내 곁에 있어 줄 수 있느냐고. 오히려 먼저 등을 돌린 건 묘정이었다. 휘림을 간절히 원했으나, 그를 진정으로 원한다면 벗이 아닌 여인으로서 제 곁에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언젠가 자신의 앞날을 내다보았을 때 이런 작별은 예고되어 있지 않았다. 예전에 점괘를 내보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휘림은 이번에도 길 바깥에 있었다. 그리고 묘정에게는 반드시 가야만 하는 주어진 운명의 길이 있었다. 작별 앞에서, 묘정은 이곳을 떠나 거처를 마련하게 된다면 서신으로라도 왕래하고 지낼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휘림은 그러겠노라 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영영 벗으로 남게 되었다.

휘림이 이곳을 떠난 지 두 달쯤 되었을 때 그는 정말 약속대로 자신이 거처로 삼은 곳을 알리는 짤막한 서신을 보내왔다. 묘정은 휘림의 필체를 손끝으로 덧그리듯이 만져 보다가 이내 멍하니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어쩌면 휘림은 저를 붙잡아 주거나, 함께 따라나서 주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묘정은 끝내 자신의 운명을 털어놓지 못했다.

묘정은 불현듯 자신에게 남은 햇수를 헤아려 보았다.

아니, 잘한 일이다. 그래. 이거면 되었다.

텅 빈 손아귀를 천천히 움켜쥐며 묘정은 눈을 감았다.

***

휘림이 떠난 이후로 묘정은 말수가 줄었고, 상념에 잠기는 시간이 많아졌다.

요사이 묘정은 삶과 죽음, 인간과 귀신, 그리고 운명에 대해서 생각하고는 했다. 서책을 보거나 평소와 다름없이 지내다가도 때때로 고개를 들고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게 되었다.

“무얼 그리 보십니까?”

수향의 물음에 묘정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다른 이들은 눈치채지 못했으나 수향은 알 수 있었다. 묘정은 이전과는 다르게 기운이 없었고, 몹시 무기력해 보였다. 휘림이 떠나고 묘정이 크게 상심했다는 것을 알아차린 수향은 하루에도 몇 번씩 들러 묘정에게 말을 걸기도 하고, 곁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주고는 했다.

“휘림은 잘 지내고 있을 겁니다. 서로 갈 길이 다르니 언젠가는 반드시 멀어질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기운을 내세요. 군주가 시름에 잠기면 한 나라가 위태롭다고 하였습니다.”

“허나 내가 군주는 아니지요.”

“귀신과 인간을 아우르는 나자들의 주군 아니십니까.”

“…….”

묘정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제 운명에 대해서 생각하다 보면 방상시가 이 땅에 내려온 이유, 그 본질에 대해서 골몰하게 되었다. 악귀를 쫓는 신. 이승의 질서를 바로잡는 신. 부정한 것을 파(破)하고 격퇴하는 힘. 이름을 부르고 명(命)을 인도하는 성명자의 권능.

‘참, 그 이야기 들었습니까? 근래에 재앙신이 내려와 민간이 쑥대밭이라 합니다. 도성까지 온다면 필시 나라에 큰 변고가 있을 것이니 각별히 주의하셔야 합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묘정이 불쑥 입을 열었다.

“바깥에 재앙신이 횡행한다고 하던데, 혹 들은 바가 있습니까?”

질문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수향의 낯에 당혹스러움이 떠올랐다. 반응을 보아하니 수향은 재앙신이라 불리는 존재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것이…….”

묘정이 재차 묻자, 수향은 난처한 기색이 역력하여 입을 열었다.

“원로들이 아직 말을 전해서는 안 된다 하여… 아직 손쓸 때가 아니라 조금 더 시일이 지나야 합니다. 오랫동안 계획한 일이니 궁궐까지 소문이 닿으면 그때 알리라고 하였습니다.”

묘정은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한 얼굴을 했다.

“‘그것’은 일부러 만들어 낸 것입니다.”

묘정의 눈이 서서히 크게 뜨였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재앙신이라 불리는 악신은 사특한 악귀를 모아 주술로 만들어낸 것으로, 일을 꾸민 목적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재앙신을 속박하여 부리는 데 성공하면 인간으로서는 가질 수 없는 강한 힘을 얻게 되리라는 계산이었다. 그 힘은 장차 나자들에게 큰 이익이 될 것이었다.

재앙신을 봉인하기 위해서는 제물이 필요했다. 재앙신이라 불리는 것을 만들어 낸 후, 본디 의도한 대로 그것을 속박하기 위하여 살아 있는 아이를 제물로 인신(人身) 봉인을 하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문제는 그 힘이 워낙 강하여 도저히 억누를 재간이 없었던 것이다.

또한 아이의 몸속에서 날뛰어대는 재앙신의 기운이 매우 흉포하여, 재앙신의 그릇이 되는 인간 아이조차도 이성을 잃기 일쑤였다. 때문에 아이를 다스리는 자체가 아예 불가능했다.

그리고 둘째는 바로 이렇게, 재앙신을 부리는 데 실패했을 때의 경우였다. 나자들의 힘으로 수습하는 것이 불가능하더라도 현신의 권능이 있다면 재앙신을 제압하는 것이 가능했다. 비록 재앙신을 다스리는 데 실패하여 없애게 되더라도, 이 또한 나자들에게는 이득이었다.

“나례청의 입지가 나날이 위태로워지고 있으니 현신께서 직접 재앙신을 구축한다면 궁궐에서도 나례청이 존속해야 함을 깨닫게 될 것이므로 이 또한 좋은 본보기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일부러 ‘그것’이 바깥에 해악을 부리도록 내버려 두었단 말입니까?”

“당분간은 그러할지라도 멀리서 본다면 결국은 나라와 백성을 위한 일입니다.”

“그래서… 살아 있는 아이를, 재앙신을 봉인하는 제물로 썼다….”

묘정이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허면, 그 아이는 누구입니까?”

아이의 부모는 비교적 묘정의 측근이었다. 반나절 전에도 얼굴을 보았고 말을 섞었던, 평소 곁에서 시중을 드는 부관이었다. 몇 년이 넘도록 부관으로 지내고 있는 탓에 묘정에게도 익숙했다. 그는 이곳에서 같은 나자와 부부의 연을 맺었는데, 재앙신의 그릇이 된 아이는 그 둘 사이에서 태어난 어린 아들이라고 했다. 나자들끼리 혼인하는 일은 흔한 일이었다.

“그 말은… 부모가 직접 원해서 아이를 제물로 바쳤다는 말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이야기를 전해 들은 묘정은 숨을 멈췄다.

“…….”

발끝에서부터 이상한 열기가 끓어오르는 듯했다. 묘정은 수향에게 아이를 갖다 바친 나자 부부를 즉시 데려오라 명하고, 이런 일을 계획하고 벌인 원로들도 당장 잡아들이라고 했다.

묘정은 휘청거리며 문밖으로 나왔다.

모두가 모인 앞에서, 묘정은 근처에 서 있던 호위에게 다가갔다. 호위의 허리춤에 매달린 검집으로 손을 가져가 즉시 검을 빼 들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성큼성큼 걸어 부관의 앞으로 향한 묘정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의 목에 시퍼런 검을 겨누었다.

그때, 수향이 달려와 묘정의 앞을 가로막았다.

“부디 고정하십시오!”

“비키세요.”

묘정은 살의에 가까운 분노를 느꼈다.

“아니 됩니다!…”

“비키라 했습니다.”

수향이 간곡히 읍소했다.

“나자로서 사명을 다하고 모범을 보이며 힘써 온 자입니다.”

역겹고 경멸스러워서 헛구역질이 나올 지경이었다.

“인두겁을 쓰고 이럴 순 없는 겁니다.”

“나례청을 위한다는 일념 하나로 사랑하는 자식을 제물로 바쳤다고는 하나, 부모로서 이들이라고 해서 마음이 오죽하겠습니까? 부디 너그럽게 여기시어 자비를 베푸셔야 합니다.”

수향의 청원에 묘정의 손이 멈칫했다. 부관과는 얼굴을 맞대고 지낸 사이였으므로 천성 자체가 악한 인간이 아니라는 것쯤은 묘정도 알고 있었다. 오히려 지금껏 봐온 누구보다도 부관은 선량하였고 올곧은 심성을 가지고 있었다. 남들과 다를 바 없이 평범한 사람이었다.

묘정은 오랫동안 미동조차 하지 않고 멈춰 서 있었다.

“아이의 이름이 뭐지?”

묘정은 부관을 향해 물었다. 그런데, 부관은 새하얗게 질린 낯으로 입술을 몇 번 달싹이기만 할 뿐,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는 듯이 머뭇거렸다. 그 순간 묘정은 알아차렸다.

“아이의 이름을 지어 주지 않았어?”

마침내 묘정이 실소에 가까운 헛웃음을 흘렸다. 부모의 마음은 오죽하겠느냐며 자비를 베풀어달라는 수향의 말에 한순간 애석한 마음이 든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눈앞의 인간은 평범한 부모가 아니었다. 사랑하는 자식에게 이름조차 지어 주지 않는 부모는 없을 것이다.

묘정은 천천히 손을 내리며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새까만 하늘이 비극의 장막처럼 펼쳐져 있었다. 멍하니 어둠 속을 응시하던 묘정은 손으로 이마를 틀어쥐었다. 머리가 아팠다.

나자로서 이들에게 죄는 없었다. 그저 평범한 한 인간으로서 죄가 있을 뿐이었다.

묘정은 손에 쥐고 있던 검을 휘둘러 부관의 목을 베었다. 피가 분수처럼 솟구쳐 올랐다. 곳곳에서 경악에 찬 비명이 터졌다. 묘정은 바닥에 엎어져 있던 나머지 한 명의 목도 마저 베었다. 수향은 눈을 크게 홉뜬 채 망연자실한 얼굴로 묘정을 바라보고 있었다.

묘정은 몸을 돌려 칼끝으로 수향과 원로들을 겨누었다.

“자식의 목숨을 제물로 쓰는 것이 그대들이 말하는 대의인가?”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묘정은 천천히 칼을 버렸다. 어둠에 물든 땅이 귀신의 영토라면, 나례는 어둠을 몰아내는 횃불이라. 불꽃의 심지가 다 하였다면 곧 사그라질 때였다. 달이 차면 기울듯이 번영과 쇠락도 어쩌면 하늘의 소관일 터다. 묘정이 내다보았던 자신의 앞날에 나례청을 무너트리는 일 같은 건 없었다. 그러니 이 길은 주어진 정도(正道)가 아니었다.

“지금 이 시간부로 나례청을 파(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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