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
‘지금 이 시간부로 나례청을 파(波)한다.’
당연하게도 극심한 반발이 있었다. 원로들을 비롯한 몇몇 나자들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읍소하며 항거하였으나, 그럼에도 묘정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수향은 배신이라도 당한 것 같은 눈으로 묘정을 바라보았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묘정은 방상시로서 부여받은 모든 짐을 챙겨 나례청을 나왔다. 짐은 생각보다 간소했다.
나례청의 상징이자 근간이 되는 방상시가 부재하는 이상, 나자들을 한데 모았던 구심점 또한 사라진 셈이 되었다.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한들, 남아 있는 이들의 결속이 길게 이어지지는 못할 것이었다. 힘주어 뭉쳐봤자 결국 부서지고야 마는 흙처럼, 자연히 흩어질 테다.
자신이 있을 곳을 스스로 없애버린 셈이 되었으나 놀라울 정도로 실감이 나지 않았다. 나례청은 인간적이지 않다던 휘림의 말은 틀렸다. 오히려 너무 인간적이기에 그들은 괴물이 되었다. 죄없는 아이까지 산 제물로 바치면서 존속해야 하는 집단이라면 이 나라와 백성을 수호할 자격이 없었다. 이승의 질서를 바로잡는다느니, 전부 허울뿐인 빛 좋은 개살구였다.
하루가 다르게 날이 추워졌다. 모든 것이 죽어가는 계절이 오고 있었다. 어두워진 산길을 묵묵히 걷던 묘정은 문득 걸음을 멈췄다. 고개를 돌려 자신이 걸어온 길을 돌아보았다.
“…….”
곧 있으면 해가 지겠구나.
묘정은 옷깃을 여미며 걸음을 재촉했다.
묘정은 재앙신을 찾아내어 없애는 것이 자신의 마지막 소임이라고 믿었다. 그러려면 어디로 갔는지 위치를 파악해야 했다. 제일 먼저 생각난 것은 휘림이었다. 재앙신에 관한 최초의 이야기도 휘림을 통해서 들었으니, 어쩌면 좀 더 자세한 정보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묘정은 곧바로 휘림을 찾아 나섰다. 몇 달 전, 휘림이 서신을 보내준 덕분에 거처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휘림은 묘정을 보자마자 낯을 굳히더니, 황급히 팔을 잡아끌었다.
“별일 없었습니까? 다친 곳은 없고요?”
오히려 당황한 것은 묘정이었다. 묘정이 아무런 기별도 없이 다짜고짜 찾아왔음에도 휘림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는 나례청이 무너졌다는 사실까지 알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휘림의 말에 따르면 ‘현신이 나례청을 버리고 떠났다’는 식으로 나자들 사이에서 다소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다고 했다. 또한 묘정이 이곳에 오기 며칠 전에, 원로들이 사람을 보내 묘정의 행방을 알고 있느냐고 휘림을 추궁하였다고 했다. 그들은 묘정을 원망하는 듯했다.
“묘정이 갈 곳이 어딨습니까? 온다면 이쪽으로 올 줄 알았습니다.”
휘림은 묘정을 마당 안쪽으로 잡아끌며 바깥을 예의주시했다.
“그래서 앞으로 어쩌실 겁니까?”
돌아가는 상황이 심상치 않다며 휘림이 어두운 낯을 했다.
“우선 재앙신부터 찾아내 없애야겠지요.”
묘정은 어깨에 짊어지고 있던 자신의 행낭을 건넸다.
“나중에 반드시 찾으러 올 테니, 잠시 맡아줄 수 있겠습니까?”
***
휘림이 알려준 단서로 방향을 잡은 묘정은 몇 달 가까이 재앙신을 찾아서 팔도를 돌아다녔다.
원로들이 추적하고 있다는 휘림의 말은 사실이었다. 가끔은 꼬리가 붙어 뒤를 밟는 기운이 여럿 있었다. 재앙신을 쫓는 와중에 그들을 따돌리는 건 꽤 성가신 일이었다.
재앙신은 붉은 안개를 몰고 다닌다고 했다. 봉인할 당시 제어가 불가능할 정도로 강렬한 기운이 날뛰고 있었으며, 그 영향으로 재앙신이 지나간 자리에는 역병이 돌고 흉년이 든다고 하였으니 그 소문을 따라서 재앙신의 이동 경로를 추측했다. 문제는 재앙신을 찾아다니는 것이 비단 저뿐만은 아닐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나자들보다 먼저 재앙신을 찾아야 했다.
때는 초겨울, 유독 바람이 차던 어느 밤의 일이었다.
고목 아래에 쪼그리고 앉은 재앙신을 발견한 묘정은, 먼발치에서 몸을 숨기고 동태를 살폈다. 인상착의도 맞아떨어졌으며, 무엇보다 주변에 잡귀가 모여 있었다. 재앙신의 주변에는 인간의 것이 아닌 기운이 희미하게 일렁거리고 있었다. 잡귀들도 그 기운을 알아보고 모여든 것이 틀림없었다. 손짓으로 잡귀를 휘휘 물리친 묘정은 재앙신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렇게 겁내지 않아도 된단다. 나는 너와 같은 인간이거든.”
아이는 경계심 어린 눈으로 묘정을 노려보고 있었다. 현재 재앙신의 의식이 올라와 있는지, 인간의 의식이 올라와 있는지 확인하고자 몇 마디 말을 걸어 보았다.
“귀재란 무엇일까?”
“귀신을… 볼 줄 아는 재주….”
디행히도 이지가 뚜렷한 걸로 보아 아직은 재앙신에게 완전히 잡아먹히지는 않은 듯했다.
아이는 총명했다. 그리고 너무나 평범했다.
부정하고 사특한 재앙신을 담은 그릇이었다. 묘정의 할 일은 인간도 귀신도 아니게 된, 나자들의 욕심으로 제물이 된 이 부자연스러운 존재를, 깔끔하게 정리하는 것이었다.
인신(人身)을 제물로 하여 봉인의 그릇으로 삼는다면, 세월이 흐를수록 귀신의 영향력이 강해진다. 시간이 지나서 마침내 혼이 하나가 되면 그때는 봉인이 깨져 재앙신이 풀려날 것이다. 재앙신의 혼이 아이의 혼을 완전히 집어삼키기 전에 한시라도 빨리 없애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봉인한 지 얼마 안 된, 가장 이른 시일인 지금 이 순간이 바로 적기일 터였다.
재앙신의 그릇이 된 이상, 안타깝지만 아이의 삶은 이미 쓰임을 다했다. 결말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재앙신의 혼에 잡아먹혀 사라지거나, 혹은 재앙신과 함께 죽음을 맞이하거나. 돌이킬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이대로 내버려 둔다면 아이는 분명 재앙의 씨앗이 될 것이다
그러나 묘정은 어느 순간, 저도 모르게 아이를 죽이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찾고 있었다.
아니, 이 아이는 여기서 죽어야 한다.
스스스…….
한 차례 싸늘한 바람이 불었다. 묘정은 아이를 향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 아이가 목을 잔뜩 움츠리며 몸을 떨었다. 아이의 눈동자에는 오롯이 묘정 제 모습만이 담겨 있었다. 오랫동안 길을 떠돌았는지 아이의 꼴은 몹시 꾀죄죄했다. 저를 잔뜩 경계하며 날을 세우고 있는 아이는 몹시 고단해 보였다. 마치 상처 입은 듯한 어린 짐승 같았다. 묘정의 손이 멈칫했다.
“…….”
묘정은 아이의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문득 아이의 처지와 자신의 신세가 비슷하게 느껴졌다. 노력으로는 바꿀 수 없는 타고난 한계 속에 갇혀 있다는 점이 그러했다. 차이점이 있다면 묘정의 삶에는 따스하고 행복한 순간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자선원에서 보낸 세월이 그러했다. 그러나 일평생 떠돌아다닌 아이에게는 그런 순간이 있을 리가 없었다.
묘정은 찬 바람이 부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날이 많이 춥구나.”
묘정은 입고 있던 검은 장포를 벗어 아이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나와 함께 가겠니?”
묘정은 아이를 데리고 투숙할 만한 곳을 찾았다. 며칠 동안 근방을 떠돌아다니느라 눈에 익었는지, 주모는 아이를 한눈에 알아보고는 곧장 내쫓을 기세로 매섭게 눈을 부라렸다.
“저게 뭔 줄 알고! 어째 저런 걸 달고 들어오시오? 어서 썩…….”
묘정은 별말 없이 엽전 꾸러미를 보여주었다. 주모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하루 이틀 정도 묵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주모는 가자미눈을 뜨고 아이를 샐쭉 흘기더니, 못마땅한 눈으로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주모가 방 하나를 내어주자, 묘정은 식사를 부탁했다.
“저기, 이보슈.”
주모는 소반 상에 음식을 갖다 주며 묘정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내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괜한 참견은 그쯤 하슈. 코 꿰이기 전에 적당히 떼어버리는 게 좋을 거요. 이 근방에 소문이 아주 흉흉하여, 동냥 다니던 어린애들 다 쫓겨났다오.”
묘정은 애매한 미소로 주모의 간섭을 무마했다. 오랜 시간 굶주렸는지 아이는 주발에 담긴 밥을 게 눈 감추듯이 몽땅 먹어 치웠다. 밥그릇에 붙은 밥알 하나까지 싹싹 긁어먹는 모습을 보고 묘정은 제 몫의 밥까지 아이에게 내주었다. 아이는 경계 어린 눈으로 힐끗 묘정의 얼굴을 살피다 이내 그릇을 받아들었다. 묘정은 반찬을 아이 앞으로 가깝게 밀어주었다.
“천천히 먹어야지, 체할라.”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 아이는 알고 있을까? 묘정은 괜히 말을 걸어 보았다. 혹시 제 부모에 대해 알고 있다면 어디까지 기억하는지 알고 싶었다. 말을 나누어 보니 아이는 부모를 전혀 모르는 듯했으며 기억이 전무한 상태였다. 그냥 어느 순간부터 길을 헤매고 있었다고 했다. 그에 묘정은 묘한 안도감을 느끼는 동시에 까닭 모를 죄책감을 느꼈다.
“오늘 밤은 편히 자거라.”
묘정은 목욕물을 데워달라고 하여 아이를 깨끗이 씻긴 뒤, 따듯한 아랫목에 이부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온종일 추위에 떨었던 아이는 많이 지쳐 있었던 것인지 금세 잠이 들었다.
문득 마음이 무거웠다.
누군가에게 정 한 번 받지 못하고, 이름조차 없는 채로 재앙신의 그릇이 된 아이가 가여웠다. 비록 묘정이 뜻한 바는 아니었으나, 원로들이 오래전부터 계획한 일이라고 했으니 어쩌면 아이의 삶은 날 때부터 정해져 있었던 셈이다. 묘정도 이 악덕과 책임의 굴레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이 아이에게 원수가 있다면 바로 나자일 것이다.
아이를 당장 죽이지 않은 건 찰나의 동정과 연민 때문이었다. 탈은 현재 수중에 없어도, 사실 묘정에게 있어 아이의 삶을 거두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저 목을 부러트리는 건 너무나도 손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한순간의 망설임이 묘정을 자꾸만 주저하게 만들었다.
어쩌면 얄팍한 동정이거나 혹은 양심의 가책을 덜고 싶다는 욕심에 호의를 가장한 이기적인 친절을 베푸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렇게 해서 조금이라도 죄책감을 덜고 싶은 마음에 이기적으로 베푼 시혜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비록 그러할지라도, 묘정은 일평생 냉골과도 같았을 아이의 몇 해 남짓한 생애에 한순간이나마 따뜻한 기억을 남겨주고 싶었다.
고작 며칠 정도라면 괜찮을 것 같았다.
묘정은 손을 뻗었다.
찬기가 들지 않도록, 아이의 목 끝까지 이불을 끌어 올려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