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불 (304)화 (304/348)

#304

“안 자고 왜 나왔습니까?”

“그러는 휘림은 안 자고 여기서 뭐 하고 있습니까?”

둘은 말없이 서로를 보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피식 웃었다.

“잘 지내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묘정은 제 뺨 한쪽을 쓸어보았다. 휘림이 본 두 사람은 아주 잘 지내는 것처럼 보였다. 아이는 묘정을 무척 잘 따랐고, 묘정 또한 아이에게 마음을 많이 주고 있는 듯했다.

“그래서 앞으로는 어쩌실 생각입니까?”

잠시 말이 없던 묘정은 아이가 자는 방에 시선을 주었다가 목소리를 낮췄다.

“한 번 더 봉인을 행할까 합니다.”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던 휘림이 별안간 살풋 웃음을 흘렸다.

“왜 웃습니까?”

“묘정이 아이를 많이 아끼게 되었구나 싶어서요.”

휘림의 말에, 묘정의 낯이 미묘하게 가라앉았다.

“…….”

아이를 많이 아끼는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이 아이를 위한 일인가 한다면, 그렇노라고 선뜻 고개를 끄덕일 자신은 없었다. 어쩌면 아이를 곁에 둔 것도 묘정 자신의 외로움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묘정은 아이에게 어떤 선택지도 없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을 알고 이용하는 건 오히려 저 자신이 아닌가, 하는 죄책감이 수시로 고개를 들곤 했다.

“사실 이제 뭐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아이를 위해 무엇이 옳은 것인지….”

말을 흐리던 묘정이 머나먼 달빛을 바라보았다.

“사실은 전부 다 내 욕심이고, 이기심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나는 묘정이 욕심 좀 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휘림의 말에, 묘정이 멈칫하며 휘림을 바라보았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욕심이 있지요. 하긴, 우리 셋 중에 욕심이 없는 건 항상 묘정뿐이긴 했습니다. 수향은 욕심이 있으나 그것을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고. 나도 욕심 많습니다.”

휘림이 한쪽 입가를 삐죽 올리며 묘정의 등을 툭툭 쳤다.

“욕심이 없으면 무슨 재미로 인생을 산답니까?”

묘정은 피식 웃고 말았다. 휘림은 솔직한 성격에, 뭐든지 대수롭지 않다는 식으로 말하는 버릇이 있어 항상 무게를 희석시켰다. 어려서부터 그랬으니 참으로 한결같은 사람이었다.

“묘정.”

그때, 내내 웃고 있던 휘림이 진지한 낯으로 운을 띄웠다.

“겸이에게 전부 사실대로 말할 생각은 없는 건지요?”

전부 사실대로 말하라고?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네 부모는 너를 버렸고, 너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한다고, 네 부모는 너를 사랑하지 않았으며, 이름조차 지어주지 않았다고, 그러니 너의 삶은 날 때부터 잘못되어 있었다고, 너를 재앙신의 그릇 따위가 된 것은 네가 낳아준 부모 때문이라고, 나는 네 부모와 같은 나자였으며, 널 죽이려고 거두었다고?

“하하…….”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묘정은 인상을 쓰며 헛웃음을 흘렸다.

“그걸 어떻게 말한단 말입니까…….”

묘정은 아이에게 진실을 알려줄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이를 진심으로 아끼지 않습니까?”

그때, 묘정의 낯을 살피던 휘림이 말을 덧붙였다.

“그러니 묘정이 ‘재겸’이라고 이름까지 손수 지어준 것이겠지요.”

묘정이 고개를 푹 숙이며 힘없이 중얼거렸다.

“그것은 재앙신을 누르기 위해서 지어준 이름일 뿐입니다.”

“그래도 묘정의 진심은 그 누구보다도 아이가 제일 잘 알 것입니다.”

휘림은 조심스럽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묘정, 아이와 정말로 가족이 되고 싶은 거지요? 허나 묘정이 진실을 털어놓지 않으면 영영 가족이 될 수 없습니다. 용서를 구하고 사실대로 말하는 건 어떨지요. 마음이 곧은 아이이니 분명 이해해줄 겁니다. 처음에는 혼란스럽고 힘들겠지만, 나중에는 받아들일 거고요.”

마침내 묘정의 낯이 괴롭게 일그러졌다.

“…….”

휘림은 묘정에 대해서 제일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그간 사정을 털어놓았다고 해도, 휘림도 묘정에 대한 모든 걸 알고 있는 건 아니었다. 어떤 면에서는 아이와 마찬가지로 묘정이 정말로 어떤 인간인지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었다.

“나는…….”

묘정은 말을 꺼내놓고도 오래도록 침묵했다. 그러나 휘림은 재촉하지 않고 묵묵히 묘정의 뒷말을 기다렸다. 한참 만에야, 묘정이 힘겹게 입술을 달싹였다.

“나는 어차피 오래 살지 못합니다.”

“…그게 무슨 말인지요?”

예상치 못한 말에, 휘림이 놀란 얼굴을 했다.

“어디가 아픈 겁니까?”

“날 때부터 그렇게 정해져 있었습니다.”

묘정은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과 방상시의 저주에 대해서. 자신이 몇 살까지 살 수 있으며, 앞으로 삶이 어떻게 될지, 일찍이 앞날을 전부 보았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휘림은 묘정의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리고 모든 사실을 전부 털어놓았을 때, 휘림은 화가 나 있었다.

“왜 지금까지 말을 안 했습니까?”

휘림은 기가 차다는 듯이 탄식을 뱉으며 이마를 잡아 쥐었다.

“나를 좋아한다고 말해놓고선 붙잡지도 않고, 등을 돌린 것도 그것 때문이었습니까? 예, 이제 알겠습니다! 그거 압니까? 나는 묘정이, 나례청을 폐하고 나에게 가장 먼저 찾아왔을 때 함께 가자고 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묘정은 아이를 찾으러 간다고 휙 떠나버렸지요.”

휘림은 눈에 힘을 주고 묘정을 노려보았다.

“어이가 없군, 내가 사람을 단단히 잘못 보았어…….”

휘림이 홱 등을 돌렸다. 묘정은 당황했다. 왜 휘림이 저렇게까지 화가 난 건지 알 수 없었다. 일단 자신이 잘못했다는 생각에, 사과를 하고자 휘림의 어깨를 가볍게 잡아 세웠다.

“화났습니까? 화나게 했다면 미안하…….”

“나는 왜 방상시가 그런 저주를 주었는지 알겠어.”

사과를 뱉던 묘정이 말을 멈췄다.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나 본데, 너는 신이 아니야. 비겁하고 졸렬하고 나약해 빠진 인간이다. 서른세 살에 죽어? 내 앞날을 전부 알고 있다고? 일찍 죽는 것 따위는 저주가 아니야. 그걸 저주라고 받아들이고 평생 네 삶을 자포자기하고 산 거, 그게 진정한 저주야.”

휘림은 반말을 내뱉으며 눈물이 맺힌 눈으로 묘정을 노려보고 있었다.

“똑똑히 들어.”

잠시 말을 멈췄던 휘림은 검지를 들더니, 묘정의 눈앞에 겨누었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너는 이미 세상에 진 거다.”

그 말을 남겨두고, 휘림은 그대로 몸을 돌려 방으로 들어갔다.

“…….”

밝은 달빛 아래, 홀로 남겨진 묘정은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

이튿날, 날이 밝자 휘림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초가집을 떠났다.

몇 번이고 붙잡으려고 하였으나 휘림은 진심으로 뿌리쳤다. 어찌나 찬바람이 쌩쌩 부는지, 말 한마디 붙이기 어려웠다. 그렇게 어영부영 휘림을 배웅한 뒤, 묘정은 생각에 잠겼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너는 이미 세상에 진 거다.’

당장 중요한 일은 재앙신을 봉인하는 일이었다.

휘림이 쏘아붙였던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만약 재앙신의 혼을 불변케 하는 봉인이 문제없이 제대로 이루어진다면, 그때는 아이에게 전부 말하기로 했다. 아이가 스스로 삶을 선택할 수 있게끔, 지난 과거에 용서를 빌고, 모든 것을 사실대로 밝히자는 생각이었다.

마침내 결심이 섰다.

어느 깊은 밤, 묘정은 탕약을 먹여서 아이를 재웠다. 다른 방에 가서 부적을 붙이고 봉인 의식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팔문금쇄진이었다. 준비가 끝났을 때는 방 안 가득히 종이 그물이 주렁주렁 붙어 있었고, 바닥에는 짐승의 피로 그려서 만든 거대한 진이 그려져 있었다.

묘정은 진 한 가운데에 놓인 큰 접시에 자신의 피를 쏟아 넣었다.

탕약을 마시고 잠자리에 든 아이는 누가 업어가도 모를 만큼 곤히 잠들어 있었다. 묘정은 잠든 아이를 안고, 의식을 준비한 방 한가운데에 조심스레 눕혔다.

본디 아이에게는 재겸이라는 이름을 주었다. 재앙災에 형구鉗를 채운다는 뜻으로, 재앙신을 누르는 데 도움을 주는 이름이었다. 성명자의 권능이 없어도 이름 자체에는 힘이 있다. 평범한 민간에서도 그러하듯이,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언력(言力)이 작용하기 마련이다.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탈을 재앙신을 복종시키는 것이다. 얼굴에 써서 재앙신의 진명을 알아내거나, 만에 하나 이름이 없는 상태라면 이름을 새로 붙여서 명령을 내려야 했다.

묘정은 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자개함을 열고 방상시의 탈을 얼굴에 썼다. 피부에 와닿는 탈의 감촉이 서늘했다. 눈을 두어 번 느리게 감았다 뜨던 묘정은 아이를 응시했다.

어느 순간, 아이를 빤히 응시하던 묘정의 눈이 크게 뜨였다.

“…….”

탈을 쓰고 읽어낸 재앙신의 진명은, 아이에게 지어준 이름과 같았다. 이건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혼이 하나로 붙어 있으므로 재앙신도 같은 진명을 가지게 된 것이었다.

‘그래도 괜찮을 것이다.’

당황한 것도 잠시, 진명을 알아낸 묘정은 진정하려 애쓰며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철망경으로 하여금 금쇄의 진을 펼침이다. 이는 호명자가 가로되 악신을 잡아 가두는 팔진이라, 여덟 개의 문을 닫음으로 죄진 자를 속신(束身)케 하리니 그 문 중의 하나는 경문이요, 또 하나는 수문이요, 하나는…….”

어디선가 강한 바람이 불었다. 방 안에 붙여 놓은 종이 그물이 세차게 휘날리기 시작하더니, 잠든 아이의 사지를 속박하기 시작했다. 사방이 무너질 것처럼 쿠구궁, 진동했다.

묘정은 주문을 외워 나갔다.

“이어 명명자가 가로되, 죄진 자의 성명을 붙여 족쇄를 채우니 그 이름을 이루는 모든 획이 곧 자물쇠요, 철망이로다. 죄진 자를 압송하여 이곳에 그 진명을 속박함이다. 그 성명으로 재앙에 형구를 채웠으니, 재앙 재災, 칼 겸鉗이라…….”

재앙신을 깊이 억누르는 봉인 의식을 끝낸 묘정은 깊게 잠든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이제 남은 건 마지막 하나였다. 묘정은 재앙신의 이름을 세 번 부르고, 명령을 내렸다.

너는 그대로 멈춰 있으라

너는 영원히 불변하라

너는 이곳에서 움직이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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