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5
황금사목에서 금빛 안광이 번쩍이자, 아이의 사지를 옭아매고 있던 종이 그물에서 연기가 나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기화하여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모든 의식이 끝났을 때 방 안에 붙어 있던 부적은 너덜너덜해져 있었고, 바닥에 그려놓은 거대한 진(陣)도 온데간데없이 지워져 있었다. 주변이 난장판이었다. 방 안을 뒤흔들던 알 수 없는 진동도 멈춘 상태였다.
기진맥진한 묘정은 울컥 피를 뱉었다. 한순간 엄청난 힘을 소모했더니 어마어마한 탈력감이 찾아 들었다. 이중 봉인은 그만큼 위험한 행위였다. 술자인 묘정에게 여파가 남을 정도였다. 황금사목이 없었더라면, 묘정이 가진 순수한 힘만으로는 절대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아이는 이 난리통 속에서도 곤히 잠들어 있었다.
묘정은 잠든 아이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무릎을 꿇고 앉아 아이를 살펴보았다. 다행히 상한 곳 없이 멀쩡해 보였다. 자신의 입가에 남은 피를 손가락에 묻힌 뒤, 도장을 찍듯이 아이의 이마 정중앙을 꾹 눌렀다. 묘정은 아이의 손바닥에 개(開)라는 글자를 써넣었다. 아이의 기운을 열어 보자, 비로소 아이의 온전한 기운만이 느껴졌다. 먹물 몇 방울을 떨어트려 놓은 것처럼 언제나 희미하게 도사리고 있던 재앙신의 기운은 깨끗이 사라진 상태였다.
재앙신을 계획대로 잘 눌러서 속박했다는 증거였다.
의식이 성공했음을 확인한 묘정은 지친 얼굴로 중얼거렸다.
“되었다, 되었어…….”
가슴이 벅차오름과 동시에 차츰 의식이 멀어졌다.
묘정은 아이의 곁에 털썩 쓰러졌다.
***
잠에서 깨어난 아이가 가물가물 눈을 떴다. 평소와 다름없는 아침이었다. 자신은 이불을 둘둘 말고 누워 있었고, 옆으로 고개를 돌리니 묘정은 이부자리 위에 아직 잠들어 있었다.
“묘정, 나 이상한 꿈 꿨어.”
눈을 두어 번 깜빡이던 아이는 몸을 일으켰다.
“…묘정?”
자고 있는 스승을 버릇없이 흔들어 깨울 때였다.
“어디 아퍼?”
어느 순간, 아이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묘정의 이마에 손을 갖다 댔다. 묘정의 이마가 몹시 뜨거웠다. 지난밤 바닥까지 기력을 소진한 묘정은 그대로 며칠을 꼬박 앓아누웠다.
“괜찮어? 열병이라도 든 거야?”
묘정은 찬 바람이 불어 고뿔이 든 모양이라고 둘러대며 시치미를 뗐다. 언제나 건강하던 묘정이 하루아침에 자리를 보전하고 있으니 아이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닌 듯했다. 죽을 끓여 오겠다, 약초를 캐오겠다 하며 온갖 수선을 부리는 아이를 보고 묘정은 픽 웃었다.
비록 몸은 아플지언정, 마음은 이상할 정도로 평온했다. 아이와 함께 살아갈 수 있게 된 대가로 겨우 며칠 앓게 된 것쯤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묘정은 그저 기쁘기만 했다.
봉인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고, 아이도 몸 상한 곳 없이 건강해 보였다. 이제는 모든 것을 사실대로 밝힐 차례였다. 일주일을 꼬박 앓고 나서야 기력을 회복한 묘정은 아이를 불렀다.
“겸아. 어디 있느냐.”
마당으로 나온 묘정은 아이를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나 불렀어?”
그때, 부뚜막에 가 있던 아이가 한달음에 달려 나왔다.
“내 지금껏 너에게 할 말이 있었는데…….”
조심스레 운을 띄우던 묘정은 말을 하다 말고 픽 웃어 버렸다. 아궁이 청소를 하고 있었는지, 아이는 온몸이 시커먼 재투성이였다. 묘정은 아이의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이게 웬 꼴이냐.”
묘정은 온몸 곳곳에 숯 검댕을 덕지덕지 묻히고 서 있는 아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잿가루를 툭툭 털어주다가 무릎 부분에 손이 닿았을 때였다. 아이가 “아야.” 외마디 소리를 내더니 가볍게 인상을 찌푸렸다. 아이가 아프다는 시늉을 하자, 묘정이 고개를 기울였다.
“왜 그러느냐?”
“무릎 까졌어.”
묘정은 곧바로 아이의 바짓자락을 걷어 올렸다. 무릎을 살펴보았더니, 정말로 전에 못 보던 상처가 있었다. 방금 막 다쳤는지 피가 묻어 나오고 있었으며, 짙은 멍이 들어 있었다.
“이런, 조심해야지. 어쩌다 다친 것이냐?”
“엿새쯤 됐나? 약초 캐러 갔다가 돌부리에 걸려서 넘어졌었어.”
엿새 전이면 묘정이 앓아누웠을 때였다. 고뿔에 좋은 약초를 캐오겠다고 산에 다녀오겠다고 하더니 그때 다친 듯했다. 대수롭지 않게 상처를 들여다보던 묘정이 문득 멈칫하였다.
“엿새 전…….”
무릎이 깨진 상처가 하도 생생하기에 어제오늘 다친 줄 알았건만, 엿새 전이면 상처가 생기고 꽤 시간이 흐른 상태였다. 그렇다면 완전히 아물지는 않더라도 지금쯤이면 피가 멎고 딱지 정도는 앉아 있어야 한다. 그런데 무릎이 깨진 상태 그대로 전혀 낫지 않은 것이었다.
“상처에 고약(膏藥)은 발라 보았느냐?”
아이가 불퉁한 낯으로 투덜거렸다.
“응. 어제도 발랐는걸.”
마침내 묘정의 낯이 천천히 굳었다.
“왜 그래?”
묘정의 표정이 심상치 않자, 아이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근데 나한테 할 말 있다고 하지 않았어?”
평소라면 금세 나았어야 할 상처가 그대로 남아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이의 상처를 응시하던 묘정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불현듯 가슴 속 깊은 곳에서 형용할 수 없는 불길함이 선득하게 차올랐다.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 분명했다. 아니, 아니다. 그럴 리 없다.
잠시 침묵하던 묘정은 한참 만에야 겨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란다.”
***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챈 묘정은 잠시 시일을 두고 아이의 상태를 주의 깊게 관찰해 보기로 했다. 그렇게 한 달째가 되던 날, 묘정은 아이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았다.
평소라면 금세 나았어야 할 상처가 시간이 지나도 낫지 않고, 하루가 다르게 훌쩍 커 가던 눈높이도 그대로였다. 아이는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를 체감하지 못한 듯하였으나, 아이가 커 가는 모습을 지켜봐 왔던 묘정은 아이의 변화를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이의 성장이 멈췄다.
또한, 상처가 생겨도 스스로 나을 수 없는 몸이 되었다. 한마디로 아이의 육체가 더는 생장(生長)하지 않게 된 것이었다. 이것은 명백하게 봉인을 행한 후부터 일어난 변화였다.
혼을 불변케 하는 봉인에서 기인한 부작용이었다. 혼과 육신은 본디 접하여 있으며, 생명 속에서 유기적인 영향을 주고받기 마련이었다. 재앙신의 혼과 아이의 생혼이 유착된 상태로 있으므로, 재앙신에게 건 이중 봉인이 아이의 육신에도 영향을 미친 것이 틀림없었다.
둘을 완전히 분리할 수 있는 건 생명이 다했을 때만 가능한 일이었다. 아이의 생혼을 봉인하면서 혼이 불변하는 상태에 놓였으니, 육신도 그에 따라서 그대로 멈추게 된 것이리라.
‘과연 이것을 산목숨이라고 할 수 있는가?’
묘정은 커다란 낭패감을 느꼈다.
사라질 수도 없고, 자라날 수도 없으며, 그저 정지해 있는 상태.
재앙신을 담은 그릇이었다고는 하나 아이는 어디까지나 평범한 인간이었다. 지금까지는 그러했다. 그러나 이중 봉인을 행한 후, 아이는 상처가 낫지도 않으며 몸이 자라지도 않는, 영영 불변하는 괴이한 존재가 되어 버린 것이다.
살아 있는 것은 끊임없이 생동하고 변하기 마련이었다. 허나 아이의 삶은 재앙신에게 묶여 옴짝달싹 못 하는 상태로 박제되어 버리고 말았다. 아이를 그렇게 만든 건 바로 저였다.
‘묘정, 아이와 정말로 가족이 되고 싶은 거지요? 허나 진실을 털어놓지 않으면 영영 가족이 될 수 없습니다. 겸이에게 전부 사실대로 말할 생각은 없는 건지요?’
가족. 가족이라.
묘정은 절망했다. 고개를 숙이며 헛웃음을 흘렸다.
분명 아이를 위한 일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아이를 섭리에서 벗어난 이물로 만들어 버린 셈이다. 결국 묘정은 형용할 수 없는 괴로움에 사로잡혔다. 불변의 봉인을 풀면 재앙신의 혼이 아이의 생혼을 빼앗을 것이다. 허나 이 상태로 내버려 둔다면 아이는 다쳐도 나을 수 없으며, 영영 자라지 않는 몸이 되어서 세월의 바깥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묘정은 괴로운 낯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나는 묘정이 욕심 좀 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너는 신이 아니야. 비겁하고 졸렬하고 나약해 빠진 인간이야.’
방상시의 저주에서 ‘단 하나 가질 수 없는 것’이라는 게 과연 무엇인지, 묘정은 아주 오래전부터 궁금했었다. 가질 수 없는 게 무엇이든 간에 자신이 무언가를 욕심내지만 않는다면 괴롭지 않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었다. 신으로서 살다가 신으로서 죽겠다고 결심했었다.
그리고, 이것은 결심을 저버린 대가였다.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던 묘정은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보았다.
아이를 영원 속에 살려둘 것인가, 아이를 죽일 것인가.
서른세 살이 되면 죽는다. 허나 반대로 말하면 서른세 살이 되기 전까지는 무슨 짓을 하더라도 죽지 않는다는 얘기가 된다. 그렇다면, 이 생명을 아이에게 나눠줄 수 있다면…….
고민의 여지는 없었다.
그리고,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