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6
묘정은 휘림에게 편지를 썼다.
지난날 사실대로 말하지 못했음을 사과하고, 붙잡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내용을 담은 편지였다. 편지를 써 내려가던 묘정은 잠시 주저하다가 한 마디를 덧붙였다. 다시 만날 수 있겠느냐는 부탁이었다. 물론, 휘림은 지금껏 단 한 번도 답장을 해 온 적이 없었기에 사실 큰 기대는 없었다. 그런데 의외로 휘림은 선뜻 회신을 보내 왔다. 보낸 지 며칠 만의 일이었다.
‘만나고 싶으면 네가 오든지.’
요약하자면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묘정은 그 길로 짐을 꾸리고 여정에 올랐다. 이중 봉인을 행하고 시간이 흐르면서 아이는 안정기에 접어 들었고, 평범한 인간이나 다름없었다. 혼자 두는 것이 걱정되기는 하였으나, 먼 길을 데리고 돌아다니는 것보다 집에서 지내도록 하는 편이 안전하리라는 생각에서였다.
휘림이 사는 곳은 먼 지방이었다.
꼬박 며칠을 걸려서 휘림이 머물고 있다는 마을에 도착했을 때, 묘정은 한숨을 쉬었다. 주변의 분위기가 별로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멀지 않은 곳에서 백성들이 봉기를 일으켰다고 했다.
그 말이 사실인지 관군이 수문장처럼 성문 앞을 지키고 있었고, 검문을 철저히 하고 있었다. 휘림은 어쩌다가 이렇게 흉흉한 곳에서 머무르게 된 것인지, 이러다가 신변에 위협이 되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묘정은 휘림이 보내온 서신에 적힌 장소로 찾아갔다. 다행히 어렵지 않게 휘림을 만날 수 있었다. 휘림은 작은 별채 하나를 얻어서 생활하고 있다고 했다.
“아이고. 이게 누구십니까.”
마루 기둥에 몸을 기대고 서 있던 휘림은, 묘정을 보자마자 빈정대듯이 말했다.
“오란다고 이렇게 한달음에 달려올 줄은 몰랐습니다.”
선뜻 답장을 주기는 했어도, 휘림은 아직도 앙금이 남아있는지 쌀쌀맞은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묘정은 머리에 쓰고 있던 삿갓을 벗으며 조용히 웃었다.
“잘 지냈습니까?”
“잘 지냈지요.”
짧은 안부를 주고받은 뒤, 휘림이 뾰로통하게 물었다.
“왜 왔습니까?”
“보고 싶어서 왔지요.”
잠시 정적이 흘렀다.
“겸이는 왜 함께 오지 않았습니까.”
얼마 간 말이 없던 휘림이 입을 열었다.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였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함께 오겠습니다.”
“그나저나 그때 말한 봉인은 어찌 되었습니까?”
묘정은 입을 다물었다.
“…….”
휘림에게조차도 차마 사실대로 말할 자신이 없었다. 아이를 죽음에서 멀리 떨어트려놓았으니 그 여부만 놓고 본다면 봉인은 성공한 셈일 테지만, 그 결과로 아이의 삶 전체를 기형으로 만들고 말았으니, 묘정에게 있어서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뼈저린 실패가 된 셈이다.
묘정은 담담한 낯으로 ‘잘 이루어졌다’고 대답했다.
“참으로 잘 되었습니다. 허면, 겸이에게 사실대로 말하였는지요?”
침묵하던 묘정이 고개를 저었다.
“너무 늦지만 않는다면 괜찮을 겁니다.”
휘림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 결심이 섰다고 해도 쉽사리 털어놓기 어려운 이야기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묘정은 마루에 걸터 앉으며 휘림이 머무는 별채를 둘러보았다. 세간은 소박하지만 혼자 지내기에는 적당한 집이었다. 이웃해 있는 집이 없어서 조금 황량해 보이기도 했다. 휘림이 사는 곳은 마을에서 다소 외진 구석 쪽에 위치해 있었다.
“주변에 민란이 있었다고 하던데…….”
“예, 이 마을은 아니지만 산 하나를 넘으면 금방입니다.”
“거리가 가까운데 위험하진 않겠습니까?”
“위험하긴요. 지낼 만합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거처를 옮기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이, 휘림이 고개를 기울일 때였다.
“민란에 휩쓸렸다가 자칫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
“괜찮을 겁니다. 나와 그들은 같은 동지니까요.”
예상치 못한 휘림의 말에, 묘정의 눈이 크게 뜨였다.
“동지라 함은…….”
휘림은 자신 또한 봉기에 가담하고 있다며 작게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지금껏 어떻게 지냈느냐는 말에 팔도를 유랑하였노라고 얼버무리던 그였다. 묘정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어째서 그 일을 하려는 겁니까?”
“뭐, 그 나물에 그 밥 아니겠습니까.”
휘림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더니, 대수롭지 않은 어조로 말을 이었다.
“아비의 핏줄이 어디 가지는 않은 모양이지요.”
“자칫하다간 목숨이 위태로워질 수도 있는 일입니다.”
“걱정 마세요. 이 한 몸 보전하는 일이 무어 그리 어렵다고.”
물론, 그는 천하제일검이었다. 휘림이 쉬이 당해낼 수 없는 강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제일 잘 알고 있는 건 묘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묘정은 어떻게든 휘림을 막아서고 싶었다.
휘림은 비록 별 거 아니라는 투로 말하고 있었지만, 그가 가려는 길은 매우 위험한 길이었다. 귀재로서 마땅히 해야할 일도 아닐 뿐더러 묘정과는 완전히 무관한 세상의 일이었다.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리라는 보장도 없는데, 왜 그런 어려운 길을…….”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그게 사람 사는 인생인 것을요.”
묘정은 문득 가슴이 답답해졌다. 휘림은 자유로운 인간이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의 마음이 내키는 대로 살았으며 스스로에게 솔직했다. 그의 자유를 막아서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다만, 자유로운 그를 사랑하는 만큼 그를 잃는 것이 두려울 뿐이다.
“그대는 세상을 바꾸고 싶은 겁니까?”
묘정이 가라앉은 눈으로 묻자, 휘림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는 세상을 바꾸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
휘림의 욕심은 그렇게까지 원대한 것이 아니었다.
“단지…….”
잠시 말을 멈춘 휘림이 묘정을 바라보았다.
“나는 그냥 내 삶을 바꾸고 싶을 뿐입니다.”
이 세상은, 누군가 꾸며낸 듯한 거대한 흐름 속에 있다.
그것은 자연 그 자체이면서도, 때로는 자연과 아주 동떨어져 있기도 했다. 한낱 인간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있다. 탄생과 죽음, 성장과 노화, 여인이라는 성별, 날 때부터 정해져 있던 신분 따위가 그러했다. 허나 그것이 삶의 전부는 아닐 거라고, 휘림은 생각했다.
“고작해 봐야 내 삶이지 않습니까.”
무엇을 보고 들을 것인가. 무슨 일을 할 것인가. 이토록 작은 한 인간의 생애일 뿐인데 섭리니 운명이니 제 아무리 거창한 말이 따라붙는다한들 그게 전부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묘정. 자선원에서 우리가 종종 냇가에 갔던 거, 기억합니까?”
“기억하지요.”
“그때는 함께 물에 들어가서 놀기도 하였는데, 조금 크고 나서는 남녀가 유별하다고 하여 그러지 못했지요. 이후로 나는 지금껏 단 한번도 예전처럼 강물에 뛰어든 적이 없습니다.”
지난일을 회상하던 휘림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그때는 그것이 참 서글펐어요. 강물에 들어가려면 보는 눈이 없는 밤에 들어가거나, 같은 여인들끼리 모여 있어야만 하지요. 그러지 않으면 구경거리가 되어버릴 테니, 더는 내 마음대로 강물에 뛰어들 수 없다는 게 얼마나 분했는지 모릅니다. 이제 더 이상 강물에 들어가서 물고기를 잡을 수도 없고, 맨 몸으로는 강을 건널 수 없게 되었다고 생각했지요.”
먼 곳을 바라보던 휘림이 어느 순간, 또렷한 눈으로 묘정을 돌아보았다.
“헌데,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그게 무어라고 그렇게 서글펐는지 모르겠습니다. 맨몸으로 강물에 뛰어들어 강을 건널 수 없다면 나룻배를 얻어 타면 될 일이고, 맨몸으로 강물에 뛰어들어 물고기를 잡을 수 없다면 뭍에서 낚싯대를 잡으면 될 일이지요. 안 그렇습니까?”
인간으로 태어났기에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맨손으로 물고기를 잡을 수 없는 인간은 낚시대를 손에 쥐었고, 맨몸으로 강을 건널 수 없는 인간은 작은 조각배를 물에 띄웠다.
“조금은 불편한 제약이 생긴 것뿐이지요. 때로는 억울하기도 하겠지만, 그 뿐입니다.”
흐르는 강물 속을 들여다보면 헤엄치는 수많은 물고기 떼가 있다. 만일 그 강물이 세상이라면, 운명은 마치 거대한 그물과도 같은 것이다. 보이지 않는 무형의 족쇄처럼 한 인간의 생애를 번번이 포획하려 든다. 그러나 휘림은 그 그물의 바깥으로 빠져나가는 인간이었다.
“묘정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어떻게 생각하냐니, 무엇을 말입니까.”
“방상시의 저주를 받아서 명이 정해져 있다고 했지요. 허면, 묘정은 계속 그렇게 서른셋에 죽는다는 운명을 믿으며 앞으로 남은 여생도 그렇게 살 작정이냐고 묻고 있는 겁니다.”
날카로운 어조로 날아든 질문에, 묘정이 멈칫하며 휘림을 바라보았다.
“…….”
마땅히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한 묘정이 말없이 시선을 내릴 때였다.
“실은 얼마 전부터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무슨 방법 말입니까?”
휘림이 눈을 반쯤 내리뜨며 조용히 대꾸했다.
“묘정을 운명에서 구하는 방법 말입니다.”
나직한 목소리에, 묘정이 천천히 고개를 들 때였다.
“혹, 묘정은 인어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