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7
묘정은 그때부터 휘림과 다시 왕래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계절에 한 번씩 만나고는 하였는데, 주로 찾아가는 쪽은 묘정이었다. 계절이 바뀌면 잠시 집을 떠나 휘림이 머무는 곳에 간다. 그렇게 일주일 정도 머물곤 했다. 세월아네월아 낚시를 하기도 하고, 바둑과 장기를 두기도 하며 한가롭게 붙어 지내는 나날이었다.
그렇게 휘림과 함께 며칠을 지내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마음이 몹시 허무하기도 할 때도 있었다. 가는 길에는 그저 설레기만 했으나, 홀로 되돌아가는 며칠의 시간은 지독하게 외롭고 쓸쓸하게 느껴질 따름이었다. 그러나 집에 도착했을 때 “묘정! 왔어?” 하고 아이가 반겨주는 광경을 상상하면 마음속에 있던 고독함은 어느새 눈 녹듯이 사라지곤 했다.
휘림과 왕래한 지 한 해가 흐른 어느 날, 묘정은 홀로 어느 마을을 지나고 있었다.
집에 도착하려면 이틀은 더 가야만 했다. 묘정은 잠시 쉬어갈 요량으로 마을 안에 들어섰다. 그런데, 마을 안에 도착하자 어느 순간 뒤에 따라붙는 기척이 있었다.
묘정은 쫓기는 일이 잦은 편이었다. 귀신일 때도 있었지만 인간의 기운일 때도 많았다. 처음 일 이 년 동안은 꼬리가 따라붙는 일이 많았으나 아이의 기운을 숨길 줄 알게 되면서부터는 한동안 잠잠하다 싶었다. 제 기운을 따라온 것이니 필시 원로들이 보낸 추적자이리라.
다행인 것은 거리에 사람이 많아 번잡하다는 것이었다.
길을 걷던 묘정은 삿갓을 푹 눌러쓰며 걸음을 재촉했다. 그러자 뒤를 쫓는 기척의 움직임도 덩달아 빨라졌다. 인파 틈에 섞여든 묘정은 보폭을 좁히며 재빨리 모퉁이를 돌았다.
방법은 두 가지였다. 먼저 다가가 손을 쓰거나, 이 틈에 사라지거나.
인적 드문 골목에 이르러, 묘정은 벽에 몸을 붙이고 기척을 숨겼다. 추적자는 바로 근처까지 와 있었다. 방향을 살피던 그는 묘정이 숨어 있는 모퉁이 쪽으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벽에 몸을 붙이고 있던 묘정은 정제된 움직임으로 그를 단숨에 포획했다. 팔을 뒤로 꺾자마자 포박하듯이 목을 콱 졸랐다. 벽에 쿵, 몸이 부딪히자 삿갓 속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의 등 뒤를 선점하였으니 유리한 것은 묘정 쪽이었다.
“누구냐.”
묘정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의 목에 손날을 갖다 댔다.
“…내가 누군지, 정녕 모르시겠소?”
삿갓 속에서 희미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얼핏 들어도 부자연스럽게 느껴질 만큼 힘껏 내리깐 듯한 목소리였다. 어디서 들어본 것 같기도 한데. 묘정이 설핏 미간을 구길 때였다.
“이거, 서운합니다 그려.”
사내가 천천히 손을 들었다. 묘정은 귀기를 드러내며 허튼짓하지 말라는 신호를 보냈으나, 사내는 아랑곳 하지 않고, 쓰고 있던 삿갓을 쓱 들어 올리더니 묘정을 힐끗 돌아보았다.
“나는 윤 가의 수향이라고 하오.”
수향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수향?”
눈이 마주치자, 묘정의 얼굴에 놀라움이 번졌다. 수향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장난기가 묻어나는 표정이었다. 비록 나례청을 파하면서 끝이 껄끄러웠다고는 하나, 어린 시절부터 동고동락한 지우가 몇 년만에 나타나 이렇게 눈앞에 있으니 몹시 반가운 마음이 앞섰다.
“이게 누군가!”
반가운 추적자. 전혀 예상치 못한 뜻밖의 조우였다. 두 사람은 악수를 주고받으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짧게 포옹했다. 수향을 만나기는 햇수로 몇 년 만의 일이었다. 휘림을 통해서 수향의 근황을 물은 적도 있으나, 둘은 왕래를 끊긴 지 오래되어 알 수 없다고 했다.
어째선지 수향은 사내 차림으로 완전히 변복하고 있었다. 반가의 자제로서 항상 예법을 지키던 수향이 어째서 사내의 복식을 하게 되었는지, 자세한 사정을 알 길이 없었지만 떨어져 있던 지난 몇 년 동안 수향에게 적지 않은 변화가 있었다는 것쯤은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동안 잘 지냈습니까?”
“그럼, 잘 지내다마다요.”
“이게 대체 얼마 만인지 모르겠습니다.”
수향이 목덜미를 감싸 쥐며 장난스레 투덜거렸다.
“나도 단련에 힘을 쓸 것을 그랬습니다. 이렇게 바로 붙잡혀 버리다니.”
어려서부터 묘정은 여러 방면에서 두루 익혔고, 휘림은 검술과 비방에 능했다. 수향은 탐구하는 것을 좋아하여 주술과 부적에 심취하였고, 항상 서재에 틀어박혀 책을 읽고는 했다.
그는 부적에 쓸 만한 약재를 사기 위해서 이 마을에 들렀다가, 우연히 길을 지나는 묘정을 발견하고는 뒤좇아서 따라왔노라 말했다. 기가 막힐 정도로 기묘한 우연이었다.
근처의 찻집으로 자리를 옮긴 두 사람은 아주 오랜만에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고 앉았다. 차를 마시며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의 안부를 묻고, 대화를 나누었다. 수향은 나자들과 함께 지방 관아를 옮겨 다니며 민가에서 구나(驅儺) 의식을 이어나가고 있다고 했다.
“묘정, 괜찮습니까?”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어느 순간 수향이 낯을 굳혔다.
“무엇이 말입니까?”
수향이 미간을 찌푸리더니, 손가락으로 인중을 더듬는 시늉을 해 보였다.
“코에서 피가….”
묘정은 수향의 행동을 거울삼아 코밑을 훔쳤다. 정말로 손에 피가 묻어 있었다. 묘정이 멈칫하며 곤혹스러운 얼굴을 했다. 수향은 서둘러 지니고 있던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어디가 안 좋습니까?”
묘정은 재빨리 표정을 감추며 고개를 저었다.
“최근 무리를 했더니 기가 허한 모양입니다.”
별일 아니라는 듯 가볍게 무마했으나, 묘정의 눈동자가 미묘하게 가라앉았다.
묘정은 아이에게 자신의 생명을 나누어 주고 있었다. 아이는 묘정을 양분으로 삼아 성장하고 있었는데, 그 영향 때문인지 묘정은 아주 조금씩 쇠약해져 가고 있었다. 한 해가 넘어서자 아침이면 몸이 무거워졌고, 잠자는 시간이 조금쯤 늘었으며, 이전보다 쉽게 지쳤다.
그저 기분 탓이겠거니 했으나 하루하루 조금씩 그 여파가 나타나고 있었다.
대화는 계속 주변을 맴돌았다. 누구는 어떻게 지내고 있다는 둥, 최근 어디에서 무슨 일이 있었다는 둥,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였다. 어느새 대화거리가 떨어지며 정적이 찾아왔다.
꽤나 긴 정적이 이어진 끝에, 수향이 본론을 꺼냈다.
“묘정.”
심호흡을 하던 수향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나례청을 다시 세웁시다.”
입가로 찻잔을 가져가던 묘정이 그대로 손을 멈추더니, 눈썹을 까딱 움직였다. 수향이 나례청을 재건하려는 뜻을 품고 있다는 것은 일전에 휘림을 통하여 전해 들은 바가 있었다.
“이미 몇 해가 지난 일입니다.”
“몇 해가 지났다고는 하나, 아직도 나자로서 사명을 버리지 않은 이들이 많습니다. 이전에는 분명 유감스러운 일이 있었지요. 허나 갈등이 있었다면 다시 올바른 방향으로 고쳐 나아가면 될 일입니다. 나례청의 복건을 모두가 바라마지 않는 일일 겁니다.”
묘정이 대답 없이 차를 홀짝이자, 수향이 재차 입을 열었다.
“인간에게는 나자가 필요합니다.”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
“귀재에게는 분명 귀재로 태어난 사명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귀재라면 무릇 소임을 다해야 합니다. 귀재에게 소임이 있다면 귀신과 산자, 이승과 저승 사이에서 어지러워진 법도를 바로잡는 일일 것입니다. 나자들에게는 방상시가 필요합니다. 그러니 돌아오세요, 묘정.”
수향은 묘정의 눈을 들여다보며 말을 이었다.
“방상시가 나례청을 버리는 일은 역사상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수향은 단단히 착각을 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묘정은 손에 쥐고 있던 찻잔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나는 나례청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나례청이 저절로 망가진 것이지요.”
“망가졌다면 고쳐 쓰면 될 것이 아닙니까.”
“무엇이든 번성하는 때가 있으면 쇠락하는 때가 있는 법입니다. 한 나라에도 흥망성쇠가 있듯이 나례청도 그러할 뿐입니다.”
수향의 올곧은 눈동자를 응시하던 묘정이 덧붙였다.
“그러니 내가 다시 나례청에 돌아가는 일은 없을 겁니다.”
정중한 어조였으나, 동시에 묘정은 분명한 태도로 거절을 표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수향은 물러서지 않았다. 어느덧 살얼음판 위를 걷는 것처럼 팽팽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모든 것은 하늘의 소관 아래 있습니다. 무엇이 존재하는 데에는 반드시 하늘의 뜻이 있지요. 나례청이 없어지고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 압니까? 죄 없는 백성들이 귀신에게 해를 입으며 신음하고 있어요. 하늘이 귀재를 낸 까닭은 이를 바로잡으라는 뜻입니다.”
“수향의 말대로 모든 것이 하늘의 소관 아래 있으며, 무엇이 존재하는 데에 반드시 하늘의 뜻이 있다고 한다면, 반대는 어떻습니까? 허면 귀신 또한 마찬가지 아닐는지요.”
묘정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수향의 낯이 대번에 굳었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수향은 눈에 힘을 주고 묘정을 바라보았다.
“묘정은 기어이 귀신의 편에 서기로 한 것입니까? 귀신으로 인해 흉년이 들고 역병이 돌아 죽어 나가는 백성이 수백 수천이건만, 묘정이 귀신을 감싸고 돌 줄은 몰랐습니다.”
“감싸고 도는 게 아니라, 시각을 달리하여 바라보면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그게 귀신의 편을 드는 게 아니라면 뭐란 말입니까.”
수향이 싸늘한 눈으로 묘정을 노려보았다.
“설마, 그 아이와 함께 붙어 지내다가 현혹되기라도 한 것입니까?”
찻잔을 들던 묘정의 손이 멈칫했다.
아이가 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수향은 묘정이 아이와 함께 지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부적으로 쓸 만한 좋은 약재가 있어서 마을을 지나던 차에 우연히 만난 것처럼 굴었으나, 사실은 진작부터 자신의 행방을 뒤좇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아이라니,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묘정은 시치미를 뗐으나, 어느새 수향의 낯에서는 경멸과 혐오가 드러나고 있었다.
“팔도에 횡행하며 떠돌아다니던 재앙신이 어느 날 갑자기 자취를 감추고 사라졌지요. 쉬이 죽을 것이 아니니, 묘정이 죽인 것이 아니라면 여태 살려두고 있는 게 아닙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