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불 (308)화 (308/348)

#308

“설마 그 아이와 함께 붙어 지내다가 현혹되기라도 한 것입니까?”

수향이 싸늘한 눈으로 묘정을 노려보았다. 수향은 묘정이 아이와 함께 지내고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그에 묘정은 부정하는 대신 찻잔을 내려놓았다.

“아이와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묘정, 그 아이는 재앙신의 그릇일 뿐입니다.

잠시 침묵하던 묘정이 차분한 어조로 대꾸했다.

“허면 아이를 재앙신의 그릇으로 만든 이들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답니까?”

나자들을 힐난하는 말에 수향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한 차례 정적이 흘렀다.

“묘정, 인신 봉인은 본디 행해서는 안 되는 금술이기에 유감스러운 일임에는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면 원래 목적에 맞게 없애는 것이 도리일 것입니다. 그 아이는 장차 불행의 씨앗이 될 것입니다. 부자연스럽고, 섭리에서 어긋난 존재란 말입니다.”

말을 멈춘 수향이 묘정을 응시했다.

“고통받는 백성들을 생각하세요.”

“백성을 위하는 수향의 마음은 잘 알겠습니다. 그러나 백성뿐만 아니라, 나자의 욕심으로 제물이 된 그 아이를 위해주는 이도 이 세상에 단 한 명쯤은 있어도 되지 않겠습니까?”

“묘정에게는 현신으로서의 사명이 있습니다.”

“이는 수향이 관여할 일이 아닙니다.”

묘정이 무감한 낯으로 선을 긋자, 수향의 낯이 일변했다.

“…….”

어느덧 수향의 표정에서는 경멸과 혐오가 묻어나고 있었다.

“나례청의 주인이 귀신을 감싸고 도는 꼴이라니…….”

고개를 숙이며 혼잣말을 하던 수향이 탄식하듯 덧붙였다.

“나례청은 사라져야 함이 마땅하군요.”

“나례청이 사라진다면, 이 또한 수향이 따르는 그 대단한 섭리가 아니겠습니까.”

“예, 묘정의 나례청이라면 그러하겠지요.”

말을 마친 수향은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루마기 자락을 펄럭이며 삿갓을 고쳐 쓴 수향은 인사도 남기지 않고 등을 돌렸다. 묘정은 멀어져 가는 수향의 등을 바라보았다.

문득 묘정은 쓸쓸함을 느꼈다.

그를 붙잡고 싶다거나 따라나서고 싶다는 생각 같은 것은 들지 않았다. 그와 앞으로 마주할 일이 없을 거라는 사실이 서글프고 허무할 따름이었다. 어린 시절을 함께한 지우였던 두 사람의 거리는 점점 아득하게 멀어져 가고 있었다. 묘정은 수향과 인연이 다했음을 알았다

수향과 헤어져 초가집으로 돌아온 묘정은 곧바로 거처를 멀리 옮기고, 휘림을 제외한 이들과 왕래를 끊었다. 그동안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가볍게 쌓아온 인연이 제법 되었으나 미련 없이 단칼에 잘라냈다. 행적이 드러나지 않도록 하기 위함으로, 이유인즉슨 수향을 조심해야겠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묘정은 마지막에 보았던 수향의 눈빛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후 휘림에게 수향과 만났다는 사실을 말했더니, 휘림 역시 수향을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렇게 한동안 사람이 오고 가는 길을 피해 다녔고, 바깥에 나설 때면 꼬리가 밟히지 않도록 채비를 단단히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소년은 잘 먹고, 잘 지내고 있었다.

수향과 재회한 이후 다시 그를 만나는 일은 없었다. 그에 대한 소식은 알 길이 없었다.

***

“혹, 묘정은 인어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휘림은 몇 해 전, 팔도를 떠돌아다닐 적에 한 사내를 만난 적이 있다고 했다. 휘림은 우연한 기회로 어려움에 부닥친 그를 도와주었고, 목숨을 구해주었다. 그는 휘림을 믿을 만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는지, 자신이 인간들 틈에 정착해 살아가고 있는 인어라고 밝혔다.

‘나으리, 저희를 도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사내의 말에 따르면 언제부턴가 알 만한 인간들 사이에서는 인어를 잡아먹으면 불로장생한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여, 몇 해 전부터 인어 사냥이 횡행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가족들이 인간에게 붙잡혀 어딘가로 끌려갔다는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도와달라 부탁했다.

휘림은 사내의 부탁에 응하여 붙잡혀 있는 인어 무리에게 활로를 제공해줌으로써 그들이 바다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들은 휘림에게 감사를 표하며 나중에 큰 병이 들거나 위험에 처하게 된다면 꼭 찾아오라고 말했고, 연신 보은을 약속하며 바다로 돌아갔다.

“인어를 통하면 늙지 않고 장수한다고 하니 도움을 받아 봅시다.”

그리고 이듬해 봄이 되었을 때, 묘정과 휘림은 다시 만났다.

“그때 만난 사내를 찾았습니다. 하지만…….”

휘림은 여기저기 수소문한 끝에 전에 만났던 사내를 찾아낼 수 있었다. 반년 만의 일이었다. 바닷속에 사는 인어들을 만나기 위해서는 그를 꼭 거쳐야만 했다. 사내를 찾아간 휘림은 ‘아는 이가 서른세 살에 명이 다한다는 예언을 피해 보려 하는데, 인어들을 만나게 해 줄 수 있느냐’고 사정을 털어놓았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문제가 있었다. 인어들이 원래 살던 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떠났다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몇 해나 지난 일이었다.

“인어들이 거처를 옮겨 생각보다 시일이 오래 걸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묘정이 서른세 살이 되기 전까지는 반드시 찾아낼 것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알고 지내던 인어를 찾는 데만도 반년 가까이 걸렸는데, 설상가상으로 바닷속에 산다는 인어들은 멀리 있는 바다로 이주한 상황이었다. 그들을 찾아내기까지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었다. 그 길은 요원해 보이기만 했고, 어느덧 묘정에게 남은 시간은 그리 많지 않은 상황이었다.

“휘림은, 나를 위해서 왜 그렇게까지 하는 겁니까?”

사실 묘정은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았다. 바라는 것이 있다면 언젠가는 아이에게 모든 진실을 털어놓고 용서를 받는 것, 그리고 여생 동안이나마 지금처럼 휘림과 왕래하면서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다. 묘정이 망설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휘림이 말했다.

“묘정은 참으로 둔치입니다 그려.”

“그게 무슨 말인지요.”

“모르겠습니까? 나는 묘정과 가족이 되고 싶습니다.”

예상치 못한 휘림의 고백에, 묘정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나는 이는 없지요. 하지만 출생은 불가피할지라도, 죽음으로 가는 길은 인간이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한 문제인 것이지요. 그러니 운명을 비틀어 보는 건 어떻습니까?”

잠시 말을 멈춘 휘림이 묘정을 바라보았다.

“저주받은 삶이라 체념하고 손을 놓고 있을 바에야, 세상을 상대로 어떻게든 꾀를 내보자는 겁니다. 섭리에서 벗어난 일일지라도요. 혹시 모르는 일이지 않습니까?”

“…….”

“묘정, 저주 때문이 아니더라도 단명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당신은 헛똑똑이입니다. 아직 무너지지 않았는데 어째서 미리 무너져 있는 겁니까. 왜 벌써부터 무릎을 꿇고 있습니까? 세상이 그런다한들, 당신은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을 작정입니까?”

마침내 묘정의 낯이 어두워졌다.

“만약 저주를 피한다고 해도, 당신과 가족이 된다면 당신도 내 운명에 포섭될 것입니다. 내가 먼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눈앞에서 당신을 먼저 잃고 싶진 않습니다.”

중요한 건 어떻게든 이 삶을 어떻게든 살아내겠다는 결심이며, 각오일 것이다. 그럼에도 묘정은 휘림과 가족이 될 자신이 없었다. 저주의 내력은 서른세살에 죽는다는 것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이를 곁에 두고, 가족을 꾸렸을 때 그 모든 것을 잃게 된다는 것이 요지였다.

“당신은 둔치지만, 나는 꾀가 있는 인간입니다. 내가 순순히 운명에 걸려 넘어질 것처럼 보입니까? 나는 몸부림치고, 꼴사납게 버둥거릴 겁니다.”

“…….”

“만약 당신 곁에 남는 대가로 내가 죽게 된다고 해도, 나는 묘정처럼 억울한 처지가 아닙니다. 왜냐면 나는 알고서 선택한 길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괜찮습니다.”

“…….”

“혹시라도 희망을 남겨두었다가, 일이 어그러져 실망하게 될까 두려운 것이지요? 그렇다면 없는 일로 하지요. 오늘부로 인어에 관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을 테니 전부 잊으십시오. 그러나 만에 하나 내가 방도를 찾는 데 성공한다면, 그때 다시 묻겠습니다.”

그렇게 몇 번의 계절이 돌았다.

어느덧 묘정에게 남은 시간은 이 년 남짓이었다. 그 사이 아이는 소년이 되어 있었고, 곧 있으면 아이와 함께 지낸 지 십 년이 되며, 머지않아 묘정은 서른세 살이 될 것이었다.

그리고 그해 가을, 휘림에게서 서신이 왔다.

‘인어를 찾았습니다.’

편지를 받아든 묘정은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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