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1
“성명자의 권능으로 이르되, 너는 네 주인이 아닌 자의 말을 듣지 마라.”
폭주가 그쳤다.
아이의 몸을 휘감고 있던 붉은 안개가 일시에 흩어졌다. 아이가 무언가에 짓눌린 듯 바닥에 쿵 쓰러졌다. 무릎 한쪽을 굽히고 앉아 있던 묘정은 죽은 듯이 쓰러져 있는 아이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자리를 뜨지 못하고 아이를 꾹꾹 눈에 담고 있던 묘정이 어느 순간,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묘정은 화마에 휩싸인 초가집을 뒤로한 채 걸음을 옮겼다.
묘정은 천천히 어둠을 향해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서까래와 기둥이 무너지면서 지붕이 내려앉는 소리가 났으나, 묘정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허공에 잿가루와 타다만 불씨가 흩날리고 있었으나, 눈앞이 흐려서 잘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앞만 보고 걸어 나가던 묘정은 우뚝 걸음을 멈췄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둡고 우거진 산중에 있었다. 멍하니 서 있던 묘정은 고개를 꺾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장대한 밤하늘. 이지러진 곳 하나 없는 온전한 보름달이 묘정을 응시하고 있었다.
우우우…….
어디선가 부엉이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꼭 환청 같았다. 방금 전에 있던 모든 일들이 전부 다 거짓이고, 꿈이었던 것만 같았다. 묘정은 축 늘어트렸던 손을 들어 올렸다. 차가운 달빛이 피에 젖은 손바닥을 물들였다. 마침내 묘정의 눈가가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이것은 씻을 수 없는 죄였다.
“…….”
달빛이 유독 서글픈 밤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깨어난 아이는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하루아침에 죽지도, 늙지도 못하는 몸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저를 증오하고 원망할 것이다. 천애 고아로 혼자 남겨진 아이에게 의지할 데라고는 저밖에 없었다는 걸, 묘정도 알고 있었다.
‘너는 어리석은 인간이 되지 말아라.’
‘너는 나처럼 살지 마라.’
묘정은 양쪽 눈을 감싸 쥐며, 털썩 무릎을 꿇었다.
“아, 아아…….”
이제는 그 말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
묘정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수향의 행방을 쫓는 일이었다.
며칠 동안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추적하고 있었으나 그의 행방은 묘연하기만 했고, 보름이 지나서야 간신히 행적을 찾을 수 있었다. 비마라도 불러내어 도움을 받았다면 좋았을 것이나, 불타 버린 집에 모든 것을 놔두고 왔으니 그럴 수도 없었다. 창고 속에 있던 물건들은 화마 속에서도 멀쩡히 남아 있을 것이므로 아이가 나중에 요긴하게 쓸 수 있을 것이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몇 년 만에 재회한 수향은 태연하게 묘정을 맞이했다. 묘정은 별다른 인사 없이 수향의 맞은편에 정좌를 하고 앉았다. 수향이 차를 내어주었으나, 묘정은 차를 마시지 않고 방 안을 가볍게 훑었다. 살갗에 와닿는 기운이 삼엄했다. 이 공간에는 온갖 주술이 쓰여 있었다.
자신이 찾아오리라는 걸 예감하고, 기다렸던 것이 틀림없었다.
예전 같았으면 수향을 상대로 탈을 되찾는 일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묘정은 몇 해에 걸쳐 많이 쇠약해진 상태였다. 일상에는 별 무리가 없었지만, 언제부턴가 가끔 기침을 하면 피가 나올 때도 있었다. 그동안 허리춤에 오던 아이가 가슴팍에 닿는 눈높이로 자라날 때까지 생기를 나눠 주었던 데다 수시로 의식을 반복하면서 힘을 많이 잃은 상태였다.
“내 아이에게서 가져간 것을 돌려주시지요.”
묘정은 거두절미하고 본론을 꺼냈다.
수향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찻잔을 들었다.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아무런 동요 없이 태연한 기색으로 차만 마실 뿐이었다. 그에 묘정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방 안의 기운에 집중해 보았다. 탈을 보관한 자개함에 봉인을 걸어 두었으니, 만약 수향이 봉인을 풀어냈다면 탈의존재를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그러나 황금사목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다른 곳에 보관 중인 것인지, 아니면 봉인을 풀지 않은 채로 이 방 어딘가에 두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당장은 수향의 정확한 의중을 파악해야 했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묻지 않겠습니다.”
허리를 바로 세운 묘정은 서늘한 목소리로 운을 뗐다.
“그것은 수향이 가질 수 없는 물건입니다.”
잠시 찻잔을 만지작거리던 수향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옛 성현의 훈전에 이르기를, 신하된 도리로 윗사람이 잘못된 길로 간다면 진실된 마음으로 거듭 간언하고, 그럼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어긋난 도리를 바로잡으라 하였습니다. 주인이 책무를 다하지 않고 근간을 무너트렸으니, 자격이 없다 하면 어찌하겠습니까?”
묘정의 낯이 싸늘해졌다.
말로 한다고 해서 수향이 순순히 탈을 돌려줄 것이라고 생각지는 않았다. 그러나 탈을 어디에 두었는지 알 수 없는 이상에야 그를 상대로 섣불리 무력을 쓸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해서 그대가 진정으로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매한 군주는 끌어내려야 함이 마땅한 법입니다. 묘정에게는 현신의 자격이 없습니다. 당신이 의무와 사명을 져버렸으니, 내가 현신의 자리를 다시 올바르게 세울 작정입니다.”
묘정이 눈을 가늘게 떴다. 수향은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탈을 가진다고 모두가 현신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묘정이 천천히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
“가져서는 안 되는 것에 욕심을 낸다면, 그 대가를 치러야 할 겁니다.”
묘정이 수향의 낯을 뚫어져라 바라볼 때였다.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답니까?”
수향이 찻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입을 열었다.
“나는 내가 가진 욕심이 잘못됐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금 당장은 그렇지 않아도 나중에, 먼 훗날 세상이 바뀌면 그때는 내가 지금 하는 생각이 잘못된 게 아닐 수도 있지요.”
“정말 그렇게 생각합니까?”
수향의 말에, 묘정이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을 때였다.
“그 아이는 원래의 자리로 돌려보내겠습니다.”
“내 품에서 빼내 갔다 한들, 그 아이가 당신의 수중에 들어오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정말 그렇게 확신할 수 있습니까?”
“왜냐면 그 아이는 청개구리거든…….”
묘정이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이 세상에 정말로 절대적인 섭리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영원불변하는 건 없다는 사실일 겁니다. 헌데 그 아이는 하지 말라는 짓은 꼭 하고, 하라고 등 떠미는 일은 절대로 순순히 하는 법이 없지요. 이제부터 그 아이는 누구의 것도 아닌, 제 삶을 살게 될 겁니다.”
“…그게 무슨 말인지요.”
“수향은 영원불변한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그때였다. 바깥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나으리.”
대화에 끼어든 이는 수향을 곁에서 모시고 있는 수하 중 한 명이었다.
급박한 기색으로 들어온 그는 묘정과 수향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난처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그가 머뭇거리며 수향과 동석해 있는 묘정의 눈치를 살폈다. 그에 수향은 묘정에게 잠시 시선을 주었다가, 어서 말해 보라는 듯이 눈짓을 했다. 수하가 입을 열었다.
“평안도에서 반란의 조짐이 있어 관군이 그 일대를 습격했다고 합니다.”
***
평안도는 휘림의 거처가 있는 곳이었다.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은 묘정은 그 즉시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일전에 휘림이 말해 준 바에 따르면, 거사일까지는 적어도 보름 정도는 시간이 남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보다 앞서 관군이 움직였다. 그 소식을 들으니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새하얗게 변했다.
당장 휘림이 무사한지부터 확인해야 했다. 묘정은 미친 사람처럼 휘림의 행방을 찾아 헤맸다. 소문에 의하면, 민란 세력 가운데 내통하는 자가 있어서 민란이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을 관군 쪽에 흘렸고, 관군이 그 일대에 미리 매복하여 큰 전투가 벌어졌다는 것이었다.
“뭐? 그게 참말인가?”
“그렇다니까. 민란에 가담한 이들 전부 다 싸그리 목을 베었다는군 그래.”
“세상에, 허면 여인들과 아이들은 어찌 됐대?”
“으응, 안 죽이고 노비로 보냈다나.”
어딜 가도 민란에 관한 이야기뿐이었다. 설마 그럴 리 없다. 여인과 아이는 살려두었다고 했으니, 분명히 아직 살아 있을 것이다. 묘정은 절박했다. 여인과 아이는 노비로 보냈다는 말에 이곳저곳을 수소문해 보았으나, 아무리 찾아봐도 휘림을 안다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쉬이 당할 사람이 아니니, 어쩌면 미리 빠져나와서 몸을 보전했을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이미 도망쳐서 어딘가에 숨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가약을 맺기로 하였으니 휘림은 반드시 그 약속을 지킬 것이다. 몇 날 며칠을 떠돌아다니던 묘정은 일전에 휘림이 머무른 적 있는 별채에 가보기로 했다. 예전에 지나가는 말로 나중에 살만한 곳을 정해 두었는데, 근처에 넓은 호수와 고즈넉한 산자락이 있어 지내기가 좋다고 했던 곳이었다.
버려진 별채에 도착한 묘정은 마루에 정좌하고 앉았다.
하루가 흐르고, 이틀이 흘렀다. 묘정은 자지도 않고, 먹지도 않으며 휘림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렇게 며칠의 시간이 흘렀을까, 마루에 앉아 있던 묘정이 고개를 들었다. 기척이 느껴졌던 것이다. 기척이 느껴진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 묘정의 눈이 크게 뜨였다.
“…….”
눈앞에 있는 것은 그토록 기다리던 이의 얼굴이 아니었다. 그러나 어딘지 낯이 익은 얼굴이었다. 분명 이전에 본 적 있었다. 휘림을 보살펴주고 있다던 이월댁이었다.
지저분한 꼴로 나타난 이월댁은 품 안에 보따리 짐을 끌어안고 서 있었다.
묘정과 눈이 마주치자 이월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입을 어물거리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이월댁이 비틀거리며 묘정을 향해 몇 발자국 가까이 다가오는가 싶더니, 그 자리 그대로 털썩 주저앉았다. 이월댁은 소리도 내지 못하고 숨죽여 울고 있었다.
어찌 된 일인가 하여, 묘정은 황급히 이월댁에게 다가갔다.
“이곳에는 어쩐 일로…….”
이월댁을 일으켜 세우려던 묘정이 멈칫했다. 이월댁이 대뜸 품 안에 안고 있던 포대기를 내밀었기 때문이었다. 잘 감싸인 포대기 안에는 아주 작은 갓난아이가 잠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