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4
“태희야.”
재겸은 무언가를 깨달은 사람처럼, 홀연히 중얼거렸다.
“배신자는 나였어.”
제일 먼저 보인 것은 윤태희의 얼굴이었다.
그런데, 윤태희의 표정이 몹시 이상했다. 넋이 나간 것 같기도 하고, 뭐라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이었다. 영귀들은 숨죽인 채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머리를 반대 방향에 두고 누워 있던 둘은 꿈에서 깨어나자마자 상체를 일으켰고, 서로를 마주 본 상태로 앉아 있었다.
아득한 과거 속에는 묘정의 짧은 생애가 담겨 있었다.
묘정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온통 처음 알게 된 것들뿐이다. 어린 시절의 묘정. 순해 빠져서는 늘 웃기만 하던 묘정. 강아지처럼 휘림을 졸졸 쫓아다니던 묘정. 방상시이자 나자였던 묘정. 휘림을 사랑했던 묘정. 하나부터 열까지 처음 알게 된 모습들이었다.
묘정이 어떻게 나고 자랐으며 누구를 사랑하였는지, 어떤 생각을 했고 무슨 감정을 느꼈는지 지켜보았을 뿐이다. 그런데 마치 묘정과 함께 한 생애를 살아낸 것 같은 기분이었다.
재겸은 생각했다.
만약 이것이 그저 꿈일 뿐이라면, 두 번 다시는 꾸고 싶지 않은 지독한 악몽일 것이라고.
우우우…….
또다시 올빼미가 울었다. 재겸은 흠칫하며 밖을 쳐다보았다. 손끝에서부터 시작된 알 수 없는 떨림이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그것은 공포감을 닮아 있었다. 묘정을 처음 만났던 날도, 제 손으로 묘정에게 칼을 찔러 넣었던 마지막 날도, 오늘처럼 이렇게 달이 밝았었다.
“배신자는 나였어…….”
재겸이 멍한 얼굴로 몇 번을 곱씹듯이 되뇌었다. 꿈의 형식을 빌려서 보게 된 과거는 낡고 오래된 필름처럼 불투명했다. 그러나 현실의 잔여물로 남아 있는 슬픔은 몹시 선명했다.
이 감정이 무엇인지 깨닫기도 전에 자꾸만 눈물이 떨어졌다.
환청처럼 맴도는 올빼미의 울음소리. 서늘한 밤공기. 어둠에 잠긴 산중. 이지러진 곳 없이 동그란 달. 갑자기 저를 둘러싼 모든 것이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재겸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제자리를 서성거리던 재겸이 제 머리를 퍽퍽 때리기 시작했다.
“으… 으으…….”
갑자기 속이 울렁거리며 신물이 올라왔다. 재겸은 벽을 붙잡고 토악질을 했다. 그에 멍하니 있던 윤태희의 눈에 안광이 돌아왔다. 속에 있던 것을 게워내자 갑자기 한기가 들었다.
어린 시절 잡귀들이 저를 쫓아다니며 키득거릴 때처럼 저 점점이 빛나는 별빛들이, 나무에 걸려있는 무수한 잎사귀들이, 희미하게 불어오는 바람결이 귀에 속삭이고 있었다. 배신자. 배신자. 배신자. 배신자. 배신자. 배신자. 배신자. 배신자. 배신자. 배신자. 배신자. 배신자. 배신자. 배신자. 배신자… 스스로의 일갈이 무형의 올가미처럼 숨통을 조여오고 있었다.
묘정은 나를 배신했어! 아니 네가 먼저 묘정을 배신한 거지. 묘정은 나를 버리고 떠났어! 아니 네가 먼저 묘정을 버린 거라니까. 하지만 묘정은 나에게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았어!
“…….”
시야가 어그러졌다. 눈에 비치는 모든 것들이 왜곡되는가 싶더니 세상이 빙빙 돌기 시작했다. 쉴 새 없이 눈물이 떨어졌다.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팠다. 재겸이 털썩 무릎을 꿇고 상체를 엎드렸다. 그때, 구석으로 가까이 다가온 윤태희가 재겸의 어깨를 천천히 붙잡았다.
“재겸아.”
그에 재겸이 흠칫하며 윤태희를 바라보는 순간이었다. 불현듯 윤태희의 이목구비가 일그러졌다. 휘림의 얼굴이 되었다가 묘정의 얼굴로 바뀌더니, 윤태희의 얼굴 위로 덧씌워졌다.
묘정과 휘림. 방상시. 인어환. 아기…….
방상시가 이 땅에 돌아오리라.
이하 벽사단의 주인이 말하다.
그리고 언젠가의 벽보.
“너야?”
움직임을 멈추고 있던 재겸이 멍하니 입술을 달싹였다.
“정말 너야?”
“…….”
“아니지?”
“…….”
그 순간, 윤태희의 눈이 거세게 흔들렸다.
‘예전에 산에 가지를 치러 갔었지. 근데 어디서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기에 웬 소리인가 찾아보았더니 신기하게도 땅속에서 소리가 나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래서 땅을 파 보니 웬 비석이 하나 있었는데, 거기에 기다릴 혜(徯)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단다. 그래서 참으로 이상타 싶어 비석을 치워 보았는데 이번에는 관이 나오는 것이 아니냐! 관을 열어 보았더니 선오가 그 안에서 자고 있지 뭐냐! 우리 선오는 하늘이 내린 선물이었단다.’
“묘정하고 아무런 상관도 없다고 했잖아.”
“…….”
“넌 모르는 일이지? 그렇지?”
“…….”
윤태희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느냐고 했었다. 이번에도 얼토당토않은 소리 하지 말라고 부정해 주길 바랐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윤태희는 재겸을 바라보기만 할 뿐 그 어떠한 말도 하지 않다가, 한참 만에야 약간의 떨림이 섞여 있는 목소리로 입술을 달싹였다.
“전부…….”
윤태희가 힘겹게 말을 이었다.
“전부 다 지나간 일이야.”
윤태희의 낯은 몹시 창백했고, 쓴 물을 삼킨 것처럼 어그러져 있었다. 지나간 일이 없던 일이 되는 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것이 윤태희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아니야… 아니야….”
그러나 재겸은 고개를 저으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내가 묘정을 죽였단 말이야…….”
손에 쏟아지던 뜨거운 피를 기억한다. 칼로 찌를 때의 느낌을 기억한다. 어디까지나 묘정이 저한테 한 것을 고스란히 돌려준 것뿐이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대로 앙갚음해 주었다.
다만 저는 죽지 않는 몸이었고, 묘정은 그날 죽었을 뿐이다.
“묘정이, 묘정이 죽었는데, 나 시체 앞에서 3일을 앉아 있었어.”
“…재겸아.”
“사람이 죽었을 때는 삼 일 안에는 다시 돌아올 수도 있잖아.”
“…….”
“아니면 귀신이 될 수도 있으니까, 만약 그러면 한 번 더 죽이려고.”
“…그만해.”
묘정의 숨이 끊어진 이후로도 재겸은 차가운 시체가 된 묘정과 같은 방 안에 있었다. 하루는 많이 울었고, 하루는 기절하듯이 잤고, 나머지 하루는 어땠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묘정이 다시 살아 돌아오길 바라면서도, 영영 돌아오지 않기를 바랐던 것 같다. 한때 묘정은 재겸의 모든 것이었다. 그리고 묘정은 그런 재겸에게서 모든 것을 앗아갔다. 묘정에게서 삶을 빼앗겨 버린 탓에 재겸은 아주 오랜 동안 묘정을 증오하고 그리워하며 살아야만 했다.
그런 재겸에게 주어진 진실은 너무나도 가혹한 것이었다.
“근데 아무리 기다려도 안 살아났어. 돌아오질 않았어!”
“…….”
“이게 무슨 말인지 알겠어? 너도 봐서 알 거 아냐…….”
잠시 말이 없던 윤태희가 눈을 꾹 감으며 조용히 말했다.
“…그만하라고 했어.”
쉴 새 없이 눈물을 흘리던 재겸이 실성한 듯이 웃기 시작했다.
“야… 그러면, 그러면 있잖어, 태희야. 네가 만약 묘정의 아들이 되는 거면… 내가 묘정을 죽였으니까…… 그럼 내가 있잖어, 네 아빠를 죽인 거야. 내가 네 원수가 되는 거야…….”
짜악—
재겸의 고개가 세차게 돌아갔다.
윤태희가 재겸을 때린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재겸이 멈칫 굳었다. 불에 댄 것처럼 뺨이 아프고 화끈거렸다. 쿨럭, 작게 기침을 했더니 비린 맛이 퍼졌다. 입 안이 터진 것 같았다.
“그래. 더 때려, 더.”
재겸은 완전히 정신이 나간 것 같았다. 윤태희가 이를 악물었다. 손을 뻗어 재겸의 멱살을 확 잡아챘다. 몸을 확 끌어당기는 힘에 재겸이 저항 없이 그대로 끌려가는 순간이었다.
윤태희가 애원하듯이 말했다.
“그만해, 제발…….”
재겸이 신음을 흘리며 몸을 늘어트리자, 윤태희가 손에서 힘을 풀었다. 스르륵 미끄러진 재겸이 바닥에 쓰러졌다. 윤태희는 이를 악물고 감정을 눌렀다. 벼랑 끝에 선 기분이었다.
영귀들이 숨죽인 채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
“…….”
힘없이 옆으로 쓰러져 있던 재겸은 오래도록 말이 없었다.
”…태희야.”
한참 만에야 초점이 없는 눈으로 중얼거렸다. 그에 윤태희가 싸늘한 눈으로 고개를 돌려 재겸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덧붙여 흘러나온 말에, 윤태희는 눈을 감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나 좀 죽여 줘라.”
나지막하면서도, 처절한 부탁이었다.
“내가 왜 살아야 해.”
지나간 일을 없던 일로 만드는 것은 오직 죽음, 죽음뿐이다.
“나 계속, 이렇게 살아 있는 게 너무 싫어.”
재겸의 눈꼬리에 걸려있던 눈물이 옆으로 도르륵 굴러떨어졌다.
“…….”
윤태희가 눈가를 감싸 쥐었다. 언제나 강인하고 올곧던 소년은 망가져 있었다. 망가진 채로 무너져 가고 있었다. 구덩이 속으로 떨어지는 소년의 손을 붙잡아주고 싶었으나, 윤태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지나간 일을 없던 일로 만들 수는 없으므로. 그러나,
“…그래?”
눈가를 틀어쥐고 있던 윤태희가 어느 순간, 천천히 팔을 내렸다.
“알겠어.”
윤태희는 고개를 들었다. 붉게 물든 눈시울이 재겸을 노려보았다. 어딘지 악에 받친 듯한 눈빛이었다. 윤태희는 쓰러져 있는 재겸에게 다가갔다. 손아귀로 목을 감싸고, 힘을 주었다.
재겸의 뜻대로, 윤태희가 재겸의 목을 움켜쥐었다.
“…….”
“…….”
점점 숨이 막혔다. 재겸은 넋이 나간 얼굴로 윤태희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숨이 막혀서 괴로웠으나 윤태희가 이 손을 영영 풀어주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던 어느 순간, 재겸의 눈가에 피가 어리기 시작했다. 눈가에 맺힌 피는 어느새 피눈물이 되어 흘러내리고 있었다.
“…….”
“…….”
이윽고 재겸의 몸에서 붉은 안개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폭주였다. 정신도 육체도 수세에 몰리면서 기운이 마구 날뛰고 있었다. 윤태희의 얼굴을 올려다보던 재겸은 시야가 차츰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그때, 윤태희의 눈에서 툭, 눈물이 떨어졌다. 떨어진 눈물은 재겸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재겸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갑자기, 목을 조르던 손아귀의 힘이 풀렸다.
붉게 물든 눈시울로 재겸을 힘껏 노려보던 윤태희가 어느 순간, 입술을 달싹였다.
“나자의 이름으로…….”
지나간 과거 전부를 없던 일로 만들 수는 없다.
“밤을 몰수합니다.”
그러나, 오늘 밤 단 하루의 일이라면 없앨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