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5
지나간 과거 전부를 없던 일로 만들 수는 없다.
그러나, 오늘 밤 단 하루의 일이라면 없앨 수 있을 것이다.
“나자의 이름으로 밤을 몰수합니다.”
말을 끝맺는 순간, 윤태희가 입고 있던 옷 안쪽 주머니 속에서 무언가가 부스럭거리는 기척을 내며 빠져나왔다. 손가락 한마디쯤 오는 크기의 검은색 종이학. 흑망조였다. 품속에서 빠져나온 흑망조가 허공 위로 두둥실 떠오르는가 싶더니 재겸을 향해 쏜살같이 날아들었다.
흑망조를 쓰면 그날 하룻밤의 기억을 지울 수 있다. 누각을 뛰쳐나갔던 재겸을 다시 데려온 시점에서부터 산에는 어둠이 내린 상태였다. 흑망조를 통해 오늘 밤을 도려낼 수만 있다면, 꿈의 형상으로 보게 된 과거의 진실들 또한 전부 없던 일로 덮어놓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고통스러운 진실을 대면한 소년을 구해낼 수 있는, 유일한 수였다.
“패현,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
과거의 기억을 보러 이곳에 들어오기 전, 윤태희는 패현에게 한 가지 명령을 내렸다.
“네, 말씀하십시오.”
“물건 하나만 가져다주겠어?”
윤태희가 가져와달라고 부탁한 물건은 바로 흑망조였다.
흑망조가 있는 위치를 알려 주자 패현은 곧바로 자취를 감췄고, 머지않아 메모지가 들어 있는 철제 케이스 하나를 가지고 다시 나타났다. 검은색 메모지가 들어 있는 케이스였다.
정말로 만에 하나, 자신이 정말로 재겸의 스승과 연관이 있다면.
알 수 없는 불길함이 그림자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점점 희미한 불안감을 느끼고 있던 윤태희는 케이스를 열어 포스트잇 한 장을 떼어냈다.
메모지를 손바닥에 올리고 숨을 불어 넣자마자 눈 깜짝할 사이에 종이 새 한 마리가 완성되었다. 손등 위에 내려앉은 흑망조가 종이로 된 날개를 푸드덕거리며 윤태희를 올려다보았다. 미리 만들어둔 흑망조를 품속에 넣을 때만 하더라도 정말 이것을 쓰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어디까지나 최악을 가정하여 혹시나 하는 마음에 준비해 두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현재 상황에 이르러서는 이 방법 외에는 다른 어떠한 선택지도 떠올릴 수 없었다. 이런 진실이라면 모르는 게 나았다.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라면 지워버려야 마땅하다.
그러나 흑망조가 재겸에게 통할지 통하지 않을지는 미지수였다. 상황이 극한에 치달으면서 윤태희 역시 평정을 잃었다. 윤태희는 단 한 번의 도박에 모든 것을 걸어보기로 했다.
그렇게 흑망조가 날아든 순간이었다.
붉은 안개가 일시에 흩어지더니 폭주가 멈췄다.
흑망조가 통한 것인지, 재겸은 의식을 놓고 쓰러졌다. 그에 윤태희는 축 늘어진 재겸을 품에 안으며 눈을 감았다. 숨을 들이쉬며 진정하려 애썼으나, 손은 파들파들 떨리고 있었다.
눈물을 흘리며 죽음을 애원하던 소년의 낯은 어느덧 평온해져 있었다
“…….”
윤태희는 재겸의 뒤통수를 한 손으로 감싸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비록 처음 계획한 의도와는 다르게 쓰였으나 결과는 같았다. 원하지 않는 진실을 회수하였다는 점에서 그러했다.
‘윤태희. 너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나 속이지 마.’
‘아니, 속여도 돼. 속여도 되니까 들키지만 마.’
윤태희는 축 늘어진 재겸의 몸을 반쯤 일으켜 제게 기대게 했다. 일견 마주 앉은 듯한 자세에서 윤태희는 재겸을 꽉 끌어안았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재겸의 목덜미에 이마를 묻었다. 그렇게 윤태희는 아주 오래도록 재겸을 안고 있었다. 함께 독약을 먹고 잠이 든 것처럼.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곁을 지키고 있던 흑제가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냈다.
“괜찮으십니까?”
뭐가 괜찮느냐는 걸까? 부모에 대해서 알게 된 것? 제 아비가 재겸의 스승이자 원수인 묘정이라는 것? 그가 저주 받은 선대 나례청의 마지막 방상시였다는 것? 출생부터 재겸과 엮여 있다는 것? 자신이 사실은 인어환을 먹고 이백 년 전부터 살아온 인간이라는 것……?
어느 쪽이든 간에 아무렇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다시 돌아왔을 때 파란색 피 웅덩이가 있었어.”
신지혜가 착각했거나, 중간에 무슨 착오가 있었던 게 틀림없다고, 당시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 피의 주인공이 재겸이라는 것이라는 전제하에 내린 판단이었다. 그런데 설마 그게 자신의 피일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당시 윤태희의 머릿속에는 온통 불로불사를 풀 저주를 처음부터 다시 찾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따라서 재겸과 인어가 관계없다는 걸 깨닫게 된 이후로는 폐기된 답안이라고 생각하여 대수롭지 않게 넘겼었다.
그리고, 인어환을 취한 인간은 재겸이 아니라 윤태희 저 자신이었다.
인어환을 취하면 노화하지 않으며, 상처가 생겨도 저절로 낫는다고 했다. 인어환의 효력은 인어의 수명에 따라 달라진다. 거여도에서 만난 인어의 말에 따르면 인어의 수명은 200년 안팎이라고 했으니, 시기도 얼추 맞아떨어지는 셈이다. 이제야 모든 것이 이해가 갔다.
정신 나간 소리라고 생각했던 윤원중의 말은 사실이었던 것이다.
문득 헛웃음이 나오려고 했다. 물론, 과거의 일과 자신의 부모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되면서 정신적인 충격을 전혀 느끼지 않았는가 한다면, 그건 아니었다. 윤태희 또한 정신적으로 매우 혼란스럽고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묘정과 휘림이 제 부모라고 한들 자신이 이전과는 다른 존재가 되는 건 아니라고, 윤태희는 생각했다. 그들은 그들이고 저는 저일 뿐이다. 그저 혈연이라는 이유만으로 가족애를 느끼기에는 윤태희는 이미 냉연한 인간이었다.
윤태희에게 중요한 건 오직 재겸뿐이었다.
“흑제야.”
“예.”
재겸의 목덜미에 이마를 묻고 있던 윤태희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시간이 꽤 흘렀는지 바깥의 어둠은 한결 옅어져 있었다. 푸른빛의 여명이 번지고, 멀리서 동이 트고 있었다.
윤태희는 날카로운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았다.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듣게 해.”
윤태희는 품에 안고 있던 재겸을 침상 위에 바르게 눕혔다. 그에 흑제가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언젠가 같은 명령을 받은 적이 있었으나, 그때하고는 상황이 완전히 달랐다.
소리 없이 다가온 흑제는 재겸의 얼굴 위로 손을 뻗으며 눈을 감았다.
“단주님.”
그런데 어느 순간, 흑제가 멈칫하며 윤태희를 돌아보았다.
“의식 속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
눈을 뜬 순간, 재겸은 자신이 또다시 재앙신의 구역으로 떨어졌다는 사실을 알았다.
“야, 너 괜찮어?”
자신과 똑같은 생김새를 한 소년이, 시야 한구석에서 빼꼼 고개를 내민 채 저를 들여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흠칫하며 눈을 크게 뜬 재겸이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둘의 머리통이 꿍, 부딪혔다.
“우윽!”
소년이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이마를 잡고 뒤로 나자빠졌다.
재겸은 당황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머리 위에는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방금 전의 감각이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어두운 밤공기. 환하던 달빛. 뺨에 떨어지던 눈물의 미지근함, 악에 받친 듯하던 붉은 눈시울, 목을 조르던 힘, 그리고…….
‘나자의 이름으로 밤을 몰수합니다.’
흑망조.
“어, 어떻게…….”
윤태희가 저에게 흑망조를 썼다. 그런데도 시간차를 두고 혼잡한 기억이 파도처럼 밀려들기 시작했다. 묘정. 방상시. 나례청. 휘림. 그리고 태희. 윤태희가 흑망조를 쓴 것이 무색하게도 전부 기억이 났다. 대체 어찌 된 일인지 알 수 없어서, 숨을 거칠게 몰아쉴 때였다.
“고마운 줄 알어. 전부 내 덕분이니까.”
그때, 소년이 재겸의 마음속을 훤히 읽은 것처럼 입을 열었다.
“네, 네 덕분이라니.”
“그 시꺼먼 새 새끼 말야.”
폭주가 시작된 상황에서 흑망조는 통하지 않았다. 소년은 전부 다 제 덕분이라고, 제힘으로 지켜준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라며 생색을 부렸다. 아무것도 묻지 않는 걸로 봐서는 재겸이 겪은 일 전부를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재겸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제 목을 만졌다.
“왜…….”
“응?”
왜 그랬어. 왜.
소년이 어리둥절한 얼굴을 할 때였다. 갑자기 맑고 푸르던 하늘에 순식간에 먹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화창한 날씨가 금세 어둡게 변하더니 세찬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뭐야.”
갑자기 비가 내리자, 소년이 인상을 찌푸렸다.
“야, 뭐 하는 거야.”
재겸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슬퍼할 뿐이었다.
“너 때문에 하늘이 엉망이 됐잖어.”
갑자기 쏟아지는 빗줄기에 짜증이 났는지, 소년이 빨리 되돌려 놓으라고 성화를 부릴 때였다. 재겸은 아무 말 없이 바닥에 털썩 주저앉는가 싶더니, 그대로 땅 위에 엎어지듯 상체를 엎드렸다. 그러고는 목놓아서 엉엉 울기 시작했다. 악을 쓰듯이. 누군가를 뼈저리게 원망하듯이. 어쩌면 그리워하는 듯이 울었다. 어린아이였을 때도 이렇게 울었던 적은 없었다.
인간이 아닌 소년은 슬프다는 감각이 어떤 건지 몰랐다. 그런데 재겸이 가진 감정이 점점 그대로 전이되어 오면서, 소년은 감정의 정체가 뭔지도 모르는 채로 덩달아 슬픔을 느꼈다.
우는 재겸을 지켜보던 소년의 표정이 점점 미묘하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야…….”
침울한 얼굴로 재겸의 주변을 서성거리던 소년이 축 처진 목소리를 냈다.
“그… 묘정이 불쌍해서 그러는 거야?”
“…….”
“아님 전부 네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
그러나 재겸에게선 어떠한 대답도 들을 수 없었다.
“야아.”
“…….”
“응? 대답 좀 해봐.”
“…….”
소년은 심드렁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거렸다.
“네 마음이 안 좋으니까 나두 안 좋잖어…….”
결국, 소년은 무릎을 꿇고 펑펑 울고 있는 재겸의 앞으로 다가왔다. 몸을 웅크린 재겸의 앞에서, 소년은 무릎을 끌어안고 바닥에 궁둥이를 붙였다. 아무것도 없던 소년의 손에는 어느새 우산이 들려 있었다. 일전에 개미를 만들어 냈던 것처럼, 이번엔 우산을 만들어 냈다.
소년은 팔을 뻗어 재겸에게 우산을 씌워 주었다.
“나 여기 계속 있어도 되냐?”
“마음대로 해.”
고개를 끄덕이던 소년이 말을 덧붙였다.
“언제까지 있을 건데?”
“영원히.”
뜻밖의 말에, 소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영영 밖에 안 나가고 여기 있으려고?”
“응.”
“어째서?”
투둑, 툭, 투둑…….
“용서가 안 돼, 이 삶이…….”
재겸은 우산을 때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아주 오랫동안, 아주 오랫동안 울었다.
우는 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는 사람처럼, 재겸은 하염없이 울기만 했다. 이곳에선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 이곳에선 모든 게 그대로 멈춰 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피곤하지도, 졸리지도, 배가 고프지도 않았다. 멈추지 않는 긴 장마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