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6
저물녘, 누각은 숨죽은 듯이 고요했다.
텅 빈 복도에 서서 문 앞을 지키고 있던 흑제는 활짝 트인 창문 바깥으로 시선을 주었다. 붉은 저녁노을이 산등성이를 물들이며 넘어가고 있었다. 복도에는 싸늘한 정적만이 감돌았다. 평소라면 우당탕 뛰어다니며 소란을 피웠어야 할 영귀들은 오늘따라 조용했다. 새로를 통해서 대강 이야기를 전해 들은 영귀들은 각자 조용히 방에 머물며 움직임을 삼갔다.
어느덧 해가 지고 있었다.
어둠이 내리면 오늘 이 하루도 머지않아 지나갈 것이다.
단주는 어제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았고, 잠도 자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온종일 방 안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산 자는 며칠 내내 자지 않고 먹지 않으면 반드시 생명에 금이 간다. 조용히 문 앞을 지키던 흑제는 조심스레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한참을 기다렸음에도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 오지 않았다. 고민 끝에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침상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아 있는 단주의 뒷모습이 보였다.
단주는 다리를 꼬고 앉은 채 비스듬히 턱을 괴고 있었는데, 시선은 정면에 있는 침상에 고정되어 있었다. 간이로 만든 침상 위에는 앳된 얼굴을 한 소년이 곤히 잠들어 있었다.
기척을 느낀 것인지, 단주는 흑제에게 잠시 눈길을 주었다가, 금세 다시 소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어쩌면 잠이 든 것은 아닐까 하였으나, 단주는 아침에 보았던 자세 그대로였다.
쏟아지는 시든 햇볕이 소년의 얼굴을 쓸어 내리며 차츰 각도를 달리했다.
몇 시간째인지 알 수 없었다. 단주는 동이 트고 해가 지는 여태까지, 무언가에 붙들린 것처럼 저렇게 소년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면서도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는 것처럼, 탁자에 대고 손끝을 굴리는 행동을 반복하고 있었다.
방 안에 들리는 건 소년의 숨소리와 도르륵 도르륵, 규칙적이면서 강박이 느껴지는 일정한 소음뿐이었다. 단주의 얼굴은 무표정했고, 감정을 읽을 수 없었으나 흑제은 단주가 현재 몹시 불안정한 상태라는 것을 알았다.
“단주님.”
“…….”
“좀 쉬시는 것이 어떨지요.”
“…….”
단주는 묵묵부답이었다.
“외람된 말씀이오나 몸을 돌보셔야 합니다.”
소년의 의식은 굳게 닫혀 있었다. 어찌 된 일인지는 알 수 없으나, 범접할 수 없는 거대한 벽 같은 것이 가로막고 있는 것 같았다. 내내 말이 없던 흑제가 입술을 달싹였다.
“그이는 한동안은 눈을 뜨지 않을 듯합니다. 어쩌면 꽤 오랫동안…….”
그때, 줄곧 말이 없던 단주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가.”
폭주가 일어나면 며칠은 깨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고 했다. 언젠가 재겸이 직접 피를 쏟아서 폭주를 일으켰을 때도 폭주가 금세 멎었고, 다음날 곧바로 눈을 떴었다. 하지만 폭주가 끝까지 이어진 것도 아니고, 흑망조를 써서 중단되었음에도 하루가 지나도록 재겸은 눈을 뜨지 않았다. 그저 잠시 깊은 잠이 든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윤태희는 곤히 잠든 재겸에게 다가갔다.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허리를 숙이고, 소년의 가슴팍에 귀를 갖다 댔다.
너는 이곳에 있다.
쿵, 쿵, 쿵…….
규칙적인 심장박동 소리를 들으며, 윤태희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러나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재겸은 눈을 뜨지 않았다.
***
윤태희는 며칠 내내 재겸의 곁을 지켰다. 금세 눈을 뜰 것이라고 생각했던 재겸은 이틀째가 되도록 깨어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사흘째가 되던 날, 윤태희는 결국 몸을 일으켰다.
윤태희는 흑제를 불러 재겸을 지켜보라는 말을 남긴 뒤 다른 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윤태희가 자리를 옮긴 곳은 서가가 있는 곳이었다, 누각에 찾아온 손님을 맞이하던 방이기도 했다. 윤태희는 손으로 주렴을 걷으며 더욱 안쪽으로 깊숙이 있는 방 안에 들어갔다.
비어 있던 옷걸이에는 적색 두루마기가 걸려 있었다. 지난 며칠 사이에 영귀가 다시 가져다 놓은 듯했다. 물에 담가 핏물을 빼냈음에도 두루마기는 여전히 어둡고 선명한 적색을 품고 있었다. 윤태희는 자신의 아버지, 그리고 사랑하는 소년의 피로 물든 옷을 만져 보았다.
“…….”
무감한 얼굴로 옷자락을 만지작거리던 윤태희는 탁자 앞에 앉았다.
지난 며칠간 윤태희는 깨어나지 않는 재겸을 보며 아주 많은 생각을 했다. 자신의 생애에 대하여, 아주 오래전에 죽은 어떤 이들에 대하여, 사랑하고 증오하던 할아버지에 대하여, 그리운 수살귀에 대하여, 사랑하는 소년에 대하여, 그리하여 자신의 모든 것에 대하여.
윤태희는 담배 한 대를 꺼내 물었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느리게 피웠다.
넓은 탁자 위에는 장기판이 놓여 있었다. 장기판은 꽤 빼곡했고, 각각의 자리마다 장기 말이 놓여 있었다. 일전에 펼쳐 놓았던 포진 그대로였다. 윤태희는 하나씩 설계해 두었던 장기 말을 한 곳으로 어그러트렸다. 초와 한, 원래대로 통 속에 쏟아붓고 장기판을 비웠다.
어려운 문제를 맞닥뜨리거나 머릿속이 복잡할 때면 장기를 두곤 했다. 한 번은 초를 잡고, 그다음은 한을 잡고, 그렇게 자신을 상대로 번갈아 수를 두다 보면 필시 보이지 않던 것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이 있다. 윤태희는 몇 번이나 판을 엎고, 장기말을 어그러트렸다.
재겸과 수향이 다시 만나기로 약속한 날은 어느덧 이틀 뒤였다.
그날은 공교롭게도 목패를 빼앗기로 한 날이기도 했다. 남은 시간은 이틀뿐이었다. 이틀 뒤에는 모든 것을 끝내야 한다. 재겸이 있어야만 했다. 윤태희는 이틀 안에 재겸이 돌아올 것이라고 확신했다. 아니, 스스로 확신이라는 착각을 할 만큼 강렬하게 염원하고 있었다.
아직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
그러니 처음부터 하나씩 다시 시작해야 한다.
200년 전의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면서 많은 진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걸러낼 것은 거르고, 쓰임이 있는 것만을 손에 남겨두어야 한다. 윤태희는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했다.
재앙신은 아주 오래전부터 재겸의 몸 안에 있었다.
재겸이 불로불사의 몸이 된 근본적인 이유는 묘정이 이중으로 건 봉인 때문이었다. 재앙신과 재겸의 혼은 하나로 붙어 있으며, 더 이상 동화되지 못하도록 울타리를 세웠고, 마지막 안전장치로 성명자의 권능을 빌어 재앙신의 이름을 부른 뒤, 불변하라는 주문을 내렸다.
그리고 나는 마지막 방상시의 후계이다.
방상시의 탈을 되찾기만 한다면 틀림없이 방법이 있을 것이다.
중요한 건 탈을 되찾아야 한다는 것과 반드시 수향을 대적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로써 목적은 아주 선명하고 명확해졌다. 탈을 되찾고 군(君)을 지키는 것. 그러나 이제는 이 모든 일이 제 소관 밖으로 벗어난 것만 같았다. 언젠가 재겸은 말했다. 세상은 원래 악의적이라고. 이제는 그 말뜻을 알 것 같기도 했다. 윤태희는 텅 빈 장기판을 응시했다.
반듯한 손가락이 장기 말을 손안에 쥐고 굴릴 때였다.
“얘, 선오야.”
손이 멈칫했다. 무표정한 얼굴로 정면을 응시하던 윤태희가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손목 부근에 희미한 간지럼이 일었다. 옷소매를 걷고 손목으로 시선을 내렸더니 좁쌀처럼 조그맣고, 핏방울처럼 붉은 눈이 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시시가 몸을 뒤채며 혀를 날름거렸다.
“그 애는 돌아오지 않을 거다.”
거여도에서 경고를 남겼던 시시가 눈을 뜬 건 꽤 오랜만의 일이었다.
“…….”
윤태희는 눈을 가늘게 뜨고 시시를 내려다보았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아느냐고 물으려는데, 문득 기묘한 위화감이 들었다.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직감. 혹은 깨달음 같은 것. 윤태희는 그제서야 자신이 무언가를 놓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묘정, 휘림, 수향, 방상시, 재앙신. 모든 것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러나 단 하나, 시시에 대한 것은 없었다.
“시시.”
불현듯 윤태희는 시시와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시시는 최초의 권속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무신도 속에서 튀어나온 시시는 가신이 되어 주겠노라 자처하며 선오의 몸 속에 깃들었다. 시시는 선오에게 많은 것을 알려 주었다. 시시는 부적을 깨뜨리는 법을 알려 주었고, 난생 처음으로 바깥 세상에 발을 딛게 해 준 존재였다. 길을 잃고 추위에 떨 때는 오두막으로 안내해 주었고, 귀신을 권속으로 삼는 법을 알려 주었다. 자신이 본향의 표식이 있는 인간이라는 것도 시시를 통해서 알게 된 사실이었다.
생각할수록 무언가 이상했다.
문득, 시시가 처음부터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윤태희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모든 일의 시작은 그 겨울날 문을 열고 나와 불을 일으킨 순간부터 시작되었다. 문을 열 수 있도록 도와준 이는 시시였다.
이후에도 시시는 윤태희가 방향을 잃고 헤맬 때마다 어김없이 눈을 떴다.
시시는 위기의 순간에서 몇 번이나 구해 주었고, 위험하다는 경고를 남겼다. 저를 이렇게 돕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여 몇 번이고 물었던 적이 있다. 그런데 그때마다 시시는 본향이 사랑하는, 본향의 표식이 있는 인간이기에 길잡이가 되어 주는 것이라는 말을 반복했다.
그렇다면 본향의 표식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평범한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는 것. 오직 선택받은 자만이 얻을 수 있는 것. 어쩌면 그것은…….
“너, 정체가 뭐야?”
시시, 그 자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