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불 (318)화 (318/348)

#318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태희 씨! 태희 씨?”

일방적으로 전화가 끊기자, 정주의 낯이 덜컥 굳었다.

“정주 님, 왜 그러세요?”

“뭐야, 갑자기 이게 무슨….”

최근 며칠간 재겸은 집에 들어오지 않았고, 연락도 되지 않았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닐까 하여 좌불안석으로 며칠을 보낸 상황이었다. 그러다 걸려온 윤태희의 전화에 반가웠던 것도 잠시, 정주는 하얗게 질린 낯으로 서둘러 전화를 다시 걸었다. 그러나 잠깐 사이에 윤태희의 휴대전화는 꺼져 있었다. 재겸에게도 전화를 걸었지만, 연결이 되지 않았다.

그때 메산이가 “괜찮으세요?” 하고 다가왔다. 키가 작달막한 메산이와 땅바닥에 엎어져 있는 남생이를 보고 있으려니, 이 아이들에게 위험한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나 겁이 났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앞으로 많이 위험할지도 몰라요. 하지만 오늘 하루가 지나면 모든 게 끝날 겁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몸을 피할 만한 곳이 있으면 피신해 있어요. 재겸이도 그걸 원할 거예요.’

멍하니 윤태희의 말을 곱씹던 정주는 방으로 들어가 커다란 짐가방을 하나를 가져왔다. 호문… 호문을 열고 피신해 있으면 될까? 정주는 가방 안에 짐을 넣으며 경황없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재겸과 연락이라도 되면 좋을 테지만, 연락이 되질 않는다면 호문 안에 피신해 있는 것이 최선이리라. 정주가 어둡게 굳은 얼굴로 짐을 챙기자, 메산이가 달려왔다.

“정주 님, 어디 가는 거예요?”

“호문을 열 거야! 얼른 준비해!”

“네? 왜, 왜요?”

“나례청에… 전쟁이 일어날 거래.”

“예? 그, 그럼 나리께선요?”

“재겸이가 피신해 있으라고 했대.”

“저, 저희만요?”

“그래.”

메산이는 멍하니 입을 벌린 채 눈을 깜빡였다. 유남생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수선스러운 이는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걸 일찍 깨달은 정주뿐이었다. 정주는 서랍장을 열어 짐을 챙기기 바빴다. 그때, 메산이가 정주의 팔에 덥썩 매달리며 울먹거렸다.

“나, 나리께서 혹시 위험하신 거면요?”

“…뭐?”

“만약에 크게 다치시기라도 하면요…?”

“하, 하지만 재겸이가….”

“이대로 저희랑 헤어지시려는 거면요?”

그게 무슨…

정주가 멈칫하며 메산이를 내려다볼 때였다.

“엇!”

유남생이 갑자기 외마디 소리를 내며 입을 벌리는가 싶더니,

“편지! 편지가 있습니다요!”

난데없이 꽥 소리를 질렀다. 정주가 화들짝 놀라며 유남생을 쳐다보았다.

“뭐? 넌 또 갑자기,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불현듯 유남생의 머리에 스친 게 있었다.

‘혹시 유서입니까요?’

얼마 전, 재겸은 식탁에 앉아 편지를 쓴 적이 있었다. 재겸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그때 읽어보라며 편지를 숨긴 장소를 알려주었다. 유남생 혼자 절대 못 올라갈 위치였다.

“주인님께서 쓰신 편지, 편지가 있습니다요!”

“뭐? 편지?”

정주와 메산이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예삿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재겸은 말없이 떠났으면 떠났지, 이렇게 편지 같은 걸 남겨 두고 가는 성격이 아니었다.

“어디, 어디 있는데?”

유남생이 허둥지둥 발갈퀴를 흐느적거리며 앞장섰다.

“이, 이쪽에 있습니다요! 이리 와보십쇼!”

정주와 메산이는 사색이 되어 유남생의 뒤를 좇았다.

엉금 엉금….

“야 깽알아! 빨리 좀 걸어가 속 터져 죽겠네!”

“어엉… 이보다 어떻게 더 빨리 걷습니까요….”

진정한 거북이걸음이었다. 보다 못한 메산이는 발만 동동 구르다가 유남생을 번쩍 안아들었다. 유남생이 지휘하듯이 “저기… 저 장롱! 세번째 서랍!” 하고 위치를 알려 주었다.

세 식구는 바닥에 편지를 놓고 머리를 맞댔다.

편지 제일 위에는 제목처럼 <인사>라는, 큼지막한 글씨가 쓰여 있었다. 다소 삐뚤빼뚤하게 쓰인 글씨는 맞춤법과 띄어쓰기가 군데군데 틀려 있었다.

메산이는 침을 꼴깍 삼키며 편지를 들여다 보았다. 이것은 메산이에게 있어 난생 처음으로 받은 편지였다. 예전 같았으면 글을 몰라서 편지를 읽지 못했을 것이다. 한글 공부를 시작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메산이는 더듬더듬 느리게 글자를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너희에게 그동안 못한 말이 있어

말로만 하면 나중에 잊어버릴 테니까

꼭 기억해주었으면 해서 이렇게 종이에 쓰려고 해

지금까지 나랑 함께 있어 줘서 고마워

그리고 내가 먼저 떠나게 되어 미안해

이제는 나를 기다리지 않아도 돼

메산이 정주 말 잘 듣고 밥 많이 먹고 맨발로 다니지 말고 행복해야 해

정주 늘 차 조심해야 해 너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즐겁게 누리며 살아

남생이 계속 여기 함께 있어도 돼 메산이랑 정주랑 오래오래 잘 지내

그리고 태희를 잘 부탁해 왜냐하면 태희는 나에게 많이 소중해

나를 여기까지 살게 해 줘서 고마워

안녕히 잘 있어

짧은 글이었지만,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썼다는 것이 느껴지는 글이었다.

“안녕히?…….”

메산이가 사색이 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

“야, 그만 좀 해.”

어둡고 흐린 하늘, 장마는 계속되었다.

“대체 뭐가 그렇게 슬픈 건데?”

재겸은 여전히 심연 속에 있었다. 멈추지 않는 장마 속에서, 몇 날 며칠이 지나도록 우산을 들고 있던 소년은 지친 기색으로 땅에 철퍼덕 앉으며 물었다. 위로를 위해서라거나, 괜찮다고 말해주려는 것이 아니었다. 소년으로서는 순수한 의문에서 비롯된 질문이었다.

“나는 네가 왜 그렇게 슬퍼하는지 이해가 안 가. 너는 그 당시에 묘정을 죽이고 싶어 했어. 게다가 묘정은 원래 죽기로 되어 있었고, 네가 죽이지 않았어도 묘정은 어차피 죽었을 거야. 그땐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걸 너도 알고 있잖아. 그런데 왜 그렇게 슬퍼하는 거야?”

분명 묘정이 행복하길 바란 적이 있었다.

만약 그와 헤어지게 되더라도, 그가 온전히 행복한 가족을 꾸리기를 바랐다. 그는 틀림없이 좋은 아버지가 될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었다. 한때는 그 자리를 욕심낸 적도 있었다.

그러나 묘정은 사랑하는 연인을 잃었고 제 자식을 직접 땅에 묻었다.

“나는 묘정에게도, 태희한테도 죄인이야.”

윤태희의 곁에 있을 자신도, 자격도 없었다.

그 아이가 무슨 생각으로 흑망조를 썼는지 그 정도는 알고 있다. 다시는 속이거나 숨기는 일 따위 없을 거라고 하더니… 역시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재겸은 인제 와서 윤태희를 탓하고 싶진 않았다. 그런 진실이라면 저라도 윤태희가 잊어주기를 바랐을 것이므로.

그러나 소년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물었다.

“네가 왜 죄인인데?”

재겸은 무릎에 얼굴을 묻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윤태희에게서 아버지를 앗아간 사람은 저였다. 묘정을 배신한 사람도 저였다. 그런 주제에 그 아이를 좋아한 것도 저였다. 재겸은 이런 스스로를 용서하고 싶지 않았다.

“너도 다 봤으니까 알 거 아니야.”

“알아, 봤어.”

소년이 재겸의 앞에 쪼그려 앉으며 말을 이었다.

“근데, 그게 네가 본 전부야?”

너는 본래 묘정의 손에 죽었어야 했어.

어쩌면 묘정의 눈에 처음 띄었던 그 순간에 말이야. 하지만 묘정은 너를 죽이지 않았어. 아니, 죽이지 못했지. 처음에는 그저 동정이거나 연민이었을지도 몰라.

그 감정이 뭐였든 간에, 어쨌든 중요한 건 묘정이 찰나의 순간에 망설였다는 거지. 그리고 그 한순간의 알량한 망설임이 묘정의 삶을 바꾼 거고.

묘정은 방상시의 핏줄을 물려받아 태어날 때부터 쓰임이 정해져 있었어. 방상시는 본향의 종이자 본향의 수레, 본향의 전령이야. 본향이 원하는 흐름이 있다면, 묘정은 그 흐름을 실행해야만 해. 그래서 이전까지 묘정의 삶은 단 한 번도 묘정의 것이었던 적이 없었어.

그런데 문제는 묘정 그 녀석이 신이 될 만한 그릇이 아니었다는 거야.

왜냐면 묘정은 너무나도 인간적이었거든. 작고 어리고 연약한 것에 마음을 쏟고야 마는, 너무나도 평범한 인간이었지. 방상시라면 방상시답게 묘정은 평생을 빈 수레로 살았어야 했어. 하지만 묘정은 텅 비웠어야 할 제 안에 무언가를 채워 넣고 말았지. 사랑이라는 감정을 깨달아 버린 거야.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피하지 않았어. 그건 묘정이 선택한 거야.

그러니까 그건 네 죄가 아니야.

가만히 소년의 말을 듣고 있던 재겸이 중얼거렸다.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데.”

“묘정은 자기 혼자서 운명을 거슬렀을 뿐이야.”

“휘림을 만나서 아이를 낳고, 그래서 그랬다는 거야?”

“아니, 그것뿐만이 아니야.”

“…뭐?”

“너를 사랑했잖어.”

소년이 시큰둥한 어조로 말을 뱉었다.

“…….”

재겸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눈앞의 소년을 바라보았다.

한참 동안. 아주 오랫동안. 멍하니…….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소년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하늘을 힐끔 올려다보는가 싶더니, 이내 재겸에게 내어주고 있던 우산을 접었다. 우산을 휘휘 휘두르며 물기를 탁탁 털었다.

영영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장마가 끝났다.

어느샌가 비가 그쳐 있었다.

발치에 빗물이 고여서 웅덩이가 생겨나 있었다. 맑은 웅덩이 속에서 푸른 하늘과 구름이 흘러가는 광경이 보였다. 거울을 응시하는 것처럼 웅덩이를 쳐다보고 있던 재겸은 문득 물에 비친 제 모습을 마주했다. 자신과 눈이 마주치자, 재겸은 제 눈동자 속을 들여다보았다.

그 속에는 유년의 기억이 있었다. 저를 바라보는 묘정의 시선이 있었다. 나무 위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을 때, 저를 올려다보던 묘정의 눈동자를 기억한다. 저 밑에서, 흔들림 없이 올곧던 눈은 조용히 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얼마나 고민했는지 모른다.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고 고민하다가 그 품에 뛰어내렸을 때, 저를 받쳐 주던 단단한 팔과 따스한 온기, 온화한 미소를 기억한다. 밥을 덜어주던 손길, 이불을 목 끝까지 올려주던 감각을 기억한다. 윗목에서 잠이 들면 조심히 안아서 아랫목에 뉘어주던 그 품을 기억한다.

귀한 아이야. 나와 함께 가겠니?

“맞아.”

날이 춥구나. 집에 가자꾸나.

“맞아…….”

모든 순간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묘정이… 나를 많이 사랑해줬어.”

겸아, 참으로 잘 태어났다.

“묘정이 많이, 많이…….”

네게 부모복이 없는 것이 내게는 복이로구나.

“나를 많이 사랑해줬어…….”

재겸이 설핏 웃었다.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며 멍하니 말을 곱씹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목소리가 점점 떨리는가 싶더니 턱 끝이 일그러졌다. 번져 나간 웃음은 울음이 되었다.

“묘정이 나를 많이 사랑해줬어…….”

재겸은 푸른 하늘 아래서 한참을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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