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1
“…윤 수석님?”
강이빈이 멍하니 입을 열었다. 어둠 속에 서 있는 인영은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눈을 감았다가 뜨며 안력을 돋울 때였다. 그런데, 어느새 인영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 있었다.
“수, 수석님?”
당황한 눈으로 주변을 살폈으나, 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잘못 봤나? 강이빈의 주변에 있는 인물 가운데 이매탈을 쓰는 이는 단 한 명뿐이다. 어쩌면 착각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자신이 본 게 맞다면 윤태희는 벽사단의 주인이 입는다는 적색 두루마기를 입고, 신로에 서는 금기를 범한 것이다. 강이빈이 멍하니 입술을 달싹였다.
“설마 그럴 리가…….”
그러나 만약, 헛것을 본 게 아니라면?
***
어쩌면 여느 때와 다름없는 평범하게 지나가는 하루였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땅거미가 지고, 어둠이 내리기 전까지는 그랬다. 기이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도, 나례청 상황실로 연락이 빗발치기 시작한 것도 해가 완전히 저물고 난 후의 일이었다. 각지에 흩어져 있는 나자들에게서 불이 난 것처럼 전화가 걸려 와 업무가 마비될 정도였다.
상황실로 걸려 온 전화는 하나같이 똑같은 내용이었다.
“나례청 상황실입니다. 용건을 말씀하세요.”
방금 전에 이상한 소문을 들었다, 라는 것이었다.
숨어 있던 귀신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다니며 ‘오늘 밤 나례청이 무너질 것이다’라는 말을 퍼뜨리고 있었다. 심상치 않은 조짐을 느낀 암행부 나자들은 몇몇 귀신을 붙잡아 어디서 그런 말을 들었느냐고 물었으나, 그저 ‘계시가 있었을 뿐이다’라는 대답만 돌아올 뿐이었다.
오늘 밤 나례청이 무너진다.
이 요언(妖言, 민심을 혼란하게 만드는 요사스러운 말)은 귀신들로부터 시작되었다.
새로는 신출귀몰한 마당발이었다.
새로는 알고 지내던 귀신들을 불러 모아 선대 나례청과 방상시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요약하자면 선대의 방상시는 본디 어느 한쪽만을 위한 신이 아니라 인간과 귀신, 모두를 아우르는 신이었으나 현대 나례청에서는 이러한 진실을 숨긴 채 질서를 어지럽히고 있다. 진정한 방상시는 벽사단의 단주이며, 나례청의 새 주인이 될 것이다, 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이 소문이 바깥까지 퍼지게 된 데에는 묘귀들의 공이 컸다.
“자자, 친구들, 그럼 부탁하겠슴다!”
말을 마친 새로는 이 이야기를 널리 널리 퍼뜨려달라 부탁했다. 묘귀들은 매우 날쌘 데다 저마다 활동 영역이 있어 말을 실어 나르는 데 제격이었다.
“저어, 묘귀 친구들? 제 말 듣고 있슴까?”
다만…… 다루기는 쉽지 않을 뿐이다. 묘귀들은 뒷발로 귀를 북북 긁으며 새로의 말을 듣는 둥 둥 마는 둥 했다. 심드렁한 묘귀들을 일깨운 것은 숭인1동 골목대장 살찐이였다.
“모두가 알다시피 얼마 전, 벽사단 나리들께서 핍박받던 우리의 동지 김 짱돌을 지켜 주셨다. 영귀님들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인간의 쓸개를 빼먹는 끔찍한 집단이라는 무고를 뒤집어쓰고 이곳에서 쫓겨나거나 나례청의 나자 놈들에게 해를 입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꼬리를 휘휘 움직이던 살찐이가 험악한 얼굴로 묘귀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니 우리는 은혜에 보답하여야 한다!”
살찐이의 설득이 통했는지 묘귀들이 므앵,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묘귀들은 어둡고 좁은 골목을 누비고 다니며 바깥으로 이야기를 퍼 날랐다.
구전으로 시작된 이야기는 이지가 있는 귀신들 사이에서 파다하게 퍼져나갔다. 그러다 나례청에 원한이 있는 귀신들을 거치며 그 내용이 조금씩 부풀려졌는데, 나중에는 ‘방상시가 나례청을 무너트림으로써 인간을 벌하고 귀신의 편에 설 것이다’라는 방향으로 소문이 퍼지게 되었다. 이지가 없는 잡귀와 객귀들은 대충 주워들은 내용을 노래처럼 흥얼거렸다.
“나례청이 무너진다네.”
“나례청도 끝장이라네.”
“방상시가 돌아온다네.”
처음에는 그저 떠도는 풍문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때마침 봉수대에 푸른 불이 일었다. 산꼭대기에서 시작된 불은 평범한 인간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괴이한 것이었다. 파랗게 일렁이는 불꽃은 산 자에게 알 수 없는 공포를, 죽은 자에게는 기이한 경외를 주었다. 그것은 마치 변란을 알리는 신호탄처럼 보였다.
나례청에 투서 한 장이 날아든 것도 그 무렵이었다.
종이에 적힌 것은 흘려 쓴 듯한 글씨로 적힌 여덟 글자가 전부였다.
方相氏 再臨於穢土
방상시 재림어예토
마침내 벽사단이 코앞까지 왔음을 알아차린 나례청은 긴급비상사태를 선포했다.
가장 최우선으로 지켜야 할 것은 시민들의 안전과 종묘의 보존이었다. 벽사단의 습격이 현실이 된다면, 자칫하다간 아무것도 모르는 평범한 사람들까지 휘말릴 수도 있었다.
종묘 주변은 수많은 빌딩과 상가가 즐비해 있는 서울의 중심지였다. 만일을 대비하여 도심의 피해를 막아야 했고, 이곳은 세간에 알려져서는 안 되는 영역이었다.
전시 태세에 돌입한 정화부와 부적부에서는 종묘와 종로 일대에 거대한 결계를 치고, 내부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바깥에서 보았을 때는 내부 상황이 보이지 않게끔, 천을 덮듯이 종묘 전체에 투명한 방벽(防壁)을 씌우기로 했다.
이는 나례청 역사상 단 한 번도 전례가 없던 일이었다. 엄청난 규모의 작업이었으므로 백여 명이 넘는 인원이 한꺼번에 투입되었다.
부적부와 정화부가 방어에 힘을 쏟는 동안, 각 부서의 부장들은 한자리에 모여 곧 있을 벽사단의 습격을 막기 위한 긴급회의를 열었다. 연관된 정부 부처에 협조 요청을 보내고, 임산부와 미성년자, 초라니와 수습 나자를 제외한 모든 나자들에게 비상 동원령을 내렸다.
정화부에서는 의료 지원을, 암행부에서는 경계와 엄호를, 부적부는 전력 지원을, 제구부에서는 보급을 담당했다. 전면전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큰 현 상황에서 전투직인 축역부의 역할이 가장 막중했다. 회의를 마친 석주련은 축역부에 소속된 수석 나자 전원을 소집했다.
그렇게 단 한 명을 제외하고, 축역부 수석이 모두 한곳에 모였다. 자리에 없는 사람은 윤태희뿐이었다. 고작 한 명의 빈자리였으나 그 공백이 가져다주는 무게감은 남달랐다.
각 부서의 1팀 수석은 같은 수석 직급 가운데서도 가장 핵심이 되는 위치였다. 제1팀의 수석이 되는 자가 차기 수장으로 내정된다고 할 만큼 그 자체로서 상징성이 있는 자리였다.
다른 축역부 수석들은 윤 수석이 왜 오지 않는가 의아해하는 기색이었다. 그러나 석주련은 윤 수석에 대해 어떤 말도 꺼내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던 사람인 것처럼.
***
수석들과 회동을 마친 석주련은 청장실로 향했다.
긴 복도를 걸어 청장실에 도착한 석주련은 문을 열었다. 그러자 고즈넉하고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졌다. 긴박한 전운이 감도는 본청과는 달리 현실과는 완전히 단절된 세계 같았다.
때마침 청장은 마당에 나와 맑은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보였다. 뒷짐을 지고 밤하늘의 별을 구경하던 청장이 입을 열었다.
“아가, 어서 오렴.”
청장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석주련이 고개를 숙였다.
“바깥에 큰 소란이 있는 모양이구나.”
“벽사단에서 본청을 노리고 있는 듯합니다.”
석주련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바깥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보고했다. 방상시가 돌아온다는 투서가 날아들었고, 곧 벽사단이 움직일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청장이 미소를 지었다.
“방상시가 돌아온다, 라…….”
청장이 희미하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내 기회를 줬건만…….”
알아들을 수 없는 중얼거리던 청장은 걸음을 옮겼다. 석주련은 청장의 뒤를 따랐다. 마루를 딛고 방 안으로 들어선 청장은 좌상 앞에 앉더니, 석주련에게 차를 한 잔 내주었다.
“아가.”
“예.”
“기억하느냐?”
청장이 찻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때도 푸른 불이 있었지.”
청장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던 석주련이 멈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
푸른 불. 잠시 잊고 있었던 오래전의 예언을 떠올릴 때였다.
“걱정하지 말아라, 이번에도 별일 아닐 것이다.”
넌지시 말을 건넨 청장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잠시 정적이 찾아 왔다. 어디선가 풀벌레가 울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청장은 이제 막 생각이 났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아, 헌데, 주련아.”
“예.”
“너는 벽사단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느냐?”
석주련이 멈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
한 차례 침묵이 흘렀다.
“저는….”
석주련이 한참 만에 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저는, 알지 못합니다.”
청장은 말없이 석주련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그것이 정말이냐고 묻는 듯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눈이 속을 훤히 꿰뚫어 보는 듯하여, 석주련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내렸다.
청장실에 오기 전부터 석주련의 심장은 빠르게 뛰고 있었다. 평정심을 되찾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었으나 손에는 땀을 쥐고 있었다. 반면에 청장은 시종일관 여유를 잃지 않고 있었다. 좌상 위에 길쭉하고 납작한 나무 조각을 탁, 소리가 나도록 올려놓았다.
그 순간, 석주련의 눈이 살짝 크게 뜨였다.
“나는 안단다.”
반질반질하게 깎은 나무 조각에는 아무것도 쓰여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석주련은 저게 무엇인지 한눈에 알아보았다. 저것을 반대로 뒤집는다면, 누군가의 이름이 적혀 있을 것이다.
“방상시를 참칭하는 이가 누구인지 말이야.”
[공지]
오늘 연참 예정이었던 322화는 작가님의 건강 사정으로 3월 12일(토) 오후 6시에 이어서 연재될 예정입니다. 도서 이용에 참고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