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3
연옥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환각에 걸린 것처럼 눈앞이 흐려졌다. 마치 거대한 중력이 몸을 짓누르는 듯했다. 구슬픈 거문고 소리가 송곳처럼 귓속을 파고들었다.
알 수 없는 향수를 일으키는 선율은 지옥도를 선사해 주었다. 정신력이 약한 나자들은 괴로움에 신음하다가 의식을 잃었고, 대부분은 토를 하거나 패닉에 빠졌다.과거의 안좋은 기억이 신물처럼 올라오는 탓에 정신적인 타격이 컸다.
이영신이 입을 틀어막고 고통스러워할 때였다.
“우리 연옥이는 거문고도 잘 뜯네.”
어느 순간, 혼란한 정신을 비집고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이제 그만해도 돼.”
구슬프고 처연한 연주가 멎었다.
“단주님 언니야!”
거문고 연주에 여념 없던 연옥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단주가 자리에서 일어난 연옥을 향해 양팔을 벌렸다. 연옥은 기다렸다는 듯이 폴짝 뛰어올랐다. 단주는 아주 익숙하다는 듯이 연옥을 한쪽 팔로 훌쩍 받쳐 안았다.
“나 잘했어? 잘했다고 해죠.”
연옥은 단주의 목을 둘러 안으며어리광을 부렸다. 우리 연옥이는 못 하는 게 없네? 연옥이는 뭘 먹고 이렇게 씩씩하고 예쁠까, 그치. 우리 연옥이가 다 했지…….
“그럼 연옥이는 이제 다가 언니 옆에 가 있을까?”
여기저기서 괴로운 신음이 울려 퍼지는 와중에 끼어든 다정한 음성은 몹시도 이질적이었다. 어디서 많이 들어 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분명히 알고 있는 목소리였다.
이영신이 이를 악물고 두 눈에 힘을 주었다. 잠시 아득해졌던 정신이 제자리를 찾았다.
간신히 정신을 잡고 힘겹게 고개를 들어 올렸을 때였다. 사방이 뚫린 악공청의 정중앙, 자세로 아이를 한 팔로 안고 있는 누군가의 모습이 보였다. 이영신은 순간 제 눈을 의심했다.
수트 위에 겹쳐 입은 적색 두루마기와 이매탈.
“하이.”
***
종묘 내부에 들어오기 전, 윤태희는 종묘 담장을 따라 순찰 중이던 암행부 나자 세 명을 발견했다. 이매탈을 쓰고 있던 윤태희는 순찰 중인 세 사람 앞에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수고 많으십니다.”
갑자기 튀어나와 놀란 나머지 나자 셋이 몸을 뒤로 물렸다. 잠시 얼굴에 경계가 바짝 솟은 기색이었으나, 얼굴에 쓴 탈을 보고 같은 나자임을 알았는지 경계가 살짝 허물어졌다.
셋은 자신의 앞에 있는 이가 축역부 나자라는 사실은 알았지만, 그가 축역부 수석 윤태희라는 것은 알지 못했다. 셋에게 태연하게 인사를 건넨 윤태희가 갑자기 놀란 음성을 냈다.
“어! 저기 하늘에….”
윤태희가 대뜸 손을 들며 나자들의 뒤쪽 어딘가를 가리켰다.
세 나자가 흠칫하며 윤태희가 가리킨 방향을 휙 돌아볼 때였다. 기척도 없이 다가온 강한 힘이 세 사람의 등 뒤에서 목을 차례대로 후려쳤다. 담장 그림자 속에 숨어 있던 흑제의 소행이었다. “윽!” 소리와 함께 세 사람은 순식간에 의식을 잃고 그 자리에 털썩 쓰러졌다.
윤태희는 쓰러진 세 사람에게 가까이 갔다. 잠시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아 재킷 안 주머니와 이곳저곳을 뒤적거리던 윤태희는 이내 카드 목걸이로 이루어진 출입증을 찾아냈다.
윤태희는 뺏어 낸 출입증을 무성의한 손길로 아무렇게나 휙 내던졌다. 몸을 일으킨 윤태희가 쓰러진 두 사람을 구둣발로 툭 걷어차며 “이제 들어가도 돼.” 하고 턱짓을 했다.
흑제가 세 명의 의식을 깊게 가라앉히는 작업을 했다. 그런 다음에 흑제, 새로, 패현은 각각 차례대로 한 명씩 몸을 차지했다. 새로는 마음에 안 드는 옷을 입은 듯한 표정이었다.
“단주님, 꼭 이렇게까지 해야 됨까?”
스타일이 맘에 안 든다며 새로가 울상을 짓자, 단주가 작게 웃었다.
“조금만 참아 줘.”
부적부에서 발급하는 목걸이로 된 명찰에는 호신부(護身符)의 기능이 있기 때문에 귀신에 씌이거나 빙의되는 일을 막는 효과가 있었다. 이것을 몸에 지니고 있을 때에는 귀신이 몸 안으로 침입할 수 없다.그만큼 제법 강한 부적이어서 귀신이 직접 손대는 것은 어려웠다.
“이렇게 안 하면 아무리 너네라도 버티기 힘들 거야.”
종묘는 조선 시대에 국가 제사를 지내던 사당이자, 왕과 왕비의 신주를 봉안한 곳이다. 게다가 결계가 쳐진 상태이기에 귀신이 경내에 함부로 발을 들였다간 금세 맥을 못 추리게 될 것이다. 영귀이기에 그나마 버틸 수 있는 테지만, 그래도 오래 시간을 끌지는 못할 것이다.
목적지는 정전의 스무번째 칸.
정전까지 가기 위해서는 세 영귀가 길을 열어야 했다.
“가자.”
멀리서 거문고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 것은 그 무렵이었다.
연주가 멈추자 의식을 잃은 나자들을 제외하고 다른 나자들이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방금 전까지 사방이 트인 악공청 안에 서 있던 단주는 어느샌가 높은 기와지붕 위로 올라가 있었다. 곁에서 거문고를 연주하던 꼬마 귀신은 어느덧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바닥에 엎어져 신음하던 이영신이 고개를 들었다. 이매탈? 설마…… 탈 너머의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이영신을 발견한 윤태희가 어깨 근처로 손을 들더니, 손가락을 살랑였다.
“하이?”
매우 무성의한 음성이었다. 아까 전까지만 아이에게 다정하게 말을 건네던 사람과 같은 인물이라는 게 믿겨지지 않을 만큼, 목소리에서 온기라고는 한 톨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이영신이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입을 달싹였다.
“……윤 수석?”
이영신은 눈의 실핏줄이 터져 있고, 이마에 힘줄이 서 있기는 했지만, 의식만은 제법 명료하게 유지하고 있었다. 상당수의 나자들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상황에서 저렇게 버티고 있는 게 용했다. 평소 허당처럼 보일지라도 저런 모습을 보면 과연 수석이라고 할 만했다.
“대,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네가 왜…….”
그때, 지붕 꼭대기에 서 있던 윤태희가 기와지붕을 밟고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지붕에 깔려 있는 기왓장이 구둣발에 밟혀서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모두가 말을 잃은 채 달빛을 등지고 있는 윤태희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윤태희는 한 손으로 얼굴에 쓰고 있던 탈을 고쳐 쓰는가 싶더니, 검을 쥔 다른 손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한 번만 말할 테니 잘 들으세요.”
허공을 대고 검 끝을 겨눈 윤태희가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여기부터… 여기까지.”
악공청을 에워싸고 포진해 있는 나자들을 내려다보던 윤태희가 한 차례 영역을 지정해 주었다. 꽤 넓은 간격이었다. 검 끝을 일직선으로 그어 보이던 윤태희가 불쑥 말을 덧붙였다.
“검에 귀기를 실어 날릴 겁니다.”
뭐? 이영신이 멍하니 입을 벌릴 때였다.
“어디를 칠 건지 미리 말해주기까지 했는데, 못 피하면 등신이겠죠?”
말을 마친 윤태희가 검집을 빼서 뒤로 휙 내던졌다. 곧장 검을 휘둘렀다.
쿠구궁!
검에 실려 있던 귀기가 그믐달 형상으로 떨어져 나갔다. 친절한 예고에 몸이 먼저 반응했다. 악공청 주변에 모여 있던 나자들이 좌우로 갈라지며 반사적으로 몸을 날렸다. 직접적인 공격에 당한 이는 없었으나 주변은 온통 쑥대밭이 되었고, 뒤쪽의 건물이 무너져 내렸다.
갑작스러운 공격이었지만 미리 예고가 있었기 때문인지 대부분은 민첩하게 몸을 피할 수 있었으나, 나무와 건물이 부서지는 바람에 다친 이들도 있었다. 여기저기서 신음이 나왔다.
“윤태희! 너 제정신이야?”
간신히 몸을 피한 이영신이 바닥에 엎어져 꽥 소리를 질렀다.
“나자들끼리 공격하면 안 되는 거 몰라서 그래?”
“알지, 영신아. 내가 그걸 모를까.”
“그걸 아는 놈이,”
뭐 하는 거야, 라고 뒷말을 붙이려던 이영신이 멈칫했다.
“너, 설마…….”
그때, 윤태희가 손에 들고 있던 검을 들더니, 달빛에 비추어 보며 무감하게 중얼거렸다.
“뭐, 이 정도는 괜찮나 보네.”
이영신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 공격을 하겠노라며 친절하게 예고해준 이유.윤태희는 금기 안에서 자신이 움직일 수 있는 범위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가 알아보기 위하여 시험을 해보고 있는 것이었다.
“너 미쳤어?”
윤태희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아마도?”
금기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로 나례청을 돌파하는 일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윤태희는 힘을 자유롭게 쓸 수 없는 상태였다. 나자를 상대로 위해를 가하거나 예고 없이 귀기를 써서는 안 된다는 제약에서 벗어나지 못한상황에서는 모든 것이 불리했다.
만약 윤태희가 직접 귀기를 써서 위해를 가한다면 그에 상응하는 반동이 찾아올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나례청 내부에 들어가기도 전에 몸을 가누지도 못할 만큼 큰 고통이 찾아오리라는 것은 자명했다. 그 고통이 어느 정도인지는 이전에 한 번 겪어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반대도 마찬가지지.”
벽사단의 주인으로 이곳에 서 있었으나, 윤태희도 나자였다.
그 제약을 넘어서기 위해서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이영신은 모를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일들이 이제 와서는 전부 소용없는 일이 되었다는 것도. 애시당초 재겸을 끌어들였던 이유는 목패를 되찾기 위해서였음에도, 윤태희는 지금 목패도 재겸도 없이 이곳에 서 있었다.
불현듯 웃음이 나오려고 했다.
윤태희는 언제나 계산을 끝마친 뒤에야 움직이는 인간이었다. 무모하게 밀어붙이는 타입이 아니었고, 스스로도 그 사실을 알았다. 문득 누군가를 닮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