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불 (324)화 (324/348)

#324

축역부장실, 석주련은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손을 들어 힘없이 마른세수를 하던 석주련이 이마를 짚은 채 고개를 숙였다. 부장실 안에는 시계 초침 소리만이 유일하였으며, 데스크 위에는 서류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고질병과 같은 두통이 오늘따라 유독 심하게 느껴졌다.

청장과 나누었던 대화가 머릿속에 맴돌고 있었다.

“나는 안단다.”

좌상 위에 놓인 목패를 본 순간, 석주련의 눈이 거세게 흔들렸다.

‘방상시를 참칭하는 이가 누구인지 말이야.’

청장은 손끝으로 목패를 톡톡 건드리며 말을 이었다.

‘꽤 오랫동안 역모를 꾸며온 모양이더구나.’

석주련의 눈가 한쪽이 짧게 경련했다. 등줄기로 식은땀이 흐르는 듯했다. 뭐라도 말을 해야 한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벽사단의 주인이 누구인지 모른다고 시치미를 뗐다. 그러니 그에 걸맞은 반응을 보여야만 할 것이다. 청장은 ‘역모’라는 단어를 썼다.

방상시를 참칭하는 자. 즉, 벽사단의 주인이 나례청의 내부자임을 내포하는 단어였다. 이런 상황에서는 ‘그자가 누구입니까?’라고 묻는 것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반응일 것이다.

그러나 석주련은 좀처럼 입을 떼지 못했다.

그자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청장은 대답 대신 목패를 뒤집어 이름을 보여줄 것이다. 석주련은 목패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알고 있는 그 이름일 것이므로.

석주련은 한참 동안 대답을 하지 않았다. 청장이 눈썹 한쪽을 들어 올렸다.

‘누군지 별로 알고 싶지 않은가 보구나.’

‘…네, 알고 싶지 않습니다.’

저돌적인 대답이 의외였는지, 청장이 눈을 가늘게 뜰 때였다.

‘저에게 있어서는 쓸모없는 정보이니까요.’

‘쓸모가 없다?’

‘예. 인간이든 귀신이든, 벽사단의 주인이 누구이든 간에 저는 그자를 반드시 척결할 것입니다. 나례청에 위협이 되는 자라면 없애는 것이 마땅하지요. 역적이라면 더더욱 그래야 하고요. 그 누구라도 청장님께서 일구어내신 이곳에 함부로 발을 들일 수는 없을 겁니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석주련이 흔들림 없이 입을 열었다.

‘그러니 그자가 누구인가는 저에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청장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눈가의 주름이 접히며,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는 듯하던 날카로운 눈매가 천천히 허물어졌다. 청장은 여느 때처럼 부드러운 인상이 되어 있었다.

‘그래, 네 말이 맞구나.’

지금은 일선에서 물러나 지휘관 역할을 맡고 있었으나, 그도 한때는 현장에서 축역부 나자로서 군림하던 인물이었다. 그에게도 귀신을 쫓는 축역부 나자라면 누구나 부여받는다는 탈이 있었다. 전통 탈은 나례청의 상징이자 축역부 나자의 갑옷과도 같은 것이었다.

석주련은 손을 뻗어 제일 아래쪽에 있는 서랍을 열었다.

서랍 속에는 다소 낡은 탈 하나가 들어 있었다. 나무로 깎은 탈에는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한때는 덧칠한 물감의 색이 선명하였지만, 이제는 색이 흐려져 있었다.

석주련은 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만감이 교차했다. 실로 오랜만에 꺼내보는 것이었다. 불현듯 고집스러울 정도로 탈을 벗지 않던 녀석이 떠올랐다. 이 갑갑한 것을 본청 안에서 잘도 쓰고 다녔구나. 지금에 이르러 생각하면 우스운 일이다. 허술함을 가장하였으나 사실은 그 누구보다도 철저한 녀석이었다.

윤태희가 얼굴을 숨긴 데에는 필시 남다른 까닭이 있었던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야 석주련은 윤태희가 남들 앞에서 맨얼굴을 드러내기를 꺼려하던 이유를 비로소 알 것 같았다.

데스크 한쪽에 올려둔 호출기가 울렸다.

- 부장님, 주영입니다. 지금 악공청에…….

경내의 악공청에 적색 두루마기를 입고 이매탈을 쓴 자가 나타났다는 다급한 전언이었다. 석주련은 가만히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다 ‘윤 수석’이라는 단어가 들려온 순간이었다.

“…….”

결국, 석주련은 고개를 숙이며 눈을 감았다.

“윤태희는…….”

한참을 침묵하던 석주련이 입을 열었다.

“윤태희는 벽사단의 수괴로 의심되는바, 나자의 직무를 져버리고 귀신과 은밀히 내통하여 비밀리에 반란을 주도하였다. 따라서 나례청의 붕괴를 조장한 혐의에 따라 본청 행동강령 3조 2항에 의거, 지금 이시간부로 축역부 제1팀 수석 나자 윤태희의 직위를 해제한다.”

석주련은 천천히 손을 들어 얼굴에 탈을 썼다.

“벽사단의 수괴로부터 나례청을 사수하라.”

***

“어디를 칠 건지 미리 알려주기까지 했는데, 못 피하면 등신이겠죠?”

단주의 공격이 한 차례 주변을 휩쓸고 지나갔다.

나자들 틈에 숨어 있던 패현은 기함했다.

단주에게 무언가 계획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였으나 이런 방식일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방금 전, 나자들을 상대로 귀기를 실어날린 단주의 행동은 무모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다. 만약 한 명이라도 공격에 직접적으로 휘말렸다면 죽음과 같은 고통이 찾아왔을 것이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나자들은 몹시 동요하고 있었다.

벽사단의 주인이 붉은 두루마기를 입는다는 소문을 모르는 이는아무도 없었고, 축역부의 수석으로 군림하는 윤태희를 모르는 이 또한 아무도 없었다. 그의 얼굴은 모르더라도 그가 이매탈을 쓴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윤태희와 벽사단. 두 조합에 나자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나례청의 상징인 전통탈과 적색 두루마기는 몹시 잘 어울렸다.

같은 나자를 상대로 위해를 가하면 금기를 어긴 반동이 찾아온다. 그 사실을 알고서 나설 수 있는 사람은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서로 공격할 수 없는 상황이므로 어쩌면 동등한 처지에 놓여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머릿수로만 따진다면 오히려 우세한 건 이쪽이었다.

그러나 나자들은 윤태희를 눈앞에 두고도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 함부로 공격했다가는 나자로서 금기를 어긴 대가를 치러야만 할 것이다. 양쪽 다 리스크를 짊어진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승패를 가르는 것은 단 하나.

그것은 잃을 것을 두려워하느냐 마느냐일 것이다. 방어적인 태도로 임하며 몸을 사리는 쪽이 지는 싸움이었다. 윤태희는 금기의 범위를 가늠하여 이를 역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직접적인 피해를 주는 경우가 아니라면 반동이 찾아오지 않는 듯했다. 금기의 범위를 시험해 본 결과, 주변의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2차적으로 피해를 주는 것이라면 괜찮아보였다.

“윤 수석, 왜 네가 거기 있는 거야?”

그때, 이영신이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말했다.

“벽사단에 붙잡히기라도 한 거야?”

이영신은 필사적으로 부정하고 싶었다.

“나례청을 배신한 거냐? 아니지?”

벽사단 귀신들에게 홀렸거나, 윤태희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일어난 일일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러나 윤태희가 내놓은 답변은 이영신의 기대를 완전히 짓밟아 놓았다.

“아니, 배신이 아니지.”

윤태희가 가운처럼 걸치고 있던 두루마기를 살짝 집어 올리며 “왜냐하면 처음부터 이게 본업이었고.” 하더니, 이내 탈을 가리키며 “이건 부업이었으니까.” 하고 대답을 덧붙였다.

“미친…….”

이영신이 이마를 감싸 쥐며 허망하게 중얼거렸다.

“공무원은 겸직 금지라고, 새끼야….”

탈 속에서 나직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맞아, 그래서 이제 그만두려고.”

“그만두다니? 뭘?”

“소문 못 들었어?”

탈 너머의 시선이 또렷하게 빛났다.

“오늘밤 나례청이 무너진다는 소문.”

이영신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리는 순간이었다.

“나 이제 나자 그만하려고, 영신아.”

대답을 마친 윤태희가 다시 검을 들어 올렸다.

멍하니 굳어 있던 나자들이 뒷걸음질을 치며 자세를 잡았다. 공격이 올 것을 알고 있는 이상 가만히 당하고 있을 순 없는 노릇이고, 어떻게든 반격에 나서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단주가 나자들을 향해 연달아 검을 휘두를 때였다.

어느 순간, 윤태희가 살짝 몸을 틀더니 어깨를 움켜쥐었다. 예리한 무언가가 어깨를 살짝 스치고 지나갔다. 누군가가 귀기를 실어 반격을 해온 것이다. 윤태희는 상처 부근에 손을 가져갔다. 손바닥으로 상처 부위를 눌렀다가 떼자, 선명한 피가 묻어 나왔다. 그러나 두루마기의 색상이 핏빛과 흡사한 탓에 윤태희가 상처를 입었다는 사실을 누구도 알지 못했다.

“…….”

얼마간 말없이 손바닥을 내려다보던 윤태희가 고개를 들었다.

“방금 이거 누굽니까?”

나자들을 휘 둘러보던 윤태희가 무감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래요, 이렇게 용감한 사람도 한 명씩은 있어야겠죠. 그래도 각오는 하세요. 금기 어기면 뒤지게 아파요.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싶을 만큼. 겁주려는 게 아니라 겪어봐서 알아요.”

그래 봤자 때늦은 조언이었다.

“뭐… 나도 알고 싶지 않았지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나자 한 명이 심장을 움켜쥐며 비명을 질렀다.

“아아악—!”

그때였다.

어디선가 쿵, 쿵, 쿵, 하는 일정한 울림이 들려왔다.

저 멀리 어둠 속에서 수십, 수백의 인영이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그에 나자들은 지원군이 도착하였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들은 적색 두루마기를 입고 있었고, 얼굴에는 이매탈을 쓴 채 하나같이 윤태희와 똑같은 외양을 하고 있었다. 형운이 보낸 술지게미 병정들이었다. 병정들이 행군하듯이 비척비척 가까이 다가왔다. 나자들의 눈에 경악이 들어찼다.

달빛을 등지고 있던 단주는 고개를 들고 먼 곳을 응시했다.

이제는 정전으로 향할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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