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5
단주는 정전으로 향했다.
나자라면 정전 안으로 들어갈 때 동문을 통해야만 했으나, 평소와 달리 남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남문은 신이 드나드는 문이라고 하여 나자들에게는 출입이 금기시되는 문이었다. 패현과 새로, 흑제는 단주보다 앞서 걸으며 길을 열었다.
정중앙에 난 문을 활짝 열어젖히며, 윤태희는 정전에 들어섰다.
바닥에 돌이 깔려 있는 정전 일원은 넓고 광활하였으며, 중앙을 가로지르는 기나긴 신로가 펼쳐져 있었고, 신실(神室)이 길쭉하게 늘어서 있었다. 정전 일대는 아수라장이었다. 형운이 만든 술지게미 병정들과 나자들이 한데 뒤엉켜 각개전투를 벌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단주의 외형을 본떠 만든 술지게미 병정들은 나자들에게 큰 혼란을 야기했다. 남문 근처에 있던 나자들은 단주를 발견하였으나, 그들은 당장 눈앞에 있는 ‘단주’와 전투를 벌이느라 윤태희의 앞길을 막지 못했다. 윤태희는 쑥대밭이 된 정전을 가로질러 쭉 뻗은 신로(神路)를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여기저기서 우렁찬 고함 소리와 검과 검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흑제와 새로, 패현은 윤태희를 중심으로 둥글게 서서, 주인을 보위하며 길을 열었다.
이따금 그를 알아본 나자들이 뛰어드는 순간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공격하기 바로 직전에 행동을 멈췄다. 다가는 먼 숲속에 숨어, 마치 저격수처럼 단주에게 접근하는 이들을 물리치고 있었다. 작두칼로 생각을 잘라냄으로써 원거리에서 호위를 거들고 있는 것이었다.
“단주님, 오로지 앞만 보십시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적색 두루마기 자락이 휘날렸다. 어디선가 부적이 날아오면 새로가 팔을 휘둘러 부적을 파훼했고, 귀기가 스쳐 지나갈 때는 패현이 검을 휘둘러 튕겨냈다. 발밑으로 결계에 걸리거나 진이 발동하면 흑제가 곧바로 단주의 그림자를 원형으로 펼쳤다.
영귀들의 임무는 윤태희를 안전하게 나례청 앞까지 데려다 놓는 것이었다.
종묘는 죽은 자를 위한 공간이자 신주를 모시는 곳이기에 사람의 몸을 빌린다면 영귀라도 버틸 수 있었지만, 나례청 내부로는 귀신이 발을 들일 수 없다. 따라서 나례청 내부로 향할 수 있는 건 나자인 인간, 오직 단주뿐이었다. 단주를 나례청 안으로 보내고 나면, 이 일대를 정리하는 건 영귀들의 몫이었다. 영귀들은 단주를 정전의 스무 번째 칸 앞으로 인도했다.
윤태희는 목에 매고 있던 출입키를 수트 재킷 안에서 끄집어냈다.
“태희 님, 진정한 방상시가 되어서 돌아오십시오.”
흑제와 새로, 패현이 한쪽 무릎을 꿇으며 머리를 조아렸다.
출입 키를 꽂는 순간, 문틈으로 빛이 번쩍였다. 문을 활짝 열었다. 어둠에 익숙했던 눈에 환한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잠시 고개를 숙이고 있던 윤태희가 천천히 눈을 뜰 때였다.
눈앞에 펼쳐진 의외의 광경에 윤태희는 멈칫했다.
불을 밝혀 둔 나례청 로비는 사람 한 명 없이 텅 비어 있었다. 지나가는 개미 한 마리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썰렁한 광경이었다. 윤태희는 손을 뒤로 뻗어서 문을 닫았다.
뚜벅, 뚜벅, 뚜벅.
발을 뗄 때마다 대리석으로 된 바닥에 구두 굽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그렇게 텅 빈 로비 한복판에 선 순간이었다.
“……황송하기도 해라.”
눈을 천천히 감았다가 뜨던 윤태희가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이렇게 마중까지 나와주실 줄은 몰랐는데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사람이라고는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눈 깜짝할 사이에 윤태희는 포위되어 있었다. 탈을 쓴 사람들이 사방에서 윤태희를 향해 검을 겨누고 있었다.
“즉시 무장을 해제하고 투항하라.”
잘 벼려진 칼은 금세라도 목을 꿰뚫을 것처럼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얼굴에 탈을 쓴 채 기척 없이 나타난 이들은 총 여덟 명으로, 전부 축역부 수석들이었다. 한 손에 검을 들고 있던 윤태희가 어깨를 으쓱해 보이는가 싶더니 슬쩍 눈동자를 굴렸다.
“다시 한번 말한다. 벽사단의 수괴는 즉시 무장을 해제하고 투항하라.”
재차 엄숙한 경고가 날아들었다.
“싫다면?”
윤태희가 고개를 슬쩍 기울이며 고저 없는 어조로 도발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칼끝 하나가 이매탈에 닿을 것처럼 가까이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그만.”
그때, 등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전부 다 검을 거둬라.”
짤막한 명령에 여덟 개의 검이 순식간에 물러났다. 윤태희는 고개를 틀고 뒤를 바라보았다. 찡그린 듯한 표정, 툭 튀어나온 눈, 어딘지 화가 난 것 같으면서 노기가 서린 듯한 삼엄한 얼굴. 선비탈이었다. 윤태희는 선비탈을 쓴 사람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훑었다. 그는 굽이 낮은 단화를 신고 있었으며, 발등에는 오래 전에 생긴 큰 흉터가 남아 있었다.
“…….”
윤태희의 입꼬리가 천천히 호선을 그렸다.
“탈 쓰신 거 정말 오랜만이네요.”
윤태희는 아무렇지 않게 검을 쥔 손을 뒤로 옮기며 열중쉬어 자세를 했다.
“석 부장님.”
몸을 돌리자, 선비탈 너머로 무감한 눈이 윤태희를 응시하고 있었다.
“모두 물러나라.”
석주련은 축역부 수석들에게 물러나 있을 것을 명령했다. “내가 직접 상대할 테니.” 그 말인즉슨 앞으로 윤태희와 저 사이에서 벌어질 일에 관여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부장님!”
그에 수석들이 한 발자국 다가서며 반발하는 목소리를 냈으나,
“명령이야.”
석주련은 두 번 말하지 않겠다는 태도로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 누구도 끼어들지 마라.”
멀찍이 떨어진 거리에서, 이매와 선비가 서로를 마주 보았다.
“…….”
석주련은 윤태희가 차라리 이대로 사라져서 영영 돌아오지 않기를 바랐었다. 모든 것을 잊고, 머나먼 곳으로 훌쩍 떠나기를 바랐었다. 더이상 얼굴을 볼 수 없더라도 괜찮았다.
모든 것을 잊고 잘 살고 있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것으로도 충분했다.
그러나 끝내 윤태희는 눈앞에 있었다.
축역부의 상징인 이매탈을 쓰고, 단주의 두루마기를 걸친 채로.
사실은 처음 눈치챈 순간부터 묻고 싶었다. 왜 그런 일을 꾸몄는지, 너는 언제부터 그런 마음을 품고 있었는지, 무엇이 너를 그렇게 만들었는지. 그러나 지금껏 단 한 번도 묻지 못했다. 입에 담는 순간 돌이킬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이유를 묻는 대신에 후회하지 말라, 아무데도 모르는 곳으로 가서 전부 잊어버리고 살라, 그렇게 몇 번이고 신호를 주었다.
“하고 싶은 말은?”
석주련이 무감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할 말이야 많죠.”
뒷짐을 지고 있던 윤태희가 고개를 숙이며 픽 웃었다.
문득 오래전, 탈을 고르러 갔던 기억이 났다.
당시 석주련은 수석이었고, 윤태희는 축역부에 갓 입성한 새내기 나자였다. 그날 수많은 탈 중에서 윤태희가 고른 것은 이매탈이었다. 석주련은 많고 많은 탈 중에 왜 하필 이매탈을 골랐느냐고 물었다. “그냥요.” 그렇게 대꾸한 윤태희는 조용히 미소만 지어 보였었다.
“제가 그때 무슨 심정으로 이 탈을 골랐는지 아세요?”
언제나 이유 없이 싱글벙글 웃고 있는 어리석은 이매.
“부장님은 생각해 본 적 있으세요?”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음에도 선비의 곁을 떠나지 않는 이매.
“이매가 왜 선비를 떠나지 않는지.”
눈은 웃고 있으나 턱이 없어서 늘 미완성인 채로 존재하는 이매.
“저는 매일 생각했어요.”
‘이매는 선비한테 복수를 하려는 거야. 본인 손으로 죽이기 위해서 기회를 노리고 있는 거지. 어리석고 우매한 건 이매의 웃는 얼굴을 곧이 그대로 믿는 사람들이고.’
윤태희가 손을 들어 천천히 탈을 벗었다.
“저는 이 순간만을 기다려 왔어요.”
긴 세월 동안 숨죽여 살아온 이매는 비로소 맨 얼굴을 드러냈다. 함 속에 갇혀 숨죽이는 것밖에 할 줄 몰랐던 어린아이는 더 이상 이곳에 없다.
“부장님, 저 기억 안 나세요?”
나지막한 물음에, 석주련의 눈매가 살짝 일그러졌다.
“부적부 나자 윤원중 기억하시죠.”
찰나의 순간이었다.
윤태희는 탈 너머 석주련의 눈빛이 흔들리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 주련아, 다 죽였니?
석주련의 눈동자가 서서히 크게 뜨였다.
“…….”
칼을 쥔 손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너…….”
석주련은 어렸던 윤태희의 눈동자 속에 칼날처럼 심겨 있던 적대와 증오를 기억했다.
편의점까지 저를 뒤따라 들어온 녀석을 처음 보았을 때 알 수 없는 기시감을 느꼈었다. 나자가 되기 위해 자신을 따라다녔던 아이였으므로 언제 어디선가 한번쯤은 마주쳤던 모양이라고, 일순 거울처럼 과거의 제 모습이 보인 듯하여 그런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했었다.
언젠가 청장은 말했다.
‘주련이 너는 지금껏 한 번도 내 뜻을 거스른 적이 없었지.’
그러나 사실은 단 한 번의 항명이 있었다.
십수 년 전, 예언이 있었다.
<푸른 불이 일어나는 날, 방상시가 돌아 오리라.>
그즈음 청장은 예언을 파헤치기 위하여 혈안이 되어 있었는데, 어느 겨울날 산중에 커다란 푸른 불이 일어났다는 신고가 들어왔다. 그 주변에는 화귀(火鬼)가 들끓던 탓에 계절마다 큰불이 일어나 나자가 잠입해 있던 곳이었다. 모든 것을 태우지만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괴화(怪火)라고 했다. 소식을 전해 들은 석주련은 청장의 명령을 받아 마을로 향했다.
그리고 석주련은 그날, 어두운 함 속에서 저를 멍하니 올려다보는 눈동자를 발견했다.
윤원중이 데려다 키운다는 아이였다.
석주련이 알고 있는 바에 의하면 윤원중에게는 가족이 없었다. 하나뿐인 아들은 사고로 잃었다고 했고, 고아를 하나 데려와서 키우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함 속에 숨은 아이와 눈이 마주친 순간, 석주련은 어두운 광 속에 갇혀 있던 자신의 유년을 보았다.
당시 복지관 직원으로 잠입해 있던 암행부 나자는 아이가 귀재라고 주장했으나 뚜렷한 증거가 없는 상황이었다. 석주련은 아주 작은 불확실성에 흔들리고 있었다. 윤원중의 가족이라면 혈연을 물려받아 귀재일 확률이 높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는 분명히 고아라고 했다.
한순간에 스쳐 지나가는 망설임과 연민으로 인하여 석주련은 그날 끝내 아이를 죽이지 못했다. 어차피 사방에 불이 번지고 있었다. 머지않아 이 집은 모두 불타서 없어지고 말 것이다. 만일 불길이 치솟는 방에서 무사히 빠져나온다고 해도 아이는 제대로 된 인생을 살 수 없으리라. 함 속에 몸을 웅크린 아이를 구할 수는 없을지라도 이대로 함을 닫는다면. 눈을 감고 못 본 척 지나칠 수만 있다면. 그것이 청장의 명령을 거역했던 최초의 기억이었다.
“네가…….”
석주련이 눈을 크게 뜬 채 멍하니 중얼거렸다.
“너였구나…….”
“네, 저였어요. 부장님.”
석주련은 원수의 하수인인 동시에 은인이었다. 윤태희는 석주련이 그 누구보다도 보잘것없는 평범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윤태희는 석주련을 용서할 수 없었다. 약이 없으면 잠을 이루지 못한다는 사실과 두통의 형상으로 따라다니는 저 그림자의 근원이 무엇인지도 알고 있었다.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거라고, 윤태희는 늘 생각했다.
“왜 그러셨어요?”
“나는….”
석주련은 힘겹게 입술을 달싹였으나,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왜 그런 짓을 했느냐고, 왜 윤원중을 죽였느냐고 묻는다면 그저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는 대답밖에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석주련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명령에 끝내 항명하지 않은 것은 저였으므로.
“왜 그때 나를 죽이지 않고 살려놨는지, 나는 그게 궁금했어요.”
그 이유는 석주련도 알지 못했다. 어린아이를 죽이고 싶지 않다는 마음. 그것은 그저 너무나도 평범하고, 그 누구라도 가질 법한, 인간적인 마음이라고밖에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맨얼굴이 된 윤태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부장님.”
무언가 벅차오르는 듯하면서도, 동시에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었다.
줄곧 궁금했었다. 내가 당신이 그때 살려둔 그 아이라는 것을 말하면, 당신은 어떤 표정을 지을 것인가. 당신이 베푼 한순간의 자비 혹은 망설임이 먼 훗날 사람의 형상으로 찾아와 당신의 목을 칼을 겨누는 날, 당신은 자신의 악덕 앞에 무릎을 꿇을 것인가. 호의를 배반당하는 순간이 온다면 당신은 나를 원망할 것인가, 혹은 과거의 자신을 후회할 것인가.
“제 손에 죽어주실래요?”
문득 윤태희는 알 것 같았다.
먼 길을 걷고 걸어서 증오하고 사랑하는 스승을 찾아갈 수밖에 없었던, 어느 소년의 마음에 대하여. 그리고 그에게 칼을 찔러넣을 수밖에 없었던 그 슬픔과 어쩔 수 없음에 대하여.
귀기 없이 검이 격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