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불 (326)화 (326/348)

#326

세월에 닳은 선비와 맨얼굴의 이매가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귀기 없이 검이 격돌했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두 사람의 검에는 단 한 톨의 귀기조차 실려 있지 않았다. 귀기로 인한 부차적인 피해를 막기 위함이었다. 오로지 검으로만 겨루는 승부였다. 서로에게 상처를 내거나 위해를 가하는 순간, 둘 중의 한 명은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만 한다.

그럼에도 석주련과 윤태희는 알고 있었다. 눈앞의 상대를 쓰러트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그리고 금기를 뛰어넘을 만큼 처절한 인간이 이 결투의 승리자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싸움을 피할 방법은 없었다. 직위를 해제하였으나 윤태희의 이름은 여전히 나례청에 묶여 있었고, 목패는 청장의 손에 있었다. 한 번 나자였던 인간은 원칙적으로 목패를 돌려받을 수 없다. 반동을 감수해서라도 서로에게 상처를 내거나, 일격으로 끝내야 했다.

윤태희는 이 길을 지나야만 했고, 석주련은 윤태희의 앞을 막아서야만 했다.

공기를 가르는 파공음과 함께 검과 검이 맞부딪쳤다.

날카롭고 소름 끼치는 금속성의 울림이 퍼졌다. 축역부 수석들은 숨죽인 채 둘의 검투를 지켜보았다. 몇 번이고 검이 부딪쳤다가 떨어졌다. 윤태희는 단 한 순간도 주저하지 않았다.

석주련은 전성기가 지난 나이였음에도 윤태희와 호각을 이루었다.

과연 신이 내린 명장이라고 불릴 만한 인간이었다. 석주련은 여태 다른 나자들과 달리 소극적인 태도를 단 한 번도 보이지 않았고, 윤태희를 상대로 검을 쓰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한순간의 망설임이 삶을 바꾼다.

그리고 그 망설임이 승패를 판가름 지을 것이다.

석주련 역시 윤태희와 마찬가지로 잃을 것이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두 사람이 검을 겨루는 일은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것이었다. 한시도 틈을 보여선 안 됐다. 검기가 이어질수록 두 사람의 호흡이 점점 흐트러졌다. 검을 맞댄 채 얼굴이 가까워졌을 때였다. 찰나의 순간, 석주련이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숨결처럼 목소리를 냈다.

“그만해라, 태희야.”

애원처럼 흘러나온, 아주 조그만 속삭임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줄곧 무감정하게 검을 휘두르던 윤태희는, 꽝꽝 언 호수와도 같던 마음에 무언가 균열이 생겨나는 것을 느꼈다.

대체 무엇을 그만하라는 것인가? 무엇을 위해서?

“부장님.”

윤태희는 칼날 같은 눈동자로 석주련을 노려보다가, 싸늘한 조소를 흘렸다.

“왜 그렇게 사셨어요?”

윤태희는 더 이상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맨얼굴이 된 이매는 누구보다도 날카롭고 냉정했다. 표정에 웃음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고, 낮게 억눌린 목소리에는 분노와 증오, 적대가 묻어 있었다. 석주련은 윤태희에게서 뼛속 깊은 원한과 날 것과도 같은 복수심을 읽어냈다.

흐트러진 숨을 삼키며 석주련은 이를 악물었다.

“…….”

선비탈을 쓴 탓에 석주련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윤태희는 알지 못했다. 둘은 서로를 앞에 두고 거친 호흡을 뱉었다. 잠시 숨을 돌리게 된 상황에서 윤태희가 입을 열었다.

“부장님, 그딴 말은 집어치우시고, 차라리 빌어보세요.”

“…….”

“잘못했다고, 후회한다고 해봐요. 그게 낫지 않겠어요?”

“…….”

석주련은 검 자루를 움켜쥔 손아귀에 악력을 더했다.

“청장님께서 네 목패를 가지고 계신다.”

그 순간, 윤태희가 멈칫하며 두 눈에 힘을 주었다.

“…….”

그 말은, 너의 역모는 패하고 말 것이라는 암시처럼 들렸다.

석주련을 뚫고 청장에게 가더라도, 목패가 청장의 수중에 있으므로 윤태희의 생사 역시 목패에 의해 좌지우지될 수 있었다. 여기서 투항한다면 목숨만은 부지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윤태희는 곧바로 검을 비틀었다.

몇 번의 공격이 이어졌다. 그리고 긴 검투 끝에 먼저 빈틈을 드러낸 것은 석주련이었다. 윤태희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검을 찔러넣었다. 석주련이 손이 짧게 흔들리는 순간이었다.

“…….”

챙그랑, 소리가 났다.

석주련의 손에 들려 있던 검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낸 소리였다. 석주련은 천천히 손을 옆구리에 가져갔다. 삼 분의 일이 넘는 깊이로 검이 꽂혀 있었다. 석주련이 이를 악물고 숨을 몰아쉴 때였다. 윤태희가 찔렀던 검을 빼내자, 엄청난 양의 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부장님!”

축역부 수석들이 경악하며 비명에 가까운 고함을 내질렀다. 정신없이 비틀거리던 석주련이 앞으로 고꾸라지자, 윤태희는 쓰러지는 몸을 받아냈다. 어깨에 얼굴이 눌리며 선비탈이 떨어져 내렸다. 윤태희는 바닥에 굴러떨어진 선비탈로 잠시 시선을 내렸다가 손을 들었다.

석주련의 어깨를 잡고, 그를 저에게서 떼어내려는 순간이었다.

태희야,

석주련의 어깨를 움켜쥐던 윤태희의 손이 멈칫했다.

꺼져가는 듯한 목소리가 귓가에 흘러 들었다. 석주련이 입술을 달싹였다. 그것은 마치 속삭임 같았다. 오직 윤태희의 귀에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다.

“…….”

잠시 말없이 서 있던 윤태희는 석주련의 어깨를 잡고 있던 손을 천천히 놓았다. 광활한 로비에는 정적만이 감돌았다. 묵직한 무게감을 느끼던 윤태희는 석주련을 떼어놓는 대신, 한 보 뒤로 물러섰다. 지탱하는 힘이 사라지자 석주련의 몸이 그대로 풀썩 쓰러져 내렸다.

수도 없이 당신을 대적하는 상상을 했다.

“부장님!”

“괜찮으십니까?”

두 명은 석주련에게 달려갔고, 나머지 여섯 명이 윤태희의 앞을 막아섰다. 수석들은 윤태희를 둥글게 포위한 채 검을 겨누고 있었다. 윤태희는 아무런 표정 없이 숨을 들이쉬었다.

“직위를 해제하였으니 당신은 더 이상 나자가 아닙니다.”

“그럼 해 봐요, 뭐든.”

볼에 피가 튀어 어딘지 섬뜩한 표정으로, 윤태희가 말했다.

“나 죽일 수 있어요?”

축역부 수석들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귀신은 잘도 베면서, 사람 죽이려니까 무섭죠?”

축역부 수석들의 눈이 짧게 흔들렸다. 날고 긴다는 수석들이었으나 당장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같은 동료였던 윤태희를 상대로 선뜻 나서지 못했다. 다만 움직이지 못하게 목에 칼을 겨눈 채 서로 시선을 주고받을 뿐이었다. 그러나 눈앞에서 석 부장이 당했다. 이대로 돌려보낼 수는 없었다. 수석 중 하나가 결심한 듯 손에 힘을 주었다. 검을 들어 올릴 때였다.

“길을 열어라.”

뒤에서 힘없는 명령이 흘러나왔다. 석주련의 목소리였다. 그에 윤태희와 대치 중이던 수석들, 모두의 시선이 뒤로 향하는 순간이었다. 석주련은 마지막으로 말을 뱉었다. 유언처럼.

길을 열고, 예를 갖춰라.

나례청의 마지막 방상시이시다.

***

피에 젖은 구둣발을 뗄 때마다 텅 빈 복도에 뚜벅뚜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언젠가 따스한 햇볕이 쏟아져 내리던 도서관에서, 윤태희는 소년에게 물었었다.

‘그래서 복수를 해낸 기분은 어때?’

소년은 한참 동안 말이 없다가 ‘그냥 그랬어.’ 라고 말했다. 가벼운 회피에 지나지 않는 대답이었다. 원수를 죽였으니 충분히 기뻐하라고 말했으나 소년은 전혀 기뻐하지 않았다.

그리고 윤태희는 지금 이 순간, 소년의 대답이 최선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할 말이 많으면 되레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다. 그냥이라는 말에 담긴 무게가 얼마나 덧없고 선명한 것인가. ‘그냥’이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던 소년의 막막함에 대해서 이제는 알 것 같았다.

후련하고 기쁠 것 같다고, 분명히 그렇게 생각했었다.

복도 모퉁이를 돌자마자 반듯했던 걸음이 급격히 흐트러졌다. 몇 걸음 못 가서 윤태희의 몸이 무너져 내렸다. 심장이 쥐어짜이는 듯한 고통이 시작되었다. 윤태희는 가슴팍을 헤집으며 바닥에 무릎을 대고 엎어졌다. 뼈대가 불툭 불거져 나온 손에 수트 재킷이 구겨졌다.

금기를 어긴 대가였다.

“아, 아……”

땅을 파고 들어가려는 사람처럼, 윤태희는 바닥을 긁으며 소리 없이 몸부림을 쳤다. 그러다 구역질이 올라와서 울컥, 피를 토했다. 이후에도 몇 번이나 각혈이 있었다. 머리를 바닥에 박고 신음하던 윤태희는 어떻게든 몸을 일으켜 세우고자 노력했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그러나 반쯤 몸을 일으키자마자 복도 벽에 어깨를 부딪치며 그대로 미끄러져 내렸다.

금기를 어긴 대가는 실로 가혹했다. 검에 찔려 치명상을 당한 적도 있었지만, 그보다 훨씬 고통스러웠다. 누군가 칼로 심장을 도려내는 듯했다. 맨정신으로는 도저히 버틸 수 없는 수준의 통증이었다. 두 눈에 힘을 주지 않으면 순식간에 의식이 멀어졌다. 그렇게 몇 번 정신을 놓았다가 깨어났다. 이럴 바엔 차라리 석주련의 검에 당하는 쪽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복도 벽에 몸을 기대고 있던 윤태희는 온 힘을 다해 이를 악물었다.

지금껏 수백 번, 수천 번도 넘게 상상했다. 석주련의 목에 칼을 겨누는 상상이었다. 그리고 그 상상은 현실이 되었다. 마침내 윤태희는 석주련을 이겼고, 꿈에 그리던 복수를 했다.

그런데, 허허벌판에 서 있는 듯한 이 황량한 마음은 무엇인가.

심장이 난도질당하는 것처럼 아팠다. 반동으로 찾아온 고통일 뿐인데, 만일 누군가 이 모습을 본다면 석주련을 찌른 것에 아파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정말이지 어이없는 생각이었다.

그래서일까?

“하, 하하…….”

불현듯 웃음이 나왔다. 작게 시작된 웃음은 입가에서 얼굴 전체로, 얼굴에서 어깨로 번져 나갔다. 어깨까지 떨면서 큭큭대던 윤태희는 양손으로 눈가를 감싸 쥐며 상체를 엎드렸다.

석주련에게 복수를 끝낸 윤태희는 바닥에 엎드린 채 미친놈처럼 웃어댔다.

지나온 걸음마다 구두 굽 모양대로 피에 젖은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

제 손으로 찌른 석주련의 몸을 지탱하고 있을 때, 꺼져가는 듯한 목소리가 계속해서 환청처럼 맴돌고 있었다. 마치 꿈을 꾼 것 같기도 했으나, 귓가에 흘러든 그 내용만은 선명했다.

태희야,

엘리베이터에 타면, 홀수로 된 버튼을 한 번에 누르고… 복도 끝에 있는 문을 열어라….

그곳이 네 목패가 있는 곳이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참담함이 밀려들었다.

윤태희는 물에 빠졌다가 간신히 뭍으로 올라온 사람처럼 참았던 숨을 터뜨렸다. 과호흡이 온 것처럼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어깨가 들썩거리고 가슴팍이 가파르게 오르락내리락했다. 형언할 수 없는 분함과 억울함, 그리고 이상한 설움 같은 것이 한순간에 북받쳐 올랐다.

그래서 윤태희는 잠시 울어야만 했다.

정말이지 어이없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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