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7
금기를 어긴 대가로 혹독한 고통이 찾아왔다.
두 다리로 반듯하게 서 있는 것조차 힘든 상황이었다. 윤태희는 처음으로 걸음마를 떼는 짐승처럼 벽을 짚고 힘겹게 걸음을 뗐다. 이대로 청장을 만난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아무런 계획도, 청장을 대적할 방법도 없었다. 하지만 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그래도 가야만 했다.
설사 이 길 끝에 죽음이 있더라도.
‘청장님께서 네 목패를 가지고 계신다.’
목패가 있는 곳, 그곳에 바로 나례청장이 있다.
우선 엘리베이터를 타야 했다. 엎어지면 코가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이건만 아주 먼 길처럼 느껴졌다. 몇 걸음 걷다가 주저앉기를 반복하며 가까스로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했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윤태희는 닫힘 버튼을 누름과 동시에 털썩 넘어졌다. 손이 피로 젖어 있는 탓에, 핏자국이 닫힘 버튼에서 시작하여 아래로 미끄러지듯이 긴 흔적으로 남았다.
“하. 으…….”
윤태희가 신음을 흘리며 손끝으로 엘리베이터 바닥을 긁었다. 자꾸만 의식이 흐려졌다. 실로 어마어마한 격통이었다. 석주련이 알려준 대로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러야 하는데, 손 하나 까딱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닫힌 엘리베이터는 같은 층수에 그대로 멈추어 있었다.
윤태희는 반쯤 쓰러지듯이 엘리베이터 벽면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폐쇄된 엘리베이터 안은 몹시도 고요했다.
그렇게 엘리베이터 안에 앉은 상태로, 윤태희는 몇 번이나 정신을 놓았다.
정신을 놓은 건 아주 짧은 순간들에 불과하였으나 잠시 꿈을 꾸기도 했다. 수살귀. 할아버지. 마당에 뒤엉켜 있던 길고양이들. 처음 맛보았던 사탕의 달콤함 같은 것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이대로 오래도록 잠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분 남짓이었지만 정신이 희미하여 오랜 시간이 흐른 것처럼 느껴졌다. 윤태희는 힘없이 앉아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팔을 드는 것조차 버거운 상황에서 아무런 대책도 없이 청장을 만나러 가겠다고 애쓰는 꼴이 문득 우습게 느껴져서 스멀스멀 웃음이 나왔다. 죽으러 가는 기분이 이런 것일까. 한없이 무력함을 느끼면서도, 그럼에도 끝을 보고야 말겠다는 이 마음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여기까지 생각이 뻗어 나가자, 갑자기 떠오른 얼굴이 있었다.
‘왜 잘못될 걸 알면서도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한 거야?’
어머니, 라고 하면 이상했다. 기껏해야 제 또래처럼 보이는 얼굴을 잠깐 엿본 게 끝이었으니까. 그런데 지금 이 순간, 윤태희는 직접 만난 적도 없는 ‘어머니’의 얼굴을 떠올렸다.
이름이 휘림이라고 했던가. 윤태희는 자신과 피가 이어져 있는 머리 짧은 여인을 생각했다. 검을 잘 쓰고 덩치가 작던 휘림과, 평생을 산속에 숨어 살았다는 그의 아비를 생각했다.
아마 저의 외할아버지가 되는 사람일 것이다. 그는 민란이 실패할 것이라는 사실을 짐작하고 있었음에도 기꺼이 스스로 몸을 내던졌고, 그의 딸 역시도 그와 같은 길을 걸었다.
희뿌연 과거 저 너머에서, 어린 휘림은 자신의 아비에게 왜 잘못될 걸 알면서도 그런 어리석은 짓을 했느냐고 물었고, 그는 대답했다. ‘내가 그런 인간으로 태어났기 때문이겠지’.
생각해보면 정말 그랬다.
세상에는 ‘그렇게 태어나서 그렇다’라고 설명할 수밖에 없는 인간들이 있다. 무너질 것을 알면서도 그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인간들이 있다. 그리고 자신이 그런 인간이라는 걸 깨달은 순간에서야, 하나하나 치밀하게 수를 헤아리고, 계획을 세워 왔던 윤태희는 장기 두는 것을 그만둘 수 있었다. 십 년의 계획을 버렸다. 더 설계할 수 있는 판 따위는 없었다.
사랑하는 이를 곁에 붙들어 놓을 수 있을지도 요원하고, 나례청을 부수고 청장의 목을 가져오는 일도, 진정한 방상시가 되는 일도, 이름을 되찾는 일도, 모든 것이 불확실하기만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윤태희는 문을 열어야만 했다. 인생에 다시 없을 혹한 속에서 할아버지와 수살귀가 있는 집을 나왔던 그때처럼, 세상 밖으로 처음 발을 디뎠던 그때처럼…….
윤태희는 벽을 짚고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버튼을 누르려고 손을 뻗는데, 팔이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다. 석주련이 알려준 층수를 누르자 계기판에 알 수 없는 문자가 떠오르더니, 엘리베이터가 움직였다. 한참을 올라가던 마침내 엘리베이터가 어느 한 곳에서 멈춰 섰다.
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몸을 기댄 채 위태롭게 서 있던 윤태희는 눈앞의 광경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어둡고 넓은 복도에는 흰 가면을 쓴 수십 명이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흰 가면은 몹시도 기괴해 보였다.
청장의 친위대였다. 초인(草人, 짚인형)들은 마네킹처럼 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안에 서 있는 저를 발견했을 게 분명한데도 흰 가면을 쓴 무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마 일정 거리 이상 가까워진다면 곧바로 공격해올 것이다. 딱 봐도 인간이 아니었다. 그 사실을 알아차린 윤태희는 무감한 얼굴로 숨을 크게 내쉬며 곧바로 닫힘 버튼을 눌렀다.
“씨발, 개같네…….”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이제는 별반 놀랍지 않았다. 다만 이번만큼은 각오가 필요했다. 반동의 여파로 운신하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윤태희는 총알이 날아다니는 전장에서 간신히 몸을 숨긴 사람처럼 호흡을 가다듬었다. 한쪽에 떨어트렸던 검을 손에 다시 쥐었다.
‘길을 열어야 한다.’
호흡을 고른 윤태희가 열림 버튼을 눌렀다.
마침내 문이 열린 순간이었다.
그때였다. 누군가 쏜살같이 튀어나와 윤태희 앞을 가로막더니, 윤태희에게 날아들던 검을 맞받아 쳤다. 흰 가면을 쓴 초인이 뒤로 밀려났다. 맞받아친 검에는 꽤 강한 귀기가 실려 있었다. 윤태희의 앞에 등을 내보인 채로 서 있는 이는 긴 머리를 질끈 동여매고 있었다.
“수석님, 괜찮으세요?”
윤태희의 눈이 서서히 크게 뜨였다.
“……강 주임님?”
윤태희에게 등을 내보이고 선 이는 다름 아닌 강이빈이었다.
***
두 시간 전.
- 윤태희는 벽사단의 수괴로 의심되는바, 나자의 직무를 져버리고 귀신과 은밀히 내통하여 비밀리에 반란을 주도하였다. 따라서 나례청의 붕괴를 조장한 혐의에 따라 본청 행동강령 3조 2항에 의거, 지금 이시간부로 축역부 제1팀 수석 나자 윤태희의 직위를 해제한다.
“벽사단의 수괴로부터 나례청을 사수하라.”
무전을 통해 전언을 남긴 석주련은, 얼굴에 선비탈을 쓴 채 문 앞으로 향했다. 문고리에 손이 닿는 순간, 별안간 석주련의 손끝이 멈칫했다. 석주련은 얼마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청장은 윤태희의 목패가 수중에 있음에도 윤태희를 막지 않았다. 목패는 육체와 이어져 있으므로, 목패를 통한다면 윤태희를 얼마든지 막을 수 있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벽사단의 습격을 미리 저지할 수도 있었는데도 청장은 그러지 않은 것이다. 윤태희에게 기회를 주고 싶다거나 윤태희가 멈추기를 기다리는 것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언젠가 윤태희가 산제물로 바쳐질 위기에 처했을 때, 청장은 그 사실을 알고도 막지 않았으므로.
석주련은 나례청장이 저에게 어째서 윤태희의 목패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린 것인지, 그 의중이 궁금해졌다. 벽사단의 주인이 윤태희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시험해본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문득, 비단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닐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청장님께서는 어쩌면, 그 아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왜.
벽사단에서는 계속 신호를 보내왔음에도 막지 않은 이유.
청장은 대체 무엇을 바라고 있는가?
- 주련아.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이유가 뭔지 아느냐? 사람을 위하되, 사람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란다…….
문 앞에 멈춰 서 있던 석주련은 그대로 등을 돌렸다. 다시 무전을 들었다.
“축역부 제1팀, 지금 어디에 있지?”
제1팀 나자들을 불러올 것을 명령한 석주련은 의자에 앉아 그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너희는 윤태희가 벽사단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나?”
“그럴 리가 없습니다.”
표지호는 낯을 굳혔다.
벽사단의 수괴가 윤태희로 의심되는 바, 그의 직위를 해제하였다는 사실은 이미 파다하게 퍼져있었다. 그럼에도 제1팀 팀원들은 그 사실을 믿을 수 없다는 눈치였다. 단, 강이빈만은 붉은 두루마기를 걸친 채 이매탈을 쓰고 있는 사람을 보았던 게 헛것이 아니었음을 알았다.
“그럴 사람이 아니다, 라…….”
석주련은 표지호의 말을 곱씹는가 싶더니,
“윤 수석을 믿는 거로군, 그렇지?”
슬쩍 미소를 지으며 말을 덧붙였다.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감정이 무엇인지 알고 있나?”
“…….”
“그건 바로 ‘배신감’이야. 믿던 누군가로부터 배신당했다는 감각이 사람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지. ‘윤태희가 역모를 저질렀다’. 이게 만약 사실이라면? 그렇다면 어쩔 거지?”
“…….”
“만약 이 역모가 끝나고 모든 일이 정리되면, 나례청은 너희에게 책임을 물을 거다. 윤태희와 같은 팀이었으니 마땅히 혐의가 있을 법하지. 그러니 너희 역시 위험해질 거야.”
윤태희가 역모를 꾀하고 반란을 주도하였다면, 윤태희의 최측근이던 이들 역시 그 대상에 포함될 것이다. 반역은 200여 년 전만 해도 근처 친인척을 비롯해 삼대를 멸하는 중죄였다.
“그 녀석이 이 사실을 몰랐을까? 그래, 너희가 아는 윤 수석은 어떻지? 자신이 역적이 되었을 때, 너희에게 피해가 갈 거라는 생각조차 못 하는 인간은 아닐 것 같은데? 안 그런가?”
팀원들의 낯이 하얗게 굳었다.
“하, 하지만…….”
“동조하였거나 방조하였거나. 너희의 무고함이 밝혀진다고 하더라도 예전처럼 돌아갈 수는 없을 거야. 그런 녀석이다. 너희를 조금이라도 생각했다면 이런 일은 벌이지 않았겠지.”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정확하고 예리한 지적이었다. 팀원들은 하나같이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누구 하나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그때, 말을 멈췄던 석주련이 팀원들을 한 명 한 명 응시했다.
“내가 묻고 싶은 건 한 가지뿐이야.”
석주련은 얼굴에 쓰고 있던 선비탈을 고쳐 쓰며 덧붙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는, 그 아이의 편이 되어줄 수 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