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불 (329)화 (329/348)

#329

문에 등을 기대고 있던 윤태희가 미끄러지듯 주저앉았다.

청장실은 고요했으며,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는 서재 같은 곳이었다. 케케묵은 듯하면서도 묘하게 향긋한 냄새가 났다. 먼지와 세월이 차곡차곡 쌓이고, 그런 곳에 오래된 책들이 모이면서 만들어진 냄새였다. 윤태희에게는 아주 익숙한 향기였다.

청장실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현실 세계와 급격하게 단절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윤태희는 눈을 감고 천천히 오랫동안, 느리게 숨을 골랐다.

이곳에 오기까지 곁을 스쳐 지나간 수많은 얼굴이 떠올랐다.

지금쯤 밖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 강이빈의 말처럼 정말로 팀원들이 와 주었을까? 팀원들이 와 줄 것이라는 그 믿음은 대체 어디에서 온 걸까? 과연 다들 무사할 수 있을까? 석주련은? 나례청 밖에서 나자들과 투전을 벌이고 있을 영귀들은?

그리고, 그리고….

‘선오야, 나는 이미 네 판에 수많은 장기 말을 갖다 바쳤다. 너의 수많은 권속들, 영귀들, 그리고 그 아이까지도… 그 무수한 사연과 시련과 역사를 딛고서 너는 지금 이곳에 있는 거다.’

팔을 늘어트린 채 눈을 감고 있던 윤태희가 어느 순간 스르륵 눈을 떴다. 왼쪽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를 풀었다. 손목시계로 덮어 두었던 자리에는 흐릿하게 새겨진 주저흔과 검은 뱀 시시가 숨어 있었다. 은색 메탈 시계를 바닥에 떨어트리자 절그럭, 하는 소리가 났다.

“시시.”

“…….”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

“…….”

손목 속의 검은 뱀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마지막 부탁이야.”

한숨처럼 나지막한 목소리로 덧붙인 말에, 까맣게 죽어 있던 시시의 눈동자에 붉은빛이 들어 왔다. 마지못해 깨어난 시시가 석류알처럼 빨간 눈동자를 들고 윤태희를 응시했다.

“뭔데?”

“나 오늘 죽을지도 몰라.”

“웃기는 소리, 넌 오늘 안 죽는다.”

시시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본향의 가피를 입은 인간이 그렇게 쉽게 죽는 줄 알아? 너는 아주 특별한 갑옷을 두르고 있는 거야. 그러니까 내가 네 몸 안에 있는 이상 그럴 일은 없어.”

“그래? 그럼 이제 내게서 떠나.”

잠시 침묵이 흘렀다.

“…….”

입을 다물고 있던 시시가 작은 눈을 찌푸리며 말했다.

“진심이야?”

“그래.”

“어째서?”

“나는 네가 바라는 존재가 될 수 없으니까.”

“그게 나한테 하고 싶은 마지막 부탁이냐?”

“응.”

“…….”

시시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내가 떠나면 너는 정말로 보잘것없는 인간이 되고 말 거야.”

“상관없어.”

“너는 이제껏 내 덕분에 온갖 불운을 피할 수 있었어. 사고 수와 흉살이 들어도 전부 빗겨 나갔고, 죽도록 다칠 일이 있으면 그 절반만큼만 다쳤어. 잃어버린 물건은 반드시 네게 돌아왔어. 그건 내가 여태 곁에서 널 지켜줬기 때문이었어.”

알고 있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이 세상에 정말로 인격적인 신(神)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있다면, 그 정체는 본향에 가까울 것이다. 본향은 하늘이며 그림자다. 언제나 머리 위에, 혹은 발밑에 있다. 모든 만물의 고향이다. 이 세상에서 살아 숨 쉬는 모든 존재는 본향으로부터 와서 본향으로 돌아간다.

“본향은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존재의 부모와도 같아.”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식을 이기는 부모는 이 세상에 없는 법이지.”

한참 동안 말이 없던 시시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선오야, 너는 특별해.”

너는 반드시 ‘무언가’가 되어야만 해. 무언가를 이루어내야만 해. 이 세상에 한 획을 그어야만 해. 보잘것없이 살다가 보잘것없이 죽어서는 안 돼. 평범한 인간이 되어서는 안 돼. 너는 영웅이 되어야 해. 신이 되어야 해. 시시한 것은 버리고, 거대한 운명을 따라가야 해.

“나는 윤선오가 아니라 윤태희야.”

윤선오는 특별한 인간이었다. 남들에게는 없는 힘이 있었고, 하늘의 예쁨을 받았으며, 세상의 호의 속에 있었다. 감히 누구도 누리지 못할 번영과 위업을 약속받은 인간이었다. 그러나 윤태희는 만물의 주인 따위는 되고 싶지 않았다. 천하를 호령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제 그만 나를 떠나주지 않겠어?”

“정말로 나를 버리고 갈 생각이야?”

“버리는 게 아니야.”

시시라는 존재는 윤태희에게 있어 과거 그 자체였다. 상처, 흔적, 역사, 과오, 걸어온 길이었다. 버리고 싶다고 해서 버릴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윤태희도 잘 알고 있었다. 단지,

“그냥 그 자리에 놓고 오는 거지.”

윤태희는 엄지로 문지르듯이 시시를 쓰다듬었다. 다정한 손길이었다. 윤태희의 쓰다듬을 받아들이고 있던 시시는 “어리석은 놈! 어리석은 놈!” 하며 토라진 것처럼 고개를 돌렸다.

“대체 너는 뭘 원하는 거야?”

오래전, 탈 속에 갇힌 방상시는 인간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너의 힘인 동시에 너의 죄가 되리라. 나를 가지는 대가로 내 너에게 한철의 번영과 누구도 누리지 못할 일생의 쇠락을 주겠다. 너는 누구도 넘보지 못할 명예와 위업과 영광을 얻을 것이다. 네가 원한다면 너는 천하를 거머쥘 것이고, 만물의 주인이 될 것이나 정작 중요한 단 하나만은 영영 가질 수 없을 것이다.

윤태희는 지금 이 순간 깨달았다.

방상시가 영영 가질 수 없을 거라고 말한 정작 중요한 단 하나.

“내 삶.”

짤막하게 대꾸한 윤태희는 바닥에 내려놓았던 검을 집어 들었다. 검을 손목 부근으로 가까이 가져다 대고, 일직선으로 살갗을 그었다. 언젠가 상처를 낸 적이 있던 자리였다. 흉터가 있는 손목을 긋자 피 한 줄기가 흘러나오더니, 이내 손을 타고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윤태희는 시시의 눈을 감기듯이 손목을 감쌌다.

윤태희는 보잘것없는 인간으로 살고 싶었다. 한없이 연약하고 흔들리는, 어리석은 인간으로 살아가기를 원했다. 천하를 얻는 대신에 단 한 명의 연인과 몰락의 길을 걷고 싶었다.

어떤 인간은 일평생 남이 쥐여 준 지도를 가지고 산다. 무엇이 되어야만 하고, 무언가를 이뤄내야만 한다. 그러나 윤태희는 천하의 주인이 되는 대신 이 삶의 주인이 되고 싶었다.

‘너는 이름이 뭐야? 내 이름은 선오고… 우리 할아버지는 윤원중이야.’

‘글쎄? 나는 이름이 없어. 마음대로 불러. 이제 네가 내 주인이니까.

‘그럼 넌 이제부터 시시야.’

‘왜?’

‘혀를 날름거릴 때마다 시시, 소리가 나니까.’

‘좋아. 나는 이제부터 너의 시시다.’

시시, 시시, 시시….

“성명자의 권능으로 이르되…….”

윤태희는 다른 손으로 손목을 덮은 채, 조용히 읊조렸다.

“너는 이제부터 어느 곳으로도 나를 인도하지 마라.”

세상에는 신이 없는 인간도 있고, 신이 있는 인간도 있고, 신이 되는 인간도 있으며, 신을 만드는 인간도 있다. 그러나 나는 아마 신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공평하게 사랑할 자신이 없다. 어떤 귀신보다 어떤 인간을 더 사랑하고, 어떤 인간보다는 어떤 귀신을 더 사랑한다. 유독 누군가를 향해 기울어지는 마음을 참아낼 도리가 없다. 혼자 걸어온 길이었으나 이 길 위에 있는 나는 혼자가 아니다.

차갑게 얼어붙은 더러운 땅에도 민들레가 고개를 비집고 일어난다. 길가의 그늘진 구석에도 한 조각 볕이 지나간다. 윤태희는 이 온기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평범한 인간이었다.

전부 한철인 것을 알면서도, 또다시 혹한의 겨울이 올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윤태희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반동의 여파로 인하여 운신하기가 힘들었으나 비틀비틀 걸었다. 청장실 안쪽에 난 문으로 향했다. 한 손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져 내리고 있었고, 다른 손으로는 검을 쥐고 있었다.

문을 열자 광활한 풍경이 펼쳐졌다.

드넓은 마당, 장대한 밤하늘, 무수히 흩어진 별 조각, 은하수 아래 자리한 아름다운 장소는 마치 비밀스러운 요새처럼 보였다. 주술로 만들어낸 공간이거나,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구축해낸 공간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관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경치였다.

이 길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생각했었다. 어쩌면 낭떠러지이거나 혹은 끔찍한 지옥의 형상이거나, 악취가 나는 시궁창 같은 곳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너른 잔디밭이 펼쳐져 있고, 잘 가꾸어져 있는 조경수에 둘러싸인 공간은 몹시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한 손에는 검을 든 채, 피를 뚝뚝 흘리며 상처투성이로 서 있는 윤태희는 이 장소에 어울리지 않았다.

그리고, 이곳에 청장이 있다.

윤태희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얼굴에 쓴 탈을 벗었다. 맨얼굴에 서늘하고 시원한 밤바람이 스치고 지나갔다. 잠시 눈을 감았다. 살갗에 닿는 바람의 감촉을 천천히 음미했다.

저 멀리, 커다란 기와집 한 채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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