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0
저 멀리, 고래 등 같은 커다란 기와집 한 채가 보였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기다란 반석 위에는 고무신 한 켤레가 놓여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고무신을 내려다보던 윤태희는 신발을 벗지 않고 구둣발로 마루에 올라섰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창호지로 덧댄 미닫이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드르륵, 소리와 함께 문을 열리자, 붓을 들고 종이에 난을 치고 있던 청장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허락도 없이 난입한 상황이었음에도 청장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어쩌면 윤태희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윤태희는 그렇게 청장과 마주했다.
“이런, 꼴이 말이 아니로구나.”
경상 앞에 앉은 청장은 피로 물든 검을 든 채, 슈트 위에 적색 두루마기를 걸치고 있는 윤태희를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찬찬히 훑어보았다.
“오는 길에 고생을 좀 해서요.”
고개를 꺾으며 방 안 풍경을 둘러보던 윤태희가 중얼거렸다.
“아름다운 곳에 사시네요.”
청장이 동의를 표하듯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어서 오려무나.”
태연하게 인사를 건네는 청장은 수수한 한복을 입고 있는 노년의 여성이었다. 그가 탈을 가져간 이라는 것은, 피를 통해서 엿본 과거 속의 얼굴과 쏙 빼닮아 있어서 알 수 있었다.
청장은 백발로 된 단발머리를 한 채 풍성한 치마를 입고 있었는데, 일견 평범한 노인처럼 보이면서도 깊이를 알 수 없는 호수와도 같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나이대를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아주 엄격할 것 같으면서도, 정반대로 너그러울 것 같은 기묘한 인상이었다.
나의 원수이자 내 부모의 벗이었던 이가 지금 눈앞에 있다.
청장과 마주하게 된다면 적대와 증오를 숨기지 못하고 감정적으로 격앙되리라고 생각했으나, 윤태희는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놀라울 만큼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다. 만감이 교차했다. ‘드디어 만났구나’하는 탄식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이상하게도 긴장감이 확 풀어졌다.
“앉아도 되나요? 서 있기가 힘들어서 그러는데.”
말로는 허락을 구하고 있었으나, 윤태희는 대답을 듣지도 않고 털썩 바닥에 앉았다. 정화부의 약수를 마시고 조금쯤 고통이 가라앉는 것 같았으나, 어느새 약효가 다 되었는지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쳤다. 아까 전부터 스멀스멀 통증이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주련이를 찔렀니?”
윤태희의 뺨에 튄 피를 보던 청장이 넌지시 물었다.
“…….”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청장이 혼잣말을 했다.
“이래서 머리 검은 짐승은 함부로 거두는 게 아니라더니…….”
석주련이 윤태희를 막아내지 못하리라는 것쯤은 예상하고 있었다. 막지 못한 것인지 막지 않은 것일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결과는 청장이 짐작한 대로였다. 석주련이 저를 등졌다는 사실에 상처를 받은 건 아니었지만, 그리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왠지 입안이 썼다.
“주련이도 나이가 들었구나.”
손에 쥔 붓을 만지작거리던 청장이 열린 창문 너머로 먼 곳을 바라보았다.
“주련이도… 나이가 들었어…….”
윤태희가 무감한 눈으로 물었다.
“시험이었나요?”
청장은 말없이 미소만 지었다. 시험은 아니었다. 믿음과 불신의 경계에서 행하는 것이 시험이다. 그러나 애초에 청장은 석주련을 믿은 적이 없었다. 각별히 신경을 쓴 것은 사실이었으나 딱 거기까지였다. 배신감을 느끼거나 배은망덕하다고 석주련을 탓할 생각은 없었다.
“짐승도 자신을 거둔 이를 알아보는 법이지. 그러나 인간만은 그렇지가 않아. 호시탐탐 빈틈을 노리고, 감정에 약해져서는 갈대처럼 흔들리고 만단다. 그것이 인간의 허점이야.”
“별 기대도 없었군요.”
윤태희가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에 대해서 훤히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얘기하시네요.”
청장은 별다른 대꾸 없이 어깨를 으쓱해 보이더니, 붓과 종이를 정리했다.
“그래, 이제 너는 무얼 하고 싶으냐?”
“글쎄요. 딱히 뭘 해야겠다는 생각은 없어요. 뭘 해야 될지도 모르겠고.”
그 말은 사실이었다. 윤태희에게는 이제 아무런 계획이 없었다. 초도 손에서 놓았고, 한도 손에서 놓았다. 어느 샌가부터 장기 말은 모든 규칙을 어기고 스스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렇다면 너는 무엇을 위해서 여기까지 왔지?”
무엇을 위해서…… 윤태희는 자문해 보았다.
처음에는 복수를 위해서였다. 불타버린 유년에 대해 앙갚음을 하고 싶었고, 윤원중과 수살귀를 죽인 원수를 갚고 싶었다. 그러나 이제는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 최초의 목표였던 목패를 되찾고 싶은가 하면 소년을 위해서 죽고 싶기도 했다. 시시가 이곳으로 이끌었기 때문일 수도 있으나, 문을 열 수 있게 해준 건 시시일지라도 문을 열고 나온 건 나 자신이다.
“원래는 당신을 죽이고 방상시의 탈과 목패를 되찾을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무엇을 위한 복수인지 이제는 그 인과가 실타래처럼 마구 뒤엉켜 있었다. 답은 하나뿐이다. 뒤엉킨 과거를 잘라내는 것이었다. 엉망이 된 실타래는 미련 없이 끊어내야만 한다.
“지금은 그냥 모든 걸 끝내고 싶어요.”
“강한 아이구나.”
윤태희는 소리 없이 웃었다. 틀린 말이다. 너무도 연약한 인간이라서 나는 이곳에 있는 거다. 과거를 잊을 수가 없고, 헤어나지 못하는 인간이어서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거다.
윤태희는 대답 대신 천천히 숨을 고르며 얼굴에 쓴 탈을 벗었다. 그런데, 병풍 뒤쪽에서 금색 눈을 가진 검은 고양이가 사뿐사뿐 걸어 나왔다. 윤태희의 시선이 고양이에게로 향했다. 고양이는 가까이 다가오지도, 숨지도 않은 채 가만히 앉아서 윤태희를 응시하고 있었다.
“허면, 너는 내게 무얼 바라지?”
“장기나 한판 뒀으면 해요.”
고양이와 시선을 맞추고 있던 윤태희가 입을 열었다.
“장기?”
“네.”
뜻밖의 제안이었는지, 청장이 고개를 기울였다.
“장기라… 네가 이기면 뭘 해 줄까?”
“제 목패를 주세요.”
“네가 진다면, 너는 뭘 내놓을 것이냐?”
“제 목숨을 드리죠.”
망설임 없는 대답에, 청장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그라들었다. 우위에 있는 쪽은 청장이었다. 방상시의 탈을 가지고 있는 것도, 윤태희의 목패를 가지고 있는 것도 청장이었다.
“여기까지 와서, 겨우 장기 한판에 목숨을 걸겠다?”
“네.”
청장이 설핏 미간을 구겼다.
순순히 목을 내놓겠다는 의중을 알 수 없었다. 윤태희는 정말 진심인 것처럼 보였다. 이는 수세에 몰린 상황에서 윤태희가 할 수 있는 마지막 발악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었다.
“젊은이의 치기란 좋은 것이구나.”
두 사람의 대국이 시작되었다.
딱, 딱, 고요한 밤중에 경쾌한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장기 말을 들어 올려서 판에 내려놓을 때마다 나는 소리였다. 청장과 장기를 두고 있노라니 불현듯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혼자서 장기를 두고 있던 여혜 선사와의 첫 만남이었다.
윤태희는 물었다.
‘한을 두는 것도 나고, 초를 두는 것도 나잖아요.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반대편의 패를 움직였는지 나 스스로 알고 있는데, 이렇게 혼자서 장기를 두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윤태희의 질문에 선사는 대답했다.
초를 잡았을 때는 안 뵈이던 게, 한을 잡으면은 뵈여. 어느 한쪽을 이기게 해야겠다 싶다가도, 지고 있는 쪽에 또 긍휼한 마음이 들어서는 일부러 수를 돌아가기도 허고, 이쪽저쪽 왔다 갔다가 하다 보면은 도끼 자루 썩는 줄 모르게 재미져.
이짝이 이겨도 내가 이기는 것이고, 저짝이 이겨도 내가 이기는 것이지. 반대로 이짝이 져도 내가 지는 것이고, 저짝이 져도 내가 지는 것이여. 이러나 저러나 결과는 매한가진데, 참 신기허게도 종국에는 마음이 훼까닥 기울어.
결국 사람 마음이란 것이 한쪽으로 꼭 치우치게 돼 있데…….
초의 편에 서서 장기를 둘 땐 보이지 않던 것이 한의 편에 서서 장기를 두면 새롭게 눈에 보인다. 어느 자리에 서느냐에 따라 보이는 풍경이 달라지고 마음 또한 시시각각 달라진다고 했다. 그래서 재미있다고, 선사는 말했다. 이제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알 것 같다. 어디론가 기울어 버리는 마음, 패를 잃을 때마다 상처받는 마음은 신(神)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어느덧 대국은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청장이 미소 띤 얼굴로 패를 옮기며 말했다.
“옳지, 장군이다.”
장기판을 내려다보던 윤태희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이쪽도 장군이네요.”
두 쪽 다 장군이라는 것을 한 박자 늦게 알아차린 청장이 설핏 인상을 썼다.
“이런…….”
조금 전에 둔 한 수가 패착이었다. 줄곧 청장이 우세한 형국이었으나 한 차례 실수로 윤태희에게 기회가 넘어갔다. 소위 ‘빅장’이라고 하여, 윤태희가 군을 움직인다면 청장의 군을 잡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장기는 끝까지 군을 지키는 쪽의 승리다. 그러나 만약 윤태희가 자신의 군을 들어 청장의 군을 잡는다면, 양쪽 다 동시에 군을 잃게 되므로 무승부가 된다.
패배할 바에야 어떻게 보더라도 비기는 편이 나았다.
하물며 윤태희는 이 판에 자신의 목숨을 내놓은 상황이었다. 이쪽의 군을 바쳐 저쪽의 군을 잡는다면 이 판은 비기는 판이 된다. 무승부가 되었음을 깨달은 청장이 혀를 찰 때였다.
윤태희가 군을 들어 올리더니, 착수하지 않고 그대로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장기판 바깥으로 손을 뺐다. 무승부가 아니었다. 윤태희의 기권이었다. 청장이 멈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제가 졌어요.”
무승부 대신에 패배를 선택한 윤태희는 손에 쥐고 있던 군을 슈트 안쪽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정좌한 상태로 앉아 있던 윤태희가 허리를 바르게 세우더니, 청장을 향해 말했다.
“내 목숨을 가져가도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