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1
얼굴에 쓰고 있던 탈을 고쳐 쓰며, 윤태희가 입을 열었다.
“내 목숨을 가져가도 좋습니다.”
서로가 동시에 죽거나, 이대로 무승부이거나. 그러나 윤태희는 그보다 한발 물러서서 자신의 군을 장기판 밖으로 빼냈다. 윤태희의 ‘군’은 지켰지만, 기권이나 다름없기에 대국에 있어서는 패배였다. 목숨을 건 대국에서 기권을 선언하자, 청장의 표정이 기묘하게 변했다.
“목패를 깨부수든, 목을 베든 마음대로 하세요.”
탈 너머로 보이는 눈동자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
청장은 눈매를 가느다랗게 좁혔다.
그때, 멀찍이 앉아 있던 고양이가 윤태희를 향해 다가오더니 앞발을 모아 앉았다. 그러고는 시선을 잡아끌려는 듯이 야옹, 울음을 냈다. 윤태희는 고양이의 금색 눈을 바라보았다.
고양이는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한 기색이었다.
“목숨은 귀한 것이지.”
그때, 청장이 먼 곳을 바라보며 넌지시 말했다.
“이렇게 시시하게 버려서야 쓰겠느냐.”
어차피 진작부터 윤태희의 계획이 무언지 훤히 내다보았던 상태다. 인제 와서는 그 계획이 전부 좌절되었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현재로서는 저를 대적할 방법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도 알았다. 여기서 만약 윤태희를 없애 버린다면, 괜히 소년의 반감만 사게 될 것이리라.
“밤공기가 좋으니 산책이나 하지 않으련?”
그러니 소년이 올 때까지는 살려 두는 편이 이로울 것이다.
“정원에 능소화가 참으로 아름답게 피었어.”
청장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에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고양이의 눈을 들여다보고 있던 윤태희가 청장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청장은 옆쪽에 난 커다란 미닫이문을 열고 뒤뜰로 나갔다. 청장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마루가 삐걱거렸고, 치맛자락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고양이는 자신의 주인인 청장이 자리를 벗어나자 잠시 주의를 돌리는 듯하였으나 이내 다시 윤태희에게로 눈길을 옮겼다. 윤태희는 고양이를 한번 보았다가, 뒤뜰로 시선을 주었다.
“…….”
난데없이 산책을 권하는 청장의 의중을 알 도리가 없었으나, 윤태희는 청장을 따라 뒤뜰로 나갔다. 윤태희가 몸을 일으키자 고양이도 그 뒤를 졸졸 따랐다. 뒤뜰에는 넓은 정원이 펼쳐져 있었다. 환한 달빛이 실린 부드러운 바람에 아름드리 뻗은 나뭇가지가 살랑거렸다.
윤태희는 멀찍이 떨어진 거리에서 느린 걸음으로 청장의 뒤를 따라 걸었다.
“같은 풍경처럼 보여도 하루하루 달라지는 것들이 있지. 매일 산책을 할 때마다 감회가 새롭구나. 오늘은 유독 지난날에 대한 기억이 많이 떠오르니, 나도 늙기는 늙은 모양이야.”
정원에 핀 꽃과 나무를 눈에 훑어보던 청장이 혼잣말을 했다.
“이맘때쯤이면 벗들과 함께 이곳저곳을 쏘다니며 꽃 구경을 했지. 바람 부는 언덕에 앉아 낮잠을 자기도 하고, 들꽃을 꺾어서 가락지 따위를 만들곤 했었어… 어찌나 즐거웠는지.”
이렇게 아름다운 꽃이 피어나는 계절이면 자선원에서 살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 시절이 그리운가요?”
“그립고말고. 세월은 돌이킬 수 없는 법이니.”
뒷짐을 진 채 뒤뜰을 거닐던 청장이 어느 순간 입을 열었다.
“오래전 우리 집에서도 이 계절이 되면 능소화가 피어났단다. 참 아름답지. 예전에는 양반집에서나 볼 수 있다고 해서 양반꽃이라고 부르곤 했는데, 요즘 세상에선 안될 말이지.”
활짝 개화한 능소화를 지긋한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청장은 말을 이었다.
“세상이 참으로 많이 바뀌었어. 이제는 타고난 신분도 없고, 마음만 먹는다면 어디에든 길이 있지. 바뀐 세상을 보면 격세지감이 들다가도 ‘왜 나 때는 이럴 수 없었는가’ 하는 생각이 든단다. 그때는 무어가 그리 억울했는지. 밤이면 가슴에 불덩이가 맺힌 듯하여 잠을 이룰 수가 없었지. ‘부모를 잘못 만난 탓인가’, ‘나는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하며 말이야.”
청장의 소회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던 윤태희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래도 그 시대에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다면 그렇게까지 비관할 처지는 아니었을 텐데요.”
“그래,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얘기했지.”
고개를 끄덕이던 청장이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내가 어쩌다 나자가 되었는지 아느냐?”
“글쎄요.”
“나는 집에서 버림받았단다.”
청장은 손을 들어 능소화를 슬쩍 건드리며 말을 이었다.
“집안의 명예를 실추시켰다고 말이야.”
부친은 야심이 가득한 사람이었다.
까마득하게 오래전의 이야기였다. 어린 시절 왕실에서는 후사를 잇기 위한 후궁을 뽑고자 간택을 시행한 적이 있었다. 부친은 몇 살 터울의 수향의 친언니를 간택에 내보냈다. 그런데 그즈음 동생인 수향의 귀문이 본격적으로 열리기 시작했다. 바로 손아랫동생인 수향에게 귀신을 보고 듣는 재주가 있다는 소문은 바깥으로 퍼져 나갔고, 그게 곧 구실이 되었다.
’예? 귀신과 통하는 요사한 피가 흐른다니요!’
’그런 이유로 간택에서 떨어지는 게 어딨답니까.’
간택은 사실상 의례적인 절차이고 내정자가 있기 마련이라, 비단 수향 때문에 간택에서 떨어진 것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분풀이 상대가 필요했는지 수향의 언니는 수향을 몹시 원망했고, 부친 역시 수향이 집안의 수치라 여기고 끝내 집에서 내쫓다시피 했다.
“모두가 입을 모아 나로 인해서 일이 어그러졌다고 수군거렸지.”
청장은 손을 들어 능소화를 건드리며 조용히 덧붙였다.
“심지어 나를 낳아준 부모조차도 말이야.”
부친은 되는대로 혼담을 넣어 짐짝 치우듯 수향을 먼 곳으로 시집 보내 버리려고 했다. 그러나 천만다행으로 유모의 손에 빼돌려졌고, 그렇게 해서 오게 된 곳이 자선원이었다.
부모에게 버려졌다는 증오와 원한은 전부 귀신에게로 향했다.
“나는 아버지가 참 바보 같다고 생각했단다. 그렇게나 제 딸이 간택되기를 바란다는 게 이상했거든. 하물며 정실도 아니고 후궁일 뿐인데. 그게 대체 무어라고 난리인지 말이야.”
잠시 말을 멈췄던 청장이 어깨를 으쓱이며 입을 열었다.
“만약 바라는 대로 무엇이든 될 수 있다면, 나는 왕의 부인 같은 건 되고 싶지 않았다.”
잠시 말을 멈춘 청장이 비밀을 속삭이듯이 조그맣게 말했다.
“차라리 왕이 된다면 모를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내뱉은 말에 이매탈 너머로 보이는 눈매가 슬쩍 가늘어졌다.
“예전 같으면 이런 소리를 입에 담았다가는 목이 달아났을 게야. 허나 지금은 원한다면 나랏님도 될 수 있는 세상이니, 설마 반역을 입을 담았다고 늙은이를 잡아갈 일은 없겠지.”
우스갯소리를 하던 청장이 빙그레 웃으며 윤태희를 돌아보았다.
“그래서 나는 나자가 되어 참 좋았단다. 그 시절에는 할 수 있는 일이 많이 없었거든. 자수를 놓거나, 집안 살림을 돌보거나, 좋은 혼처를 구해 아이를 낳고 부군을 섬기는 것만이 도리였지. 만약 나자가 되지 않았다면 절에 들어가 비구니가 되거나 혹은 무녀(巫女)가 되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어느 적당한 집안에서 마나님 노릇이나 하면서 살았을 것이고….”
청장은 활짝 흐드러진 능소화를 찬찬히 눈에 담았다.
“그랬다면 참으로 시시한 삶이 아니겠느냐.”
나는 왜 귀신을 보고 듣는 인간으로 태어났는가, 하늘은 나의 무엇을 필요로 하여 이 땅에 나를 내놓았는가, 숱한 번민과 절망 끝에서 어린 소녀는 마침내 자신의 자리를 찾았다.
하늘이 나에게 귀신을 보고 들을 줄 아는 재주를 내린 데는 필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니 나는 잘못된 존재가 아니다. 아무것도 망치지 않았다. 어쩌면 이 또한 섭리이리라….
‘어쩌면 나는 나자가 되기 위하여 이 땅의 부름을 받은 것인지도 모른다.’
나자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청장에게 있어 자신의 존재를 긍정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왕이 될 수는 없으니 방상시라도 되고 싶었습니까?”
청장은 슬쩍 걸음을 멈추더니, 말없이 윤태희를 돌아보았다.
“…….”
한참 만에야 청장은 “그럴지도 모르겠구나.” 하고 의외로 흔쾌히 중얼거렸다.
선택받은 인간이었던 묘정은 자신이 방상시인 것을 슬퍼했고, 자신에게 주어진 숙명을 짐처럼 여겼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때, 수향은 세상의 섭리 자체가 불공평한 것임을 깨달았다.
“그때는 걸핏하면 ‘세상은 왜 이다지도 불공평한가’하며 한탄했단다. 내가 갖고자 하는 것은 늘 남에게 있고, 나에게 필요가 없는 것이 남에게는 바라마지않는 것이기 마련이지.”
묘정은 그 자리에 있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리고 수향은 묘정 대신 자신이 그 자리에 앉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재겸은 불로불사를 저주로 여겼다. 그리고 수향은 영생을 원했다.
저 사람은 내가 원하는 것을 가지고 있음에도 왜 기뻐하지 않는가? 나는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가지고 있는데 저 사람은 왜 나를 함부로 부러워하는가? 세상, 혹은 신(神)이 불공평하다는 것은 그 자체로 섭리이거나 인간이 짊어지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비극인 셈이다.
“그랬군요. 여러모로 안타까운 이야기네요.”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윤태희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어쨌든 왕도, 방상시도 되지 못했으니.”
윤태희가 혼잣말처럼 내뱉은 말에, 정원을 거닐던 청장이 멈칫하며 걸음을 세웠다.
“…….”
방상시가 되지 못했다…?
“그게 무슨 말이지?”
발길을 멈춘 청장은 천천히 윤태희를 돌아보았다.
“내게 방상시의 탈이 있다는 걸, 너도 알고 있지 않으냐?”
청장이 무감한 얼굴로 되묻자, 윤태희가 대수롭지 않은 투로 대꾸했다.
“방상시의 탈을 가졌다고 아무나 현신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방상시의 탈을 가진다고 하여 모두가 현신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어디선가 들어 본 듯한 말이었다. 알 수 없는 위화감을 느낀 청장이 눈가를 가느다랗게 좁혀 뜰 때였다. 윤태희가 얼굴에 쓴 탈에 손을 가져가더니,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렇지 않습니까?”
반쯤 맨얼굴을 드러내 보인 윤태희가 눈동자를 스르륵 치켜떴다.
“윤가의 수향 선생.”
칼날처럼 잘 벼린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수향의 낯이 천천히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