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불 (333)화 (333/348)

#333

수향은 끝내 윤태희를 믿지 않았다.

윤태희는 눈 깜짝할 사이에 포위되어 있었다. 저를 원형으로 둘러싼 흰 가면들을 바라보던 윤태희는 자신을 겨누고 있는 날카로운 검 끝에서 수향의 두려움을 읽었다.

초인들이 일제히 공격을 시작했다.

윤태희는 한꺼번에 날아든 검을 받아냈다가 일시에 튕겨냈다.

눈앞의 초인들을 베고, 또 베어 나갔다.

시간이 갈수록 윤태희의 움직임은 조금씩 느려지고 있었다. 일시적인 진통제 역할을 해 주었던 정화부 약수는 어느새 효험이 바닥난 상태였다. 점점 통증이 심해지고 있었다.

주술로 부리는 게 명백한 이상에야 저것들을 없애려면 주술 자체를 파훼하거나 술자인 수향을 공격해야만 한다. 그러나 초인들이 이렇게 벽처럼 앞을 버티고 서 있으니 수향에게 접근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게다가 윤태희는 반동의 여파에 시달리느라 평소처럼 귀기를 운용하는 것조차 힘든 상황이었다. 어느 쪽으로 보나 점점 패색이 짙어지고 있었다.

윤태희는 싸늘한 낯으로 전세를 가늠했다.

수는 갈수록 늘어만 가고, 윤태희는 점점 한계에 이르고 있었다. 눈앞의 흰 얼굴들은 윤태희가 지쳐 쓰러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까마귀 떼 같았다. 여기서 한순간이라도 정신을 놓는다면 다음 장면은 없을 것이다. 윤태희는 비틀거리며 검 자루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때였다.

“수석님!”

어디선가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뒤를 돌아본 윤태희의 눈이 점점 크게 뜨였다. 저 멀리서 팀원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수석과 수습을 제외한 나머지 제1팀 팀원들 전원이었다.

팀원들이 와 줄 거라던 강이빈의 말은 사실이었던 것이다.

“이런…….”

뜻밖의 지원군이 등장하자 수향은 혀를 찼다.

얼굴에는 전에 없던 선명한 불쾌감이 서려 있었다.

이것은 예상 밖의 일이었다. 설마 같은 나자들을 포섭했을 줄은 몰랐다. 생각보다 점점 상황이 좋지 않게 돌아가고 있었다. 위기감을 느낀 수향은 더 많은 초인들을 끄집어냈다.

“수석님, 괜찮으세요?”

“저희 너무 늦은 건 아니죠?”

복도의 무리를 뚫고 여기까지 달려온 제1팀 팀원들은 홀로 버티고 서 있는 윤태희를 발견하자마자 곧바로 대열을 맞추어 섰다. 마치 다 함께 현장에 나섰던 여느 때처럼, 팀원들은 윤태희를 호위하듯이 초인들과 대치하는 듯한 모양새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아니 쟤네 여기 또 있어?”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아 진짜 미치겠네.”

초인들을 바라보던 팀원들이 머리를 벅벅 긁으며 저마다 불만을 토했다.

눈앞의 초인들은 이곳에 오기 전에 맞닥뜨렸던 초인들과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복도에서 마주친 초인들은 칼로 베는 대로 떨어져 나갔다가 시간이 지나면 다시 원상태로 재생할 뿐이었으나, 눈앞에 있는 초인들은 원상태로 복구됨은 물론이요, 그에 더하여 본체에서 떨어져 간 짚더미에서부터 새로운 초인들이 생겨나고 있었다. 초인들의 머릿수가 우후죽순으로 늘어나고 있으니, 상황이 거듭될수록 열세에 몰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만약 친위대를 뚫고 청장에게 간다 해도, 이런 몸 상태로 목패와 탈을 되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윤태희는 검을 휘둘러 초인들을 최대한 멀리 쳐낸 뒤, 검을 땅에 푹 꽂았다.

중심을 잡기 위해 애쓰는데, 시야가 점점 흐릿해졌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대체 뭘 어쩌자고, 다들 여기까지 왔는지 모를 일이다.

흐릿한 시야 속에서 윤태희는 문득 생각했다.

냉소적인 인간은 겁에 질린 인간이다.

그런 면에서 윤태희와 수향은 어딘가 닮아 있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윤태희에게는 재겸이 있었다는 것이다. 재겸을 만나지 않았다면 수향과 비슷한 인간으로 살았을 것이다. 윤태희는 재겸을 만나면서 타인이 주는 시선 한 톨, 손길 한 번, 사소한 순간 하나하나가 제 삶에 얼마나 큰 위력을 끼치는지 알게 되었다.

처음 문을 두드리고 들어온 것은 재겸이었으나 그 이후에는 석주련이, 팀원들이, 수많은 사람들이 물밀듯이 들어왔다. 이래서는 파도에 휩쓸릴 수밖에 없다. 그리고 파도에 휩쓸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존재만이 광활한 바다를 온몸으로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에 대한 믿음, 혹은 의지하는 마음, 어쩌면 우애와도 같은 것.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마음일 것이다. 설령 상처받고 배신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살아간다는 것은 계속해서 그 실패를 반복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수향은 매우 현명한 똑똑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윤태희는 지금 이 순간 소년을 생각했다.

수향의 눈으로 본다면, 재겸은 사랑하는 스승에게 배신당하고 버림받았음에도 결국에는 또다시 누군가에게 자신의 마음을 내어주고야 만 어리석은 인간일 것이다. 문득 소년이 보고 싶었다. 세상 모든 것에 관심이 없는 척하면서도, 냉소에 똘똘 뭉친 것처럼 보이면서도, 결국에는 정을 주고야 마는 실수를 계속 반복하는, 아름답고 강인한 소년이 보고 싶었다.

그때, 틈을 비집고 들어온 검 하나가 윤태희의 어깨를 스쳤다.

“윽!”

윤태희가 신음을 뱉으며 무릎을 꿇었다.

“수석님!”

표지호가 놀라서 목소리를 냈으나, 윤태희는 피할 겨를조차 없는지 어깨를 붙잡고 있었다. 초인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당장이라도 윤태희의 목을 꿰뚫을 것처럼 검을 내밀었다.

그때였다.

뻐억—

어디선가 돌이 날아들었다. 귀기가 실린 돌은 검을 부러뜨리고 어디론가 튕겨 나갔다. 튕겨 나간 돌은 나무에 박혀 있었다. 상황을 관전하고 있던 청장이 멈칫하며 고개를 틀었다.

무슨 신호를 받았는지, 친위대가 갑자기 움직임을 멈췄다.

“뭐, 뭐야!”

그에 따라서 당황한 팀원들도 행동을 멈췄다.

난데없이 날아든 돌에, 팀원들은 일제히 돌이 박힌 나무로 시선을 옮겼다. 그런데 돌이 박힌 나무가 검게 물들기 시작하더니 삽시간에 시들어 버렸다. 죽어버린 것이다.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아 얼굴을 일그러트린 채 기침을 토하고 있던 윤태희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모두의 시선이 나무에 박혀 있는 돌에 고정되어 있는데,

“누굴 손대.”

어디선가 목소리 하나가 들렸다.

죽어버린 나무를 바라보고 있던 모두의 시선이 동시에 어디론가 향했다.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바라보는데, 어느 한 곳에서 시선이 멈췄다. 높이 솟은 나무 꼭대기 위에 누군가 서 있었다. 달빛이 환한 덕분에 얼굴을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강이빈이 입술을 달싹였다.

“……재겸이?”

재겸과 똑같이 생긴 소년은 활대를 들고 있었고, 붉은 안개와도 같은 귀기에 휩싸여 있었다. 나무 꼭대기 위에 서 있던 소년이 활을 들어 올리더니, 턱 끝까지 시위를 당겼다.

화살이 날아든 방향은 수향이 서 있는 위치였다.

멀리서 소년과 눈이 마주친 순간이었다. 수향이 몸을 물리자마자 붉은 귀기를 두른 화살이 아슬아슬하게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빗나간 화살은 근처에 서 있던 초인을 관통했다.

화살에 맞은 초인은 조금 전의 나무와 마찬가지로 검게 물드는가 싶더니 파사삭, 흩어져 버렸다. 초인에게 걸린 주술마저 단번에 파훼해버린 것이었다. 수향의 낯이 매섭게 굳었다.

“…….”

팀원들이 하나 같이 말을 잃은 채 멍하니 재겸을 바라보고 있었다. 틀림없이 막내가 맞다. 그런데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보고서 하나 쓰는데도 반나절이 걸리고, 세상 물정 모르는 소년은 어마어마한 귀기를 두르고 있었으며, 저 멀리서 여기까지 활을 쏘고 있었다.

“뭐, 뭐야…….”

팀원들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소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앞에 있는 건 틀림없이 재겸이 맞다. 윤 수석이 직접 고른 후임이니 특출난 재목이라는 건 알았지만 저건 말이 안 됐다.

그때, 등 뒤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재겸의 등장에 놀란 것도 잠시, 낯선 기척을 느낀 팀원들이 황급히 몸을 돌렸다.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혹시 뒤에서 기습이라도 하는가 싶어서였다. 그런데 뒤를 돌자마자 눈에 들어온 광경은 예상 밖이었다. 땅에서 일 미터쯤 떨어진 허공에 말 한 마리가 둥실둥실 떠 있었던 것이다. 말이 하늘에 떠 있는 것도 놀라운데, 심지어 그 말 위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어린아이 한 명, 그리고…….

“저, 저저 정, 정, 정, 정주다.”

연예인.

낯익은 얼굴을 알아본 고준형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때, 허공에서 둥실거리던 비마가 땅에 안착했다.

그러자 연예인과 꼬마가 기다렸다는 듯이 땅으로 내려왔다. 팀원들이 흠칫하며 몸을 물릴 때였다. 키가 작달막한 꼬마 아이는 땅에 내려오자마자 곧바로 윤태희를 향해 다다다, 달려왔다. 팀원들은 멍하니 눈앞의 아이를 바라보았다. 아이가 다급하게 윤태희에게 말했다.

“윤 도령님! 괜찮으세요?”

……윤 도령님?

상당히 예스러운 호칭이었다. 어딜 봐도 아이가 쓸 법한 단어는 아니었다.

그때, 아이가 윤태희에게 손을 뻗었다. 아이의 손에서 하얀 빛무리가 쏟아져 내렸다. 어깨에 난 상처가 순식간에 아물기 시작했다. 팀원들이 멍하니 말을 잃고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없었다. 눈으로 보고도 믿어지지 않는 광경이었다.

“저, 저게 뭐야…?”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