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4
“윤 도령님! 괜찮으세요?”
……윤 도령님?
상당히 예스러운 호칭이었다. 어딜 봐도 아이가 쓸 법한 단어는 아니었다.
그때, 아이가 윤태희에게 손을 뻗었다. 아이의 손에서 하얀 빛무리가 쏟아져 내렸다. 어깨에 난 상처가 순식간에 아물기 시작했다. 팀원들이 멍하니 말을 잃고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없었다. 눈으로 보고도 믿어지지 않는 광경이었다.
“저, 저게 뭐야…?”
그때, 메산이와 함께 말에서 내린 정주가 곧장 땅에 부적 하나를 붙였다. 간단한 결계를 쳐둔 것이었다. 메산이가 윤태희를 완전히 치료할 정도의 시간 정도는 벌 수 있을 것이다.
때마침 낯익은 얼굴을 알아본 고준형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저, 저저 정, 정, 정, 정주다.”
연예인.
“하하. 안녕하세요… 많은 사랑 부탁드려요….”
정주가 어색하게 인사를 건넸다.
***
그 사이, 나무 꼭대기 위에 서 있던 소년은 모습을 감추고 어디론가 사라진 뒤였다.
수향은 재빨리 소년의 움직임을 좇았다. 소년은 숲속에 몸을 숨긴 채 아주 빠른 속도로 이동하고 있었다. 어두운 숲에서 화살이 연이어 날아들었다. 붉은 귀기를 두른 채 창공을 가르며 쏜살같이 날아든 화살 한 번에 초인 다섯, 여섯 개가 줄줄이 꿰이며 그대로 스러졌다. 겨우 화살 하나에 초인들이 줄줄이 사라지는 광경에 팀원들은 말을 잃고 멍하니 서 있었다.
친위대를 순식간에 파훼시켜 놓은 재겸이 붉은색 귀기를 내뿜으며 이쪽을 향해 다가왔다. 팀원들 근처 수풀에서 지푸라기 인형 하나가 튀어나온 것은 그와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뒤에!”
비마 근처에 서 있던 정주가 발을 굴렀다. 그러자 어디선가 황소만 한 크기의 은색 여우가 튀어나왔다. 은색 여우가 쏜살같이 달려와 팀원들에게 달려드는 짚 인형을 콱 물더니 그대로 내던졌다. 그러자 마찬가지로 짚 인형이 파스스, 흩어졌다. 팀원들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잠시 뒤, 은색 여우는 온데간데없고 그 자리에는 다시 ‘연예인’ 정주가 서 있었다.
팀원들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재겸을 바라보았다.
눈앞에 있는 건 TV 속의 그 사람이 틀림없었다.
“연, 연예인이… 영물, 영물이었어…….”
고준형이 멍하니 입술을 달싹였다.
“크흠.”
정주는 애써 태연한 척을 하며 커다란 나무 밑으로 걸어갔다. 손에 피를 낸 다음, 나무에 커다란 상형 문자 같은 것을 그렸다. 손바닥을 대고 뭐라 중얼거리자, 나무 껍데기 틈에서 빛이 새어 나오는가 싶더니, 커다란 문이 생겨났다. 정주는 곧바로 문을 활짝 열었다.
“여러분 일단 들어가세요, 얼른요.”
정주가 팀원들을 향해 다급하게 손짓했다. 팀원들이 매우 당황한 눈으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난생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팀원들에게 정주는 TV 속에서나 보던 유명 연예인이었다.
그런데 그 유명 연예인이 나무에 대고 문을 만들어냈다.
“저, 저 안에는 뭐가 있는데요?”
“이건 호문이에요.”
“호문(狐門)?”
표지호가 설핏 미간을 구길 때였다.
“어? 호, 호문이라면….”
고준형이 무엇인가를 떠올렸는지 설마, 하는 표정으로 정주를 바라보았다.
“호문은 호족들의 성채로 가는 문이에요. 호족이 아닌 자는 열 수 없으니 저 지푸라기 놈들이 안에 들어오진 못할 거예요. 그러니 빨리 피신해 계세요. 여기라면 안전할 거예요.”
“그, 그럼 저 두 사람은요?”
“저분들은 신경 안 써도 저분들끼리 알아서 하니까 걱정 마시고요.”
“네? 하, 하지만…….”
윤 수석과 재겸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둘을 놔두고 피신하라는 권유에 부담을 느꼈는지, 팀원들은 호문 안에 들어가기를 주저하는 눈치였다.
그러자 정주가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저기… 여러분한테는 정말로 죄송한 이야기이지만… 지켜야 할 사람이 늘어난다는 입장에서, 차라리 안전한 곳으로 대피해 주는 편이 훨씬 도움이 됩니다.”
팀원들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여우 정주는 연예인 이미지와는 다르게 할 말은 다 하는 타입이었다.
***
메산이는 도착하자마자 윤태희 치유에 나섰다. 손에서 하얀 빛무리가 쏟아져 내리자 어깨에 난 상처가 순식간에 아물기 시작했다. 난데없이 나타난 메산이와 정주, 재겸으로 인해서 윤태희는 정신이 하나도 없는 상태였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없었다.
“윤 도령님, 괜찮으세요?”
일단 눈에 보이는 상처부터 치료한 메산이가 윤태희의 손을 잡아 쥐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작게 기침을 뱉던 윤태희가 외려 질문을 던질 때였다.
“너 괜찮아?”
방금까지만 해도 나무 꼭대기에 있던 재겸이 눈 깜짝할 사이 곁에 와 있었다. 재겸은 신음을 흘리던 윤태희의 양 뺨을 감싸 쥐었다. 윤태희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몸 곳곳에 피가 묻어 있었고, 상처가 나 있었다. 윤태희의 상태부터 확인하던 재겸은 화를 억눌렀다.
“왜 너 혼자 여기까지 온 거야?”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윤태희.”
재겸이 눈을 꾹 감았다가 뜨더니 살벌한 얼굴로 말했다.
“경고하는데, 다시는 네 멋대로 움직이지 마.”
윤태희는 재겸이 자신을 많이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눈을 보면 알 수 있었다. 화가 난 것처럼 보이지만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고, 목소리도 희미하게 떨렸다.
“알겠어?”
“응.”
재겸의 손에 들려 있는 활과 붉은 귀기를 본 윤태희가 물었다.
“또 폭주한 거야?”
“아냐. 아직은.”
올 때부터 팔을 갈라서 활을 꺼내 두었다. 붉은 귀기는 재앙신의 힘이 맞지만, 활을 꺼내자마자 메산이를 통해서 상처를 치유했으니 엄밀히 따지면 폭주 상태는 아니었다.
“그럼 이 귀기는 왜….”
“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이리 와.”
재겸이 윤태희의 멱살을 콱 움켜쥐었다. 목을 조르는 것처럼 강한 힘이었다. 윤태희가 재겸의 손목을 양손으로 움켜잡으며 인상을 찡그릴 때였다. 재겸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도 들어가 있어.”
“어디를?”
“호문 안으로.”
뭐? 윤태희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안 가, 놔.”
“윤태희!”
재겸이 고함을 치며 윤태희를 노려보았다.
“내가 두 번, 세 번 말하게 하지 말랬지.”
“널 두고 어딜 가.”
나를 내버려 두고 혼자 여기까지 잘도 와 놓고서….
뜨거운 불덩이가 치솟아 오르는 듯했다. 당장이라도 고함을 칠 뻔하였으나 재겸은 가까스로 목 끝까지 치민 불덩이를 삭여냈다. 가파르게 오르락내리락했다. 스스로 기세를 꺾었다.
“태희야.”
재겸이 윤태희의 목덜미를 감싸 쥐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죽으면 나는 살아갈 자신이 없어.”
윤태희가 멈칫하며 재겸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니까 제발 들어가 있어.”
그때, 호문 앞에 서 있던 정주가 고함을 쳤다.
“빨리요, 어서요! 곧 문 닫혀요!”
팀원들은 이미 문 너머로 사라진 상태였다.
“재겸아! 시간 없어. 얼른…….”
옥신각신하는 두 사람을 지켜보며 발을 동동 구르던 정주는 일단 메산이를 향해 손짓했다. 너부터 들어가 있으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메산이는 어쩐지 굼뜬 걸음으로 오고 있었다.
“메산아, 너라도 빨리 와! 곧 문 닫혀!”
이번에는 메산이가 주저하고 있었다.
“얼른 이리 오라니까?”
복장 터진 정주가 가슴을 퍽퍽 두드렸다.
“왜! 너는 또! 왜 또! 뭔데!”
메산이가 두 손을 모아쥐더니 울먹거리며 말했다.
“그, 그치만 혹시라도 나리께서 다치시면은요…?”
갈등하던 정주는 결국 호문을 닫았다. 이로써 이곳에 남은 것은 재겸과 윤태희, 그리고 딸려온 식구들뿐이었다. 윤태희와 옥신각신하던 재겸이, 나머지는 들어가지 않았음을 눈치채고 정주를 응시했다. 몹시 살벌한 눈빛이었다. ‘약속하고는 다르잖아.’라고 말하는 듯했다. 재겸은 노기 서린 얼굴로 다가오더니, 정주에게 당장 메산이와 피신해 있으라고 말했으나,
“그… 호문은 보름에 한 번밖에 못 열어…….”
정주는 깨갱, 하며 시선을 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