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불 (335)화 (335/348)

#335

이곳에 오기 전, 세 식구는 한 가지 약속을 했다.

윤태희의 집에서 눈을 뜬 재겸이 가장 먼저 본 것은 알 수 없는 푸른 불이 오로라처럼 산등성이를 적시고 있는 광경이었다.

그걸 본 재겸은 어두운 밤거리를 정신없이 달려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했을 때 대문은 굳게 잠겨 있었고, 집안의 모든 불이 꺼져 있었다.

인기척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문틈으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심장이 두방망이질을 쳤다. 무언가 있다. 문고리를 잡는 손이 파르르 떨렸다. 망설이던 재겸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문을 열어젖힌 순간이었다. 몸을 말고 앉아 있던 여우가 고개를 들었다.

“너…….”

재겸은 멍하니 입술을 달싹였다.

방 안에는 커다란 은색 여우 한 마리가 몸을 둥글게 말고 앉아 있었다. 여우로 변한 정주였다. 문틈 사이로 번져 나오던 빛은 정주의 털에서 번져 나오던 광채였다. 방 안을 밝히는 불이 없는데도 정주의 은색 털에서는 은은한 빛이 뿜어나오고 있었다.

똬리를 튼 것처럼 둥글게 말고 있는 품 안에는 메산이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앞으로 많이 위험할지도 몰라요. 하지만 오늘 하루가 지나면 모든 게 끝날 겁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몸이 피할 만한 곳이 있으면 피신해 있어요.’

윤태희의 언질이 있었음에도 메산이와 정주는 집을 떠나지 않고 재겸을 기다렸다.

식구들은 무사했다.

모두 안전하다는 것을 확인하자 마음속 깊은 곳에서 안도감이 차오르며 일시에 긴장이 풀렸다. 재겸은 여우로 변한 정주의 옆구리에 몸을 붙이고 털썩 주저앉았다. 피부에 와닿는 털의 감촉이 부드러웠다. 기다리던 재겸이 나타나자 정주와 메산이가 벌컥 목소리를 냈다.

“나리!”

“재겸아!”

메산이의 주머니 속에서 유남생도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주인님, 괜찮으십니까요.”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으려는데, 정주가 한발 빠르게 입을 열었다.

“며칠 동안 연락도 안 되고, 지금까지 어디 있었던 거야?”

윤태희는 정주에게 피신해 있으라고 했지만, 재겸과 어떠한 연락도 닿지 않은 상황에서 윤태희의 말만 덥석 믿고 떠나려니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았다. 그러나 아무런 소식도 없이 집을 지키고 있으려니 걱정이 앞섰다. 혹시 침입자가 있을지도 모르고, 어떤 위험이 닥쳐올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 태평하게 마음 놓고 기다릴 수는 없었다. 때문에 정주는 만일을 대비하여, 발빠른 대응을 위해 본래의 모습인 여우로 변하여 재겸을 기다리던 중이었다.

정주가 재겸을 붙잡고 자초지종을 물었다.

그러나 지금은 대답할 겨를이 없었다. 식구들이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일단은 한시름 놓았다. 한시라도 빨리 윤태희가 있는 곳으로 넘어가야만 했다.

“나는, 나는 가 봐야 할 곳이 있어. 너희는 지금 바로 호문 안으로 들어가.”

재겸은 비마를 호출하는 마패를 챙겨서 서둘러 마당으로 뛰어나왔다.

“뭐? 어디 가는데?”

“태희가 위험해.”

“재겸아, 일단 좀 진정해.”

정주는 비마의 등 위로 올라타려고 하는 재겸의 팔을 붙잡았다.

“우리도 같이 갈게.”

“무슨 소리야. 놔.”

“태희 씨도 호문 안에 같이 들어가는 건 어때?”

재겸이 멈칫하며 메산이를 바라보았다.

어디까지나 재겸과 동행하기 위한 목적으로, 순간의 기지를 써서 내뱉은 말이었으나 정주는 자신의 작전이 통했음을 알았다. 고민하던 재겸은 도착하는 즉시 윤태희를 데리고 호문으로 함께 피신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뒤에야 합류를 허락했다.

“그럼 우리가 호문으로 들어가면, 너 혼자 뭘 어떻게 하려고?”

“몰라.”

나는 그곳에 혼자 남아서 무얼 할 수 있을까. 그 이후에 무엇을 어떻게 할지는 재겸도 몰랐다. 그러나 다만 분명한 것은, 수향을 대적할 수 있는 이는 저밖에 없다는 사실이었다.

비마에 올라탄 메산이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까마득하게 작아진 세상을 구경했다. 주머니 속에 숨어 있던 유남생도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비마가 아니었다면 청장의 요새에 도착하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을 것이다. 하늘을 달리는 비마 덕분에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었다.

먼 하늘에서 내려다본 윤태희는 멀리서 보기에도 평소와 같은 상태가 아니었다.

윤태희가 다쳤다는 걸 깨닫자마자 몸이 먼저 움직였다.

당장 땅으로 내려가려고 준비를 하는데, 정주가 재겸의 팔을 붙잡았다.

“재겸아, 잠깐만… 저기 봐!”

재겸이 멈칫하며 정주가 가리킨 방향을 보았다.

때마침 제1팀 팀원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알 수 없으나 팀원들이 윤태희의 편에 서 주고 있었다. 예상 밖의 일이었다. 잠시 상황을 가늠하던 재겸은 따로 움직이기로 했다. 재겸을 나무 위에 내려준 비마는 정주와 메산이를 싣고 창공을 한 바퀴 돌았다. 정주의 역할은 호문을 열고 팀원들과 윤태희를 무사히 피신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주는 이제 와서 약속을 어겼다.

호문을 닫아버린 것이다.

남은 건 재겸과 윤태희, 정주, 메산이, 유남생 그리고 하늘 높은 곳에서 이 모든 일을 눈요기로 삼는 비마.

“그… 호문은 보름에 한 번밖에 못 열어…….”

재겸은 무시무시한 낯으로 정주를 노려보았다.

“약속했잖아.”

재겸은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지금 너네까지 뭐 하자는 거야.”

그때, 재겸의 기세에 눌려 시선을 피했던 정주가 멈칫하더니 낯을 굳혔다.

“…….”

잠시 말이 없던 정주가 정색을 했다.

“우리는 항상 네가 하라는 대로만 해야 해?”

“…뭐?”

“너는, 기다리는 입장은 생각도 안 해?”

평소 잔소리가 많고 오지랖이 넓은 녀석이기는 하지만, 정주는 기본적으로 눈치가 빨라서 치고 빠져야 하는 자리를 기가 막히게 알았다. 그런데 정주는 오늘따라 물러서지 않고 있었다. 정주가 재겸을 상대로 이렇게까지 정색하면서 화를 내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왜 자꾸 짐짝처럼 취급하는데?”

정주도 알고 있었다. 지켜야 하는 사람 입장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보다 피하여 주는 게 도움이 된다고 팀원들에게 농담처럼 말했지만, 이는 재겸에게도 매한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정주는 마음이 상했다.

“그래, 미안하다. 도움도 안 되는데 얼쩡거려서.”

정주가 적반하장으로 나오자, 재겸의 표정이 더욱 살벌해졌다.

“이 새끼가…….”

재겸이 눈을 크게 뜨며 정주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설 때였다. 분위기가 한순간에 험악해졌다. 놀란 메산이가 안절부절못하며 둘 사이를 서성거렸다.

“나리, 정주 님… 싸우지 마세요….”

눈치를 보던 유남생도 주머니 속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어잇, 이럴 때가 아니지 않습니까요….”

그때, 정주가 울컥한 얼굴로 쏘아붙였다.

“아무것도 설명 안 해 주고, 맨날 말없이 다치고, 쓰러져서 오는데 왜 나는 항상 걱정만 해야 해? 너 연락 안 될 때마다 얼마나 조마조마한지 알아? 무슨 일 있었냐고 물어봐도 맨날 나중에, 나중에! 그래서 그 나중에가 도대체 언젠데?”

울분 섞인 토로에, 재겸이 멈칫하며 정주를 바라보았다.

“너는 기다리는 사람 입장은 생각도 안 해? 아무리 다쳐도 안 죽으니까 괜찮다고? 그래, 너는 그렇겠지! 그런데 재겸아, 네가 정말로 우리를 생각한다면 그러면 안 되는 거야. 넌 다치지 않고 돌아오길 바라는 마음이 어떤 건지 이해는 해?”

잠시 말을 멈춘 정주는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꾹 삭였다.

“너 유서까지 썼잖아.”

“…….”

“그게 마지막이면 어쩌나 했어.”

“…….”

마지막이라고 생각해서 편지를 썼었다.

그러나 이런 걸 원한 건 아니었다. 이렇게 얼굴을 붉히며 싸울 생각 같은 건 없었다. 서로가 서로를 소중히 여긴다는 것쯤은 재겸도, 정주도 알고 있었다. 그때는 작별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마지막 인사를 남기고 싶었을 뿐이다. 하지만 이제 재겸의 마음은 그때와 달랐다.

“너희는…….”

재겸이 입술을 달싹였다.

“너희는 내 가족이야.”

정주와 메산이가 멈칫하며 재겸을 바라보았다.

“짐이라고 생각한 적 없어.”

고개를 숙이고 있던 재겸이 주먹을 쥐었다 폈다가 하며 말을 이었다.

“그만큼 너희가 좋아서 그래.”

정주와 메산이가 없었다면 이 막막한 삶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정다움을 알려준 정주와 메산이에게 제대로 인사를 하고 싶었다. 지금까지는 늘 받기만 했으니까. 소중한 만큼 지키고 싶을 뿐이다. 혼자서 헤쳐왔다고 생각했으나 돌이켜 보면 재겸은 혼자가 아니었다.

“미안해. 마음이 너무 불안해서 그랬어.”

재겸은 고개를 숙이며 눈가를 문질렀다.

“너무 불안해서 그랬어…….”

사실은, 이곳에 온 순간부터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귀기를 끌어내는데 평소와 같은 귀기가 아니라 재앙신의 귀기가 흘러나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마치 원래 제 힘인 것처럼.

‘우리는 곧 하나가 될 거야.’

자유자재로 힘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이 불길하게만 느껴졌다.

‘내가 너의 운명을 부수어 주마.’

깨어나기 직전 들었던 그 말은 무슨 뜻이었을까. 폭주를 한 상태도 아니건만 재앙신의 힘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다는 것이 이상했다. 마치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끌어안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당장은 여기서 더 깊게 파고들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떠나지 않고 계속 이곳에 있어도 돼.”

게다가 어차피 호문이 닫혔으니 이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재겸은 정주를 믿었다.

“대신에 한 가지 부탁할게.”

그렇기에 자신에게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을 맡기기로 했다.

“태희를 지켜 줘.”

윤태희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기운의 흐름이 불안정했고, 반동의 여파로 인하여 몸이 몹시 약해져 있었고, 메산이에게 완전히 치유를 받는 데까지도 시간이 걸릴 것이었다.

그러나 정주가 곁을 지켜준다면, 돌발 상황이 생기더라도 괜찮을 것이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할 수만 있다면 그 전에 끝낼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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