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7
눈을 감았다가 떴을 때 제일 먼저 보인 것은 파란 하늘, 그리고 시야 한 귀퉁이에 있는 소년의 얼굴이었다. 재겸은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또다.
현실에서 의식을 잃고, 또다시 녀석의 구역에 떨어진 게 분명했다.
“안 돼!”
벌떡 몸을 일으킨 재겸이 소년의 멱살을 잡아 쥐었다. 다시 이곳에 떨어졌다면 빨리 현실로 돌아가야 했다. 재겸은 저번에도 그랬던 것처럼 소년이 자신을 깨워주기를 바랐다.
“밖으로 돌려보내 줘, 얼른.”
“왜 갑자기 멱살을 잡고 그래?”
“지금 이럴 때가 아니라는 걸 너도 알잖아!”
재겸이 급하게 다그쳤다.
“그러니까 누가 망설이래? 조영우든 누구든 간에 칼로 확 썰었어야지.”
“그럴 순 없었어. 걔는 아무 잘못도 없는 애야.”
“그래, 그러니까 네가 안 된다는 거야.”
그때, 소년이 멱살을 잡고 있던 재겸의 손을 붙잡았다. 그에 재겸은 멱살을 놓지 않기 위해 힘을 주었다. 그러나 소년은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너무도 손쉽게 재겸의 손을 떼어냈다.
“나는 이미 한 번 기회를 줬어. 그만큼 힘도 실어줬고. 하지만 너는 다시 이곳에 왔지. 너는 이제 내 허락이 없이는 이곳에서 나갈 수 없어. 왜냐면 이제는 내가 너보다 강하니까.”
“…뭐?”
재겸이 멍하니 되묻자, 소년이 장난꾸러기처럼 웃었다.
이제 둘은 어디까지가 재겸이고, 어디까지가 소년이라고 구분할 수 없을 만큼 뒤섞여 있었다. 이곳에 떨어지기 전, 재겸은 제힘이라도 되는 것처럼 붉은 귀기를 자유자재로 썼다. 그게 바로 증거였다. 주도권이 소년에게 넘어갔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재겸은 얼굴을 굳혔다.
이제는 소년의 허락이 없으면 이곳에서 나갈 수 없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때가 좋지 않았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었다. 윤태희의 이름을 되찾지도 못했고, 수향과 제대로 맞붙지도 못한 상태였다.
“그럴 순 없어. 돌아가야 해.”
“왜 돌아가야 하는데?”
“내 삶의 주인은 태희라고 했잖아. 나는 태희를 위해 살 거야. 그 애한테 원하는 건 전부 들어주겠다고 약속했어. 그러니까 돌아 가야 해. 빨리 돌아가서 태희를 지켜줘야만 해.”
소년이 심드렁한 얼굴을 했다.
“거짓말.”
“뭐?”
“거짓말 하지 마. 사실은 지금도 죽고 싶으면서.”
재겸이 인상을 썼다.
“그게 무슨 소리야?”
되묻는 말에, 소년이 피식 웃었다.
뭐긴,
누군가를 위해서 산다는 건 이상하니까.
봐, 너는 살아갈 이유가 없다고 했었지.
하지만 생각해 보면 살아야 할 이유 같은 건 갖다 붙이기 나름이야. 너는 태희를 위해 살겠다고 했지만, 만약 네가 누군가를 위해서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이었다면 너는 진작부터 정주를 위해서도, 메산이를 위해서도 살아가겠다는 결심을 할 수 있었을 거야. 안 그래?
하지만 너는 그러지 않았어.
왜일까?
정주와 메산이는 네 정답이 아니었던 거겠지.
그리고 태희는 너에게 있어서 꽤 그럴듯한 대답이었던 거고.
하지만 말야, 잘 생각해봐. 이 일을 계기로 본향은 태희에게 내렸던 가피를 거두어 들일 거다. 묘정에게 그랬듯이 말이야. 만약 일이 다 잘 풀려서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다고 해도 사람 인생이라는 건 모르는 거다. 윤태희는 당장 내일이라도 죽을 수 있는 인간이 된 거야.
그럼 너는 얼마든지 또 혼자 남겨질 수 있다는 거지.
“이제 그런 건 상관없어.”
거짓말.
“정말이야!”
거짓말이야.
“거짓말이 아니야!” 재겸이 양손으로 귀를 감싸 쥐며 소리를 질렀다.
“그동안 내게는 살아야 할 이유가 필요했어. 그전까지는 왜 살아야 하는지 의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어! 그래서 죽고 싶었어! 하지만 이제는 아니야. 나는 태희를 위해서 살 거야.”
그게 네 삶이야?
“그래.” 재겸이 악을 쓰듯이 대답하자, 소년이 물었다.
좋아, 그럼 너 말이야.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 그동안 ‘죽어야 할 이유’ 같은 게 있었냐?
“죽어야 할 이유라니?”
너 계속 죽고 싶어 했잖아.
“그냥 사는 게 싫었으니까. 그게 이유야.”
아니지. 그건 이유가 못 돼. 그건 감정이지. 감정은 언제나 바뀌는 거야. 그 자체로서 명분이나 당위가 될 수는 없는 거야. 너는 이제껏 죽어야 할 이유가 없는데도 죽고 싶어 했어.
“그래서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살기로 했건, 죽기로 했건, 그 이유는 중요하지 않다는 거야.
너는 앞으로 윤태희를 위해서 살겠다고 했어. 살아갈 이유를 찾았다고 하지만, 너는 앞으로도 살고 싶지 않을 거다. 왜냐면 죽어야 할 이유가 없는데도 계속 죽고 싶어 했으니까.
죽어야 할 이유가 없는데도 죽고 싶어서 하는 사람은, 살아야 할 이유가 있는데도 죽고 싶어 하거든. 왜인 줄 알아? 애초에 그렇게 생겨 먹은 인간이라서야. 그게 너의 운명이야.
남을 위해서 산다고 해도 그건 삶의 이유가 되지 않아.
왜냐면 그건 어차피 한순간일 뿐이니까. 너는 아마 평생 이렇게 살 거야. 죽을 수 있는 몸이 되어도 말이야. 아니, 오히려 평범하게 죽을 수 있는 몸이 된다면 그건 더 큰 문제지.
너는 앞으로도 때때로, 아무런 이유 없이 죽고 싶어질 거다.
“아니야!” 그때, 소년이 재겸의 멱살을 콱 잡아 쥐었다.
알아듣겠어? 넌 진짜로 살고 싶은 게 아니야.
어차피 남한테 줘 버릴 삶이라면 나한테 줘.
어차피 누군가에게 줘 버릴 삶이라면, 나한테 주는 건 왜 안 되는데!
“왜냐면 너는 재앙신이니까.”
웃기지 마. 그건 남들이 하는 얘기일 뿐이야. 중요한 건 내가 네 눈에는 뭐로 보이느냐겠지. 너는 저번 날 본향을 ‘운명’이라고 했어. 나는 너한테 있어서는 재앙신 같은 게 아니야.
“그럼 뭔데?”
그건 네가 대답할 문제야.
말해 봐, 네 눈에는 내가 뭐로 보이는지.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그딴 거 몰라.”
그때, 재겸을 노려보던 소년이 팔을 뻗었다.
“대답해.”
소년이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큭…….”
“본향이 운명이라면, 그럼 나는 뭐 같냐고!”
땅바닥에 처박힌 재겸을 향해 소년이 악을 썼다.
“대답해! 대답하란 말이야!”
재겸은 또 다른 저 자신을 올려다보았다.
소년은 멱살을 감싸 쥔 채 씩씩거리며 재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평화롭고 좁은 땅에 갇혀서 매일 장독을 들여다보고, 한 자리를 맴돌면서 같은 풍경을 보았을 녀석이 가여웠다.
아,
재겸은 문득 알 것 같았다.
자신과 똑 닮은 얼굴을 한 소년의 정체가 무엇인지.
“너는….”
재겸의 눈꼬리에서 눈물 한줄기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너는 죽고자 하는 마음이야.”
매섭게 굳어 있던 소년의 얼굴에 균열이 생겼다.
“…….”
멱살을 움켜쥐고 있던 손아귀에서 천천히 힘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너는 너무도 손쉽게 삶을 저버리려고 한다. 무엇에도 감흥을 느끼지 않고, 무엇에도 환희하지 않는다. 너는 삶을 버리고 싶게 만드는 욕구. 알 수 없는 무기력과 권태. 안개처럼 드리워진 과거의 미련. 무엇에도 기대하지 않는 마음. 모든 것을 놔 버리고 싶게 만드는 피로.
“…….”
“…….”
재겸과 소년은 말없이 서로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눈꼬리에서 비죽비죽 눈물이 흘러내렸다. 눈앞이 잘 보이지 않았으나 소년은 슬퍼하는 것 같기도 했고, 기뻐하는 것 같기도 했다.
왜 살아야 하느냐고 묻는 사람은, 사실은 누구보다도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아니야… 아니야… 그러지 마….”
어느 순간, 소년이 괴롭게 얼굴을 찌푸렸다.
“왜… 왜 그렇게 말해….”
소년은 멱살을 풀더니 재겸을 끌어안았다.
“그러지 마. 너는 나 없이 살아갈 수 없어. 내가 너를 지금까지 지켜줬잖아. 우리는 아주 오래전부터 한 몸이었잖아. 그러니까 네 삶을 내게 줘. 응? 아니, 주지 않아도 좋아. 그냥 계속 같이 있게 해줘. 내가 없으면 아무도 널 이해 못 해. 너는 외톨이가 되고 말 거야…….”
소년이 애원하듯이, 혹은 저주를 퍼붓듯이 말했다.
“세상 모두가 나를 재앙신이라고 해도 네가 나를 ‘수호신’이라고 한다면 나는 그렇게 될 거야. 네가 예뻐하는 인간이 있다면 내가 지켜줄게. 누구도 손끝 하나 댈 수 없도록 내가 보살펴 줄게. 네가 미워하는 인간이 있다면 혼을 내줄게. 벌을 내리고 앙갚음을 해 줄게….”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재겸의 목을 조르던 소년은, 어느샌가 재겸의 뺨에 자신의 뺨을 맞대고 있었다. 목소리는 위태롭게 떨리고 있었다. 마치 겁에 질린 아이 같았다.
“응? 어서 대답해, 계속해서 나랑 같이 살아가겠다고…….”
소년이 뺨을 비비며 떼를 쓰듯이 말했다.
“힘을 빌려달라면 그렇게 할게. 지금 당장 수향을 죽여달라고 한다면 그렇게 할게. 네가 원하는 걸 전부 다 이루어줄게!… 나는 너고, 너는 나잖아… 우리는 하나잖아, 응?”
슬픈 마음이 들었다. 비죽비죽 눈물을 흘리던 재겸은 천천히 손을 들어 소년의 뺨을 감싸 쥐었다. 소년은 어린 동생이거나 쌍둥이 같기도 하고, 혹은 제 분신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나는 너 같은 거 필요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