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0
재겸은 오랫동안 그 평안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곳은 평화롭고 고요했다.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있을 수 있었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벼락처럼 깨우친 진리 속에서 재겸은 마침내 방법을 깨달았다.
재겸은 저 멀리 서 있는 수향과 윤태희를 향해 천천히 다가가기 시작했다. 눈에서는 피눈물이 흘러 내리고, 다리는 후들후들 떨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재겸은 멈추지 않았다. 한 걸음 한 걸음씩 발을 내디딜 때마다 발치에 자라나 있는 풀이 시들고, 땅이 말라붙었다.
완전히 개방된 재앙신의 힘은 수향의 영토를 장악해 나가고 있었다.
재겸을 발견한 수향과 윤태희가 동시에 뒤를 돌아볼 때였다.
윤태희의 목패를 손에 쥐고 있던 수향은 그대로 정지한 채 낯을 굳혔다.
‘이게 무슨……’
재겸과 시선을 마주한 순간, 수향은 목석처럼 굳고 말았다. 소년의 몸 주변으로 붉은 귀기가 폭발하듯이 솟구치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압도적인 권능이 수향을 짓눌렀다.
엄청난 무게의 중력이 단숨에 온몸을 찍어 누르는 듯했다.
도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인지 알 수 없었다. 사지를 결박당한 것처럼 꼼짝할 수가 없었다. 그 자리에 그대로 못 박힌 채 서 있던 수향이 처음으로 선명한 동요를 보이기 시작했다.
“무, 무슨 수작을 부린 것이냐?”
소년과 하나가 된 재겸은 제 힘처럼 재앙신의 권능을 쓸 수 있었다. 그러나 재겸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수향을 노려보고 있던 재겸이 시선을 고정한 채 입을 달싹였다.
“윤태희.”
재겸은 윤태희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잘 들어.”
방상시의 탈을 가진 수향을 대적할 방법, 그리고 저와 하나가 된 녀석에게서 벗어나서 완전한 ‘나 자신’을 거머쥐는 방법, 그리하여 모든 것들 되돌리는 방법이었다.
재겸은 윤태희의 어깨를 잡고 ‘모든 것을 끝낼 방법’을 말해 주었다.
“나는 아마 오늘 여기서 수향과 함께 죽게 될 거야.”
현재 재겸의 혼과 재앙신의 혼은 한데 뒤엉켜 있는 상태였다.
오래전, 묘정은 재앙신이 재겸의 혼을 더 이상 잠식하지 못하도록 봉인되어 있던 재앙신을 더 깊은 곳에 눌러서 가두고, 구속하는 형구를 덧씌웠는데 그것이 바로 금(禁)줄이었다.
그러나 재겸이 그 금줄을 직접 끊어버리게 되면서 초가집 한 채와 마당뿐인 공간에 갇혀 있던 재앙신은 다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재겸의 몸 안에서 자유를 얻은 재앙신은 점점 힘을 되찾기 시작했고, 시간이 흐르며 둘의 혼은 점점 하나가 되어 가고 있었다.
오랜 세월 더 이상 들러붙지 못하는 상태로 멈춰 있던 두 혼은 이제 연리지처럼 하나로 이어져 있었다.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재겸이고,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소년인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칼로 무 자르듯이 완벽하게 혼을 반으로 나눌 수 있는 방법 같은 건 없으리라.
소년과 이어지게 된 재겸은 인간으로서는 올라설 수 없는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인간으로서는 볼 수 없었던 세상의 규칙과 수많은 정보가 활짝 열린 오감을 타고 쏟아져 들어왔고, 재겸은 수많은 정보 가운데서 공식을 만들 듯이 모든 것을 끝낼 수 있는 방법을 완성해냈다. 그것은 천 조각 몇 개를 고르고 그것들을 직조하여 조각보를 만드는 일과 비슷했다.
수향은 인신 공양이라는 금술로 귀재들의 생명력을 갈취하여 지금껏 삶을 연명해 왔다. 주술을 발동시킬 수 있다면, 그 주술을 상쇄하거나 파훼하는 방법 또한 존재하기 마련이었다.
재겸은 수향이 지금껏 삶을 유지해올 수 있었던 그 주술 자체를 깨트릴 생각이었다.
금술을 깨트린다면 수향의 몸은 삽시간에 원래대로 노화할 것이고, 육체는 더 이상 혼을 잡아두지 못할 것이다. 이제껏 수십 명의 생명을 재료로 써 온 주술을 깨트려야 하는 일이니 아주 강력한 의식이 될 것이었다. 그리고 강력한 의식에는 그만한 제물이 필요한 법이었다.
“…제물이라니?”
재겸의 설명을 듣던 윤태희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설마…….
수향의 금술을 파훼하는 의식을 행하는 데 필요한 조건.
그것은 바로 혼(魂) 하나를 제물로 바쳐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너도 알잖아.”
그리고 재겸에게는 마침 두 개의 혼이 있었다.
“내 몸 안에 재앙신이 있다는 거.”
잠시 말을 멈춘 재겸은 제 왼쪽 가슴팍을 움켜쥐었다.
“그러니까 내가 제물이 될게.”
다른 누구도 아닌, 오직 저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어느 쪽도 확신할 수 없다는 점에서 확률은 반반이었고, 사실상 도박에 가까웠다.
두 개의 혼 중에 무엇이 쓰이고, 무엇이 남겨질 것인가.
이것을 역이용한다면 녀석을 떼어낼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수향의 금술을 깨트리는 데 필요한 것은 혼 하나. 혼 하나는 수향과 함께 떠날 것이고, 혼 하나는 이 땅에 남을 것이다.
돌아올 수도 있고,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 살고 싶은 마음과 죽고 싶은 마음의 싸움이 될지도 모른다. 이제는 어디까지가 ‘나’이고 어디까지가 ‘녀석’인지 알 수 없었다. 녀석과 하나가 되면서 이제는 녀석의 눈으로 세상이 보였고, 녀석의 권능을 쓸 수 있는 지경에 이르렀으니까. 그나마 다행이라면 스스로를 완전히 잃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아직까지는 말이다.
사실 재겸은 직감하고 있었다. 지금은 간신히 녀석을 밀어내고, 몸의 주도권을 어렵사리 되찾았으나 어쩌면 지금 이 순간이 ‘나 자신’으로 있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재겸은 자신에게 주어진 단 한 번의 기회에, 제 모든 것을 걸어보기로 했다.
“꼭 돌아올게. 약속할게.”
윤태희는 설명을 끝낸 재겸의 앞을 황급히 가로막았다.
“그게 무슨 말이야?”
윤태희는 재겸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지금 같이 죽겠다는 거야?”
윤태희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수향이랑 같이?”
어떻게든 붙잡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안 돼, 안 돼, 재겸아. 정 그렇다면 내가, 내가 죽을게. 나 죽어서 영귀가 될게. 그러니까 제발, 우리 이제 그만하자. 도망가자. 같이 도망가겠다고 했잖아. 그냥 다 그만하고…….
윤태희는 애원했다. 화를 내는 것처럼 고함을 쳐 보고,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로 아무 말이나 뱉었다. 그럼에도 재겸은 끝내 뜻을 꺾지 않았다. 윤태희도 알고 있었다. 재겸은 한번 결정하면 물러서는 법이 없다는 것을. 그리고 재겸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움직여준 적이 없다는 사실도. 윤태희는 매달리듯이 재겸을 끌어안았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하면 돼?”
윤태희는 재겸을 끌어안은 채 고개를 푹 숙였다.
“널 기다리면 돼?”
“아니, 기다리지 마.”
재겸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저었다.
“…….”
잠시 말이 없던 윤태희는 어느 순간 작게 웃음을 뱉었다.
“돌아올 건데, 기다리지는 마라?”
“응, 기다리지 마.”
윤태희가 입술을 꾹 깨물며 먼 곳을 바라보았다. 울음을 참으려는 듯 한 차례 감정을 꾹 삭여낸 윤태희가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감았다. 길게 뻗은 속눈썹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
윤태희는 이를 악물고 붉어진 눈으로 재겸을 노려보았다. 마치 그게 말이 되냐는 듯이. 윤태희로서는 애초에 돌아오겠다는 재겸의 말 자체도 믿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재겸은 거기다 대고 기다리지 말라는 말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재겸은 정말로 진심이었다.
재겸은 윤태희가 저를 기다리지 않기를 바랐다. 왜냐하면 재겸은 일평생을 기다리며 살았다.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것을 기다리면서 살았다. 자신이 무엇을 기다리는지조차 모르는 채로, 눈앞이 깜깜한 사람처럼, 오지 않은 무언가를 기다리면서 그렇게 삶을 허비했다.
“만에 하나 내가 돌아오지 않더라도 괜찮아.”
“뭐가, 뭐가 괜찮아.”
윤태희가 미간을 구기며 실소를 흘렸다. 정말이지 어이없는 말을 들었다는 듯이, 잘게 헛숨을 내뱉던 윤태희는 어깨까지 떨면서 웃고 있었다. 울음과 닮아 있는 허탈한 웃음이었다.
“그게 말이 돼?”
윤태희는 결국 고개를 툭 떨어트렸다.
“그게 말이 돼…?”
무책임한 말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재겸은 기다리지 말라는 말밖에는 할 수 없었다. 아직 도래하지 않는 무언가를 기다리면서 살아가는 삶은 형벌과도 같으므로.
“지금 나더러 너를 잊고 살라는 거야?”
“아니, 아니야. 그런 말이 아니야.”
재겸은 윤태희가 소중한 순간들을 간직하고 살아가 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저를 기다려서는 안 되었다. 이게 무슨 마음인지 설명하고 싶었지만, 재겸은 아무리 생각해도 적당한 말을 생각해내지 못했다. 문득 마음이라는 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은 눈에 보이지도 않으며, 손으로 만질 수도 없다. 할 수만 있다면 마음을 온전히 꺼내서 윤태희의 손바닥에 올려놓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만약 그것이 심장이라고 하더라도.
“태희야.”
“응.”
“오늘이 가면 내일이 올 거야.”
“그래.”
“우리가 알아야 할 건 그게 전부야.”
내일을 기다리지 않아도, 어차피 내일은 온다.
“내가 없더라도, 그냥 너는 계속 살아가면 돼.”
그러니까 우리는 ‘오늘’을 잘 살면 되는 거다.
속눈썹에 매달린 눈물이 예뻤다. 언젠가 저 눈물을 빨아먹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재겸은 윤태희의 양 뺨을 감싸 쥐고 눈물로 젖은 속눈썹에 천천히 입술을 갖다 댔다. 그러자 윤태희가 잠시 눈을 감았다. 입술 틈으로 스며든 눈물은 미지근하면서도 짭짤한 맛이었다.
“태희야.”
재겸의 부름에, 윤태희가 감았던 눈을 뜰 때였다.
“미안해.”
눈물을 빨아먹은 재겸이 말했다.
“나 널 위해 살아갈 순 없을 것 같아.”
나는 오로지 나 자신을 위해서 살기로 했다.
오로지 나 자신을 위해서 나는, 네가 내 곁에 있기를 바라면서 살 것이다. 욕심이라고 해도 좋고, 이기적이라고 원망해도 좋다. 그러나 어쩔 도리가 없다. 이것이 나의 사랑이다.
재겸은 오늘에야 알게 되었다. 나를 사랑하지 않고선 다른 누군가를 사랑할 수 없다. 그래서 재겸은 소중한 것들을 사랑하기 위해서 이 삶을 먼저 사랑하기로 했다. 나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라, 주어진 생(生)을 사랑하라는 말은 아마도 ‘계속해서 살아가라’는 뜻일 거다.
깨어 있다는 건 아주 피곤한 일이다.
그래서 한때는 쉬고 싶었다. 재겸은 깨어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지쳐 있었다. 그래서 잠으로 도망쳤던 적도 있었고, 깨어 있으나 죽어 있는 것처럼 살았던 적도 있었다.
당장 내일이라도 예기치 못한 일로 윤태희와 이별하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안다. 언제까지고 정주와 메산이가 제 곁을 지켜줄 수 없을 것도 안다. 삶의 소중한 것들이 사라지고, 모든 것과 작별해야 하는 순간이 반드시 찾아올 것이다. 그럼에도 재겸은 깨어 있기로 했다. 이 광막하고 쓸쓸한 세상에 저 혼자 남겨지는 일이 몇 번이고 반복된다고 해도, 재겸은 저와 함께 남아 있는 것들이 스스로 생명을 다하는 그 날까지, 이 땅에 깨어 있기로 했다.
그리하여 나는 이 생(生)을 사랑해볼 작정이다.
“그러니까 태희야.”
재겸은 윤태희의 양쪽 뺨을 잡아 올리며 윤태희와 눈을 맞췄다.
“너도 너를 위해서 살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