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1
“너도 너를 위해서 살아.”
윤태희의 눈에서 또다시 눈물이 굴러 떨어졌다.
“그래, 그럴게.”
윤태희가 고개를 푹 숙이며 웃었다. 그렇게 한참을 조용히 웃던 윤태희가 큼지막한 손바닥으로 하관을 감싸 쥐더니, 눈물을 닦아내듯이 물기를 훔쳤다.
“만약에 다시 만나면, 나랑 같이 밥 먹을까?”
울음기가 남은 목소리로 윤태희가 속삭였다.
“알았어.”
“차도 같이 마셔줄래?”
재겸이 고개를 끄덕이자, 윤태희가 한 번 더 되물었다.
“매일매일?”
“응, 매일매일.”
윤태희가 반쯤 고개를 숙이며 미소를 지었다.
“그럼… 그냥 나랑 같이 살래?”
지나가듯이 툭 날아든 말에, 재겸은 눈을 두어번 깜빡였다.
“…….”
잠시 말이 없던 재겸의 입가에 천천히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래.”
아무도 우리를 알아보지 않는 곳으로 가자. 평범하고 시시콜콜하게 사는 거다. 끼니 때가 되면 밥을 지어먹고, 볕이 좋은 날이면 마루에 누워서 머리를 맞댄 채 낮잠을 자는 거다. 그렇게 까무룩 잠들었다가 눈울 떴을 때는 창밖에 해가 저무는 하늘이 펼쳐져 있을 것이고, 미처 끄지 못한 텔레비전에서는 시시껄렁한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을 것이다. 그러다 우리 둘중에 누군가 시답잖은 농담을 건넨다면 킬킬 웃어버리자.
그러다 이런 일상이 지루하게 느껴지면 바다에 가는 거다. 저번처럼 섬도 좋고, 산은 조금 지겹긴 하지만 단풍이 지거나 신록이 우거지는 계절에는 그만한 정취가 없으니 계절에 한 번씩 나들이를 가는 것도 좋을 거다. 그렇게 별볼일 없이 사는 거다.
그래, 그거면 된다.
‘내일’을 상상하던 재겸은 숨을 크게 들이쉬며 등을 돌렸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미라처럼 비쩍 말라붙는 수향의 모습이 보였다.
재앙신의 권능에 의해 움직임을 봉쇄당한 수향은 손 하나 꿈쩍하지 못한 채 땅에 붙어 있었다. 곱게 늙은 노인의 외양은 온데간데없이 수향의 몰골은 죽어 버린 나무와도 같았다.
재겸은 수향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수향의 손에는 목패가 들려 있었다. 윤태희의 이름이 적혀 있는 목패였다. 재겸은 수향의 손에서 목패를 빼내려고 했다. 수향은 목패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에 재겸은 수향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한순간에 원래의 세월만큼 늙어버린 수향은 외양이 몹시 초라해져 있었으나, 눈동자만은 맑고도 깊었다. 재겸과 눈을 똑바로 마주하려는 수향에게서는 마지막 발악 같은 것이 느껴졌다. 손아귀에 힘을 집어넣는 것이 느껴졌으나, 그럼에도 재겸은 손쉽게 목패를 빼냈다.
재겸은 윤태희에게 목패를 내밀었다.
“자. 네 이름이야.”
“고마워.”
재겸은 뺨에 흘러내린 피눈물을 닦으며 입을 열었다.
“이걸로 우리가 처음 했던 약속은 지킨 거야.”
“그래.”
“그럼 이제 나 갈게.”
“…….”
건네받은 목패를 내려다보다가, 윤태희가 입술을 달싹였다.
“…가기 전에 한 번만 안아 줄래?”
재겸은 양팔을 벌려 윤태희의 목을 끌어안았다.
“태희야.”
“응.”
있잖어, 나도 그때가 제일 좋았어…… 재겸이 조그만 목소리로 귓속말을 했다. 너는 사서 선생이었고 나는 의뭉스러운 전학생이었던 그때가 제일 좋았다고, 재겸이 소곤거리자 윤태희가 재겸을 끌어안으며 눈을 감았다. “나도.” 조용히 미소를 짓던 윤태희는 생각했다.
지나간 날은 어째서 그토록 눈부신가.
윤태희는 지금 이 순간 시간이 멈추길 바랐다.
“이제 진짜 가야 해.”
그러나 재겸은 어김없이 윤태희를 밀어냈다. 재앙신의 힘이 완전히 영토를 장악하고 나면 재겸 또한 주도권을 유지하기가 힘들어질 것이었다. 어느덧 주변의 생기는 전부 시들어 있었고, 저 멀리 떨어진 숲속까지 힘이 미쳐 땅이 메말라 가고 있었다. 마지막 기회였다.
“내가 떠나면 네가 해 줘야 하는 일이 있어.”
“뭔데?”
재겸은 말없이 윤태희의 손을 가져가더니 큼직한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에 윤태희가 고개를 들고 재겸을 바라볼 때였다.
재겸은 윤태희의 주먹을 말아 쥐며 활을 쥐여 주었다.
“태희야.”
활을 손에 쥐는 순간, 알 수 없는 전율이 투창처럼 뒷골을 관통하는 듯했다.
“묘정이 나를 많이 사랑해 줬어.”
재겸은 잠시 말을 멈추고 묘정의 활을 내려다보았다.
부채감을 느끼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그러나 재겸은 묘정에게 받은 사랑을 윤태희에게 돌려주고 싶지는 않았다. 내리 베푸는 것도, 돌려주는 것도 아니다. 그저 윤태희를 사랑하는 것뿐이었다. 이는 그저 아무런 셈법 없이, 사랑 받았음으로 배워서 행할 수 있는 것이었다.
“미안하다.”
재겸은 감정을 억누르며 애써 의연하게 말을 이었다.
“네 아버지를 뺏어서…….”
윤태희는 인상을 썼다.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만큼 재겸의 사과는 생각지 못한 것이었다. 윤태희는 작게 웃음을 흘렸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 말은 할 필요가 없다는 듯이. 그러나 재겸이 무슨 마음으로 건넨 말인지 알기에, 괜찮다는 소리는 입 밖에 내지 못했다. 어떤 말도 얹을 수가 없었다. 고개를 젓는 것이 윤태희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내가 수향이랑 하나가 되면, 그때 이 활로 쏘는 거야.”
“나 활 한 번도 쏴본 적 없어.”
“괜찮아. 잘할 수 있을 거야.”
재겸이 씩 웃었다. 소년다운 미소였다.
“왜냐면 넌 묘정 아들이니까.”
말을 마친 재겸은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수향에게 가까이 다가간 재겸은 땅에 떨어져 있던 검 한 자루를 들었다. 검 자루에 각인된 글씨를 보니 틀림없는 사인검(四寅劍)이었다.
“우린 너무 지긋지긋하게 오래 살았어.”
사인검(四寅劍)은 십이지간 중에서 호랑이를 뜻하는 인년(寅年), 인월(寅月), 인일(寅日), 인시(寅時)에 제작된 검으로 사인검에 찔려서 죽으면, 미련과 원한이 있어도 귀신이 되지 못하고 그대로 사라진다. 재겸은 수향의 주변으로 진을 그린 뒤, 손끝에 피를 묻히고 수향의 이마에 술식을 적었다. 피와 사인검으로 주술을 발동시키는, 아주 강력한 의식이었다.
“같이 가자.”
수향의 발치에 사인검을 푹 꽂아 넣으며, 재겸이 말했다.
“내가 당신의 길동무가 되어줄게.”
무어라 말을 하고 싶은지 수향이 입을 벙긋거렸다. 그러나 모든 기력을 땅에 빼앗겨 버린 수향에게는 한 마디 유언을 남길 기력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수향의 입에서 흘러나온 음절은 말이 되지 못한 채 흩어졌다. 사람의 형상이라기보다는 말라비틀어진 나무토막 같았다.
준비를 마친 재겸은 뒤를 돌아보았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는 윤태희가, 그보다 더 먼 곳에서 정주와 메산이가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나하나 눈에 눌러 담던 재겸은 정주와 메산이에게 멀리 물러나 있으라는 것처럼, 혹은 먼저 집으로 돌아가 있으라는 것처럼, 손을 훠이훠이 흔들며 인사를 남겼다.
“나으리!”
멀리서 메산이가 고함을 쳤다.
“안 돼요, 안 돼요….”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메산이는 정주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쳤다. 당장 재겸에게로 달려가고 싶었다. 그러나 정주는 무언가를 예감한 사람처럼 메산이를 끌어안은 팔에서 힘을 풀지 않고 있었다.
“흐어엉, 나으리! 나으리…!”
떼를 쓰듯이 몸부림을 치던 메산이가 끝내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괜찮아, 메산아. 괜찮아.”
정주는 목놓아서 우는 메산이를 꽉 끌어안았다.
괜찮아, 괜찮아, 메산아…….
정주는 떨리는 목소리로 누구에게 하는지 알 수 없는 말을 몇 번이고 중얼거렸다.
“껍데기라면 깨질 것이고.”
사인검으로 그린 원 바깥에 서 있던 재겸은 원 안에 발을 들이며 입을 열었다.
“허상이라면 사라질 것이며.”
수향의 이마에 피로 적은 술식에서 빛이 번쩍이기 시작했다.
“삿된 것이라면 물러날 것이다.”
주문을 외우던 재겸이 진 안으로 완전히 들어선 순간이었다.
한순간 엄청난 휘광이 번쩍였다. 윤태희도, 멀리서 상황을 지켜보던 정주와 메산이도 눈을 질끈 감았다. 온 세상이 하얗게 물드는 것처럼 큰 빛이 번쩍였다. 빛이 가시고 난 후, 땅바닥에는 두 사람만이 쓰러져 있었다. 윤태희는 검은 밤하늘에 떠오르는 불빛을 목도했다.
사람이 죽기 전에 몸에서 빠져나오는 푸른 불꽃, 혼불이었다. 죽음을 앞두고 인간에게서 태어나는 최초이자 마지막의 불빛. 살아온 생애의 모든 빛이 모여서 단 한 번 타오르고 지는 것. 머나먼 창공에서 하늘로 돌아가는 불빛을 본 윤태희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
윤태희가 붉게 물든 눈으로 활시위를 당겼다. 양쪽 눈가에 맺혀 있던 눈물이 간격을 두고 툭, 투둑, 떨어졌다. 끊어질 것처럼 팽팽하게 당긴 활시위가 손가락을 파고들었다.
활시위를 놓는 순간, 푸른 귀기를 두른 화살이 창공을 가르며 허공에 박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