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3
그날 이후로 반년의 시간이 흘렀다.
윤태희는 ‘그날’에 관하여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활시위를 놓는 순간, 거대한 푸른 불이 하늘에 번졌고, 시야가 완전히 날아갔다. 그리하여 모든 빛이 가셨을 때 윤태희의 눈에 보인 것은 저 멀리 쓰러진 수향과 재겸의 모습이었다.
수향의 몰골은 흉측했다. 혼이 떨어져 나간 육신은 썩은 나무처럼 말라비틀어져 있었고,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숨이 끊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수향의 몰골은 말 그대로 ‘죽음’의 형상이었다.
윤태희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재겸에게 다가갔다.
재겸아.
몇 번을 불러도 재겸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윤태희는 초점이 나간 눈으로 품에 안은 몸을 내려다보았다. 아무런 반응 없이 축 늘어져 있는 재겸은 속이 텅 빈 껍데기 같았다. 그러나 뺨을 맞댄 순간, 윤태희는 피부에 와닿는 희미한 숨결을 느꼈다. 재겸은 살아 있었다. 분명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육신 안에 혼이 남아 있다는 증거였다.
재겸이 살아 있음을 알게 된 순간, 윤태희는 웃었다.
재겸은 살았고, 수향은 죽었다. 깨달음과 동시에 하늘 한 귀퉁이가 일그러지며 왜곡되고 있었다. 술자인 수향의 죽음으로 그가 행한 모든 주술이 풀리게 되었고, 그에 따라 주술로 구현한 공간 또한 무너지고 있는 것이었다.
수향에게 조종당하던 인간들이 정신을 차린 것은 그 무렵이었다.
조영우를 비롯하여 고충에 의식을 지배당하던 인간들은 어안이 벙벙한 낯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바빴다. 그들은 하루아침에 날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자신들이 어떤 상황에 부닥쳐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들은 고술에 걸려 있던 동안의 모든 기억이 사라진 상태였다.
“어서 이곳을 빠져나가는 게 좋겠소.”
높은 하늘에서 구경꾼처럼 상황을 가늠하고 있던 비마는 이상함을 느끼고 땅으로 내려왔다. 시공간이 점점 비틀리고 있었다. 제때 빠져나가지 못하면 이 공간과 함께 사라지고 말 것이다. 비마는 이 사실을 곧바로 정주에게 알렸다.
정주는 깨어난 이들을 서둘러 문밖으로 내보냈다. 무고한 이들이었다. 재겸을 품에 안고 있던 윤태희는 정주의 손길에 이끌려 비마의 등에 올라탔다.
비마가 순식간에 하늘 위로 솟구쳐 올랐다.
구름을 뚫고 먼 창공을 내달리던 비마는 어느 순간 “떨어지지 않게 꽉 잡으시오.” 하더니, 수향이 주술로 구현해낸 공간 틈 사이를 비집고 단숨에 빠져나왔다. 윤태희는 재겸을 품에 안은 채 멍하니 발밑을 쳐다보았다.
품에 안고 있는 재겸의 체온은 따듯했다. 지상에서 멀어지자 몸이 일순간에 붕 떠오르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알 수 없는 안도감과 함께 시야가 점차 흐릿해졌다. 윤태희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잠에서 깼을 때, 제일 먼저 보인 것은 유남생의 얼굴이었다.
윤태희는 제 가슴팍 위에 올라와 코를 골며 자는 유남생을 보고 ‘지금 이게 현실인가?’ 하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쩐지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마치 꿈을 꾼 것 같기도 했다.
윤태희는 정주에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다. 윤태희는 자신이 어떻게 돌아오게 되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정신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정주는 비마가 이곳까지 태워다 주었노라고 답했다.
윤태희가 물었다.
‘겸이 어디 있어요?’
정주는 별말 없이 윤태희를 재겸의 방으로 안내했다. 방문을 열었을 때, 재겸은 침대에 누워 곤히 잠들어 있었다. 윤태희는 그제서야 자신이 꿈을 꾼 게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주는 기억이 온전치 못한 윤태희에게 그날 있었던 일을 설명해 주었다. 윤태희는 마침내 모든 일이 끝이 났다는 것을 알았다.
재겸은 살아 있고, 수향은 죽었다.
안도한 윤태희는 그대로 쓰러지듯이 다시 잠에 빠졌다. 그렇게 사흘을 내리 잤다. 그토록 오래 자 본 것은 처음이었다. 긴 잠에서 깨어나 눈을 떴을 때도 정주와 메산이는 여전히 윤태희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 그들을 위해서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동안 하지 못한 말이 있어요.’
윤태희는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자신이 나자가 된 이유와 재겸을 나자로 만든 이유에 관해서. 그리고 그동안 있었던 모든 일에 관해서. 짧다고 짧고 길다면 긴 이야기에 메산이와 정주는 귀를 기울였고, 모든 이야기를 마쳤을 때는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아 있었다.
‘미안합니다.’
윤태희는 정주와 메산이가 큰 충격을 받거나, 어쩌면 화를 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따지고 보면 모든 일의 시작점에는 윤태희가 있었다. 처음부터 목적을 숨기고 접근했고, 지금까지 정주와 메산이를 속여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왜 그런 제안을 했느냐고, 재겸이 이런 일에 휩쓸린 건 전부 당신 탓이라고 분노하며 멱살을 잡아도 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정주는 오랫동안 침묵했다. 메산이도 마찬가지였다. 숨 막히는 정적이 흘렀다. 시간이 멈춘 게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가만히 앉아 있던 정주가 어느 순간 몸을 일으켰다. 정주는 뒷짐을 진 채 한참 동안 창가를 서성거려야만 했다. 그러지 않으면 볼썽사납게 울어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긴 침묵 끝에 정주가 말했다.
‘태희 씨가 미안해할 이유는 없어요. 저는 그냥 재겸이가 하고 싶은 대로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재겸이는 나자가 되고 싶다고 했고, 그래서 서울로 올라와서 살고 싶다고 했어요. 그래서 온 거예요.’
감정을 추스른 정주는 예상외로 차분했다.
‘그건 재겸이의 선택이었고, 저는 그걸 따랐어요. 그리고 그건 제 선택이었고요. 재겸이가 왜 저희한테 그걸 비밀로 했는지도 알겠어요.’
재겸이 죽고 싶어 한다는 것은 정주도 익히 알던 사실이었다. 그건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재겸에게 활력이 생겼다. 생각해보면 오랜 세월 지쳐 있던 재겸에게 하루아침에 갑자기 삶의 의욕이 생겨났다는 건 아무래도 이상한 일이었다.
이제는 괜찮냐고 물어볼 수도 있었다. 아니, 적어도 한 번쯤은 물어봤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국 아무것도 묻지 않은 건 정주였다. 혹시나 재겸이가 죽고 싶다고 대답할까 봐.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차마 묻지 못했다.
재겸은 정이 많고 마음이 여린 인간이었다. 모질게 밀어내지도, 칼같이 잘라내지도 못하는 성격이라는 것쯤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재겸이 사실대로 털어놓지 않은 건 아마 미안해서일 거다.
스스로 삶을 등지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 무엇이 진정으로 그를 위한 일인가 생각하면 답은 알 수 없다. 원하는 대로 보내주는 게 맞는 건지, 아니면 붙잡는 게 맞는 건지. 억지로 붙잡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마음이 슬펐다.
그러나 그것은 어쩔 도리가 없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정주는 괜찮다고 했다.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이제 서울에서 살 이유는 없어졌네요.’
정주는 웃으며 말했다. 한없이 서글픈 마음이 들면서도, 동시에 홀가분했다. 단 하나 중요한 것이 있다면, 재겸이 계속 살아가겠노라 결심했다는 것이다. 고집이 센 재겸은 한번 결정한 일에서는 물러서는 법이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입 밖으로 낸 약속은 전부 지켰다. 재겸은 이곳에 있고, 다시 돌아올 것이다.
정주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정주는 윤태희에게 서울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예전에 살던 시골집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함께 가겠느냐고 묻자, 윤태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기묘한 동거가 시작되었다.
윤태희가 들어와 살게 되면서 가구를 새로 들였다. 2층에 남는 방 가운데 하나를 서재로, 다른 방은 침실로 쓰게 되었고, 식탁도 더 널찍한 것으로 바꿨다.
식구가 늘었으니 조금 더 넓은 식탁을 쓰는 게 좋지 않겠느냐는 것이 정주의 의견이었다.
식사 시간이 되면 새 식탁에는 언제나 한 벌의 수저가 더 올라왔다. 둘만 먹을 때는 세 벌의 수저가, 셋이 먹을 때는 네 벌의 수저가 올라왔다. 그러나 한 자리는 항상 비어 있었다. 그것은 누구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암묵적인 규칙이자, 언제라도 재겸이 깨어날 것만 같다는 ‘기대’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칼이 도마에 부딪히는 울림과 밥솥에서 김이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긴 잠에서 깨어난 재겸이 늘어지게 하품을 하면서 방문을 열고 나온다.
잠이 덜 깬 얼굴로 식탁에 앉아서 밥 푸는 것을 거들거나, 냉장고에서 반찬을 꺼내거나, ‘밥때가 됐으면 재깍재깍 나와서 앉아 있어야지.’ 하고 비몽사몽 잔소리를 해대면서 놀러 나간 메산이와 유남생을 찾으러 갈 것이다.
그래서 언제나 식탁 한편은 항상 비워 두었다.
윤태희는 어느 순간 ‘식구(食口)’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한집에 살면서 끼니를 같이하는 것.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누군가를 위해서 불 하나를 켜놓고 자리를 비워 놓는 것. 왜 수저 하나를 더 놓았느냐고 구태여 묻지 않는 것. 서로를 향한 보이지 않는 마음 같은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