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불 (344)화 (344/348)

#344

석주련이 눈을 뜬 곳은 병원이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석주련은 자신의 얼굴에 인공호흡기가 씌워져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과다출혈에 장기 일부가 손상되어 많이 위중한 상태였다. 의식이 없는 사이에 몇 번이나 고비가 찾아왔다고 했다. 귀기의 실린 검에 당했더라면 틀림없이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주변에 나자들이 있어 늦지 않게 처치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 천운이었다.

석주련은 한동안 병원 신세를 져야만 했다. 나례청과 연계된 병원에서 정화부와 의료진의 치료를 받으며 차차 안정적인 회복세에 접어들기까지 두 달이 걸렸고, 퇴원할 수 있었다.

벽사단의 습격으로 인해 나례청은 실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사망자는 없었으나 163명의 부상자가 발생했고, 정전 일부가 파손되면서 종묘는 보수공가에 들어가게 되었다. 한창 박차를 가하고 있던 지부 건설 공사 역시 중단되었고, 수습과 복구에 매진했다. 모든 업무를 일시 중지하고 나례청은 임시 폐쇄 조치에 들어가게 되었다.

나례청 정상화를 위한 특별대책본부가 설립되었고 진상조사위원회가 구성되었다.

본청 내부에서 ‘벽사단을 끝까지 추적해야 한다’, ‘수뇌인 윤태희를 수배해야 한다’는 주장이 흘러나오고 있었으나. 벽사단이 습격했다는 사실을 접한 윗선에서는 노골적으로 껄끄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벽사단이라는 존재가 수면 위에 드러나는 것을 꺼린 탓이었다.

지난 세월 동안 비선 조직으로서 입지를 다져온 벽사단은 고위 공직자와 정재계 인사들을 상대로 의뢰를 받으며 해결사를 자처해 왔다. 그 과정에서 많은 정보를 손에 얻을 수 있었는데, 바깥에는 알려져서는 안 되는 약점, 내지는 사적으로 민감한 사안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 벽사단을 탈탈 파헤친다면, 알려져서는 안 되는 비밀들이 세상에 탄로 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때문에 그들은 벽사단에 대해서 깊게 파고드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나례청에 적당히 무마하라는 식으로 입김을 넣었다. 윗선의 개입으로 놀라울 정도로 흐지부지되었다.

지난 10년간 줄을 대어 놓은 효과를 톡톡히 본 셈이었다.

윤태희에게서 연락이 온 건 그로부터 몇 주가 지났을 무렵이었다.

어느 날 석주련은 창틀에 놓인 쪽지 하나를 발견했다. 쪽지 속에는 일시와 장소가 적혀 있었다. 반듯한 글씨체를 본 순간 석주련은 이것이 윤태희에게서 온 것임을 깨달았다.

종이에 적힌 주소는 도심 외곽에 있는 한적한 카페였다. 약속 시간에 맞춰 카페에 도착한 석주련은 카페 내부를 둘러보았다. 아직 윤태희는 없었다. 창가 근처의 비어있는 자리에 앉으니 조용하고 평화로운 정경이 내다보였다. 테이블 위로 쏟아져 내리는 햇볕이 따스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먼저 와 계셨네요.”

뒤에서 불쑥 날아든 목소리에 석주련이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윤태희가 서 있었다.

윤태희는 후드 티에 롱 패딩을 입고 있었다. 항상 수트를 입은 모습만 보다가 이렇게 편한 차림으로 있으니 언뜻 보면 대학생 같았다. 나자가 아닌 윤태희는 평범한 청년이었다.

“주문 아직 안 하셨죠?”

머리에 후드를 뒤집어쓰고 패딩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로 나타난 윤태희는 어제 만난 사람처럼 태연했다. 석주련이 고개를 끄덕이자 윤태희는 “그럼 먼저 주문부터 해야겠네요.” 하더니 카운터로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윤태희가 음료 두 잔을 들고 자리로 돌아왔다.

주문한 음료는 따뜻한 캐모마일 티 한 잔과 자몽 에이드였다. 윤태희는 캐모마일 티를 석주련 앞에 놔 주었다. 무엇을 마시겠다고 말도 하지도 않았건만 알아서 주문한 모양이었다.

말없이 제 앞에 놓인 차를 내려다보고 있으니, 윤태희가 말했다.

“부장님 단 것도 싫어하시고 커피도 잘 안 드시잖아요.”

이럴 때면 긴 세월을 함께 했음을 체감하게 된다. 단 것을 싫어하고, 커피를 안 마신다고 직접 입 밖으로 꺼내어 말한 적은 없다. 그런데도 윤태희는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오랫동안 일정한 거리에서 서로를 지켜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깊은 속내 같은 건 알 수 없을지라도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는 자연스럽게 알고 있었다.

“얼굴이 많이 상하셨네요.”

빨대로 음료를 휘젓던 윤태희가 고개를 들고 석주련을 쳐다보았다. 이렇게 대면한 것은 오랜만이었다. 석주련은 잠시 윤태희와 눈을 맞추고 있다가 어느 순간 슬쩍 시선을 돌렸다.

윤태희는 석주련이 보기 드물게 긴장한 상태라는 것을 눈치챘다.

윤태희에게 있어 석주련은 청장의 하수인이자 가족을 죽인 원수였다. 그 사실을 알고 나니 석주련은 윤태희의 눈을 쳐다보는 것이 힘들었다. 혼란스럽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윤태희 앞에서 석주련은 죄인일 수밖에 없었다.

“그날 목패는 되찾았나?”

석주련은 애써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네, 찾아서 없앴어요.”

“그럼 이제 나자 한 명쯤 죽여도 아무런 탈도 없겠군.”

“그렇죠.”

“그래서, 못다 한 복수는 언제쯤 마저 할 생각이지?”

넌지시 날아든 말에, 윤태희가 눈썹 한쪽을 들어 올렸다.

“…….”

잠시 말이 없던 윤태희가 어느 순간 피식 웃었다. 석주련은 자신을 언제쯤 죽일 것이냐고 덤덤하게 묻고 있었다. 마치 내 생사를 결정할 권리는 너에게 있다, 고 말하는 것 같았다.

“저 부장님 죽일 생각 없어요.”

빨대로 음료를 휘적거리던 윤태희가 혼잣말처럼 덧붙였다.

“그럴 생각이었으면 병원에 찾아갔던 날에 손을 썼겠죠.”

찻잔을 입에 가져다 대던 석주련이 윤태희를 쳐다보았다.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의 일이다. 어느 깊은 밤, 약 기운에 취해 잠에 빠졌던 석주련은 가물거리는 시야 속에서 언젠가처럼 잠든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윤태희의 얼굴을 보았다. 싸늘하고 무표정한 눈이었다. 석주련은 윤태희가 저를 죽일 생각으로 찾아왔다고 생각했다.

병실 주변에 나자들이 깔려 있어 경비가 삼엄했을 텐데 어떻게 뚫고 들어왔을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고, 뭐라 말을 하고 싶었지만 금세 눈이 감겼다. 윤태희는 석주련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얼마 뒤에 조용히 자리를 떴다. 의식이 오락가락하는 와중이었으므로 석주련은 자신이 헛것을 보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정말로 윤태희가 다녀간 게 맞았던 거다.

“…….”

잠시 침묵하던 석주련이 조용히 입술을 달싹였다.

“왜 병원에 찾아왔었던 거지?”

“그냥 잘 계시는지 궁금해서요.”

“너는 내게 복수를 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나?”

“그랬죠. 근데 이젠 뭐, 됐어요.”

윤태희가 꺼내놓은 대답은 과거형이었다.

“뭐가 됐다는 거지?”

“이만큼 했으면 됐다 싶은 거죠.”

태평하게 음료를 마시던 윤태희가 무심한 어조로 덧붙였다.

”문득 다 부질없는 짓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복수를 한다고 해서 세상을 떠난 윤원중과 수살귀가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지나간 모든 일들이 없던 일이 되는 것도 아니다. 이러나저러나 윤태희는 모든 기억을 짊어지고 살아가야만 했다. 그리고 윤태희는 제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는 ‘누군가’를 더 늘리고 싶지 않았다.

”대신에 그건 알아주세요.“

”무얼 말이지?“

”저 부장님 용서 안 합니다.“

찻잔을 쥐고 있던 석주련의 손이 멈칫했다. 예고 없이 핵심을 찔러 놓고도 윤태희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음료 컵에 입술을 갖다 대더니, 컵에 담겨 있던 얼음 하나를 입에 물었다.

겨우 이 한마디가, 석주련을 향한 윤태희의 ‘복수’였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하게 굴었으나, 윤태희는 석주련을 용서하지 않았다. 윤태희는 언제나처럼 대화의 주도권을 한순간에 휘어잡았다. 윤태희와 대화를 하다 보면 질질 끌려가는 느낌이 들 때가 있었다. 지금도 그랬다. 평정심을 유지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용서를 받고 싶다는 마음 같은 건 없었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석주련은 자신이 지은 죄를 갚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럼 나는 뭘 하면 되지?”

석주련의 물음에, 윤태희가 작게 웃었다.

“하긴 뭘 해요. 그냥 알아서 잘 사세요.”

잠시 말이 없던 석주련이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윗선에서는 나례청이 없어지기를 바라지 않는 모양이야.”

“그래요?”

“전부 사실대로 밝히고 싶다는 생각은 없나?”

현재 윤태희는 내란을 꾀한 혐의로 수배 중이었다. 그러나 청장을 끌어내린 장본인인 데다 방상시의 후손임을 밝힌다면 원하는 방향으로 나례청을 이끌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내란을 꾀했다고 하더라도 그 내막이 알려진다면, 윤태희는 나례청의 새 주인이 될 수도 있었다.

“네가 원한다면, 내가 직접 진실을 밝혀줄 수도 있어.”

어찌 됐든 윤태희는 사건의 당사자였다.

“글쎄요. 딱히 그럴 이유 없지 않나요.”

그러나 윤태희에게는 이러한 내막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알려야겠다는 의무감 같은 건 없었다. 딱히 세상에 반드시 남겨둬야 하는 이야기도 아니었다. 어차피 이미 전부 지난 일일 뿐이다. 나례청의 역사로 남기기보다는 과거의 사연으로서 잊히길 바랐다.

“원래대로라면 네가 있어야 할 자리니까.”

“그거야 옛날얘기죠. 제가 무슨 권리로요? 지금이 무슨 조선시대도 아니고, 요즘 같은 세상에 그런 게 어디 있어요. 하다못해 초등학교 반장 뽑을 때도 투표로 뽑는 시대인데요.”

이제 와서 그 자리가 원래 누구의 자리였는지 밝히며 정통성을 따져봤자 우스울 뿐이다. 게다가 그것은 과거를 답습하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윤태희는 방상시의 저주에서 벗어난 최초의 인간이었다. 저주를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서 선대 방상시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윤태희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제 발로 그 자리로 다시 돌아가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었다.

“이제 저랑은 상관없는 일이고, 어떻게 되든 관심 없습니다.”

과거의 사슬은 전부 끊어냈다.

“나례청을 다시 세우든 어쩌든 그건 남은 사람들끼리 알아서 하세요.”

수향의 나례청을 무너트렸다. 그것으로 윤태희의 복수는 끝났다.

“이제 방상시 같은 건 이 세상에 없어요.”

수향은 죽는 그 순간까지 끝내 탈을 넘기지 않았다. 그리고 방상시의 탈은 수향이 만든 공간과 함께 이 세상에서 영영 사라졌을 것이다. 이제 와서는 탈을 되찾아야 할 이유는 사라진 상태였고, 탈에 대한 미련이 없었다. 바라는 것이 있다면 재겸이 돌아오는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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