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5
윤태희와 재회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석주련은 징계위원회에 회부되었다.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윤태희를 막아서지 않았다는 것을 이유로 석주련에게 비난의 화살이 쏟아졌다. 그에 석주련은 최소한의 인수인계를 끝마친 후에 축역부장직에서 물러나겠다는 의사를 밝히며, 청장이 금술을 이용하여 몇백 년 넘게 삶을 연명했다는 사실과 초라니와 귀재를 제물로 삼았다는 사실 등 자신이 알고 있던 모든 것을 털어 놓았다.
이백 년 넘게 살아온 청장이 지금의 나례청을 재건하기까지 내부에서 비윤리적인 일이 자행되고 있었음을 실토한 석주련은 그 명령을 따른 자신에게도 죄가 있음을 고백했다. 그 사실이 알려지면서 나례청 안팎으로 어마어마한 파장이 일었고, 모두가 큰 충격에 휩싸였다.
그 과정에서 엘리베이터에 특정 홀수 층 버튼 몇 개를 눌러야만 도착할 수 있었던 나례청장실의 위치도 드러나게 되었다. 청장실 내부와 이어지던 비밀의 공간은 어느샌가 사라져 있었다. 문 너머에 자리하던 아름다운 풍경은 온데간데없이 시멘트로 된 벽면이 전부였다.
그날 이후로 그 문 안으로 들어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자들 사이에서는 ‘나례청은 죄의 대가를 치른 것’이라는 여론이 형성되었다. 그 연장선으로 귀신을 주적으로 내세우던 본청 특유의 분위기는 점차 사그라들기 시작했고, 내부에서는 나례청의 방식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는 자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여파로 인하여 얼마 전에는 나례청의 행태에 크게 실망한 나자들이 대거 사직하는 일이 있었다. 사표를 제출한 나자들 대부분은 나자 일에 커다란 사명감과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이들이었다.
제구부 제1팀 수석 이영신은 나례청에 남기로 결정했다. 이보다 적성에 맞는 직업을 찾기 힘들 것 같다는 것이 이유였다. 재겸과 동기였던 임효문은 얼마 전 수습 딱지를 떼고 정식으로 나자가 되었다. 윤태희가 몸담고 있던 축역부 제1팀의 수석 자리는 공석으로 남게 되었고, 제1팀 팀원들 대부분은 나례청에 잔류하였지만 강이빈은 나자 일을 그만두기로 했다.
조영우를 비롯하여 청장에게 붙잡혀 조종당하던 귀재들은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갔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벽사단은 그날 이후 자취를 감췄다.
하루아침에 증발하듯이 사라졌던 축역부 제1팀은 하나같이 행방이 묘연하였으나, 그로부터 보름이 지나서 나례청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호문에 들어갔다가 빠져나온 축역부 제1팀 팀원들과 부상을 당했던 석주련은 그날 이후 정신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그날 있었던 일과 깊게 연관되어 있는 증인으로서 이곳저곳 불려 다녀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그날 일이 최종적으로 어떻게 되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례청을 다시 세우든 어쩌든 그건 남은 사람들끼리 알아서 하세요. 이제 저랑은 상관 없는 일이고, 어떻게 되든 관심 없습니다.”
저와는 상관 없는 일이라며 확실하게 선을 그었지만, 그 이후로도 석주련에게서 가끔 연락이 왔다. 석주련은 윤태희에게 전화를 걸어서 현재 나례청의 상황은 어떻고, 일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소식을 전해주고는 했다. 그것이 최소한의 도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앞으로 저 같은 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시고, 알아서 잘 사세요.”
그러나 윤태희는 무심한 태도로 일관했다. 어디서 무얼 하며 지내냐고 물어보아도 “백수가 집에서 백수 노릇 하지, 어디서 하긴 뭘 해요.” 하며 건성으로 대답을 꺼내놓을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석주련은 윤태희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부장님, 저 자리 좀 뚫어주세요.”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사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없던 자리를 만들어주는 일 정도는 어렵지 않은 모양이었다. 석주련의 도움으로 백수 생활을 청산한 윤태희는 새 직업을 얻었다. 그해 가을 무렵이었다. 윤태희는 대륭 고등학교 도서실의 사서로 다시 출근하게 되었다.
몇 달 전, 메산이의 납치 사건으로 활동을 중단하고 복귀를 준비하고 있었던 정주는 재겸이 하루아침에 깊은 잠에 빠지게 되면서 일정을 전부 미룬 채 시골집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그런 정주의 복귀를 도운 것은 윤태희였다.
“재겸이라면 이런 걸 원하지 않을 거예요.”
그렇게 말하며, 윤태희는 정주에게 복귀할 것을 조언했다. 윤태희의 말이 맞았다. 진정으로 재겸이 돌아올 것이라고 믿고 있다면 자신의 삶에도 충실해야 한다. 자칫하면 유서가 될 뻔했던 마지막 편지에서도 재겸은 정주에게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라는 당부를 남겼었다.
그리하여 정주는 원래 예정한 대로 활동을 재개하기로 했다. 예전처럼 다시 서울과 시골집을 오가는 생활을 시작하게 된 정주는 일주일에 한 번꼴로 시골집에 돌아오고 있었다.
이른 아침, 윤태희는 출근 준비를 했다.
니트 안에 와이셔츠를 받쳐 입고, 그 위에 외투를 걸치고 나온 윤태희는 현관으로 향했다. 메산이와 유남생, 검은 고양이는 현관 앞에 일렬종대로 열을 맞춰 섰다. 출근하는 윤태희를 배웅하기 위해서였다. 누가 그러라고 한 적도 없건만. 다들 정해진 시간이 되면 현관까지 따라 나오곤 했다. 구두 주걱을 이용해 구두를 꿰어신은 윤태희가 뒤를 돌아보았다.
“다녀올게요.”
윤태희는 줄줄이 서 있는 셋에게 차례대로 시선을 맞췄다.
“어디 나가지 말고, 집 잘 지키고 있어요.”
메산이와 유남생을 순서대로 쓰다듬어준 윤태희는 마지막으로 고양이의 턱밑을 어루만져주었다. 그러자 고양이가 눈을 가늘게 뜨며 골골거리는 소리를 냈다.
고양이와 함께 살게 된 것은 그날 이후의 일이다.
맨 처음 수향이 키우던 고양이가 이 집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만 해도 피가 식는 듯한 기분이었다. 청장의 손을 탄 고양이라고 생각하니 위험하게 느껴진 탓이었다. 수향의 고양이는 평범한 고양이가 아니라 금술을 통해서 본래 수명보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존재였다. 윤태희에게 있어 고양이는 영 꺼림칙할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 저 고양이가 이곳에 있는 것인지 의문이었다. 윤태희는 정주에게 저 고양이를 왜 여기에 데려왔느냐고 물었다. 그런데 정주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고양이가 제 발로 직접 따라왔다는 것이었다.
그날, 고양이는 기와집 지붕에 발을 모으고 앉아서 모든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 공간이 어그러지기 시작하면서 정주 일행이 떠나려는 낌새를 보이자, 내내 꼼짝도 하지 않고 있던 고양이가 갑자기 땅으로 폴짝 뛰어 내려오더니, 마치 자신도 데려가 달라는 것처럼 야옹야옹 울면서 정주 일행의 뒤를 졸졸 따라왔다는 것이다.
대강의 상황을 전해 듣게 된 윤태희는 한동안 고양이를 주의 깊게 관찰했다. 수향이 무언가 수를 써놓은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며칠 동안 지켜본 결과 고양이는 평범해 보였다.
딱 한 가지만 제외하면 말이다.
“먀웅.”
“응? 뭐라고?”
“미웅.”
“뭐라는지 도통 알 수가 없네…….”
바로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영물인 정주와 메산이, 유남생은 인간이 아닌 존재와도 대화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수향의 고양이가 하는 말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여태껏 수많은 짐승을 만났지만 이런 적은 처음이라며 정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점을 수상하게 여긴 윤태희는 묘귀들을 소집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였다. 윤태희의 부름을 받고 달려온 살찐이와 김짱돌은 매우 험악한 얼굴로 검은 고양이와 마주 앉더니, 꼬리를 붕붕 휘두르며 고양이와 치열한 기싸움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역시나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묘귀들은 해괴하다며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나쁜 놈은 아닌 것 같습니다.’ 라고 말했다.
딱히 위협이 될만한 점은 없다고 판단한 윤태희는 고양이를 잠시 데리고 있기로 했다. 술자가 죽고 주술이 풀렸으니 어차피 고양이의 명줄은 다한 셈이다. 머지않아 남은 생명력이 꺼지면 그때는 자연히 떠날 것이었다. 그때까지 머무르게 해주는 것쯤은 괜찮을 것 같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메산이는 고양이에게 몹시 호의적이었다. 왜냐하면 메산이에게 있어 이 세상의 모든 동식물은 소중한 친구이기 때문이었다. 메산이는 고양이와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해서 다정하게 말을 걸었고, 틈만 나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유남생은 드디어 자신의 수하로 삼을 놈이 들어왔다며 기뻐했다.
유남생도 고양이도 엄밀히 따지면 이 집에 ‘굴러들어온 돌’이긴 매한가지였으나, 유남생은 일찍 굴러들어온 자신이 선배라며 권위를 내세웠다. 그렇게 몇 날 며칠 텃세를 부리며 고양이 앞에서 깔짝거리던 유남생은 기어이 고양이의 심기를 건드리고 말았고, 결국 고양이로부터 매서운 귓방망이를 얻어맞고 나서야 겨우 얌전해졌다.
오랜 세월을 함께한 주인이 사라졌음에도 고양이는 윤태희를 제법 잘 따랐다. 윤태희가 귀가할 시간이 되면 현관에 마중을 나갔고, 서재에서 책을 읽고 있으면 문을 열어달라는 듯이 발톱으로 문을 긁었고, 잠을 자기 위해 누워 있으면 침대 위로 폴짝 올라와서 윤태희의 배 위에 몸을 말고 누웠다.
고양이는 별 탈 없이 식구들 틈에 섞여드는 듯했다.
그러나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되면서부터 고양이는 조금씩 기운을 잃었다. 마당에 나가서 뛰어놀기도 하고, 이곳저곳을 우다다 뛰어다니던 고양이는 활동량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깨어 있을 때는 창가 근처에 앉아서 가만히 바깥 풍경을 내다보는 시간이 늘어났다.
“기운이 없니?”
메산이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고양이를 들여다보았다. 어디가 아픈 거냐고 물어도 고양이는 대답이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치유를 해 주기도 했지만, 산삼동자의 효험에도 고양이는 기력을 되찾지 못했다.
하루 종일 거실에 앉아서 마당을 내다보다가, 윤태희가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잠깐 기운을 차렸다가 또다시 조용해졌다. 고양이는 윤태희를 느릿느릿 쫓아오다가 걸음을 멈췄다. 침실로 향하던 윤태희가 뒤를 돌아보았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잘만 쫓아오더니, 이젠 계단을 오르는 것조차 힘에 부치는 모양이었다. 윤태희는 고양이를 품에 안아 들었다.
“자, 이리 와.”
윤태희는 고양이를 데리고 침실로 향했다. 잘 시간이라는 것을 알았는지 고양이는 윤태희의 배 위에 동그랗게 몸을 말고 누웠다. 잠시 선잠이 들었다. 그러다 눈을 떴을 때, 윤태희는 새까만 암흑 속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윤태희가 주변을 두리번거릴 때였다.
“본향의 아이야.”
어디선가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윤태희는 목소리가 날아든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닿은 곳에는 누더기에 가까운 낡은 옷을 입고 봉두난발을 한 누군가가 서 있었다. 그는 나무로 깎아 만든 탈을 쓰고 있었다. 황금색으로 번쩍이는 네 개의 눈과 마주친 순간, 윤태희의 눈이 크게 뜨였다.
황금사목이 눈앞에 있었다.
“나를 가지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