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불 (348)화 (348/348)

#348

매서운 칼바람이 불었다.

얼마 전, 대륭 고등학교는 기나긴 겨울 방학을 끝내고 새 학기를 맞이했다.

개학 이후로 윤태희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방학 동안 책을 대출해 갔던 아이들이 물밀듯이 밀려왔기 때문이다. 데스크 뒤쪽으로 반납한 책들이 무더기로 잔뜩 쌓여 있었다.

본격적인 사서 일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도서실에만 상주하는 것이 아니라 연체자를 찾아서 각 반을 돌아다녀야 할 때도 있었고, 무거운 책을 하루에 몇 번이나 옮겨야 했다. 서가를 정리하는 것도 꽤 중노동이었다.

방과 후 업무까지 끝내고 나니 어느덧 도서실 문 닫을 시간이었다.

마지막까지 도서실에 남아서 책을 읽던 학생이 떠났다. 의자에 앉아 데스크 업무를 보던 윤태희는 목을 좌우로 꺾으며 가볍게 기지개를 켰다. 의자가 뒤로 밀리며 도르륵 바퀴 굴러가는 소리가 났다. 창밖으로 노을이 지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어느덧 오후 5시였다.

도서실은 폐방했지만 아직 할 일이 제법 남아 있었다.

퇴근하려면 한두 시간 정도는 걸릴 것 같았다.

윤태희는 머그잔을 들고 몸을 일으켰다. 교무실에 가서 커피를 타올 생각이었다. 문을 열고 나오자 하교 시간이 지난 복도는 고요했다. 설렁설렁한 교무실로 내려온 윤태희는 커피포트에 물을 올렸다. 물이 끓어오르기를 기다리고 있으려니 남아 있던 선생들이 말을 걸어왔다.

“윤 쌤, 아직 퇴근 안 하셨어요?”

“이제 정리하고 가려고요.”

“수고하셨습니다.”

가볍게 인사를 주고받는 사이, 포트가 끓었다. 믹스 커피 두 봉지를 털어 넣고 티스푼으로 대충 휘적거렸다. 윤태희는 커피 향이 폴폴 나는 머그잔을 들고 도서실로 돌아왔다.

끼익, 텅.

등 뒤로 철문이 닫혔다. 데스크 앞으로 돌아온 윤태희는 벗어 두었던 안경을 썼다. 다리를 꼬고 느슨한 자세로 앉아 커피를 한 모금 마실 때였다. 서가 안쪽에서 작은 기척이 들렸다.

마우스를 딸각거리던 윤태희는 슬쩍 턱을 들고 서가 안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자리를 비운 사이에 누가 왔나 싶었으나 금세 기척이 끊긴 걸 보니 아무래도 기분 탓인 것 같았다.

윤태희는 다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잠시 모니터를 들여다보던 윤태희는 뒤쪽에 쌓여 있던 책 몇 권을 한꺼번에 손에 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원래 있던 자리에 꽂아 놓기 위해서였다. 책에 붙은 청구 기호를 확인하며 서가 근처로 가까이 다가갔을 때였다. 책장 틈으로 교복을 입은 누군가의 뒷모습이 보였다.

“어.”

외마디 소리와 함께, 윤태희가 걸음을 세웠다.

윤태희는 왔던 길로 뒷걸음질을 치며 고개를 내밀었다. 짧은 머리를 한 소년이 벽에 반쯤 기대어 책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소년의 손에 들려 있는 책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소년이 읽고 있는 책은 <지知와 사랑>이었다.

“친구, 우리 도서실 개방 끝났는데.”

책을 읽고 있던 소년이 뒤를 돌아보았다.

소년과 눈이 마주친 순간, 윤태희의 손아귀에 있던 책 몇 권이 쿠당탕 떨어져 내렸다.

“…….”

아름답고 강인한 소년이 눈앞에 있었다.

특유의 무심한 시선. 살짝 진한 눈썹과 치켜 올라간 눈꼬리. 모든 것에 심드렁해 보이는 까칠한 표정. 소년은 교복 위에 남색 떡볶이 코트를 입고 목도리를 둘둘 두르고 있었다.

윤태희를 위아래로 찬찬히 훑어보던 소년이 입을 열었다.

“안녕.”

인사를 툭 내뱉고 나니 문득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생각해 보니 보통 ‘야.’하고 부르거나, 윤태희가 인사를 해 오면 고개만 끄덕하고 말았지, 윤태희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는 건 이번이 처음인 것 같았다.

“잘 있었어?”

윤태희는 자신이 드디어 미쳤다고 생각했다. 모든 사고가 일시 정지했다. 눈을 감았다가 뜨면 눈앞에 서 있는 소년이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릴 것 같았다. 뭐라 입술을 달싹이려던 윤태희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네가 없음으로 나는 그동안 안녕하지 못했으므로.

소년은 손에 들고 있던 책을 덮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작년 늦은 봄에 처음으로 왔던 것 같은데 눈 깜짝할 사이에 시간이 흘렀다. 문득 감회가 새로웠다. 계절이 한 바퀴 돌았음에도 도서실은 변함없는 풍경을 간직하고 있었다. 도서실 한쪽에 놓여 있는 커다란 책상을 보니 항상 같은 자리에 앉아서 책을 읽었던 기억이 났다.

가끔은 책을 읽다가 까무룩 잠든 적도 있었고, 책 읽는 시늉을 하면서 데스크 앞에 앉아 있던 사서 청년을 은밀히 훔쳐보기도 했다. 그때를 생각하니 왠지 손바닥이 간지러웠다.

“여기 오니까 생각난 건데, 까먹고 못 한 말이 있어.”

소년은 코트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으며 서가로 시선을 옮겼다.

“예전에 여기 처음 왔을 때 말이야. 책 구경하다가 정신을 차렸더니 발밑에 검은색 벌레가 득실거렸어. 그래서 그거 없앨라고 여기 있는 책 찢어다가 부적으로 썼었어.”

그때는 경황이 없어서, 벌레를 처치할 생각에만 급급하여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 책이나 골라 집었다. 처음에 찢었던 건 모양이 별로여서 대충 바닥에 휙 내버렸고, 두 번째로 찢어낸 종이를 사용해서 간이로 부적을 만들었다. 그러니 그 책은 총 두 장이 비어 있는 셈이다.

“근데 그다음에 곧바로 네가 문을 열고 들어온 거야.”

갑자기 벌컥 문을 열고 나타난 윤태희를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책을 망가트렸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으려고 헐레벌떡 바닥에 내버렸던 종이를 주워 손에 꽉 쥐고 있었더랬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뭐라고 그렇게 좌불안석이었는지 모를 일이다.

“어떤 책인지 찾으려고 했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못 찾겠네.”

되는 대로 집어 들었던 것이라 미처 제목을 살피지 못했다. 그때 서 있었던 자리를 가늠하여 책을 찾아보려고 했는데, 서가 위치가 바뀌었는지 봐도 봐도 뭐가 뭔지 알 수가 없다.

“뭐. 그냥 그런 일이 있었다고…….”

심드렁한 얼굴로 말을 흐리던 소년이 둘둘 매고 있던 목도리에 코를 묻으며 웅얼거렸다.

“그때 반창고 붙여줘서 고마워.”

도서실 내부는 시간이 멈춘 것처럼 조용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소년의 시선이 창가로 향했다. 소년이 서 있는 창가에는 못 보던 화분이 놓여 있었다. 햇볕이 잘 드는 자리 잡은 화분 속에는 작고 동그란 붉은 씨앗이 있었다.

처음 학교에 간다고 했을 때 메산이는 자기도 따라가겠다며 떼를 썼었다. 하지만 호기심이 많은 만큼 겁도 많고 사람을 무서워하는 녀석이라 결국 한 번도 데려와 보지는 못했다.

이렇게라도 구경시켜 줄 수 있으니 잘된 일이다.

소년은 흙 위에 놓여 있는 조그마한 씨앗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부드러운 흙에 덩그러니 있는 모습이 귀엽다. 작고 동그래서 연약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소년은 알고 있었다.

이토록 콩알만 한 씨앗이지만, 사실은 세상 그 무엇보다 단단하다는 것을.

메산아

조심해서 다녀와

한때 재겸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에 의문을 품은 적이 있었다.

내가 지나온 모든 순간, 나를 스쳐 지나간 모든 이들, 내 곁에 머무르고 있는 산 자와 죽은 자, 그리하여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이 모든 것들. 세상은 내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화분을 들여다보고 있던 소년이 미소를 지었다.

어쩌면 이것은 씨앗의 형태를 한 ‘사랑’일지도 모른다.

소년은 창문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하루가 저물고 있었다. 아직은 봄이 멀게만 느껴지는 계절이었다. 메산이가 돌아오겠다고 말한 봄이 올해 봄일지 내년 봄일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중요한 건 어쨌든 봄은 돌아온다는 사실일 것이다.

코트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시들어가는 햇볕을 바라보던 소년이 입을 열었다.

“태희야.”

소년이 손등으로 시린 코끝을 훔치며 말했다.

“나는 지긋지긋하게 살다가 늙어서 죽을 거야.”

이 세상에는 죽지 않고 살겠다는 말을 가슴에 손을 얹고 맹세하듯이 해야만 하는 인간이 있다. 재겸은 어쩔 수 없이 그런 인간이었다. 그럼에도 재겸은 계속 살아보기로 했다.

“그러니까…….”

소년이 윤태희를 돌아보며 말했다.

“너도 나랑 같이 늙어 죽을래?”

윤태희의 표정이 서서히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무엇인가 울컥 치받쳐 오르는 듯했다. 윤태희는 흘러내린 머리를 헤집듯이 움켜쥐더니 결국 고개를 숙였다.

윤태희의 얼굴은 삽시간에 엉망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다가가지도 멀어지지도 못하고, 제 자리에 서서 어쩔 줄 몰라하던 윤태희기 어느 순간 한 손으로 하관을 틀어쥐더니 다른 한 손으로는 무릎을 짚으며 허리를 숙였다.

“하, 하하, 하…….”

울음기 섞인 숨결을 길게 토해낸 윤태희의 어깨가 들썩거렸다. 얼핏 보았을 때는 웃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먼 길을 쉬지 않고 달려온 사람처럼 어느샌가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있었다. 쉴 새 없이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윤태희는 소리도 내지 못하고 하염없이 울었다.

소년은 펑펑 울고 있는 윤태희에게 다가갔다. 어깨 한쪽을 살짝 건드리듯이 손을 얹었다. 그러자 윤태희가 무너지듯이 주저앉더니, 무릎 위에 걸친 자신의 팔에 얼굴을 묻었다.

“울지 마.”

소년은 윤태희의 뺨을 잡고 얼굴을 들어 올렸다. 피부가 흰 윤태희는 귓바퀴와 눈 주변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이렇게까지 울 줄은 몰랐다. 어떻게 달래줘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왜 울어.”

“안 오는 줄 알았어. 다시는 안 오는 줄 알았어…….”

소년은 양팔을 벌렸다. 가슴으로 윤태희의 머리를 힘주어 끌어안았다. 마치 자신의 심장 소리를 들려 주려는 것처럼. 자신이 지금 이곳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고 선언하는 것처럼. 단단한 팔이 소년의 등을 힘껏 둘러 안았다. 와이셔츠 너머로 느껴지는 체온이 뜨거웠다.

윤태희는 여전히 향기로웠다.

이제 죽고자 하는 마음은 없어졌다. 그러나 지금은 이렇게 양지에 서 있는 것처럼 환한 마음일지라도, 살다 보면 언젠가는 고작 한 톨의 어둠에도 잡아 먹히는 날이 올 것이다.

그런 날이 오면 아마 또다시 못 견디게 죽고 싶어질 것이다. 그때마다 재겸은 제 마음속에서 실체도 없이 오직 잔상처럼 남은 녀석과 싸워야만 할 것이었다. 어쩌면 평생 동안.

만에 하나 패잔병처럼 쓰러지는 일이 있더라도 굴복하지는 않을 것이다. 재겸은 오랜 세월 동안 냉소와 염세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것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하여 차가운 철갑옷을 입는 일과도 같았다. 그러나 이제 재겸은 모든 것을 벗어던진 채 이 땅 위에 서 있었다.

이제는 이렇게 소중한 이를 맨몸으로 끌어안는 것이 더 중요한 일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이 삶을 왜 살아야 하는지 소년은 줄곧 궁금해했다.

그리고 소년은 이제는 그 답을 알 것 같았다. 산다는 것은 삶의 주인이 되는 일이다. 내 것이라고 여긴 적 없는 삶이었으나, 나는 단 한 순간도 이 삶의 주인이 아니었던 적 없다.

“재겸아.”

소년의 품에 안겨 있던 윤태희가 말했다.

“우리 유쾌한 연애를 하자.”

쏟아져 내리는 햇빛 속에서, 소년은 웃었다.

“그래.”

그리고 그 순간, 소년은 깨달았다.

너는 세상이 내게 선사한 호의였음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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