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1권) (1/18)

1장

박석연 씨는 이해하지?

이해는 개뿔.

여느 날과 같이 출근했더니 책상이 사라졌다는 어느 직장인의 일화는 다 남 얘기인 줄만 알았다.

사내 파벌 다툼이야 늘 있는 일이고, 줄을 잘못 서 낙동강 오리알이 되는 신세가 만연하다는 것도 안다. 그러나 바로 내가 개인적인 성향 문제로 밀려 나갈 줄은 콩나물시루 같은 버스 안에서도 생각지 못했다.

고리타분하게도 운수 좋은 날이었다.

주말 내내 피곤에 절어 뻗어 있다가 월요일 오전이 돼서 로또를 확인해 보니 5등이 세 개나 당첨되어 있었다. 만 원어치 샀으니 오천 원이나 이득이었다.

오늘 밥값은 벌었다는 가뿐한 마음으로 회사에 갔더니 없어진 책상과 함께 급작스러운 인사부의 부름이 내려왔다.

‘이봐, 박석연 주임. 토요일에 회사 팩스로 이런 게 날아왔어. 박 주임의 성적취향에 대해 왈가불가할 생각은 없지만 사내가 시끄러워지는 건 상부도 원치 않는 거 알지? 며칠 전에도 미스 김이 영업팀 과장하고 그런 일이 있었잖아? 거기다 박 주임까지 터져 버리니 나로서도 어쩔 수가 없어. 전에도 한번 이런 비슷한 소문 돈 거 내가 간신히 막아 줬잖아. 그러니까 박석연 씨는 이해하지?’

박 주임, 박 주임 살갑게 부르던 이가 마지막 말에선 박석연 씨로 바뀌어 있었다.

한마디로 더는 회사 사람이 아니니 나가라는 소리였다. 권고사직을 권하면서 책상까지 치워 버리다니 아주 용의주도했다.

남자와 들러붙어 있는 팩스 복사본을 건네받고, 개인 사생활 가지고 태클 거는 회사 따위 기세 좋게 그만 두겠다!, 말했으나 이 바닥이 원체 좁은 곳이다 보니 취업 전선에 이상이 생길 것임을 예감했다. 입들은 또 얼마나 가볍던가.

‘체일 슈즈 박석연이 게이라면서?’

‘게이 남자 친구 놈이 앙심을 품고 회사로 팩스를 보냈다던데?’

‘어이구 세상이 말세네, 말세야.’

눈에 선연했다. 이래저래 마음이 약했던 어릴 때였다면 옥상에라도 올라가 세상 비관하며 자살을 꿈꿨을지도 모르겠지만, 이미 한 번의 경험으로 헛된 짓은 하지도 꿈꾸지도 않는다.

대학 시절 죽어 버리자 싶어 옥상에 올라갔을 때도 어땠던가.

갑자기 불어온 거센 바람에 등이 휘청거려 악착같이 살겠다고 난간을 붙들었다.

손이 하얗게 바래도록 난간을 붙잡았을 때 문득 생각난 건, 죽긴 내가 왜 죽어 였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등 돌려도 나 이해해 주는 부모님 계시고, 내 일만 잘하고 즐길 거 즐기다 세상 떠나면 될 걸 내가 왜 죽어야 해. 그때의 마음이 다시금 생각났다.

죽음을 선택할 만큼 절박했던 심정을 싹 잊었다고 말한다면 거짓이겠지만, 어리석은 행동을 할 나이는 아니었다.

터덜터덜 한낮의 도로변을 걷다가 구두를 구겨 신었다. 발뒤꿈치가 발갛게 까져 욱신욱신 통증을 호소했다. 맞춤 구두를 신고 나오지 않아 벌어진 참사였다.

회사에 팩스를 보낸 놈에 대해서 추측을 해 봤다.

신발 디자인계에 있어서 유명 회사이니만큼 나를 밀어내고 내 자리를 차지하려는 놈일 수도 있고, 게이 바에서 한 번 봐 놓고서는 나 좋다고 주야장천 따라다닌 이름 모를 회사원일 수도 있었다.

손에 쥐어진 팩스를 펼쳐 보니 남자와 내가 끈적하게 얽혀 있었다. 거의 맞닿을 뻔한 입술을 기가 막히게도 캐치해 냈다.

친구끼리 장난삼아 끌어안은 것이라 변명하기에는 손의 위치가 참으로 애매했다.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고 근 반년 만에 찾았던 게이 바에서 이런 대형 엿을 먹을 줄이야.

오갈 데 없는 분에 종이를 갈기갈기 찢어서 공원 쓰레기통에 투척했다. 공채 시기도 아닐뿐더러 불명예스러운 퇴직에 누가 나를 받아 줄까 싶었다.

당장 내야 할 관리비, 휴대폰 요금, 보험비까지 매달 지불해야 하는 금액이 생각하면 할수록 쭉쭉 올라갔다.

번잡한 도심에서 벗어나고 싶어 귀농한 부모님께 갈 수도 없었다. 없는 돈 긁어모아 농업용 트랙터를 선물해 드린 게 저번 달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일시불이 아닌 할부로 살 것을 그랬지.

벤치에 털썩 앉아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멍하니 있을 수는 없으니 여기 저기 전화를 돌려서 괜찮은 자리 있으면 발품 팔아 면접이라도 다녀야했다.

연락한 지 1년이 넘은 사람들에게는 염치가 없어 걸지도 못하고, 그나마 업계에서 입지가 탄탄한 학교 선배에게 전화를 넣었다.

하나 다행인 점은 그 선배가 내 성 정체성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대학 내에서 퍼졌던 소문에 의해 필연적으로 알게 된 것이지 내 입으로 떠든 건 아니었다.

[이게 누구야, 바쁘신 박석연 씨 아니신가]

“예, 재운 선배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고 계시죠?”

한 달 전에 잡지 촬영장에서 우연히 마주쳤지만, 서로가 바쁜 바람에 인사만 하고 헤어졌었다.

[나야 항상 똑같지. 근데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공원 벤치에 앉아서 휴식을 즐기고 있는 건 아니고. 저 회사 잘렸어요.”

단도직입적인 내 말에 재운 선배가 혀를 찼다.

[잘리긴 왜 잘려. 너만큼 일 잘하는 놈이 어디 있다고.]

“그냥 좀 그럴 일이 있었어요.”

[……그렇구만. 근데 어쩌냐, 우리 회사는 인원 풀이다.]

대충 짐작은 한 것인지 재운 선배는 깊게 물어오지 않았다. 게다가 전화한 용건까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요새 불경기라 취업하기 쉽지가 않을 텐데…….]

그렇죠, 라고 응수하려는데 아! 하고 귀를 찌르는 탄성이 들렸다.

[맞다, 맞아. 딱 한 군데 사람 구하는 곳 알고는 있는데.]

“정말요?”

[회사 위치도 좋고, 복지도 잘되어 있고, 아마 네 경력이면 연봉도 꽤 맞춰 줄 것 같긴 해. 근데 소규모 회사야. 거기 회사가 정말 좋기는 한데……. 너한테는 좀 안 맞을지도 모르겠다.]

“지금 제가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죠. 당장 내일부터 굶게 생겼는데요.”

[모아 둔 돈도 없냐.]

“부모님 귀농하신다고 여러모로 도와드렸더니, 좀 그러네요.”

[그럼 일단 얘기는 해 놓을게. 너무 기대는 말아라. 거기도 사람 구했으면 말짱 도루묵이니까.]

“예, 선배 진짜 감사해요.”

전화를 끊고 벤치에 등을 한껏 기댔다. 서류 가방을 열어 늘 구비되어 있는 밴드를 꺼내 까진 뒤꿈치에 붙였다.

구두를 다시 신기도 싫어 벤치에 양반 다리를 하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진짜 날씨 좋다. 우중충하지 않아서 차라리 다행인가.

공원에는 아이를 데리고 나온 엄마들과 땡땡이가 분명한 고교생들이 저마다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점심 먹을 때를 제외하면 늘 회사와 출장지에 붙어 있어야 했다. 이처럼 한낮에 한량처럼 있어 본 건 사회생활 이래 처음이었다.

“저기요.”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데 교복을 입은 남자 두 녀석이 위에서 기웃거렸다. 무슨 용건인가 싶어 다리를 내려 뒤축이 구겨진 구두에 발을 넣었다.

“부탁 하나만 드려도 돼요?”

“무슨?”

한 녀석이 엄지손가락을 척 올려서 뒤쪽 매점을 가리켰다.

“담배 좀 대신 사 주세요. 오천 원 드릴게요.”

이것들이 어디서 약을 팔아. 심부름 값 500원으로 나를 부려먹으려고?

회사 동료가 피시방에서 학생들에게 담배 삥을 뜯겼다고 했을 때 얼마나 만만하게 보였기에 그런 건가 싶었는데, 생각을 정정해야했다. 그냥 학생들이 뻔뻔한 거였다.

나는 지갑에서 돈을 꺼내려는 두 녀석을 저지하듯 손을 펼쳐 보였다.

“잠깐.”

가슴을 크게 부풀렸다가 숨을 훅 내쉬었다.

“방금 회사까지 잘린 마당에 내가 너희 담배까지 사 주면 너희가 생각해도 되게 비참할 거 같지 않냐? 내가 아무렇지 않아 보여도 여기 안쪽이 완전 넝마가 됐거든. 나이 지긋한 분들도 날 가만 놔두질 않는데, 미성년인 너희까지 가세하면 다시 옥상에 올라가고 싶어진다.”

두 녀석은 내 넋두리에 할 말을 잃은 듯 당황한 얼굴이었다.

“죄송해요. 그래도 자살은 하지 마세요.”

그중 한 놈이 심각한 얼굴로 나를 위로했다.

우우우웅- 벤치에 내려 두었던 휴대폰이 뱅글 돌았다. 재운 선배에게서 도착한 문자였다.

모 아니면 도라는 심정으로 메시지를 열람했다.

[x월 xx일 윰스테이트 빌딩 3층. 포트폴리오, 면접서류 가지고 방문 고고.]

“그래, 죽으라는 법은 없나 보다.”

벤치에서 일어나서 고등학생 녀석들을 등지고 걸었다. 밴드가 제대로 붙지 않았는지 발꿈치에서 덜렁거려 거슬렸다. 허리를 굽혀 꾹 밴드를 누르는데 등 뒤로 두 녀석의 우렁찬 소리가 들렸다.

“힘내세요, 형!”

“죽지 마요!”

내가 회사에서 잘린 이유를 알아도 저렇게 응원을 해 주려나.

평범함이라는 틀을 벗어났을 때, 사람들의 시선이 어떻게 변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같은 문제를 저질러도 평범하지 않은 이들에게는 좀 더 가혹한 상황이 펼쳐지기도 한다. 이중 잣대란 무섭다.

재운 선배의 입김이 닿은 회사일지라도 퇴직의 사유에 대해선 적당히 언급은 해야 하니, 일단 기대감은 제로로 낮췄다.

혹시 내가 가진 모든 운을 로또 5등에 쓴 건 아닐까 하는 회의감마저 들었다. 그것도 세 개나 당첨됐으니 어쩌면 일리가 있었다.

생각해 보니 팩스가 날아 왔다던 토요일은 어땠던가. 끓여 먹은 너구리에서 다시마가 두 개나 나왔었다. 국물이 더 감칠맛 나겠다고 좋아했던 나 자신이 한심했다.

라면을 후후 불어 먹고 있던 시간, 회사가 나로 인해 뒤집어진 것도 모르고…….

어쩐지 운수가 좋더라니, 김 첨지가 따로 없었다.

“아……. 울고 싶다.”

중얼거리듯 나온 혼잣말에 입술을 꾹 다물었다. 한 번 더 내뱉으면 정말 쓸데없는 눈물이 날 것 같아서 벅벅 눈만 비볐다.

***

저절로 시선이 위로 올라가는 날이었다.

나뭇가지 끝에 몽울몽울 달린 종 모양의 오동나무 꽃에서 살내음이 흘러들어 왔다. 고개를 숙인 연분홍의 꽃들은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바사삭 제 몸들을 부딪쳤다. 종소리가 날 것도 같았는데 조용히 꽃잎 몇 개만 떨어뜨릴 뿐이었다.

들고 있던 포트폴리오 위에 툭 내려온 잎이 또다시 불어온 바람에 밀려났다. 여의도 한복판에 위치한 윰스테이트는 빌딩을 주변으로 작은 숲이 조성되어 있었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 도심 한복판에 이런 잔디밭과 빽빽한 나무숲을 이루려면 분명 한두 푼 가지고는 턱도 없었을 것이다.

1층은 로비를 겸용하는 테라스 카페가, 2층부터 4층까지는 전면 유리로 구성되어 있었다. 저 창문 다 닦으려면 청소 비용이 어마어마하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면접 시간보다 이르게 도착했지만, 패셔너블한 건물의 기백에 눌려 한참이나 근처를 배회했다. 다행히 맞춤 구두를 신고 나와 걷는데 어려움은 없었다.

나는 갓 시골에서 상경한 촌놈처럼 로비를 두리번거리며 엘리베이터를 찾았다. 로비 정면에는 윰의 여성 모델 사진이 회사 로고와 함께 박혀 있었다. 흑백 사진에서 펌프스 구두만이 유일하게 붉은색을 띠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한쪽 문에는 조깅화를 신은 남자가 운동화 끈을 매는 자세로 이쪽을 쳐다봤다. 나머지 문에는 로비와 동일한 여자 모델이 맨발로 조깅화를 들고 있었다.

손에 힘을 하나도 가하지 않은 듯 가벼운 느낌이라 조깅화의 무게에 흥미가 들었다. 그것도 잠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며 모델들이 사라졌다.

나는 목적지인 3층에서 내려 회의실을 찾았다. 간판이 달려 있어 찾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왠지 복도에서 소독약 냄새가 진동하는 것 같았지만, 새 건물이라 그런가 생각하고 말뿐이었다.

문이 열려 있는 회의실 안에는 무언가를 끄적거리고 있는 남자의 등이 보였다. 똑똑, 열린 문을 노크해서 인기척을 대신했다.

“아, 면접 오신 분?”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반갑게 인사해왔다.

“예! 안녕하십니까? 오늘 면접보기로 한 박석연이라고 합니다.”

“얘기는 들었습니다, 이쪽으로.”

회의실에 마련된 커다란 테이블은 상석이 구분되지 않는 타원형이었다. 어디에 앉아도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볼 수 있는 형태로, 일렬 책상이던 전(前) 회사의 딱딱한 프레젠테이션실보다 자유로운 분위기가 느껴졌다.

남자가 내게 안내한 자리는 바로 옆자리였다. 마주 본 것도 아니고, 나란히 앉아 면접을 보는 건 또 처음이었다.

다소 어색했지만 나는 남자에게 면접서류와 함께 포트폴리오를 내밀었다. 그가 서류를 받고 쓱 훑어보더니 빙긋 웃었다.

“커피라도 드시겠습니까?”

“아뇨. 괜찮습니다.”

“저는 한 잔 먹겠습니다.”

등받이가 얕은 의자를 회전시켜 자리에서 일어난 남자가 회의실의 에스프레소 머신을 작동시켰다. 금세 따끈따끈한 커피를 가져와서는 내 디자인이 담긴 포트폴리오를 하나하나 살펴봤다.

“원래 면접은 사장님이 직접 보시는데, 출장을 가시는 바람에 제가 대신 일을 맡았습니다. 전 이재화 과장이고요.”

과장이면 적어도 30대 중후반은 돼야 할 텐데, 남자는 많이 봐줘야 나보다 두세 살 위 같았다.

“박석연 씨, 윰 브랜드에 대해선 들어보셨나요?”

체일 슈즈에 있을 때 스쳐 가듯 들었던 것 같은데, 확실한 건 아니었다.

그만큼 소규모 신생 회사들은 하루에도 수십 개씩 생기고 또 그 이상으로 사라져 갔다.

“물론 알고 있습니다. 신생 브랜드 중에서도 가장 급성장하고 있는 곳이라 들었습니다.”

이건 선의의 거짓말에 속하려나. 아니지 면접을 붙으려는 가식적인 처세에 해당하겠지. 이재화 과장은 내 빈말을 간파한 듯 눈을 찡긋했다.

“설립된 지 이제 겨우 반년 된 신생 브랜드라 아마 생소할 겁니다. 실질적으로 시장에 뛰어든 건 이제 한 달이 좀 넘었고요. 하재운 씨에게 들은 대로 굉장히 감각적인 디자인을 하시는군요. 먹히는 것도 있겠지만 시장에 내놓기에는 과한 것도 보이고……. 체일 슈즈면, 대형 브랜드에서 일하셨군요.”

“예, 지금까지 몸담고 있었습니다.”

“음. 제가 보는 면접은 형식적인 것이니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 박석연 씨는 심사에서 이미 통과가 되었거든요.”

“예? 통과요?”

“저희도 당장 일할 사람이 급하기도 하고, 대형 브랜드에 계셨던 만큼 노하우도 많이 알고 계실 거라 생각됩니다. 경력으로 따져도 손색은 없고요.”

포트폴리오를 제출하지도 않았고, 회사에 보낸 거라곤 이메일 면접서류뿐이었다. 아무리 아는 사람의 추천이 있다고 하더라도 서류만으로 채용을 결정하기가 쉽지는 않을 텐데…….

신생 브랜드라 어설프다고 보기는 또 어려운 게, 사옥에서 느껴지는 박력만 봐도 꽤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설립한 회사임은 틀림없었다. 아니면 재운 선배의 입김이 그만큼 어마어마한 건가?

큰 맘 먹고 투 플러스 한우라도 쏴야겠다.

“다만 한 가지 조건이 있는데…….”

체일 슈즈를 그만둔 이유에 대해서 묻지 않는 걸 보니 설마 알고 있는 것인가 싶었다. 조건이 사내 연애 금지 뭐 이런 거 아닌가. 입이 조금 썼다.

“박석연 씨는 윰 옴므가 아닌 윰 쉬즈 부서로 배속될 겁니다.”

의외의 발언에 눈이 커졌다. 옴므는 남성용, 쉬즈는 여성용 구두 제작 부서를 뜻하니까.

“제가 여성용 구두를 디자인해 보지 않은 건 아니지만, 여태 몸담았던 부서가 남성 구두였습니다. 디자인 경력으로 따져도 남성용이 훨씬 깁니다.”

“1차 서류를 봤을 때는 저도 의아했는데, 박석연 씨 포트폴리오를 보니까 확실히 알겠군요. 박석연 씨의 디자인은 저희가 추구하는 쉬즈 브랜드에 가깝습니다. 죄송하지만 옴므 쪽을 원하신다면 채용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이미 결정된 사항이니 따르라 이 말이었다.

디자인에 있어서 남성용, 여성용을 가리진 않으나, 아니 정확히는 여성용이 좀 더 표현에 있어서는 자유로웠지만 그간의 경력도 무시할 순 없었다. 내 코가 석 자인데 스카우트된 사람처럼 협상을 할 배짱은 없었다.

“채용만 해 주신다면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저희는 인센티브제도가 도입되어 있습니다. 1,2분기 마다 목표를 잡고 그 목표에 달성하게 되면 순이익의 일부를 개인별 공헌도에 따라 지급합니다. 본인의 디자인은 회사와 디자이너의 고유산물로 취급하여 순이익의 8:2로 나눠 가집니다. 물론 회사가 8이지만요.”

입이 벌어졌다. 노예처럼 일하고 월급만 받아 가는 게 아닌, 보너스를 지급한다니?

입사 초반엔 내가 만든 디자인을 팀장들이 멋대로 가져가 써먹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어쩐지 운수좋은 날이 다시 찾아오는 것만 같았다. 너무 좋은 조건이라 혹시 달리 구린 사항이 있는 건 아닌지 의심부터 들었다.

“박석연 씨는 패턴 제작이 가능한 인재라고 들었습니다. 저희는 샘플 제작을 따로 하청에 맡기는 것이 아니라 직접 만듭니다. 디자인뿐만 아니라 제작 기술까지 요하죠.”

“예, 샘플 제작은 혼자서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역시나 싶었다. 좋은 조건에는 늘 까다로운 제한이 걸려 있었다.

디자인과 신발 패턴 제작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지만, 확실히 나뉜 분야이기도 했다.

디자이너는 신발을 도식화한 작업지시서를 만드는 역할을, 패턴사는 그것을 만들어 내는 일을 했다. 이재화가 말하는 건 그 두 개를 전부 혼자서 해내라는 소리였다.

사실 대형 브랜드에서도 라스트(*「나무틀」 또는 「신발틀」. 신발을 만들기 위한 원형)의 패턴을 제작할 수 있는 인원은 그리 많지 않았다. 내가 디자인뿐만 아니라 직접 만드는 일에도 관심이 있어 공부해 오지 않았다면 이런 기회조차 잡지 못했을 것이다.

“아, 그리고 체일 슈즈와 다른 점이 있다면 실적을 올리지 못했을 경우 가차 없이 퇴사될 수 있습니다. 당연히 그런 극단적인 상황은 일어나지 않겠지만, 그만큼 긴장해야겠죠.”

“물론입니다.”

대형 브랜드의 경우는 원체 직원이 많아 허수아비처럼 앉아 있다가 퇴근해도 눈총을 받는 일은 드물었다. 디자인을 대충 끄적거려 내놔도 다른 걸로 다시 해 와, 라는 말만 들을 뿐 그 때문에 해고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그동안 내가 뻔뻔한 월급도둑이었다는 말은 아니다.

거기다 이 회사는 인센티브제까지 있다고 하니 그간 쌓아 두었던 아이디어 노트를 쏟아 내야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연봉은 체일 슈즈에서 받으신 그 이상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정확한 연봉 협상은 사장님께서 돌아오신 후에 가능하니, 혹시 내일부터 출근이 가능하십니까? 일단 박석연 씨가 회사 업무 방식이나 분위기를 파악해야 하고 또 맞지 않으면 다른 곳을 알아보셔야 할 테니까요. 직원에게도 회사를 고를 권리가 있죠.”

“당연히 내일부터 출근 가능합니다.”

재운 선배에게 엎드려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분명 나쁜 조건도 있겠지만 백수보다야 나을 것이다. 나는 잘 부탁한다며 이재화 과장이 내민 손을 맞잡고 공손히 인사했다. 그가 내 포트폴리오를 돌려주며 말했다.

“사양 말고, 가시기 전에 커피 한 잔 하고 가세요.”

이재화도 내가 예의상 사양한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직접 내려주겠다며 머신기 앞에 선 이재화를 향해 꾸벅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아메리카노? 카푸치노?”

“카푸치노로 부탁드립니다.”

포트폴리오를 옆구리에 끼고, 이재화가 뽑아 준 카푸치노를 두 손으로 건네받았다.

“꽤 맛있을 겁니다. 그럼 내일 봅시다.”

“그러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자리로 돌아간 그가 펜을 쥐었다. 테이블 위에 난잡하게 흩어진 디자인 용지들 속에서 또 다른 제품을 그려 내기 시작했다.

나는 회의실을 나서며 엘리베이터가 아닌 계단을 찾았다. 죽 한 번 돌아보고 돌아갈 생각이었다. 계단이 위치한 복도 끝으로 다가갈수록 소독약 냄새가 더 짙어졌다.

냄새의 정체에 대해 알게 된 순간 커피를 놓칠 뻔했다. 왼쪽 투명 유리창 밑으로 실내 수영장이 보였다. 라인은 다섯 개로 크진 않았지만, 회사 내에 수영장이 있다는 점이 놀라웠다. 또 수영장 안쪽으로는 헬스장이 연결되어 있었다.

매달 돈을 내고 사용해야 할지도 모르지만 복지는 끝내주는 회사인 것 같았다. 나는 뜨거운 커피를 찬찬히 홀짝였다. 카푸치노 거품이 입 안에서 사르륵 녹았다.

이재화의 말대로 커피 맛이 일품이었다.

***

아무리 생각해도 로또와 다시마 두 개는 미래의 행운을 암시하던 복선인 듯했다.

애초에 대형 브랜드라는 타이틀에 묶여 그만둘 생각도 하지 못했지만, 왜 이런 회사를 이제야 들어왔는지 후회막급이었다.

‘윰’은 사옥 곳곳에 일의 효율을 올리기 위한 장치가 극대화되어 있었다.

로비 카페는 푸짐한 브런치 가격이 고작 2천 원이었고, 각 층에 위치한 에스프레소 머신과 수영장, 헬스장 이용비는 무료였다. 수면실은 또 얼마나 좋던가. 우리 집 침대보다 더 푹신해 보이는 쿠션에 야근을 지원하고 싶을 정도였다. 지금 같아선 A4용지 다섯 장에 회사 찬양 리포트를 작성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박석연 씨, 이거 좀 봐봐. 어우, 진짜 죽여.”

회사 설립과 함께 입사한 곽일영 대리가 잡지를 불쑥 내밀었다. 두 발을 매끈하게 포개어 소파에 앉아 있는 유명 연예인의 광고 사진이었다.

“예쁘네요.”

“발 봐봐. 발톱이 아주 동그랗고 깨끗해. 죽이지. 하아, 하아.”

곽일영이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다만 발 페티시에 대해선 동의하기가 힘들었다.

장장 나흘 동안 이 연예인 저 연예인의 발 사진을 보여 주는데, 어디서 맨발들 사진만 족족 찾아오는지 신기할 뿐이었다.

설마 족발에도 흥분하는 거 아니야? 손으로 사진의 발을 매만지는 곽일영을 애써 웃으며 바라봤다.

윰 쉬즈 부서는 대리 곽일영과 나, 과장이자 팀장 일을 병행하는 이재화가 한 팀이었다.

나머지 두 팀이 더 있었지만, 사무실이 달라 입사 첫날 인사만 하고 얼굴만 익힌 게 다였다.

“박석연 씨.”

나는 이재화의 부름에 군기 잡힌 이등병처럼 번쩍 일어섰다.

“예.”

“신상 로퍼 내준 거 얘기해 봤는데요, 공장에서 스웨이드는 재봉 가능한데 금장 체인은 따로 샘플을 보여 달라네요.”

“집에 떼어다 놓은 샘플 있는데 내일 가져오겠습니다.”

“오케이.”

한 계절 앞선 상품을 개발해야 하는 건 비단 의류에 국한된 건 아니었다. 슈즈도 마찬가지였다.

원청회사에서 디자인을 제출하면 하청업체(공장)에서 그에 따른 소재와 장식을 끌어다 샘플을 만들어 낸다. 다소 특이하게도 윰은 패턴사를 고용해 샘플을 제작하지 않고, 직접 만드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공장은 이미 준비된 소재를 가지고 만들기만 하면 끝이었다.

“그리고 박석연 씨는 다음 주부터 시장조사 외근 나가도 돼요. 주 5일 기준으로 총 열두 시간이 외근으로 주어집니다.”

“알겠습니다.”

옆에서 허억허억거리는 곽일영의 숨소리가 거슬렸다.

저 사람이 드라마 <연인의 조건>의 여자주인공 구두를 디자인한 사람이었다는 걸 알았을 땐 놀라 자빠질 뻔했다. 발가락이 아슬아슬하게 가려지는 핫핑크 킬힐은 인터넷 상에서도 화제가 되어 윰 메인 상품으로 팔리는 중이었다.

나는 거친 숨소리를 무시하고 디자인 수첩을 펼쳤다. 갑자기 회사 앞 오동나무 꽃잎이 생각난 탓이었다. 종 모양의 꽃무늬를 끄적거리며 연보라색 수채 연필로 색을 쓱쓱 칠했다.

오동나무 꽃잎 향은 분내음을 닮아 있었다. 게다가 모양과 색에서는 처연함과 정숙함이 느껴지기까지 했다. 주말 드라마 <엘리스리스>의 주연 분위기와 꽤 어울릴 것 같았다.

쇼프로나 드라마에 지대한 관심은 없어도 자주 챙겨보기는 했는데, 시장조사의 일환이나 마찬가지였다.

트렌드는 하루아침에 바뀌고 지나갔던 유행이 어느 순간 다시 찾아오는 세상이었다. 디자인은 유행에 뒤처지는 순간 낙오되어 버린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최신 잡지들이 꽂힌 서재로 다가갔다.

체일 슈즈에서 발행된 여름용 팸플릿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것을 들어 휙휙 넘겼다. 열 개 중 절반 이상이 고루하고 흔한 디자인이었다. 그럼에도 잘나가고, 수많은 디자이너들이 입사를 선망하는 이유는 하나였다. 브랜드 파워.

잡지를 원래의 자리에 꽂아 넣고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기가 막힌 커피를 뽑아내는 에스프레소 머신으로 걸음을 옮겼건만, 회의실에 팻말이 걸린 걸 봐선 다른 팀이 있는 듯했다.

주차장하고 이어지는 1층 로비에도 같은 기종이 있다는 걸 떠올렸다. 계단을 내려가 주차장과 연결된 회전 유리문까지 한달음에 찾아갔다. 위가 어서 카페인을 보급하라며 난리였다. 에스프레소 머신에서 카푸치노를 뽑는 동안 무심히 유리문 밖을 바라봤다.

자전거 한 대가 휙 주차장 안으로 들어왔다.

발목까지만 내려오는 바지 덕에 짙은 청색 로퍼가 눈에 튀었다. 신발부터 보는 것도 직업병인가 싶어 찬찬히 시선을 위로 올렸다.

오픈한 숄 카디건과 안에 자리한 민무늬 흰 라운드 티의 배색이 자연스러웠다. 자전거를 세워 두고 내린 남자가 저벅저벅 회전문으로 걸어왔다.

삐- 에스프레소 머신에서 카푸치노가 다 됐다는 신호가 들렸다. 나는 종이컵 끄트머리를 잡아서 올라온 거품을 만족스럽게 내려다봤다.

회전문을 통해 들어온 남자도 머신 앞에 서서 아메리카노 버튼을 눌렀다. 비켜 주려고 그를 올려보는 순간이었다. 들고 있던 뜨거운 카푸치노를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힘을 꽉 쥐어야 했다. 손바닥이 덴 것처럼 뜨거워졌다.

안경 속으로 비치는 얼굴이 낯선 것 이상으로 익숙했다. 남자가 나를 보기 전에 재빨리 몸을 돌렸다. 카푸치노가 넘쳐흐르지 않도록 신경 써 가며 걸음을 재촉했다.

저 자식이 여기 왜 있어?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그것뿐이었다. 엘리베이터를 무시하고 계단으로 걸어 올라갔다. 잠시 멈춰 서서 입가에 카푸치노 거품을 머금었다.

곧 동요할 필요가 없었다는 후회가 밀려들었다. 차라리 얼굴을 마주 보고 누구세요, 라는 듯 무시하고 지나쳐 올 것을. 아니 그건 너무 우스운가.

자전거를 탄 데다 하고 온 차림새를 보아하니 아는 사람을 만나러 온 것일 수도 있었다.

후- 바람을 불자 커피가 부글부글거렸다. 팩스를 보낸 놈도 누군지 못 찾아냈는데 그 와중에 저 인간까지 마주하니 이 무슨 운명의 농간인가 싶었다.

입사한 지 며칠 안 된 신입이 오래 자리를 비울 수는 없어 사무실로 다시 돌아와 보니, 곽일영은 여전히 발 페티시 삼매경이었다.

“오늘 점심 뭐 먹을래요?”

잡지에 코를 박고 있던 곽일영이 불현듯 물었다.

“전 아무거나 잘 먹습니다.”

“밖에 나가서 먹죠. 쌀국수 어때요?”

“좋습니다.”

인터넷을 열어 패션위크 창을 뒤적거리며 구두들을 눈에 담았다. 좀체 집중하지 못하고 따닥따닥 마우스만 클릭해 댔다.

‘씨발, 넌 여기를 이렇게 이렇게 하면 꼴리냐?’

‘야, 나도 구멍 맛 좀 보자.’

‘존나 토 쏠려. 게이 새끼.’

내게로 쏟아지던 비난들이 생생했다. 왜 이런 기억은 잊히지도 않고 끈질기게 따라다니는 건지 모르겠다. 지금은 그런 소리를 들어도 얼마든지 흘려들을 수 있는데, 이상하게도 대학 때를 떠올리면 괴로울 정도로 속이 뒤틀렸다.

“배고프면 지금 먹으러 갈래요?”

곽일영의 말에 눈에 의문을 담았다. 곽일영이 검지를 들어 내 입술을 가리켰다. 나도 모르게 다 마신 커피의 종이컵을 잘근잘근 씹고 있었다. 이대로 앉아 있어 봐야 시간만 낭비할 것 같아 지갑을 챙겨 들었다.

나는 손으로 종이컵을 와작 구겨 동그랗게 말았다.

“와, 박석연 씨는 살림 잘하겠어요.”

“예?”

“그거 쓰레기 줄이려고 한 거 아니에요?”

곽일영이 구겨진 종이컵을 바라봤다.

“뭐…… 그렇죠……. 근데 쌀국숫집 어디 있는지 아세요?”

“편의점요.”

“편의점에서 쌀국수도 팔아요?”

“몰랐어요? 근데 박석연 씨 남자치고 발이 되게 작네요.”

발 페티시는 여자 남자 할 것 없이 평등한가 보다. 곽일영의 시선이 걷는 족족 따라오며 내 구두에 머물렀다.

***

점심으로 먹은 쌀국수가 그대로 얹힌 것 같았다.

편의점에서 판다는 쌀국수는 황당하게도 컵라면이었다. 물론 벌게진 눈으로 편의점 밖의 여자들의 발만 쳐다보는 곽일영 때문에 얹힌 건 아니었다.

홀로 남은 사무실에서 엎드려도 봤다가 마우스를 끄적거리기도 하다가, 결국엔 나오지도 않는 머리를 쥐어짜 신상 디자인이나 꾸역꾸역 그리고 있었다. 곽일영과 이재화는 신설동 가죽 시장으로 외근을 나간 터였다.

쿵-! 사무실의 문이 단번에 활짝 열렸고, 벽에 부딪힌 문고리가 소음을 자아냈다. 뺨을 책상에 대고 손만 끄적거리던 게 들킬세라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한 손을 주머니에 꽂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다 눈을 크게 떴다. 안경을 벗은 얼굴이 이제는 완전히 낯익었다. 그가 홀로 있는 나를 보더니 말을 던졌다.

“나머지 사람들은?”

“외……근 나가셨습니다.”

대답하면서도 내가 왜 저 인간의 질문에 답을 주어야 하는지 황당했다.

“따라와.”

“예?”

책상을 붙잡은 채로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얼빠진 소리 하고는. 사장실로 와.”

그렇게 툭 내뱉고는 곧바로 사무실을 나가버렸다. 나는 입만 벌린 채로 그가 나간 문을 노려봤다.

사장실……?

저 인간이 설마…….

고개를 탈탈 흔들고는 자리에 풀썩 앉았다. 아니, 아직 속단하기는 일렀다. 제가 직접 사장이라고 말하진 않았잖아. 하지만 분명 사장실로 와, 라고 했었지? 그렇다면…….

‘거기 회사가 정말 좋기는 한데……. 너한테는 좀 안 맞을지도 모르겠다.’

재운 선배의 말이 다시금 떠올랐다.

선배, 안 맞는 정도가 아니잖아요, 이건.

오히려 소고기를 내가 얻어먹어야 할 판국이었다. 아무리 일자리가 없어도 그렇지…….

나는 디자인 수첩을 북 찢었다. 연달아 휘갈겨 같은 글을 반복해서 썼다.

사표, 사표, 사표.

종이컵을 구겼듯 종이도 와작 뭉갰다. A4용지 다섯 장에 회사 찬양 리포트가 아닌 사표를 빼곡히 적어도 모자랐다.

저 인간은 최상의 조건을 모두 물리칠 만큼 최악이었다. 제대로 된 분도 풀지 못했던 기억이 스멀스멀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바보가 따로 없었지.

‘제가 선배한테 뭐 잘못한 거라도 있어요? 혹시 그 일 때문입니까? 그래서 그런 소문을 퍼뜨리셨어요?’

‘네가 사람 보는 눈 없는 걸 왜 나를 탓해. 공짜로 좋은 경험 했다고 생각해.’

뻔뻔할 정도로 차가운 말투가 귓가에 어른거렸다. 나는 의자를 거칠게 뒤로 밀어냈다.

A4 용지를 찾아 커다랗게 ‘사표’라는 글자를 작성해 딱 두 번 접었다. 용지를 손에 쥐고 물어물어 사장실을 찾아 3층으로 올라갔다.

굳게 닫혀 있는 문을 쿵쿵 힘을 주어 노크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S 자 모양의 의자에 앉은 남자는 들어온 나를 힐끔 올려다봤다. 그는 다시금 안경을 쓰고 있었다.

책상의 끄트머리에 놓인 투명한 유리명패에 대표 [진여원]이라는 글자가 파여 있었다. 양쪽 벽면에 빼곡하게 놓인 책장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 꼭대기에 도달할 수 있었다. 왜인지 모를 압박감이 느껴졌지만, 일부러 발에 힘을 주어 걸었다.

“신발도 화를 내나.”

그가 피식 웃으며 서류로 손을 놀렸다. 아까 먹은 쌀국수가 부글부글하고 속에서 끓어오르는 것만 같았다.

“아무리 사장님이라도 회사에서 반말 들을 이유 없습니다.”

차갑게 응수하며 뒤로 놓인 손을 앞으로 뻗으려는 찰나였다.

“뻔하게 사표 내러 왔습니까?”

뻔한 행동해서 미안하군.

곧장 존댓말이 나온 데다 내 행동보다 더 빠른 그의 말에 머리로 열이 올랐다. 정 떨어질 만큼 말끔하게 생긴 상판을 한 그는 다시 서류로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이해합니다. 두고 가세요.”

이해합니다? 뻔뻔한 건 세월이 지나도 변하는 법이 없는 듯했다.

“일단 우리도 사람을 구해야 하니 일주일만 지내요. 사표는 그 후에 처리하겠습니다.”

사과는커녕 제 할 말만 하고 이쪽은 쳐다보지도 않는 태도에 화조차 나지 않았다. 아니, 너무 화가 나서 머리가 백지가 된 건가 싶었다.

나는 그의 책상으로 성큼성큼 다가가 [사표] 딱 두 글자만 적은 종이를 탁 내려놨다. 내려놓은 위치도 그의 서류 중앙이었다.

“진 사장님, 말을 하실 때는 사람을 쳐다보고 말씀하셔야죠.”

진여원이 안경을 툭 벗어 내려놓았다.

“박석연 씨, 안 본 사이에 건방져졌군요.”

진여원이 빤히 내 눈을 들여다봤다.

“누구 덕분이죠. 그리고 이거 사기 채용 아닙니까? 그쪽이 여기 사장인 줄 알았으면 면접도 안 봤습니다. 사람 구할 동안 더 일해야 하는 이유도 모르겠고요.”

쯧- 진여원이 혀를 찼다.

“마음대로 해요. 내일부터 안 나와도 상관없으니.”

그게 끝이었다. 그는 나가라는 듯 또 애초에 내가 여기 없었다는 듯 서류에만 집중했다. 옆으로 밀린 사표가 방치된 나만큼이나 덩그러니 무시당하고 있었다.

며칠간 일한 돈 안 받아도 그만이었다. 지금 당장 회사를 박차고 나갈 생각만 가득했다. 이를 악물고 돌아나가는 내 등에 그의 목소리가 부딪혔다.

“박석연 씨.”

돌아보니 그가 사표 종이를 끌어 와 손에 쥐고 있었다.

“사표 양식 알려 줘?”

그가 종이를 팔랑팔랑 흔들었다. 그 바람에 눈이 뾰족하게 올라갔다.

“걱정 마시죠. 양식 제대로 맞춰서 다시 제출하겠습니다. 일주일이라 하셨죠? 딱 일주일간만 자리 채우겠습니다. 월급은 제대로 주실 거라 믿죠.”

제 할 말만 내뱉고 사장실의 문을 쾅 닫았다. 문에 등을 기대고 나서야 흥분했던 정신이 퍼뜩 돌아왔다.

뭘 일주일을 더 해.

울컥한 마음에 있는 대로 내뱉었더니 속이 시원하기는커녕 가슴만 더 답답해졌다. 내가 미쳤지, 미쳤어. 2층까지 쿵쿵거리며 내려와 그새 비어 버린 회의실에서 카푸치노 한 잔을 더 뽑았다. 커피 맛이 정말 억울할 만큼 좋아서 울적함이 배가 됐다.

사무실로 돌아오니 외근 나갔다 온 곽일영이 내 옆자리에서 뭐에 홀린 사람처럼 펜을 휘갈겨 대고 있었다.

“발, 발, 무슨 발, 쟁반같이 둥근 발. 어디어디 있나, 옆자리에 있지.”

곽일영은 노래까지 중얼거리며 앞코가 둥근 분홍 플랫슈즈를 뚝딱 완성시켜 나갔다.

손만 뻗어 색연필 통을 와르르 쏟아 ‘어느 것을 고를까요.’의 모양새로 손가락을 왔다 갔다 했다. 안 그래도 부산스러운 정신을 곽일영이 더했다.

“깔창은 흰색, 검은색 스트라이프 패턴을 교차시키는 게 좋겠는데요.”

곽일영이 고개를 번쩍 들어 반짝이는 눈망울로 나를 쳐다봤다.

“어? 나 박석연 씨 진짜 좋다.”

“고백은 감사한데, 딱히 연인은 안 만드는 주의라 사양할게요.”

곽일영은 내 농담을 듣지도 않고는 깔창 안감을 스트라이프 무늬로 칠했다. 보통 겉면 색상이 단조롭다면 깔창을 돋보이게 만드는 게 정석이었다. 어차피 발바닥이 닿는 곳이라 보이지는 않으나 판매를 하려면 어떻게든 구매자의 시선을 사로잡아야 했다.

물론 인체의 특성상 발바닥은 일자가 아닌 곡선으로 되어 있기에 플랫슈즈는 걸을 때나 앉아 있을 때 깔창이 흘끔흘끔 보이기는 했다.

“근데 어디 갔다 왔어?”

“사장실요.”

“응, 우리 사장님 되게 좋은 사람이지?”

곽일영은 웬만해선 사람을 다 좋아하나 보다. 좀 전에 나한테도 그러지 않았나. 그러나 진여원이 좋은 사람이라는 소리는 수긍하지 못하겠다.

“회사에 사장이 두 명인가 보죠.”

곽일영이 눈치채지 못하게끔 뼈 있는 말을 던졌다. 그러자 곽일영이 고개를 갸웃했다.

“우리 회사 사장님 한 명인데? 오! 완성됐다.”

곽일영이 플랫슈즈 디자인이 완성된 용지를 나한테 내밀었다.

“여기다 박석연 씨 이름도 써.”

“예? 왜요?”

“공동 작업했잖아, 지금.”

아이디어를 내는 족족 뺏어 가는 게 이 바닥 생리인 줄 알았는데,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곽 대리님 좋은 사람이네요.”

곽일영이 내민 디자인 용지를 책상에 반듯이 펼쳐 놓았다. 이왕 이름 쓸 거 오전에 생각했던 것을 써먹기로 했다. 동백나무 꽃을 앞코에 그려 넣었다. 걸을 때마다 달랑달랑거리는 귀여운 모양이 될 것 같았다.

“예쁘다!”

곽일영이 용지를 휙 뺏어 가서는 헤실헤실거렸다.

“근데 박석연 씨는 어디 있다 왔어?”

“체일 슈즈요.”

“오~ 좋은 데네.”

왜 이동했어? 라는 말이 필연적으로 나올 것 같았는데 그냥 고개만 주억거리고 말뿐이었다.

“대리님은요?”

곽일영이 디자인 용지를 이재화의 자리에 올려놓으며 대답했다.

“나? D&C.”

귀를 의심했다.

“D&C……요?”

“응.”

곽일영은 무슨 문제 있어? 라면서 눈을 끔뻑였다.

체일 슈즈는 상대도 안 되는 명품 브랜드잖아. 그런 인재가 왜 진여원의 회사에 있을까. 새삼 남 걱정이 들었다.

“진짜 좋은 데 계셨네요.”

“여기가 더 좋아.”

동시에 사무실 문이 열렸다. 이재화가 어깨에 메고 있던 커다란 비닐봉지를 바닥에 툭 내려놓았다. 샘플 제작용 중창과 가죽인 듯했다.

이재화의 얼굴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다짜고짜 우리 자리의 도식지를 보더니 평가를 내리듯 음- 하고 목을 울렸다.

“만들어.”

이재화가 곽일영과 나를 향해 도식지를 던졌다.

***

“이모, 여기 맥주 500cc 한 잔 더 줘요.”

재운 선배는 맥주잔이 바닥을 보이자마자 바로 추가 주문에 들어갔다. 맥주 고래답게 내가 한 잔 마실 동안 벌써 석 잔째 흡입하는 중이었다.

하소연을 하러 나온 사람은 나인데, 장장 한 시간째 재운 선배의 상사 욕만 들어야 했다.

“선배, 윰 말고 다른 데는 없어요?”

“네가 아직 배가 덜 고프구만. 개인 업체라도 들어갈래? 그런 자리는 많이 아는데, 연봉은 체일슈즈에서 받았던 것보다 훨씬 낮을 거야.”

재운 선배는 새로 나온 맥주의 절반을 단숨에 해치운 뒤, 손등으로 입술을 벅벅 훔쳤다. 곱게 잘생겨서는 여전히 하는 짓은 털털했다. 눈꼬리가 처져 있어 호감 가는 인상이 더없이 선하게 누그러졌다.

“너 인마, 그게 대체 언제 적 얘긴데 여태까지 앙심 품고 있어. 뒤끝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만, 거기 입사조건 엄청 까다로워. 진여원 입맛이 워낙 고급이어야 말이지. 너 정도 스펙이니까 가능한 거야.”

“그 스펙 가지고 정말 다른 데는 없어요?”

“막말로 진여원이면 눈요기도 되겠다, 너한테는 꿈의 직장 아니냐.”

“그게 개인 취향 무시 발언이에요.”

“키우는 개새끼 성격이 아무리 개차반이라도 생김새 하나만 예쁘면 다 용서되는 거 몰라?”

“개랑 사람이 같아요! 그리고 강아지가 옥상으로 주인을 떠밀기라도 하겠어요?”

“……너 옥상에도 올라갔었냐?”

재운 선배가 연달아 혀를 차며 맥주를 마셨다.

“그럼 일단 내년까지만 버텨 봐. 우리도 3월에 항상 공채하니까.”

나는 닭똥집 꼬치를 오독오독 씹었다.

“근데 복지는 우리 회사보다 윰이 훨씬 낫다? 솔직히 체일 슈즈보다도 낫잖아.”

“그건 그렇긴 한데…….”

늘 개방되어 있는 수영장과 헬스장을 비롯해 옥상에는 테니스장, 입에서 사르르 녹는 카페테라스의 핫케이크, 유명 바리스타가 살고 있는 것 같은 에스프레소 머신까지. 그뿐이랴 칼퇴근은 기본이었다.

안 그래도 머신이 탐나서 따로 구입할까 하고 가격을 알아봤더니 억 소리는 아니더라도 천 소리는 나더라.

“연봉 협상은 했냐?”

“아직요.”

“크게 질러 봐, 너 어차피 거기서 계속 일할 생각 없잖아.”

“진짜 큰맘 먹고 한 5천 부를까 봐요.”

“우리 박석연이 배포가 작아서 어디다 써먹나. 적어도 6천은 불러야지.”

“대기업 과장도 아니고 주겠어요? 그리고 인센티브 제도도 있다는데.”

“내 보기엔 넌 체일 슈즈랑 안 맞았어. 가지고 있는 재능 썩히는 꼴밖에 더 돼? 체일 슈즈도 브랜드 파워 하나로 버티고 있는데, 거기도 장기적으로 봤을 땐 위험해. 차라리 잘 나왔다 생각해. 어차피 너도 회사만 다니다 끝낼 생각은 아니잖아.”

최종 목표는 내 브랜드를 갖는 것이지만 세상이 그리 만만하진 않았다. 쇼핑몰을 창업하려 해도 족히 천 단위는 들고 광고비는 그 이상으로 필요했다. 광고 자금이나 유명 연예인 인맥도 없으니 PPL은 꿈도 못 꾼다. 맥주의 탄산에 목이 따끔따끔했다.

“내일도 출근해야 하는데 그만 드세요.”

추가로 맥주를 주문하는 재운 선배를 말렸다.

“마시고 회사로 들어가 봐야 돼.”

“잔업 있어요?”

“이번에 <엘리스리스> 마지막 회 촬영분이 바다 신이라잖아. 신발 벗고 바다로 들어가는 뭐 그런 거라던데, 중점적으로 비춰질 테니 여기저기서 PPL 넣고 싶어 난리지. 우리도 그 난리 속에 꼈다. 샘플만 수십 개씩 쏟아 내고 있어.”

“설마 여주인공 자살한대요?!”

그게 중요하냐? 싶은 얼굴로 재운 선배가 어이없게 웃었다.

“드라마 광이냐?”

“그건 아니고. 그냥 어쩌다 보니.”

“나도 자세한 내용까지는 몰라.”

재운 선배가 숨도 쉬지 않고 500cc 한 잔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보는 내가 다 목이 아팠다.

“일어나자.”

“계산은 제가 할게요.”

“됐어 자식아, 내 연봉 보면 눈이 회까닥 돌아갈걸.”

그러면서 낸 카드는 법인카드였다.

선술집을 나와 인사를 하고 선배와 반대로 걸어가며 곰곰이 생각했다. 선배 말도 일리는 있었다. 그게 대체 언제 적 얘기인데 앙심을 품고 있냐는……. 그런데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사람이 다시 그 도끼를 보고 싶겠냐 이 말이다.

집 근처에서 마신 덕에 오는 길이 고달프진 않았다. 현관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마트 광고 종이들을 떼어 냈다.

참치 캔 990원. 그 큼지막한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내일은 찌개나 끓여 먹을까?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요리 중 가장 자신 있는 게 참치김치찌개였다. 엄마가 준 김치로 끓이는 거니 어려울 것도 없었다.

회사를 그만두느냐 마느냐의 기로에 서서 내일 반찬이나 걱정하는 내가 한심했다. 그래도 옛날에 비하면 많이 무신경해졌지. 이게 다 진여원 덕이라면 덕이었다.

광고지를 분리수거함에 던지고 침대에 털썩 앉았다. 괜히 또 옛날 생각이 나서 감상에 잠기려던 순간이었다.

-미안해, 솔직하지 못한 내가, 지금 이 순간이 꿈이라면.

휴대폰 벨소리가 울려 퍼졌다. 두 달 전인가, 체일 슈즈의 직원과 게임을 하다가 벌칙으로 깔아 놓은 벨소리인데 여태 귀찮아서 바꾸지 않았다. 이직도 했으니 이참에 바꿔야겠다고 생각하며 발신자를 확인했다.

엄마였다.

아들 힘든 거 알고 응원하려고 전화한 것만 같아 마음이 짠했다.

“엄마, 안 자고 웬일이야.”

[석연이, 너 돈 좀 부치라.]

단박에 짠한 마음이 증발했다.

“무슨 돈.”

[옆집 바치 싸게 나왔는데 마려. 우리가 살까 현데, 배추도 심고 혀서 보내 줄 테니까.]

“내가 갑자기 돈이 어디 있어.”

[일은 뭐에 한다냐.]

“트랙터 사 줬잖아. 돈 없어 나.”

[그놈의 트랙터 있음 뭐 하냐! 바치 읎는데 바치!]

하기야 마당에서 트랙터를 끌기는 좀 그렇지. 시골이니 생각보다 땅값이 쌀 수도 있었다.

“얼만데.”

[너 아부지한테도 2천 있으니께, 너가 천주믄 되긋다.]

잠시 할 말을 잃었다. 통장에 모아 둔 돈이 딱 천만 원이었다.

당장 일 그만둬도 두어 달은 근근이 버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닌 밤중에 날벼락이 따로 없었다.

“돈 없어. 천만 원이 누구 애 이름이야?”

[아들노무 새끼 하나 있는 게, 손주는 못 만들어 줄망정 농사지을 바치라도 사줘야 할 거 아녀.]

“그 얘긴 왜 또 꺼내, 미안하게.”

[……미안한 놈이 그르냐.]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에이씨, 거칠게 눈을 비벼 뚝뚝 떨어지려던 것을 막았다.

대학교에서 퍼진 소문이 집까지 들어가는 건 순식간이었다. 내가 다녔던 대학 행정실에서 평생을 일해 오던 아버지가 예상보다 일찍 은퇴한 것도 다 못난 아들놈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석연이 네가 몹쓸 병에 걸린 것도 아니고, 남한테 피해 준 것도 아닌데 왜 죄지은 놈처럼 고개 숙이고 다니냐. 난 하나도 부끄럽지 않다.’

심적으로 궁지에 몰렸을 때 아버지가 해주신 말이었다.

그때만큼 옥상에 올라갔었다는 사실이 죄송스러울 때도 없었다. 제 감정에 못 이겨 부모님 가슴에 대못 박는 일인 줄은 모르고…….

“알았으니까 계좌 보내. 내일 부쳐 줄게.”

[우리 죽고 나면 어차피 다 니꺼 아녀. 무덤에 돈다발 다 싸가지고 갈 것도 아니구.]

“자꾸 그럴 거요! 믄 죽는단 소리를 하요!”

태어난 것도 서울, 자라난 것도 서울인데 가끔 엄마와 대화할 때는 말투가 전염되어서인지 정체 모를 사투리가 튀어나왔다.

[왜 화를 내고 지랄인다냐.]

“됐으니까, 아버지한테 안부나 전해 줘.”

[이잉, 아릇다.]

뚝, 전화가 끊어졌다. 어떨 때 보면 아버지와 엄마가 뒤바뀐 게 아닐까 싶었다. 어렸을 때부터 무뚝뚝한 건 엄마 몫, 조용히 챙겨 주는 건 아버지 몫이었다.

소나기 오던 날 개울가에서 만난 서울 청년과 시골 여인의 로맨스로 내가 태어났다는 게 아이러니다.

아버지가 소설가 황순원 ‘소나기’의 팬만 아니었다면 내 이름이 석연이 되는 일도 없었겠지.

‘어쩌면 저렇게 자식 복이 없을까.’

연이의 죽음에 석이의 부모가 하던 말이었다. 당신이 아들놈 이름을 저렇게 지어서 우리도 자식 복이 없는 거라며 노발대발하던 엄마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나는 샤워하는 것도 잊은 채 침대에 드러누워 버렸다. 이렇게 된 거 연봉이나 세게 불러서 돈이나 얻어 내고 말자는 생각만 무럭무럭 커져 갔다.

과거의 분함 때문에 물러나는 것보다 차라리 진여원의 주머니라도 털어 내는 게 더 탁월한 선택이 아닌가 싶었다. 물론 자기변명이었다.

돈, 돈, 그놈의 돈이 문제다.

***

당당히 그만두겠다 말한 지 하루가 지나고 또 이틀이 지났지만, 나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도 뻥긋 못했다. 그 와중에 다른 사람을 구했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 전전긍긍했다.

사장실로 향하는 발걸음을 막은 건 자존심이었다. 계속 다니겠다고 말했는데 버스는 지났으니 나가라, 라고 말하면 쥐구멍을 찾아야 했다.

그래도 오늘은 꼭 말해야 할 텐데…….

나는 회사 건물 앞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멍한 시야에 파스텔 카디건을 입고 자전거를 타고 오는 남자가 보였다.

잘생겼네― 하고 생각 없이 쳐다봤는데, 그게 진여원이었다. 눈과 뇌를 뽑아 버리고 싶었다.

진여원이 나를 지나쳐 가다 브레이크를 잡아 자전거를 세웠다. 나는 그에게 고개만 꾸벅했다.

“……안녕하십니까.”

바람에 날리던 그의 머리카락이 자연스럽게 제자리로 돌아왔다.

“새삼 잘생겨 보여?”

진여원의 말에 비웃음에 가까운 미소를 띠었다.

“네, 참 잘생겼네요. 건물이.”

“역시. 내가 설계했거든.”

비꽈서 대답했는데 진여원은 애초부터 회사 건물에 대해 물어본 것임을 깨달았다. 다시 주차장으로 향하듯 핸들을 고쳐 잡았다.

“저기 사장님!”

급하게 진여원을 불렀다. 진여원이 한쪽 페달에만 발을 올려놓은 채로 나를 쳐다봤다.

사장실로 직접 찾아가는 것보다 지금이 나을 것 같았다. 행여 퇴사하라고 해도 민망함은 덜할 테고.

“저…… 혹시……. 직원 구하셨습니까?”

진여원이 손목시계를 보더니 그대로 입을 열었다.

“30분 뒤에 사장실로 와요, 박석연 씨.”

30분 뒤? 진여원의 말에 의문이 생겨버렸다.

“아니면 연봉 협상 여기서 할 건가.”

진여원이 툭 내뱉고는 페달을 밟았다.

가다가 바퀴나 터져라. 속으로 구시렁구시렁거렸지만 정작 엎어질 뻔한 건 나였다. 애꿎은 바닥만 밑창으로 꾹꾹 짓누르며 걸었다.

2층으로 올라가 어느새 버릇이 된 일과처럼 에스프레소 머신 앞에 섰다. 오늘은 달달한 카푸치노보단 아메리카노가 더 당겼다.

일단 연봉 협상하자는 얘기는 계속 다닐 수 있다는 거겠지?

커피를 홀짝거리며 사무실로 향했다. 나보다 먼저 출근한 곽일영이 부지런히 샘플을 만들고 있었다.

“대리님, 좋은 아침입니다.”

“좋은 아침.”

라스트에 꽂힌 슈즈의 모양이 그럴싸했다. 둘이서 같이 아이디어를 낸 인디핑크색 플랫슈즈였다. 고심해서 천을 고르느라 샘플 작업이 며칠 늦어진 것치고는 꽤 성과가 있어 보였다.

“석연 씨 말대로 캔버스 천으로 하니까 훨씬 예쁘다.”

“다행이네요. 중창은 기존 플랫슈즈보다 더 두껍게 만들었거든요. 일단 보세요.”

어젯밤, 하릴없이 드라마를 보기도 뭐해 만들어 온 것이었다. 키 높이가 기본인 트렌드에 맞춰, 굽이 거의 없다시피 한 플랫슈즈들도 기본적으로 속굽이 들어가 있었다. 중창을 두껍게 만들수록 속굽은 더 높아진다.

나는 본드 칠을 해 중창을 붙이고 발등과 양옆 날개를 연결했다. 샘플 제작이니만큼 완벽한 기성품이라 부르기엔 조잡한 면들이 보였지만, 썩 나쁘진 않았다.

대충 완성한 신발을 곽일영에게 내밀었다.

“박석연 씨, 손 진짜 빠르다.”

입을 벌리고 구경하던 곽일영이 슈즈를 이리저리 훑어봤다.

“아무래도 샘플이니까요.”

마지막으로 오동나무 꽃잎 모양의 액세서리를 앞코에 붙였다. 강력접착제라 손부채질을 하지 않아도 금세 말랐다.

“일단 신어 봐야 괜찮은지 알겠는데, 사이즈가 맞을지 모르겠네요.”

신고 온 맞춤구두와 양말을 벗은 뒤 플랫슈즈에 발을 넣었다.

보통 남자들에 비해 작은 발은 이런 때만 쓸모 있었다. 나쁘지 않은 착용감에 다른 쪽 플랫슈즈에도 액세서리를 붙이고 양쪽으로 신어봤다.

“예뻐!”

곽일영이 하아, 하아. 또 거친 숨을 쏟아 냈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니 달랑달랑거리는 연보라색 종꽃과 인디핑크 캔버스 천이 아담하고 소박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괜찮네요.”

앞뒤로 걸어 보는데 곽일영의 숨소리가 점점 더 거칠어졌다.

발 페티시에 불을 지핀 게 설마 난가 싶어 신발을 벗으려는 찰나였다. 가장 높은 직급답게 제일 늦게 출근한 이재화가 들어오고 있었다. 아직 잠기운이 가시지 않은 듯 눈이 붉었다.

이재화는 인상을 쓰고 내가 신고 있는 플랫슈즈를 노려보더니, 오- 하는 입 모양을 만들어 냈다.

“디자인으로 본 것보다 훨씬 낫네. 난 오케이야. 패턴 따로 뜬 거 있지? 그거 일단 줘 봐.”

곽일영은 여전히 내 발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패턴을 건넸다.

9시 정각을 가리키는 전자시계가 띠링- 벽면에서 울렸다. 30분 뒤에 오라고 했으니 지금쯤이면 알맞을 듯했다.

“저 사장실에 좀 다녀와도 될까요?”

“사장실이면 잘됐네요. 그럼 그거 신고 갔다 와요.”

“이걸 신고요?”

“사장님께 샘플 보여 줘야 하거든요. 어차피 직접 신어서 보여 줘야 하니까.”

구두로 갈아 신고 슈즈는 따로 들고 갈까 하다가 말았다. 사장실에서 양말을 벗고 슈즈를 신는 것을 상상하니, 그게 더 이상한 모양새인 것 같았다.

밖에 나가는 것도 아니니 상관없겠지. 나는 양말을 뭉쳐서 구두에 넣고는 아메리카노를 들고 나왔다. 원두 원액이 가라앉은 밑 부분까지는 마시지 않고 쓰레기통에 버려 버렸다.

옴므 부서가 있는 3층 복도를 걷다가 갓 출근한 여자직원 무리 몇몇을 마주쳤지만, 내 꼴을 보고 웃거나 손가락질 같은 건 하지 않았다. 구두 회사에 있다 보면 샘플을 신은 줄도 모르고 돌아다니는 직원이 한둘이 아니었다.

나는 사장실 앞에 서서 심호흡을 딱 두 번 했다. 이렇게 된 거 내년까지는 어떻게든 버텨 보자. 또 누가 아나, 계속 보다 보면 무뎌질지도 모르지.

똑똑- 노크를 두 번 하고 문을 빠끔히 열었다. 자리에 앉아 있는 진여원이 들어오라며 턱을 까딱했다. 안으로 발을 디디자 진여원이 갑자기 짧게 웃었다. 그의 시선이 내 발에 머물러 있었다.

남자도 얼마든지 인디핑크 슈즈를 신을 수 있다는 듯 당당하게 걸어가자 그는 웃음의 잔해를 거두지 않고 나를 쳐다봤다.

“샘플입니다.”

“모델이 좋은 건가, 신발이 예쁜 건가.”

자칫 무성의하게 느껴질 만한 억양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진여원이 책상을 돌아 나왔다. 그가 책상 끄트머리에 걸터앉아 팔짱을 꼈다.

“돌아봐요.”

한 바퀴를 빙 돌았다.

“팔은 왜 벌려.”

탁, 나도 모르게 벌리고 있던 팔을 허벅지에 붙였다.

“이 과장한테 통과됐다고 전해요.”

보통 디자인 하나를 통과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족히 일주일 이상이었다. 이렇게 일사천리에 진행되는 것에 대해 한편으론 속이 다 시원했다. 그간 체일 슈즈에서 쌓인 게 많았나 보다.

“회사 방침에 대해선 이미 다 들었을 테고, 그래서 연봉은 얼마를 원합니까. 애타게 한 만큼 불러 보든가.”

내가 사표를 내겠다고 말한 게 연봉 협상이나 하고자 꼼수를 부린 거라고 생각했단 말인가.

진여원은 상식을 벗어난 인간이었다. 하지만 아쉬운 놈이 우물을 판다고 하나하나 열 받을 필요도 없었다. 받을 건 받고, 일할 건 하면 그만이었다. 그렇다한들 재운 선배 말처럼 6천을 부를 용기는 없었다.

“연봉은 체일 슈즈에서 받았던 만큼만 주시면 됩니다. 그리고 지난 일은 저도 잊을 테니 사장님도 쿨하게 잊고 대해 주시죠. 사장님께서 저한테 실수했던 일은 어린 날의 객기라고 생각하겠습니다.”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박수를 쳐 주고 싶었다. 정말 지난 일이니 아무렇지 않게 잘 말한 것 같았다. 덤덤한 표정을 유지하려 얼굴에 신경을 쏟아 부었다.

“쿨한 박석연 씨 마음이 갑자기 왜 변했을까나.”

진여원이 고개를 삐딱하게 하고 나를 떠보듯 쳐다봤다. 0.1초 만에 생각난 변명이라곤 이것뿐이었다.

“커피가 너무 맛있어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그때였다.

-따라, 따라 라라라라. 미안해, 솔직하지 못한 내가.

놀라서 황급히 휴대폰을 꺼냈다. 또 그 와중에 놓치는 바람에 벌칙 게임으로 깔아두었던 벨소리가 줄줄 흘러나왔다. 진여원이 굴러간 휴대폰을 먼저 주워 내게 내밀었다. 건네받아 재빨리 통화 거부 버튼을 눌렀다.

“죄송합니다.”

나는 사죄의 말을 하고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아무리 자유로운 회사라 하더라도 사장 앞에서……. 게다가 저 인간에게 책잡히고 싶지 않은데 몰상식한 놈이 된 것만 같았다. 전 회사에서는 한 번도 저지른 적 없던 실수였다. 결국 플랫슈즈에다가 복잡한 생각까지 가미되어 일어난 사태였다.

“박석연 씨 휴대폰은 인공지능이 탑재되어 있나 본데.”

인공지능?

가만히 말을 되새겨 봐도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가서 우리 엄마 전화나 받아요.”

진여원이 휴대폰에 저장된 문구를 그대로 읊었다. 얼굴에 확 열이 올랐지만, 내색하지 않고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나는 사장실을 나와서 한참 뒤에야 진여원의 말뜻을 완전히 이해했다. 인공지능…….

휴대폰이 내 거짓말을 감지했다는 말이었다. 미안해 솔직하지 못한 내가는 무슨 내가야. 당장 벨소리부터 갈아 치워 버릴 생각으로 휴대폰을 꽉 쥐었다.

걷는 내내 신발의 종꽃이 달랑달랑 흔들렸다.

‘좋은 사람 있으믄 데리구 오구. 담달에는 상추도 무럭무럭 클 테니까.’

엄마로서는 엄청난 결심이 필요했을 것이다.

나한테 있어 좋은 사람 = 남자니까.

그 덕에 어긋난 전화 타이밍에 대해서 울컥했던 것도 잊고 애정 어린 잔소리만 듣다 전화를 끊었다.

좋은 사람이라…….

가끔 게이 바나 가서 놀다 오는 생활이 전부였다. 곽일영에게 연인을 만들 생각이 없다던 말은 비단 농담은 아니었다. 누구 한 사람에게 정착할 마음은 버린 지 옛날이었다.

멋모를 어릴 적에는 나한테도 소울메이트가 있을 거라는 환상에 젖어 보기도 했지만, 지금 와서는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안다.

게다가 종잡을 수 없을 만큼 사람에게 빠져 버리는 성격을 타고나서 사랑을 한 번 시작하면 포클레인으로 비트를 파고야 만다. 불필요한 에너지 소모를 하느니 얄팍한 관계가 차라리 편했다.

가끔씩 찾아오는 외로움에 강아지라도 키워 볼까 생각해도, 데려올 강아지가 뭔 죄인가 싶어 그만두기를 벌써 몇 번이나 반복했다.

나는 옆 사무실에서 나오는 사람과 가볍게 눈인사만 하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그런데 새로운 직원이었지? 라는 듯 쳐다보는 눈초리에 뭔가 꺼림칙한 감정이 담겨 있는 느낌이었다. 그냥 느낌이겠지.

“과장님, 플랫슈즈 통과됐다고 전달받았습니다.”

“오케이, 그럼 일영이가…… 아니다, 길도 익힐 겸 공장에는 석연 씨가 다녀와요. 235랑 240사이즈로 금요일까지 기성품 샘플 만들어 달라고 전해줘요. 급한 거니까 최대한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 하고요.”

이재화가 공장 약도를 그린 포스트잇을 내게 건넸다. 성수동이면 왔다 갔다 두 시간은 충분히 걸리는 거리였다.

보통 원청과 공장 사이의 의견이나 디자인 전달은 신입이 맡는 일이었다. 체일 슈즈에 있을 때는 짬밥이 제법 되는 터라 이런 건 밑의 직원들에게 맡겼었다. 새삼 다시 막내가 됐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검은 비닐봉지에 패턴과 샘플 원단을 바리바리 챙겨들고 1층 카페로 향했다. 아무래도 점심 먹을 시간은 따로 없을 것 같았다.

카페에서 양갱을 하나 사서 지불할 돈은 우리 팀으로 걸어 놓고, 크게 한입 베어 먹었다.

오전 8시 30분부터 오후 7시 사이에 카페 이용은 전부 회사 부담이었다. 카페긴 하지만 라면만 제외하면 편의점에서 파는 것들이 대부분 진열되어 있었다. 진여원만 아니면 회사 건물에다가 절이라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로비를 빠져나오는데 바람에 비닐이 부스럭부스럭거렸다. 나는 손에 들린 양갱과 비닐봉지를 차례로 내려다봤다. 가방을 가지고 나올걸 그랬나. 뭔가 처량한 기분인데…….

고개를 틀자 테라스에 앉아 전화통화를 하고 있는 진여원이 보였다.

눈이 딱 마주친 순간 그도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마침 전화통화가 끝난 것 같았다. 그가 손을 까딱까딱 접었다.

재수 없는 동작이었지만 군말 않고 그에게로 다가갔다.

“뭐가 달랑거리나 했더니…….”

진여원은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나를 쳐다봤다. 안경이 없어서 저러는 건가 싶었다. 반말과 존댓말이 묘하게 뒤섞여 있는 어투에 꼬투리를 잡을 수도 없었다.

하긴 사장이 날 ‘야’라고 부르든 ‘너’라고 부르든 뭔 말을 할 수 있겠냐만. 처음 본 날이야 그만두겠단 패기가 넘쳐 반말하지 말라며 엄포를 놨지만, 이제는 월급을 주실 사장님이 아니신가. 그러거나 말거나 가던 길이나 마저 보내 주었으면 했다.

“서둘러 공장에 가 봐야 합니다.”

“그 꼴로?”

마치 양갱과 비닐봉지를 가리키는 것 같았다.

“예.”

회사를 위해서 점심시간도 아껴 가며 양갱으로 끼니를 때운다는 말은 덧붙이지 않았다. 진여원이 다시 휴대폰을 들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꾸벅하고 돌아서서 가려는데 그가 내 손에 들린 양갱과 다리 쪽을 순차적으로 가리켰다.

“첫인상이 강렬하겠어.”

이어 어, 난데. 하면서 전화 통화를 재개했다. 양갱을 진여원의 얼굴에 내던지고 싶은 걸 꾹 참았다.

물렁물렁한 양갱을 이에 힘을 주어 씹으려는데 문득 핑크색이 눈에 들어왔다. 플랫슈즈를 그냥 신고 나온 것이었다. 바보가 따로 없었다.

빠르게 사무실로 다시 돌아가는 길에 보니 통화를 하는 진여원이 웃고 있었다. 전화 상대방 때문이 아니라 꼭 나를 보고 낄낄거리는 것 같았다. 심지어는 걸을 때마다 달랑거리는 종꽃마저 나를 비웃는 것 같았다.

애초부터 신발 잘못 신고 나왔으니 갈아 신으라고 말하면 될 것을, 달랑거린다느니 첫인상이 강렬하겠다느니……

음침한 자식이었다.

사무실로 돌아와 신발을 갈아 신고 나오니 테라스는 텅 비어 있었다. 남은 양갱을 입 안에 욱여넣고 지하철로 터벅터벅 걸었다. 바닥에 떨어진 꽃잎만 애꿎게 발로 휙휙 찼다. 시원한 숲을 완전히 벗어나자 습기가 적당히 묻어 있는 바람이 불어왔다.

생각해 보니 진여원이 나한테 실수를 한 것도 딱 이맘때쯤이었다.

대학 시절 진여원에 대해서는 남들 아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군대 다녀온 복학생, 인기는 많은데 엄청 오래 사귄 여친이 있는 예비 품절남. 진여원은 MT나 모임에 잘 참여하지 않는 아웃사이더 기질이 있는 편이라 나와도 별다른 접점이 없었다.

딱 하나 연결된 고리가 있다면 당시 내가 사귀었던 사람의 친구였다는 것이다. 친구라고 해도 대학 내에서 말이나 나누는 사이였지 절친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처음에는 소문의 근원지가 진여원은 아닐 거라고 믿었다.

대체 진여원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저 사람은 아닐 거라는 믿음은 대체 어디서 나왔던 걸까. 내 실수에도 개의치 않고 넘어갔던 성격 때문에? 그의 디자인을 동경해서? 아마 둘 다였을 것이다.

내가 군대로 도피하듯 달아났을 때 진여원은 죄책감도 없이 제 여친과 희희낙락 웃고 지냈겠지. 졸업하고 바로 결혼한다는 소리를 들은 것도 같은데, 내 알바 아니었다.

이재화가 그려 준 약도는 정확해서 헤매는 일 없이 공장을 찾을 수 있었다. 공장의 입구부터 가죽 냄새가 도처에 가득했다. 저 안쪽에는 기계가 시끄럽게 돌아가고 있었다. 아마 염색 작업을 하는 듯했다.

나는 넓은 공장 부지의 왼편에 놓인 조립식 컨테이너로 걸어갔다. 감이 맞는다면 저기에 공장 관리인이 있을 터였다. 조립식이라 하더라도 보통 주택처럼 현관문이 달려 있었다.

“공장장님 계십니까?”

노크를 하고, 반쯤 열어 둔 문 안으로 들어가자 접대용 소파에 앉아 있던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네, 제가 공장장인데 어디서 오셨습니까?”

체일 슈즈의 하청 공장장은 눈이 보일까 싶을 정도로 늙은 노인이었는데, 여기 공장장은 젊은 남자였다. 공장장은 나이 지긋한 사람일 거라는 것도 내 편견인 듯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윰에서 온 박석연이라고 합니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이재화 과장님 팀으로 새로 들어왔습니다.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명함이 없지만,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그렇군요. 전 이곳 공장 책임자 김요한입니다.”

내민 손을 맞잡으니 그가 맞은편 자리로 나를 안내했다. 나는 자리에 앉자마자 비닐봉지 안에 돌돌 말아온 원단과 샘플, 액세서리를 죽 늘어놓았다. 자신을 김요한이라 소개한 그는 종꽃 액세서리를 흥미롭게 구경했다.

“혹시 엊그제 저희 쪽으로 금장 체인 샘플 보내 줬던 분이신가요?”

“어?! 어떻게 아셨어요?”

신상 로퍼에 들어갈 체인을 엊그제 퀵서비스에 실어 보냈었다.

“만들기 까다롭게 생긴 게 똑같아서요.”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 까진 없죠. 어차피 액세서리는 남대문 시장 사람들이 만드는 거니까요. 단가를 비싸게 불러서 그렇지. 천 재질은 싼 편이니 전체 단가는 어느 정도 맞겠네요.”

구두 하나를 만들기 위해 거쳐 가는 손은 생각보다 많다. 액세서리는 남대문 시장, 가죽과 천은 신설동이나 이곳 성수동에서. 그리고 그 모든 걸 하나로 이어 완성품을 만들어 내는 게 공장이었다.

나는 두 개의 소파를 가로지르는 테이블에 놓인 펜을 잡았다. 패턴 옆 종이에 미처 적지 못했던 실 소재를 끄적거렸다.

“박음 라인은 갈색 실로 3cm씩 큼직큼직하게 갔으면 합니다. 단조로운 만큼 특징을 주고 싶어서요. 색상은 총 세 가지로 인디핑크, 베이지, 네이비로 하고요. 일단 베이지와 네이비 실색상은 이번 주 중으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인디핑크만 미리 제작 부탁드려요.”

“기한은요?”

“되도록 빠른 편이 좋은데. 내일 모레까지는 받아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재화가 부탁한 금요일까지는 사흘이 남은 시점이었다. 사흘 내로 해 달라고 말하면 그 날짜에 빠듯하게 맞춰 줄 것이 분명하기에 일부러 하루 더 앞당겨 말했다.

김요한이 플랫슈즈 샘플을 손바닥 위에 올려 훑어보더니 피식거렸다.

“진 사장님이 또 하나 까다로운 분을 스카우트했네요.”

바른 말로 스카우트는 아니었다. 재운 선배에게 부탁해서 간신히 얻은 일자리지. 구구절절 사연을 말할 이유는 없기에 그냥 같이 웃어 주고만 말았다.

“잘 버텨 봐요. 차가운 것과 다르게 틀린 말은 안 하는 사람이니.”

“기존에 누가 금방 그만뒀었나 보죠.”

그럼 그렇지. 그 인간 밑에서 버틸 사람이 어디 있겠어. 또 누가 알아? 거래처에서 직원들 뒷담화나 하고 다닐지.

과거를 지운 쿨한 직원을 코스프레하고 싶어도 속으로 구시렁대는 건 막을 재간이 없었다.

“그만뒀다기 보다는.”

김요한이 목에다 손을 긋는 시늉을 했다. 잘렸다는 뜻이었다. 김요한이 벽면에 걸린 시계를 올려다봤다.

“혹시 점심 먹었어요?”

“양갱으로 대신 때웠습니다.”

“하하, 입맛이 노후하시네요.”

“양갱 안 먹어 보셨죠?”

김요한은 잠시 허를 찔린 듯 놀라더니 이내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음, 그러고보니 한 번도 안 먹어봤네요.”

“생각보다 맛있습니다. 영양도 만점이고요.”

쓰레기통이 보이지 않아 돌돌 말은 비닐봉지를 한 손에 쥐자, 김요한이 대신 버려주겠다면서 가져갔다.

“그럼 공장장님,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래요, 또 보죠.”

아버지가 말씀하시길, 나 어렸을 때 한참 울다가도 양갱만 쥐여 주면 세상 다 가진 듯 웃었다고 한다.

고등학교 매점 아주머니도 나 때문에 팔리지도 않는 양갱을 들여놨었으니 말 다했다. 공장에서 지하철까지 걸어가며 양갱을 하나 더 사 먹을까 하다가 어차피 회사로 들어가면 공짜인데 뭐 하러 돈 쓰냐는 생각이 들었다.

전세 자금 대출받을 때 퇴직금 중간 정산만 하지 않았어도 허리띠를 졸라맬 일은 없었을 텐데. 휴대폰 요금부터 시작해서 교통비, 광열비 등등 다 빼면, 통장 잔액이 달랑 오만 원이라 990원짜리 참치 캔도 못 사는 형편이었다.

여의도가 물가 비싸기로는 으뜸이라 점심 한 끼에 만 원은 족히 나왔다. 카페에서 내내 브런치를 사 먹기에는 사실 좀 눈치도 보이고, 재운 선배 말처럼 배포도 작아 양갱이나 깨작깨작 사 먹는 게 다였다.

진여원이 카페 이용 금액 정산에 들어갔을 때 이재화네 팀 뭘 그리 많이 처먹는 거냐고 거들먹거리면 나만 손해였다.

아, 그러고 보니 진여원에 대해 하나 더 아는 게 생각났다.

독설가라는 것.

***

1차는 주꾸미, 2차는 대게 집이었다.

곽일영이 안다는 주꾸미 집은 먹거리 방송이 와도 손색없을 정도로 맛이 기가 막혔다. 대신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집이라 곽일영의 사심이 어느 정도는 느껴졌다.

공장에서 제때에 보내 준 플랫슈즈도 예상보다 예쁘게 나온 데다 드라마에 협찬할지도 모른다는 말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체일 슈즈는 가뭄에 콩 나듯 부서별로 회식을 가졌는데 윰은 대체로 팀별 회식인 듯했다. 오늘은 뒤늦은 환영회를 겸하지만 듣자 하니 둘째와 넷째 주 금요일 마다 꼭 회식을 한다고 했다.

이 며칠간 돈 아끼느라 있는 반찬으로 끼니를 때우다가 윤기 나게 비벼진 대게 내장밥을 보니 이 무슨 임금님 수랏상인가 싶었다. 통통한 대게 살점을 다 해치우고 몸통에 빼곡히 올라간 밥을 퍼먹자 위가 빵빵하게 부풀어 올랐다.

“박석연 씨 잘 먹어서 보기 좋네.”

이재화가 흐뭇한 미소를 띠며 사이다를 따랐다. 한 가지 아쉬운 게 있다면 곽일영도 이재화도 술은 마시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하긴 술 들어갈 자리에 이 비싼 음식 더 넣는 게 좋지.

“맛있어서 자꾸 먹게 되네요.”

“3차는 소고기 집이니까 적당히 먹어.”

그걸 왜 이제 말해…….

숟가락을 가져가려던 행동을 멈췄다.

“잘 먹었습니다.”

3차를 위해 위를 보존하는데 옆에 앉은 곽일영이 자꾸 내 발을 주물러 댔다.

“곽 대리님, 저 오늘 발 안 씻고 나왔어요.”

귀찮게도 만져대기에 둘러댄 변명일 뿐이었다.

“진짜?”

기겁하며 손을 뗄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힘을 줘서 주물럭거렸다.

“나 발 냄새도 좋아해.”

“족발이라도 먹으러 갈 걸 그랬네요.”

“족발을 왜 먹어.”

보기도 아까운 족발을 왜 먹냐고 물어보는 건가?

“맛없어. 차라리 보쌈이 낫지.”

다행히 족발에는 발 페티시가 발휘되지 않는 것 같았다.

우리 셋은 대게 집에서 한 시간 정도를 보내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재화가 들고 간 계산서를 흘끔 보니 20만 원이 넘는 돈이 적혀 있었다. 1차 주꾸미 집은 13만 원이었다.

기세 좋게 긁힌 법인카드를 받아 든 이재화가 얼른 3차를 가자며 근처에 있는 소고기집을 가리켰다. 1등급 한우만을 판매한다는 궁서체가 간판에 멋스럽게 걸려 있었다.

소고기집은 좌식 테이블이 아닌 의자가 놓인 식탁이었다. 원치도 않는 발마사지를 받지 않아도 되니 다행이었다. 평소라면 눈 돌아갈 만한 반찬들이 깔렸으나 생갈비만 먹어도 벅찼기에 고기가 익기만을 기다렸다.

“오실 때가 됐는데.”

이재화가 식탁에 놓아둔 휴대폰의 불을 밝혀 시간을 확인했다. 9시 44분. 44라는 글자가 왜인지 불길했다.

“누가 오시나요?”

“사장님.”

“예?”

이재화가 뭘 놀라느냐며 양미간을 모았다.

“회식 자리에 사장님도 오십니까?”

“체일 슈즈는 아니었어?”

“예……. 사장님은 얼굴 보기도 힘들었죠.”

“거긴 대형 브랜드라 그런가 보다.”

자꾸 대형 브랜드라 하는데 회사 건물로만 따지면 윰이 훨씬 대형 같았다.

핏기가 가신 고기를 한 점 집어서 입에 넣고 우물우물 씹었다. 달궈진 뜨끈한 육즙에 배가 고팠으면 더 맛있었을 텐데- 라는 가난한 생각을 가졌다.

“박석연 씨는 다 밖으로 배출되나 봐. 많이 먹는 것 같은데 살이 안 찌네.”

“지금이야 그런데 전에는 뚱뚱했어요.”

“에이, 무슨 그냥 통통 정도였겠지.”

곽일영이 신발에 감춰진 내 발을 유심히 보며 중얼거렸다. 저건 살쪘던 발이 아니야- 라고.

“진짜 뚱뚱했는데……. 하하.”

고교 시절 인터넷에서 만나 잠깐 사귀었던 놈이 있는데, 놈은 나와 만나는 내내 돼지 새끼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었다. 꿀꿀꿀 놀려 가며 뱃살을 찌를 땐 인격적인 모독까지 느꼈었다.

놈 말처럼 내가 뚱뚱하긴 했지만 대놓고 놀리는데 기분 좋을 리가 있나. 그냥 그놈이 좋아서 웃어 주고 말았을 뿐이었다.

나는 여름 방학이 오자마자 공부할 시간을 쪼개서 헬스장에 틀어박혀 러닝머신을 하루에 세 시간씩 뛰었다. 두 달 동안 이를 물고 살을 빼서 연락하니 없는 번호로 나왔다. 살 빼고 연락하라던 놈 좋다고 매달린 내가 병신이었다. 그렇게 뺀 살은 아무리 먹어도 다시 찌는 일이 없었다.

아마 내가 살찌는 데 막대한 원인을 제공한 사람은 아버지였을 것이다. 먹는 게 복스럽다며 하루에도 다섯 끼씩 먹이니 살이 안 찌는 게 이상하지. 부모님과 같이 살면 다시 찔지도 모르겠다.

“오셨어요.”

이재화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나는 빨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놓고 똑같이 일어나 뒤를 돌았다.

웬일로 까만 슈트를 쫙 빼입은 진여원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어차피 옷에 냄새 다 밸 텐데 힘깨나 줬다 싶었다. 진여원이 식탁을 돌아 이재화의 옆에 앉았다. 그러자 종업원이 재빨리 진여원의 자리를 세팅했다.

진여원이 물을 한 모금 마시며 입을 열었다.

“3차?”

“예, 사장님이 너무 늦으셨어요.”

“영업부 제대로 돌아가기 전까지는 어쩔 수 없지.”

신생 브랜드다 보니 영업부가 아직 활발히 활동하지는 못하는 듯했다. 그 대신 진여원이 바쁘게 뛰어다니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진여원이 맥주를 주문하는 것을 보고 침을 꼴깍 삼켰다. 맥주잔은 네 개가 나왔지만 그가 내 앞에다만 잔을 내려놨다. 따악- 시원하게 따진 맥주를 내게 들이밀었기에 나는 두 손으로 잔을 붙들었다.

“환영해, 박석연 씨.”

툭 던지는 말의 진의를 가리기가 어려웠다. 진짜 환영한다는 건지, 빈말인지.

“감사합니다.”

그가 내게 맥주를 따라 주는 동안 소매의 커프스가 조명을 받아 날카롭게 빛났다.

“아직은 다닐 만한가 봐?”

날카로운 커프스는 복선이었나 보다.

“네, 커피가 일품이거든요.”

반대로 내가 맥주병을 잡아 그에게 따랐다. 괜한 트집 잡히기 싫어 졸졸졸 거품이 넘치지 않도록 들이부었다. 한참을 따르자 진여원이 맥주잔으로 병 입구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사약 따라? 떨고 그래.”

“아닙니다.”

속으로 마시고 체하란 말을 했더니 왠지 찔리는 기분이었다.

건배를 한 뒤 맥주를 한 모금 홀짝였다. 나는 저들끼리 얘기하는 동안 구워진 소고기만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목이 막힐 때마다 맥주를 마시고, 또 고기를 넘기고.

생각 없이 반복하다 보니 뇌까지 음식이 차오른 것만 같았다. 셋은 제대로 먹지도 않으면서 불판이 비워져 갈 때마다 추가로 주문하는 바람에 숨이 헉헉 나올 만큼 먹을 수밖에 없었다.

음식 남기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엄마 탓에 생겨난 버릇이었다. 이왕 먹는 거 진여원 주머니나 실컷 털어 내자 싶어서 먹었더니 오히려 내가 더 미련해 보였다. 정작 진여원은 연속적으로 소고기를 주문하고 있었다.

더는 못 먹겠다 싶어 허리를 펴는데 목구멍을 치미는 트림과 함께 맥주 거품도 따라 올라왔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진여원과 이재화의 대화를 단절시켰다.

“죄송합니다. 저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둘 다 고개만 끄덕거렸다. 부리나케 화장실로 가려는데 곽일영이 나를 붙잡았다. 설마 같이 가자는 건 아니겠지? 곽일영이 검지로 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화장실 2층에 있어.”

“예, 감사합니다. 그럼.”

어금니를 꽉 누르고 대답한 뒤 걸음을 재촉했다. 계단을 삽시간에 올라 2층 화장실 문을 쾅 열었다.

후우- 하면서 먹은 걸 가라앉히려는데 욱하고 먹은 게 올라왔다. 좌변기에 우웩 하고 뱉어 내자 맥주 거품과 함께 고깃덩어리 같은 게 마구 엉켜서 쏟아졌다. 맥주를 먹지 말았어야 하는데 왜 먹어가지고는.

사약은 내가 받은 것 같았다. 아직도 속이 답답했지만 심각하게 치밀어 오르던 것을 뱉고 나니 좀 살만했다.

미련한 인간아. 진여원 주머니 잡다 내가 죽겠다.

마침 세면대에 놓여 있는 가글로 입을 헹구고 얼굴을 씻었다. 눈까지 벌게져서 툭 치면 후두둑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옛날에 로마 귀족이 맛있는 걸 계속 먹기 위해서 먹고, 토하고 했다던데 난 귀족은 못 될 거 같다.

마지막으로 다시 가글을 한 뒤에 얼굴을 닦고 화장실을 나왔다. 1층으로 내려오니 불판에 있던 고기가 타다 못해 쪼그라들어 있었다. 자리에 앉자 곽일영이 나를 걱정스럽게 쳐다봤다.

“석연 씨, 울었어?”

“아니요.”

“눈이 빨간데.”

“하품을 했더니…….”

휴대폰은 진동을 해 놨으니 타이밍이 안 좋을 일은 없었다. 하물며 벨소리도 바꾼 지 오래다.

“토라도 하고 왔나.”

진여원이 맥주잔을 입에 댄 채로 말을 내뱉었다.

“아닙니다. 토를 왜 합니까.”

정색하며 대꾸했다.

“토할 정도로 먹던데.”

아니면 말고, 라는 듯 말하는데 열이 확 올랐다. 진여원에게 보란 듯이 덜 탄 고기를 집어 꼭꼭 씹었다.

“박석연 씨, 잘 먹는데 1인분 더 시켜 줘?”

“안 돼요, 사장님. 그만 먹어, 석연 씨.”

곽일영이 진여원을 보고 이어 나를 봤다.

곽일영 씨 진짜 당신 좋은 사람이야.

안심하고 그를 그윽하게 쳐다보는데 곽일영이 헤실 웃었다.

“발에 살찌면 안 돼.”

곽일영이 고등학교 때의 나를 본다면 아마 경악하겠지. 그래도 감사한 일은 틀림없었다.

***

아……. 진짜 죽겠다.

그 말만 벌써 수십 번째였다. 황금 같은 주말 동안 온몸의 모든 장기를 쏟아낸 기분이었다.

아랫배에서 꾸륵꾸륵 신호가 올 때마다 연방 화장실과 침대를 오가야 했다. 뭘 잘못 먹었는지 분 단위, 또는 시간 단위로 화장실을 들락날락한 것이다.

아침에 출근할 때도 도중에 지하철에서 내려 화장실을 찾아야 했다. 배를 잡고 간신히 회사에 도착하니, 곽일영이 얼굴이 반쪽이 됐다면서 내게 와플 하나를 건넸다. 먹으면 그대로 쏟아 낼 것 같기에 고개만 절레절레 저었다.

병원까지 갈 정도는 아니지 않을까 싶어 방치했더니 점점 심해지는 모양이었다. 병증에 대해 인터넷을 검색한 결과, 장염인 듯했다. 장염이 꼭 뭘 잘못 먹어야 걸리는 게 아니란다. 심하게 과식했을 때도 해당했고, 그게 내 경우 같았다.

그 좋아하는 커피도 마시지 못한 채 핼쑥한 얼굴로 펌프스 힐을 그리다 펜을 툭 놓았다.

요정과 구두장이 동화가 현실이 되었으면 하고 오늘만큼 바란 때가 없었다. 나름 착하게 산 것 같은데 로또는 안 될망정 구두 짓는 요정이라도 찾아오지 않으려나…….

곽일영과 이재화가 시장조사차 외근을 나간 터라 빌빌거려도 눈치는 보이지 않았다. 약국이라도 다녀와야겠다 싶어 자리에서 일어나는 때 사무실 전화가 요란하게 울렸다.

나는 싸르르하게 아파오는 배를 움켜쥐고 수화기를 들었다.

“예, 윰 쉬즈 박석연입니다.”

[이 과장 바꿔 봐.]

거침없는 말만 듣고도 진여원인 것을 금방 알아차렸다.

“지금 자리에 안 계신데요.”

[곽 대리는]

“두 분 다 외근 나가셨습니다.”

[그럼 박석연 씨가 플랫슈즈 샘플 가지고 바즈 스튜디오로 와.]

오늘 내 상태가 영 아니다 보니 속으로라도 구시렁거릴 힘은 생기지 않았다.

“어디에 있는 겁니까.”

[여의도 공원 정문 가기 전에 있어. 10분 내로 도착해.]

뚝- 진여원이 전화를 끊어 버렸다. 여기서 여의도 공원이면 걸어서 가도 30분은 족히 걸릴 텐데 10분 내로 도착하라니.

끙, 앓는 소리와 함께 인상을 쓰고 플랫슈즈가 담긴 신발 박스를 찾았다. 사이즈 235, 240을 전부 챙겨서 사무실을 나왔다. 혹시나 싶어 화장실에도 들렀지만 배만 아플 뿐 감감무소식이었다.

이렇게 된 거 차라리 잘됐다 싶은 마음으로 슈즈를 건네주고 약국을 찾을 생각이었다. 도로가에 서서 택시를 잡으려는데 시간대가 시간대인지라 한 대도 보이지 않았다. 동시에 휴대폰이 진동했다. 번호 저장은 안 되어 있지만, 누군지는 대충 감 잡을 수 있었다.

“예, 여보세요.”

[기어 와?]

“지금 택시 잡고 있습니다.”

나는 슈즈 박스가 담긴 쇼핑백을 들고, 도로를 이리저리 둘러보며 대답했다.

[회사 차 있잖아.]

“저 면허 없습니다.”

[그럼 자전거라도 타고 오든가.]

이번에도 뚝-

마냥 택시를 기다릴 수는 없어 다시 회사로 돌아갔다. 자전거를 타 본 지 한 10년은 됐을 텐데 괜찮으려나. 비척비척 주차장으로 걸어가 잠금 장치도 없이 덩그러니 놓인 진여원의 자전거를 내려다봤다. 앞에 바구니 같은 것도 없어 쇼핑백을 손잡이에 걸었다.

티타늄 프레임과 검은색 바퀴에 달린 십자 모양의 휠이 흠집하나 없이 매끈했다. 나는 뒷바퀴의 고정대를 발로 쳐올리고 핸들을 잡았다.

굴곡이 없는 주차장을 빠져나가며 오랜만에 타는 자전거를 몸에 익혀 나갔다. 다행히 전에도 웬만큼은 탔던 터라 금세 적응할 수 있었다. 그런데 자전거가 원래 이렇게 잘 나가는 거였나.

페달을 한 번만 밟아도 속도가 붙었다. 몸에 힘은 하나도 없는데 자전거라도 잘 나가 주니 다행이었다. 달릴수록 점차점차 속도가 붙는 자전거에 감탄할 사이도 없이 여의도 공원에 다 와 갔다.

일전에 이 근처에서 바즈 스튜디오를 본 기억이 있었다. 고개를 들어 고층 건물 3층에 큼지막하게 달린 바즈 스튜디오 간판을 발견했다. 자전거를 그곳까지 굴려 건물 안에 세워 놓고 스튜디오로 올라가니, 진여원이 스튜디오 문 앞에서 손목시계를 툭툭 두드리고 있었다.

그는 나타난 나를 보자마자 쇼핑백부터 받아 갔다. 쇼핑백을 열어서 박스를 확인한 진여원이 이번엔 내 얼굴을 보더니 피식 웃었다.

“얼굴이 주말 사이 못생겨졌어.”

“원래 이렇게 생겼습니다.”

“수고했어. 양갱이나 사 먹어.”

설마 그 양갱 먹고 배탈 난 거 아니야? 그런 마음으로 쳐다보는 것도 무색하게 진여원은 스튜디오 안으로 들어갔다. 볼일 봤으니 빨리 가서 일하라 이거냐.

제기랄, 갑자기 또 신호가 와서 2층에 있는 화장실로 뛰어 내려갔다. 약국 가서 빨리 약이나 사 먹어야지. 감기처럼 미련하게 나을 때까지 나뒀다간 온몸이 반쪽이 될 것 같았다.

나는 화장실에서 한바탕 일을 치르고 나서야 손을 씻고 거울을 봤다. 다크서클이 눈 밑까지 내려와 있었다. 원래 이렇게 생기진 않았기에 한숨만 절로 나왔다.

밖으로 나와서 세워 둔 자전거를 찾는데 도통 보이질 않았다. 배만 아플 뿐 정신이 나가진 않았으니 세워 둔 곳을 잊을 리는 없었다.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자전거를 찾는 그때였다.

“어?”

나도 모르게 얼빠진 소리가 새어나왔다가 정신이 퍼뜩 들었다.

“내 자전거!”

정확히는 진여원의 자전거가 저 앞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야! 거기 안 서!”

내 고함에 교복 입은 놈이 나를 돌아봤다. 배가 아픈 것도 잊고 놈을 향해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타고 올 때는 씽씽 달려간다고 좋아했던 자전거를 따라가려니 죽을 맛이었다. 때마침 건널목 신호가 빨간불인 것을 보고 더 힘껏 달렸다.

차들이 속도를 내서 달리는 터라 고등학생 놈도 도로를 질러갈 용기는 없는 것 같았다. 조금만 가면 된다, 조금만.

놈도 다급하게 핸들을 꺾어 방향을 틀려는 찰나였다. 나는 헉헉대는 몸을 날려 자전거와 함께 도둑놈을 엎어뜨렸다.

“으악!”

횡단보도에 서 있는 볼라드에 자전거가 부딪혔고, 도둑놈의 비명소리와 더불어 타당! 불길한 소리가 뒤따랐다.

“이 새끼가! 어디서…… 허억, 헉. 도둑……질이야, 허억.”

나는 벌떡 일어서려는 도둑놈의 멱살을 잡았다. 놈이 거칠게 내 손을 쳐내며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 냈다.

“씨발! 좆 됐다! 튀어!”

저 혼자 벌인 일이면서 누구한테 튀라고 하는 말인지. 쫓아가서 아작을 내주고 싶었지만, 놈은 자전거를 탔던 것보다 더 빠르게 도망가고 있었다. 혈기왕성한 고등학생과 아파 죽겠는 직장인이 상대될 리 없었다. 나는 숨이 가쁜 가슴을 두드리면서 자전거를 내려다봤다.

자동차에 부딪혀도 흠집 하나 안 날 것 같은 바퀴의 휠이 찌그러져 있었다. 핸들도 요상한 모양으로 꺾인 채 바닥에 누워 있었다. 움푹 팬 프레임과 십자 모양이었던 휠은, 원래의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씨발, 좆 됐다.

그건 내가 할 말이었다.

비실비실한 몸을 움직여 볼라드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자전거를 일으켜 세울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러게 왜 자물쇠가 없냐고, 왜. 머리를 쥐어뜯으며 신음했다.

이대론 안 되겠다 싶어서 휴대폰을 꺼내 들어 근처에 자전거 집이 있는지 물색했다. 약 750m 부근에 삼천리 자전거 매장이 하나 있었다. 자전거 프레임에 붙어 있는 회사 이름은 삼천리가 아니지만, 수리가 가능하길 바랐다.

아니지, 이걸 내가 왜 고쳐. 사장 심부름 때문에 불의의 사고가 난 건데 보험처리 해야지. 그러나 회사에 등록된 차도 아니고 개인 소유물일 게 분명한 자전거이니 보험처리가 가능할 리가 없었다.

엘리베이터에 끌고 올라갔으면 이런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소 잃고 외양간 고쳐 봐야 아무짝에도 소용없다는 걸 알면서 내내 후회가 남았다. 설상가상으로 배가 또다시 욱신욱신했다. 자전거를 일으켜서 돌아간 핸들을 원위치 시켜 봤다. 다행히도 브레이크 손잡이만 부러져 있었다. 쪼개진 부분을 주워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자전거 핸들을 잡고 인도를 걷는 동안 몇 번이나 페달에 정강이를 부딪쳤다. 진여원이 주인 아니랄까 봐 자전거도 까칠했다. 저 반대편에서부터 걸어오는 회사원 둘이 나를 보자마자 황당한 표정을 띠웠다.

“야야, 저거 잔차 아냐?”

“맞네.”

나와 자전거를 보고 하는 소리 같은데 도통 뭔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걸음을 멈추고 그들을 쳐다보자 두 남자도 동시에 자전거로 향했던 시선을 내게 옮겨 왔다. 지금 내 표정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쯧쯧 혀를 차는 걸 봐선 아주 좋지 않은 듯했다.

“사고라도 났어요?”

“예. 좀…….”

파란색 넥타이를 맨 회사원이 먼저 말을 붙였다.

“저, 근데 잔차가 뭡니까?”

혹시 이 자전거의 기종을 아나 싶어 물어봤다.

“잔차 몰라요?”

바로 네 손에 있는 게 잔차다, 라는 듯했다.

“이 자전거 기종이 잔차입니까?”

“아뇨, 그 뭐냐. 비싼 자전거를 줄여서 잔차라고들 해요.”

“이게 비싼가요?”

파란색 넥타이 옆의 줄무늬 넥타이가 흠하고 턱을 문지르며 자전거를 훑어봤다.

“린스키 거네요. 린스키 기종은 저도 자세히는 모르는데, 족히 백 단위는 할 걸요.”

“백 단위요?”

“예, 아마도요.”

저 남자도 자세히는 모른다고 하지 않았나. 그래, 아닐 수도 있었다. 나는 감사하다는 인사를 건네고 다시 터덜터덜 자전거를 끌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아예 먹은 게 없어서인지 배만 아플 뿐 또다시 화장실 신호가 오진 않았다. 어제부터 지금까지 먹은 거라곤 생수뿐이었다. 그 때문에 하늘이 노랗게 보이는 듯도 했다.

700m가 오늘따라 십 리처럼 느껴졌다. 저 끝에 삼천리 자전거를 발견했을 때 망가진 휠도 개의치 않고 자전거를 타고 한달음에 도착하고 싶었다. 하지만 보이는 것보다 훨씬 멀었다.

가게 앞에 자전거를 세우자마자 바퀴에 바람을 넣고 있던 주인이 손을 탁탁 털었다.

“어서 오세요.”

주인은 내 옆에 세워진 자전거를 흘끔 봤다.

“바람 넣으시게요?”

“아뇨, 수리 좀 가능한가해서요.”

“어디 보자…….”

주인이 뒷주머니에 꽂아두었던 목장갑을 꼈다. 가까이서 자전거를 보자마자 그가 좀 전의 회사원들과는 비교도 안 되게 경악했다.

“이걸 여기서 고쳐 달라고 하면 어째요.”

“휠하고 브레이크만 갈아주시면 되는데, 안 되겠습니까?”

“린스키를 나한테 가져오면 어쩌나. 쯧쯧, 휠이랑 브레이크가 아예 나갔네. 이건 본사에서 공수 받아서 고쳐야 해요. 뭘 어쨌기에 이게 이렇게 되나.”

“그럼 본사가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이거 그쪽 거 아니에요?”

“제 건 아니고…….”

말꼬리를 늘이자 주인이 나를 의심의 눈초리로 훑었다.

“혹시 어디서 주워 온 거라면 얼른 제자리에 갖다 놔요. 그러다 독박 쓸라.”

도둑놈은 따로 있는데 엄한 사람을 잡고 있었다.

“상사 자전거인데 실수로 이렇게 됐습니다.”

“이런……. 피박 쓰셨네요.”

독박에 이어 피박인가.

“이게 그렇게 비쌉니까?”

“휠만 가는 데 개당 5백은 할 걸요.”

5백 원이요? 되묻고 싶었다. 사실은 못 들은 척 귀를 닫고 싶었다.

일이십이면 해결되겠지 했는데 5백이라니. 양쪽 다 고쳐야 한다면 엄마한테 준 돈을 다시 돌려받아야 할 판이었다. 물론 땅 계약이 끝나서 받을 수는 없었다.

“감사합니다.”

분명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떴을 것이다. 세워 둔 자전거를 질질 끌고 가는데 등 뒤로 안타까운 시선이 박히는 것 같았다.

진여원은 도로에 돈을 뿌리고 다녔구나. 그럼 대체 본체는 얼마라는 건지. 체일 슈즈에 팩스 뿌린 자식 걸리기만 해 봐라. 것보다 도둑만 아니었어도 피박에 독박을 맞을 일은 없었다.

회사로 돌아가는 길이 까마득했다. 몇 달 굶더라도 사표를 냈어야 했다. 회식 음식 축내다 속 버리고, 회사 들어와서 돈만 버리게 생겼다.

자전거로 10분이면 충분했던 거리가 돌아오는 데는 거의 한 시간이 걸렸다. 혹시 진여원이 돌아왔나 싶어 두리번거리며 주차장으로 향했다. 이대로 세워 놓고 모른 척 시치미를 뗄까…….

위에서 붉은 점을 깜빡이는 CCTV가 범죄의 종말을 알렸다. 휠은 구겨졌지만 바퀴는 잘 돌아가니 그냥 타고 다니라는 말도 할 수 없었다. 멈추지 않는 자전거를 누가 타느냐는 말이다.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전화를 할까 말까 한참을 고민했다. 일단 휴대폰 메모장을 열어 프레임의 이름을 그대로 옮겨 적었다. 그리고 번쩍번쩍한 대리석을 밟으며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아랫배에서 지글지글 열이 끓었다. 이마까지 뜨거워져 손으로 훑어 보니 식은땀도 나는 중이었다. 회사고 뭐고 때려치우고 집에 가서 눕고 싶었다.

뭐 이렇게 사는 게 힘드냐. 느릿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무실로 돌아와 절전모드로 넘어간 모니터를 마우스로 흔들어 깨웠다. 나는 다짜고짜 검색창에 진여원의 린스키 기종을 작성해 넣었다.

[즉시 할인가 23,750,080원.]

입을 벌리고 모니터로 얼굴을 가져다댔다.

판매자가 오타를 낸 게 아닌가 싶어 다른 판매 사이트로도 들어가 봤다. 거긴 심지어 유료 배송이었다.

람보르기니를 박은 티코 주인의 심정이 이렇지 않을까. 그 도둑놈도 정확한 가격은 모르고 왠지 비싸 보이니 들고튀려 했던 걸지도 모른다. 저 가격을 알았다면 손도 안 댔을 것이다. 흡사 창자가 뒤틀리는 듯해 끙끙대는 신음이 절로 새어 나왔다.

쾅!

거칠게 문이 열리는 소리에 몸이 번쩍 튀었다. 그 반동에 마우스도 대롱대롱 책상 낭떠러지에 매달렸다. 지금 저렇게 문을 열고 들어올 사람은 딱 한 명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진여원.

“박석연 씨.”

머리 위로 그늘이 내려왔다. 진여원의 손에는 내가 가져갔던 쇼핑백이 들려 있었다. 진여원의 눈초리가 싸늘했다. 전에도 저런 표정을 본 적이 있었다. 아마 내가 그에게 실수했던 때였을 것이다.

“내 자전거에 무슨 짓을 한 겁니까.”

이럴 때만 존댓말이야. 나는 책상을 붙들고 힘겹게 일어섰다. 진여원은 뭐 저딴 게 다 있냐는 표정이었다. 이래선 안 되는데 울고만 싶어졌다.

“제가……. 자전거를 밖에다 세워 뒀는데 도둑이 훔쳐 가려고 해서 붙잡았습니다. 그런데 그 꼴이 났죠. 그래도 아예 사라진 것보단 낫지 않을까요…….”

아픈 배를 움켜쥐고 최대한 송구스러운 마음을 담아 변명했지만, 비굴해 보일지 뻔뻔해 보일지는 모를 일이었다.

진여원이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어째 화가 난 웃음 같지는 않았다. 아니면 내가 그렇게 착각하고 싶은 걸 수도.

“도둑은?”

“도망쳤습니다.”

“칼만 안 든 강도군.”

상체에 깔끔하게 피트 되는 진여원의 와이셔츠를 움켜잡고 싶었다. 현기증이 일정도로 배가 너무 아팠지만, 그를 붙드는 대신 떨어진 마우스를 손아귀에 꽉 쥐었다.

진여원은 내가 모니터에 띄워 놓은 창을 내려다봤다. 웃음이 더 짙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물어내려고?”

그가 모니터를 툭 튕겼다. 패널에 잔상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니 내 속도 같이 뒤집어졌다.

“물어내려고 해도…… 인간적으로 너무 비싼 자전거를 타고 다니지 않으십니까. 그리고 그렇게 비싼 줄 알았으면 애초에 타지도 않았습니다. 자물쇠도 없고요. 그보다…… 왜 자전거를 타고 오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이게 다 당신 때문이잖아.

“근데 박석연 씨.”

진여원이 흥분한 나를 이상한 사람 취급하듯 봤다.

“왜 이렇게 쌕쌕거려.”

동시에 픽, 다리에 힘이 풀렸다. 진여원이 놀라 나를 잡았다. 바닥에 나뒹구는 쇼핑백 화면을 마지막으로 시야가 까맣게 암전됐다.

***

칙, 무언가가 분사되는 소리와 함께 라벤더 향이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번쩍 눈을 떠 눈동자만 양옆으로 굴렸다.

누군가 나를 위에서 내리누르는 것 같았다. 특히 손등이 제일 갑갑했다. 눈을 깜빡이자 수액걸이에 링거팩이 걸려 있었다. 줄을 죽 타고 시선을 죽 내리니 내 손등까지 이어졌다.

몸을 일으켜 아릿아릿한 뱃가죽을 매만졌다. 누군가에게 맞은 듯한 통증은, 복통이 있고 나서 흔히 있는 후유증이었다. 천장에 박혀 있는 다이아몬드 조명은 단 하나만 불이 들어와 있었다. 그걸 보고 나서야 회사 수면실인 것을 깨달았다.

반대편 침대에 인기척이 느껴져 돌아보자 진여원이 팔짱을 끼고 앉아 있었다.

그의 주머니에서부터 띠띠띠- 시끄러운 알람이 울렸다. 그때 진여원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잠을 깨듯 머리를 한 번 흔들고는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는 내게로 다가왔다. 배가 기절하기 전처럼 아프지는 않았다.

“……몇 시입니까?”

진여원이 테이블에 놔두었던 내 휴대폰을 툭 던져 주었다. 밤 11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었다. 대체 얼마나 잔 거야.

그가 링거팩을 확인하고는 내 손을 붙잡았다.

“뭐…… 하십니까.”

“다 맞았는데 뭘 끼고 있어.”

밤 11시까지 여기에 있어 준 건가? 죄책감이 배가 되어버린 데다 진여원과 단둘이 있으니 어색해져 입이 저절로 움직였다.

“직접 빼시게요? 이거 불법의료행위,”

“신고해.”

휙 내 손목을 잡아서 테이프를 뜯어냈다. 바늘을 쑥 빼내더니 솜을 내 손등에 꾹 눌러 주었다. 차갑게 생긴 거랑은 다르게 손의 온도가 높았다.

저 손으로 배를 만져 주면 아픈 것도 금세 달아날 것 같기는 개뿔, 나는 솜을 대신 누르며 바늘 자국을 흘끔흘끔 확인했다. 병원에서 맞았을 때보다 피가 덜 나오는 것 같았다.

“사장님 혹시 마약하십니까?”

진여원이 실소를 흘렸다.

“건방지게 굴면 월급이라도 올라?”

“줄어들지는 않겠죠. 고용보험관리공단이 괜히 있는 게 아닙니다.”

“신기해.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던데, 박석연 씨는 사람이 아닌가 보군.”

꼬박꼬박 이름에 ‘씨’ 자를 붙인다고 해서 존댓말이 형성되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진여원이 나를 잡아 주지 않았으면 책상 모서리에 헤딩할 뻔했으니 감사의 인사는 건네야 했다.

“저 때문에……. 고생하셨습니다.”

“인사성만큼이나 경우도 있었으면 해.”

곧장 자전거 이야기를 꺼낼 심산임을 예측했다. 마음 같아선 월급에서 까십쇼, 하고 싶었지만 나는 다른 말을 꺼내기로 했다.

“……저 돈 없습니다.”

“자전거 하나 공수해 와.”

동시였다.

입을 꾹 다물고 있자 진여원이 빈 링거팩을 쓰레기통으로 던졌다. 진짜 불법의료행위로 신고해 버릴까.

그래, 그걸로 흥정하자고 하는 거다. 죽은 사람 살려 뒀더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속담의 가해자가 내가 될 줄이야.

“솔직히 제 개인적인 용무로 끌고 나간 것도 아니고 회사 업무 차원에서 벌어진 일인데, 제가 100퍼센트 책임을 져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사장님이 저보고 자전거를 타고 오라고 하셨잖습니까.”

월급쟁이인 내가 단번에 2천 3백만 원을 어떻게 물어내느냐는 말이다. 스스로의 뻔뻔함에 얼굴이 불타 없어질 것 같았지만, 솔직히 다 물어내라고 할까 봐 무서웠다. 그뿐이랴 진여원과 나는 다시금 악연이라는 게 실감났다.

“그럼 50퍼센트만 지든가.”

진여원이 사뭇 진지하게 대꾸했다. 그러나 50퍼센트라고 해도 천만 원이 훌쩍 넘는다.

“사장님, 저 돈……없습니다, 정말.”

그가 내 말을 싹 무시하고는 뒤돌아 걷기 시작했다.

“사장님!”

“내일은 병가내고 쉬어. 그리고 참고로.”

진여원이 수면실 문에 반쯤 걸쳐 선 채로 툭 말했다.

“우리 회사는 가불 안 됩니다, 박석연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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