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18)

2장

“박석연 님~”

차트를 든 상냥한 목소리의 간호사가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일자 소파에서 일어나 진료실로 향했다. 병가를 내긴 했지만 아침 7시부터 일어나 집 근처 진료소가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버릇처럼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는 건 직장인의 비애였다.

나는 진료실 내의 동그란 의자에 앉아 의사를 마주 봤다. 미리 간호사에게 작성해 낸 병명을 훑어본 의사가 의자를 끌고 오며 옷을 올리라는 신호를 보냈다.

상의를 가슴께까지 올리자 청진기를 몸에 찰싹 가져다 댔다. 차가운 금속 때문인지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언제부터 아팠습니까?”

“저번 주 금요일부터 그랬던 것 같습니다.”

“설사는요?”

“지금도 하긴 하는데 횟수는 많이 줄었습니다.”

“주말 내내 고생하셨겠군요.”

내 고통을 알아주는 이가 반가웠다.

“일단 이틀 치 약을 지어 줄 테니 먹어 보고 호전이 없으면 다시 내원하세요.”

“예, 감사합니다.”

약을 처방하는 의사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그런데 선생님, 일반인이 함부로 링거를 놓고 그래도 되는 겁니까?”

“일반인이 어떻게 놓습니까, 허허.”

바늘 자국 위에 딱지가 진 내 손등을 내밀었다.

“이거 일반인이 놓은 것 같습니다.”

의사가 내 손을 보더니 훗 웃었다.

“일반인이 아주 깔끔하게 놨군요. 찌른 자국을 보니 혈관도 한 번에 찾았고. 이 정도 실력이면 우리 병원에 초빙하고 싶은데요? 자, 이제 나가 보시죠.”

의사는 실없는 말을 하는 나를 쫓아내다시피 굴었다. 혹시 링거는 의사나 간호사가 와서 놓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꽂는 것보다 빼는 게 더 쉬울 것도 같고.

기억이 없으니 협박을 하려 해도 말짱 헛수고였다. 이틀 치 약을 지어 약국에서 곧장 하나를 뜯어 먹었다. 플라시보 효과를 맹신하는 성격이기에 벌써부터 장이 편해진 것 같았다.

좀 늦게라도 출근할까 하다가 누구 좋으라고 열심히 일하나 싶었다. 슬리퍼를 찍찍 끌며 재운 선배에게 전화를 연결했다.

[잠깐만. 어, 그래 석연아.]

재운 선배가 누군가에게 말을 하고 나서 나를 불렀다.

“바쁘세요?”

[아냐 괜찮아. 방금 아침 회의 끝났어.]

선배가 내 상사였으면 정말 좋았을 텐데.

“선배 정말 죄송한데……. 저기 혹시 돈 좀 빌려주실 수 있으세요?”

[당연히 갚을 수만 있다면 빌려줄 수 있지.]

“2년에 걸쳐서 나눠 갚으면…….”

입이 달라붙었다.

[하하, 내가 무슨 재운 캐피탈이야? 얼마나 큰 금액인데.]

“2천만 원 조금 넘어요.”

[석연아.]

“예.”

[누구 팼어?]

“실컷 패고 무르는 깽값이면 억울하지나 않죠.”

[무슨 일인지 물어봐도 되냐?]

“선배, 아니 사장님 자전거 제가 작살냈어요.”

[푸……푸하하하. 잠깐, 잠깐만. 그게 그거였어? 하하하, 미치겠다.]

침이 튈 리는 없으나 휴대폰을 멀찍이 떼어 냈다.

“그게 그거라니요?”

[비글 한 마리가 자전거 박살 내고 도리어 성질냈다기에 뭔 소린가 했더니. 하하하, 아 죽겠다, 푸하하.]

“끊을게요. 선배는 제 편이 아닌 것 같네요.”

[야야, 무슨 소리야. 난 네 편이지.]

그러면서 끅끅 대는 숨을 참고 있었다. 나는 끌던 슬리퍼를 멈추고 고개를 틀었다. 이제 보니 우리 동네에도 자전거 가게가 떡하니 있었다.

“진짜 끊을게요. 조만간 봬요.”

[어어, 푸흡…….]

대학 시절부터 진여원과 재운 선배가 어느 정도 친한 것은 알고 있었다.

패디과의 아웃사이더로 유명했던 그 둘이 지금껏 친하게 지내온 줄은 최근 들어 알게 됐지만 말이다. 그간 재운 선배는 진여원이라면 학을 떼는 나를 생각해서 언급하지 않은 것 같았다.

일렬로 죽 늘어선 자전거를 구경하며 생각에 잠겼다. 분명 자전거 하나 공수해 오라고 했지, 똑같은 자전거로 사 오라고 하진 않았다. 한국말은 아 다르고 어 다른 법이다.

“자전거 보십니까?”

주인이 화색을 띠며 달려 나왔다. 먼저 눈에 들어온 건 프레임이 전부 분홍색인 자전거였다. 자전거 헤드에는 클래식한 등나무 바구니까지 달려 있었다.

“오호, 여자 친구 선물하시게요?”

자전거는 인디핑크 플랫슈즈에 딱일 것 같은 여성용 느낌이 물씬 났다. 그래, 너로 정했다.

“혹시 카드 됩니까?”

이왕 비글로 본 거 지옥견답게 굴어 주마.

***

어제만큼 하루가 빠르게 가길 기다린 때도 없었다. 평소보다 한 시간이나 일찍 일어나 어제 산 자전거를 끌고 회사에 도착했다. 나조차 자전거 색이 부담스러워 야구 모자를 푹 눌러써야 했다.

출근시간까지는 아직 여유로웠다. 주차장에 매복해서 진여원을 기다리며, 동료 몇몇이 지나갈 때마다 몸을 틀어 딴 곳을 바라봤다. 출장이라도 간 건 아니겠지? 이러다 내가 지각할 것 같은 초조한 마음에 자전거 안장을 툭툭 두드렸다.

왔다.

숲길 사이로 포카리스웨트 페트를 쥐고 있는 진여원이 보였다. 자전거를 수리 맡겼는지 두 발로 걸어오는 중이었다. 나는 야구 모자를 벗어서 눌린 머리를 털어 냈다.

“안녕하십니까, 사장님. 좋은 아침입니다.”

최대한 산뜻하게 진여원을 향해 인사했다.

“누구 덕에 좋은 아침은 아니지.”

진여원이 음료를 마시며 나를 내려다봤다. 라운드 니트에 배치한 연회색 슬랙스가 진여원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보트 슈즈 형식을 띤 로퍼까지 삼박자가 고루 갖춰졌다. 옛날부터 생각해왔지만, 감각 하나는 타고난 인간이었다.

“감상할 시간 따로 줘?”

“이정도면 충분합니다.”

30초도 과분하지. 지나쳐 들어가려는 진여원에게 분홍 자전거를 쑥 내밀었다.

“말씀하셨던 겁니다. 그리고 자전거 수리 끝나면 다시 돌려주십쇼. 이것도 꽤 비싼 자전거입니다.”

“얼만데.”

손가락 세 개를 폈다.

3만 원? 이라고 말하면 그대로 눈을 찔러 주려고 했다.

“굴러가는 건 다 모르네.”

그가 등나무 바구니를 들었다 놨다. 한심하다는 눈이었다. 어쩐지 원래 가격보다 더 비싸게 주고 산 것 같은 느낌이 왔다.

“그래도 잔머리는 잘 굴러가.”

그가 곡선으로 떨어지는 분홍색 프레임 라인을 손으로 훑었다. 자전거가 사람의 몸이었다면 야한 기분이 들만큼 노골적인 손길이었다.

“그럼요, 이 머리로 그 대학을 나왔는데요. 아시다시피 만년 장학생이었거든요.”

“모르겠는데?”

그가 손을 딱 뗐다.

“이력서에라도 써넣을 걸 그랬네요.”

“그럼 나머지는 뭐로 채울 건데.”

“나머지라니요?”

진여원이 손가락 한 개를 폈다가 다시 접었다 이번엔 다섯 개를 펼쳤다.

“저거 견적이야. 50퍼센트로 턱도 없지.”

그가 포카리스웨트의 주둥이를 잠갔다.

“그리고 박석연 씨, 지각이야.”

진여원이 자전거 바구니 통에 페트병을 던져 넣었다. 회사로 들어갈 생각도 못하고 자전거를 망연자실하게 내려다봤다. 50퍼센트를 채우라는 진여원의 말보다 더 당황스러운 건 이 자전거의 견적이었다.

‘고객님이 자전거 보시는 눈이 있네. 현금가로는 33만 원이고 카드가로는 35만 원인데, 이 정도면 엄청 싼 거예요. 인터넷 뒤져 봐도 알 걸요.’

‘원래 자전거가 이렇게 비쌉니까?’

‘에이, 보는 눈은 높은데 가격을 낮게 보면 안 되죠. 딱 한 대 남은 거라 떨이치려는 건데, 나야 다른 사람한테 팔면 그만이니 비싸다 느껴지면 말아요.’

‘그럼 믿고 사겠습니다.’

‘좋다, 기분이다. 카드로 계산한다고 했죠? 여자 친구 선물해 준다니까 싸게 해 주는 거예요. 30만 원만 받을게요. 대신 교환, 환불 절대로 안 돼요.’

자연스레 어제 주인과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먼저 들어간 진여원을 재빨리 따라갔다. 다행히 그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사장님.”

진여원이 대답 없이 나를 쳐다봤다.

“혹시……. 오늘 퇴근 후에 시간 있으실까요?”

“없어.”

생각도 하지 않고 나온 대답 같았다.

나도 너한테는 1초도 허비하기 싫지만, 자전거에 대한 지식이 없으니 내가 조목조목 따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진여원이 날 골리려고 일부러 가격을 후려쳐서 이야기한 것일 수도 있지 않나.

“그럼 내일은요? 시간 되시면 저 좀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뭘.”

“자전거 가게요. 사장님이 타실 건데 마음에 안 드시면 교환도 직접 하시는 게 어떨까 해서요.”

나름 꼼수를 부렸더니 진여원이 그제야 흥미를 보였다.

“변호사 선임비는 어쩔 건데.”

이해가 빠른 사장이었다. 그가 열림 버튼을 누른 채로 안을 턱짓하기에 쪼르르 엘리베이터를 따라 탔다.

“앞으로…… 말썽은 적당히 피우겠습니다.”

진 사장, 네가 날 비글이라 생각하면 충분히 만족할 만한 대답이 아닌가.

재운 선배에게 들어 알고 있는 사실을 진여원은 모를 테니 그가 의문을 가질 거라고 생각했다. 진여원은 엘리베이터 문에 비친 나를 쳐다보고 입을 열었다.

“이 정도야 재롱이지.”

재롱……. 발끈하지 말자 싶어 주먹을 꽉 쥐는데 상승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동시에 문에 비춰진 나를 보던 진여원의 시선도 사라졌다.

변호사 선임비를 들먹인 말은 결국 놀리기 위한 포석 같았다. 가게에 같이 가 주리란 기대도 제로로 수렴됐다. 안 내려? 라는 얼굴로 보기에 한마디를 해 주지 않고서는 하루 종일 입이 근질근질할 것 같았다.

“역시 사장님답게 통이 크시네요. 그 가격이 재롱이라니요.”

“언제까지 잡고 있을까.”

그가 열림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할 말 있으면 더 하라는 듯 구는 모양새에 형식적으로 고개만 꾸벅했다. 돌아 나가는데 쿵, 거의 닫혀 버린 문에 어깨가 부딪혔다. 일부러 타이밍 맞춰 뗀 게 분명했다. 내가 빠져나갈 새도 없이 문이 굳게 닫혔다. 눈을 부릅떠서 뒤를 돌아보자 진여원이 여상하게 말했다.

“7시, 주차장으로 나와.”

어깨를 마사지하며 꽉 다물린 어금니를 간신히 뗐다.

“……감사……합니다.”

그사이 3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에서 진여원이 내렸다. 그가 시야에서 멀어지기도 전에 탁탁탁- 닫힘 버튼을 연타했다.

욱신, 어제 하루 약 먹고 좋아졌다고는 해도 복통은 간간이 찾아왔다. 서둘러 카페인을 섭취하고 싶었지만, 커피 먹고 탈이 날지도 모르니 생수나 마셔야 했다. 복도에 놓인 정수기에서 물을 벌컥벌컥 마시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열이 뻗쳤다.

나한테 미안해 얼굴도 못 들어야 할 놈이 뭐가 저리 뻔뻔한가.

내가 2천만 원에 육박하는 자전거를 박살내긴 했지만……. 그래, 솔직히 말해 속이 편하다고는 못하겠다. 한편으론 생각보다 일이 심각해지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고.

그렇다고 쌤통이라든지 잘됐다든지 하는 마음은 일절 없었다. 혹시 대학 때 일을 자전거로 흥정하자는 건가 싶기도 했다. 꼴에 자존심은 있어서 자, 이걸로 계산 끝내고 서로가 좋은 상사와 부하로 남자는 말은 못하는 건가? 그런 놈이 엘리베이터 문을 타이밍 노려 닫을까.

당연히 아니었다. 게다가 내 기억 속의 진여원은, 속에 있는 말을 돌려 꺼내는 인간도 아니었다. 그는 남의 디자인을 보고 “쓰레기.”라는 말을 할 수 있는 패기의 아웃사이더였다.

후- 한숨을 길게 쉬고 턱까지 흐른 물을 닦아 냈다. 사무실에서는 곽일영과 이재화가 각자 자리에서 분주히 일을 하는 중이었다.

“죄송합니다. 좀 늦었습니다.”

스크랩을 하려는지 잡지를 오리던 이재화가 반갑게 날 맞았다.

“아픈 건 좀 어때요? 어째 그렇게 마구 먹을 때부터 알아봤다니까요.”

“덕분에 많이 좋아졌습니다.”

“어라, 석연 씨 많이 아팠어?”

곽일영이 엎드려 디자인을 하던 자세로 고개만 번쩍 들었다.

“예, 어제 그래서 출근을 못했습니다.”

“어제 안 나왔어?!”

곽일영이 놀라는 바람에 내가 더 놀랐다.

“모르셨어요……?”

내가 그렇게 존재감 없는 남자였나.

“응, 나도 안 나왔거든.”

“그러셨구나. 대리님도 어디 아프셨어요?”

“아, 그렇지. 말 안 한 게 있는데 곽 대리는 한 달에 두 번 결근해. 그날만 우울증 때문에 시체처럼 변하거든.”

이재화가 특이사항을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3일하고 25일이야.”

저렇게 헤실거리며 말하는 걸 봐선 우울증보다는 조증에 가까운 것 같은데.

“3일은 왕따당할 때 포대자루에 갇혀서 하루 종일 있던 날이고, 25일은 울 엄마 자살 시도로 정신병원에 간 날이거든.”

심각하다 못해 엄청난 사연이었다. 입이 떡 벌어졌다.

“대체……. 포대자루에는 왜.”

“초등학교 때라 쏙 들어가고도 남았지.”

이재화가 손으로 포대자루를 그려서 쏙 들어가는 시늉을 했다. 인상을 쓰고 이재화를 바라봤다. 하극상처럼 느껴져도 할 수 없었다. 저게 저렇게 놀릴 거린가.

“박석연 씨 그렇게 안 째려봐도 돼요. 곽 대리와 나 동창이니까. 같이 왕따 동기였지.”

이재화가 이미 지난 일이라며 허허 웃었다.

“다 지난 일은 맞지. 그래도 포대자루에 들어갔을 때 진짜 무서웠거든. 졸업할 때까지 진짜 힘들었어.”

곽일영이 펜 뚜껑으로 입술을 쿡쿡 찔렀다.

“왕따 시킨 새끼들은 가만 놔두셨어요?”

“놔둬야지 뭘 어째.”

세상에서 제일 재수 없는 놈이 사람 따돌리고 낄낄거리는 음흉한 새끼들이다. 어쩌면 내가 겪어 봤기에 화가 나는 것일지도 몰랐다.

옥상 사건 후에 군대를 다녀오고 나서 성격이 많이 무뎌졌지만, 그 전까지는 사소한 놀림에도 가슴이 넝마가 되곤 했었다. 곽일영의 우울증도 어느 정도는 이해했다. 현재가 어떻든 과거에 헤진 가슴은 꿰매기가 힘들었다.

“그리고 지금도 당하고 있잖아.”

“예?”

“몰랐어? 우리 부서, 왕따 부서로 유명한데.”

곽일영이 새로운 사실을 알려 주었다. 옆 사무실에서 나온 사람이 나를 꺼림칙한 시선으로 보던 게 떠올랐다.

“아니 어째서요?”

“사회 부적응자들 모아 놓은 데야, 우리 부서. 나도 이재화 과장도 같이 D&C 있다가 여기 온 거거든. 사장님이 우리 디자인 보고 스카우트 해 온 건데, 한 달에 두 번 빠지는 조건도 그때 허용해 줬어.”

“설마 박석연 씨……. 몰랐어요?”

이재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 면접 본 건 당신이었잖아. 말 안 해 줬는데 내가 어찌 아나.

설마 진여원, 내가 게이라서 여기로 보낸 거였어? 재운 선배에게 들어 날 뽑기로 결정했을 때부터 결정된 사항이었던 거고?

처음엔 진여원이 나를 입사시킨 이유가 궁금했지만, 여태껏 별 생각이 없던 건 예전에 진여원이 내게 한 말이 있기 때문이었다.

‘2학년치고 디자인 좋네.’

대학 때 내 과제물을 보고 지나가듯 한 소리였다. 그때는 진여원의 인색한 칭찬에 뛸 듯이 기뻐했었다. 이후로 나름 멀찍이서 바라보며 동경하던 선배였는데 그가 날 엿 먹였다는 충격은 어마어마했다. 순진했었지.

타임머신이 있으면 타고 가서 옛날의 박석연을 없애 버리고 싶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며 소심하게 따지는 게 아니라, 네놈 새끼 그럴 줄 알았다면서 같이 엿을 먹여 줘야 했다.

사회 부적응자들 부서…….

내가 그런다고 풀죽을 줄 알았다면 착각이다.

“사회 부적응자들끼리 보란 듯이 잘해 보죠. 인센티브도 억 소리 나게 받는 겁니다.”

당차게 말하면서도 가슴이 왠지 따끔따끔했다.

“오, 석연 씨 발만큼 멋있는 말이다.”

“그럼 말 나온 김에 이거 받아요.”

이재화가 ‘프로젝트 X’라고 적힌 파일을 내게 던졌다. 열 장은 족히 넘는 종이가 클립에 꽂혀 있었다.

“이번에 여성 의류 브랜드 끌로이랑 우리가 콜라보레이션을 하기로 했어요. 다음 달 말에 끌로이에서 가을 패션 컬렉션이 열리는데 그때 구두를 전부 우리 쪽에서 협찬하기로 했습니다. 우리 부서에서 열 켤레는 내야 하니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거예요.”

바라던 바였다. 파일에는 스무 종류에 육박하는 피팅 사진이 있었다. 끌로이라면, 국내 브랜드가 아닌데 어떻게 협찬을 따왔나 싶었다.

얼굴로 영업을 뛴 건 아니겠지? 비틀린 속으로 구시렁대가며 의자에 털썩 앉았다.

첫 번째 옷은 당장 생각나는 디자인이 없어 두 번째 장으로 넘겼다. 하얀 롱 블라우스에 7부 블랙 스키니를 마네킹이 입고 있었다. 진짜 모델들 사진이었으면 이미지화시키기 더 수월했을 테지만, 협찬 받는 측에서 그 정도까지 배려해 주는 법은 없었다. 내가 알기로 끌로이는 화려함과 정적인 이미지로 중간 타협이 없는 의상을 만들어 내는 곳이었다.

사진 속 의상은 정적인 이미지에 속했다. 당연 그들이 원하는 건 아마 눈 돌아갈 정도로 화려한 구두일 것이다.

며칠 전 음악 방송에서 유심히 봐 두었던 발목 스니커즈를 떠올렸다. 인디언 패턴이 인상적이었지. 가죽 바지에 대비되도록 발목을 가느다랗게 돋보여 주는 스트랩힐이 정답일 듯했다. 금색, 검정색, 붉은색을 교차시켜 세 가닥으로 땋은 발목 끈을 그려 넣고, 기하학 무늬의 인디언 패턴을 발등라인부터 옆면까지 쓱쓱 색칠했다.

색감이 많이 들어갈수록 힐은 가는 게 좋다. 여자 구두는 예쁘기만 한 게 전부가 아니었다. 다리가 날씬해 보이도록 착시현상을 만들어 내야 하는 작업도 중요했다.

대강 형태만 잡아 놓은 디자인과 사진 속의 옷을 번갈아 보며 머릿속에서 매치시켰다. 나쁘진 않지만 여기서 좀 더 화려해도 될 것 같았다. 힐을 금장으로 감싸는 것도 고급스럽겠고, 가죽 바지와 금장은 원래도 궁합이 잘 맞았다.

“네가 지미 추 신발을 신는 순간에 이미 네 영혼을 판 거야.”

옆에서 곽일영이 중얼거렸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 나이젤이 한 말이었다. 아마도 이쪽 업계 사람이라면 열 번은 더 봤을 영화일 거다.

“너무 지미추스러운가요?”

“아니, 지금 박석연 씨 신발이 영혼을 팔아도 좋을 만한 것 같아서. 뚝딱 나오네.”

“생각해 뒀던 게 있는데 이 옷하고 나름 맞아떨어져서요. 나머진 한참 머리 짜내야겠죠.”

다시금 시작했던 가위질을 멈춘 이재화가 내 자리로 걸어왔다. 그가 입은 세미 정장과 운동화가 어울린다고는 하지 못하겠다.

“체일 슈즈는 아까운 사람 버렸네요. 하긴 거긴 디자인이라 부를 것도 없죠. 진부한 것들 투성이니까.”

진여원의 독설을 이재화가 전수받은 것 같았다. 사실 이재화가 정확히 본 건 맞았다. 브랜드의 모토가 평범함으로 체일 슈즈는 창작의 자유가 제한된 편이었다. 대중성과 평범함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는 딜레마에 빠져 있는 판국이지만 말이다.

구두의 생김새는 특이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특별할 수 있었다. 같은 디자인이라도 색의 조합에 따라 이미지가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체일 슈즈는 평범한 대중들을 위한 구두라 광고하지만, 그 가격을 주고 진부한 디자인을 살 바에야 개인 수제화 가게에서 맞춤 구두를 사는 게 금전적인 면에서 더 이득이었다. 나만 해도 신고 있는 구두가 동네 맞춤 구두 가게 제품이었다.

사회 부적응자들 부서라는 말에 불타올라 점심시간 전까지 쏟아 낸 디자인만 다섯 개가 넘었다.

남성용 구두 부서에 있을 동안 생각만 해 오고 막상 그려 보지는 못했던 여성용 구두 이미지가 물밀 듯 쏟아져 나왔다. 이러다 고갈되면 바로 쫓겨나는 거 아니야? 싶었으나 걱정은 일렀다. 가만히 TV만 보고 있어도 디자인들이 무한 증식해 나가고는 했으니까.

우리 팀은 속이 안 좋은 나 때문에 밖으로 나가 사 먹지는 못하고, 1층 카페테라스에서 대충 점심을 때웠다. 물론 나는 브런치는 고사하고 양갱만 먹고 있었다.

두 개째 양갱 은박지를 뜯으며 곽일영과 이재화가 먹고 있는 브런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핫케이크와 베이컨 계란 스크램블이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먹고 싶은가 봐, 석연 씨.”

“엄청요. 근데 오늘은 참으려고요.”

“그래? 어차피 아는 맛이잖아.”

식도락의 기쁨을 모르는 이나 할 수 있는 말이었다.

“맛을 아니까 더 먹고 싶은 거죠.”

이재화가 포크로 소시지 하나를 찍어서 내게 내밀었다. 정중히 사양하며 양갱을 우걱 씹어 먹었다. 그때였다. 주변에 있던 회사원들이 하나같이 다 기립했다. 덩달아 나도 일어나며 나타난 남자를 바라봤다.

진여원이 안경을 벗고는 격식 차리지 말라는 듯 앉으라며 손을 까딱했다. 이어 포카리스웨트를 냉장고에서 꺼냈다. 이제 보니 포카리스웨트 중독자였구만. 나도 카페인 중독자니 딱히 할 말은 없었다.

그대로 나갈 거라 생각했는데 그가 우리 테이블로 저벅저벅 걸어왔다. 4인석 중 빈자리는 내 옆자리였다. 그는 의자를 끌어내 앉더니 음료를 시원하게도 마셨다.

“식사는 하셨습니까?”

이재화가 물었다.

“대충.”

“몸 생각도 하셔야죠.”

“플랫슈즈 250사이즈로 받아 왔어?”

부하 직원의 걱정 따위는 말끔히 무시하고 제 용건만 꺼냈다.

“네, 어제 도착했습니다.”

“오늘 중으로 엘리스리스 팀한테 보내 놔.”

“알겠습니다.”

양갱만 갉작갉작 씹어 먹다 깜짝 놀랐다.

“엘리스리스요?!”

내 큰 목소리에 남자 셋의 시선이 동시에 내게로 박혔다.

“뭘 그렇게 놀라?”

곽일영이 생 오렌지 주스를 쪽쪽 빨아마셨다.

“아……. 그게 자주 보는 드라마라서요.”

“우리 공동 작업한 거, 거기 협찬 들어가잖아. 몰랐어?”

드라마 협찬인 줄은 알고 있었는데 그게 <엘리스리스>인 줄은 몰랐다. 그러고 보니 재운 선배네도 거기에 협찬 들어간다고 했던 것 같은데…….

진여원이 용건은 끝났다는 듯 손목시계를 내려다보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플랫슈즈 잘 만들었어.”

생각지도 못한 칭찬에 떨떠름하게 고개를 꾸벅했다. 곽일영은 특유의 헤실거리는 웃음을 띠고 있었다.

“콜라보도 잘해 봐.”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대답은 했지만, 사회 부적응자 부서에 너무 많은 걸 기대하는 거 아니야? 속으로 비꼬아 주며 입술을 옆으로 찢었다.

“뭐, 열심히 한다고 다 잘되는 건 아니지.”

툭 내뱉은 진여원이 예의상 표정을 유지하는 날 보지도 않고는 테라스 밖으로 걸어 나갔다. 사장 주제에 땡땡이치는 건 아닐 테고 외부 활동차 밖에 나가는 듯 보였다.

“석연 씨, 양갱을 무슨 사탕 같이 씹어.”

곽일영이 이빨 상해- 하면서 제 이를 딱딱거렸다.

“사람을 씹을 순 없잖아요.”

남은 양갱을 한입에 털어 넣고 꼭꼭 씹었다.

곽일영과 이재화가 역시 우리 박석연 씨, 사회 부적응자 부서다운 알 수 없는 똘기가 있다면서 흐뭇하게 바라봤다. 왜인지 우리 셋이 똘똘 뭉쳐야 할 것 같았다. 우리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앉아 있는 회사 동료들을 보니 말이다.

***

분홍색 자전거 안장에 앉아 진여원을 기다렸다. 손목시계를 확인하니 약속 시각으로부터 20분이 지나가고 있었다. 분명 7시 주차장이라고 했었지 주차장에서 만나자는 말은 하지 않았다.

기다린 시간이 미치도록 아까웠다. 야구 모자를 푹 눌러쓰고 안장에 올라타 유유히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뒤늦게 퇴근하는 회사원들이 나와 분홍색 자전거를 보고 속닥거리는 것 같았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너희 사장도 타게 될 거다.

처음엔 인도로 달렸는데 퇴근시간이 맞물려서 그런지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결국 도로로 자전거를 끌고 내려와 달리기 시작했다.

갓길로 가고 있었지만 뒤에서부터 쌩쌩 달리는 자동차들 때문에 죽음의 위협을 느낄 정도였다. 하는 수 없이 내려서 자전거를 끌고 가다가 또다시 타는 일을 반복했다. 간혹 배가 살살 아플 때는 안장에 앉아 숨을 돌렸다.

동네 자전거 집에 도착했을 땐 9시가 거의 다 되어 있었다. 다행히 자전거 집 간판에는 불이 들어와 있었다.

나는 주인과 좋게 이야기를 해 볼 심산으로 전의를 가라앉혔다. 그런데 어제의 주인이 아닌 좀 더 젊어 보이는 남자가 카운터에 앉아 낄낄대며 TV를 보고 있었다.

“저, 사장님은 어디 계십니까?”

“아부지요?”

남자가 카운터에서 나오며 대답했다.

“지금 잠깐 뭐 사러 가셨는데, 왜요?”

“별건 아니고 어제 산 자전거에 문제가 있어서요.”

“수리 때문이면 저한테 말씀하셔도 돼요.”

기회는 이때다 싶었다. 아들이면 자전거 가격도 알 테니 주인이 오기 전에 대뜸 물었다.

“이 자전거 얼마에 파는 겁니까?”

“얼마에 사셨는데요?”

우문이었다.

“제가 카드로 계산했는데 뭔가 좀 잘못된 거 같아서요.”

“가격 맞게 사셨을 걸요. 그리고 전 가격 잘 몰라요.”

남자는 리모컨으로 채널을 돌려가며 딴청을 부렸다.

딸랑딸랑, 문에 달린 종소리가 들렸고 때마침 자전거집 주인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가 나와 자전거를 보더니 갑자기 인상을 팍 썼다.

“분명 교환, 환불 안 된다고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요.”

다짜고짜 내가 무슨 연유로 온 줄도 모르고 선수를 치는 것을 보니 저 새끼가 뭔가 구린 게 있구나 싶었다.

“이봐요, 동네 장사하시는 분이 사기를 치시면 안 되죠.”

“사기요?”

주인이 사람 좋았던 인상을 험악하게 구기며 다가왔다. 나보다 키도 작은 게 압박감을 주려고 해 웃기기만 했다.

“어디가 어떻게 사기라는 거요?”

“이거 견적 어떻게 봐도 15만 원 이상 안 나오더군요.”

“어디서 거짓 정보를 알아 와서 헛소리를 지껄이쇼.”

“자전거에 대해 엄청 잘 아는 사람이 그러던데요.”

“자전거 집 주인인 나보다?”

근데 어째 점점 말이 짧아졌다.

“인터넷 뒤져 보니 이런 자전거는 비싸봐야 10만원 안팎이던데요. 적당히 우기시죠.”

“허~ 이 사람 자전거에 대해 하나도 모르네. 그런 건 한두 달 타면 버려야 되는 싼 마이고. 이건 족히 5년은 탈 수 있는 거요. 알고나 지껄이쇼.”

워낙 강경하게 나오는 주인을 보니 순간 제 값 주고 산 게 맞나 하는 착각이 들었다. 재빨리 따질 말을 생각하고 있는데 휴대폰이 주머니에서 크게 요동쳤다.

꺼내 보니 부재중 전화표시도 떠 있었고, 지금 전화하는 사람은 진여원이었다.

“여보세요.”

[문자 확인해.]

“문자요? 잠시만요.”

휴대폰을 내려서 문자를 확인했다.

6시 50분에 도착한 문자의 내용은 [8시로 변경. 자전거 가게 주소 적어] 로 단출했다. 그 전에 바로 도착했던 게 스팸 문자여서 진여원이 문자를 보낸 줄은 모르고 있었다.

“문자 보내셨었네요.”

[해결했으면 말고.]

“잠깐만요!”

나는 불만스럽게 서 있는 주인과 아들을 쳐다보며 급히 진여원을 불렀다.

“여기가 어디냐면 저희 동네인데…….”

[박석연 씨 동네 이름 한번 특이해.]

“xx역 근처에 이 좋은 자전거 세상이라는 곳입니다.”

[10분.]

뚝, 끊겼다.

“싸가지 진 사장.”

끊긴 휴대폰을 보고 욕설을 내뱉었다.

그깟 15만 원 손해 보고 말자고 통 크게 생각하려 해도 카드 명세서가 나오면 후회할 게 분명했다. 후회할 거리를 제공하느니 잠깐 열 받고 말지.

“지금 뭐 하자는 거요?”

“10분만 기다려 보세요. 이 자전거 견적 말해 줄 사람 올 테니까.”

“우리 지금 문 닫을 건데 못 기다려요.”

“꿀릴 게 없으면 충분히 기다려 줄 수 있는 거 아닙니까?”

“흥, 꿀리긴 누가.”

틱틱거리는 주인이 어디 올 테면 오라는 기세로 코를 울렸다.

밖을 내다보며 1분, 2분, 시간을 쟀다. 10분이 조금 안 되었을 때, 마침 차 한 대가 자전거 집 앞에 섰다.

진여원이 조수석에서 내려 간판을 흘끔 보더니 이쪽으로 걸어왔다. 시동을 끈 운전석에서는 또 다른 익숙한 얼굴이 내렸다. 재운 선배였다. 놀랄 시간도 없이 딸랑딸랑, 종이 울리고 두 남자가 차례로 들어왔다.

“선배? 여기는 어쩐 일이세요?”

“일 때문에 여원이 만났다가 같이 왔지.”

“아, 사장님……하고요. 저기, 사장님. 제가 문자를 늦게 봐서,”

“됐어.”

내 말을 잘라 낸 진여원이 주인에게 뭐라고 말을 할 줄 알았는데, 팔짱만 끼고 있을 뿐 다른 자세를 취하진 않았다. 그는 주변의 자전거를 둘러본 뒤에 휴대폰을 꺼내 주인의 얼굴로 내밀었다. 순식간에 주인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야한 사진도 아닐 텐데 왜 저런 반응인가 싶었다.

“이, 이거는 재질이 다른 건데…….”

“안장 만 원도 안 되고, 프레임은 강화도 아니고 바퀴는 18인치인데, 하이브리드 값으로 판 게 말이 되나. 당신이 원가 얼마에 샀는지도 말해 드릴까?”

나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진여원을 쳐다봤다. 사기 맞았을 때는 이렇게 따지시오- 정석 프로그램을 보고 있는 듯했다.

물론 나도 구두 가게에서 덤터기를 씌울 때는 군더더기 없이 핵심만 집어서 따질 수 있었다. 자전거에 관심도 없으니 지식이 있을 리 만무했다.

주인이 카운터에서 만 원권 여러 장을 꺼냈다. 아들이 불만을 드러내는 게 보였지만 주인이 조용히 하라며 만류했다.

“그 뭐냐, 손님. 제가 착각한 것 같은데 진짜 고의는 아니었습니다.”

주인은 만 원권 총 열다섯 장을 내가 아닌 진여원에게 내밀었다. 재운 선배의 눈에 왜인지 모를 흥미진진함이 서려 있었다.

“이보세요, 사과는 저한테도 하셔야죠.”

“미안합니다.”

떨떠름한 얼굴이었다.

“동네 장사 이런 식으로 하지 마시죠. 마음 같아선 이 동네에 떠들고 다니고 싶지만 이번 한 번만 참는 겁니다.”

그 사이 진여원과 재운 선배는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나도 주인에게 기세 좋게 호기를 부리며 자전거를 끌고 나왔다.

세워 둔 차 앞까지 가자 진여원이 쓱 내게 15만 원을 내밀었다.

“그걸로 밥 사.”

내가 돈을 받으며 감사합니다, 의 감사까지만 말한 순간이었다.

“예?”

“변호사 선임비 다른 걸로 대체해 줘?”

왠지 밥값이 더 싸게 먹힐 듯했다.

“아닙니다, 그럼 여기.”

도로 진여원에게 돈을 내밀었더니 차문을 열기만 했다.

“지금 사라고.”

“그래, 같이 먹자 석연아.”

“그게…… 전 지금 밥 못 먹는데요.”

“죽 시켜.”

말이나 못하면.

“그럼 이 근처에서 먹어야겠는데?”

재운 선배가 내 자전거를 가리켰다.

“선임비 다시 드릴 테니 두 분이서 드시면 안 될까요?”

“왜 빼고 그래, 오랜만에 대학 동문끼리 모인 건데. 아, 저번에 우리 같이 갔었던 선술집으로 가자. 석연이 넌 자전거 타고 와.”

자기들 할 말만 한 둘이 나란히 차에 올라탔다. 선술집 방향으로 사라지는 차를 보며 나도 안장에 앉았다. 선술집에 죽을 팔 리가 있나. 집으로 가 버릴까 하는 충동이 치솟았다.

주머니에 넣은 15만 원이 묵직하게 느껴졌다. 이대로 튀면 얼마나 갈구려나. 도와준 게 고맙긴 한데 오히려 15만 원보다 더 먹는 거 아니야? 나는 간판에 불이 꺼지는 자전거 가게를 노려봤다.

당신이 사기만 안 쳤으면 이럴 일도 없잖아. 그렇게 따지면 모든 일의 원흉은 자전거 도둑놈이었다. 아니 진짜 시발점은 진여원의 자전거 가격이었고.

나는 별 수 없이 페달을 밟으며 선술집으로 향했다. 안주나 술값이 그렇게 비싼 곳이 아니라 그나마 다행이었다.

전봇대 기둥과 자전거를 한데 묶어 자물쇠를 채웠다. 비밀번호는 1828. 기억하기 쉬운 숫자로 설정했었다. 당연히 비밀 번호는 십. 팔. 이십. 팔입니다, 라고 말해 줄 기회를 노리기도 했다.

선술집 안으로 들어가니 진여원과 재운 선배가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재운 선배의 옆에 앉았다. 메뉴판을 보는 진여원이 안주 겸 식사 대용인 음식을 세 종류나 시켰다.

다 안 먹기만 해 봐라. 나도 하루에 양갱 한 박스씩 해치워 주마.

“석연이 왜 이렇게 뿔이 났어.”

“아닌데요.”

“그런 표정 처음 보는데?”

내 표정이 어떤가 싶어 이마를 만졌다. 진짜로 오돌토돌하게 주름이 가 있었다.

“근데 선배와 사장님은 어떻게.”

“이번에 우리도 윰하고 같이 드라마 협찬하게 됐거든. 사실 그게 다는 아니고 다른 일로도 겸사겸사 만났지.”

“잘됐네요.”

“내가 추천한 인재 제법이지 않냐? 진여원 넌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가져간 거야.”

진여원의 시선이 갑자기 내 배를 향했다.

“아마, 결말은 거위 배가 갈라졌던 것 같은데.”

“거위 주인이 멍청했거든요.”

“거위가 없어도 주인이 황금을 만들면 그만이지.”

그래, 너 잘났다.

미역무침에 연두부가 기본 안주로 나왔다. 연두부는 먹어도 괜찮을 것 같아서 젓가락으로 반을 잘라 먹었다. 선배와 진여원의 앞에 놓인 맥주가 탐이 났지만 마실 용기는 없었다.

우리 둘의 대화를 듣던 재운 선배는 뭐가 그리 웃긴지 연방 웃음을 참아가며 물었다.

“대체 자전거는 왜 산 거야?”

“사장님 드리려고요.”

“분홍색을?”

“잘 어울리실 것 같은데요 뭘.”

성질을 긁으려고 꺼낸 말인데 진여원이 무시로 일관하며 맥주를 마셨다. 나도 진여원의 말을 무시할 수 있는 위치였으면 진즉에 행하고도 남았다. 예로부터 꼬우면 사장하라는 말이 진리다.

“50퍼센트는 뭐로 채울 건지 그 좋은 머리로 생각해 봤어?”

“돈은 없으니 몸으로 때울까요?”

행여 저놈이 엄한 착각을 하면 곤란하니 서둘러 말을 붙였다.

“원하신다면 아침저녁으로 태워다 드리죠.”

“점심은 왜 빼먹어.”

“거절하실 거라 생각했는데요.”

“내가 왜.”

나는 젓가락으로 애궂은 연두부만 뭉갰다. 가만히 맥주잔을 입에 대고 우리의 대화를 듣던 재운 선배가 기어코 폭소를 터뜨렸다.

“푸하하하, 아하하, 미치겠다.”

테이블까지 쳐 가며 웃어 대던 재운 선배가 고개를 들었다.

“진여원, 답지 않게 왜 그러는데.”

“보면 알아.”

“보면 안다고?”

재운 선배는 의문을 띠다가 곧 생각난 게 있다는 듯 화제를 전환했다.

“맞다. 너희 끌로이랑 콜라보레이션 한다며. 진여원 수완 봐라, 상도덕 좀 지키지?”

“아~ 우리 사장님께서 소시오패스셨구나.”

진여원이 턱으로 나를 가리켰다.

“찌르면 반응이 바로 오거든.”

“비글 취급은 정중히 사양하겠습니다.”

“와, 석연이 네가 그렇게 말하면 내가 고자질한 놈이 되잖아.”

하나도 재미없는 상황이건만 재운 선배가 뭐가 그리 신나는지 연방 낄낄거렸다.

“흥분점이 참 낮아.”

진여원이 플랫슈즈를 처음 봤을 때처럼 피식거렸다.

“우리 석연이 대학 때는 비글이 아니라 순둥한 포메라니안이었는데.”

재운 선배는 다소 안타까움이 느껴지는 말투였다.

“예, 누구 덕분에 미친개가 됐죠.”

“진여원이 단단히 미움 받았네.”

그러거나 말거나의 태도를 시종일관 유지하던 진여원이 울리는 휴대폰을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화를 받고 온다며 걸어 나가는 뒷모습에 가운뎃손가락을 올려 주려다 선배 때문에 참았다.

“선배, 보셨죠. 저 인간…… 사장님이 저 갈구는 거요. 양심이 있으면 저러지 못하죠. 그러니까 다른 데 있으면 좀 부탁드려요.”

“음. 그렇긴 한데.”

앓는 내 소리에 선배가 맥주를 벌컥 들이켰다.

“그래도 나름 귀여워하는 것 같은데?”

“하하…….”

입만 벙긋 벌려 감정 없는 웃음을 흘렸다.

“네가 진여원 진짜 독설을 못 들어서 그래. 저건 독설 축에도 안 들지. 저 정도면 엄청 인간적인 거야.”

“전에는 동물이었나 보죠.”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다던 대학 때의 연인이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결혼해서 잘 살고 있다면 부인에게 부처상이라도 줘야 할 것 같다. 부인한테도 온갖 독설을 서슴지 않을 테니 말이다. 어쩌면 이미 열반의 반열에 올라 부처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문에 달린 휘장을 걷고 들어오는 진여원을 보고 입을 꾹 다물었다. 동시에 재운 선배가 휴대폰에 도착한 메시지를 보더니 뜨악한 얼굴로 외쳤다.

“이런, 주희 난리 났다. 나 먼저 가 볼게.”

“둘만 놔두고 어딜 가세요!”

속닥거리며 선배를 붙잡았다.

“석연아, 어차피 이제 네 사장님 아니냐. 진여원이 저렇게 말장난 받아 주는 것도 처음 보는데 잘 좀 지내봐라. 그리고 난 널 믿기는 해도 그 일은 좀 생각해 봤으면 해. 남한테 관심도 없는 놈인데, 진여원이 그럴 놈이냐? 그럼 간다.”

선배는 진여원에게도 손만 들어 인사하고는 재빨리 차 키를 챙겨 나가 버렸다. 덩그러니 의자에 앉아 진여원을 마주하고 있자니 좀 전의 자전거 가게에서 느꼈던 가시방석은 애교였다.

진여원이 그럴 놈이냐, 라는 건 나도 몇 번이나 했던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때 진여원은 변명도 없었고, 오히려 인생 공부했으니 잘됐지 않으냐며 뻔뻔하게 굴기까지 했었다.

나는 반쯤 남은 재운 선배의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약 먹었으니 이 정도는 장이 견뎌 주겠지. 흘끔 앞을 보니 진여원은 튀긴 치킨을 간장 소스에 찍어 먹었다.

라운드 니트가 어려 보이는 효과를 가져왔는지 대학생 때의 모습과 겹쳐보였다. 저런 남자랑 사귀면 진짜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한때는 했었다. 미친 생각이었다.

“근데 사장님 아까 자전거집 주인한테 보여 준 게 뭡니까.”

내가 말을 하지 않으면 계속 침묵만 유지될 것 같기에 먼저 운을 뗐다. 또 주인이 정색하며 돈을 돌려준 이유가 궁금하기도 했다.

진여원은 젓가락을 가지런히 내려놓았다. 주인에게 보여 줬던 것 그대로 내게 휴대폰을 내밀었다.

<이 좋은 자전거 세상>

상단에 제목이 쓰여 있고 내 것과 같은 기종인데, 색만 다른 자전거를 스크린샷 한 사진이었다. 가격은 15만 원.

“이거 인터넷에서도 판매하는 거였어요?”

“자전거 집 주인이 사람을 잘 보네.”

“예?”

“사기 잘 당하게 생겼잖아.”

생각해, 박석연 생각해라.

빨리 지지 않을 만한 말을 떠올리라고.

“피라미드 회사에서 반겼겠어.”

진여원이 나보다 먼저 말을 꺼냈다. 재운 선배가 이 인간한테 별 얘기를 다 한 것 같았다. 이미 자리를 뜬 재운 선배가 원망스러웠다.

대학 4학년 때, 졸업한 재운 선배가 학교 다니면서 쉽게 할 수 있는 좋은 일자리가 있다며 추천해 준 곳이 있었는데, 노래방에 비눗방울 기계를 설치하는 일이었다. 500원을 넣으면 비눗방울이 1분간 나오는 기계 말이다.

할 일이라고는 설치된 가게를 일주일에 두 번씩 돌며 돈 통을 회수하는 것뿐이라 얼른 재운 선배를 따라갔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내 돈 200만 원을 먼저 지불해야 하는 피라미드 회사였었다.

몇 배로 불려서 준다던 200만 원은 당연히 허공으로 날아갔다. 그러고 보니 재운 선배한테 일자리를 알아봐 달라고 한 것 자체가 실수였다.

나는 손을 들어 맥주를 한 잔 더 시켰다. 그걸 단숨에 해치우고 또 한 잔을 다시 주문했다. 진여원이 저거 왜 저래, 라는 듯 쳐다봤다.

“후……. 재운 선배가 그런 얘기까지 했습니까?”

진지하게 물어보자 진여원이 맥주를 마시려던 동작을 멈칫했다. 안경 너머로 진여원의 눈이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진짜였나? 라고……. 그냥 떠본 말에 넘어간 내가 바보였다.

진여원이 턱을 매만지며 테이블을 툭툭 두드렸다. 손으로 가려진 입술이 설핏설핏 보였다가 사라졌다.

나는 그제야 그가 처음 보는 얼굴로 웃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제 알았는데 진여원이 웃을 때면 차가운 인상이 완화되어 평소보다 부드러워 보였다.

‘그래도 나름 귀여워하는 것 같은데?’

재운 선배의 말이 맞을 리가 없었다. 자전거 박살 낸 부하 직원을 어떻게 골려 줘야 할까 음흉한 속내를 가진 사장일뿐이었다.

나는 재운 선배의 착각을 깨어 줄 요량으로 물었다.

“혹시 사장님…… 제가 귀여우세요?”

직구로 날린 내 질문에 황당함을 표할 거라 생각했는데 기우였다. 진여원은 덤덤하게 나를 쳐다보며 한참이나 말을 아꼈다. 게이 주제에 어디서 개소리를 지껄이냐고 하면 아무리 나라도 평정을 유지하지는 못할 것 같았다.

무슨 말이 나올까 기다리는 동안 묘한 초조함이 느껴졌다.

“박석연 씨.”

꿀꺽.

입에 담고 있던 맥주를 넘겼다.

“마약 해?”

다시 맥주를 넘기게 만드는 대답이었다. 아마 안경 쓴 모습이 익숙하지 않아 그렇게 보이는 것이라 생각했다. 무성의하게 말한 것과는 다르게 표정은 여전히 부드러운 것 같아서.

“꽁한 타입이신가 봐요. 마음에 담아 두시고 복수하시네요.”

나는 진여원의 얼굴을 보지 않고 미역무침만 뒤적뒤적거렸다.

“그건 너겠지.”

“저는 그럴 만하죠, 안 그렇습니까? 그전 회사에 있을 때 저 엄청 싹싹하기로 유명했거든요. 저보고 건방지다고 하시는데, 제가 왜 그러는지 누구보다 잘 아시지 않습니까?”

“쿨하게 잊자고 한 사람이 누구였더라.”

나는 쿨하게 잊어도 너는 그러면 안 되지.

홧홧한 속을 달래려 남은 맥주를 들이켰다.

“그만 마시지?”

“또 결근할까 봐 걱정 되십니까? 그럴 일 없습니다.”

“말이 많아져.”

내가 말이 많아지는 이유의 9할은 너 때문이다. 보란 듯이 맥주잔을 입에 댔다.

“그럼 빨리 드세요. 그리고 저 술주정 없습니다. 아마 사장님보다도 잘 마실 겁니다.”

“아니면 어색하면 말이 많아지나.”

입술이 쪼그라들었다.

둘만 있는 게 부담스러워 입을 더 나불나불댄 걸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젓가락이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선술집에서 흘러나오는 노래가 섞여들었다.

가만히 있다 보니 내가 떠들지 않아도 주변은 충분히 시끄러웠다. 느긋하게 새우 크로켓을 먹는 진여원을 바라봤다. 잘 먹는 건 좋은데 하나 더 시키지는 마라. 그 순간 눈이 마주쳤다. 안경을 쓰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안 그랬으면 지금보다 더 숨이 막혔을 지도 모르겠다.

“괜찮은 가게네.”

가게에 대한 평가가 진여원치고 후했다. 왠지 내가 으쓱해지는 기분인 건 어쩔 수 없었다.

평소 내가 먹는 것의 두 배나 느린 속도로 식사를 마친 진여원이 남은 맥주를 전부 비웠다. 이 가게 생맥주 맛도 끝내주거든.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보는데 그가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계산서를 들고 재빨리 카운터로 다가갔다. 반갑게 아는 척을 해 주는 주인에게 현금으로 계산하고 밖으로 나왔다.

“이걸로 계산은 끝인 겁니다.”

진여원은 “내일 주차장에 가져다 놔.” 하고는 도로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인상을 와작 구기고 자전거에 올라타려는데 그가 나를 돌아봤다.

“끌고 가지?”

“타고 갈 겁니다.”

페달에 척 발을 올렸다.

“잘 굴러가는 머리로 생각해 봐. 자전거가 차에 해당되는지 아닌지.”

그러고는 또 제 갈 길로 발걸음을 틀었다. 또 나 놀리려고 헛소리하는 거 아닌가 싶었다. 그런데 자전거를 분명 잔차라고 했었지? 휴대폰은 이럴 때 스마트하게 사용하라고 있는 거다.

검색창에 ‘자전거 음주운전’이라고 재빨리 적었다.

변호사 답변이 달린 지식인 글을 읽어 보니, 자전거 사고가 났을 때 음주 상태라면 처벌이 가능하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나는 얼른 안장에서 내려왔다.

진여원이 걸어간 방향에는 취객만 어슬렁거릴 뿐 더는 그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와는 반대 방향으로 분홍 자전거를 질질 끌었다.

자전거를 오피스텔 주차대에 묶어 놓고 집에 올라오자마자 컴퓨터를 켰다. 며칠 전부터 생각해 왔던 것을 실행하기 위해서였다. 인터넷 서점에 접속해서 망설임 없이 책을 한 권 주문했다.

[말 잘하는 사람이 이긴다.]

당신도 촌철살인의 대가로 거듭날 수 있다!

강렬한 빨간색 글씨가 띠지에 둘러져 있었다. 당일배송이니 내일 밤이면 침대에 드러누워 독서를 할 수 있을 듯했다. 왜인지 가뿐한 기분이 되어 샤워를 하고 나와 약을 먹었다. 맥주 때문에 또 설사를 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오전보다도 더 상태가 호전된 것 같았다.

무리하게 다이어트를 한 이후부터 내장이 약해졌는지 심하다 싶을 정도로 과식을 하면 으레 그렇듯 체하거나 복통을 일으키기 십상이었다.

머리 말리는 것도 귀찮아 침대에 그냥 누워 버렸다. TV만 켜놓고 눈을 끔뻑끔뻑하다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우웅- 우웅- 우웅-

바닥에서 휴대폰이 진동했다. 잠결에 TV는 껐는지 휴대폰만 빛을 내뿜고 있었다. 손을 뻗어 휴대폰을 쥐었다. 저장도 되어 있지 않은 데다 처음 보는 전화번호였다.

새벽 2시가 넘은 시간인데 대체 누구야.

받지 않고 다시 바닥에 던져두자 끊어졌던 전화가 다시 울렸다. 잠이 슬슬 달아나려고 하기에 짜증스레 전화를 받았다.

“예, 여보세요.”

[얼굴이나 좀 보자.]

받자마자 후회했다. 새벽에 걸려오는 전화치고 좋은 소식이 없는 법이다.

“잘못 거셨습니다.”

[석연아 나야.]

후- 숨을 고르고 되도록 차갑게 말을 뱉었다.

“……내 전화번호는 어떻게 알았어.”

[나 발 넓잖아.]

두 달 전에도 이렇게 전화가 걸려 왔던 날, 바로 휴대폰 전화번호를 바꿨었다. 그 전에도 두 번 정도 그랬었고. 일단 휴대폰을 귀에서 떼어내 녹음 버튼을 눌렀다.

“내가 연락하지 말라고 했잖아.”

[그냥 만나서 말만 좀 하자는데 뭘 그렇게 빼고 그래.]

“할 말 있으면 지금 하고 끊어. 그리고 다신 연락하지 마.”

[석연아, 우리 다시 시작하자. 내가 다 이해해 줄 테니까.]

“세상에 사람이 형하고 나만 남아도 절대 그럴 일은 없어. 좀 알아들어.”

[지금 어디 살아? 갈 테니까 만나서 얘기하자.]

“내가 전에 그랬지. 또 이런 식으로 굴면 형 부인한테 전부 말할 거라고.”

[너 때문에 이미 이혼했는데 무슨 소리야.]

저런 새끼랑 결혼했던 부인이 불쌍할 지경이었다.

“여전해, 자기 문제 남 탓으로 돌리는 거. 어차피 전화번호 바꿔도 내가 이 업계 뜨지 않는 이상 사람들 통해서 알아낼 테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흠흠, 목을 가다듬었다.

“김대영, 너랑 사귀었던 게 존나 후회된다 씹새야. 생각하면 시간 아까워서 뒈져 버릴 것 같아. 옛정 생각해서 좋게 말해 왔던 거 아니야. 내 입 더럽히기 싫어서 그랬던 거지. 그러니까 귓구멍 파고 적당히 좀 알아 처먹어.”

[…….]

놀란 건지, 당황한 건지 김대영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래, 미안하다. 석연이 너 화 좀 풀리면 다시 전화할게.]

재차 헛소리를 지껄이는 통에 전원을 끄고 휴대폰을 던져 버렸다. 누가 그랬던 것 같은데, 말을 못 알아들으니 이길 자신이 없다고. 나는 이불을 머리꼭대기까지 덮어썼다. 잠이 다 달아나 버렸다. 네 시간 뒤에는 일어나야 하는데 쓸데없는 생각만 자꾸 머릿속을 잠식해나갔다.

‘씨발, 너 때문에 되는 일이 없어 새끼야. 디자인 존나 병신같이 그려 와서 학점도 거지같이 받았잖아. 너는 A 받았더만. 좋냐? 엉? 좋아?’

‘형이 교수님께 제대로 설명 못한 거잖아.’

‘자꾸 짜증 나게 할래?’

‘알았으니까 화 내지 마 형. 내가 미안해.’

‘알면 좆이나 물어 봐.’

그때는 지는 게 이기는 거라 생각했다. 이제는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안다.

지는 건, 지는 거였다.

대학 시절, 나랑 사귈 때의 김대영은 늘 화가 나 있었다. 내게 온갖 짜증을 부렸고 아주 가끔 다정하게 대해 주면 난 그게 좋아서 또 실실거렸다. 나도 모르는 사이 파블로프의 개가 되어 있던 것이다.

‘석연이 너는 사람 볼 줄도 눈꼽 만치도 모르니까,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

엄마가 항상 하던 말이었다.

김대영과 헤어지기를 결심했을 때가 돼서야 실감했었다. 사람 보는 내 눈깔이 장식용이었다는 것을.

이대로 잠들면 더할 나위 없이 꿈자리가 사나울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헤매는 동안 진여원이 나타났다.

내가 준 분홍색 자전거 뒷좌석에 긴 생머리의 여자를 태우곤 꽃이 만발한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여자의 얼굴은 어떻게 생겼는지 보이지 않았다. 진여원이 그답지 않은 잔잔한 웃음을 띠고 말했다.

‘너 마약 해?’

어느새 자전거 뒤에 탄 사람은 나로 변해 있었다. 헉! 벌떡 몸을 일으켰다.

창문 틈새로 햇빛이 스멀스멀 영역을 넓혀 가는 중이었다. 진짜로 꿈 한번 사나웠다. 반대로 요 며칠 아침이면 싸르르했던 배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출근을 준비하는 동안 오늘 하루 졸음과 싸워야 할 것을 예감했다.

***

그 며칠 사이 완전히 길을 익혀 생각보다 더 이르게 회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운동하는 셈치고 자전거로 출근을 했더니 온몸에 땀이 흥건했다.

샤워를 한 것도 무색해지는 바람에 곧장 수영장으로 향했다. 수영장을 직접 이용해 보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탈의실이 텅 빈 것을 보니 이른 아침부터 수영할 사람은 나밖에 없는 것 같았다.

각 로커에는 사원들 이름이 적혀 있었는데 제일 끝에 있는 로커에 내 이름이 보였다. 옷걸이에 옷을 걸어 놓고 로커에 비치된 수영복으로 갈아입었다.

꽉 끼는 삼각 수영복이 하반신에 찰지게 달라붙었다. 물안경도 있지 않을까 했는데 주변을 둘러봐도 찾을 수가 없었다. 탈의실에서부터 이어진 수영장으로 나오니 부판이 놓인 탁상 옆에 물안경이 잔득 쌓여 있었다.

나는 부판은 무시하고 물안경만 잡아 머리에 끼워 맞췄다. 아무도 없는 수영장을 보니 꼭 내가 전세 낸 것만 같았다. 어쩐지 개인 수영장을 가진 부자가 된 것도 같았고.

“네, 1번 라인 박석연 준비 자세에 들어갔습니다. 음, 오랜만에 복귀하는 건데 잘할 수 있을까 걱정되는군요. 하지만 여의도의 물개라 불리지 않습니까. 걱정할 것 없습니다.”

허리를 양옆으로 돌려 가며 혼자 제 모습을 중계했다. 발만 슬쩍 내밀어 담가 봤더니 물의 온도도 적당했다. 허리를 굽혀 준비 자세를 취하고 스스로 땅- 소리를 내어 풍덩 물에 들어갔다.

발장구만 쳐서 앞으로 진행하다 슬슬 팔을 움직였다. 살을 뺄 때 헬스만 한 게 아니라 여러 종목의 스포츠도 병행했기에 자유형과 접영은 식은 죽 먹기였다. 아마 디자인 쪽으로 재능이 없었다면 운동선수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25미터는 족히 됨 직한 라인의 끝에 도달해 물속에서 몸을 뱅글 돌았다. 이번엔 접영으로 갈 생각이었다.

고작 50미터를 왔다 갔다 한 것뿐인데 체력 소모가 엄청났다. 자전거만 몰지 않았어도 세 번은 왕복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웠다. 벽에 손을 터치하며 물 밖으로 가쁜 숨을 내쉬었다.

“푸하~ 역시 실력이 죽지 않았어요. 박석연 선수. 아주 대~단합니다.”

스스로에게 칭찬을 하는데 어둑한 물안경을 통해 두 다리가 보였다. 사실 혼자인 수영장을 누린 것도 잠시였었다. 물귀신이 나왔던 공포영화가 생각나 더 혼잣말을 한 것이었는데 두 다리를 보고 기겁을 했다.

나는 부리나케 물안경을 벗어 고개를 쳐들었다. 진여원이 저거 아침부터 약 했나 싶은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출근하셨습니까.”

“잘하네.”

웬걸, 이젠 혼잣말까지 하냐며 빈정거릴 줄 알았는데 말이다.

“사장님, 비글이 왜 지옥견이라 불리는 줄 아십니까? 운동량이 많아서 그렇죠. 제때 운동을 안 시켜 주면 미쳐서 날뜁니다.”

“그럼 박석연 씨한테는 우리 회사가 놀이터겠어.”

진여원이 목을 까딱까딱했다. 준비운동 자세 한번 거만했다.

나는 가운데로 눈이 쏠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그의 가슴팍만 쳐다봤다. 신이 내린 몸매에 얼굴까지 가졌지만, 그걸 전부 깎아 먹을 정도로 저 인간한테 부족한 게 있었다.

미끈하게 빠졌어도 독설만 뱉어 내는 저 주둥이.

양팔을 밖으로 뻗어 몸을 일으키자 물줄기가 내 몸 밑으로 와르르 쏟아졌다.

“한판 붙어 보실래요?”

“내기 걸어.”

“꼭 뭘 걸어야 합니까.”

“인센티브 제도는 왜 만들었을 거 같아.”

운동이든 시합이든 일이든, 사람은 목표가 있어야 열심히 하게 마련이다.

“제가 이기면 나머지 50퍼센트 0으로 수렴해 주시면 안 됩니까? 사장님은요?”

“이기고 나서 생각해 보지.”

“그건 아니죠. 말도 안 되는 조건이면 저도 안 할 겁니다.”

“말도 안 되는 조건은 방금 박석연 씨가 걸었지.”

주문한 책이 제발 오늘 꼭 도착했으면 했다. 그리고 여전히 우물을 파는 건 아쉬운 놈이었다.

“그럼 해요, 수영 종목은 아무거나 해도 상관없는 걸로 하고요. 괜찮으십니까?”

“해.”

어차피 이길 자신이 있었다. 살이 쪘던 고교 때는 열외라 쳐도 대학 이후로는 운동하면 져 본 역사가 없었다. 체일 슈즈 단합대회 때도 내 덕에 우리 팀이 상품을 빵빵하게 가져갔었다.

나는 중앙 라인에 서서 자세를 잡았다. 물안경을 다시금 고쳐 쓰고 말했다.

“출발 신호는 제가 해도 됩니까?”

“그러든지.”

“그럼 셉니다. 반칙하면 다시 하는 거고요. 하나 둘 셋 땅!”

혀를 재빠르게 굴리며 말이 끝나자마자 신호를 외쳤다. 진여원이 나보다 더 늦게 입수하는 게 느껴졌다. 치사해도 별 수 없었다. 나보다 다리가 한참 더 기니 이 정도의 핸디캡은 가져야지.

나는 곧장 수영 중 가장 빠르다는 자유형으로 물을 질러 나갔다.

옆으로 고개를 틀어 숨을 쉴 때마다 진여원을 확인했다. 나보다 늦게 출발했음에도 비슷한 선상에서 따라오고 있었다. 그도 팔을 번갈아 물속에서 물 밖으로 당기며 자유형을 시전했다.

나는 다리에 힘을 주어 턴을 하고는 미친 듯이 팔과 다리를 휘저었다. 진여원을 신경 쓸 겨를이 더는 없었다. 중앙 지점을 지나 서서히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흡사 숨도 쉬지 않고 헤엄쳐 손을 올려 벽에 착! 터치했다.

“허억! 헉! 이겼다!”

금메달을 딴 선수처럼 주먹을 물 밖으로 불끈 쥐어 올렸다. 진여원도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서 있는 상태였다. 머리카락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그가 위를 쳐다보며 말했다.

“마침……. 잘됐네.”

잘되다니 뭐가?

진여원이 보는 방향으로 시선을 따라 올렸다. 허리에 튜브를 끼고 있는 곽일영의 반짝이는 눈도 우리 둘을 향해 있었다.

“어떡해, 석연 씨. 나 거짓말 못하는데.”

“예?”

“석연 씨 안 이겼어.”

“예?!”

좀 전보다 더 크게 되물었다.

“사장님이 이겼어.”

“곽 대리님!”

“내가 봤는데……. 사장님 손이 조금 더 빨리 닿는 거.”

진여원이 수영장 스테인리스 계단을 척척 올라갔다.

“다시 하죠! 곽 대리님이 잘못 봤을 수도 있으니까.”

나도 진여원을 따라 올라갔다.

진여원은 손으로 머리를 털어 냈다. 그 상태로 나를 흘끔 보며 말했다.

“고민되고 있어.”

“고민하지 말고 다시 하죠.”

“우승 상품을 뭐로 정할지 말이야.”

찰박찰박, 진여원이 걸어 나가는 자리마다 물 자국이 남았다. 허탈하게 숨을 씩씩대며 진여원 등을 노려보다가 소리쳤다.

“사장님! 자전거 비밀번호 알아 가셔야죠.”

“말해.”

“십팔, 이십팔, 입니다. 자전거 자물쇠……번호가요.”

기세 좋게 말했지만 끝에서는 약간 후회했다. 진여원은 비치된 수건으로 몸을 닦아 내기만 했다.

“박석연 씨는 발만 귀여운 줄 알았는데 입도 귀여워.”

언제는 마약했냐며.

내 발을 본 진여원의 시선이 이번엔 입술에 머물렀다. 어째 귀엽다는 뜻에 반어법이 섞여 있는 것 같았다. 순간 풍덩하는 소리가 뒤에서부터 들렸다.

진여원이 바구니에 수건을 툭 던지고 샤워실로 들어가는 때였다. 곽일영이 나를 불렀다.

“석연 씨, 나 수영 가르쳐 주라.”

튜브를 끼고 물장구치는 곽일영이 내 속도 모르고 방실거렸다.

“곽 대리님 튜브에 바람내고 싶은 심정이라 지금은 안 돼요.”

“그럼 언제 돼?”

“내일 하죠. 대신 제 교육 방식은 스파르타입니다. 기대하셔도 좋아요.”

곽일영이 내 말은 듣는 둥 마는 둥 팔을 허우적거렸다. 튜브 때문에 앞으로 나아가는 법은 없었다.

혹 떼려다 혹 붙은 내 심정은 모르는지 곽일영이 천장을 본 상태로 드러누웠다. 저러다 튜브 뒤집어지지. 나는 수영장에 걸린 시계를 본 다음 물속으로 풍덩 들어갔다.

“튜브 빼 봐요.”

“어? 지금 가르쳐 주게?”

“예.”

내가 직접 튜브를 벗겨 내서 밖으로 던졌다.

“제 손 잡고 몸 쭉 펴요.”

곽일영이 내 두 손을 꽉 잡으며 감동 어린 얼굴을 했다.

“박석연 씨 좋은 사람이네.”

“곽 대리님도요. 단 너무 솔직하지만 않으면요.”

곽일영이 얼굴을 물에 담갔다 뺐다 하며 어푸어푸거렸다. 두 다리는 물렁거리는 가래떡처럼 흐느적거리기까지 했다. 곽일영이 수업 진도를 제대로 따라오지 못한 것만 제외하면 나름 보람찬 수영강의였다.

문득 물 먹고 코가 매워 징징대는 곽일영을 보고 든 생각이, 놀리는 재미가 이런 건가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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