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처음은 발을 동동 구를 만큼 걱정이 됐고, 그다음은 될 대로 되라 싶었고, 또 다음은 잊어 먹은 거 아니야? 싶었다.
그리고 근 2주 만인 오늘은 완벽한 평온이 찾아왔다.
내기에서 이긴 뒤로 진여원과는 몇 번 얼굴만 마주쳤을 뿐 직접적으로 이야기를 나눈 일은 없었다.
분홍 바구니 자전거도 주차장에 있다가 없다가 하는 걸 봐선 정말로 진여원이 타고 다니는 듯했다. 직접 보고 놀려 주지 못한 게 천추의 한이었다.
생각해 보니 유리아 백화점 전 지점 입점에 맞춰 정신없이 바쁠 진여원이기에 내기 따위는 충분히 잊고도 남았을 것 같았다. 우리 팀 역시도 콜라보레이션 때문에 쉼 없이 잔업을 하는 중이었다.
“컬러 종류는요?”
샘플로 주문해야 할 구두가 스무 켤레 이상이기에 공장 책임자 김요한이 직접 회사로 와줘야 했다. 이제는 샘플 스무 개 중에서 세 개만 건져도 감사할 지경이었다. 벌써 열 켤레 이상 진여원에게 퇴짜를 맞았기 때문이었다. 그때마다 이재화의 시무룩하게 처진 어깨가 안타까웠다.
‘불우이웃 돕기도 민망할 수준이야. 쓰레기통에 갖다 버려.’
이재화가 진여원에게 들은 대사를 따라 하는데도 음성지원이 됐다.
김요한이 볼펜으로 톡톡 책상을 쳤다. 화들짝 정신을 차리고는 가보시와 힐을 감싸는 컬러를 건네주었다.
“이거와 같은 연두색으로요.”
“음. 이 정도면 비비드 계열이네요.”
옅은 연두색이 아닌, 멀리서도 한눈에 들어올 만한 강렬한 진연두였다.
“지금 샘플만 서른 개 넘게 작업한 거 알고 계시죠? 타 부서 것까지 하면 거의 오십 개가 넘어가요.”
김요한도 슬슬 짜증이 치미는지 은연중에 불만을 흘렸다.
“죄송합니다. 사장님 눈이 워낙 까다로워서 말이죠.”
“우리도 하는 만큼 받으니 뭐 할 말은 없지만……. 그나저나 곽 대리님하고 이 과장님은요?”
“사무실에 계십니다.”
곽일영과 이재화는 사무실에서 열심히 디자인을 짜내는 중이었다. 샘플을 넘기는 건 한 사람만으로도 충분하기에 제일 막내인 내가 있는 것이었다.
“고생이 많으시네요. 덕분에 저도 잔업 같이하고요.”
미안한 마음에 회의실에 배치된 에스프레소 머신에서 커피를 뽑아 대령했다.
“드세요. 이제 딱 두 개 남았습니다.”
웨지힐 한 개와 펄감이 가미된 비즈 슬리퍼를 연달아 설명했다. 비즈가 촘촘히 박혀야 할 슬리퍼 도식지를 살펴보던 김요한이 펜을 똑딱였다.
“이건 단가는 좀 나가도 네일용 비즈로 하는 게 좋겠네요. 단가 저렴한 액세서리 비즈는 광택이 떨어지거든요.”
“조명에 반짝반짝거리면 효과도 배로 뛰니까 그렇게 하죠.”
“그럼 총 스무 켤레고 기한은 언제까지 해 드릴까요.”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김요한에게는 거짓말을 해서 시일을 앞당길 필요가 없었다. 여느 공장과는 다르게 정확한 날짜를 맞춰주는 게 가장 큰 장점이었다.
“음…… 내일이 토요일이니까. 다음 주 금요일까지는 맞춰 드리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김요한이 도식지들을 정리해서 일어났다. 남은 커피를 가져가는 그에게 인사를 하고 나서야 나도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이미 다섯 잔은 먹은 것 같은데 카페인이 다시 당겼다. 카푸치노가 다 내려올 때까지 머신기 앞에서 멍하니 기다렸다. 반쯤 열린 회의실 안으로 옆 부서 사람인 허준성이 들어왔다. 오늘 따라 늦게까지 남아 있는 팀이 우리 뿐만은 아닌 듯했다. 카푸치노를 빼내려는 순간이었다. 나보다 먼저 허준성의 손이 머신 입구로 향했다.
내가 뽑은 카푸치노를 홀짝이는 꼴을 보고 다시 한번 커피를 뽑았다. 이번에도 역시 나보다 먼저 손을 뻗어 그것을 가져갔다.
“하나 더 뽑아 드려요?”
허준성의 경우 없는 행동을 참아내고 입을 떼었다.
“아뇨, 부서 사람 줄 거라 이거면 충분합니다.”
다시 카푸치노를 눌러서 가져가려는데 허준성이 나를 불렀다.
“내 친구 중에 하나가 체일 슈즈에 있는데 박석연 씨 소문 진짜였어요?”
“무슨 소문이요?”
내가 덤덤하게 말하자 허준성이 이런 반응을 원한 게 아니라는 듯 굴었다.
“그쪽 호모로 쫙 퍼졌다던데요. 체일 슈즈뿐만이 아니라 세노스에 있는 아는 친구도 그러던데. 박석연 씨 구멍 맛이 끝내준다고. 그러고 보니 우리 사장님은 참 박애주의자셔. 동성애자들도 막 뽑고.”
세노스라는 말에 찌르르 감이 왔다.
“김대영 친구입니까?”
“뭐 적당히 아는 사이죠.”
곽일영이나 이재화나 사람 좋은 걸로는 엄지를 척 들어야 했다. 허준성이 지나가며 몇 번 그들에게 빈정대는 말을 던질 때마다 참았지만, 오늘은 내 인내심이 한계에 도달했다. 신경이 날카로운 건 너희 부서뿐만이 아니다.
“왜 그래요? 사실을 말하는데 기분 나빠 보이네요.”
“그래서 어쩌라고요. 네 친구 새끼도 내 구멍 좋다고 따먹었다. 됐냐?”
사회 부적응자 부서에 순한 양들만 있을 거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뭐…… 뭐?”
커피를 든 채로 허준성이 말을 더듬었다.
“왜요.”
아무렇지 않게 묻자 허준성이 머신 위에 커피를 내려놓았다.
“박석연 씨 방금 뭐라고 했습니까?”
믿기지가 않는다며 되물었다.
“어쩌라고.”
똑같이 말해 줬다.
“지금 장난하십니까? 박석연 씨 그렇게 안 봤는데 경우는 밥 말아 먹었어요?”
“허준성 씨 개념은 비빔밥 해 먹었구나. 다음에 비빌 때 나도 불러 줘요.”
카푸치노를 후룩후룩 먹으며 나가는 내 옷을 허준성이 붙잡았다.
“뭐 이딴 새끼가 다 있어! 야, 다시 말해 봐. 내가 너 그냥 둘 거 같아?”
놈의 손을 탁 쳐냈다.
“증거 있어요? 녹음 했어요?”
나는 한번 씩 웃어 줬다.
“왜 애먼 사람을 잡아요. 바쁘니까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허준성이 길길이 날뛰든 말든 무시했다. 사무실로 돌아와 눈 돌아가게 디자인을 끄적거리는 곽 대리와 이 과장을 보자니 마음 한구석이 짠했다.
어떤 새끼든 우리 부서 사람들 괄시하기만 해 봐. 진짜 비글처럼 물어뜯어 난장판을 만들어 놓을 테니까.
우리 오늘 마무리하고 술이나 한잔할까요? 기세를 몰아 화끈하게 말하려다 말았다. 둘 다 술을 못 먹는 사람들이니 아쉬워도 어쩔 수 없었다.
***
퇴근을 하자마자 피곤에 찌든 몸을 이끌고 집 근처 편의점을 들렀다. 한동안 술을 마셔 주지 않았으니 큰맘 먹고 비싼 맥주 열 병을 사 들고 홀로 집으로 터덜터덜 걸어왔다.
거리의 커플들이 불금이라며 신나 있는 와중에, 내가 든 병맥주들이 달그락달그락 몸을 부딪치며 나를 위로해줬다. 도착해서는 곧바로 병맥주 하나를 땄다.
흑맥주의 깊은 풍미를 느끼며 구석에 처박아 두었던 박스를 부욱 뜯었다. 집에 오면 바로 뻗어 자는 걸 반복하다 보니 배달된 책을 볼 짬도 나질 않았다.
책을 펼치자 갓 나무를 베어 낸 것 같은 향이 배어 나왔다.
[당신도 촌철살인의 대가로 거듭날 수 있다.]
책을 둘러싼 띠지를 떼어 버리고 맥주를 마셔 가며 책을 정독했다.
책의 제1 수칙은 상대방의 말에 긍정적인 태도를 보여라 였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사람들의 말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면 말 잘하는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물론 오늘 내 태도를 봐서는 글렀다 싶었다.
게이라고 놀리는 말에 ‘예, 맞습니다. 저는 긍정적인 게이입니다. 얼마든지 밟아 주세요.’ 라고 하란 말인가? 페이지를 휙휙 넘기며 늘어놓은 맥주를 또 땄다.
제2 수칙은 입에 욕을 담는 순간 당신은 진다 였다.
나는 책을 닫아서 저기로 던져 버렸다. 책의 뒷면에 손 글씨 같은 폰트로 뭔가가 깨알같이 적혀 있었다.
[주의 : 본 책을 맹신하진 마시오. 상대에 따라 다릅니다.]
환불하고 싶은 마음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구매한 지 벌써 2주나 가까이 흘렀으니 가능할 리는 없었다.
책 읽기도 포기하고는 여느 날과 같이 TV나 켜서 빈둥빈둥거렸다. 채널을 돌리는데 ‘<엘리스리스> 마지막 회’가 광고 화면 위에 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일이 바빠 <엘리스리스> 마지막을 챙겨 보지 못했었다. 분명 재운 선배네 회사와 우리 회사 신발이 나온다고 했었지.
나는 광고가 다 끝날 때까지 기다려서 <엘리스리스>를 시청했다.
<엘리스리스>의 여주인공 나이는 20대 초반이었지만, 생김새가 워낙 어려 보여 중학생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불우한 환경 속에서 자랐어도 당찬 성격을 가진 여자였다. 작고 예뻐 엘리스라는 별명을 가진 그녀의 주변으로 여러 남자들이 다가갔지만 결국 그녀는 아무도 선택하지 않았다. 진정으로 그녀를 사랑했던 남자도 있었는데도 말이다.
나도 회마다 왜 저럴까 하는 궁금증을 가졌는데, 마지막 회를 다 보고 나서야 알게 됐다. 그녀는 자신의 절친을 사랑한 동성애자였다. 심지어 어려 보였던 것은 불치병으로 인한 성장장애 때문이었다. 죽음을 목전에 둔 여자는 고백도 하지 못하고 아름답게 세상을 뜨려 했다.
키가 작아 늘 힐만 신고 다녔던 여자가 마지막으로 산 건 분홍색 플랫슈즈. 그 슈즈를 신고 편하게 모래사장을 누비던 그녀가 쭈그리고 앉아 슈즈에 묻은 모래를 툭툭 털어 냈다.
‘너까지 데리고 갈 순 없어.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나를 위해 산 물건이거든. 그러니까 넌 예쁘게 살아서 꼭 누군가에게 사랑받길 바라.’
플랫슈즈를 가지런히 벗어 놓은 그녀가 파도가 치는 바다로 서서히 걸어 들어갔다. 물이 가슴까지 차올랐던 곳에서 그녀가 한 발을 더 내딛자 작은 몸이 아예 물속에 잠겨 버렸다. 엔딩 화면이 점차 흐려지며 하단에 글씨가 떠오르고 있었다.
‘우리들의 엘리스는 작고 귀여웠다. 우리는 그것이 그녀의 전부인 줄 알았다. 이제 그녀는 환상 속에서만 존재한다.’
이어 자막이 올라가고 협찬 목록에 우리와 재운 선배의 회사 이름이 위로 사라져 갔다.
나는 꼴사납게 훌쩍거리고 있었다.
맥주를 하나 더 따려는데 한 시간 동안 사온 걸 다 먹었는지 빈 병만 굴러다녔다. 어쩌면 적당히 취기가 돌아 감정이 격해졌는지도 모르겠다. 비척거리면서 일어나 지갑을 챙겼다. 이대로는 아쉬워 편의점을 다시 들를 생각이었다.
울적한 마음과는 다르게 경쾌한 휴대폰 벨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는 주머니를 뒤적거려 휴대폰을 꺼내 봤다.
[진 사장]
저장한 문구가 반짝 올라왔다.
이 시간에 왜 전화질이야. 업무 시간은 진작 끝났다고.
그럼에도 샘플에 문제가 생겼을 수도 있으니 무시하지는 못했다. 코를 크게 훌쩍이고 전화를 받았다.
“예, 여보세요.”
[와서 대리운전 좀 해.]
다짜고짜 용건만 말하는 게 진여원다웠다.
“저 면허 없다고 말씀드렸는데요.”
[박석연 씨는 자전거 면허가 필요한 나라에 살고 있습니까?]
진여원은 존댓말 같지 않은, 존댓말을 할 줄 아는 유일한 남자였다.
휴대폰의 저장 문구를 ‘진싸가지’로 당장 바꿔야겠다.
“그것보다 제가 왜 가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아침점심저녁.]
저번 술자리에서 농담 삼아 말한 걸 기억하고 있을 줄이야……. 이어 수영장 내기를 꺼낼 것만 같아 얼른 대꾸했다.
“어디십니까? 근데 저도 술 마셨습니다.”
[문자 확인해.]
뚝- 얼마 기다리지 않아 편지 모양이 휴대폰에 떠올랐다.
위치는 회사와 우리 집 중간 지점에 있는 고급 한우 집이었다. 이미 옷은 입은 채라 준비할 것도 없었다. 어차피 나도 술 먹었으니 운전은 무리겠고, 가서 이렇게 왔으니 내기는 갚았다며 생색이나 부릴 생각이었다.
아니면 전봇대에 들이받아 버려? 나도 다칠 수 있으니 그건 좀 생각해 봐야 했다.
빈 맥주병을 구석으로 모아 두고 신발장을 열었다. 놓아둔 운동화를 꺼내려는데 상단에 위치한 신발 상자가 눈에 들어왔다. 체일 슈즈 단합대회 때 샀던 신발이었다.
손을 뻗어 안에 담긴 신발을 꺼내 바닥에 내려놓자 따닥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다. 나는 바닥에 쭈구려 앉아 단단히 묶여 있는 신발 끈을 풀었다. 발을 끼워 맞춰서 다시 신발 끈을 묶고 섰다. 키가 몇 cm는 더 자란 기분이었다.
따닥, 따닥, 걸을 때마다 신발에서 소리가 났다. 도로까지 나가서 택시를 잡고 기사에게 목적지를 말했다. 택시 기사는 내가 탈 때부터 의아한 눈으로 연방 바라봤지만 개의치 않았다.
택시 창문에 작은 방울이 맺혀 있다 생각했는데 어느새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차로는 금방인 거리라 한우 가게에 도착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고풍스러운 한우집 대문 앞에 서 있는 진여원과 분홍색 자전거가 보였다.
택시 기사에게 요금을 지불하고 인도에 내려섰다. 역시나 신발은 따닥거렸다. 그에게 다가가는 동안 울려 퍼지는 이 소리에 진여원이 나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매끈한 얼굴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가 걸친 맨투맨 티셔츠에서 초여름 풀냄새가 물씬 풍기는 것 같았다.
왠지 짜증이 묻어 있는 듯했던 진여원의 얼굴에서 점차 그 기색이 지워져 나갔다.
“종꽃에 이어 이번엔…….”
진여원이 감상을 중얼거렸다.
“태워 드릴까요? 저 술 먹어서 차도 쪽으로 핸들이 꺾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축구하는 사람 불렀나?”
진여원이 내 스파이크를 보더니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태워 달라고 하면 페달을 밟는 척 진여원의 정강이를 찍어 버릴 심산으로 신고 나온 것이었다.
진여원이 핸들을 잡고 갑자기 자전거의 안장에 앉았다. 웃어 주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어울리는 바람에 웃음이 쏙 들어갔다.
“뭐 해.”
“뭐 하십니까.”
또 동시였다.
“지금 저 놀리려고 여기까지 나오라고 한 겁니까?”
“타.”
진여원이 고개만 움직여 안장 뒤, 짐받이를 가리켰다.
“제가 왜요?”
“술 마셨다며.”
“사장님도 드신 거 아닙니까?”
“이걸로 퉁쳐 줄까 하는데.”
바닥에 스파이크 심이 꽂힐 기세로 달려가 얼른 앉았다.
“구두약속도 약속입니다.”
진여원이 페달을 밟아 자전거를 몰았다.
뒤로 넘어갈 뻔한 것에 놀라 그의 티셔츠를 잡고 버텼다. 스파이크를 잘 신고 나왔지. 일반 운동화였으면 체인 위쪽에 올린 다리가 몇 번이고 미끄러졌을 것이다.
이 인간 술버릇 한번 특이하네.
나는 속으로 구시렁거리며 휙휙 지나가는 나무들을 바라봤다. 남의 뒤에서 자전거를 타 본 건 처음이라 의외로 신선했다. 보슬비 때문에 공기도 마찬가지로 청량했고.
“박석연 씨는 비 올 땐 우산보다 스파이크를 신나 본데.”
질까 보냐.
“예, 바닥이 미끄러워서요.”
가격이 저렴한 자전거라 그런지 두 남자의 무게에 체인이 다륵, 다륵, 힘겹게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진여원 낑낑대는 거 보게 언덕이라도 나왔으면 했는데 경사가 얕은 내리막길이 나왔다.
“술버릇이 남에게 봉사하는 건가 봅니다.”
“그래 보여?”
“구세군 냄비에 백 원 한 푼 안 넣을 사람으로 보이는데요.”
잡은 셔츠가 자전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웃음 때문에 흔들리는 것 같았다.
한참을 달리다 보니 나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져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자전거 뒤에 타는 것도 나쁘지는 않네. 엉덩이는 좀 불편해도.
“사장님, 저 왜 태워 주시는 겁니까?”
취기가 있는 건 나뿐이고 진여원은 멀쩡한 것 같았다.
“알고 싶어?”
“그만 좀 찌르세요. 놀림당하는 사람은 별로 재미없습니다.”
“알면 상처받을 텐데.”
왠지 긴장감이 몰려오는데 진여원은 말을 꺼내지 않았다.
내리막길을 내려가면서 보슬비와 함께 시원한 바람이 얼굴에 묻어났다.
하, 진짜 기분 좋다. 맑고 풋풋한 공기가 하루 종일 혹사당한 정신과 몸을 씻겨 주는 것만 같았다. 게다가 내일은 황금 같은 주말이었다.
진여원이 무언가를 흥얼대고 있었다. 그도 밤공기에 기분이 좋아 보이는 듯했다. 어쩌면 술기운에 기분이 업된 건지도 모르고.
자세히 들어보니 익숙한 노래였다.
……라라 라라라라 날 좋아한다고.
독설만 내뱉어서 그렇지 진여원의 목소리만 놓고 보자면 넋이 나갈 정도로 좋았다.
라라라라 라라라라 널 사랑한다고.
그가 포카리스웨트 주제가를 부르는데 웃기기는커녕 뒷부분이 더 듣고 싶었다.
그가 더 부르지는 않았지만 저절로 머릿속에서 노래가 재생됐다. 키득거리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포카리스웨트 중독자답네요.”
“여자만 모델인 게 아쉬워.”
그가 광고의 편협한 사고방식이라면서 툭 내뱉었다.
“상큼한 음료니까요.”
“내가 하면 레전드로 남겠지.”
순간 오늘 본 책의 제1 수칙이 떠올랐다.
상대방의 말에 긍정적인 태도를 보여라.
왠지 저 말에 동의하면 어떤 반응이 나올까 궁금해졌다. 어쩌면 진여원의 말문을 막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건 그러네요. 노래도 잘 부르시고.”
끼익- 내리막길을 다 내려온 자전거의 속도가 천천히 줄어들었다.
“박석연.”
그가 자전거를 완전히 세워서 땅에 다리를 딛고 나를 불렀다. 설마 저번의 ‘마약 해?’라는 꿈은 예지몽이었나?
“못생긴 감이 이 며칠간 자꾸 떠오르는 이유가 뭘까 싶어.”
예지몽은 아니었다.
“그냥 사 드세요.”
“아마 불가능할걸.”
“왜요……?”
“못 먹는 감이라서.”
으악!
진여원이 갑자기 속력을 붙이기 시작했다. 반동에 그의 등에 코를 퍽 박았다. 한 손으로 그를 잡고 또 한 손으로는 코를 문지르는데, 진여원의 목소리가 바람 소리와 함께 흘러들어왔다.
“더 못생겨지겠네.”
[주의 : 본 책을 맹신하진 마시오. 상대에 따라 다릅니다.]
역시 긍정 따위는 때려치워야 했다.
평지를 또 얼마간 달리는 동안 바람을 만끽했다. 엉덩이만 불편하지 않으면 이대로 자도 될 만큼 정신이 나른해졌다.
나중에 연인이라도 생기면 가끔 이렇게 서로 타 볼까. 연인이라……. 곱씹고 있는데 진여원이 나무 펜스가 둘러진 주택 앞에서 우뚝 자전거를 세웠다. 나는 두 다리만 내려 멀뚱멀뚱 앉아 있었다.
“뭐 해, 안 내리고.”
“아…….”
갑작스레 내리라는 말에 어리벙벙하게 자전거에서 내려섰다. 그러자 진여원도 내려 자전거를 끌고 대문으로 향했다.
낮은 펜스와 이어진 대문의 높이가 내 키만 했다. 비밀번호를 누른 진여원이 안으로 들어갔다. 여전히 어안이 벙벙해서 그를 쳐다보자 진여원이 대문에 자전거를 기대어 놓고는 말했다.
“내기 상품 잘 받았어.”
그러니까 지금 여기가 너희 집이고, 나를 어딘지도 모르는 여기에 데려다 놓고, 넌 집에 들어가 쉬겠다고?
의문과 기막힘이 3단으로 증폭했다.
대문이 굳게 닫히고 정원에 자전거를 대강 세워 놓은 진여원이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정원 한복판에 세워진 주택은 모임지붕 형태의 북미스타일을 띠고 있었다.
넋 놓고 구경하던 정신이 번쩍 돌아왔다. 나는 속으로 진여원 욕을 남발해 가며 대문을 노려봤다.
문패에 특이하게도 이름이 적혀 있었는데, 진여원 석 자 옆에 나란히 쓰여 있는 또 다른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진여원, 달래.]
부인 이름이 달래라도 되나 보지? 이름 한번 엄청 촌스럽네. 아주 사랑꾼 납셨네. 문패에 이름까지 떡하니 박아 놓고 말이야. 왜, 가운데에 하트라도 붙이지?
뱅글, 몸을 돌려서 자전거를 타고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왠지 분이 안 풀려서 도로 진여원의 집으로 돌아왔다.
정원에서 무언가를 손질하는 진여원이 보였다. 이쪽으론 시선도 두지 않고 집중하고 있기에 제자리에서 두 번 점프했다. 술 먹으면 용감해진다는 말이 맞았다. 스파이크를 신은 발을 들어 대문을 뻥 걷어찼다.
쾅- 생각보다 우렁찬 대문 소리에 내가 더 놀라 언덕 위를 달려 올라갔다. 그의 대문 밖으로 인영이 보였다. 진여원일 것 같아서 그의 집이 더 멀리 보일 때까지 한참을 내달렸다.
여기서 바라보니 회사만큼이나 패셔너블한 주택이었다. 나는 둘러진 낮은 펜스를 보고 중얼거렸다. 도둑이나 들어라.
헉헉거리며 숨을 돌리고 택시가 다닐 만한 도로까지 걷고 또 걸었다.
진여원이 원래부터 마이페이스인 것은 알았으나 부하 직원을 괴롭히는 똘기까지 갖춘 줄은 최근에 알았다.
고작해야 12시밖에 안 됐는데 나온 김에 이대로 들어가는 게 좀 아쉬워졌다. 어차피 집에 가도 혼자고 주말 내내 TV밖에 더 보겠나 싶었다. 혼자 술 먹다가 엄마한테 전화해서 찔찔대는 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전에도 코가 삐뚤어질 때까지 마시고는 부모님께 전화해서 한참을 말없이 코만 훌쩍거렸었다. 물론 필름이 끊긴 터라 기억은 안 나지만 그다음 날 엄마가 한 말 때문에 알아차렸다.
‘너 죙일 코 찔찔 거리드만 고뿔 걸린겨? 약 사다 먹어.’
그때 엄마도 코맹맹한 소리가 났었다.
대로변에 나와 서서 문이 닫힌 커피숍 유리문에 내 모습을 비춰 봤다. 슬랙스에 7부 셔츠 차림이 나름 봐줄 만했다. 신발도 바닥만 들어 보이지 않으면 감쪽같이 조깅화스러웠다. 따닥거리는 스파이크 소리는 노래에 충분히 묻히고도 남을 테고…….
나는 내 앞에 선 택시에 올라타며 가볍게 말했다.
“이태원이요.”
***
이태원 로열패밀리는 금요일, 토요일이면 각지에서 올라온 게이들로 북적 북적거렸다.
입구에서부터 벌써 서로 부둥켜안고 입술을 맞대는 무리들이 즐비했다. 스무 살 초반에는 눈 돌아가는 신세계에 빠져 매 주말마다 출근 도장을 찍었지만, 그것도 해가 갈 때마다 줄어들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다가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 또 사진을 찍어서 회사로 보내면 어쩌지 라는 생각에…….
그런데 남의 사생활을 들춰내 회사로 보내는 게 오히려 범죄 아니던가. 어째서 내가 몸을 사려야 하는 건지 조금 억울하기는 했다. 어차피 현재 사장은 내가 게이인 거 아는데 상관없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알고서도 채용했으니 말이다.
그래, 너희는 클럽도 가고 나이트도 가서 여자를 꼬시는데 나라고 집에만 처박혀 있으란 법은 없다. 술기운도 더해졌겠다 당당하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나를 보자마자 바텐더가 반갑다며 손을 올렸다. 머리꼭대기까지 차올랐던 당당함과 기세도 잠시, 몸을 휙 틀었다. 이건 기시감이었다. 단지 그때와 상황이 반대로 됐을 뿐이었다.
“석연아 안 들어오고 뭐 해!”
게이 바 바텐더로 족히 5년은 일한 미령이 음악 소리를 내리누를 정도로 크게 날 불렀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고는 미령을 향해 검지 한 개를 들었다. 입술에 붙여서 조용히 하라는 행동을 취하는 때였다. 김요한이 무심한 얼굴로 나를 돌아봤다. 그도 눈이 동그래졌다가 다시 원래의 위치를 찾았다.
아주 오래전에 진여원이 나를 이렇게 발견했었더랬지.
그때 진여원은 나와 김대영을 보고도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었다. 그저 그 혼자 바 테이블에 앉아 맥주를 마셨을 뿐이었다. 그러니 누구라도 그가 이쪽이라고 착각했을 것이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선배님, 여자 친구는 눈속임이었어요?’라고 생각 없는 말을 건넸었다. 괜히 동경하던 선배가 같은 성향이라는 것이 반가워 주절주절 떠든 게 잘못이라면 잘못이었다.
진여원이 게이 바인 줄 모르고 들어온 것을 알았다면, 아마 말은커녕 부리나케 자리를 피했을 테니까.
“혹시 박석연 씨, 잘못 들어온 거예요?”
김요한이 턱을 괴고 손을 흔들었다.
그럴 리가 있나, 바텐더가 내 이름까지 불렀는데. 나는 흠흠 헛기침을 해 가며 바 테이블로 걸어갔다. 미령이 내가 앉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맥주 한 병을 내려놓았다.
“늘 마시던 거 맞지?”
뚜껑을 딴 버드와이저에서 흰 연기가 솟아올랐다. 누가 들으면 내가 로열패밀리 죽돌이인 줄 알겠다.
“박석연 씨도 이쪽이었어요?”
내 옆의 김요한이 불쑥 물었다.
“예…… 뭐.”
그와 얼떨떨하게 짠을 하자 김요한이 시원하게도 맥주를 들이켰다. 나도 차가운 맥주 병을 잡아 입술에 가져갔다. 먹고 왔던 맥주에 비해 탄산이 더 독했다.
회사였으면 이런저런 얘기라도 하겠는데 사적인 자리이니만큼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난감했다.
“샘플 작업은 들어가셨어요?”
샘플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김요한이 분위기 파악 못하는 사람 취급을 했다. 구겨진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석연 씨, 여기 와서까지 일 얘기하면 안 되죠.”
“그럼 무슨 얘기를 할까요.”
“그러게요. 서로 연애 넋두리나 할까요.”
“그건 일만큼이나 별로인데요.”
김요한의 시선이 스파이크를 신은 내 발에 머물렀다. 그 역시도 구두 만드는 사람이니 남의 신발을 유심히 보는 듯했다.
“박석연 씨는 파트너 없어요?”
“우리 석연이는 파트너 없어. 병신 같은 새끼한테 한 번 잘못 걸려서 그 후로는 아주 학을 뗐거든.”
김요한의 물음에 미령이 내 대신 끼어들어 대답을 주었다.
“그 얘긴 왜 또 꺼내.”
“말도 마라, 요한 씨도 지금 가슴앓이하고 있거든. 석연이 네가 나보단 더 잘 다독여 주겠다.”
나는 김요한을 놀라 바라봤다.
“이성애자라도 좋아하나 봐요.”
“글쎄요, 이쪽인지 아닌지도 모르겠네요. 워낙 특이한 사람이라.”
“고백은 했어요?”
“했다가 차였죠. 참 특이한 이유로 차였지만요.”
“특이한 이유요?”
“네……. 발을 어떻게 성형해요, 발을.”
별로 취한 것 같지 않았는데 같은 말을 중얼중얼거리는 것을 보니 충분히 만취한 듯했다. 그런데 얼굴 성형도 아니고 발을 성형하라니…….
왠지 특이한 사람이 딱 한 명 떠올랐다. 발 페티쉬 곽일영.
“그 혹시…… 설마 싶은데 상대가, 곽…… 대리님?”
설마 하는 내 말에 김요한이 씁쓸한 얼굴로 웃었다. 방실방실 웃으며 ‘너 발 못생겨서 싫어.’라고 했을 곽일영이 눈에 선했다.
곽일영이 내 발을 좋아하는 걸 알면 김요한이 날 싫어하게 되겠지. 되도록 김요한과 곽일영이 있는 자리는 피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차라리 몰랐으면 마음 편히 김요한을 볼 수 있었을 텐데, 게이 바를 찾은 게 적잖이 후회됐다. 같은 성향의 사람이라도 일이 엮이면 모르는 것만 못하다. 그래서 다들 공과 사를 구분하는 것이다.
이게 다 진여원 때문이다. 진여원만 아니었으면 나올 일도 없었고, 이곳을 찾지도 않았다.
라라라라 라라라라 날 좋아한다고.
중독성 짙은 노래가 좀 전부터 귓가를 맴돌았다. 미령에게 시끄러운 클럽 노래로 선곡을 부탁했다. 바닥이 심장 박동처럼 쿵쿵쿵 울리기 시작했다.
“근데 넌 왜 이렇게 구리게 하고 왔어? 오늘 금요일이라 물도 좋은데.”
미령이 투덜거렸다.
“어, 그 물 내가 흐리려고.”
“저기 엘리트 회사원 하나 있는데 연결시켜 줄까? 되게 신사적이고 좋은 사람이야.”
“유부남이겠지만. 그렇지?”
“요새 유부남이 별건가. 지들도 놀려고 나오는 건데 좀 어울리면 어때서.”
“미령아, 그 유명한 말 있지 않냐. 내 꽃밭 가꾸자고 남의 꽃밭 망치긴 싫다고.”
“여전히 드라마에 빠져사는구만.”
미령과 대화하는 동안 김요한의 옆으로 반반한 남자들이 오갔다. 김요한은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을 뿐이었다. 아마도 차인 게 오늘이거나 요 근래 일인 듯했다.
나는 김요한이 편하게 넋두리를 할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줄 생각이었다.
“요한 씨, 저는 저쪽에 아는 분 있어서 자리 좀 이동할게요. 전 그럼.”
빈말 삼아 자리를 회피하려는 때였다.
“저 새낀 여기 왜 또 왔대.”
갑자기 미령이 바텐더답지 않은 태도를 보였다. 인상을 험상궂게 구기고는 가게 입구를 바라보고 있었다. 가게 진상 손님인가 싶어 돌아봤다. 아니, 저건 내 진상이었다.
김대영이 주머니에 한 손을 꽂고 어슬렁어슬렁 걸어왔다. 한 때는 허세 가득한 저 행동도 멋있다고 생각했던 과거의 나를 매우 쳐 주고 싶었다.
생긴 거 하나는 멀쩡해서 여기저기서 바텀이 꼬이는 바람에 가슴앓이했던 것도 다 옛날 일이다. 김대영이 나를 보더니 이산가족 상봉하듯 반갑게 다가왔다.
“석연아, 형 보고 싶어서 온 거야?”
김요한이 김대영의 광택 나는 검정 구두를 보더니 한마디를 내뱉었다.
“최악.”
동감이었다. 역시 진여원이 계약을 맺은 공장장답게 독설 수위도 만만치 않았다.
자리를 뜨려던 마음을 고쳐먹고 양주가 진열된 정면만 쳐다봤다. 김대영이 내 옆에 와서 앉더니 혼자 주절주절 떠들어 댔다.
잘 지냈냐느니, 보고 싶지 않았냐느니, 역시 오늘 오면 널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며 실없는 소리나 늘어놨다. 남은 것만 비우고 집으로 얼른 가야겠다는 생각에 맥주만 벌컥벌컥 들이켰다.
김대영이 갑자기 내 손목을 콱 쥐었다. 눈동자만 돌려 힐끔 쳐다봐 주고는 거칠게 빼냈다.
“파트너 찾으러 왔으면 다른 사람 알아봐.”
“왜이래, 석연이 아직도 삐친 거야? 잘난 얼굴 다 망가지겠다, 인상 좀 그만 써.”
언제는 계속 보니 내 얼굴도 지겹다던 놈이 아니었나. 내 자취방에 다른 남자 데려와 자기까지 한 놈이었다.
“형, 일단 사과 먼저 한다.”
김대영이 내 말에 그럼 그렇지 하는 얼굴을 했다.
“여기 잘 봐봐.”
스파이크의 발바닥을 번쩍 들어서 보여 주었다. 그대로 김대영의 무릎을 차자 놈이 악 소리를 지르면서 내 신발을 쥐었다. 그러다 손바닥에 스파이크 심이 찔렸는지 또 한 번 소리를 내질렀다.
“자꾸 나한테 접근하면 다음엔 얼굴에다 찍어 줄줄 알아. 난 너한테 관심 좁쌀만큼도 없고, 네가 이혼을 하든 한강에서 스트립쇼를 하든 신경도 안 쓰여. 여기 네가 좋아하는 구멍들 많으니까 골라 처 드세요. 네 친구 새끼한테도 전해, 입 제대로 놀리라고.”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알아들은 것 같았다. 김대영의 얼굴이 사색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속은 시원하지 않았다. 물론 씁쓸할 것도 없었다. 진짜 이놈이 나한테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됐구나 하는 생각만 들뿐이었다.
차라리 얼굴만이면 진여원이 낫지. 그래 비교도 안 된다. 안 되긴 뭘 안 돼. 이성을 거치지 못하고 나온 생각에 혀를 내둘렀다.
“요한 씨, 저 먼저 가 볼게요. 죄송합니다.”
“예에, 그러세요. 조만간 또 봬요.”
당황한 어투로 대답한 김요한이 내 신발을 유심히 내려다봤다. 오, 역시 스파이크였나 하는 것 같았다. 나보다 더 속이 시원해 보이는 미령에게 맥주 값을 치르고 바를 빠져나왔다.
“석연아, 잠깐만!”
쫓아 나온 김대영이 나를 뒤에서부터 부둥켜안았다. 목덜미에 소름이 오소소 올라왔다. 향수 냄새마저 역했다. 그대로 구두를 찍어 주자 김대영이 한 발로 뛰어가며 나를 붙잡았다.
“너 진짜 이거 전치 2주 나온다?”
“신고해.”
시큰둥하게 내뱉었다. 김대영이 입만 벌리고 내 말을 받아치지 못했다.
말은 책이 아니라 진여원을 보고 배워야겠다.
“대체 왜 이러는데? 나 진짜 싫어졌어? 네가 얼마나 나 좋아했었는데, 기억해 봐.”
“네 눈엔 내가 아직도 철없는 애들로 보이냐? 아직도 대학생 때 박석연으로 생각하냐고, 새끼야. 회사도 너보다 더 좋은데 들어갔고 너보다 잘 나가, 엉? 내가 뭐가 아쉬워서 널 또 만나.”
“어차피 회사 잘렸잖아.”
들끓을 것도 없었지만, 머리가 싸하게 식었다.
“잘렸는지 내가 그만둔 건지 네가 어떻게 알아.”
김대영이 연방 나불대던 입을 꾹 다물었다.
“씨발, 너였냐? 회사로 팩스 보낸 게?”
김대영의 멱살을 잡았다. 놈이 애써 웃으면서 내 손을 떼어 냈다.
“석연이 너, 말 너무 막 한다.”
“너야말로 대체 왜 이래.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나한테 이러냐.”
“너도 마찬가지잖아. 네가 영혜한테 찔러서 나 위자료 다 털렸구만.”
나도 모르는 진흙탕 싸움을 너랑 하고 있었나 보다.
“난 네 부인 전화번호도 모르는데 찌르긴 뭘 찔러. 네가 어디서 딴 놈하고 놀아나다가 걸렸겠지, 안 그래?”
김대영이 황당함을 넘어 기가 차다는 내 표정을 보더니 아차 싶은 얼굴을 했다. 나 말고도 걸리는 구석이 있는 듯했다.
정말 허탈하기 그지없었다. 김대영이 범인일 줄이야……. 놈은 잃을 게 많은 유부남이기에 용의 선상에 둘 생각조차 하지 않았었다. 내가 이딴 쓰레기를 무슨 생각으로 좋아했던 걸까. 새삼 지난 삶에 회의를 느꼈다.
“석연아. 내가 오해했다면 미안한데…….”
“네가 진짜 나 좋아한다면 그딴 짓 못하지. 괜히 너 좋다는 놈이 변하니 안달 나냐? 이제 보니 대학 때 소문도 나한테 다 뒤집어씌우려고 네가 낸 거 아니야? 김대영 씨가 워낙 일반인 코스프레를 잘하셨어야지.”
“그건……. 나 아니야.”
김대영이 석연아- 나를 어르듯 다정하게 불렀다. 그러더니 내 팔을 잡아서 벽으로 밀었다.
박력 있게 주둥이를 박으려 하는 걸 주먹으로 배를 내질렀다. 김대영이 컥! 하고 기침을 뱉어 냈다. 힘으로 어찌해 보려는 걸 똑같이 힘으로 되갚아 줬더니 놈이 더 흥분해 난리였다.
“가만히 좀 있어. 너 강간처럼 해 주는 거 좋아했잖아.”
“미쳤냐? 네 대가리는 너 좋을 대로만 해석하는 필터라도 달렸어?”
눈앞에서 가운뎃손가락을 흔들어 주고는 따닥따닥 번화한 거리를 걸어 나갔다. 또 따라오면 이번에는 경찰서라도 갈 심산이었다.
사람 보는 눈알이 해태라 김대영에 버금가는 진상을 만나 또 사랑에 빠질까 두려워 마음 편히 누굴 만나지도 못했다.
날 돼지라고 놀리던 고교 때의 놈이나, 대학 와서 만난 김대영이나 하나같이 문제가 있었다. 그 탓에 여태 연애를 제대로 해본 적도 없었다.
편의점에서 산 술을 꿀꺽꿀꺽 마시면서 거리를 걸었다. 마시면 마실수록 손에 든 비닐봉지가 가벼워졌다. 안주로 산 오징어 버터구이도 질겅질겅 씹었다.
금요일 밤이라 그런지 혼자 술을 마시며 걷는 나를 이상하게 보는 사람들도 없었다. 잔뜩 내려간 기분과는 다르게 이태원의 밤은 활기차기만 했다.
나도 아무 근심 걱정 없이 여기서 놀던 때가 있었다.
이곳 사람들이 다 내 친구인 것 같고, 하나같이 나와 마음이 맞는 동료일 거라 생각했었다. 그렇게 만나서 놀고 하룻밤 자고 나면 연락이 안 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어느 정도 서로 마음을 주고 만났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유부남이었던 놈들도 수두룩했다.
게이 바를 찾는 이들의 절반은 유희만을 즐겼고, 또 절반은 피에로 같았다. 피에로는 유희만을 찾는 사람들 틈에서 즐거워하지만 속으로는 울고 있었다. 나는 그 어느 쪽도 아니었다.
사전적 연인, 애인의 의미를 포기하니 사랑에 대한 기대치도 저절로 낮아졌다.
“아……. 취한다.”
병나발을 불며 혼잣말을 지껄였다. 이렇게 우울한 건 오랜만이었다. 두 번째 편의점에 들러 또 술을 사 들었다.
엄마는 술 한 잔 못하고, 아버지는 술을 좋아해도 제어력이 뛰어난 편이었다. 난 술을 좋아하기만 했지 제어할 줄은 몰랐다. 그런 부모님 사이에서 태어난 게 나라니……. 스스로도 신기할 지경이었다.
겉으로는 아닌 척해도 부모님에게는 부채 같은 죄책감이 늘 따라다녔다. 두 분에게서 나 같은 놈이 태어났으니, 혹시 산부인과에서 남의 자식과 바뀐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을 할 정도로 자존감이 박살이나 버렸다.
문득 오늘 본 <엘리스리스> 마지막 회가 떠올랐다. 20대 초반이었다면 가슴 절절히 그녀를 이해했을 테지만, 지금은 단순히 슬프기만 할 뿐이었다.
집까지 걷는 것을 포기하고 택시에 올랐다. 그래도 많이 걸어왔기에 택시비를 꽤 절약할 수 있었다.
방으로 돌아가지 않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꼭대기 층에서 내렸다. 옥상과 바로 연결된 문을 열어 남은 맥주와 함께 난간에 팔을 걸쳤다.
‘난 널 믿기는 해도 그 일은 좀 생각해 봤으면 한다. 남한테 관심도 없는 놈인데, 진여원이 그럴 놈이냐.’
재운 선배가 했던 말을 되새겨 봤다. 그리고 김대영이 자긴 아니라고 했지만, 놈은 원래 거짓말을 잘했다. 이제 와서는 진실이 어떤 건지도 잘 모르겠다.
아무렴 뭐가 중요한가.
지금 잘 살고 있고 가끔씩 이렇듯 우울해지지만, 뛰어내리려 옥상을 찾는 어리석음도 없는데.
나는 새 맥주를 꺼내 병을 돌려 땄다. 병따개가 필요 없는 맥주는 나 같은 사람들을 위한 맥주였다. 꼴깍꼴깍 맥주를 넘겨 가며 휴대폰을 꺼냈다.
잠잠한 휴대폰을 깨워 수신 상단에 있는 전화번호를 터치했다. 벌써 스무 병 가까이 비워냈기에 술기운이 완연했다.
난간에 등을 기대고 주르륵 앉았다. 단조로운 신호음이 계속 흘렀고, 상대방은 자고 있는지 받지 않았다.
오기가 생겨 다시 한번 전화를 걸었다.
[술주정이면 내일 해.]
다짜고짜 싸늘한 말투가 튀어나왔다. 어디서 날 보고 있는 거 아니야? 주변을 느릿하게 두리번두리번거렸다.
“궁금한 게 있는데요, 사장님.”
혀가 적당히 꼬여 있었다. 입에서도 술 냄새가 거나하게 나는 것 같았다.
[…….]
“왜 죽고 못 산다던 연인하고 결혼 안 하고 다른 사람이랑 했습니까?”
[내 호적이라도 떼어 봤어?]
대학 때 여친의 이름은 정확히 생각나지 않았지만, 달래라는 이름은 확실히 아니었다. 그런 촌스러운 이름이었으면 기억했을 것이다.
“팻말에 적혀 있더라구요. 달래, 달래……. 달래 먹고 맴맴. 고추 먹고 맴맴인가. 좀 불러 주실래요?”
포카리스웨트 불렀던 것처럼 말이야.
[이거 기억하면 내일 이불 차고 싶을 텐데, 필름 끊기길 기도해.]
“어차피 끊길 것 같아서 전화한 거거든요. 진짜 궁금하단 말이죠. 이성애자들도 사랑 별거 없나……. 그쪽들도 유부남인 거 숨기고 클럽 가고 룸살롱 가고 그래요? 게이 바에 결혼반지 빼고 오는 진상들처럼?”
[확률적으로 이성애자들이 많으니 진상도 더 많겠지.]
세상은 넓고 병신은 많다-의 변형판인가.
“아직 대답 안 하셨는데요. 왜 헤어졌어요? 대학 졸업하고 결혼한다고 그랬던 거 같은데.”
[사랑은 일방적인 손해거든.]
“어렵네요.”
내가 술 취한 사람한테 별소리를 다 한다는 말을 들은 것 같았지만 정확하진 않았다.
[내일 되면 못생긴 얼굴 더 웃기게 붓겠어.]
다만 저 말 하나는 아주 정확하게 들렸다.
“못생긴 감이나 드세요. 저 자렵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진여원에게서 헛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전화를 끊고 집으로 내려왔다.
다음 날 지끈거리는 숙취를 가지고 일어나자마자 머리를 쥐어뜯은 건 당연했다. 진여원과 수신도 아닌 발신으로 5분이나 통화를 했고, 내용도 기억나지 않았기에…….
오전 일찍 도착해 있던 문자를 확인하고 나서야 큰 실수를 했구나 지레짐작했다.
[일요일 오후 1시까지 우리 집 방문.]
방문이란 두 글자가 선생님이 성적표를 들고 우리 집을 방문했을 때보다 더 묵직하게 다가왔다.
***
나는 진여원의 집근처에 다다르기 전부터 안절부절못했다. 거리상으로는 그리 멀지 않은데 차편이 복잡해서 버스를 두 번이나 갈아타야 했다.
금요일 밤에 신나게 달렸던 내리막길이 오늘은 원망스러웠다. 발을 천천히 떼려 해도 관성에 의해 평지보다 다리가 더 빠르게 움직였다.
혹시 스파이크로 차고 도망쳤던 것 때문에 한 소리 하려고 부른 건가? 아니면 전화에다 대고 내가 욕이라도 퍼부었나. 그것도 아니면…….
도무지 떠오르는 게 없었다. 약속 시간인 1시가 조금 넘어서야 그의 대문 앞에 설 수 있었다.
흰 페인트가 칠해진 창살 무늬 철 대문은 흠집 하나 없이 깨끗했다. 내가 발로 찼던 부분을 꼼꼼히 살펴보고 벨을 누르려 할 때였다.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진여원이 정원에 나와 나를 보고 있었다.
“조금…… 늦었습니다.”
굽이 거의 없는 청색 운동화를 신은 진여원이 성큼성큼 다가와 문을 열었다.
“저……. 사장님.”
나는 앞서 가는 진여원을 따라갔다. 밖에서 보는 것보다 더 커다란 정원 크기에 놀란 것도 잠시, 그가 내게 말을 건넸다.
“발로 찼어, 안 찼어.”
“예?”
“이불.”
“그게……. 다른 걸 차긴 했는데…….”
내가 문을 돌아보자 진여원이 픽 웃었다. 그가 대문 좌측에 위치한 텃밭에 우뚝 섰다.
거기에는 상추와 익지 않은 조그만 토마토가 듬성듬성 매달려 있었다. 샐러드에 자주 올라오는 잎이 넓적한 푸른 채소 같은 것도 주르륵 자라 있었다.
“거기서 나와.”
진여원이 그에게서 몇 발자국 떨어진 내게 비키라 지시했다. 옆으로 옮겨 가자 그가 다시 말했다.
“거기 말고.”
대체 어디로 나오라는 건데? 어쨌든 더 뒤로 이동했다. 그와 동시였다. 잔디가 깔린 바닥에서 스프링클러가 올라오더니 거센 물줄기를 쏟아 내기 시작했다.
“으앗!”
한 방향도 아니고 360도로 뿌려 대는 통에 바지가 흠뻑 젖어 버렸다. 진여원이 바닥에 내려놓은 바구니에서 수건 하나를 내게 던졌다.
나는 스프링클러가 닿지 않는 텃밭까지 한달음에 가서 젖은 옷을 닦아 내야했다. 그동안 진여원이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날씨도 더운 편이라 흰 티셔츠에 청바지만 덜렁 걸치고 온 건데 이 차림에 불만이 있는 듯했다. 그런데 진여원도 흙이 군데군데 묻은 청바지에 흰 티셔츠 차림이여서 나와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딱이네.”
그렇게 말하며 진여원이 내게 수건이 아닌 다른 물건을 건넸다. 나는 이걸로 뭘 어쩌냐며 그에게 받은 모종삽을 위로 들어 보였다.
“파.”
진여원이 딱 한 마디를 내뱉었다.
“뭘요?”
“눈앞에 텃밭.”
“제가 왜요.”
“새로 청경채 심을 거니까.”
“그러니까 제가 왜.”
“술 마시는 것보단 생산적이지.”
내가 술 먹고 너한테 전화한 건 알겠는데, 무슨 말을 한지는 모르겠다고 솔직히 말하면 오히려 진여원은 없는 실수도 지어낼 것 같았다.
나는 짐짓 다 기억하는 척 모종삽으로 촘촘하지 못한 텃밭을 푹푹 쑤셨다.
“꿈이 농부신가 봅니다.”
진여원은 은연중에 찔러보는 내 말을 무시하고 청경채 씨앗을 내가 파 놓은 구덩이에 뿌렸다.
모종삽은 내게 주고 자기는 편히 서서 씨앗이나 뿌리는 게 여간 거슬리는 게 아니었다. 나는 회사 사원이지 진여원의 몸종은 아니다.
“이런 건 부인하고 오순도순하시죠. 전 안 하렵니다.”
허리를 일으키며 흙을 뒤집던 모종삽까지 빼냈다.
“박석연 씨, 내 호적 좀 그만 더럽히지?”
어째 호적이란 말을 두 번이나 들은 것 같았다.
다음에 술 먹고 어디론가 전화할 때는 반드시 녹음 버튼을 누르자고 다짐했다. 진여원이 행여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말을 꺼낼까 싶어 재빨리 말을 돌렸다. 물론 모종삽으로 다시 밭을 파는 일도 잊지 않았다.
“근데 저기 저 큰 나무는 뭡니까?”
정원 끄트머리에 커다랗게 심긴 나무를 가리켰다. 별 생각이 없었는데 막상 묻고 나니 나도 정체가 궁금해졌다.
“감나무.”
“저기서 열리는 감 드시면 되겠네요.”
“우리 집 감은 전체적으로 예쁜 편이거든.”
“어차피 입으로 들어가는데 예쁜 게 무슨 상관입니까.”
“나보고 못 생긴 감 먹으라며.”
제가 언제요? 질문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진여원이 내 시선을 무시하고 흰색 물뿌리개로 청경채를 심은 텃밭에 물을 주었다.
밑에서 그를 올려다봤는데, 집중하고 있는 옆모습에 홀릴 뻔했다. 생긴 거 하나만 보고 남자를 만나 호된 꼴 다 봤으면서 넌 여전히 얼굴이나 밝히냐……. 스스로에게 질타를 퍼부었다. 나는 땀을 털어 내듯 머리를 흔들어 다시 흙을 푹푹 쑤셨다.
주르륵, 이마를 타고 흐르는 게 순간 땀인 줄 알았는데 물이었다. 진여원이 물뿌리개를 내 머리 위로 가져와 줄줄 흘리고 있는 중이었다.
“으악! 뭐 하십니까!”
번쩍 몸을 일으켰다. 기분 나쁜 것과는 달리 시원하게 젖은 머리를 털어 냈다.
“아직 크려면 먼 것 같아서, 잘 자라라고.”
장난을 친 진여원은 성의 없는 말투를 툭 던졌다. 그의 입꼬리에 매달린 웃음이 여느 때 보다도 더 묘하게 다가왔다.
뜨거운 햇볕이 정수리에 와 닿아 화끈 화끈거렸다. 이왕 시킬 거면 모자라도 주지 괜히 몸만 뜨거워지네.
나는 진여원을 향해 짐짓 화난 어투를 자아냈다.
“발 사이즈와 키가 비례하는 건 알고 계시죠? 그런 점에서 전 충분히 자랐습니다.”
발 사이즈에 비해 키는 큰 편이었다. 진여원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은 거지 평균으로는 보통이었고.
허리를 더욱 꼿꼿이 세워 머리를 탈탈 털었다. 일부러 진여원 쪽으로 물을 튕겼다. 진여원은 뺨에 묻은 물기를 쓱 닦더니 내 키와 제 키를 가늠하며 지껄였다.
“낮아서 따먹기는 좋겠어.”
“잘 아시네……예?”
모종삽을 위협적으로 들이밀었다.
“토마토 말이야. 따기나 해.”
대나무 심이 지탱하고 있는 방울토마토 나무가 허벅지께에서 흔들거렸다.
내가 진여원보다 작으니 토마토를 따기는 더 수월하겠다는 소리겠다. 일일이 발끈하지 말자며 부글부글한 속을 다독였다.
푸르스름한 토마토를 톡톡 따서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러다 다 익지도 않은 열매를 따라고 지시한 게 의아해졌다.
“근데 익지도 않은 걸 왜 땁니까?”
성격이 모나서 텃밭 채소한테 해코지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사실 그런 것 치고 녀석들 상태는 탱글탱글했다.
“나무가 자라야 하니까.”
“열매가 있으면 나무가 못 자라요?”
손을 깊숙이 넣어 저 안쪽의 토마토까지 땄다. 진여원이 내 손이 들어간 부분까지 마찬가지로 제 손을 넣어 토마토를 톡 따 왔다.
“열매가 양분을 빼앗아가잖아.”
그가 손안에 그러쥔 토마토 열매를 내게 던지며 말했다. 얼굴 어디에 맞았으면 내가 딴 거 다 던져 주려고 했지만, 가볍게 던졌기에 한 번에 받아 낼 수 있었다.
바닥에 쌓인 열매가 세 주먹은 충분히 나올 듯했다. 진여원은 수건이 든 바구니에서 투명한 통을 하나 꺼냈다. 그리고 익지 않은 토마토를 통에 담아 다시 바구니에 투척했다.
“비료로 안 줘요?”
“박석연 씨는 궁금한 것도 많아.”
“제가 괜히 비글이겠습니까.”
진여원이 의외로 수긍하는 모양새였다. 그건 또 그것대로 기분은 썩 좋지 않았다.
“토마토 장과용.”
장과라면 장아찌였다. 엄마가 자주 보내 주는 음식 중 하나가 매실, 머위 장과였다. 고인 침을 꿀꺽 삼켰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식탐은 어디 가는 법이 없었다.
진여원이 2층 돌담으로 경계가 둘러진 텃밭에 앉았다. 턱이 낮아서인지 긴 다리가 길게 쭉 뻗어 있었다.
모종삽으로 씨를 뿌린 곳을 토닥토닥거린 후 나도 거리를 두고 옆에 앉았다. 진여원이 차가운 캔 하나를 휙 던졌다. 마침 목이 마른 터라 바로 캔 뚜껑을 땄다.
음료를 마시며 탁 트인 정원을 구경했다.
조경에도 관심이 있는지 잔디의 높이도 일정했고, 여러 개의 반송 그루가 주택으로 들어가는 길을 안내해주듯 나란히 서 있었다.
텃밭 반대편에는 울퉁불퉁한 현무암으로 연출한 동그란 연못이 보였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연못 계곡에서 물이 졸졸졸 흘러내렸다. 이제 보니 물레방아도 연방 돌아가는 중이었다.
그 옆에 놓인 핑크색 바구니 자전거가 의외로 정원의 운치를 더했다. 이런데서 살면 하루에 찌든 일과도 씻기듯 사라질 것 같았다.
이리저리 정원을 구경하다가 자연스레 진여원을 바라봤다. 그는 캔을 떨어뜨릴 듯 말 듯 손끝에 걸쳐 놓기만 한 상태였다. 음료를 다시 그러쥐어 마시려던 그가 문득 나를 바라봤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너무 대놓고 쳐다봤나 싶었다. 나는 일부러 물기가 마르지 않은 청바지로 시선을 돌려 툭툭 털어 냈다.
내가 어제 실수를 저질렀다면 한마디쯤은 할 법했는데, 지금껏 하지 않는 걸 보니 방문하라고 한 이유가 그때문은 아닌 듯했다.
“저 오늘 왜 부르셨어요?”
“땅 잘 팔 것 같아서.”
망설임 없이 나온 대답과 함께 그가 캔을 구겨서 바닥에 내려놓았다.
땅……. 잘 파지. 근데 그건 옛날 얘기였다. 오래전, 운 나쁘게도 김대영에게 매달리다 찔찔 짜는 모습을 진여원에게 보인 적이 있었다.
그때 분명 나보고 환경 보호 단체 회원이냐고 했었지. 그 뜻을 이제야 알았다. 김대영 같은 쓰레기를 수거하는 나를 은연중에 비꼰 거였다. 그러니 지금 진여원이 말한 땅도 텃밭을 말한 건 아닐 것이다.
“그래도 걱정은 마시죠. 사장님 생각하면서 땅은 안 팝니다.”
“오늘은 왜 팠는데.”
“대문 발로 찬 게, 죄송……해서요.”
민망함에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진독사, 마이페이스 진 싸가지가 목만 한번 울려 웃었다. 그가 바지를 털고 일어나더니 반송이 안내하는 길을 따라 주택으로 걸어 들어갔다. 한 손에 든 바구니까지 달랑거렸다.
설마 일 끝났다고 들어간 건가? 그럴 리가, 라고 생각하면서도 이미 금요일에 전적이 있었다. 나를 대문 앞에 내려 두고 들어가지 않았던가.
나갈 때 대문이나 열고 가자는 소심한 심보를 가지고 나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별일은 아니었지만 나름 기분 전환이 되는 삽질이었다. 부모님이 농촌으로 내려간 것도 적잖이 이해됐다.
자식 놈이 손주를 못 보여줄 테니, 열매라도 수확해 마음을 달래는 건지도 모르겠다. 다시금 주택에서 나온 진여원은 바구니가 아닌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있었다.
“일당 안 받아?”
“주실 겁니까?”
“땅 열심히 팠으니.”
저게 진짜……. 진여원의 뒤통수를 눈에 힘을 팍 주고 쏘아보는 동안 그는 상추와 고수, 오이까지 수북이 따서 비닐봉지에 쑤셔 담았다.
“전 돈이 좋습니다.”
진여원이 뒷주머니에서 지폐 한 장을 꺼내 비닐봉지에 같이 넣었다. 세종대왕도 아니고 퇴계 이황이었다. 나는 그가 내민 비닐봉지를 건네받음과 동시에 물었다.
“제 품삯이 천 원밖에 안 됩니까?”
“4월 초부터 키운 거 박석연 씨가 하루 만에 가져가는 꼴인데, 내 노동비는 얼마 줄 생각이야.”
“계산법이 특이하시네요. 설마 월급도 그렇게 주시는 건 아니죠?”
“글쎄.”
할 거 다 했으니 어서 집에나 가라는 식으로 내 말을 무시했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나도 미련 없이 등을 돌려 비닐을 흔들며 걸어갔다. 대문까지 성큼성큼 가서 문을 쾅 닫으려는데 진여원이 팔짱을 끼고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손에 힘을 빼고 적당한 세기로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대문도 티타늄이라 백 단위로 물어 줘야 할지도 몰랐다.
서로가 보이는 낮은 펜스 때문에 나와서도 구시렁거리지 못했다. 펜스 라인을 따라 걸어 나가며 비닐봉지 속의 오이를 꺼내 와작 씹었다. 수분이 가득한 오이가 입 안에서 팍 터지며 상쾌한 향을 자아냈다.
펜스에 팔을 걸친 진여원이 말했다.
“박석연 씨.”
그가 펜스를 톡톡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달래가 없어서 아쉬워?”
진여원이 가리키는 것은 내가 들고 있는 봉지였다.
나는 뭐라는 거야, 라는 눈으로 쳐다봐 주었다.
“저도 달래가 봄에만 자란다는 것쯤은 압니다.”
“똑똑하네. 난 몰랐는데.”
진여원이 제 할 말만 하고 펜스를 등졌다. 그의 흰 셔츠가 모양 좋은 넓은 등에 달라붙어 있었다. 감탄하고 있던 걸 들키기가 싫어 발을 빨리 놀렸다. 남은 오이를 와작와작 씹으며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그 순간이었다.
‘달래, 달래……. 달래 먹고 맴맴. 고추 먹고 맴맴인가. 좀 불러 주실래요?’
‘진짜 궁금하단 말이죠. 이성애자들도 사랑 별거 없나…….’
들고 있던 오이를 툭 떨어뜨렸다.
내 목소리가 듬성듬성 머릿속에서 자동 재생이 됐다. 또 다른 헛소리를 지껄이진 않았나 싶어 머리를 싸맸다. 그러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더 생각나는 건 없었다.
미쳤다, 박석연.
하필 맨정신도 아니고 술 먹고 진여원한테 전화를 해……. 게다가 사랑 타령까지…….
흐느적거리는 팔로 떨어진 오이를 주워 봉지에 담았다. 누워 있었으면 이불을 발로 찰 만큼의 창피함이 몰려왔다.
나는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고 나서야 새 오이를 꺼내 씹었다. 시원한 오이 과즙이라도 섭취하지 않으면 속이 탈 것 같았다.
차라리 진짜 비글이라면 후회는 안 하지. 고뇌하는 인간인지라 후회가 온몸에 덕지덕지 달라붙었다. 정류장에 나와 같이 서 있던 할머니 한 분이 내 비닐봉지와 먹고 있는 오이에 관심을 보였다.
할머니에게 오이 하나를 건네주니 어디서 샀냐며 아주 실하다는 인사를 건넸다. 제가 직접 키운 거예요. 거짓말을 하며 생각을 분산시켰다.
문득 정류장 왼쪽과 오른쪽에 세로로 붙어 있는 광고가 눈에 들어왔다.
한 손에 풍선을 들고 마치 날아갈 듯한 역동적인 모습의 모델을 담은 흑백 사진이었다. 여자 모델이 신고 있는 구두만 푸른색으로 빛났다. 반대편에는 남자모델이 뛰어오는 여자를 안을 듯한 자세로 두 팔을 벌리고 있었다.
둘 다 모두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탑 연예인이었다. 온통 흑백에 구두만 색을 입힌 스타일은 마치 우리 건물 로비 정면에 있는 사진과 흡사했다. 고정된 사진 위로 움직이는 글씨가 깜빡였다.
[YOUM. 지금 곧 당신을 찾아갑니다.]
***
술과 주말농장 체험에 의해 주말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진여원이 준 상추와 고수는 일요일 저녁에 혼자 삼겹살을 싸 먹고도 절반이나 남아 버렸다.
남은 건 투명 비닐봉지에 넣어 냉장고 신선실에 박아 두었다. 직접 키운 것이니만큼 엄청 싱싱하기도 했고, 인간은 미워도 먹을 건 예외였으니까.
삼겹살에 초고추장을 찍어 아삭아삭 씹히는 상추를 다시금 떠올리며 모델 사진을 유심히 살펴봤다.
여태 다섯 벌 정도는 어울릴 만한 구두를 별 고생 없이 그려 낼 수 있었는데, 나머지는 구두의 종류만 가늠했을 뿐, 디자인은 백지상태였다.
이럴 때는 혼자 끙끙대는 것보다 시장조사를 나가거나 주변 사람의 도움을 받는 게 더 현명했다. 물론 디자인 의견 교류는 윰이라서 가능한 편이었다. 체일 슈즈였으면 하이에나 같은 디자인 도둑놈들 때문에 입도 뻥긋 못했겠지.
그런데 좀 전부터 곽일영이 나를 쳐다보고 휙 고개를 돌리는 것을 반복하며 무언가를 주저주저하고 있었다. 옆자리라서 그의 움직임이 더 여실하게 다가왔다.
“곽 대리님.”
“어?! 왜!”
곽일영이 내 부름에 화들짝 놀랐다.
“왜 그러세요?”
“아니……. 아무것도 아닌데……가 아니라, 있잖아.”
어울리지 않게 부끄러워하는 모습에 오늘 날짜를 확인했다.
3일과 25일의 중간인데 아직 곽일영의 우울증이 도지려면 멀었다. 곽일영이 책상 밑에서 짠~ 하고 슬리퍼를 꺼내 보여 주었다.
중고등학교 때 자주 신었던 검정 흰색의 조합이 익숙한 삼선 슬리퍼였다.
“이게 뭐예요?”
“조금 있음 더워지잖아. 물론 지금도 덥긴 하지만. 석연 씨 구두나 운동화보다 슬리퍼 신으면 시원할 거야.”
그러면서 하아, 하아 거친 숨을 내뱉었다.
“잘 받을게요.”
삼선 슬리퍼에서 고무 냄새가 훅 올라왔다. 쳐다보는 시선이 여간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라 신고 온 운동화를 벗어 슬리퍼에 발을 넣었다.
“최고야!”
내 발이 못생겼으면 김요한처럼 내쳐졌으려나.
“곽 대리님 제 발이 혐오스럽게 생겼으면 어쩔 뻔했어요.”
“그럼 여름에도 부츠 신고 다니면 되지, 왜?”
김요한에게 애도를 표했다.
“둘이 노는 건 좋은데 콜라보 기한 일주일 남은 것도 기억하죠?”
오전부터 진여원에게 한바탕 깨지고 온 이재화가 평소답지 않게 날카로웠다.
“물론입니다.”
곽일영은 고개만 힘차게 끄덕끄덕했다.
인간적으로 말해서 보름 남짓하게 시간을 주고 열 켤레를 내라는 건 사장의 횡포나 다름없었다. 콜라보레이션만 있는 게 아니라 가을, 겨울 신상과 함께 여름 제품도 쏟아 내야 하는데 말이다.
물론 속으로만 불만을 쏟아 낼 뿐 현실은 봉급쟁이 숙명에 순응하는 수밖에 없었다. 점심도 나가 먹을 시간이 부족해 중국집 배달음식으로 때워야 했다. 탕수육도 시켜 줬으면 했지만 빨리 먹어야 했기에 다음 기회로 미뤘다.
“곽 대리님, 레이스 스커트에는 샌들이 좋겠죠? 힐도 괜찮을 것 같긴 한데 옷도 신발도 너무 화려하면 안 될 것 같아서요.”
“음…….”
곽일영이 턱을 괴고 목을 울렸다.
“난 운동화가 좋을 것 같은데? 찍찍이 운동화.”
“유아용 찍찍이요?”
곽일영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더니 쓱쓱 메모장에 무언가를 그려 보여 줬다.
로봇 그림이 그려진 초등학생용 운동화가 아닌, 앞코는 유아틱하게 둥글지만 발등을 감싼 라인이 허리선처럼 늘씬하게 빠진 한 줄 찍찍이였다.
“요즘 애들 스커트에 헐렁한 티셔츠도 많이 입고 다니잖아. 편해서 선호하는 걸 테니 구두보다는 이쪽이 더 나을걸.”
새삼 곽일영이 대단해 보였다.
“그럼 컬러는 하나로 통일하고 신축성이 좋은 재질로 만드는 게 좋겠네요.”
이번엔 곽일영이 나를 대단하게 바라봤다.
“석연 씨 우리 오래오래 같이 일하자.”
“그럼요. 근데 대리님.”
“응, 물어봐.”
“여기 월급은 제대로 나오죠?”
오래오래 일하려면 월급이 중요했다. 사장조차도 월급 얘기에 글쎄, 라고 대답하지 않았나.
“늦은 적은 한 번도 없어. 왜?”
“그냥요.”
책상 스피커 위에 올려둔 달력을 보며 날짜를 셌다. 일주일 정도만 더 기다리면 첫 월급날이었다.
한 푼이라도 틀려 봐, 고용보험센터로 바로 직행이라고 생각한 그때였다. 사무실의 전화가 뚜르르 하고 울렸다.
“제가 받겠습니다.”
사무실로 전화를 할 사람이라고는 김요한이나 회사 내선일 가능성이 컸다.
“예, 윰 쉬즈입니다.”
[전부 대회의실로 모이라고 전해, 10분.]
목소리를 듣자마자 뚝 끊어질 거라 예상했는데 정답이었다. 나는 수화기를 꾹 비벼 눌러 주고 나서야 입을 떼었다.
“전부 대회의실로 모이라고 전해, 10분.”
내 말에 이재화와 곽일영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장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둘 다 하던 일을 멈추고 서둘러 자리를 정리했다. 말이 10분이지 진여원 성격상 30초라도 늦으면 기어 와? 하는 독설이 나올 게 뻔했다.
나도 디자인을 습작해 놓다시피 한 종이들을 한데 끌어모아 파일 꽂이에 올렸다. 곽일영이 선물해 준 삼선 슬리퍼를 벗고 구두로 갈아 신었다.
“회의 때 슬리퍼 신어도 되는데…….”
“우리끼리가 아니라 대회의실이니 다 모일 듯한데요.”
“자자, 갑시다.”
이재화가 안타까워하는 곽일영의 등을 퍽 쳤다.
이재화를 필두로 나와 곽일영이 사무실을 나왔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기에 우리 셋은 계단으로 올라갔다.
각층에 작은 회의실이 있다면 사장실이 있는 3층에는 대형 회의실이 있었다. 회사원 전부를 수용하고도 남을 만큼 큰 강당 수준이었다.
대회의실은 수영장 로커처럼 정해진 자리는 없지만 팀끼리 모여 착석하는 중이었다. 영화관 좌석 같이 계단식으로 놓인 중앙쯤에 우리 셋이 나란히 앉았다.
누가 말하지 않아도 영업부는 맨 오른쪽에, 윰 쉬즈는 우리를 기점으로 왼쪽, 윰 옴므는 거의 앞줄에 포진해 있었다.
우리 줄의 끄트머리에 앉은 허준성이 나를 대놓고 노려보는 게 느껴졌지만, 가뿐히 무시했다. 어차피 팀도 다른데 지가 노려보면 어쩔 건데. 나는 허준성을 향해 씨익 웃어 줬다. 허준성이 오버해 가며 뒷목을 붙잡았다.
가장 늦게 도착한 진여원이 대회의실 입구에서부터 터벅터벅 계단을 내려왔다. 안경을 쓴 모습에 다시금 어색함이 감돌았지만, 처음처럼 낯설지는 않았다.
안경을 쓴 진여원은 맨얼굴보다 좀 더 날카로워보였다. 게다가 평소와 다르게 쓰리 피스 검정 슈트까지 입고 있어 딱딱한 자리일 것을 예감했다.
진여원이 지나가고 곧바로 예상치 못한 사람이 뒤따랐다.
재운 선배……?
내려가던 선배가 나를 발견하더니 손을 흔들었다. 선배가 왜 여기 있는지 물어볼 새도 없었다. 상단에 선 진여원이 고정된 마이크를 떼어 냈다.
“이렇게 모인 건 오랜만이죠?”
평소보다 부드러운 어투에 놀라 이번엔 내가 뒷목을 잡을 뻔했다.
앞줄에 포진해 있던 여자들이 네, 하고 맑은 목소리를 냈다. 형식적인 인사를 더 덧붙인 진여원은 얼마 지나지 않아 본격적인 이야기를 꺼냈다.
“아시다시피 곧 유리아 백화점 전 지점에 윰 브랜드가 오픈합니다. 현재 본사 직영 매장으로는 청담동과 명동이 운영 중이죠. 옴므와 쉬즈는 같은 매장에서 판매되며, 운동화 부문은 캐주얼 윰으로 분류될 겁니다. 캐주얼은 가을경에 런칭 준비 중인 것도 다 알고 계실 테고.”
그는 어딘가를 보며 잠깐 말을 멈춘 다음, 다시 말을 이었다.
“앞으로 캐주얼 부분을 전면 담당하게 될 하재운 이사를 소개합니다.”
동시에 웅성웅성거리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모든 디자인은 진여원을 통해서 허가 사인이 떨어지는 시스템이었는데, 이제 캐주얼 부분은 이사에게 전부 위임됐다는 소리였다.
슈트를 입은 재운 선배가 진여원에게서 마이크를 건네받았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하재운이라고 합니다. 다들 선남선녀들만 모였군요. 사장님께서 얼굴 보고 뽑으신 건 아닐 테니, 여러모로 여러분께 기대가 큽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재운 선배가 사람 좋은 웃음으로 인사를 한 다음에야 멍했던 정신이 돌아왔다.
‘이번에 우리도 윰하고 같이 드라마 협찬하게 됐거든. 사실 그게 다는 아니고 다른 일로도 겸사겸사 만났지.’
전에 선술집에서 선배가 그랬었다.
‘겸사겸사’에 해당되는 게 캐주얼 윰의 이사 자리였다고? 그때만 해도 회사를 그만둔다는 소리는 없었는데…….
“석연 씨, 침 떨어지겠어.”
곽일영의 검지가 턱에 와 닿고 나서야 입을 벌리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곧바로 진여원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왔다.
“유리아 백화점 입점이 끝나고, 콜라보레이션까지 완료가 되는 주 금요일에 난지도로 캠핑을 갈 예정입니다. 물론 강제 참여는 아니니 억지로 권하지 마세요. 그리고 건의가 몇 건 들어왔는데 윰 쉬즈, 윰 옴므 팀들 잘 들어요. 오늘 모이라 지시한 이유가 이것 때문입니다.”
부드럽게 말을 잇던 진여원이 원래의 차가운 말투를 드러내 보였다.
“난 파벌 싸움 같은 거 질색입니다. 앞으로 신입사원들도 점차 증원될 텐데, 선배들로서 바른 태도를 보여 주길 바랍니다. 우두머리의 목을 자르면 그 밑의 자들이 와해되는 건 순식간이라는 거, 염두에 둬요.”
선두에 서서 파벌 싸움을 일으키면 잘라 버리겠다는 소리였다. 체일 슈즈도 파벌 싸움에 관련해 여러 강경책을 내놨지만, 현실적으로 해결된 것은 없었다. 아마도 고인 물 때문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윰은 새로 샘솟기 시작한 물이니 진여원의 바람대로 흘러갈 수도 있을 것이다.
하긴 진여원이라면 고인 물을 전부 퍼내고 제가 직접 깨끗한 물을 붓고도 남을 인간이었다.
그래서 농사를 하나. 실없는 생각을 하는데, 팀장은 3층 다른 회의실로 모이라는 말을 끝으로 그가 마이크를 내려놓았다.
나는 직원들이 거의 빠져나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뒤늦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여간 꼭 찌질한 것들이 고자질도 잘해.”
곽일영과 이재화, 그리고 나를 보면서 허준성이 비꽜다. 곽일영과 이재화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허준성을 쳐다봤다.
“고자질을 왜 합니까. 내 입으로도 충분한데.”
내가 비록 진여원에게는 밀리는 일이 많지만, 너쯤은 말로 밟아 줄 수 있거든.
곽일영이 내 소매를 꽉 쥐었다. 허준성의 모난 태도 때문에 그런가 싶었는데 아니었다.
“이봐요, 허 씨. 발이 못생겼으면 신발이라도 좀 닦아요. 누가 이거 보면 우리 상품 사고 싶겠어요?”
곽일영이 쓰레기라도 보듯 허준성의 발을 가리켰다.
구두 만드는 사람이 흠집은 물론이거니와 얼마나 막 신었는지 구두에 때깔이 하나도 없었다. 곽일영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빵집 주인 손이 더러워 봐라 누가 사 먹나.
“그만, 그만. 우린 일할 거 산더미예요. 난 회의실로 갈 테니 얼른 사무실로 가요.”
이제 보니 내가 없어도 할 말은 다들 하는 사람들 같았다.
본전도 못 건진 허준성이 어떻게든 이겨 보려고 머리를 굴리는 것 같은데, 곽일영과 이재화가 지나갈 동안에 입도 뻥긋 못했다.
저 앞에서는 재운 선배와 진여원이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재운 선배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선배가 내게 기다리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저 잠시 인사 좀 드리고 갈게요. 학교 선배라서요.”
“응, 그래요.”
“빨리 와, 슬리퍼 신어야지.”
그 타이밍에 허준성이 드디어 할 말을 생각해 냈는지 곽일영에게 쪼르륵 따라 붙었다. 여기선 대화가 들리지 않았으나 허준성의 구겨진 얼굴이 싸움의 결과를 알려 주었다. 놈이 여전히 본전도 못 건졌다는 것을.
직원이 다 빠져나간 자리에 셋만 남아 있으니 강당이 휑했다.
“선배, 진짜 회사 옮긴 거예요? 말씀 없으셨잖아요.”
“주희랑 결혼하려면 월급 한두 푼 가지고는 턱도 없어서.”
재운 선배의 여자 친구는 알음알음 어마어마한 부잣집 딸로 알려져 있었다.
“진여원이 흔든 낚싯대 그냥 물어 버렸지 뭐.”
“아쉽게도 월척은 아니었지.”
“나 정도면 옥돔 급은 되지. 안 그래 석연아?”
“이빨 뾰족한 상어한테서 몸 보존 잘하세요.”
재운 선배가 외려 자신의 이를 드러내 보이고 웃었다. 팀장 이상은 회의실로 모여야 했기에 셋 다 걸어가며 말을 나눴다.
“석연이 재롱에 진 사장은 매일이 재미있겠어.”
“디자인이 재롱만큼 못 따라와서 문제지.”
안 그래도 내는 족족 퇴짜를 맞았기에 심란한데 원인을 제공한 사람이 저렇게 말하니 입술이 저절로 씰룩댔다. 차가워 보이는 안경을 써서 그런지 오늘따라 더 밉상이었다.
“두 분 다 바쁘신데 그만 들어가 보시죠. 저도 기름 짜듯 머리를 쥐어짜 보겠습니다.”
회의실이 바로 눈앞이었다.
진여원과 재운 선배도 들어가기에 앞서 회의 내용에 대해 거론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책 안 잡히게 90도로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 사무실로 내려갔다. 잠시 잠깐 혼자 있었던 곽일영이 외로웠다면서 다짜고짜 슬리퍼를 내밀었다.
“곽 대리님.”
“응?”
대답하면서 왜 내 발을 보십니까? 라는 속마음은 말하지 않았다.
“혹시 좋아하는 사람 있어요?”
“좋아하는 부위는 있어.”
“그 좋아하는 부위가 못생긴 사람이 곽 대리님 좋아하면요? 다만 마음은 착한 사람이고요.”
곽일영이 곰곰이 생각에 잠긴 듯 눈을 위로 올렸다. 넋두리 하던 김요한을 보니 왠지 연민이 생겨서 꺼내 본 말이었다.
“석연 씨는 사람 볼 때 어디부터 봐?”
“솔직히 마음은 아니고, 일단 외모부터 보죠.”
“나는 발이야. 마음은 두 번째라구. 그런 점에서……. 석연 씨 나랑 사귈래?”
“곽 대리님은 왠지 제가 아닌 제 발이랑 사귈 것 같아서 사양하겠습니다.”
곽일영에게 성별의 유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시무룩해 있는 곽일영을 뒤로하고 강당으로 가기 전 건드렸던 작업지를 주르륵 책상에 펼쳐 놓았다.
“이건 왠지 통과할 것 같지 않아요?”
곽일영이 그린 찍찍이 신발을 가리켰다. 곽일영이 그럴 것 같다면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통과할 만한 자신이 있는 디자인은 처음부터 촉이 왔다.
나조차도 긴가민가한 것들은, 일단 보여주고 피드백을 받았다. 그래서 퇴짜를 맞으면 역시라면서 한숨을 내쉬었고, 통과하면 의외의 수확이라며 기뻐했다. 사실 디자인을 내놓는 그 순간부터는 모 아니면 도처럼 도박하는 마음이었다.
주야장천 그리다 보면 어떤 게 예쁘고, 어떤 게 이상한지 감조차도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기에 시장조사가 있는 것이다.
시간만 있었다면 직접 재료를 사다가 만들어 보고 요모조모로 수정할 시간을 가졌을 텐데, 기간이 짧다 보니 재질과 패턴 제작은 전부 공장 몫으로 돌아갔다. 그나마 김요한이 센스가 있는 편이라 다행이었다.
한두 시간이나 지났을까, 생각보다 회의가 길어진다 싶었을 때 이재화가 사무실로 돌아왔다.
단 몇 시간 만에 처져 있던 이재화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무슨 좋은 소식이라도 있나 싶었다.
“곽 대리, 내일 우리가 유리아 영등포 지점 디스플레이 최종 점검 맡았어. 여기서 완전 가까워. 나 제비뽑기 잘했지?”
이재화가 엄지를 척 들어 보였다.
“오~ 잘했어! 아니 잘했어요.”
둘이 친구다 보니 가끔 회사에서도 곽일영의 반말이 나오는 듯했다. 나만 무슨 상황인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웬 제비뽑기요?”
“유리아 지점이 총 열 개라 두세 명이 한 팀이 돼서 윰 매장을 돌아봐야 하거든요. 팀장급하고 일반 사원 이렇게요. 일종의 출장이죠.”
“아~ 그럼 저는 사무실 지킴이 하는 건가요?”
“아뇨, 석연 씨도 가야 돼요. 내일 오전에 출발하니까 9시까지 회사 주차장으로 나와요.”
“알겠습니다.”
나간 김에 시장조사도 같이 할 생각이었다. 이참에 막혀 있는 머리나 뚫렸으면 좋겠다.
“근데 저 면허 없어서 운전은 불가능한데 괜찮을까요?”
“괜찮습니다. 사장님이 하시니까.”
“예? 저희끼리 가는 게 아니었습니까?”
윰에 오고 나서부터 자다가 봉창 정말 여러 번 두드렸다.
“나는 곽 대리. 석연 씨는 사장님. 이렇게 가는데요?”
“근데 제가 왜 사장님이랑!”
회사에 입사한 이래로 가장 큰 목소리를 자아냈다. 이재화가 금세 애석한 얼굴로 돌변했다.
“디자인부 총 세 팀이 각자 방문할 지점을 뽑은 뒤에 또 제비뽑기를 했거든요. 당첨 부서에서 사장님과 동행할 사람 차출하라고 해서요. 사장님이 가시는 데가 가장 멀다 보니 복불복으로 정하신 것 같은데……. 미안합니다. 내가 제비뽑기를 못해서.”
아까는 잘했다며! 자기들 것만 잘하면 다냐.
꿀처럼 끈끈했던 부서애가 맹물처럼 변하는 순간이었다.
“사장님과 동행하는 게 불편할 수도 있겠지만 어쩔 수 없잖아요. 일단 제 운이 더 좋았던 거니까요. 이참에 시장조사 겸 많이 배우고 오세요. 디자인부에서 차출된 이유가 그 때문입니다. 석연 씨 면허만 있었어도 내가 바꿔 줬을 텐데 아쉽네요.”
절대 아쉬워 보이진 않았다.
“곽 대리님 면허 없으세요?”
“응, 없어. 나 운전 못해.”
나도 없는데 누굴 탓할까.
“그럼 전 사장님과 어디로 갑니까?”
“부산.”
이번에야말로 진짜 입에서 침이 떨어질 지경이었다.
“부산, 부산이면 밀면 먹어야 돼. 먹고 인증샷 보내 줘.”
곽일영이 사람 속은 모르고 실없는 소리나 해 댔다.
부산이면 여기서 쉬지 않고 가도 족히 다섯 시간은 걸리는 거리였다. 왕복으로는 열 시간.
그 좁은 차 안에서 진여원과 둘이 신경전을 벌일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골이 지끈지끈했다. 원수를 외나무다리에서 대체 몇 번을 만나는 건지.
면허라……. 내가 게을러서 면허를 안 딴 게 아니다. 정확히는 못 딴 거였다. 필기시험은 한 번에 합격했는데 실기시험에서 장장 5회나 떨어졌다.
두 번은 출발 신호 위반, 또 두 번은 정지선 위반, 마지막 한 번은 왜 떨어졌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운동 실력이 좋다고 해서 운전까지 잘하는 건 아니었다.
한 번에 딸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은 연기처럼 사라지고, 시험비만 다섯 번이나 날리고 나서야 마음을 접었다. 그렇게 손 놓고 있다 보니 이 나이까지 와 있었다.
곽일영은 이제 냉채족발까지 노래를 불렀다.
“곽 대리님 저랑 바꿔 가실래요?”
“싫은데.”
“가면 밀면하고 냉채족발도 드실 수 있어요.”
“너무 멀잖아. 나 차멀미 심해.”
곽일영은 일말의 고민도 없었다. 이왕 알려 줄 거 퇴근시간 가까이 돼서나 말해 주지. 벌써부터 기분이 우울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