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이른 아침부터 주차장에는 팀을 이루어 각자 차나, 회사 차를 타는 인원들로 북적거렸다. 나 역시 오래 차를 타야 하기에 아침부터 삼겹살에 상추까지 곁들여서 든든히 먹고 왔다.
진여원을 기다리며 바람에 뒤집어진 맨투맨 후드를 정리했다. 맞춤 운동화 앞코로 바닥을 콕콕 찔렀다. 시장조사도 병행하니 나처럼 편안한 복장을 한 직원들이 대부분이었다.
9시가 되기 바로 직전, 주차장으로 검은 세단 한 대가 스윽 들어왔다.
나는 내 근처에서 선 세단의 보닛을 봤다. 입을 벌리고 포효하고 있는 재규어 모양의 엠블럼이 그 위에 붙어 있었다. 조수석 창문이 내려가자마자 운전석을 확인했다. 진여원의 파스텔톤 카디건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뒷좌석에 타야 하나 앞좌석에 타야 하나 전전긍긍하다 결국 앞좌석을 선택했다. 흘끔 본 뒷좌석은 구두 박스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조수석에 앉아 진여원에게 꾸벅 인사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사장에게 운전을 시키는 간 큰 회사원이 어디 있나 싶어 마음이 불편했다.
“어울리지 않게 왜 귀가 처졌어.”
진여원이 룸미러를 손으로 조정하며 말했다.
“아침을 너무 많이 먹어서요.”
둘 사이를 가로지르는 중앙 부분에 그가 즐겨 마시는 음료 두 개가 나란히 꽂혀 있었다. 하나는 나 주려고 둔 건가 싶은 마음은 언감생심 꿈꾸지 않았다. 아무거나 골라 드시는지 둘 다 양이 줄어 있었다.
나는 가져온 파일 가방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정면만 바라봤다. 곧 주차장을 빠져나온 차가 도로로 진입했다. 콧등을 찡그리고 이를 드러낸 재규어의 은색 엠블럼이 핸들 중앙에도 붙어 있었다.
수천 만 원짜리 자전거를 타시는 분이 왜 자동차는 최고가 브랜드를 타지 않나 싶었다. 나는 말없이 운전만 하는 진여원에게 물었다.
“차도 제일 비싼 거 타고 다니실 줄 알았는데 의외네요.”
뚜벅이가 자격지심에 내뱉은 말 같아서 바로 정정했다.
“벤틀리나 포르쉐…… 자동차의 명장, 이런 거 타실 줄 알았습니다.”
진여원이 내게 포카리스웨트를 내밀었다. 여전히 나 먹으라는 소리는 아닌 줄 안다. 뚜껑을 열어서 진여원에게 내밀었다. 음료를 마신 그가 대답했다.
“내가 명품인데 왜.”
그러면서 페트병을 내게 다시 주었다.
그래, 이번 건…… 내가 완벽히 졌다. 할 말이 없었다. 전화상으로 한 말이었으면 아주 쇼를 한다 했겠지만, 저 얼굴로 말하니 입이 저절로 다물렸다. 그래도 재수 없는 건 여전했다.
라디오나 노래도 안 틀어 엔진만 고요하게 울리는 차 안이 처음부터 지금까지 계속 불편했다. 고속도로로 빠지는 길에 돌입하고 나서야 또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원래 눈이 나쁘십니까.”
갑자기 진여원이 나를 쳐다봤다. 안경이요, 하면서 그의 것을 가리켰다.
“작업할 때만.”
그러고 보니 일이 관련되어 있을 때만 썼던 것 같기도 하고…….
안경 안에 숨겨진 눈이 무심한 듯했지만 차갑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텃밭에 앉아 있을 때처럼 정수리부터 그 아래로 화끈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저 인간 얼굴이 너무 잘나서 이러나 싶기도 하고, 그걸 안 한 지 너무 오래돼 욕구 불만이 쌓였나 싶기도 했다.
“앞에 보고 운전하시죠.”
시큰둥하게 말했지만 괜히 기분이 몰랑몰랑했다.
“벨트 매.”
아차 싶어 얼른 벨트를 끌어다 똑딱 맞췄다.
“올라타면 난폭해지거든.”
뭐라고……? 진여원 때문에 몸의 온도가 확 올라버렸다.
“고속도로 말이야.”
덕분에 엄한 상상을 멈춰야 했다. 아무래도 욕구 불만이 맞나보다.
***
“사장님! 속도계 좀 보세요!”
조수석 등받이에 찰싹 달라붙어서 외쳤다. 속도계 바늘이 160km를 간당간당하게 넘어가고 있었다.
서울을 벗어나자마자 뻥 뚫린 고속도로를 즐기기라도 하듯 점차 올라간 속도가 자이로드롭 탑승을 방불케 했다. 진여원이 창백하게 질린 나를 보더니 혀를 찼다. 그러면서도 속도는 여전했다.
올라타면 난폭해진다는 것에 대해 잠시라도 흥분했던 내가 한심했다. 곤두선 신경에 별의별 상상들이 오갔다. 사고라도 나서 다른 차와 부딪히면 이렇게 저렇게 피해야지, 에어백은 잘 터지겠지? 혹시 트럭하고 부딪히면 바로 벨트를 풀고 뒷좌석으로 뛰어들어야지.
내가 들어갈 만한 공간이 되는지 구두 박스가 쌓인 뒤를 확인했다. 파고들어 가면 박스가 충격을 흡수해 줄 수는 있을 듯했다. 어차피 사고 나는 순간 몸이 굳을 게 분명하기에 쓸데없는 생각이었다.
옥상으로 나를 떠밀었던 놈이 이번에도 어김없이 사지로 모는 판국에 이를 갈았다.
“절 죽이실 생각입니까?!”
“난 운이 좋은 편이라.”
너만 운이 좋으면 뭐하냐? 넌 살고 난 죽으면 어쩌라고.
“1차로는 추월 차선이라도 규정 속도는 130km입니다.”
1차로와 2차로를 넘나드는 진여원에게 재차 목소리를 높였다.
“박석연 씨는 이론만 강한가 본데.”
내가 기필코 이번 년도에는 면허를 따고 만다.
눈을 질끈 감았다. 내 말은 귓전으로도 듣지를 않으니 차라리 한숨 자는 게 나을 듯했다. 일어나면 천국이거나 부산이겠지.
“조수석에 사람이 있는데도 운전자 졸음운전 사고가 왜 일어나는지 알아?”
나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눈만 감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옆 사람이 자기 때문이지.”
눈을 번쩍 떴다.
졸음에 전염성이 있다는 건 나도 익히 알고 있다. 사무실에서도 한 사람이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면 옆 사람에게 점차 그 기운이 전파되어 나간다. 하물며 그보다 더 좁은 차 안인데…….
“그럼 안 졸 테니 속도 좀 줄여 주시죠.”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잘 범해. 여전히 말이야.”
진여원은 누가 자거나 말거나 상관없는 예외에 속한다는 뜻이었다.
저 독종을 평범한 사람과 동일시했다는 것에 대해 미안해졌다. 물론 진여원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에게 말이다. 나는 팔짱을 끼고 잠을 잘 자세를 잡았다.
띠링 띠링, 과속 단속 구간입니다.
내비게이션이 경고음을 울릴 때마다 속도가 줄어들었다가 다시 올라가기를 반복했다. 미국의 어느 도로는 느리게 달리면 딱지를 끊는다던데, 진여원을 거기다 던져 놓고 싶었다.
간신히 잠든 꿈속에서는 자이로드롭 운전자가 사람들을 내려 주지 않고 몇 시간이나 기구를 태우며 캬캬캬 웃고 있었다.
***
꿈뻑꿈뻑.
확, 저절로 눈이 떠졌다. 순간 속도감이 느껴지지 않아 창문에 기대고 있던 이마를 원위치시켰다. 바라본 정면에는 층수가 낮고 긴 건물이 보였다.
[추풍령 휴게소]
천천히 글씨를 읽고 나서야 여기가 어딘지를 깨달았다. 시동이 꺼진 자동차는 한 뼘만큼 창문이 열려 있고 문은 잠겨 있었다. 이제 보니 후덥지근한 차 안의 공기 때문에 잠이 깬 것 같았다.
저 혼자만 휴게소로 들어갔는지 진여원이 보이지 않았다. 치사한 자식. 속으로 구시렁거리며 차 밖으로 나왔다. 기지개를 켜서 찌뿌드드한 몸을 달래고 휴게소로 향했다. 화장실은 가고 싶지 않아 편의점으로 곧장 들어갔다.
커피우유와 연양갱을 그리고 진여원이 먹을 음료를 산 뒤에 메마른 목을 우유로 축였다.
휴게소 뒤쪽에 마련된 생태공원 산책로에 관심이 생겼지만, 진여원은 날 버려두고 갈 수도 있는 인간이기에 서둘러 주차된 차로 방향을 틀었다.
달달한 양갱을 씹으며 재규어를 찾았다. 차에 시동이 걸려 있어 진여원이 돌아온 것을 알 수가 있었다. 나는 서둘러 쓰레기통에 빈 우유갑과 양갱 포장지를 버리고 차에 올라탔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에 이마에 송골송골 맺혔던 땀이 씻겨 나갔다.
“누가 업어 간 줄 알았는데.”
“편의점 다녀왔습니다. 뭘 좋아하시는지 몰라서 그냥 드시던 거로 사왔습니다.”
진여원이 호두과자 봉지를 내 무릎으로 던졌다. 그는 내가 내민 음료를 가져가는 일도 잊지 않았다.
“저……. 먹으라고요?”
“물물교환.”
뭐야, 만일 내가 음료를 안 사왔으면 저 혼자 먹으려고 한 건가?
“감사히 먹겠습니다. 근데 전 통감자가 더 좋은데요.”
호두과자를 입에 넣으면서 대꾸했다. 진여원이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설마 사 주려고? 하는데 지갑을 계기판 위에 툭 올려놓았다. 그가 핸들을 잡자마자 벨트를 끌어다 맸다.
내장된 시계를 보니 출발한 지 두 시간이 조금 넘어 있었다.
여기서 부산 센텀시티에 있는 유리아 백화점까지도 앞으로 두 시간이면 갈듯했다. 또 자려고 자세를 잡는데 이번엔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속도도 익숙해져 처음처럼 불안하지 않았고 심지어 진여원이 운전하는 건데 믿어도 되겠다는 근거 없는 신뢰감까지 생겨났다.
“잠 다 깼으면 좀 떠들어 봐.”
진여원이 설핏 인상을 쓰고 있었다.
“라디오 틀어 드릴까요?”
“남 얘기하는 걸 내가 왜 들어야 돼.”
포카리스웨트만 먹는 사람이 웬일로 원두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회사에서 처음 마주쳤을 때도 커피를 뽑아 먹었던 것 같은데, 피곤할 때만 먹나 보지?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호두과자를 품에 안고 한 개씩 꺼내 먹었다.
내가 진여원에게 하고 싶은 말이라고는 왜 대학 때 소문을 냈습니까? 그뿐이었다.
지금으로선 김대영에게 의심의 추가 잔뜩 기울어 있긴 하지만, 진여원의 말처럼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정말 진여원이 소문의 근원지라고 한들 이제와 무슨 소용일까. 저 인간이 내 사장인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인데.
“변명 같은 거 잘 안 하시죠?”
“애초에 변명할 일을 왜 해.”
공을 던지면 제대로 받고 다시 내게 패스해야지, 이런 식인데 대화가 이루어지겠냔 말이다. 마시고 있는 원두커피의 밑을 툭 쳐 주고 싶었다.
“백화점 입점은 얼마 주고 들어가셨어요?”
차라리 일 얘기가 나을 것 같기에 슬쩍 화제를 전환했다.
“공짜로.”
“예…… 예?”
호두과자를 씹는 것을 멈췄다.
“말했다시피 운이 좋거든.”
그러면서 웃는 얼굴이 낯설었다. 진짜로 빈정거릴 때만 나오는 비틀림이 느껴졌다. 진정으로 운이 좋다고 말하는 것 같지가 않았다.
“그 운, 저 좀 나눠 주실래요.”
“하는 거 봐서.”
진여원이 커피를 받침대에 내려놓으며 나를 흘끔 봤다. 여전히 재수는 재수대로 없는데 왜 아랫배가 뜨거워지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섹스를 했던 날을 되새겨 봤다.
코트를 입었을 때쯤이었는데 언제인지 기억도 잘 안 난다. 사진에 찍힌 녀석과도 가벼운 페팅만 했을 뿐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날 화끈하게 끝까지 가 볼 걸 그랬다.
진여원이 에어컨의 온도를 낮췄다. 안 그래도 맨투맨 후드가 너무 얇다고 생각했는데 차 내부의 공기가 더 서늘해지고 있었다.
에어컨 좀 줄여 달라는 말이 혀끝에 매달렸다. 그러나 사장이 운전까지 하고 있는 마당에 너무 뻔뻔하지 않나 싶어 돌려 말하기로 했다.
“더우세요?”
“아니.”
“근데 왜 에어컨을…….”
“볼이 홍시 같아서.”
두 손을 펴서 뺨에 가져다 대니 아니나 다를까 열을 내뿜고 있었다.
“그러게요, 호두가 엄청 뜨겁네요.”
제가 뜨거운 걸 먹으면 얼굴이 빨개집니다. 이 말은 변명 같아 꺼내지 않았다.
호두과자 하나를 꺼내 에어컨 바람에 식히는 시늉을 했다. 후후 입으로 불기까지 하자, 진여원이 에어컨 온도를 낮추며 짧게 웃었다.
서울로 돌아가면 밤늦게라도 미령을 찾아갈 생각이었다. 괜찮은 파트너 하나 연결시켜 달라고 해야지. 이러다가 게이도 아닌 일반인인 진여원한테 욕정하면 곤란했다.
내 성향을 자각하고 나서 생긴 철칙이 있다면 이성애자는 피하자는 것이었다. 운이 좋아서 사귀게 되어도 결국엔 현실적인 벽에 부딪혀 깨지기 십상이었다.
‘미쳤냐? 너 나랑 게이 결혼식이라도 올릴래? 씨발, 너는 너, 나는 나대로 결혼해야지.’
‘나도 알고 있는 사실을 꼭 입으로 말해야 해?’
‘그러니까 적당히 좀 굴어라. 씨발아 너 때문에 나까지 소문나면 어쩌려고 그래. 학교서 아는 척 좀 적당히 하라고.’
이렇듯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오를 때가 있었다. 관계를 부정하는 김대영에게 상처받아 질질 짜던 기억까지는 꺼내어 보지 않았다.
어느새 호두과자가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꾸역꾸역 집어넣었더니 목이 텁텁했다. 운전에 집중한 진여원을 보고 조용히 그가 마시던 걸 쥐었다.
입을 대지 않고 마시려는데 갑자기 차선이 바뀌며 속도가 줄었다.
“풉.”
윗입술과 페트병 주둥이가 그대로 박치기를 했다.
얼얼한 입술을 손으로 문지르며 진여원을 불만스레 쳐다봤다. 진여원은 부하 직원의 안위 따위는 생각지도 않고 다시 속도를 올렸다.
이번 출장만 끝나면 내가 다신 이 인간 차를 타나 봐라.
올라오는 길도 마찬가지로 고될 거란 생각에 없던 멀미마저 이는 것 같았다.
***
센텀시티 유리아 백화점에 도착하니 1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점심 정도는 먹여 줄줄 알았는데 호두과자로 끝이었나 보다. 나는 군말 없이 백화점 2층을 오르는 진여원을 따라갔다.
내 양손에는 구두 상자가 담긴 쇼핑백이 바리바리 들려 있었다. 차에서 내릴 때 진여원이 얹어 준 것이었다.
온 김에 미발매 신상을 직접 디피하려는 생각인 듯한데, 좀 나눠들면 덧나냐 싶었다. 그의 손에 들린 거라곤 무선 노트북뿐이었다.
2층은 명품 매장이 밀집되어 있는 구역이었다.
2층 에스컬레이터 정면에 [YOUM- Coming Soon]이라 적힌 나무 패널이 매장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에스컬레이터에서 직진으로 보이는 매장이면 입점하기 꽤 어려웠을 텐데, 혹시 공짜라고 말한 건 농담이었나…….
진여원이 손잡이가 달린 나무 패널을 돌려 열었다. 순간 담배 냄새가 훅 코끝을 스쳤다. 진여원이 나를 안으로 들여놓고 빠르게 문을 닫았다. 아니나 다를까 인부들은 사방이 막힌 것 하나만 믿고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지금 뭣들 하는 겁니까.”
진여원이 차갑게 내뱉자 인부들이 종이컵에 담배를 담았다. 유리 진열장을 닦고 있던 정장 차림의 남자도 인상을 쓰고 이쪽을 돌아봤다.
그의 입에도 담배가 물려 있었다. 그가 재빠르게 담배를 비벼 끄고 이쪽으로 한걸음에 달려왔다. 가슴께에 달린 명찰을 보니 윰 소속 직원이었다.
부산 지점 점장인 것 같은데 내가 봐도 기가 막혔다. 가죽이 얼마나 냄새에 예민한데 폐쇄된 공간에서 담배를 피우는 건지, 이건 상식 부족이었다.
“사, 사장님.”
점장이 연방 진여원에게 허리를 굽혀 가며 내 손에 들린 쇼핑백까지 대신 받아 갔다.
“오신다는 말씀을 듣지 못해서…….”
“그래서 담배를 피웠다, 이 말입니까?”
점장에게 향했던 싸늘한 진여원의 시선이 이번엔 내게로 향했다.
“박석연 씨.”
“예.”
나는 그가 내민 법인 카드를 엉겁결에 받아 들었다.
“올라가서 공기청정기 사 와요.”
“알겠습니다.”
카드를 가지고 냄새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문을 황급히 닫았다.
저 안에서 한바탕 파란이 일 것을 예감했다. 평소 같았으면 내가 지 몸종이냐 하면서 투덜거렸을 텐데, 지금은 감사하기만 했다. 내가 잘못한 게 없어도 상사가 화나면 좌불안석이기 마련이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까마득히 먼 천장에 매달린 조명들을 구경했다. 따뜻한 색의 조명이 건물 내부를 고급스럽게 감싸고 있었다.
가전제품 판매 코너인 6층까지 걷지 않고 에스컬레이터가 이끄는 대로 얌전히 서 있었다. 일찍 내려가 봐야 좋을 것 하나 없었다.
어디 제품으로 살까 고민하다 6층 휴게실 소파에 앉아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냄새 잘 빠지는 공기청정기를 검색해서 가장 평이 좋은 것을 찾아냈다.
곧바로 M 브랜드 매장을 찾아가 법인카드로 화끈하게 공기청정기를 긁었다. 백만 원이 조금 넘는 금액이었다. 매장 직원도 이것저것 재지 않고 바로 구매를 결정한 내가 마음에 드는지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 있었다.
“어디로 배송해 드릴까요?”
“그냥 주세요. 제가 끌고 갈게요.”
2층까지 배송해 달라고 하려다가 말았다. 괜히 담배를 안에서 피웠다느니 어쨌다느니 하는 안 좋은 소문이 퍼지면 곤란하니까.
“그럼 주차장까지 가져다 드릴까요?”
“아뇨, 여기 백화점에서 쓸 거라 엘리베이터 타면 됩니다.”
포장지를 다 뜯어내고 바퀴를 굴렸다. 새 제품이라 그런지 청소기처럼 돌돌 잘 굴러갔다.
엘리베이터 안에 탄 사람들의 저건 뭐야, 하는 눈초리를 당당히 무시하고 2층 매장으로 끌고 갔다.
나무문을 두드리자 안에서부터 문이 열렸다. 문을 열어 준 점장뿐만 아니라 인부들은, 파랗게 또는 하얗게 가지각색으로 얼굴들이 질려 있었다.
“무거우셨죠?”
점장이 공기청정기를 대신 끌어가 코드를 꽂고 작동시켰다. 청정기에 표시된 공기 중 오염 농도가 80퍼센트에 육박했다. 반대로 진여원의 심기는 최저치를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진여원에게 법인카드를 공손히 내밀었다.
“가지고 있어.”
“예.”
제가 왜요? 라고 말했다간 법인카드가 얼굴에 날아올 분위기였다.
주변을 둘러보니 진여원이 저렇게 화가 날만도 했다. 담배 연기는 그렇다 쳐도 이번 주 내로 오픈 예정인 지점이 갓 공사를 끝낸 것처럼 정신없었다.
바닥에 나뒹구는 목자재들하며 함부로 방치된 수십 종의 구두까지, 마치 폐업한 매장을 보는 것만 같았다.
고객 접대용 벨벳 소파에 앉아 있던 진여원이 노트북을 우리 쪽으로 돌려 보였다.
“점장님, 이걸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노트북 화면에는 각 지점을 찾은 팀들이 매장을 찍은 사진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우리 부서가 간 영등포점을 포함해 총 일곱 곳이나 됐다.
진열장에 양 사이드로 나눠 배치한 옴므, 쉬즈 구두와 고객 응대용 테이블 소파까지 하나 같이 완벽했다. 이곳 부산 지점만 빼면 당장 오픈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더 자세히 들여다보니 각 지점마다 메인으로 장식된 사진은 <엘리스리스>의 여주인공이었다.
꽃이 만발한 정원에서 화관을 쓰고 다리를 포개어 앉아 있는 그녀가 신은 건 나와 곽일영이 만든 플랫슈즈였다.
심각한 분위기인 와중에 이번 월급에 인센티브가 포함되려나 하는 궁금증이 솟았다. 물론 지금 물어볼 용기는 없었다.
“저희도 내일쯤이면 다 완성이 될 듯한데……. 인부들이 좀 늦은 것도 있고 해서…….”
“뭔 소리예요. 저희는 부르는 날짜에 맞춰 왔을 뿐인데요.”
“오늘도 지각하셨지 않습니까?”
“그쪽도 늦게 와 놓고는 어디서 오리발입니까.”
급기야 저들끼리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진여원의 표정이 점점 더 싸늘해져 갔다. 오늘 하루 같이 있어야 할 사람이 나인데, 불똥이 나한테 튈 것만 같아서 얼른 중재에 나섰다.
“일단 정리부터 하죠. 제가 공기청정기 사 왔으니 오늘 하루 종일 틀어 놓으면 담배 냄새는 해결될 거고, 점장님. 저기 2단 진열장 깨끗하게 정리될 때까지 구두는 꺼내 놓지 말아 주시고요. 괜히 담배 냄새 배거나 흠집 나면 안 되니까요. 그리고 신발은 진열하실 때 각 켤레마다 50cm씩은 떨어뜨려 놓아주세요.”
진열장이 다른 매장에 비해 얼마 안 되는 건 그만큼 명품만을 선별해서 내놓는다는 걸 뜻했다.
“알겠습니다.”
진여원은 침묵을 유지했다. 솔직히 사장의 침묵도 무서운데다 내가 너무 나선 건가 싶었지만, 정리하는 게 우선이라 말을 다시 이었다.
“인부님들은 바닥에 목재 다 치워 주시고 유리에 붙은 딱지들도 전부 제거 부탁드립니다. 이쪽 바닥은 제가 정리할게요.”
“예예.”
인부와 점장이 분주하게 몸을 움직였다. 나도 면장갑을 하나 얻어 바닥에 굴러다니는 구두를 주워 박스에 곱게 담았다. 진여원이 벨벳 소파 앞 원형 유리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박석연 씨.”
진여원의 부름에 그에게로 다가갔다. 그가 내 면장갑을 보더니 입을 열었다.
“체일 슈즈 왜 그만뒀어.”
이유를 아는 줄 알았더니 아니었나 보다. 나와 좀 떨어진 인부들을 돌아본 다음 답을 주었다.
“아웃팅돼서요.”
덤덤히 말하는데 진여원이 눈을 슬쩍 키웠다. 다소 놀란 듯도 했다.
“직접 떠든 건 아닐 테고.”
“대학 때처럼 타인에 의해 본의 아니게 그렇게 됐죠.”
돌려 말하는데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 타인에게 감사해야겠는데.”
진여원이 턱을 매만지며 옅게 웃었다.
“다른 회사 갈 생각하지 마.”
이제 아까워서 못 주니까. 그렇게 중얼거린 것도 같았다.
“그럼 월급 좀 많이 주세요.”
그간 인정받는 데 굶주려 있었다.
체일 슈즈에서는 디자인에 대해 의견을 내놔도 어디서 나서냐며 눈총을 받곤 했다. 그러다 보니 점차 나도 의욕을 잃어 갔고 흔한 디자인만 그려 나가기 시작했다.
입사 초반에는 외국 브랜드로 가 볼까도 진지하게 고민했는데, 그곳 역시 수석 디자이너가 되지 않고서는 잡지에 이름 한 줄 걸기가 어려웠다.
진여원도 면장갑을 끼고 구두를 담기 시작했다. 나도 그렇고 주변의 사람들도 당황해서는 진여원을 쳐다봤다.
사장님까지 하실 필요 없다는 점장의 만류에 진여원이 한 말은 “월급은 내가 제일 많이 받는데 왜.”였다.
진여원을 다시 본 지는 얼마 안 됐지만, 백번 양보해 상사로서는 믿고 따를 만한 사람이었다. 그가 퇴짜 놓은 디자인들도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긴가민가한 것들이었다. 그래도 퇴짜 맞을 때마다 열 받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왕이면 쓰레기 말고 다른 표현으로 에둘러서 해 주면 얼마나 좋아.
멍하니 진여원을 쳐다보자 눈이 마주쳤다. 속으로 투덜거린 게 읽힌 것만 같아 눈을 급히 내리깔고 구두를 주워 담았다. 머리 위로 왜인지 진여원의 시선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그것도 한동안 말이다.
***
구두 상자를 산처럼 쌓아 놓고, 바닥의 자재들도 어느 정도 정리되고 나니 저녁 시간이 훌쩍 넘어 있었다.
배 속에선 아까부터 밥 달라고 아우성이었다. 때마침 시간을 확인한 진여원이 면장갑을 벗었다.
“나머진 내일 정리합시다.”
밤을 새워서라도 매장 디스플레이를 완성시킬 거라고 생각했지만, 진여원은 의외로 퇴근시간을 단호하게 지켰다.
어디론가 전화를 연결한 진여원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다들 하아, 하고 긴 숨을 토해냈다. 사장하고 같이 있으니 꾀를 부릴 수도 없어 그제야 한숨을 돌리는 중이었다.
“고생이 많으시겠어요.”
점장이 내게 와서 살갑게 말을 건넸다. 고생 많으셨어요, 도 아닌 고생이 많으시겠어요, 는 대체 무슨 뜻이야.
“사장님하고 같이 계시면 엄청 숨 막힐 거 같은데 말이에요.”
“자기 할 일만 잘하면 숨 막힐 일도 없습니다.”
뜻하지 않은 막노동에 시장조사까지 물 건너갔는데, 사장 욕을 하는 꼴이 여간 예뻐 보이지 않았다.
점장은 내가 같이 사장 욕을 할 줄 알았는지 민망함에 머리를 긁적거렸다. 진여원이 다시 매장 문을 열고 나보고 나오라며 손을 까닥였다. 그와 동시에 전화도 끊고 있었다.
나는 진여원의 노트북과 파일가방을 챙겼다.
“공기청정기 오늘 하루 종일 가동해요. 내일 오전 10시에 다시 올 테니 그때까지 완벽히 정리해 두세요.”
백화점 출근 시간이 9시니 한 시간 만에 정리를 해야 할 텐데, 남은 양을 보면 가능할지 모르겠다. 그나저나 내일 10시에 다시 온다니? 나는 진여원을 따라가며 노트북을 내밀었다.
그가 나를 흘끔 보고는 다시 휴대폰을 귀에 붙였다. 그냥 떨어뜨려 버릴까 하다가 자전거가 생각나는 바람에 마음을 곱게 접었다.
“예, 내려오신지 몰랐습니다. 제가 찾아뵙죠.”
간단하게 말을 마친 진여원이 내게서 노트북을 가져갔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그의 뒤에 서서 말을 건넸다.
“저희 오늘 서울로 안 갑니까?”
“못 가.”
하긴 저 꼴을 봐서는 직접 확인하지 않는 이상, 부산 지점이 계속 마음에 걸릴 듯했다.
“저 속옷 안 가져왔는데요.”
“법인카드 뒀다 뭐 해.”
밉살스러운 말에 인상을 콱 구겼다.
그의 뒤에서 주먹을 쥐고 뒤통수에 휘두르는 시늉을 했다. 에스컬레이터 상단에 달린 거울에 내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서둘러 구겨진 얼굴을 펴고 팔도 내렸다. 그러나 이미 진여원이 본 뒤였다.
“더 까불어 봐.”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짐짓 평정을 유지하며 지상 주차장으로 향했다. 이럴 땐 모른 척 잡아떼는 게 최고였다. 조수석에 앉아서도 턱을 곧게 세워 정면만 바라봤다.
진여원이 기가 차다는 실소만 내뱉고 있었다.
백화점을 빠져나온 뒤로 그는 고속도로와는 다르게 규정 속도를 유지해 가며 도로를 달렸다. 이제 보니 센텀시티는 해운대에 근접해 있었다.
어둑어둑해지는 밖으로 바다가 보였다. 바다를 직접 찾은 건 대학 이후 처음이었다. 그것도 입학 초반 MT 갔을 때니 까마득했다.
해가 낮아져 붉게 물드는 바다 저 끝을 구경했다. 천연으로 나염된 머플러처럼 파도가 넘실거렸다. 호텔이라도 잡나 싶어 바다만 구경하고 있는데 웬걸, 점차 번화가에선 멀어지고 있었다.
조수석 창문이 아닌 운전석 쪽을 바라보자 별장 비스름하게 생긴 주택들이 죽 들어서 있었다.
대부분이 진여원의 서울 집처럼 정원이 딸린 주택이었다. 그렇게 또 한참을 달려 돔 형식 지붕을 가진 주택 앞에서 차가 섰다. 세 개의 돔 기둥이 연결되어 있는 유럽형 건물이었다.
나는 눈만 멀뚱멀뚱하게 뜬 채 진여원을 향했다. 그러자 그가 안 내리고 뭐 하냐는 말을 던졌다. 여전히 의문만 잔뜩 가진 채로 밖에 나와 서야했다. 운전석 쪽으로 돌아가자 창문을 연 그가 말했다.
“적어.”
“예?”
“일이삼사오육.”
적으라는 사람이 그럴 시간도 주지 않았다.
“일이삼사오육이요?”
“비밀번호.”
창문이 다시 올라가더니 차가 유턴을 해서 유유히 멀어지고 있었다. 자전거에서 내렸을 때와 같이 한동안 머리가 멍했다.
차가 사라진 방향과 함께 내 옆으로 선 별장을 번갈아 쳐다봤다. 일단 머리를 흔들고 문이 없는 정원으로 발을 디뎠다.
옆집과도 연결되어 있는 정원은 나무들이 경계선을 대신하고 있었다. 네모난 창이 여러 개 달려 있는 흰색 현관문 앞에 서서 비밀번호를 눌러 봤다.
1. 2. 3. 4. 5. 6.
띠리리, 잠금이 풀렸습니다, 하면서 잠금장치가 풀려 나갔다.
나는 문을 빠끔히 열어 얼굴만 안으로 집어넣었다. 윤기가 좔좔 흐르는 융단을 따라가자 거실 중앙에 놓인 벽난로가 보였다. 족히 열 명은 앉을 수 있는 소파가 거실을 둥그렇게 차지하고 있었다.
2층으로 올라가는 나무 계단은 음산하리만치 어두웠다. 엑소시스트에 나왔던 악마 들린 아이가 몸을 뒤집은 채로 다다닥 내려올 것만 같은 생김새였다.
“지금 나보고 여기서 자라고?”
혼잣말을 내뱉었다.
꾸르륵- 또다시 배 속이 아우성이었다. 일단 뭐라도 먹고 나서 들어가자. 밤늦게 오면 더 무서울 거 같았지만, 배고픔이 먼저였다.
자꾸만 눈에 밝히는 2층 계단을 무시하고 문을 닫았다. 정원을 빠져 나와 인도도 없는 도로를 터덜터덜 걸었다. 옆집도 사람이 살지 않는지 차도 없고, 불도 꺼져 있었다.
여기 다 별장인 거 같은데……. 꼭 공포 영화 보면 이런 곳에 혼자 있다가 도끼 맞아 죽지 않나.
뒷목이 서늘해져서 연방 뒤를 돌아봐야 했다. 슈퍼라도 나오면 좋겠는데 별장들만 하염없이 이어져 있었다. 맞춤 운동화가 아니었으면 신발을 벗고 걸어야 할 뻔했다.
30분은 족히 걸었을 때쯤 드디어 인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걸었다면 배고픔에 지쳐 길가에 쓰러졌을 것이다. 어째 바닷가가 있는 별장 동네에 슈퍼 하나가 없냐는 말이다.
다행히 인가와 닿는 도로부터는 인도도 생겨 있었다. 저 앞에 작동하지 않는 신호등을 보고 무단횡단을 감행했다. 2층 상가 건물에 슈퍼와 횟집이 보인 탓이었다.
30분을 걸으며 내내 진여원에게 저주를 퍼부었지만, 지금은 욕할 기력도 없었다. 다짜고짜 횟집으로 들어가자 주인으로 보이는 후덕한 인상의 여자가 반갑게 나왔다.
“어서 오세요, 몇 분?”
“한 명인데요.”
“아~ 그래요. 앉아서 메뉴판 봐요.”
여자가 안내한 곳은 온돌방이 아닌 식탁이었다. 해물찌개 1인분 먹고 가는 손님인 줄 알았나 본데 난 지금 이 집에 있는 회를 다 떠서 먹어도 모자랄 판국이야.
“아주머니, 옥돔 1kg이랑 모듬회 소짜리 하나 주세요.”
“그걸 혼자 먹게요?”
“예, 저 배고파 죽겠어요. 빨리 주세요.”
주인이 내 행색을 죽 살펴봤다. 곧 무전취식자는 아니라 결론 내린 것 같았다.
메인 회에 곁들여 나오는 버터콘구이와 꽁치, 멍게, 소라까지 나오는 족족 게 눈 감추듯 흡수했다. 허겁지겁 먹다가 또 탈 나면 안 되니 되도록 꼭꼭 씹기 시작했다.
맥주까지 시키고 내 바람대로 빠르게 나온 회와 함께 허기를 채워 나갔다. 모듬회 소짜리는 혼자 먹기에도 양이 적은 편이었다. 옥돔을 따로 시키길 잘했지.
“어이구, 진짜 잘 먹네. 며칠 굶은 사람 같어.”
혼자 와서 심심할 거라 생각했는지 아주머니가 말상대까지 해 주었다.
“저희 회사 사장님이 일은 태산처럼 시키고 밥은 호두과자 하나로 때우게 했거든요. 근데 그 인간이 절 저기 별장 마을 쪽에 떨구고 어디를 갔네요. 여기까지 걸어오느라 죽는 줄 알았어요.”
“나쁜 사장이네. 직원 그렇게 부려서 어디 남아나겠어.”
“진짜 나쁜 새끼예요.”
옥돔을 어금니에 넣고 힘주어 씹었다. 이유 모르게 서럽기도 했다.
“맥주 두 병이랑 산낙지 추가할게요.”
“그래그래, 금방 썰어 달라고 할게.”
금세 꿈틀거리는 산낙지를 가져온 주인이 또 내 앞에 앉았다. 옥돔으로는 씹는 맛이 나지 않아 오독거리는 산낙지를 한 움큼 잡아 서른 번씩 씹었다.
“서울 사람이야?”
“예.”
“우리 딸내미도 서울에서 일하는데, 총각은 무슨 일해?”
“구두 만들어요.”
“디자이너야?”
“말만 거창하지 대우는 이렇게 똥 같네요.”
“호호호, 말 참 재미있게 한다.”
아주머니와 주거니 받거니 얘기를 하며 식사를 하니 서러운 것도 어디론가 다 사라졌다. 추어탕은 아예 따로 시켜 밥 반공기로 마지막을 장식했다. 저번 회식 때처럼 과도하게 배부르지는 않았다. 근 두 끼를 굶었는데 이 정도는 먹어 줘야 했다.
계산할 때는 당당하게 법인카드로 긁었다. 그래, 진여원 네 말대로 법인카드 뒀다 뭐하냐, 출장 왔을 때 실컷 쓰고 말지.
카드명세서에 찍힌 26만 원을 보고 사실 좀 놀라기는 했다. 아니, 솔직히는 심장이 쪼그라들 정도로 깜짝 놀랐다.
그래도 많이 먹었다고 뭐라고 하기만 해 봐. 고용보험센터에 사장이 황무지에 버리고 갔다고 신고할 테니까. 손이 조금 떨렸지만, 일부러 영수증을 쫙쫙 찢어서 쓰레기통에 던졌다.
이어 횟집 옆 슈퍼에 들어가서 캔 맥주를 한 아름 샀다. 해변이 보이는 운치 있는 상가였지만 해가 지고 나니 바다도 까맣게 보였다.
맥주를 한 캔 따서 모래사장으로 이어지는 돌계단에 털썩 앉았다.
여기서 노숙이라도 할까? 6월이라도 새벽은 쌀쌀할 텐데.
맥주를 비워 가며 짠내 나는 바닷바람을 맞았다.
“진독사 개새끼. 나쁜 새끼. 언제는 아깝다면서, 나를 사람 하나 없는 데다 버려두고 가. 밥은 주고 가야 할 거 아니야. 키우는 개도 밥은 먹여 가면서 구박한다고.”
캔 맥주를 쥐고 구시렁대는 나를 지나가는 연인 한 쌍이 이상하게 쳐다봤다. 그마저도 왠지 더 성질이 나서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빈 깡통을 비닐봉지에 집어넣고 새로운 맥주를 꺼내 땄다. 먹은 회가 소화되며 트림이 시원하게 나왔다. 슈퍼에 다시 들러 맥주를 더 사고는 아예 모래사장으로 내려왔다.
많이 봐줘야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불꽃놀이를 하는 중이었다. 삐요옹 하고 올라가는 불꽃을 근처에서 구경하고 있자 그 중 하나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주변으로 늘어선 맥주를 보더니 작게 물었다.
“오빠야, 실연당했나?”
“아저씨가 아니라 고맙다.”
“오빠야 같은데, 와? 대학생? 서울에서 왔나. 실연당해 갖고 죽으러 온 기가?”
“죽긴 왜 죽어. 실연당해도 안 죽어.”
“근데 얼굴은 왜 이래 죽상을 해 갖고 술만 마시고 있노.”
“너 몇 살이야?”
“내 딱 슴살이다.”
“민증 보여 줘 봐.”
미심쩍어하면서도 녀석이 내게 부산대학교 학생증을 보여 줬다. 얼굴을 확인해 보니 동일인물이 맞았다.
“다 대학 친구들?”
“맞다.”
“그럼 너희도 마실래? 내가 네 친구들 것까지 빵빵 쏜다.”
녀석이 파하하 하고 웃었다.
“안 된다. 오빠야가 술에 약 탔는지 우째 아노.”
어느새 주변으로 모여든 두 명의 친구들도 맞어, 맞어 하면서 맞장구를 쳤다. 나는 남은 맥주를 입에 털어 넣었다. 엉덩이에 붙은 모래를 털어 내고 이리 오라며 손짓했다.
슈퍼로 가는 길에 녀석들이 주르륵 따라붙었다. 다 마신 캔 맥주를 모은 봉지를 슈퍼 쓰레기통에 버렸다.
“너희 먹고 싶은 걸로 아무거나 골라.”
“진짜가?”
“진짜지.”
녀석들이 신나서 소주, 맥주부터 시작해 이것저것 슈퍼 카운터에 가져다 놨다. 다른 한 명이 혹시 이것도 되나? 하면서 생리대를 흔들었다. 아무거나 다 사도 좋다고 대답하니 저들끼리 신나서 꺅꺅댔다. 호구 하나 걸렸다면서 좋아하는 것 같았다.
수북이 쌓인 것들을 법인카드로 계산하고 내 맥주도 열 캔을 사 들었다. 이미 다섯 캔 정도 비워서 이 정도면 적당할 듯했다.
그리 크지 않은 슈퍼에서 나온 가격이 10만 원이 넘었다. 커다란 봉지 세 개를 나눠 들고 다시 사이좋게 모래사장으로 내려왔다. 안주와 술잔치를 벌이는데 한 명이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훑어봤다.
“오빠야, 혹시 우리 술 맥여서 막 요렇게 조렇게 할라 하는 거 아이가?”
맥주를 시원하게 따며 쓰게 웃었다.
“걱정 마. 나 게이야.”
어차피 두 번 다시 볼 사이도 아닌데 말해서 어떤가 싶었다. 대놓고 말하니 속 시원하기도 했다. 입만 벌리고 있던 여자 셋이 동시에 쯧쯧쯧 혀를 찼다.
“옴마야, 멀쩡하게 생기 갖고는 쪼매 아깝네. 오빠야 시원하게 마시게 내도 줘 바라.”
봉지에서 맥주를 꺼내 주었다. 네 명이 동그랗게 앉아서 쨘을 했다.
둘은 소주, 나에게 학생증을 보여 준 녀석은 맥주였다. 답답한 운동화를 벗어서 옆으로 밀어두고 양말까지 신발에 쑤셔 넣었다.
발가락에 엉겨드는 모래가 기분 좋았다.
“크하, 시원타! 오빠야는 혼자 여행 온기가.”
“아니, 일 때문에 사장 따라왔는데 그 인간이……. 아니다 또 말해 뭐 하냐.”
“일 다니나?”
“신발 만들어.”
“무슨 신발?”
“윰이라고. 아직 잘 모를 거야.”
“모르기는! 유영채가 신고 나왔던 플랫슈즈 만든 데 아이가!”
“알아?”
내가 더 놀라 버렸다.
“알지! 짝퉁이지만 내도 가지고 있다.”
“그래, 좀 비싸긴 하지. 그래도 나중에 돈 벌면 진품으로 사라.”
“오빠야 진짜 윰 다니나?”
“플랫슈즈도 나랑 우리 대리님이 같이 만든 거야. 사장은 싸가지 없는데 부서 사람들은 좋아.”
녀석들이 또 꺅꺅대고 난리였다. 얼마를 버냐, 구두 만들려면 꼭 패션 디자인과를 나와야 하냐, 구두에 대한 열띤 대화의 장이 열렸다. 그러면서 서로가 맥주와 소주를 비워 갔다.
“이제 보니 오빠야 되게 잘 나가는 사람인갑네. 그래서 막 술도 쏘고 그런 기가?”
“뭐……. 그냥 그렇게 생각해. 근데 너넨 집에 안 들어가? 벌써 10시 넘었는데?”
“괜찮다. 우리 다 요 근처 산다.”
학생증 옆에 앉은 친구가 호탕하게 말했다.
“근데 오빠야.”
이번엔 학생증이었다.
“응.”
“아까부터 주머니 밖이 반짝반짝거린다.”
고개를 내려다보니 앞주머니에 반쯤 걸려 모습을 드러낸 휴대폰이 요란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여태 웃고 떠드느라 전화가 울리는 것도 몰랐다.
[진싸가지]
진 사장에서 저번에 바꿔 두었던 이름이 떠다녔다. 맥주를 모래사장에 콱 박아 놓고 전화를 받았다.
“예, 여보세요.”
[어디야.]
날 외진 데다 떨궈 놓은 게 이제야 미안해졌냐. 나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궁금하세요?”
[어디냐고 물었지 궁금하다고는 안 했는데.]
입을 꾹 다물었다. 그냥 전화를 끊어 버릴까 하는데 진여원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어딘지 찾아 줘?]
“안 궁금하다면서요.”
더 전화하다간 복장이 터질 것 같았다.
사장이라 욕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처지가 답답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얄밉고, 섭섭하고 그런지 나도 도통 모르겠다.
휴대폰을 귀에 붙인 채 달궈지는 눈을 비볐다. 내 앞에 동그랗게 앉은 여자애들 셋이 입을 벌리고 나를 쳐다봤다. 아니, 정확히는 내 머리 위였다.
[술꾼이야?]
“예……?”
멍청하게 되물으며 앞에 앉은 녀석들의 반응에 갸우뚱했다.
“많이도 마셨네.”
휴대폰보다 더 가까이 들리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자 늘씬하게 뻗은 다리가 보였다. 천천히 시선을 올렸다.
진여원이 보일 듯 말듯 묘한 미소를 머금고 서 있었다. 면바지에 쇄골이 살짝 보이는 얇은 스웨터가 바람에 잘게 흔들렸다.
“박석연 씨는 사교성도 좋아.”
나는 옷에 달라붙은 모래를 털고 일어섰다.
“사장님께서 저 혼자 별장에 떨궈 놓고 가서 국토대장정할 뻔했죠.”
“대체 휴대폰은 왜 가지고 다녀.”
휴대폰을 열어 보자 부재중 전화가 세 통이나 와 있었다. 그것도 근 한 시간 간격으로.
부지런히 도로를 걷고 있던 시간에도 전화가 와 있었다.
“싸가지 사장이란 사람이…….”
녀석들 셋이서 어버버거렸다. 야! 그걸 말하면 내가 뭐가 되냐……. 그래도 안 보이는 데서는 나랏님 욕도 한다는데…….
진여원이 핫, 하고 짧게 웃었다. 당연히 즐거워서 웃은 건 아니었다.
진여원이 나를 모래 바닥에 털썩 앉혔다. 그리고 옆에 그도 앉았다. 그는 면바지에 모래가 묻는데도 개의치 않고 봉지에서 캔 맥주를 하나 꺼내 땄다.
한 모금 마신 진여원이 여전히 입만 벌리고 있는 녀석들 셋을 향해 말했다.
“우리 누구 씨가 불만이 많은 것 같은데, 자리 좀 피해 주겠어요?”
우리라는 말 때문이었나. 학생증을 보여줬던 녀석이 검지를 들어 나와 진여원을 연달아 가리켰다. 혹시 둘이 그런 사이? 라는 듯한 행동에 재빨리 머리를 잘게 흔들었다.
진여원이 나를 술주정하는 사람 취급하듯 쳐다봤다. 흔들던 고개를 멈추고 짐짓 아무 일도 없던 척 바다를 향해 맥주만 홀짝였다.
녀석들 셋도 자기 몫으로 산 술과 안주를 담고 저 옆으로 이동했다. 그러면서도 우리를 연방 흘끔흘끔거렸다.
진여원은 무릎을 올리고 있는 내 다리를 내려다봤다.
빤히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 맥주를 입에 품은 채 발만 꼼지락거리며 모았다. 문득 그가 건물을 보며 했던 말이 생각났다.
이번엔 내가 갚아 줄 차례였다. 맥주를 꼴깍 삼켜 넘겼다.
“새삼 제 발이 예뻐 보이십니까?”
으스대는 말투처럼 나갔지만 상관없었다. 지금 나는 분이 풀린 상태가 아니므로.
“항상 느끼는 거지만.”
진여원이 말하는 동안 나는 새로운 맥주를 찾아 비닐에 손을 집어넣었다.
“발은 참 예뻐.”
맥주를 따려던 걸 멈칫했다.
“발만요?”
“그럼 뭘 또 바래.”
나는 손을 움직여 두더지 굴처럼 모래를 두 개나 팠다. 그 안에 발을 넣고 탁탁 덮었다. 기분이 꽁기꽁기했다.
“하나 더 있어.”
“됐습니다. 더 말 안 하셔도.”
“박석연.”
왜 부르나 싶어 고개만 옆으로 틀었다.
“소나기 같은데 따뜻하게 느껴지는 이름이라서.”
화악- 시원한 바닷바람이 진여원을 지나쳐 나를 덮쳐 왔다.
“그것도 예쁜 편이야.”
뺨 언저리가 화끈화끈 달아올랐다.
두더지 집에 가둔 발도 점차 달궈지는 것 같았다. 이 속에서부터 턱 끝까지 둥둥둥하고 무언가가 울리는 바람에 숨이 막혔다.
천천히 숨을 내뱉자 지금 속을 조이며 울리는 것의 정체가 심장이라는 것을 알았다. 손에 들고 있는 맥주 캔에서 또르르 물방울이 흘러내렸다. 움찔하고 살갗에 닿은 물방울을 털어 냈다.
사장님 이름도 예쁜 편입니다. 그런데 게이인 사람한테 왜 오해할 만한 발언을 막 던지세요? 부하 직원 놀리는 재미에 맛들이셨습니까? 어떤 말을 내뱉어야 할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진여원이 두더지집의 모래를 손으로 털어 냈다. 나는 밖으로 드러난 발을 슬쩍 모래 속에 다시 파묻었다.
“불리할 때만 묵비권 행사지.”
“불리하지 않은데요.”
“그럼 창피해?”
진여원이 모래가 묻은 손으로 맥주 캔을 쥐었다.
“……예.”
나는 캔을 내려놓고 차가운 손으로 뺨을 쓸었다.
“낯 뜨거운 말은 사장님이 하셨는데, 왜 제가 창피한지 모르겠네요.”
박석연. 소나기 같다는 이름을 직접적으로 들은 건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아버지가 엄마를 만난 때는 오래전의 늦여름, 황순원의 원작 소나기가 영화로 만들어진 때이기도 했다. 아버지는 아들이건 딸이건 낳기만 하면 석연이라 지어야 한다며 한사코 엄마를 설득했고, 진통이 오기 시작할 때 엄마가 이렇게 말했다고 했다.
니 마음대로 하시오- 라고.
아버지가 엄마 말투를 따라 하던 어릴 적 기억이 생각나 픽 웃음이 나왔다.
진여원이 팔을 뒤로 해 모래 바닥을 짚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입가에서 웃음을 지우고 그를 향했다.
편안해 보이는 그의 자세에 나도 모르게 따라 할 뻔했다. 내일 오전에 일찍 일어나야 한다는 압박감만 없다면 여행을 왔다는 착각을 할 정도로 여유로운 한 때였다.
그의 드러난 쇄골이 흡사 만지고픈 충동을 일게 했다.
“제멋대로인데 솔직하고 바른 게 희한해. 아버지 영향인가?”
그의 쇄골에서 눈을 떼며 정신을 차렸다.
“아버지요?”
마치 진여원이 우리 아버지를 알고 있다는 듯한 말이었다.
“어떻게…….”
“조교로 행정실 아르바이트 할 때.”
진여원이 맥주를 한 모금 마시더니 대답을 주었다.
“명품이라서 아르바이트 같은 건 안 하셨을 줄 알았는데요.”
“명품은 갈고닦아야 나오지.”
내가 군대 있는 동안 진여원은 조교를 하고 있었나 보다.
진여원이 유학 갔다는 소리는 오래전에 재운 선배에게 흘려들은 적이 있었는데, 아마 대학원을 마치지 않고 다녀온 듯했다.
“신기하네요.”
그때 알았으면 아버지에게 진여원을 많이 굴려 달라며 뒷공작을 펼칠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워도 별수가 없지. 뒷공작을 받아들이실 아버지도 아니니까.
“나중에 기회 되면 전해 드려. 내가 존경하는 분이라고.”
타인에게서 듣는 아버지에 대한 평가는 다소 생소하면서도 기뻤다.
“혹시 저 뽑으신 거……. 아버지 낙하산 같은 겁니까?”
진여원이 나를 하룻강아지 보듯 픽 웃었다.
“제트기인 줄 알고 뽑았는데 낙하산이면 곤란하지.”
맥주를 다 비운 진여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여원이 손을 펴서 내 쪽으로 내밀었다. 맞잡으라는 소리가 아닌 줄은 안다.
주머니 깊숙이 넣어 놨던 법인카드를 꺼내 올려 주었다.
“영수증은 인터넷에서 출력해서 드리겠습니다.”
홧김에 영수증을 좍좍 찢어서 버렸는데 결국 번거로움은 내 몫이었다.
나도 발바닥에 붙은 모래를 털고 양말을 신었다. 손으로 만져 보니 뒤꿈치가 까슬까슬했다. 아픈 부분을 확인해 보니 피딱지가 작게 굳어 있었다. 아까 한참 씩씩대고 걸었을 때 생긴 상처인 듯했다.
나는 뒤꿈치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신발 끈을 느슨하게 풀었다. 앞서 가는 진여원을 따라 잡으며 대학생 녀석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학생증이 엄지를 척 들어 인사에 화답했다.
먹은 맥주는 모래사장을 올라오며 쓰레기통에 버리고 처음보다는 가벼워진 비닐봉지를 흔들었다.
“걸어갑니까?”
“그럼 음주운전 할까?”
“사장님은 한 캔인데요.”
“걸어.”
비닐봉지와 안에서 캔들이 부딪히는 소리만 어두운 도로에 울려 퍼졌다.
이따금 파도가 거세질 때마다 품이 넉넉한 진여원의 스웨터는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흔들렸다. 비닐봉지를 오른손에서 왼손으로 바꿔 잡으며 입을 열었다.
“저 어떻게 찾으셨어요?”
“문자.”
“아……. 법인카드.”
횟집과 그 옆의 슈퍼를 오갔으니 내비게이션으로도 충분히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건 그렇고 나 혼자 떨구고 갔던 일에 대한 불만은 아직 풀리지 않은 채였다.
진여원이 우뚝 걸음을 멈추더니, 내 비닐봉지 안에서 맥주를 하나 꺼내 갔다. 나도 하나 꺼내서 그와 나란히 맥주를 마시며 도로를 걸었다.
일정 거리마다 세워진 가로등이 없었으면, 앞도 분간되지 않는 어둠에 갇혔을 것만 같았다. 주말이 아니라 그런지 별장지대를 지나다니는 차들도 없었다.
“그런데 별장도 가지고 계신가 봅니다.”
“어쩌다 보니.”
한숨을 들리지 않도록 푹 내쉬었다.
“사장님. 말 좀 길게 해 주시면 안 됩니까? 아까도 말이죠, 가면 간다, 오면 온다 정도는 말해 주셨으면 저 혼자 국토대장정할 일은 없었을 것 아닙니까.”
참고 있던 말을 던지자 진여원이 다시 걸음을 멈췄다. 그가 나를 돌아봤다.
“불쾌한데.”
너무 건방졌나 싶어 입을 꾹 다물었다.
“건방진데도 불쾌하지 않은 게 불쾌해.”
이번엔 혼잣말에 가까웠다.
“매력 한번 특이해.”
이어 그렇게 내뱉고는 그가 걸음을 옮겼다.
“매력 한 번만 더 있다가는 해고당하겠네요.”
해고 안 해, 라는 말 정도는 기다렸는데 아무런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진여원과 점차 거리가 벌어졌다. 뒤꿈치의 살갗이 다시금 벗겨지기 시작한 것 같았다. 새 운동화나 다름없는 맞춤 신발이라 구겨 신기도 아까웠다.
까치발로 걷듯 사푼사푼거리자 진여원과의 거리는 계속해서 벌어져 갔다. 그래도 같이 걷는 사람이 있어서인지 별장까지의 거리가 혼자 나왔을 때보다는 가깝게 느껴졌다. 사실 그런 마음도 아주 잠깐 들고 말았을 뿐이다.
서로를 밀어내는 같은 극 자석처럼 이내 진여원의 등이 멀어져 가로등 빛에 보였다가 안 보였다가 했다.
달려가도 그를 따라잡지 못할 만큼 멀어졌을 때였다. 진여원이 자신의 별장으로 쏙 들어갔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쪼그려 앉았다.
발 뒤쪽을 손으로 마사지하자 눈물이 찔끔 나올 만큼 따끔거렸다. 맥주 캔을 뒤꿈치에 가져다 댔더니 얼얼한 기색이 조금 가시는 듯도 했다.
맞춤 신발을 사도 정형화된 치수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장시간 걸을 때면 예외 없이 뒤꿈치가 나가 버렸다. 255도 아니고 260도 아닌 애매한 발사이즈를 가진 탓이었다. 고교 때는 장거리 달리기가 제일 싫었었지. 몸이 무거워서 그랬던 것도 있지만.
맥주를 홀짝이며 한참 숨을 돌리고 있는데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에 놀라 자빠질 뻔했다. 툭, 바닥으로 슬리퍼 한 쌍이 떨어졌다. 진여원이었다.
“감사……합니다.”
운동화를 벗고 슬리퍼로 갈아 신었다. 꽤 큰 사이즈라 앞뒤, 양옆이 전부 헐렁했다.
나를 두고 그냥 들어가는 모습을 봤을 때는 여기 한 구석이 허했는데 지금은 꽉 찬 것 같았다.
박석연 정신 차려라. 솔로 인생이 너무 길어서 진여원한테까지 이상한 감정을 느끼는 거다. 이러면 너만 손해다.
‘사랑은 일방적인 손해거든.’
문득 진여원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고개를 들어 진여원을 보자 그는 아무 표정 없이 내가 다시 걷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뭐지? 싶어 고개를 갸우뚱했다. 진여원이 한 말이 맞는 것 같은데, 언제 어디서 들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이불 펴 줘?”
“아뇨, 갑니다!”
봉지 안에 신발을 쑤셔 넣었다. 캔 맥주를 쥔 채로 걷자 발이 날아갈 것 같았다. 진여원의 걸음이 빠르다고 생각했지만 이제 보니 내 걸음이 느린 거였다. 꽁기꽁기했던 기분도 무색하게 입꼬리가 풀어졌다.
별장으로 돌아와 냉장고에 남은 맥주들을 일렬로 세워 두었다. 남은 것들은 내일 서울 올라가면서 가져갈 생각이었다.
진여원도 거실과 연결된 주방으로 들어오더니 냄비를 가스레인지에 올렸다. 그가 냉장고의 생수통을 꺼내 냄비에 물을 콸콸콸 부었다.
“뭐 하세요?”
“저녁.”
불을 켜는 진여원을 의아하게 쳐다봤다.
“안 드셨어요?”
그가 대답 없이 찬장에서 너구리 하나를 빼냈다.
“혹시……. 저 찾아다니신 겁니까?”
“박석연 씨.”
맥주를 손에 쥔 채로 눈동자만 올렸다.
“자뻑이 심한데.”
말은 여전히 밉상이었지만 나만 저녁을 거나하게 먹은 게 미안해졌다.
“제가 끓여 드리겠습니다.”
“파, 마늘. 냉장고에.”
말을 짧게 끊고는 너구리를 내 품으로 탁 던졌다.
맛있게 끓여 주고 싶었던 마음이, 물 대신 맥주를 들이붓고 싶은 심정으로 변모했다. 진여원은 그사이 거실 소파에 앉아 노트북을 펼쳤다.
나는 물이 팔팔 끓는 동안 파와 마늘을 냄비 안에 썰어 넣었다. 봉지를 뜯어 건더기 스프를 찢는 그 순간이었다. 다시마 세 개가 떡하니 면 위에 놓여 있었다.
다시마 두 개도 놀라웠는데 세 개라니!
진여원에게 이것 보라며 자랑하고 싶었지만, 그냥 참고 전부 물에 투척했다. 분명 다시마 두 개에 기뻐했을 때 권고 퇴직이라는 쓰나미가 몰려왔었지…….
왜인지 이번에는 세 배로 불길했다.
흘끔 진여원을 돌아보니 노트북 화면에 집중하는 중이었다. 나는 일부러 숨을 후, 후, 의식적으로 내뱉어 술기운을 지우려고 노력했다.
꼬들꼬들하게 익히는 걸 좋아하는지 푹 익히는 걸 좋아하는지 진여원의 취향을 모르기에 정석대로 5분을 끓여서 그릇에 옮겨 담았다.
젓가락으로 다시마 세 개를 건저내 보란 듯이 면발 위에 올리고 진여원에게 다가갔다.
“라면 다 됐습니다, 사장님.”
“두고 가.”
보아하니 그는 백화점 입점에 앞서 도착한 업무 메일을 확인하는 모양이었다.
사장이 일하고 있는데 눈치 없이 방에 들어가 잘 뻔뻔함까지는 생기지 않았다. 진여원은 내가 끓여온 라면을 보지도 않고 젓가락으로 휘저었다.
“아!”
그가 미간에 실금을 긋고 그제야 나를 쳐다봤다.
“그게…… 다시마요.”
“뭐?”
“세 개라서요.”
“그런데.”
그런데라니? 너구리 한 마리를 끓였는데 다시마가 세 개인 사실이 놀랍지도 않은가?
“너구리에 원래 다시마는 하나만 들어 있는 건 알고 계시죠?”
자기 입으로 명품이라고 했으니 라면을 한 번도 안 먹어본 것일지도 모른다.
“여기 지금 세 개가 들어있지 않습니까?”
“놀라야 해?”
진여원이 다시마가 세 개든 네 개든 개의치 않는다는 투로 말하고는 라면을 먹기 시작했다. 한 가닥씩 먹을 줄 알았는데 은근히 박력 있었다.
그는 젓가락질 몇 번에 걸쳐 라면을 다 먹더니 다시 화면에 집중했다. 나는 빈 그릇을 치우고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그의 앞에 놔두었다.
뭘 해야 하나 몇 번이나 진여원을 흘끔대다가 가방에서 디자인 스케치북을 빼내 두 다리에 올려두었다. 뭐라도 하는 척을 해야지, 안 그랬다가는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았다.
술 때문에 그런지 하얀 종이 위에서 연필이 제멋대로 엇나갔다. 그 바람에 얻어걸린 웨지힐 발등 라인이 좀 그럴싸했다.
“뭐 해?”
고개를 푹 숙이고 연필을 놀리는데 진여원이 불쑥 물었다.
“일…… 하는데요.”
“그런다고 잔업수당 나와?”
뒷목을 잡고 싶었다. 지금 진여원 당신이 문제라는 생각은 안 하나 보다. 사장이 일하고 있는데 직원이 어떻게 노냐는 말이다.
자리에서 일어난 진여원이 내 스케치북을 내려다보더니 한번 짧게 웃었다.
“술 마시면 감각이라도 상승하나.”
“저 별로 안 취했는데요.”
“디자인 좋네.”
‘2학년치고 디자인 좋네.’
나를 들뜨게 했던 대학 시절의 진여원이 순간 겹쳐 보였다. 그는 내가 가져다 놓은 맥주를 시원하게도 따서 목울대를 울리며 마셨다.
그때는 어떻게 하면 진여원과 친해질 수 있을까, 어떤 말을 꺼내면 저 선배 눈에 들 수나 있을까 설레했던 날도 있던 것 같은데 원수에서 사장으로 만나게 되다니…….
탁! 생각에 잠겨 있는데 내 앞으로 맥주 한 캔이 놓였다.
“박석연 씨도 마시지?”
웬일로 나한테 맥주를 대령하나 의심이 생겼다.
“감사합니다.”
나는 금세 물기가 서린 맥주 캔을 두 손으로 쥐고 진여원을 보며 홀짝거렸다. 그는 이미 한 캔을 다 비우고 새로운 맥주를 마시는 중이었다.
“혼자 먹었어?”
“혼자요?”
“바가지 쓴 건 아니고?”
“저녁은…… 혼자 먹었고 시가도 맞았던 것 같은데…….”
맥주로 입을 축이는데 입이 바짝바짝 말랐다. 차라리 만취한 상태였으면 좋았겠다. 나는 숨도 쉬지 않고 맥주 절반을 비워나갔다.
“난 또 누구한테 사기당해서 밥값까지 내준 줄 알았지. 그것도 법인카드로.”
맥주 캔 안에 숨겨진 입꼬리가 마치 웃고 있는 듯했다.
“제가 아무리 피라미드 회사에서 사기를 당했었다지만, 지금은 그 정도로 어리숙하지 않습니다.”
별장이 몰려있는 이곳은 고요함 그 자체였다. 집 근처에서 종종 들려오던 경적이나 취객들의 고성방가는 온데간데없었다.
그래서 괜히 맥주를 마시는 소리도 신경 쓰게 되고, 진여원과 눈을 마주치는 것도 부담스러웠다.
그런데 이 인간은 왜 저렇게 나를 빤히 보는지 모르겠다.
“하실 말씀…… 있으세요?”
“없는데.”
아……. 네, 그러시군요. 캔에 대고 중얼거렸더니 순간 윗입술이 따끔했다. 아차 싶어서 입술을 떼어냈는데 입구에 살짝 베인 듯했다.
손가락을 데었다가 떼어내 봤는데 다행히 피는 묻어나오지 않았다. 기가 찬 듯 쳐다보던 진여원이 어딘가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돌아온 진여원이 내 앞에 투명한 맥주잔을 놓아두었다.
“사장님, 혹시 제가 라면을 엄청나게 잘 끓입니까?”
“왜 그렇게 생각해.”
“맥주도 가져다주시고……. 컵도 가져다주시니까요.”
졸졸졸 남은 맥주를 잔에 붓고 다시 한번 눈치를 봤다. 모양 좋은 눈매 안에 담긴 동공이 자꾸만 나를 옴짝달싹도 못 하게 만들었다.
“착각 참 잘해.”
문득 경직된 표정을 숨길 수가 없었다.
“감도 없고.”
픽 웃은 진여원이 콕 안쪽을 찔러왔다. 맥주 거품이 혀끝에서 사르르 녹았다. 다 마신 캔을 버린 진여원이 욕실 방향으로 걸어갔다.
나는 그가 가져다 준 투명한 맥주잔을 두 손으로 쥔 채 그의 말을 몇 번이나 곱씹어볼 뿐이었다.
***
“그만 일어나지?”
낮고 시원하게 울리는 목소리에 꿍얼대며 이불을 파고들었다.
딱 5분만 더 자고 일어나면 아주 개운할 것 같은데. 아니 3분, 60초라도 좋으니 더 자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딱 거기까지 생각하고 몸을 번쩍 일으켰다.
젖힌 커튼에서부터 햇빛이 직선으로 침대를 쏘아 댔다. 눈을 비비고 저 앞에 선 남자를 바라봤다. 진여원이 소파 테이블 위에 올려둔 손목시계를 두르는 중이었다.
“일찍…… 일어나셨네요.”
“넌 늦게 일어나시고.”
그러니까 너도 당장 준비하라는 말이었다.
진여원에게 라면을 끓여다 바치고 맥주 한 캔을 더 한 뒤 누운 게 새벽 2시경이었다. 엑소시스트 한 편 찍을 것 같은 2층은 진여원에게 양보하고, 나는 계단이 보이지 않는 거실 소파에서 잠이 들었었다.
머리맡에 올려 둔 휴대폰을 확인하니 8시가 조금 안 된 시각이었다.
10시까지 가기로 했는데 왜 이 시간부터 난리야.
속으로만 투덜대고 욕실로 향했다. 욕실 진열대에는 열 개는 족히 넘어 보이는 언더웨어가 놓여 있었다. 같은 속옷을 이틀 입는 것만큼 찝찝한 일도 없기에 잘됐다 싶었다.
미지근한 물로 샤워를 하다 찬물로 잠기운을 몰아냈다. 한기에 몸서리가 쳐졌다. 수건걸이 옆에 걸려 있는 두터운 샤워가운에 눈이 갔다.
모텔에 있는 조악하고 얇은 리넨과는 다르게 천이 보송보송했다. 입고 나가면 미친놈 취급 받겠지. 머리를 털며 손으로 만지기만 해 봤다. 와인 한 잔과 함께 가운을 걸치고 저 안쪽의 대형 자쿠지로 걸어가면 어떤 기분일까 싶었다.
생각보다 샤워도 빨리 끝났겠다, 나는 팬티만 입은 채로 가운을 걸쳐 봤다. 천은 수건 두 개를 합쳐 놓은 듯한 두께로 몸을 착 감쌌다. 가운 하나에도 이렇게 포근할 수 있구나. 나중에 겨울 슬리퍼도 이런 재질로 만들면 딱일 듯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다 욕실 문 쪽을 바라봤다. 괜히 남의 집 비품 함부로 사용한 게 마음에 걸려 가운을 벗어 내렸다. 언더웨어는 꼭 필요한 거지만 가운은 안 써도 충분하니 말이다.
가운을 탈탈 털어서 다시 원위치시켜 놨다. 그때 욕실 문이 벌컥 열렸다. 욕실 슬리퍼를 신은 진여원이 발을 끄는 소리도 없이 세면대에 섰다.
머리를 정리하는 그가 거울 너머로 나를 쳐다봤다.
“재질이 좋네요. 나중에 겨울 슬리퍼 재질로 좋겠습니다.”
“부업하게?”
“예?”
웬 부업? 콜라보만 해도 머리가 다 빠질 지경인데, 그럴 만한 시간이나 주고 말해라.
“학교 앞에서 팔면 잘 나가겠어.”
“어른들도 털 슬리퍼 많이 신습니다. 그거야말로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죠.”
“성급해 보이는 건 그쪽이지.”
진여원이 거울 속으로 내 허리께를 가리켰다. 고개를 쑥 내렸다. 찰싹 달라붙은 팬티에 적당히 발기한 거기……가 도드라져 보였다.
찬물로 씻으면서 아침 발기는 해결된 줄 알았는데 이게 무슨 꼴이냐. 다급히 커다란 수건으로 허리를 감쌌다.
“건강하다는 증거입니다.”
“크기와 건강은 별 상관관계가 없나 본데.”
“그러는 사장님은!”
거기까지만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아침부터 성기로 대화의 장을 열고 싶지는 않았다.
진여원이 세면대에서 손을 씻고 있었다. 얼굴을 숙이고 있어서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보이지는 않았다.
나는 욕실 앞에 접어 놓은 후드와 청바지를 입었다. 무시당한 아래가 금세 쪼그라져 있었다.
그래, 저런 인간한테 잠시나마 가슴이 두근거렸던 것은 심장이 오작동한 것으로 해 두자. 저놈이 정말로 대학 때 날 아웃팅시킨 놈이면 어쩌려고.
나쁜 새끼한테 빠지는 건 한 번으로 족했다. 하물며 진여원은 여자 친구도 있던 이성애자였고……. 그런데 호적을 더럽히지 말라고 했었는데 솔로라는 소린가? 아무렴 뭔 상관이야. 그러거나 말거나였다.
냉장고에 남은 맥주를 바리바리 싸 들고 진여원의 노트북까지 챙겨서 문 앞에서 그를 기다렸다. 다가온 진여원이 구두를 신을 동안 옆으로 비켜섰다.
“라면 먹고 잔 건 난데 말이야.”
진여원이 밖으로 나가자마자 현관 거울에 내 얼굴을 비춰 봤다. 욕실 거울과 달리 가까이서 보니 눈두덩과 뺨이 부어 있었다. 잠을 얼마 못 자서 부은 것 같았다.
빨리 안 나가면 한마디 들을 것 같아 정원 밖에 세워진 차까지 한달음에 갔다. 뒤꿈치가 욱신욱신거려 몇 번이나 인상을 써야 했다. 조수석에 올라타서 노트북을 뒷좌석에 내려놓았다.
“아침 뭐 먹을 거야.”
진여원이 말했다. 물론 어제부터 꼭 먹어야겠다고 생각해 놓은 메뉴는 있었다. 부산까지 왔으니 곽일영과 이재화에게 자랑할 거리는 하나 찍어가야 했으니까.
“……밀면이요. 냉채족발도 괜찮……습니다.”
어제도 라면을 먹고 잔 사람이기에 우물거리며 대답했다. 내비게이션에 어딘가를 검색하는 진여원을 보며 공복 상태인 배를 매만졌다.
목적지를 정하자마자 진여원은 도로를 질러 나가기 시작했다. 밖으로 보이는 바다가 아침 공기를 만끽하지 않아도 충분히 시원해 보였다.
구름은 누가 손으로 헤집은 것처럼 얇게 퍼져 있었다. 예쁘다 싶어 넋 놓고 운전석 방향의 바다를 구경하는데 진여원의 시선이 뺨에 부딪혔다. 이유도 없이 민망해져 붉어진 뺨을 긁적였다.
“긁지 마.”
“이제는 제 얼굴 긁는 것도 허락받아야 합니까.”
내리쬐는 햇빛과 더불어 잘 떠지지 않는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그리고 일부러 뺨을 더 박박 긁었다.
“그러다 터지겠어.”
뭐가요? 하고 의문만 담았다. 핸들을 가볍게 쥐고 있던 그가 내 뺨을 가리켰다.
“홍시.”
놀리는 듯한 뉘앙스에 발끈했다.
“어제부터 왜 자꾸 사람을 감 취급하십니까.”
대답한 그 순간이었다. 그의 옆모습을 쳐다보다 묘한 데자뷰를 느꼈다.
못 먹는 감.
못생긴 감.
홍시.
감이 삼연타로 내 머리를 후려쳤다.
설마……. 그 순간 급격히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
전부 좋았다. 부산에서의 일정도 하루 더 걸렸지만 완벽하게 끝마쳤고, 부서 사람들에게 냉채족발&밀면 인증샷도 자랑스레 내보여 주었다.
왜 싸오지 않았냐며 징징대는 곽일영에게 부산 가서 드세요, 하고 대수롭지 않게 대꾸해 준 것까지도 아주 좋았다. 그것을 제외하면 좋지 않은 일만 남아 있었다.
요 며칠 막힌 디자인과 마찬가지로 가슴이 응어리가 진 것처럼 답답했다. 아마 일이 잘 안 풀려서 그런 것이리라 여겼다.
우리 부서에서 서른 개에 육박하는 디자인을 내놓았지만 내 것은 세 개, 곽일영은 두 개, 이재화는 세 개 채택된 게 끝이었다. 내는 족족 퇴짜를 맞은 두 벌 중 하나가 이 레오파드 의상이었다.
체크무늬 7부 스키니에 배치된 붉은 목티와 레오파드 남방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양말은 흰색으로 발목까지 올라왔다. 마네킹이 입어서 촌스럽지 모델이 입으면 패셔너블할 듯했다.
대체 흰 양말에는 어떤 구두를 신겨야 하나. 플랫슈즈, 웨지힐, 통굽 전부 아웃이었다. 이것저것 그려 보던 것을 구겨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곽일영이 내 행동을 따라 하며 눈썹을 곤란하게 늘어뜨렸다.
“석연 씨, 요 며칠 신경질적이야.”
“제가요?”
“응. 석연 씨 발도 아주 울상이고.”
“발이 표정도 지어요?”
“그럼, 발소리만 들어도 알아. 그날 사람의 기분이 어떤지. 나쁠 때는 쿵쿵쿵, 좋은 때는 콩콩콩.”
곽일영이 의기양양하게 대답했다. 쿵쿵쿵. 콩콩콩. 작대기 하나 다를 뿐인데 다가오는 느낌 자체 또한 반대였다.
“제가 쿵쿵쿵거렸습니까?”
“아니, 이상해. 쿵쿵쿵, 콩콩콩, 쿵콩쿵콩거려.”
발음하기도 힘든 단어를 연달아 내뱉는 게 용했다.
“드디어 제가 조울증이 왔나 보네요.”
“석연 씨 그거 약물 치료해야 되는데. 난 끊은 지 오래됐는데 괜찮은 병원 소개시켜 줄까?”
“병원은 괜찮고요. 곽 대리님, 괴롭히는 사람 있으면 꼭 말해요…….”
조져 줄 테니는 뺐다. 하긴 지금 내 일로도 머리가 복잡한 판국에 누굴 챙길 수가 있겠나.
“우리 팀에 석연 씨 들어와서 진짜 엄청 든든해. 수영도 잘하구. 발도 예쁘고.”
그래, 결국은 모든 게 발로 시작돼 발로 마무리됐다.
두더지 굴에 숨겨 두었던 발을 파헤치던 진여원의 손이 생각났다. 발등에 살짝 닿았던 손의 열기 때문에 모래 안으로 더 깊숙이 발을 넣어 버렸었다.
내 발소리가 이상해진 이유에 대해서는 내가 더 잘 알고 있다.
진여원.
그리고 지금 이 상황이 아주 최악을 암시한다는 것도.
언제나 그래 왔던 것처럼 더 자라기 전에 싹을 잘라내야 했다. 김대영과 헤어지고 군대 안에서도 한 번, 사회에 나와서도 또 한 번, 이성애자에게 끌린 적이 있었다.
싹이 돋기 전에 잘라 내면 열매를 틔웠을 때 제거하는 것보다는 덜 아프다. 이미 김대영과 헤어질 때 심장 반쪽을 잘라 내지 않았던가.
그런데 반쪽만 남은 게 아직도 제 기능을 잃지 않고 이따금씩 나머지 반쪽을 채워 달라며 난리였다.
이렇게 쿵쿵쿵.
그 순간 불현듯 머리에 반짝하고 불이 들어왔다. 사진의 체크무늬 바지를 내려다봤다. 편협하게만 생각하고 있었다. 모델이 신는다고 해서 전부 또각또각일 필요는 없었다. 클리퍼, 구두보다는 워커 느낌이 물씬 나는 클리퍼가 더 어울릴 법했다.
발등은 붉은색 레오파드 무늬를 가미하고 그 외의 감싼 부분과 통굽은 검은색으로 색칠했다. 잊어버리기 전에 간단히 도식화한 작업지를 곽일영에게 내밀었다.
“쿵쿵쿵도……. 영감을 주네요.”
곽일영이 오~ 예쁘다, 예쁘다, 하면서 작업지를 팔랑거렸다. 좀 전부터 이재화가 대화에 끼고 싶어 이쪽을 올까 말까 주저하는 기색이었다.
“과장님.”
“그래요.”
이재화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저 커피 좀 뽑아 오겠습니다.”
“그래요.”
이번엔 처진 목소리였다.
“아, 그리고. 오늘 요한 씨 온다고 했거든요. 혹시 오시면 이것 좀 대리님이 대신 전해 주세요.”
그간 우리 팀이 디자인한 도식지를 곽일영에게 주었다. 콜라보 행사까지 커트라인이 아슬아슬해서 아마 오늘 중으로는 전부 OK 사인을 받아야 할 것 같았다.
내가 직접 주는 편이 더 좋겠지만, 이왕 회사에 온 거 내 얼굴보다는 곽일영을 보는 게 낫겠지 싶었다.
“사진에 있는 사이즈대로 적어 주면 되지?”
“예, 제가 따로 표시해 놨으니 그대로 주시면 돼요.”
“응응, 알겠어. 커피 맛있게 마시고 와.”
커피 먹으러 나간다는 소리는 암묵적으로 시간을 좀 소요하겠다는 뜻이 숨어 있었다. 나는 휴대폰만 챙겨서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빈 회의실에 있는 머신에서 커피를 뽑아 옥상으로 올라갔다. 그물 네트가 쳐진 테니스장을 빙 한 바퀴 돌아서 옥상 난간에 팔을 기댔다. 저 밖으로는 수많은 고층 건물들이 빼곡하게 차 있었다.
날씨는 좋은데 시야는 뿌옜다. 아마 서울 공기가 부산보다는 좋지 않기 때문이겠지. 바닥에 굴러져 다니는 테니스공을 주워 탁탁 튕겼다. 그러다 공을 저 멀리로 던지고 휴대폰을 꺼냈다. 오랜만에 아버지 목소리나 들을 생각이었다.
기분이 싱숭생숭할 때마다 아버지와 대화하고 나면 한 꺼풀 속이 시원해지곤 했다. 투박한 벨소리가 흘러가고 얼마 안 되어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 석연아. 이 시간에 어쩐 일이냐.]
“잠깐 쉬는 시간이에요. 아버지는 밭이세요?”
[아니 잠깐 병원에 왔다.]
“병원이요?”
급히 물었다.
[놀라기는. 그냥 네 엄마랑 건강검진 결과 받으러 들른 거야. 요새 네 엄마 머리가 자꾸 아프다고 하기에. 결과 보니 별문제는 없는 듯하구나. 아마 주말 농장 만든다고 골머리 썩다 보니 그런 것 같아.]
“그래도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 주세요.”
[애들도 아니고, 허허.]
“그나저나 엄마랑 주말 농장 운영하실 생각이세요?”
[그래, 대여 형식으로 도시 사람들한테 할까 한다. 네 밭도 하나 따로 준비해 두마.]
“제가 밭갈 시간이 어디 있어요. 하하.”
웃음에 안도의 한숨을 섞어 내보냈다.
“그런데 아버지…….”
전화도 한 김에 아무래도 이직한 회사에 대해서도 언급해야 할 성싶었다.
“혹시 진여원이라고 기억하세요? 대학 행정실에서 조교로 아르바이트 했다던데…….”
[진여원……?]
아버지가 곧 생각이 난다면서 말을 이었다.
[아, 그래그래. 그 잘생긴 친구 기억하지. 갑자기 그 친구는 왜?]
“그게……. 별건 아니고. 저 회사 옮겼어요.”
[……그랬구나.]
아버지가 잠시 뜸을 들이다 대답하셨다. 아마 이유를 대충이나마 짐작하고 계시리라 생각됐다. 죄송해요, 라는 말이 목구멍에 걸려서 나오지 않았다. 아버지도 듣고 싶어 하지 않는 말이라는 것을 안다.
“지금 제 회사 사장님이 진여원이에요.”
[그 친구가?]
“예.”
[그래, 뭘 해도 될 것 같더니 벌써 회사 사장님인가 보구나.]
“저도 뭘 해도 될 것 같다고 어렸을 때 그러셨잖아요.”
[석연이 넌 내가 너무 오냐오냐 키웠지.]
“후회하세요?”
[이 녀석아. 보물을 안고 후회할 사람이 세상 천지에 어디에 있겠냐. 우리 부부 아이는 못 볼 거라 생각하고 살아오다가 느지막이 얻은 보물인데, 아까워서 밖에 내놓을 수가 있었어야지. 그건 지금도 그렇다.]
저도요. 아버지 엄마, 모두 제 보석들이세요. 낯간지러운 말이라 밖으로는 못 뱉고 입만 달싹거렸다.
[그래도 그 친구……. 여러모로 복잡하고 힘든 상황이었을 텐데 잘됐구나.]
뭐가 복잡하고 힘들어요? 아버지에게 되물어보고 싶었다. 물론 아버지가 이야기 해 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행정실에 계실 때도 학생들 이야기는 집 안에서 한 번도 꺼낸 적 없던 분이셨다.
“사장님이 아버지 존경한다고 전해 달라셨어요.”
[존경은 내가 그 친구를 해야지. 젊은 녀석이 어찌나 속이 깊은지. 누구 남편이 될지 몰라도 아주 괜찮은 친구야. 하물며 너 때도……. 허허, 늙으면 이렇게 말이 많아지는지 원. 얼른 너도 들어가 봐라, 일하는데 통화가 너무 길어지는구나.]
“예, 조만간 찾아뵐게요.”
[그래, 구두 예쁘게 만들고.]
웃으면서 아버지와 전화를 끊었다. 건강검진에서 별 이상이 없다고 했으니 걱정은 한시름 덜었다. 그런데 도통 아버지가 무슨 말을 하려다 주워 담았는지는 짐작 가는 바는 없었다.
더운 날씨 덕에 카푸치노가 뽑았을 때와 같이 뜨거웠다. 발을 들어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 공을 또르르 굴리고는 사무실로 걸음을 옮겼다.
2층 회의실은 우리 팀이 이용 중이라는 팻말이 달려 있었다. 곽일영과 김요한이 회의를 하는 것 같았다. 들어가서 도와줄까 하다가 어차피 완성본이니 별문제는 없을 터인지라 그만뒀다.
사무실로 돌아오니 이재화도 어디를 갔는지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자리에 앉아서 마저 클리퍼를 그려 나갔다. 이 속도면 금세 회의실로 가져다줄 수 있을 듯했다.
이것만 주고 방해 말고 얼른 빠져나와야지. 김요한에게 잘되면 한턱 쏘라고도 전하고. 콜라보레이션 런웨이만 끝나면 한시름 덜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일부러 쓸데없는 생각들을 키워 나갔다.
“시간아 가라, 빨리 가라.”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시간이 지나면 지금 복잡하게 얽혀 있는 답이 없는 이 생각들도 차차 정리되어 나갈 것이다.
순간 나는 입에 머금은 카푸치노를 삼키지 못한 채 그대로 멈췄다. 그간 진여원에게 대놓고 묻지 못했던 이유를 지금 알아버린 탓이었다.
그 소문을 정말 당신이 낸 것이 맞느냐는 질문에 대해서.
그가 어떤 변명이라도 했을 때, 또는 정말 그가 아니었을 때…….
분명 싹은 잭의 콩나무처럼 순식간에 자라 버릴 것이다.
***
“5시까지 이제 30분 남았습니다. 빨리빨리 옮기세요.”
이재화가 나와 곽일영을 재촉했다.
김요한의 공장에서부터 온 구두 박스를 한 아름 안고 대기실로 이동했다. 예정대로라면 어제 가져다 놨어야 하는데, 하나 남은 구두가 끝까지 퇴짜를 맞은 터라 오전부터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우리 부서와 타 부서까지 합쳐 총 쉰 켤레. 그중 서른 켤레가 쉬즈에서, 나머지는 옴므 팀에서 제작한 것들이었다. 모델들 또한 오전부터 분주했다.
사이즈가 어긋나 급조한 옷들도 있는지 여기저기 모델들의 체형에 맞춰 옷핀을 꽂아 넣고 있었다. 구두 박스에는 마네킹이 입고 있는 옷 사진이 붙어 있어 분류하는데 어려움은 없었다.
대기실 중앙 거울 앞에 앉은 진여원이 끌로이 대표와 한참이나 말을 나누고 있었다.
오늘은 평소 보던 안경이 아니었다. 그가 입고 있는 옷만큼이나 빈티지함이 느껴지는 제품이었다. 모델들 속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걸 보니 좁은 회사 안이라서 그가 잘나 보였던 건 아니었다.
그래, 아주 잘나셨어, 아주 모델이 따로 없구만.
구두상자를 열어서 한 개씩 최종 체크를 하는 동안 속으로만 구시렁댔다. 허준성과 우리 팀만 런웨이로 차출이 된 터라 손도 여유 있지는 않았다.
훌렁훌렁 내 앞에서 옷을 벗는 모델들에게 놀란 것도 처음뿐이었다. 물론 여자보다 남자 모델에게 눈이 가는 건 인지상정이었다.
“자기 발 되게 예쁘다.”
곽일영은 일은 안 하고 눈꼬리를 길게 찢은 화장을 한 모델의 발 앞에서 칭찬을 해 대고 있었다. 모델도 기분 좋게 웃으며 자기 발을 곽일영에게 내밀어 보였다.
“자기, 만져 봐도 돼?”
“그럼요.”
곽일영의 얼굴이 귀여우니 저런 것도 먹히는구나.
“곽 대리님. 큐빅 떨어지려고 하는데 이것 좀 봐주세요.”
“……알겠어.”
모델의 발을 아쉽게 놓더니 내 쪽으로 시무룩해져서 왔다. 달랑거리는 큐빅들을 순간접착제로 붙이는 동안에도 시선은 연방 남들의 발로 향해 있었다. 남은 상자를 전부 가져온 이재화도 모델 틈 사이에서 이리저리 치였다.
한 개, 두 개, 나도 천천히 구두를 확인한 다음 허리를 일으켰다. 자신이 맡은 옷을 입어 보는 모델들이 내 주변을 휙휙 지나쳐 갔다.
무거운 허리를 두드리고 있는데, 상체를 탈의한 채 장골이 슬쩍 보이도록 바지를 내려 입은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어!”
“어?”
남자와 내가 동시에 탄성을 터뜨렸다.
“이게 누구야. 석연 형!”
“어……. 류준아.”
“오랜만이네, 내 전화는 왜 안 받아.”
류준이 성큼성큼 다가와서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이 업계에서는 일상적인 풍경인지 누구 하나 신경 쓰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회사 사람들이 볼까 봐 류준이 감싼 팔 안에서 자연스럽게 빠져나왔다.
“바빴어?”
“조금. 잘 지냈지?”
“그럼 나야 잘 지냈지. 그날 형 그냥 그렇게 가서 내가 뭐 실수한 줄 알았잖아.”
로열패밀리에서 가벼운 페팅만 하고 헤어진 녀석이었다. 체일 슈즈를 그만두게 된 사진 속 인물이기도 했고.
“근데 형 슈즈 디자이너였어?”
여기서는 그냥 회사원이라고 말하고 다녔으니 류준이 놀라워하는 것도 당연했다.
“응, 넌 모델인 줄 몰랐다 야.”
여태 류준이라는 이름은 게이 바에서 사용하는 가명인 줄 알고 있었다.
“류준 씨, 와서 이것 좀 입어 봐요.”
끌로이 직원 중 하나가 그를 황급히 불렀다. 류준이 내 팔을 잡더니 귓가에 속삭였다.
“형, 이거 끝나고 술이나 같이 한잔할래? 전에 못한 거 오늘 하자.”
“봐서.”
“전화 꼭 받고.”
류준이 내 뺨을 쓸어내리더니 탈의실로 걸어갔다. 혹시 누가 본 사람은 없나 싶어 뺨을 닦으며 주변을 쓱 둘러봤다.
진여원이 턱을 괴고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무심해 보이는 표정으로 거울 앞 화장대를 툭툭 쳤다. 그가 몸을 일으키자 모델들과 나란히 할 만큼 시선이 올라갔다.
진여원이 걸어오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입이 메말랐다.
“박석연 씨.”
“예.”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포카리스웨트 하나 사 와.”
바빠 죽겠는데요, 라고 말하고만 싶었다. 대신 후! 한숨만 크게 쉬고 대기실 밖 복도에 놓인 자판기로 향했다.
타이밍 안 좋게도 자판기의 포카리스웨트에 품절 표시가 떠 있었다. 비슷한 게토레이를 뽑아 갈까 하다가 진여원 성격에 퍽도 그냥 마시겠다 싶어 아예 밖으로 나왔다. 편의점까지 달려가서 페트병 세 개를 계산하고 대기실로 돌아왔다.
왔습니다, 말하고 문을 여는데 왠지 분위기가 싸했다. 주변이 복잡한 가운데 진여원의 근처에 몰려 있는 사람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어두웠다.
“이거 안 맞아요. 한 치수 정도야 늘 있는 일이니 워킹에 문제없는데, 두 치수면 위험해요.”
나는 체크무늬 바지에 흰 양말을 신은 모델을 보고 서둘러 다가갔다. 내가 디자인한 클리퍼가 바닥에 덩그러니 놓여 있던 탓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곽일영에게 대신 부탁했었던 구두 다섯 켤레도 마찬가지로 바닥에 놓여 있었다. 곽일영이 나를 잡아당겼다.
“석연 씨, 큰일 났어. 내가 사이즈 미스로 알려 줬나 봐.”
곽일영이 속삭이며 울상을 지었다.
끌로이의 대표가 짜증스레 머리를 뒤로 쓸었다. 팔짱을 끼고 있던 진여원이 여섯 켤레의 사이즈를 확인하고는 모델들 앞에 재배치했다.
“의상, 화장 전부 바꿀 수 있겠습니까?”
“지금 와서요? 시작 10분도 안 남았어요.”
끌로이 대표가 제정신이냐는 듯 굴었다.
“15분만 시간을 미루죠.”
“진 대표님! 누구 얼굴에 먹칠할 일 있습니까?!”
“미뤄진 것에 대한 책임은 저희 쪽에서 지겠습니다. 방문한 모든 분들에게 윰 한정판 구매 쿠폰 나눠 드리도록 하고, 추첨식 파크뷰 디너 쿠폰까지 전부 지급하죠. 이후에 생기는 문제에 대해서도 끌로이는 언급되는 일 없도록 처리하겠습니다. 미안하지만, 끌로이 직원 분들 수고 좀 부탁드립니다.”
진여원이 허리를 굽혀 그들에게 사과했다. 나는 머리가 하얗게 바래 가고 있었다. 모델과 코디네이터들이 바뀐 의상에 맞춰 화장과 의상 사이즈를 재점검하기 시작했다.
화가 나 있는 대표와 진여원이 나누는 말도 귀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허준성의 팀은 우리를 기가 막힌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연장은 15분이었지만 그들이 완료를 지은 것은 단 10분도 되지 않았을 때였다. 체크무늬 바지는 가장 마른 모델의 체형에 맞춰 나왔기 때문에 사이즈를 늘릴 수가 없었다.
모델은 결국 두 치수나 작은 클리퍼를 신어야 했다. 그나마 힐이 아니었고, 양말까지 신은 의상이라 다행이었다.
워킹을 준비하는 류준이 나를 지나쳐 가며 이런 일은 자주 있으니 너무 걱정 말라는 위로를 건넸다. 나는 그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서 있었다.
곽일영과 이재화도 마찬가지였다. 시작 사인이 떨어지고 런웨이에 필요한 인원 외는 전부 대기실 밖으로 내몰렸다.
관람석에 앉아 뿌듯함을 느끼며 구경해야 할 시점에 윰의 직원들만 대기실 옆 도구방에 모여 있었다. 마지막으로 들어온 사람은 진여원이었다.
“문제 있던 구두, 어느 부서가 제작했습니까.”
그가 무표정하게 말했다. 허준성의 팀과 나머지 한 팀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우리를 향했다.
“저희 팀입니다.”
이재화가 면목 없음에 작게 대답했다.
“공장에 넘긴 사람은?”
곽일영이 나서려는 것을 그의 옷을 잡아 만류했다. 고개를 숙인 채로 곽일영을 보며 잘게 고개를 흔들었다. 어차피 내 몫이었던 일이었다.
“제가……. 넘겼습니다.”
허준성을 비롯해 나머지 사람들이 혀를 찼다. 진여원이 말없이 나를 빤히 내려다봤다. 숨이 턱턱 막혔다. 한참을 침묵하던 그가 안경을 벗어 내렸다.
“박석연 씨.”
“예.”
그의 입꼬리 한쪽이 올라갔다. 어이없어하는 것 같았다.
“회사 말아먹으려고 입사했습니까?”
“아닙……니다.”
“재산 관리 그것밖에 못합니까, 디자인만 달랑 그려 두면 할 일 다 한 건가.”
“제가 책임지고…….”
싸늘하게 표정이 가라앉은 진여원이 내 말을 잘라냈다.
“너 지금 나랑 장난해? 책임지고 사표 내면 뒷감당은 누가 해. 이재화팀, 너희 때문에 끝에 끝까지 미뤘는데 결국 이런 꼴까지 보게 할 셈이었어?”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진여원의 말이 다 맞았다. 그가 이토록 화난 것도 처음 봤다. 내게 저리 차갑게 구는 것 또한 마찬가지였다.
대학 때도 따지던 내게 무심하게 말한 게 다였었는데, 가슴이 지끈지끈거렸다.
“저 팀이 뭐 그렇죠. 사장님 너무 걱정 마시고.”
“문제 팀만 남고 전부 나가요.”
진여원이 허준성의 말을 막으면서도 시선은 내게 못 박아 두고 있었다.
허준성이 히죽거리는 모습에도 아무런 감정이 일지 않았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여전히 내 손에 심부름 봉지가 들려 있다는 걸 깨달았다.
“사장님, 제가 설명 드리겠습니다.”
곽일영이 마치 울 것 같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책임은 제가 지겠습니다.”
이재화가 말을 이었다. 진여원은 더없이 차갑게 대꾸했다.
“그만두려면 사이좋게 세 명이 다 나가.”
왈칵하고 무언가가 치밀었다. 화는 아니었다. 그저 속이 상했다. 그것도 손에서 힘이 다 빠질 정도로…….
“너희 부서 왜 따로 나눠 줬는지 기억 안 나? 디자인 특화 하나 믿고 감수한 부서였지, 그런데 믿음을 이따위로 내던져? 갈가리 찢어서 다른 부서 먹이로 넣어 줘야 직성이 풀리겠어?”
“……제가.”
목이 꽉 막혔지만, 간신히 말을 이어나갔다.
“다음부터는 절대 이런 실수가 없도록…… 하겠습니다.”
“나가. 나가서 네가 어떤 꼴을 만들었는지 구경해.”
이번 런웨이는 세노스, 체일 슈즈, 디바리 등등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브랜드 관계자들도 참석한 자리였다. 시작 시간이 연기가 됐다는 건 그만큼 까일 거리를 제공했다는 것이었다.
다리를 움직이지 못하는 나를 곽일영이 잡아끌었다. 나는 사 온 음료도 내밀지 못하고 비척거리며 밖으로 나왔다. 복도를 지나가다 보인 쓰레기통에 음료를 버렸다. 이재화가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박석연 씨, 앞으로 잘하면 되니까 너무 침울해하지 말아요.”
“내가 잘못한 건데 미안해, 정말 미안해.”
“괜찮……습니다.”
입술을 꽉 깨물었다. 눈이 발갛게 달궈지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상사에게 혼났던 일이 한두 번도 아니었다. 체일 슈즈에 있을 때는 더 심한 말도 들어봤었다. 그때는 괜찮았는데, 왜 지금은 견디기 힘들 정도로 이 안이 쓰린지 모르겠다.
모델들 워킹이 한창인 런웨이장으로 가 윰 지정 좌석에 앉았다. 저 안쪽에서부터 걸어 나온 모델은 뒤꿈치가 나갔는데도 표정 하나 안 변하고 턴을 했다.
물론 모델의 뒤꿈치가 까진 것을 알아본 사람은 나와 우리 팀원들뿐이었다. 의상과 더할 나위 없이 매치된 신발에 만족해하지도 못하고 두 손을 펴서 얼굴을 가렸다.
나는 모델들과 함께 대표들이 나와서 인사를 하는 동안에도 고개 한 번 들지 못하고 발치만 내려다봤다.
옥상에 올라가고만 싶었다.
***
예정대로였으면 팀별로 회식을 했을 텐데, 그럴 만한 분위기가 아니라 각자 집으로 향했다.
이재화가 우리끼리 늦은 저녁이나 먹자며 권해 왔지만 죄송하다며 거절의 말을 건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연기된 런웨이에 대해 관람객들이 크게 왈가불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방문한 연예인 여럿이 윰의 구두를 사전 예약하고 가기도 했다.
버스를 타고 갈 기운도 없어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침대에 털썩 누워서 천장을 눈을 깜빡거리며 올려다봤다.
어렸을 때 크리스마스 선물로 레고 세트를 받은 적이 있었다.
거대한 성과 그 앞을 점령한 해적선을 만들다가 지쳐 남은 조각들은 상자에 담아 보관했었다. 조금 쉬다가 다시 만들 생각이었지만, 방치된 시간이 생각보다 길었고 다시 흥미가 생겨 모아 둔 조각을 꺼내 든 것은 여름이 되었을 무렵이었다.
그렇게 레고를 완성시켜 놓으니 조각 서너 개가 부족했었다. 그 몇 부분 때문에 레고 모형은 완벽하지 않았다.
처음 레고를 받은 후 완성을 했으면 조각을 잃어버릴 일이 없었을 텐데, 어린 마음에도 후회가 내내 남아 그 일 이후로는 되도록 해야 할 일은 미루는 법이 없었다.
그건 공부나 일도 마찬가지였다. 체일 슈즈에 있을 때는 내가 잘못하지 않은 일로 꼬투리를 잡힌 게 대다수였다. 그러나 이번은 아니었다. 내 실수가 명확하기에 이렇게 나 자신이 한심하고 속이 상한 것이다. 결코 진여원이 차갑게 나를 봐서가 아니라…….
침대 밑에 떨어져 있던 휴대폰이 부르르 진동했다. 얼른 잡아서 확인하고는 혼자 헛웃음을 지었다.
누구이기를 바랐기에…….
나는 류준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류준아, 오늘 수고 많았어.”
[수고는 무슨. 형이 고생했지.]
“아냐. 근데 왜……?”
[뭐야, 잊었어? 끝나고 만나자고 했잖아. 형 집에 간 거 같더만.]
“아……. 류준아, 오늘은 그냥 집에서 쉬어야겠다.”
[에이, 문제 있었어도 잘 끝났으면 됐지. 왜 처지고 그래.]
“다음에 연락할게.”
[으~ 알았어.]
전화를 끊고 침대에서 부스스 일어나서 욕실로 걸어갔다.
거울에 얼굴을 비춰 보자 세상 다 산 것 같은 남자 하나가 서 있었다. 뺨을 짝 쳐서 기운을 북돋았다. 삽을 들고 땅을 열심히 파던 20대 초반으로 회귀하는 기분이었다.
샤워를 하며 마음을 바꿔 먹었다. 이렇게 침울해 있느니 차라리 미령이네 가게에 가서 기분 다 털어 내고, 내일부터는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회사를 가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진여원에게 신경 쓰는 것도 떨쳐 내고 싶었다.
류준이 다른 약속을 잡지 않았기를 바라며 그에게 문자를 보냈다.
[한 시간 뒤에 로열패밀리에서 볼래?]
30초도 안 되어 ‘OK’라는 짧은 답장이 도착했다.
***
단가라 패턴 티가 이 바지에 꽤 어울릴 것 같아 구입했는데 생각보다 더 캐주얼한 느낌이었다. 발이 편한 워커까지 신으니 삶에 찌든 회사원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로열패밀리 입구에 걸려 있는 전신 거울에 모습을 체크하고 계단을 내려갔다. 잠시 쉬는 타임인지 나름 잔잔한 팝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사람이 많아 에어컨을 풀가동 시켜도 내부가 후끈후끈했다. 입구에서 비비적거리는 커플을 지나쳐 몇 자리 남지 않은 바 테이블을 차지했다. 미령과 새로운 아르바이트생으로 보이는 어린 녀석이 반가이 나를 맞았다.
“웬일이야? 무슨 바람이 들어서 물 살려 주러 나왔어?”
이마를 가린 앞머리를 미령이 툭 건드렸다. 검은색 앞치마를 허리에 네모나게 묶은 미령이 입고 있는 와이셔츠가 빳빳했다. 아마 새로운 아르바이트생 때문에 평소보다 깔끔하게 하고 나온 것 같았다.
“약속 있어서.”
“별로 두근대는 약속은 아닌가 봐.”
미령이 버드와이저 한 병을 내밀며 대꾸했다.
“그냥 뭐.”
“석연아. 넌 그냥 자위기구나 하나 사라. 그걸 애인으로 삼는 게 낫겠다.”
푸핫- 컵을 닦던 아르바이트가 폭소했다. 나는 미령의 말에 반박하지 못하고 가게 내부를 죽 둘러봤다. 류준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것 같았다.
담배 연기와 향수가 뒤섞여 음습한 냄새를 자아냈다. 지금은 괜찮아도 내일이면 머리와 옷 할 것 없이 냄새에 찌들어 있을 것이다. 문득 뒤쪽의 원형 테이블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김요한이 친구들과 함께 술을 마시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김요한이 내게 아는 척을 했다.
이리 와서 같이 놀자는 신호에 미령에게 슬쩍 물었다.
“저 사람 자주 와?”
“요 한 달 부쩍 그러네.”
미령이 다른 곳을 보며 대답해 주었다. 자리를 일어서려는데 미령이 나를 붙잡았다.
“요새 질 나쁜 애들 좀 많으니 조심해라. 김대영 새끼도 문턱이 닳도록 찾아온다. 칼부림 안 나게 조심해.”
“그건 칼부림 할 용기도 없는 새끼야.”
이태원에 널리고 깔린 게 게이 바였다. 로열패밀리만 찾는 이유는 미령 때문도 있거니와 외국인이 거의 없기 때문이었다. 개인적으로 외국인을 별로 선호하지 않는 취향 탓이겠지만.
나는 버드와이저를 들고 김요한의 테이블로 다가갔다. 네 명이 둘러앉아 양주를 마시는 중이었다. 테이블에 앉아 양주를 땄다는 건 대놓고 괜찮은 남자를 꼬시겠다는 소리였다. 테이블을 잡고 양주를 마시면 기본 50만 원은 육박하니 말이다.
“박석연 씨, 인사해요. 제 친구들입니다.”
“안녕하세요.”
말은 한 번만 하고 눈으로만 김요한의 세 친구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친구 중 진하게 생긴 놈 하나가 자신의 옆자리를 터 줬다. 옆에 앉아 맥주를 홀짝이는데 놈이 내게 따른 양주를 건넸다.
“맥주면 충분합니다.”
김요한의 친구들과 같이 어울릴 생각은 없기에 단호하게 거절했다. 사양하지 않고 한두 잔 마시다 보면 한도 끝도 없다. 김요한은 이미 잔뜩 취해서 소파에 늘어지다시피 몸을 기대고 있었다.
“요한 씨, 많이 취하신 것 같네요.”
“예. 오늘 좀 취했습니다.”
“……대리님 때문에요?”
“대충은.”
김요한이나 나나 처지가 비슷하지는 않지만 딱히 다른 것 같지도 않았다. 김요한이 콜라와 섞은 양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저러다 탈 나는 건 둘째쳐도, 게이 바에서 정신을 잃는 것만큼 위험한 일은 또 없었다.
“김요한 씨, 아직 실연 안 당했으니 적당히 마셔요. 발이 안 예쁘면 어떻습니까? 그만큼 괜찮은 부츠로 가리면 되죠.”
“놀리세요?”
“직접 곽 대리님에게 들은 말이니 믿으셔도 됩니다.”
김요한이 벌게진 눈으로 자신의 신발을 내려다봤다.
“여름에도 신어야 한다는 단점은 있지만요.”
김요한은 별 게 다 사람 속 썩인다며 발을 툭툭 굴렸다.
“놀다 가세요. 전 인사만 하러 온 거라.”
“어어? 어디 가요? 얘기 좀 하다 가요.”
진하게 생긴 놈이 내 손목을 잡았다.
“저 바텀 아닙니다.”
“아, 이런.”
실수했다면서 내 손목을 놨다. 김요한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박석연 씨 탑입니까?”
“예.”
자리를 뜨기 위해 거짓말을 한 건데 예상외의 파문이 일었다.
“여태 저와 같은 줄 알았는데…….”
김요한이 말끝을 흐렸다. 내가 잘못 들었나 싶었다. 김요한이 바텀이라니? 그럼 그 곽일영이 탑을 해야 한다고?
튜브를 끼고 수영을 하고, 코가 매워 징징대고, 사장의 쓴 소리에 눈물까지 글썽이는 곽일영이? 이제 보니 저들에게 중요한 건 발 문제가 아닌 듯했다. 처음부터 포지션이 맞지 않았다.
“김요한 씨. 힘내세요.”
진지하게 그의 기운을 북돋아 준 다음 다시 내 자리로 돌아왔다. 어느새 비어 있던 내 옆자리에 나처럼 혼자 온 남자 하나가 앉아 있었다. 나를 흘끔흘끔 쳐다보던 남자가 내 의자 등받이를 톡톡 쳤다.
“파트너 찾는 거 같은데 난 어때요?”
늘씬한 몸에 얼굴도 꽤 괜찮은 남자였다. 흠집 없는 구두 또한 내 스타일이었다. 이제 대학생이나 됐을까 싶을 만하게 어려 보이는 얼굴만 아니었으면 나름 나쁘지 않았다.
전 같으면 괜찮다 싶어 바로 얘기를 나눴을 텐데 누구 탓인지 몰라도 눈이 한없이 높아져 있었다.
그만하자, 기분 전환하러 왔는데 여기까지 와서 왜 진여원 생각을 하냐. 고개를 저었다.
탕- 미령이 갑자기 버드와이저 하나를 내 앞에 내밀었다. 아직 다 마시지도 않았는데 저러는 걸 보면 뭔가 구린 게 있는 거였다. 미안하다며 남자를 거절하고 나는 새 맥주병을 잡았다. 남자는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석연아 넌 진짜 문제가 있는 것 같다. 무당이라도 불러서 굿해야 되는 거 아니냐?”
“왜.”
“저 새끼 이거야.”
미령이 눈치를 보며 손가락을 관자놀이에서 돌렸다.
“어차피 약속 있다고 말할 거였어.”
“넌 꼭 보면 생긴 건 멀쩡해도 하나같이 똥차에 병신들만 꼬이더라.”
“내가 똥차라 그런가 보지.”
씁쓸하게 웃었다.
“미령아. 하나만 좀 물어보자.”
“여러 개 물어도 돼.”
“이성애자가 나한테 호감을 보이면 그건 뭘 것 같냐.”
“그냥 애정을 제외한 호감이지.”
“그렇지?”
후- 한숨을 쉬며 맥주를 홀짝였다.
못 먹는 감, 못생긴 감, 홍시.
아무리 머리 싸매고 생각해 봐도 다 나를 지칭한 거라는 결론밖에 나오지 않았다. 진여원에 대해서 생각이 많아진 시점도 이러한 결과를 추론하고 나서부터였다.
“왜 누가 너한테 호감 보여?”
“오늘 보니까 그런 건 아닌 것 같다…….”
“괜히 관계 망가뜨리지 말고 가볍게 생각해. 우리가 그런 거 한두 번 겪어 보냐. 아는 레즈 녀석도 그러더라. 자기한테 엄청 잘해 주는 여자 친구가 있었는데 그게 애정인 줄 착각했다고. 남녀의 경우야 잘해 주면 아, 이 사람이 나한테 관심 있나 보다 하지만 같은 성끼리는 단순히 호감일 뿐이잖아.”
“그래, 나 오늘 그 말 들으러 왔나 보다.”
미령의 말을 머릿속 깊숙이 새겼다.
자전거 때도 그랬고, 부산에서도 법인카드를 함부로 긁었을 때도 충분히 사장으로서 화낼 수 있는 상황인데도 진여원은 재롱이라며 넘어갔었다. 그랬던 사람이었다. 일 실수에 있어서 그가 화가 난 것도 이해한다.
백번 잘못은 내가 저질렀지만, 야속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적어도 내 편이라 생각한 사람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편을 들었을 때 이런 기분이지 않을까. 서글픈 마음이 드는 어린아이 같은 심보였다.
앞으로 날 무시할 그를 생각하니 깨진 자존심보다 쪼개진 마음이 더 아팠다.
“약속한 사람은 언제 와?”
“올 때 되지 않았을까.”
휴대폰을 꺼내 보니 조금 늦겠다는 문자가 도착해 있었다.
“아무래도 너 그냥 가야겠다. 그리고 무당집 좀 찾아가 보고.”
멍하니 문자를 내려다보다 미령의 말에 녀석이 향한 시선을 따라갔다. 입구에서부터 김대영이 반반한 바텀 하나를 허리에 끼고 들어오는 중이었다.
다시마 세 개가 이걸 뜻했나.
하나는 진여원한테 깨지는 일, 또 하나는 김대영 새끼를 마주하는 일. 그러면 나머지 하나는 또 뭐란 말인가.
김대영이 나를 발견하자마자 이쪽으로 다가와 바텀의 뺨에 쪽쪽대고 난리였다. 이대로 일어나면 또 저 새끼가 아직 거봐라, 아직 나를 못 잊었네 어쨌네, 헛소리를 해댈 게 분명했다.
나는 맥주 두 병을 번갈아가며 마시면서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 용한 무당 아는데 좀 소개시켜 줘?”
“우리 부모님 크리스천이야. 굿하러 간 거 알면 엄마가 여기까지 쫒아올걸.”
“어라, 석연이 왜 혼자야?”
이제야 나를 봤다는 양 김대영이 불쑥 끼어들었다.
“꺼져.”
“형한테 하는 말본새하고는. 야야, 저 새끼가 나 좋다고 주구장창 매달리다가 차인 새끼거든. 지금도 뻗대는 게 꼭 삐쳐서 그런 것 같지 않아?”
어디서 개가 짖었다. 갑자기 내 빈 옆자리에 언제 도착했는지 모를 류준이 털썩 앉았다. 류준이 내 앞에 놓인 맥주 중 하나를 채가서 목을 축였다.
“석연 형, 많이 기다렸어?”
“어, 늦게 왔네.”
김대영이 나와 류준을 번갈아 봤다. 놈이 몰래 찍은 사진 속의 인물과 같아 놀라는 듯했다.
“왜 얘랑 다시 만날 줄은 몰랐나 보지?”
바텀을 끼고 있던 김대영이 멍청하게 입을 벌렸다.
“류준아, 저 새끼가 저번에 너랑 나랑 붙어 있는 거 사진 찍어서 내 회사에 보낸 새끼다. 그래서 잘렸거든, 너도 조심해.”
“그랬어? 씨발 새끼네. 난 우리 소속사 사무실로 보내도 별 상관없는데.”
류준이 갑자기 휴대폰을 들어서 김대영과 바텀의 사진을 찍었다. 찰칵, 찰칵, 플래시까지 터졌다.
“너 뭐야! 썅!”
“어이 노땅, 깝치지 마. 난 잃을 거 없는 놈이고 그쪽은 아닌 것 같거든.”
나한테도 보내 달라는 말을 던지자 김대영이 발끈했다. 모지리가 따로 없어 보였다.
대학 때 심장 반쪽이 떨어져 나간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다. 내 심장에 쓸데없이 달라붙었던 오염 덩어리가 떨어져 나간 거였다.
“김대영 계속 내 주위 맴도는 거 보니까 나랑 한판 뜨고 싶은가 본데, 섹스라도 할래?”
미령과 김대영, 류준, 반반했던 바텀도 동시에 놀랐다. 반응이 너무 화끈해서 내가 다 미안해질 지경이었다. 김대영은 병신처럼 입을 벌린 채로 내게 다가오려고 했다.
“네 후장 대주면 박아 줄 용의는 있어. 바지 까, 씨발아.”
머릿속에서 난리중인 난타를 잠재우러 온 곳이었다. 그런데도 드럼통만 더 늘고 있으니 인내심이 바닥에 팽개쳐졌다.
“박석연 이거 진짜 돌은 새끼였구만.”
이게 정답이었다. 처음부터 미친놈처럼 구는 게. 나는 일어나서 맥주를 벌컥벌컥 원샷했다.
“류준아, 미안하다. 다음에 보는 걸로 하자. 오늘 물 좋으니까 잘 골라 봐.”
“형, 또 바람맞히는 거야?”
“또는 무슨.”
손만 흔들고는 밖으로 나왔다. 매캐한 내부보다는 밖이 훨씬 시원했다.
우우우웅- 주머니에서 휴대폰이 울렸다. 류준인가 싶어 휴대폰을 내려다보다 그대로 떨어뜨릴 뻔했다. 받을까 말까 고민을 하는 찰나에 전화가 끊겼다. 이어 전화가 또 울렸다.
이번에는 조금 텀을 두고 받을 수 있었다.
“박석연입니다.”
[집으로 와.]
“지금이요?”
[20분.]
집까지 불러서 혼내려나……. 아니면 마음이 바뀌어 사표 내라고 할 수도 있었다. 월급은 나왔으니 다른 회사 구할 때까지 버틸 수는 있을 것 같았다. 10분도 아니고 20분이라고 말한 걸 봐선 마지막으로 상사의 정을 베푸는 걸지도.
“조금 있다 뵙겠습니다.”
처음으로 내가 먼저 전화를 끊었다.
이태원에서 버스 타고 갈 방법이 복잡해 택시에 올라탔다. 진여원의 집으로 향하는 동안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나가라면 나가고, 혼내면 덤덤히 받아들여야지. 그런데 왜 자꾸만 속이 상하냐. 차가워진 코끝을 손으로 감쌌다. 눈가가 시큰시큰했다. 나야말로 모지리가 따로 없었다.
택시기사는 친절하게도 진여원의 집 앞에서 나를 내려 주었다. 턱이 낮은 펜스 안으로 정원이 보였다.
풀밭에 틈틈이 심어진 조명이 은은한 색으로 정원을 감싸고 있었다. 오늘은 현관까지도 불이 들어와 있었다.
멀뚱히 서서 안을 쳐다보는데 컹컹거리며 집채만 한 개 한 마리가 펜스에 앞다리를 척 올렸다. 그 뒤로 편안한 차림을 한 진여원이 개의 목줄을 잡아끌었다.
현관 쪽으로 이동한 그가 문을 열어 주었고, 나는 떨어지지 않는 발을 억지로 움직였다. 진여원이 내 어깨 너머로 탕 문을 닫았다.
커다란 개가 헥헥거리며 진여원과 내 주위를 돌아다녔다. 여느 개그맨 닮은꼴로 유명한 불테리어였다. 실제로 보니 눈이 진짜로 바늘구멍만 했다.
“덤덤하네.”
실컷 혼나고도 평정을 유지한다는 말 같았다.
“제가……. 전부 잘못했으니까요.”
“그 뜻이 아닌데.”
진여원이 커다란 개를 쳐다봤다. 일어서면 내 허리께까지는 올 만한 놈이었다. 즉, 이 녀석 앞에서도 덤덤하냐는 말이었다. 내가 귀신은 무서워해도 맹견은 아니었다.
진여원이 짧고 흰 털을 가진 못난이의 목줄을 바닥에 박아 놓은 말뚝에 걸었다. 목줄이 쇠사슬에 버금갔다.
나는 말없이 선 그를 올려다봤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 화가 난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았다.
“혼내려고 부르신 거면……. 반성 많이 했습니다.”
“반성한 사람 옷차림이 아닌데.”
놀러 나가서 반성했다고 말하기에는 내가 생각해도 너무 뻔뻔했다. 대신 입술을 꾹 다물었다.
“묵비권은 적당히 행사하고, 오늘부터 사흘 동안 대신 돌봐.”
“예?”
생각지도 못한 말에 목소리가 삐끗했다.
“출장 때문에 집이 비니까.”
“제가 왜요.”
“책임지겠다며.”
“…….”
헥헥대고 가느다란 꼬리를 흔드는 불테리어를 쳐다봤다. 녀석은 침까지 흘리며 이쪽으로 달려들고 싶어 했다.
“이름이…… 뭡니까?”
“개나리.”
컹컹컹! 제 이름을 불렀다고 녀석이 짖었다.
“네이밍 센스가 훌륭하시네요.”
잔뜩 긴장했던 것도 무색하게 그는 평소와 다름없었다.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만 텃밭 끄트머리에 주저앉았다.
여기 오기 전까지 사표에 대해서도 고민해 보고, 그가 독설을 내뱉어도 너무 마음 아파하지 말자며 다독였는데……. 고민했던 게 무색하리만치 태연한 진여원에게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더불어 원망스럽고, 밉고, 야속하기도 했다.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복합적인 감정이 뒤엉켜 버렸다.
“왜……. 그렇게까지 화내셨어요?”
이게 아니었다.
이런 말을 하려던 게 아니었는데…….
쓸데없는 말을 뱉어 낸 입을 원망했다. 말을 정정하지도 못하고 나는 애꿎은 바닥만 내려다봤다. 그의 목소리가 내게로 내려왔다.
“박석연을…….”
덜컹, 눈꺼풀이 짧게 떨렸다.
“봐주고 싶어지니까.”
이내 심장이 콩콩콩- 빠르게 뛰었다.
적당히 땀이 차오른 손을 쓱 바지에 문질렀다. 손을 스치는 천의 감촉에도 찌릿하고 손끝이 간질거렸다.
나를 봐주고 싶어져서라니……. 허벅지에 손을 올린 채로 진여원을 올려다봤다.
그는 미간을 설핏 구긴 채로 휴대폰을 향해 있었다. 잠시나마 착각할 뻔했던 마음을 접었다. 그럼 그렇지. 미령과 나눈 대화만 없었다면 충분히 오해하고도 남을 만했다. 나는 동성의 호감에는 애정이 배제되어 있다는 것을 다시금 되새겼다.
“동문이라는 게 좋긴 좋네요.”
대한민국 관료제의 폐해이긴 하지만, 학교 후배기이에 봐주고 싶어진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진여원이 휴대폰에서 시선을 떼더니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응시했다. 그럼에도 심장은 아직 두근두근했다. 그가 어떤 말을 꺼낼지 예측하기는 힘들었다.
“휴대폰.”
그가 손을 내밀었다. 어리둥절하게 그에게 휴대폰을 주자 진여원이 빠르게 무언가를 적어 내게 다시 주었다.
“육오사삼이일…….”
나는 메모장에 적혀 있는 숫자를 읽었다. 부산 별장과는 다르게 숫자가 내림차순이었다.
“비밀번호.”
“웬 비밀번호요?”
“개나리 밤에는 안에다 들여놔. 울음소리 때문에 옆집에서 민원 들어오니 같이 자 주고.”
“여기서요?”
진여원의 집을 올려다봤다.
“그럼 데려가서 자든가.”
그가 내 말을 잘라 내고 여전히 헥헥대는 개나리를 가리켰다. 자신의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은 진여원이 대문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이 시간에 출장을 간다고? 그를 따라가며 나도 같이 나가려고 했다. 진여원이 대문을 연 채로 나를 돌아봤다.
“잘 돌봐. 모종삽 들고 땅도 좀 파고.”
“설마 지금부터 출장 가시는 겁니까?”
이번엔 내가 그의 말을 잘랐다.
“지금은 병원.”
멀쩡해 보이지만 어디 아픈가 싶어서 진여원의 상태를 확인하려고 했다. 그는 내가 감상할 새도 주지 않고 대문을 닫았다.
나는 낮은 펜스를 지나가는 그에게 목소리를 키웠다.
“어디 아프십니까?”
“칼 맞았어.”
“예……?”
“개나리 주인이.”
그가 평소보다 빠른 걸음으로 펜스를 지나쳐 갔기에 더는 물어볼 수가 없었다.
뒤에서부터 개나리가 끙끙거리고 있었다. 나 또한 같이 끙끙거리고 싶었다.
이 시간에 호출했기에 마저 혼내거나 해고할 줄 알았지만 집이나 보라니……. 정말 대학 후배라서 나를 봐주고 싶어 했던 건가……?
진여원은 동문이 좋다는 내 말에 대해서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대체 나조차 그에게 무슨 대답을 듣고 싶었던 건지 모르겠다. 게다가 저 녀석의 주인은 칼을 맞았다니 더욱 의문이고.
목줄을 철컹철컹거리며 개나리가 발버둥을 쳤다. 녀석에게 다가가 시선을 맞춰 쭈그려 앉았다.
단춧구멍 같은 눈이 왜인지 슬픔을 띠고 있는 것 같았다. 필시 내 느낌 탓이겠지. 그러니 이 녀석 주인이 칼 맞았다는 소리는 농담이지 않을까?
머리를 쓱쓱 쓰다듬자 개가 슬픔은커녕 신이 나서 내 손을 핥아 댔다.
“밥은 먹었냐?”
정원을 두리번거리며 녀석의 밥그릇을 찾았다.
바비큐 그릴이 놓인 벤치 옆에, 전에 없던 이동식 개집이 떡하니 놓여 있었다. 초등학생 한 명이 들어가서 자도 될 만큼 커다란 집이었다. 하물며 앞에 놓인 은색의 밥그릇은 양푼 비빔밥 2인분을 비벼 먹어도 충분할 듯했다.
시간도 시간인지라 저녁은 이미 먹였을 테니, 사슬을 짧게 쥐어 진여원의 집으로 개나리를 데려갔다. 알기 쉬운 비밀번호를 누르고 개를 집 안에다 들여다 놨다.
센서등이 들어온 신발장에서 흘끔 집 내부를 둘러봤다. 왼쪽에는 부산 별장과 같이 위층으로 향하는 계단이 있었지만, 엑소시스트의 악령이 나올 것 같지는 않았다. 2층이라 부르기도 무색하게 계단이 딱 세 개뿐이었다.
계단 위의 공간은 통유리로 감싸여 있어 거실과 경계를 나눴다. 저곳을 작업실로 사용하는 건지, 커다란 책장과 더불어 디자인 도식지로 보이는 종이가 테이블에 수두룩했다.
이 정도 크기면 복도가 있을 법도 한데 진여원의 집은 작업실인 1.5층처럼 특이하게도 모든 벽이 유리였다. 필요 없는 부분은 싹 밀어내고 공간을 최대한으로 활용한 느낌이 들었다.
내 오피스텔이 두 개가 들어갈 만한 거실은 돌비 사운드가 빵빵하게 터질 것 같은 홈시어터부터 요즘은 찾아보기 힘든 오디오에 대형 DVD수납장까지 갖춰져 있었다. 진여원만큼이나 오만하고 깔끔한 집이었다. 회사 건물도 마찬가지였지만.
컹컹! 신발장 앞을 서성거리는 개나리가 왜 안 들어오냐는 듯 꼬리를 흔들었다. 잠시 훑어본다는 게 나도 모르게 넋을 놓고 구경해버렸다.
“잘 자라. 내일 밥 주러 오마.”
개나리가 따라 나오기 전에 문을 쾅 닫았다. 그와 동시였다.
우와앙! 컹컹! 왕왕! 크헝헝!
개에게서 나올 수 있는 소리가 저렇게 다양할 줄이야. 돌아선 등 뒤로 흡사 하울링에 가까운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절박한 울음에 발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내가 옆집 사람이면 씩씩거리며 나올 정도로 시끄럽기도 했고.
폭 한숨을 쉬고 비밀번호를 띡띡 눌렀다. 그러자 개나리의 우렁찬 짖음도 멈췄다. 문을 열자 그사이 단춧구멍 같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며칠 만에 만나는 사람처럼 내게 달려드는 개나리의 눈을 쓱 닦아 주었다.
“야야, 생긴 건 귀신도 잡아먹을 것처럼 생겨서 왜 그러냐.”
동물의 네 다리가 거머리처럼 내게 달라붙었다. 불테리어라면 주인 외의 사람에게는 난폭하고 과거에는 투견으로 명성을 떨쳤던 놈이라던데, 이 녀석은 할머니가 살아생전 키웠던 삽살개 같았다.
나는 현관 바닥에 놓인 개 전용 수건으로 녀석의 발바닥을 닦았다. 개나리가 한쪽 발을 내 어깨에 떡하니 올려놓고 나머지 발을 닦아 주길 기다리고 있었다.
“생긴 것도 못생겨, 누굴 닮아서 이렇게 건방지냐.”
그르르릉, 제 욕하는 걸 알았는지 목을 울렸다.
개나리의 긴 주둥이를 잡아서 눈을 맞췄다. 길게 찢어진 눈이 나를 응시하지 못하고 옆으로 피했다. 주둥이를 잡은 상태로 나를 보게 만들었다.
“일단 내가 널 돌보기로 했으니 말 잘 들어라. 난 돌봐주는 사람도 못 알아보는 짐승은 안 봐준다.”
손에 힘을 주어 녀석의 얼굴을 끄덕이게 만들었다. 발을 다 닦아 주니 개나리가 현관을 막아섰다. 집으로 데려가고 싶어도 내가 살고 있는 오피스텔은 애완견 금지였다. 개 짖는 소리가 나는 즉시 민원이 들어올 게 분명했다. 하물며 불테리어는 중대형견이었다.
현관문을 잡자 녀석이 우는 소리를 내려 고개를 빳빳이 들었다. 이걸 어쩌나 싶어 옆머리를 긁었다. 울거나 말거나 무시하고 가기에는 개나리의 보일 듯 말 듯한 작은 눈이 짠했다.
주인이 칼 맞았다는 소리도 자꾸 마음에 걸리고, 우리 팀의 실수로 진여원이 손해를 보게 된 일 또한 마찬가지였다.
일주일도 아니고 사흘이니 괜찮겠지. 혀를 차며 신발을 벗었다. 거실 안쪽까지 들어가서 손뼉을 짝짝 쳤다. 현관을 뱅글뱅글 돌던 녀석이 내게로 돌진해왔다. 딱딱한 머리를 툭툭 두드려 주고 이왕 들어온 김에 주변을 자세히 둘러봤다.
홈시어터 밑으로 큐브 모양의 흰색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그 위에는 잡지에나 나올 법한 신발과 모델의 사진이 즐비했다.
시선을 옆으로 옮기자 끝에 놓인 캔버스화 한 켤레가 눈에 들어왔다. 세월의 풍파를 거친 듯 천이 넝마가 되어 있었다.
짝퉁 캔버스의 밑바닥은 전부 헤져 있었고, 신발 끈마저 보풀이 일어 수명이 다해 보였다. 좀체 진여원과는 어울리지 않는 신발이었다. 의외다 싶어 한참을 구경하다가 곧 계단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거실과의 경계선이 되는 통유리를 화이트보드 대용으로 사용하는지 구두 초안들이 그려져 있었다. 간단한 디자인부터 시작해 신발 밑창의 cm까지 적혀 있는 유리를 천천히 구경했다.
저 안에 그가 그려 놓은 디자인에 관심이 갔지만, 남의 디자인을 허락 없이 볼 만큼 낯짝이 두껍지는 않았다.
반대편 침실 역시도 벽이 아닌 투명 유리가 거실과의 경계를 두고 있었다. 이불을 가져갈 생각에 유리 너머로 들어갔다. 나를 계속해서 따라다니던 개나리가 침실로는 들어오지 않고 밖에서 유리에 얼굴을 문댔다. 콧김과 침에 투명한 창이 금세 더러워졌다.
여긴 진여원이 못 들어오게 하나 보지? 하기야 그 까탈스러운 성격이 어딜 가겠냐마는.
검은 광택이 흐르는 슬라이딩 붙박이장에서 이불 두 채를 꺼냈다. 그의 침실에 스며있는 시원한 향에 술집의 음습했던 냄새가 전부 지워져 나가는 것 같았다.
이불을 안고 나오다가 가운데 떡하니 놓인 킹사이즈 침대를 내려다봤다. 붉은 가죽으로 감싼 원형 침대 프레임에 네모난 매트리스가 올려져 있었다. 붉은 프레임과 대비되는 검은색 매트리스를 보고, 킁- 코를 울렸다. 집에서 화보라도 찍나 보지.
나도 인테리어에 관심은 많지만, 꾸미는 데는 무조건 돈이 필요했다. 지출을 최소한으로 줄여 생활하고 또 모으다 보니 인테리어 역시 간소했다. 문득 침대에 하나뿐인 검정 베개가 눈에 들어왔다.
정말 혼자 사나?
궁금증이 들었지만, 쓸데없는 관심은 끄자며 머리를 흔들었다.
거실로 나오자 그제야 개나리가 내 뒤를 쫄쫄 쫓아다녔다.
“안 도망가니까 너도 네 할 일 해라.”
쫑긋, 세워진 귀가 움찔거렸다. 하긴 말을 알아들으면 동물이 아니었다.
남의 집인지라 욕실을 사용하는 것도 조심스러워 샤워를 한 뒤에는 내 흔적이 남지 않도록 청소까지 싹 마쳤다.
헥헥, 욕실 앞에서 나를 기다리는 녀석의 머리를 한 번 더 쓰다듬어주었다. 이 녀석 덕분에 오전 일찍 일어나서 밥을 주고 집으로 돌아가 출근준비를 해야 했다. 애물단지가 따로 없었다.
나는 꺼내온 이불을 거실 바닥에 깔고 누웠다. 손을 뻗어 소파 위에 놓인 리모컨도 가져와 TV도 켰다. 박력 넘치는 화면에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드라마가 방영되고 있었다.
개나리가 내 얼굴 근처로 와서 몸을 말았다. 하얀 엉덩이가 바로 눈앞이었다. 나는 녀석을 끌어다가 가슴께에 내려놨다. 녀석이 앞발로 턱을 괴고 내게 찰싹 붙어서는 부비부비거렸다.
“사람 아무나 좋아하면 보신탕집 끌려간다.”
근육으로 탄탄한 뒷다리를 토닥거렸다. 리모컨에 내장된 조명 버튼을 눌러 거실의 불을 끄고 TV만 켜 놓은 채로 잠을 청했다.
커다란 거실에 이 녀석만 혼자 놔두었으면 꽤 외로웠겠지. 나 역시 개나리가 없었다면 마음이 휑했을 것 같다.
진여원은 이런 큰집에서 무슨 생각을 하며 자고 일어날까 싶었다. 물론 그 진여원이 외로움을 탄다는 건 어불성설일 것이다.
TV에서 나온 빛이 저 끄트머리에 놓인 운동화를 어슴푸레 비추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의외의 한 면을 본 기분이었다.
아직도 콩콩콩거리는 심장에 귀를 기울이듯 개나리가 더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개나리에게 들으란 듯이 말을 내뱉었다.
“널 맡긴 놈은 이성애자 주제에 왜 사람 헷갈리게 만드냐.”
천장을 보고 혼자 속삭이는 동안 개나리가 내 심장 위에 얼굴을 올렸다.
“그 인간 없는 동안 대신 구박할까?”
끄응- 개나리가 못생긴 얼굴을 들었다. 픽 웃고 안심하라는 듯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드라마에 좀체 집중하지 못했기에 그냥 전원을 꺼 버렸다.
까맣게 암전된 거실 창밖으로 정원의 조명이 아스라이 이 안을 파고들었다. 눈을 감고 숨을 고르는 동안에도 심장이 조용해지는 일은 없었다. 어째서인지 저 위의 낡아빠진 운동화만이 계속 눈에 밟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