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이른 오전부터 날씨가 궂었다.
카페테리아에 앉아 흐린 하늘을 바라보며, 베이컨으로 감싼 계란을 입에 넣었다. 알람을 맞춰 놓는 것을 깜빡해 오피스텔에 들를 수가 없었다.
부리나케 진여원의 집을 빠져 나오면서도 개나리가 정원을 자유로이 다닐 수 있도록 목줄을 길게 늘여 주는 건 잊지 않았다. 덤으로 사료까지 수북이 쌓아 주었다.
밖으로 나가면 한바탕 난리가 날 줄 알았는데 녀석은 의외로 얌전히 나를 배웅했다. 길게 찢어진 눈을 생각하니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나는 안면이 있는 직원들과 목 인사만 나누고 홀로 앉아 브런치를 해치웠다. 쌀이 있었으면 했지만 카페에는 구운 식빵이 전부였다. 어차피 다 같은 탄수화물이다. 적잖이 위안을 삼고 주차장 쪽의 머신으로 다가갔다.
커피를 뽑으면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저 밖에 내가 선물한 진여원의 자전거가 놓여 있었다. 어제도 정원에 없던 걸 보니 타고 출근한 건 아닐 테고, 아예 여기다 세워 놓고 나간 것 같았다.
진여원의 원래 자전거는 고가라 고치는데도 시간이 오래 걸리는 모양이었다. 커피를 들고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는데, 때마침 출근한 허준성과 딱 마주쳤다.
“안녕하십니까.”
성의 없는 인사를 건넸다. 허준성이 거만하게 고개를 까딱거렸다.
“커피 맛이 좋은가 봅니다?”
“예, 죽이네요.”
“참 넉살도 좋습니다? 나 같으면 얼굴도 못 들 텐데.”
“이보십쇼, 제가 그쪽에게 뭐 실수한 거라도 있습니까?”
“잘못이 없어도 보는 것만으로도 짜증 나는 인간이 있지 않습니까.”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허준성과 단둘이 올라타 내가 먼저 2층 버튼을 눌렀다. 웬일인지 허준성의 구두가 새것처럼 깨끗했다. 전에 곽일영이 했던 말을 의식한 것만 같았다.
“동감입니다. 보는 것만으로도 짜증 나는 인간이 있죠.”
허준성이 이게 또 무슨 말을 하려나 하고 나를 쳐다봤다. 카푸치노를 입에 머금고는 말했다.
“보통 열등감이 폭발할 때 그러던데. 설마 저희 팀에 그런 감정을 가지셨겠습니까?”
금세 열린 엘리베이터를 빠져나왔다. 허준성이 뒤에서 재수 없는 새끼, 병은 안 걸렸나 몰라 등등 뒷말을 쏟아 냈다.
뜨거운 커피를 얼굴에다 퍼부어 주고 싶었지만, 개나리의 얼굴을 떠올리며 참았다. 못생긴 얼굴이 다시금 몽실몽실 떠오르자 웃음이 나왔다.
허준성은 저 자신을 비웃은 줄 알고 더 붉으락푸르락했다. 사무실의 문을 쿵 닫고는 허준성을 떼어 냈다. 출근시간 5분 전인데도 두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버릇처럼 컴퓨터를 먼저 켜니 내장 달력이 25일임을 가리켰다.
역시나 곽일영의 자리가 평소와 다르게 깨끗했다. 3일과 25일, 곽일영이 나오지 않는 날이었다. 오늘 하루 심심하겠네. 벌써부터 곽일영의 빈자리가 느껴졌다.
문제는 있었지만 무사히 런웨이도 잘 끝났겠다, 불편한 마음은 여전했어도 인터넷 창을 열었다. 월급이 들어온 건 알았지만 하도 바쁘다 보니 제대로 확인을 하지 못한 터였다. 곧장 인터넷 뱅킹에 접속해 입금 내역을 확인했다. 그 순간 마우스를 내던질 뻔했다.
40만 원?
장난하나 싶었다. 혹시 진여원이 자전거 수리비를 매달 월급에서 뺄 생각인가?
열 받아서 휴대폰을 꺼내는데, 아침이라 침침한 눈을 다시 깜빡였다. 다시 들여다보니 따옴표가 두 개였다.
4,053,000원.
내가 40만 원으로 착각할 법도 했다. 지금 내 연봉이면 연금, 보험 등 뗄 것 다 떼고 실수령액은 앞자리가 결코 4가 나올 수가 없었다. 그런데 4자로 시작하니 지레 놀란 것이다.
계산기를 켜서 얼른 입금 내역에서 기본급을 빼 봤다. 그러니까 나머지가 더해진 금액이 인센티브였던 거다.
덜컹!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기뻐 죽겠는데 이 기쁨을 전할 사람이 없어 휴대폰만 잡고 전전긍긍했다.
엄마한테 전화하면 ‘니 돈 좀 부치라.’ 소리가 나올 테고, 아버지에게 하면 월급 관리 잘하라며 설교를 한참 하실 게 분명했다. 결국 다시 자리에 앉아서 월급 자랑할 수 있는 딱 한 사람에게 문자를 보냈다.
[하재운 이사님, 제가 한턱 쏠게요.] 라고.
곧장 답변이 왔다.
[주차장으로 콜.]
하필이면 웬 주차장인가 싶었다. 컴퓨터를 절전모드로 바꾸고 사무실 문을 열었다. 이재화가 벌컥 열린 문에 놀란 표정으로 서 있었다.
“오셨어요?”
“예, 좀 늦었네요, 석연 씨는 어디 가요?”
“잠시 1층에 다녀오겠습니다.”
“그래요, 오늘은 우리 둘뿐이니 일찍 들어와요.”
그러고 보니 지난 3일에는 나도 아파서 결근하는 바람에 이재화 혼자서 사무실을 지켰을 것이다.
“올라올 때 먹을 거라도 좀 가져올까요?”
이재화가 흠- 하고 생각에 잠겼다. 다른 건 몰라도 먹는 데 있어서는 우유부단한 과장이었다.
“양갱은 빼고, 제가 알아서 챙겨올게요.”
내가 양갱을 먹을 때마다 저거 맛없는데 싶은 표정으로 보기에 꺼낸 말이었다. 이재화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는 휴대폰을 손에 쥐고 주차장까지 기분 좋게 내려갔다. 세워진 자전거를 지나 재운 선배를 찾았다.
코너를 도니 저 앞에 재운 선배가 보였다. 선배는 손에 종이컵을 들고 담배를 뻑뻑 피워 대고 있었다.
“선……아니, 이사님.”
버릇처럼 선배라고 부르려던 것을 정정했다.
“오늘 저녁 시간 되세요? 제가 한턱 쏠게요.”
“이번 주는 무리고 다음 주나 시간 날 듯한데, 근데 왜 갑자기?”
“저 인센티브 꽤 받았어요.”
속닥거리며 말하자 선배가 담배를 후 뱉어 냈다. 웃음이 연기 사이에 얽혀 들었다.
“우리 석연이 안 그렇게 생겨선 돈 무지 밝혀.”
“돈 안 밝히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어요.”
입사 초반엔 재운 선배 멱살을 잡고 짤짤 흔들고 싶었지만, 지금 같아선 꽃가마에 태워 줄 수도 있었다.
선배는 담배를 다 피우더니 또다시 한 대를 꺼내 들었다. 이왕 나온 김에 반나절치 니코틴을 쌓아 놓으려는 것 같았다.
“제기랄, 건물에 흡연실 없는 것 알았으면 회사 이동을 다시 한번 생각해 봤을 텐데.”
“이사실은 선배 혼자 쓰지 않아요?”
“금연 건물이잖아. 진여원 독한 자식, 나 담배 가르쳐 놓은 놈이 지는 끊었다고 유세하나.”
“사장님도 피우셨나 보네요…….”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대학 때는 그랬던 것도 같았다.
“미유가 담배 냄새 질색팔색했거든. 꼴초였던 놈이 한 번 마음먹더니 그냥 끊더라.”
생각났다. 진여원의 대학 시절 여자 친구 이름이 미유였다.
진여원이 여친 때문에 담배를 끊었다고? 가히 상상이 되지 않았다. 분명 제 몸 생각해서 끊었을 것 같은데, 또 모르지. 여친 사랑이 어마어마해서 그랬을지도.
나도 모르게 한 단계 비틀림이 상승한 구시렁댐이 속에서 웅웅댔다.
“헤어진 지 얼마 안 됐나 보네요.”
아직도 다시 피우지 않는 걸 보니 불과 얼마 전에 헤어졌을 거라 생각했다.
“무슨 소리야, 엄청 오래됐지. 아마 석연이 너 군대 갈 즈음이었을걸? 진여원도 여러 가지로 정신없었을 때라 둘 관계가 원만하진 않았어. 남녀 관계가 사랑만 있다고 다 해결되는 건 아닐 테니까. 근데 우리 강아지, 진여원에 대해서 뭐가 그렇게 궁금해.”
선배가 뜻 모를 웃음을 지어 가며 종이컵에 담배를 비벼 껐다.
“아무것도요.”
“궁금한 거 있으면 직접 물어봐 봐. 아마 다 알려 줄 거 같은데.”
“놀리지나 않으면 다행이죠.”
“그러니까 하는 말이야. 진 사장이 자기 자전거 박살 낸 직원 뭐가 예쁘다고 인센티브를 넣어 주라 했겠어.”
“일한 만큼 안 받으면 고용보험센터에 신고한다고 했거든요. 그리고 이번에는 생명수당도 받을 생각이에요.”
“생명수당?”
선배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저한테 맹견 한 마리를 맡겼거든요.”
“진여원이?”
“예. 아주 직원을 자기 몸종으로 안다니까요. 뭐 제가 실수는 했지만…….”
런웨이 사이즈미스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선배이기도 하지만 지금은 회사의 이사였으니까. 재운 선배도 윰의 일정 지분을 가진 사람이기에 신뢰를 잃을 만한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
소시오패스는 진여원이 아니라 나인가…….
“석연아, 너 캐주얼 부서로 이동해볼래?”
재운 선배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왜요?”
“아니 나도 인생이 좀 재미있고 싶어서.”
“제가 부서 이동한다고 선배 인생이 재미있어지겠어요?”
“분명.”
재운 선배가 낄낄거렸다. 대학 때부터 알아 온 사람이지만, 가끔 저렇게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괜히 진여원의 친구가 아니겠지.
“부서 사람들도 좋고, 저 없으면 괄시당할까 봐 이동 못해요. 지금도 장난 아니에요. 사실 여성용 구두 만드는 데도 한참 재미 들렸고요.”
“음, 괄시라. 이재화 과장 부서지? 그리 만만한 곳이 아닐 텐데 무슨 괄시야. 너희 팀에 진여원 미니어처가 두 사람이나 있잖아?”
“미니어처요?”
“그 두 사람 독설 수위 만만치 않을걸. 그래서 부서도 따로 배정한 걸로 알고 있는데.”
사회 부적응자 부서가 아니었단 말인가?
생각해 보니 허준성은 오히려 우리 부서 동네북이었다. 직접 본 건 몇 번 안 되지만, 먼저 시비를 걸어 놓고도 이긴 전적이 없었다.
“석연이 나온 김에 테니스 한 판하고 들어갈래?”
재운 선배가 테니스 채를 휘두르는 시늉을 했다. 선배와는 대학 때도 몇 번 같이 친 적이 있었다. 물론 내 전승이었지만.
“과장님이 기다리셔서 다음에 해요.”
“어쭈~ 이것 봐라. 이사가 높냐, 과장이 높냐?”
“회사에서 얼굴 자주 보는 사람이 높죠.”
“우리 강아지 말솜씨가 일취월장하네.”
선배와 같이 카페로 들어가 군것질거리를 비닐봉지에 담았다. 양갱 두 개는 내 몫이었다.
재운 선배가 냉장고에서 포카리스웨트를 하나 꺼냈다. 선배는 계산서에 달기도 전에 뚜껑을 돌려 따서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게토레이 드시지…….”
“왜?”
그 인간 생각나서요, 라는 말은 삼켰다. 재운 선배가 입술을 닦더니 뚜껑을 잠갔다. 실실 웃는 게 오늘따라 꿍꿍이가 가득해 보였다.
“석연아, 좀 이따가 점심시간에 옥상으로 올라와라. 내가 옛날의 하재운이가 아니다.”
쾌속 서브를 보여 주겠다며 내 어깨를 툭 쳤다.
“안 친 지 오래돼서 제가 질 것 같네요.”
대학 때 한창 테니스 열풍이 불었던 적이 있었다. 다 큰 성인들이 온갖 리액션을 해가며 입으로만 필살기를 내뱉었던 기억도 났다. 재운 선배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선배가 뜬금없이 내 어깨에 팔을 둘렀다. 놀라서 주변을 보자 허준성과 그 팀원들이 테라스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직원들도 나와 선배를 보고 있었다.
이사와 일개 직원의 스스럼없는 분위기에 다들 안 그런 척 이쪽을 의식하는 듯했다. 어깨동무를 한 채로 선배가 조용히 말했다.
“잘 이용해 봐. 괄시받지 않는 제일 좋은 방법이 여기랑 저기에 있잖아?”
선배가 자신을 가리키고, 이어 위로 턱을 까딱거렸다. 진여원을 뜻하는 행동에 선배가 얹은 팔에서 빠져나왔다.
“그렇게 유치한 짓은 안 해요.”
“그래서 우리 석연이가 예쁘지.”
카페를 빠져나온 뒤에야 선배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근데 선배, 벌써 이용당한 거 모르시겠어요?”
“응?”
“착한 척해서 지금 선배한테 예쁨받았잖아요.”
“비글이 그러지. 주인 있는 데서는 천사 같다가도, 주인이 나가면 도둑이 들은 것 것처럼 헤집어 놓잖아?”
“선배까지 비글 취급이세요.”
“그런데 주인은 잠시 화가 나더라도 살랑살랑 꼬리 흔드는 게 예뻐서 또 봐주고. 아마 누구 눈에도 그렇게 비치지 않을까 싶은데? 뭐 아님 말지만.”
선배가 주어를 애매하게 넣고는 먼저 간다며 등을 팡팡 두드렸다.
생각에서 몰아내고 싶은데 재운 선배부터 시작해 포카리스웨트까지, 출장 나가 없는데도 진여원의 존재감은 여전했다.
터덜터덜 사무실로 돌아오자 이재화는 내가 사 온 과자들을 보고 잔뜩 실망한 얼굴을 했다.
“박석연 씨가 노인네처럼 양갱만 찾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진여원의 독설에 너무 익숙해졌기 때문인지, 사실 이재화도 만만치 않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이재화의 노인네 발언에 적잖이 마음에 스크래치가 그어졌다. 기운 내라며 내 발을 쳐다볼 곽일영의 부재도 또다시 실감했다.
***
진여원은 정확히 사흘을 채우고 돌아올 생각인지 여태 감감무소식이었다.
개나리 잘 데리고 있냐며 안부 문자라도 보낼 법한데……. 거기까지만 생각하고 말았다. 그 인간한테 뭘 바라냐.
나는 진여원의 집 근처 편의점에서 산 도시락과 생수를 자전거 바구니에 담았다. 어차피 내 건데 좀 타고 다니면 어떠냐 싶어서 출퇴근용으로 사용 중이었다. 아무리 나라도 분홍 자전거는 부담스러워 꼬박 모자를 쓰는 일은 잊지 않았다.
자전거를 굴려 진여원의 집 앞에 도착했을 때였다. 펜스에 달라붙어 있는 꼬꼬마 두 명이 보였다.
“야, 저 개 존나 못생겼다.”
“눈 봐, 개 찢어졌어.”
개나리는 두 꼬마 녀석들을 신경 쓰지도 않은 채 정원의 풀만 씹고 있는 중이었다.
개나리의 생김새를 욕하는 녀석들이 손에 들고 있던 탱탱볼을 던지려 팔을 뒤로 뺐다. 재빨리 자전거에서 내려 그놈의 팔뚝을 콱 잡았다.
“저래 보여도 목줄 풀어 놓으면 너희는 한 입 거리다. 조심해라.”
“아저씨가 뭔 상관이에요. 놔요!”
나 어렸을 땐 저렇게 싸가지 없지 않았다. 다시금 자전거를 훔쳐 달아나려 했던 고등학생이 떠올랐다. 아직도 그 여드름 가득한 얼굴을 기억하고 있으니 잡히기만 해 봐라.
나는 콱 인상을 구겨서 꼬꼬마들에게 겁을 주었다. 개나리는 나를 발견하자마자 풀을 뱉어 내고 발광을 해댔다.
컹컹컹! 긴 주둥이가 쩍 벌어지고 뾰족한 이빨이 드러났다. 개나리가 쇠사슬을 끊을 기세로 두 발로 서자 꼬꼬마들이 기겁해서 달아났다.
대문까지 가기도 귀찮아 그냥 펜스를 훌쩍 넘었다. 그러다 뒤늦게 자전거가 생각나는 바람에 다시 끌고 들어와야 했다. 곧장 개나리를 안아 주니 얼굴이고 목이고 할 것 없이 침 범벅 세례로 나를 반겼다.
“자식이 안쓰럽게. 왜 못생겨서 구박받고 그러냐.”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데 등 뒤가 싸했다. 마치 잊고 있던 중요한 사실을 떠올린 사람처럼 고개를 휙 돌려야했다.
예상이 적중했다. 돌이 둘러진 텃밭이 말 그대로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대나무로 지탱해 놓은 토마토 나무와 땅에서 푸릇푸릇하게 자라던 상추가 엎어지고 찢어지고 난리도 아니었다. 게다가 오이는 씹다 뱉었는지 아작이 나 있었다.
“이런 미친개가!”
분기탱천해서 일어났다. 녀석의 목줄을 끌어서 텃밭으로 데려갔다. 끌려오지 않으려는 것을 힘으로 억지로 질질 끌어당겼다. 나는 주둥이를 잡아서 텃밭을 응시하게 만들었다.
“봐, 이 자식아! 네가 이렇게 해 놓으면 뒷감당은 누가 져야 돼!”
동시에 꼬리와 귀가 축 처졌다. 단추 구멍 같은 눈이 더없이 처연해 보였다. 그 모습을 보니 머리끝까지 솟았던 화가 순식간에 진화됐다.
그래, 짐승 탓이겠냐. 텃밭까지 닿도록 목줄을 길게 늘인 내 탓이지.
요 이틀 얌전하기에 방심한 내 탓이 컸다. 녀석을 손에서 풀어 주고 비스듬히 쓰러진 대나무 심을 세웠다. 토마토 나무줄기를 대나무에 묶은 다음 옆에 놓인 모종삽을 들었다.
한숨을 더하며 개나리가 파헤쳐 놓은 흙을 고르게 두드렸다.
새롭게 심은 것으로 보이는 작두콩 줄기는 오이망을 타고 오르다 짐승의 습격으로 생을 달리했기에 더는 손쓸 수가 없었다.
줄기가 부러진 것도 있고, 부러질 듯 말 듯 아슬아슬해 보이는 것도 있었다. 비실거리며 꺾인 줄기를 마름모꼴로 짜인 오이망에 얹어 두었다. 회생 불가능한 것들은 뽑아서 바닥에 쌓았다.
한참 작업에 몰두하자 이마에 땀이 흥건했다. 텃밭을 정리할 동안 놈이 왜 이렇게 조용한가 했더니 멀찍이 떨어져 앉아서 나를 구경하는 중이었다.
“이리 와 봐.”
모종삽을 흔들었다. 개나리가 몸을 일으켰다.
국산개가 아니라 한국말을 못 알아듣나.
“컴 온.”
이쪽으로 오고 싶어 하는 것도 같은데, 제자리에서 동동거릴 뿐이었다.
개나리의 불안한 시선이 내 손에 머물러 있었다. 마치 모종삽을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설마 진여원이 모종삽으로 저 녀석을 학대한 건 아니겠지? 나는 모종삽을 저 옆으로 던졌다.
손바닥을 짝짝 치자 녀석은 그제야 몸의 근육이 한껏 도드라지도록 달려왔다. 무게가 엄청난 녀석을 품에 안아서 텃밭을 향하게 했다.
“자, 앞으로는 절대 뜯어 먹지 마. 개 풀 뜯어 먹는다는 소린 너 때문에 나온 거야, 자식아. 누가 맡긴 개 아니랄까 봐 이렇게 속을 썩여? 더워 죽겠구만.”
손으로 얼굴을 부채질해 가며 자전거로 향했다.
바구니에 넣어 둔 것들을 꺼내 바비큐 그릴이 있는 원목 테이블로 가서 앉았다. 목이 타 생수를 순식간에 반이나 들이켰다.
도시락 뚜껑을 열자 달달한 양념 냄새가 올라왔다. 땀을 흘린 탓인지 바로 식욕이 일지는 않았다. 조금 있다가 먹을 생각으로 뚜껑을 도로 덮었다.
그사이 개나리는 내 발치에 앉아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천천히 땀도 식어 갔다. 스프링클러가 돌아가며 시원한 물줄기를 쏟아 내는 소리가 듣기 좋았다.
내일이면 진여원이 올 테고, 앞으로 신세질 일 없는 집이었다. 괜히 내 집도 아닌데 정 주지 말자며 테이블에 엎드렸다.
이대로 한숨 자고 일어나면 엄청 개운할 것 같았다. 나를 올려다보고 있는 개나리를 향해 입을 벙긋했다.
“나리야.”
쫑긋.
“나리야.”
또 쫑긋.
“나리, 나리 개나리. 입에 따다 물고요. 병아리 때 쫑쫑쫑 봄나들이 갑니다.”
노래를 부르자 개나리가 고개를 왔다 갔다 하며 갸웃거렸다. 다들 이런 맛에 개를 키우는구나.
귀여웠다.
“잘 노네.”
순간 개나리가 말을 하나 싶어 놀랐다. 황급히 허리를 일으켰는데 진여원이 뒤에 서 있었다.
검정 슈트에 하얀 와이셔츠와는 대비되는 차콜 넥타이가 한눈에 들어왔다. 캐주얼한 차림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었다. 그런데 그의 손에는 슈트와 어울리지 않는 모종삽이 들려 있었다.
진여원의 등장에도 개나리가 얌전했던 이유를 알았다.
“일찍…… 오셨네요.”
“왜 더 불러 보지.”
그런다고 못할 줄 알고.
“진짜로 불러 드릴까요?”
“두 손 가지런히 모으고.”
어린이 동요 포즈를 취하라는 말에 속으로 혀를 찼다. 내가 안 할 줄 알았는지 진여원이 테이블에 놓인 내 저녁으로 시선을 주었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저기 텃밭은 제가 엉망으로 만든 거 아닙니다. 이 녀석이 저질렀고, 제가 정리했죠.”
개나리가 모종삽 때문에 내 뒤로 숨었다. 진여원이 손에 들린 모종삽을 내려다보고 텃밭 쪽으로 휙 던졌다. 그제야 개나리가 미친 듯이 진여원에게 달려들었다.
그가 흥분한 개나리의 머리를 꾹 내리누르자 녀석이 고양이처럼 진여원의 다리를 빙글빙글 돌았다.
“가만. 착하지.”
개나리에게 하는 말인데도 왜 내 가슴이 뛰는지 모르겠다. 정장을 입은 남자와 하얀 강아지. 그 효과일 거라고만 믿고 싶었다.
“밥은?”
“지금 먹으려고요……. 사장님은요?”
“아직이야.”
도시락은 한 개인데 나눠 줘야 하나. 인센티브도 줬겠다, 도시락 정도는 나눠 줄 수도 있을 것도 같고…….
잠시 고민하는데 진여원이 집 안으로 향하고 있었다. 개나리가 치사하게 그간 돌봐준 나를 두고 진여원을 따라갔다.
개나리에게 이리 오라며 손짓을 하자 녀석이 눈물 나게도 내게 달려와 주었다. 사람 보는 눈은 네가 있구나. 개나리의 뺨을 마사지해 주며 턱을 긁다가 챙겨주지 못한 녀석의 저녁이 생각났다.
비어있는 밥그릇에 사료를 듬뿍 부어 주었다. 활동량이 많아서 그런지 이 녀석도 대식가였다.
아득아득 하고 사료를 씹는 소리가 음산했는데, 먹을 때 보면 못생긴 걸 넘어 무서울 정도였다.
그런데 이 인간은 들어가서 안 나오는 거 아니야? 할 일 다 했으니 난 가야 되나 싶었다. 원목 테이블의 도시락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집도 개도 봐줬는데 그냥 가기는 억울했다. 정원이나 구경하면서 밥이나 먹을 생각으로 도시락에 손을 대려는 때였다. 현관문이 열리고 진여원이 나왔다. 반소매 라운드 티셔츠로 옷을 갈아입은 그의 손에는 커다란 피크닉용 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그는 테이블에 바구니를 올려놓더니 바비큐 그릴의 조리용 타이머를 돌렸다. 나는 눈만 멀뚱멀뚱하게 뜨고 있었다. 진여원이 손잡이를 들어 동그란 뚜껑을 열자 기름이 쭉쭉 빠질 만한 그릴이 보였다.
“뭐 하세요?”
“식사 준비.”
그가 허리에 검은 앞치마를 둘렀다.
“저 바비큐 해 주실 겁니까?”
“침 떨어지겠어.”
그리고 나선 눈을 설핏 접고 웃는데 괜히 입이 말랐다.
나는 조용히 편의점 도시락을 테이블에서 끌어 내려놓았다. 해 준다는데 마다할 것은 없었다.
진여원이 그릴과 테이블을 차례로 닦더니 빈 테이블에 양념을 한 폭립과 바나나, 파인애플을 올려 두었다. 이어서 긴 꼬치와 토마토를 내게 내밀었다.
나도 자연스레 꼬치에 토마토를 끼웠고, 진여원은 폭립을 그릴에 얹기 시작했다.
등뼈에 달라붙은 양념이 지글지글거리며 아래로 뚝뚝 떨어져 내렸다.
“병원하고 일은 다 잘 해결하셨습니까?”
“환자는 정신 차렸고, 일도 따 왔으니 잘한 셈인가.”
진여원이 파인애플도 그릴의 빈 공간에 올렸다.
“저……. 개나리 주인이 칼 맞았다는 건 농담이시죠?”
“농담을 왜 해.”
“혹시 청부살인업자한테……?”
“박석연 씨는 상상력이 뛰어나서 디자인도 창의적인가 본데.”
“요리하다 찔린 건 아닐 테니까요.”
진여원이 피식거렸다. 개나리가 우리 주변을 돌며 냄새를 킁킁대고 맡았다. 사람인 나도 이렇게 향이 좋은데 후각이 발달한 개는 오죽하겠나.
개나리가 나를 원망 섞인 눈으로 보는 것 같았다. 너희만 맛있는 거 먹으려고 나 먼저 사료를 줬구나, 그런 눈이었다.
“저 녀석 주인이 검사야.”
진여원이 개나리를 가리켰다. 그럼 범인이라도 쫒다가 다친 건가?
“그래도 무사히 정신 차렸다니 다행이네요.”
“동생한테 전해 줄게.”
“동생이요?”
칼에 찔린 사람이 진여원의 동생일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냥 개나리 주인이라고만 들었지.
나리. 개나리.
달래. 진달래.
뭔가가 어울렸다.
“설마 동생 이름이……. 진달래입니까?”
혹시나 싶어 꺼낸 말에 진여원은 그런데 라는 얼굴로 대꾸했다.
“……배에 상처 남으면 많이 속상하겠네요.”
“남자의 훈장이라던데.”
여자가 아니라 남자였나? 나는 진달래라는 이름을 가진 진여원의 동생에게 유감을 표했다.
“그런데 박석연 씨.”
그릴 앞에 선 진여원이 나를 지그시 쳐다봤다. 나도 그를 향하고 있던 터라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지 못하고 굳어 버렸다.
“토마토만 먹을 셈이야?”
손에 들려 있는 꼬치의 끝까지 토마토가 꽂혀 있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손만 움직이고 있었나 보다.
“아……. 아뇨, 전 채소보다 고기를 많이 먹을 건데.”
그러니까 고기나 많이 구우라며 웅얼거렸다. 왠지 그를 의식한 걸 들킨 것만 같아 서둘러 말을 돌렸다.
“그럼 개나리는 계속 사장님이 돌보시겠네요.”
“나 말고도 대신 봐줄 사람 있어.”
그럼 왜 나한테 부탁했는데.
발끈해서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물어보고 싶은 마음 반, 그러고 싶지 않은 마음 반이었다. 진여원의 대답에 따라 아쉬움과 기대가 교차할 것 같아서.
“엘리트 집안이시네요.”
그렇게 뜬금없는 대답만 하고 말았다. 진여원이 허리를 두른 앞치마를 풀어 내리고는 내 그릇에 노릇노릇하게 익은 폭립과 과일들을 올려 주었다. 어쩐지 피망마저도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먹어.”
“사장님 먼저,”
“빈말 말고.”
“그럼 잘 먹겠습니다.”
제일 먼저 파인애플을 씹자 뜨겁게 달궈진 과즙이 입 안에서 팍 퍼졌다.
폭립의 뼈를 따라 살점을 벗겨냈다. 포크로 찍어 입에 넣으니 고기가 살살 녹았다. 진여원도 내 앞에 마주 앉아 뼈를 발라냈다.
진여원은 침을 질질 흘리고 있는 개나리에게 발라낸 살을 한 점 툭 던져 주었다.
“개한테 사람 먹는 음식 주면 안 좋다고 들었는데.”
“패스트푸드 좋아하는 편이야?”
“그렇죠.”
“그것도 몸에 안 좋아.”
말발로 진여원을 이길 수는 없지만, 그의 말뜻을 바로 이해하는 실력은 점차 늘고 있었다.
“하기야 쟤도 태어났으면 하루쯤은 맛있는 특식도 먹고 그래야겠죠.”
양념이 깊게 배어 있는 바비큐를 씹다가 진여원이 고기를 직접 쟀다고 생각하니 좀 웃겼다.
“바비큐 양념할 때 고무장갑 끼고 비비십니까?”
진여원이 파인애플을 찍은 포크를 들고는 턱을 괬다.
“인터넷으로 주문하는데.”
“아……. 그러시겠죠.”
진여원의 눈이 모양 좋게 접혔다. 냉소적으로 생긴 남자인데도 저렇게 웃을 때 보면 불순물 하나 섞이지 않은 순수함이 보였다.
저 모습이 자꾸 기억에 남을 것만 같아서 접시에 코를 박다시피 바비큐를 먹었다.
“박석연.”
구운 토마토를 내 그릇에 올려 주던 진여원이 나를 불렀다. 박석연 씨가 아닌 박석연이라는 부름에 여기 아래가 쿵쾅거렸다.
나는 눈동자만 올려 진여원을 바라봤다.
“섭섭했어?”
그가 물었다. 런웨이 도구실에서 내게 화를 냈던 일을 말하는 것 같았다.
“……아뇨.”
이유 모를 서운함에 속이 상한 건 사실이지만, 그날 진여원은 충분히 화낼 만했다.
‘그만두려면 사이좋게 세 명이 다 나가.’
그게 가장 속이 상했다.
나라는 직원은, 그에게 있어 아쉬울 것 없는 존재처럼 느껴졌기에.
대학 때였으면 평정을 유지하지 못했을 테지만, 사회 물을 먹은 덕에 그 자리에서는 애써 덤덤할 수 있었다.
“그런데 나는 왜 섭섭하지?”
포크를 떨어뜨릴 뻔한 손에 힘을 주었다. 혼난 건 난데 사장님이 왜 섭섭하냐고 물으려던 때였다.
툭, 툭, 투둑.
나무 테이블 위로 동그란 무늬가 진하게 번져 나갔다. 정수리에도 가벼운 충격이 왔다.
뭐지, 비?
고개를 휙 위로 들었다. 콧등과 뺨으로 두서없이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빗물이 눈 안으로 떨어져 내려 쓰라림에 눈꺼풀을 꾹 닫았다가 떴더니, 점점이 떨어지던 비가 이내 쏴아아 하고 한꺼번에 쏟아졌다.
“으앗!”
컹컹컹! 개나리가 제일 먼저 제 집으로 달려 들어갔다. 나는 접시를 급히 들었다.
하늘에서 대야로 물을 들이 붓는 것처럼 물줄기가 더 거세졌다. 일단 그릴 뚜껑부터 닫자. 그런데 저기 널린 음식들은 다 어쩌지? 그보다 내 옷은…….
갑작스러운 소나기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전전긍긍했다. 비를 피하러 달려가기에는 진여원이 가져온 음식들이 눈에 밟혔다. 하물며 사장도 비를 맞고 있는데 나만 쏙 들어갈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도 삽시간에 전신이 흠뻑 젖어 버렸다. 비는 거센 빗소리만큼이나 엄청난 세기로 우리를 두드려댔다.
“일단.”
피하고 보자는 말을 꺼내기도 전이었다. 진여원이 갑자기 내 팔을 확 잡아당겼다. 더 말하지 않아도 충분했다. 동시에 그와 나는 현관까지 그대로 달려갔다.
현관 위는 아치형의 유리막이 처져 있어 비가 퉁퉁 튕겨 나갔다. 이제는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팔뚝에 찰싹 달라붙은 내 옷 위로 그의 손도 적나라하게 닿아 있었다. 차갑게 식어 가는 몸과 다르게 팔이 뜨거웠다. 머리에서 열이 들끓는 것도 같았다.
“저……. 저거 다 젖겠는데요.”
바비큐 그릴이 놓인 쪽을 바라보며 몸을 틀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진여원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지금이라도 다시 가져오면.”
“이미 늦었어.”
머리에서부터 이마와 콧등을 타고 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그 사소한 것을 느낄 정도로 감각이 곤두섰다.
진여원이 나와 같이 젖은 채로 나를 쳐다봤다. 어쩐지 나는 시선을 피하게 돼 그의 턱 끝만 바라봐야 했다. 독설을 던지기도 하고 내게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하는 그의 입술이 보였다.
빗물에 젖은 입술이 축축해서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입 안이 메말라 달싹거렸을 것 같았다. 나는 숨을 잠시 멈췄다가 말을 꺼냈다.
“갑작……스럽네요.”
작게 나온 내 목소리는 빗소리에 묻혀 버렸다.
“마치.”
나는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소나기 같네.”
진여원의 입술이 모양 좋게 올라갔다.
쏴아아아- 점점 더 거세지는 빗소리에 귀가 멍해졌다. 아직 파인애플 향이 시큼달달하게 입 안을 맴돌고 있었다.
이와 같은 날, 소년과 소녀도 소나기를 피하고자 수숫단으로 몸을 감췄었다. 비에 젖은 소년의 내음새와 온기를 느낀 소녀가 어떤 기분이었는지 나는 이제 이해할 것도 같았다.
다만 소녀는 작고 약해 소년에게 몸을 맡겼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얼굴을 타고 내려온 물이 입술로 들어와 달달함을 중화시켜 나갔다.
“무슨 생각해.”
그의 입술이 움직였다.
“소나……기요.”
그의 열기를 팔에 가둔 채로 내리는 비를 하염없이 쳐다봤다. 모르겠다. 그저 소나기 같은 지금 이 순간을 벗어나고 싶지가 않을 뿐이었다.
빗물에 무겁게 내려앉은 속눈썹을 깜빡이며 그의 옆모습을 올려다봤다. 그 역시 정원 조명에 번진 빗줄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