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2권) (6/18)

6장

재학 시절 디자인학과는 미래지향적 직군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전망 좋은 학과였다. 한참 IT 열풍이 불었던 때처럼 말이다.

애니메이션을 비롯해 개성 있는 광고들이 급부상하면서 디자인 업종으로 학생들이 물밀듯 쏟아졌다. 나 또한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만 해도 구두 업계에서 한 획을 그을 수 있을 거라는 부푼 꿈에 젖어 있었다.

졸업을 하고 나서 사회에 발을 디뎠을 때 느낀 건, 붐(boom)의 폐해에 대해서였다. 우후죽순으로 신설된 디자인과의 학생들이 다 어디로 가느냐? 당연 디자인 업계였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디자인 시장은 생각만큼 넓지 않았다.

애니메이션은 일본 외주가 태반, 패션 디자인 또한 취업문이 좁았다.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국산 패션 브랜드는 사실 몇 되지 않았다. 시장만 나가 봐도 국내 브랜드는커녕 외국 명품 카피만 즐비했다. 좁은 국내 시장을 벗어나고자 외국 브랜드로 취업을 하려 해도 난관이 있었다.

유학? 그건 나 같이 비행기 한 번 타 보지 못한 서민이 감당할 수 있는 비용이 아니었다.

포트폴리오를 꾸준히 준비하고 학점을 상위권으로 유지했기에 그나마 브랜드 가치가 있는 체일 슈즈에 입사할 수 있었다.

처음 1년은 나만 열심히 하면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졌다.

일주일에 네 번 이상 지속되는 야근도 모자라 공장과의 트러블은 직급 낮은 신입들이 대신 들들 볶였으며, 그럴싸한 디자인을 내놓아 봐야 네가 비비안인 줄 아냐고 핀잔이나 들어야 했다.

혁신은 곧 쓰레기통 행이었다. 시간이 지나자 부정당한 디자인에 의기소침해지고 문제는 마치 내게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됐다.

체일 슈즈에 계속 몸담고 있었다면 생각을 바꾸지 못했을 것이다. 브랜드의 가치는 회사에 소속된 인원들에 의해 얼마든지 높일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입꼬리에 웃음을 가득 담고 모니터를 쳐다봤다.

[YOUM & 끌로이 콜라보레이션, 그 스펙트럼에 모두가 환호하다.]

기사 제목에 맞춰 내용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런웨이가 지연이 된 점에 대해서도 한마디 언급이 없었다.

콜라보레이션에서 선보였던 한정 구두들은 유리아 백화점 입점 런칭에 맞춰 전량 매진됐고, 연예인 공항 패션으로도 여러 번 윰의 구두가 오르내렸다. 확실히 연예인의 파급효과는 어마어마했다. 남대문 카피 시장도 윰의 제품을 쏟아 내느라 때 아닌 호황이었다.

사실 진여원과 <엘리스리스> 여주인공 안세라의 열애기사도 한몫했을 것이다. 브랜드 윰만큼이나 대표 진여원의 젊은 나이와 생김새가 뜨겁게 대두됐다. 검색창에 진여원의 이름만 넣어도 이력과 얼굴 사진이 뜨는 세상이니 이상할 것도 없었다.

웃고 있던 입이 경련하는 것을 억지로 막았다. 열애기사가 뜨면 좀 어때. 나는 나대로 일해서 인센티브만 많이 받으면 되지.

“석연 씨, 얼굴이 무서워.”

곽일영이 나를 엑소시스트 악령 보듯이 쳐다봤다.

“전 곽 대리님의 바이오리듬이 더 무서운데요.”

“응. 다들 그러더라.”

곽일영이 산뜻하게 대답했다. 내가 입사 후에 적응이 안 되는 게 있다면 오늘처럼 부서 사람들이 다 빈둥빈둥 노는 거였다.

“곽 대리님은 불안하지 않아요?”

“뭐가?”

“저 회사에서 이렇게 웹서핑하고 놀고 이러는 거, 저는 처음이거든요.”

“아직 기획 안 들어왔잖아. 놀아도 돼. 기획 시작되면……. 알잖아.”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콜라보를 생각하니 끔찍하긴 했다.

윰은 각 부서마다 기획 외에도 매달 일곱 켤레의 구두를 통과시켜야 했다. 그건 인센티브에 추가되지 않는 항목이었다.

이번 달은 콜라보라는 예외적인 케이스가 있어 넘어갔지만, 다음 달은 할당량을 채워야 했다. 슬슬 쌓아 두었던 아이디어도 고갈되어 가고 있으니 조만간 백화점과 시장을 순회해야 할 듯했다.

지나가고 사라지는 유행에 맞서 새로운 유행을 선보이는 게 바로 트렌드였다. 언제나 트렌드는 유행보다 앞서 있어야 했다.

트렌드를 만드는 것은 디자이너, 그 수많은 트렌드 중에서 대중이 선택하는 것이 바로 유행이었다.

이번 여름은 비비드 컬러가 대세였으니 아마 가을까지 이어질 테고, 겨울은 정적인 색감에 장신구가 포인트가 되는 흐름으로 이어질 것 같았다. 물론 변수는 있었다. 그래서 필요한 게 시장조사였다.

“안세라 발 완전 못생겼는데, 사장님 취향 특이하네.”

진짜! 안세라고 진여원이고, 잊고 있었는데!

곽일영이 투덜거리는 바람에 다시 뇌에 콕 와서 박혔다.

“왜요, 광고 사진 보니까 예쁘던데요.”

짐짓 평이하게 말했다.

“포토샵이지. 가짜야 그거. 난 알아. 난 한눈에 알 수 있어.”

그래, 발 페티쉬 곽일영이니까. 곽일영이 타당한 이유를 대지 않아도 그 하나만으로 충분했다.

콜록, 콜록. 갑자기 나온 기침에 주먹을 쥐고 입을 가렸다. 엊그제 소나기를 한바탕 맞은 탓에 개나리도 안 걸리는 감기에 걸려 버렸다.

소나기는 이삼십 분 정도 내리다가 그쳤지만 이미 바비큐는 비에 푹 젖고 난 뒤였다. 비가 그칠 때쯤 개나리가 테이블에 뛰어들어 바비큐를 먹어 치우려는 것도 간신히 말려야 했다.

그릴의 점화 부분이 홀딱 젖어 버려 다시 구워 먹을 수도 없었다. 결국, 편의점 도시락을 진여원과 나눠 먹은 뒤에 그의 옷을 빌려 입어야 했다.

세탁까지 끝내 놓고도 만날 시간이 없어 내 자리 밑에 쇼핑백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다시금 아까운 바비큐 생각에 입맛을 다셨다. 그래도 앞으로 한 시간만 버티면 난지도 행이다.

오늘 출근하자마자 바로 출발할 줄 알았더니 오전 근무는 해야 한다고 하더라. 연방 기침을 하는 내게 곽일영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했다.

“석연 씨, 오늘 난지도 갈 수 있겠어?”

“그럼요.”

그래도 이틀간 꾸준히 약을 먹었더니 감기가 더 진행되지는 않았다. 기침도 계속 나오는 게 아니라 한 번 나올 때 몰아서 나오고 평소에는 잠잠했다.

복도에 놓인 정수기로 미지근한 물을 뜨러 나왔다. 우리 부서뿐만 아니라 타 부서 역시 시끌시끌했다. 이럴 거면 왜 4시까지 근무를 하는 건지. 목을 큼큼거리며 복도 끝으로 걸어갔다.

어차피 오늘은 할 일도 없는데 시원하게 수영이나 할까? 업무 시간이라 대놓고 하기에는 마음에 걸려서 수영장 안쪽을 내려다봤다.

쭉 뻗은 몸매의 남자가 비치 의자에 앉아 손으로 눈을 꾹꾹 누르고 있었다. 그는 다소 피곤해 보이는 모습으로 옆에 놓인 음료를 잡았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진여원과 동시에 눈이 마주쳤다.

진여원의 까만 눈이 한참이나 내게 머물렀다. 안 된다, 수영은 포기였다. 나는 고개만 까딱하고 먼저 자리를 피했다.

라라라라 라라라라. 날 좋아한다고.

라라라라 라라라라. 널 사랑한다고.

내가 드디어 미쳤네, 미쳤어.

나는 재생되는 노래를 억지로 멈췄다. 사무실 문 앞에서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약이 독해.”

괜히 감기약을 탓하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

한강공원 난지도 캠핑장은 우리가 도착한 때부터 이미 만원이었다. 우리 회사뿐만 아니라 타 회사 사람들로도 북적거렸기 때문이었다.

차를 대절하기에는 가까운 거리라 자차가 있는 사원들의 자가용을 나눠 타고 왔다. 이재화의 낡은 경차는 우리 셋이 타니 누군가를 더 태울 수도 없었다.

캠핑장은 테이블 의자부터 버너와 그릴을 비롯해 바비큐 구이에 관련한 도구는 전부 돈을 내고 대여해야 했다. 입장료도 따로 받으면서 인심 한번 야박했다.

장을 봐 온 옴므 팀과 함께 우리 팀도 손수레에 한가득 짐을 옮겼다. 군것질거리부터 시작해 수십 종류에 이르는 술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허준성이 힘자랑을 해 대며 손수레를 끌기에 나는 손 놓고 편히 구경만 했다.

파티 준비는 우리 손을 직접 거치지 않고, 따로 부른 업체가 피크닉 존에 세팅을 전부 마쳐 놓은 상태였다. 긴 일자 테이블 여섯 개가 옹기종기 모여 있고 그 중앙에 [YOUM]이라 적힌 팻말이 올려져 있었다.

최근 인원 정비를 한 인사부와 영업부는 다음 주로 캠핑이 잡혀 있었기에 오늘은 디자인부서만 모인 자리였다. 사장까지 참석하는 자리라 디자인부서에서 빠진 인원은 한둘밖에 되지 않았다.

팀별로 나눠 앉고 술들을 세팅하니 한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셋밖에 없는 우리 팀에 자리가 부족한 여직원 두 명이 와서 앉았다. 드럼통 위에 얹힌 그릴에는 바비큐와 대하, 스테이크가 빼곡했다.

곽일영이 집게를 들어 굽겠다는 것을 내가 대신 가져왔다. 층이 달라 여자 직원들과는 얼굴을 마주칠 일이 거의 없었기에 통성명을 해도 어색한 분위기는 여전했다.

“사장님이 늦으시네요.”

옴므 팀의 김현주가 새우깡을 아작아작 씹어 먹었다.

“고기 드시고 드세요.”

과자로 배 채우는 게 안타까워 내가 말했다. 김현주가 새우깡을 내려놓고 그럼 빨리 구워 줘요, 하고 귀엽게 말했다. 먼저 익은 새우부터 올려 주고 내게로 날아오는 연기를 손으로 휘휘 쳐냈다. 나도 드럼통 앞에 서서 면장갑을 끼고 새우를 뜯어 먹었다.

“석연 씨, 내가 할까?”

이재화가 입김이 나올 정도로 뜨거운 새우를 먹는 내게 말했다.

“아닙니다, 이런 건 막내인 제가 해야죠.”

곽일영은 이 와중에 직원들의 발을 하나하나 살피고 있었다.

“사장님 안 오는 거 아니야?”

김현주 옆에 있는 오단영이 맥주를 홀짝였다. 이 사람들이 이제 보니 바비큐는 관심도 없고 진여원만 찾는구나. 물론 난 바비큐에만 관심을 쏟다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슬슬 해가 지려 준비하고 있었다.

비는 안 오겠지? 얼굴 위로 툭툭 떨어졌던 빗방울의 감촉을 떠올렸다. 내 팔을 잡았던 진여원의 온기도 생각나 버리는 바람에 애꿎은 연기만 계속 휘저었다.

“인육 먹는 기분이야. 석연 씨.”

곽일영이 고기를 질겅질겅거리며 또 험악해진 내 표정을 지적했다. 나는 잔에 담긴 맥주를 단번에 원샷했다. 집게로 고기를 꾹 눌러 지글지글 태웠다.

우리 사장님께서는 <엘리스리스>의 안세라하고 밀회라도 하느라 늦나 본데…….

아니다, 그만하자. 진여원은 이성애자다. 바이인 김대영에게도 그렇게 데이고도 아직도 정신 못 차리냐? 이제 보니 나란 놈은 학습능력이 제로였다.

그와 소나기를 맞았던 이후부터 정도가 심해지고 있었다. 생각을 다른 데로 돌려도 다시 진여원이라는 원점에 도달했다.

“우리 게임할까요?”

내가 먼저 운을 뗐다. 저쪽 팀들도 분위기가 무르익어 술 게임을 하는 걸 보고 한 말이었다.

“게임? 무슨 게임이요?”

“삼육구? 베스킨라빈스? 왕 게임은 뽑기 할 재료가 없어서 무리겠고.”

김현주와 오단영이 말을 주고받았다.

“삼육구로 하죠.”

제일 간단하지만 집중력을 필요로 하는 게임을 말했다.

다들 딱히 불만은 없는지 무릎 박수를 쳐 삼육구를 시작했다. 첫순서는 곽일영부터였다. 나는 고기를 구우면서 내 차례가 올 때마다 숫자를 말했다.

네 바퀴나 돌았을 즈음 곽일영이 이, 이십삼하고 말을 버벅거렸다. 여직원들이 신이 나서 벌주를 곽일영에게 내밀었다.

“마셔라, 마셔라!”

곽일영이 보드카와 콜라가 뒤섞인 잔을 심각하게 내려다봤다. 곽일영은 술 못 마시는데…….

“제가 흑기사 할게요.”

곽일영이 감동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쓰고 단 술을 단번에 들이켰다. 인상을 찌푸린 채 스테이크 한 점을 씹어 삼켜 알코올에 젖은 위를 달랬다. 또다시 시작된 게임에 나는 멍하니 숫자만 대꾸했다.

‘그런데 나는 왜 섭섭하지?’

진여원의 웃음기 띤 얼굴이 떠오른 탓이었다.

하필이면 오늘 캠핑의 주제가 바비큐라서 자꾸 떠오르는 것만 같았다. 이젠 별 게 다 말썽을 부렸다.

“사, 삼십! 으아아.”

곽일영이 대답해 놓고는 입을 틀어막았다.

“곽 대리님.”

낮게 그를 불렀다. 곽일영이 울상을 하고 나를 쳐다봤다.

“석연 씨? 또 흑기사예요? 우와, 멋지다.”

김현주가 말과는 다르게 보드카의 비율을 음료의 두 배로 늘렸다. 보드카 한 병 정도야 버틸 수 있는 주량이니 안심하고 대신 마셨다.

“석연 씨, 술 잘 마셔요?”

“적당히요.”

“저도 엄청 애주간데 술 먹을 사람 없을 때 불러요.”

“그럴게요.”

독한 술이 들어가자 목이 따끔따끔했다. 그릴에서 몸을 돌리고는 밭은기침을 토해냈다. 동시에 드륵- 주변에서 의자 밀리는 소리가 들렸다. 일어난 사람들이 인사를 하는 방향이 하나 같이 일정했다.

진여원이 커다란 윰 쇼핑백을 들고 우리 회사 테이블로 걸어오는 중이었다.

여기저기 자리를 터 주는 와중에 진여원은 이재화의 옆에 와서 앉았다. 사실 우리 테이블이 제일 한가하기는 했다.

김현주와 오단영이 역시, 하면서 자신들의 선견지명에 기뻐했다. 아마 진여원이라면 가장 한가한 자리를 선택할 거라 여겨서 처음부터 우리에게 온 듯했다. 게다가 우리 자리는 다른 팀에 비해 술이 덜 들어간 상태였다.

나는 그가 밑에 내려놓은 쇼핑백을 흘끔 쳐다봤다.

“박석연 씨는 왜 벌써 볼이 빨개.”

“게임에서 곽 대리님이 계속 졌는데 대신 흑기사를 해 주셨거든요.”

김현주가 내 대신 답을 주었다. 나는 새 그릇에 스테이크와 폭립, 대하까지 담아 진여원의 앞에 내려놓았다.

“드세요, 사장님.”

이어 이재화가 진여원에게 맥주잔을 내밀었다. 이재화가 술은 못 마셔도 따르는 기술은 예술이었다.

“계속해.”

“뭘요?”

이번엔 오단영이 대답했다.

“게임.”

다시금 삼육구를 이어 가는데 진여원은 가만히 식사만 하고 있었다. 우리도 끼라는 말은 못하고 게임만 진행했다. 물론 곽일영 때문에 숫자가 30을 넘어가는 일이 없었다.

구구단 게임으로 바꿔 보기도 했는데, 그냥 곽일영은 숫자에 약한 거라는 결론이 났다.

중간 중간 다른 테이블의 직원들도 우리와 같이 게임을 하거나 진여원과 술잔을 기울이기도 했다.

한참 뒤에야 나도 집게를 내려놓고 곽일영의 옆에 앉을 수 있었다. 열심히 굽느라 얼마 못 먹고 술 배만 채운 터라 늦게나마 고기를 흡수해 나갔다.

목이 막혀 맥주로 손을 뻗는데 문득 맞은편의 진여원과 눈이 마주쳤다.

뭐야, 왜 보는데.

속으로 구시렁거리고 고개를 돌려 예의 있어 보이게 맥주를 마셨다. 안주 삼아 입에 넣은 토마토를 팍 터뜨렸다. 분위기를 환기하듯 허준성은 박수를 짝짝 쳐대고 있었다.

“자자, 게임 참가할 사람들 나오세요. 5천 원씩 걷습니다. 가위바위보해서 최종 우승자에게 모은 돈 몰빵하는 거고요. 추가 상품으로는 단 하나뿐인 윰 신발이 주어집니다. 사장님이 직접 디자인하신 한정 상품! 자자, 나오세요.”

여기저기서 오오! 하는 탄성이 터졌다. 허준성이 진여원과 두런두런 뭔가 말을 나눈다 싶더니 저걸 하려고 한 듯했다. 참가할 사람들이 나와 돈을 오천 원씩 냈다. 나도 로또 하는 셈 치고 지갑을 열었다.

개중에 참가 안 하는 사람도 있고, 하는 사람도 있어서 모인 돈은 약 10만 원 정도였다. 가위바위보에 앞서 다섯 씩 짝을 짓는 도중이었다.

갑자기 진여원도 참가해 수표 석 장을 얹었다. 상금이 40만 원으로 불어 참가한 사람들에게 함성이 터졌다.

1조인 나는 나머지 네 명과 함께 뒤돌아서서 팔을 들었다. 가위바위보! 허준성이 외쳤다. 나는 가위를 쫙 펼쳤다.

동시에 고개를 들어서 내가 낸 것과 다른 사람들의 것을 확인했다. 나만 가위고 나머지는 전부 보였다.

“나이스!”

주먹을 꽉 쥐자 미참가자인 곽일영과 이재화가 가장 환호했다.

일등하면 한 턱 쏴야지. 나는 오른쪽 승리자 자리로 이동했고 탈락자들은 아쉬워하며 돌아갔다. 손 하나면 충분한 가위바위보라 생각보다 빠르게 게임이 진행됐다.

나름 치열했던 예선 토너먼트가 끝나고 결국 최종 4인이 남았다. 그중 한 사람이 진여원이었다. 동그랗게 모인 결승전 선수들이 뭘 내야 할지 생각하며 손을 꼼지락거렸다.

내 옆에 서 있는 진여원에게 나는 그만 들을 수 있게 속닥거렸다.

“사장님이신데, 꼭 우승에 욕심 내셔야 합니까.”

“돈은 내가 제일 많이 냈는데 왜.”

“그러면 직원들에게 미움 받으십니다.”

“그럴까?”

진여원이 대답하자마자 허준성이 가위바위보를 외쳤다.

<가위, 보, 가위, 보.>

나는 가위를 냈기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또 다른 가위를 낸 사람은 다름 아닌 진여원이었다. 우승에 가까웠던 탈락자 둘은 처음 탈락자에 비해 더없이 아쉬워했다.

“자자, 사장님 대 일개 직원이네요.”

허준성이 헛소리를 지껄였다.

일개직원이 이기는 역전극을 보여 주마.

나는 주먹을 폈다 접었다 했다. 나와 진여원의 가위바위보가 다시 시작됐다. 가위바위보! 허준성이 또 외쳤다.

주먹, 주먹.

비기는 바람에 아! 하고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나뿐만 아니라 주변의 긴장감도 최고조로 달했다. 또다시 스타트 신호가 들리자 나는 주먹을 냈다. 그 순간, 약 2초간의 정적이 흘렀다. 나는 주먹을 불끈 쥐고 우리 팀 테이블로 달려갔다.

“아자! 봤어? 봤어요?!”

이재화와 곽일영을 향해 검지를 높이 치켜세웠다. 팀원들은 월드컵 경기에서 골 넣은 선수를 환영하듯 내게 달려들었다.

“최고야. 석연 씨, 진짜 발도 최고!”

“우리 다음 주에 회식해요, 석연 씨.”

“당연하죠.”

우리들끼리 신나서 떠드는데 허준성이 내 어깨를 툭툭 쳤다. 허준성은 이죽거리는 미소를 지으며 내게 상금 40만 원을 건넸다.

“축하합니다.”

나는 수북한 오천 원짜리 한 장을 빼서 1차 탈락자였던 허준성에게 건네 주었다.

“너무 상심마시죠. 그걸로 마음 달래세요.”

사람 좋은 미소를 담아 웃어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허준성이 뭐라 한마디를 하려다 주변을 의식해 그만두었다.

지폐를 꼼꼼히 챙겨 자리에 앉았더니 김현주와 오단영도 신이나 있었다. 다음 주 쏘는데 껴 달라며 난리였다. 공돈인데 무조건 오케이였다. 어느새 자리로 돌아온 진여원도 맥주가 담긴 컵을 입으로 가져다댔다. 왜인지 웃음기가 서려 있는 듯했다.

그가 바닥에 내려놓았던 커다란 쇼핑백 하나를 내게 내밀었다.

“우승 상품.”

“감사합니다.”

돈 말고도 윰 한정 신발이 있다고 했었다. 일어서서 인사를 하고 쇼핑백을 열어 봤는데, 박스는 구두를 담는 것보다 커다랬다. 나는 옆에 앉은 곽일영에게 조용히 물었다.

“사이즈가 맞을까요?”

“글쎄. 한정에다가 한 개 뿐이니 비싸게 팔 수도 있지 않을까?”

윰 사장이 직접 디자인한 슈즈. 후에 브랜드 가치가 지금보다 올라갔을 때 경매에 내놓으면 꽤 큰돈을 받을 수 있을 것 같긴 했다. 올라가는 입꼬리를 애써 내리누르고 쇼핑백을 내 다리 밑에 두었다.

우리 테이블에서 삼육구 게임이 다시 시작되자마자 기쁨이 반절 줄어들었다. 게임 못하는 곽일영 때문에 술을 연달아 마셔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번 판은 웬일로 곽일영이 50까지 따라 붙었다. 이대로라면 술기운이 돈 김현주나 오단영이 걸릴 듯했다. 속도가 점차 빨라지고 이재화의 차례에 도착했다.

“유…… 육시……ㅂ…….”

짝! 육자를 외침과 동시에 이재화가 박수를 쳤다. 나는 믿었던 이재화를 망연자실하게 쳐다봤다. 이재화가 만면에 미안함을 띠우고 말했다.

“흑기사.”

이재화의 옆에 앉은 진여원과 또다시 눈이 마주쳤다.

나는 진여원에게 흑기사를 외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

“아……. 취한다.”

진짜 취할 때마다 꺼내는 말버릇이었다. 느릿하게 눈을 꿈뻑꿈뻑거렸다. 이동식 화장실은 또 왜 이렇게 먼 건지. 갈지자를 그려 가면서 화장실을 들렀다가 나왔다.

나프탈렌 냄새 때문에 참았던 숨을 밖으로 나와 뱉어 냈다. 근데 손이 왜 이렇게 묵직하지?

고개를 휙 내렸다. 내 손에 커다란 윰 쇼핑백이 들려 있었다. 술김에 들고 온 줄도 모르고 있었는데…….

나는 이동식 화장실에서 조금 떨어져 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취한 상태에서도 주머니에 두둑하게 담긴 지폐를 확인했다. 돈을 꺼내 세고 히죽거렸다. 이어 쇼핑백에서도 박스를 꺼냈다.

윰의 로고가 새겨진 검은색 박스를 열었더니, 얇은 종이에 감싸인 하얀색 하이탑 운동화가 보였다. 휙 종이를 벗겨 내고 곱게 놓인 운동화를 들었다.

운동화는 스웨이드와 가죽 소재가 믹스되어 흰색의 단조로움을 탈피해 있었다. 발볼과 옆등의 가죽 소재에 사선 무늬 펀칭도 들어가 있었다.

아예 바닥에 털썩 앉아서 신고 온 로퍼를 벗었다. 흰 운동화에 때가 묻을까 봐 손을 바지에 쓱쓱 닦고 곱게 매여진 운동화 끈을 풀었다.

사이즈를 보아하니 250이 조금 넘는 것 같은데, 깔창을 빼면 내 발도 충분히 맞을 것 같았다.

깔창을 떼어 내 쇼핑백에 다시 고이 담고 신발을 신었다. 발바닥이 폭신폭신했다. 발목을 두르는 하이탑 부분마저도 부드러웠다.

일어나 제자리에서 콩콩 뛰었다. 발끝 부분이 라텍스처럼 몽실몽실거렸다.

“예쁘다…….”

곽일영이 자주 하는 말을 내가 뱉어 냈다. 주변을 뱅글뱅글 걸었다. 어차피 다들 취해 있을 테니 누가 봐도 별 상관없었다.

소재도 진짜 좋다. 진여원이 1.5층 작업실 유리창에 디자인을 그리며, 또 앉아서 도식지를 만들었을 걸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근데 그게 내 것이 됐다는 게 더 이상했다.

가위바위보에서 졌으면 다른 사람이 가져갔을 텐데……. 하지만 어차피 승리한 건 나였다. 나중에 경매에 팔 생각은 저 멀리로 떠나 버렸다.

이건 내 신발이었다.

갑자기 어지럼증이 찾아와서 균형을 잡으려 팔을 벌렸다. 그리고 폭신폭신한 신발의 앞코로 바닥을 꾹꾹 누르며 돌았다.

“팔은 왜 또 벌려.”

“어?”

진여원이 팔짱을 끼고 나를 구경하는 중이었다. 진여원은 안경을 쓸 때면 유독 더 차가워 보였다. 그런데 오늘은 취해서 그런가 그마저도 잘생겨 보였다.

정신을 최대한 다잡았다. 그러지 않으면 속말들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뺨이 패일 정도로 입을 다물고서 그를 마주했다.

“잘 ㅅ……생겼네요.”

잘 신겠습니다, 라고 말하려 했는데 낭패였다. 혀가 제멋대로 춤췄다.

“신발이 말이죠.”

나는 진심을 숨기려 실없이 변명했다.

술기운이 심장까지 퍼져 지끈거렸고 몸에 확 열이 오르기도 했다. 왠지 얼굴도 화끈거리는 것 같았다. 진여원이 내 뺨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의 침묵이 체감으로는 길게 느껴졌지만, 실제로는 고작 몇 초에 불과했을 것이다.

“어울리네.”

“감사……합니다.”

인사를 하고 지나쳐 가려는데 오른발이 왼발의 흰 앞코를 내리눌렀다. 멀쩡하게 걷는 걸 의식하려 한 탓인지 발이 꼬여 버렸다.

순간적으로 놀라 눈앞의 가슴팍에 손을 대고 몸을 지탱했다. 심장이 벌렁벌렁거렸다. 자칫 잘못했으면 땅에 그대로 고꾸라졌을 것이다. 다소 당황한 눈으로 진여원을 올려다봤다.

소나기 내렸던 그날보다 더 가까웠다. 반소매 밑으로 드러난 내 살갗에 그의 뜨거운 손이 휘감겨 있었다. 경황이 없어 눈만 깜빡였다. 내가 그를 잡는 것과 동시에 그도 나를 잡은 것 같았다.

그의 가슴에 닿은 손바닥에 무언가가 톡톡톡 부딪혔다. 손을 더 꾹 내리눌렀다. 톡톡톡이 아닌 콩콩콩이었다. 그의 심장이 내 손바닥을 두드려왔다.

“박석연.”

웃음기 섞인 진여원의 목소리가 귀를 간지럽히는 것만 같았다.

“일부러 그래?”

일부러……?

가물가물한 시야로 그를 올려다보려 했다. 진여원의 어깨만 눈에 들어왔다. 그제야 내가 그의 가슴 가까이 귀를 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황급히 뒤로 물러나자 내 양팔을 잡은 진여원의 손에 힘이 더 들어갔다. 세상이 흔들린 건 아닐 테니, 내가 휘청거린 것이었다.

“뛰……네요.”

여전히 그의 가슴에 닿아 있는 손을 떼지 않고 중얼거렸다.

“뛰지.”

하긴, 심장이 안 뛰면 큰일이지.

그런데 진여원의 심장 박동이 어째서 내 것과 닮아 있는 건지 아리송했다.

술이 머리끝까지 올라와서 그런가? 나는 무겁게 내려오려는 눈꺼풀을 간신히 힘을 주어 버텼다. 진여원이 잡고 있어서 그런지 몸에 힘이 더 빠지는 기분이었다.

하아, 하고 힘을 좀 더 빼자 마자였다. 급격한 오바이트가 용솟음을 쳤다.

“웁. 우웩.”

급히 그를 밀쳐내고 뒤를 돌았다. 와르르 하고 먹은 술이 쏟아져 내렸다. 토와 같이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진여원은 뒤에서부터 내 팔을 잡아 포박 상태로 지탱했다. 등이나 두드려 줬으면 좋겠는데 먹먹한 귀에 혀를 차는 소리만이 들렸다.

“산통 깨는데 뭐 있어.”

“사……, 우웩. 제가 무……웩.”

“둘 중에 하나만 하지?”

오바이트와 말, 둘 중에 하나만 선택하라면 당연히 말이었지만 컥 하고 보드카가 역류했다.

부하가 회식 분위기 살리려고 마신 건데 좀 토닥여 주지는 못할망정. 투덜거림은 거기까지만 생각할 수 있었다.

한 번 쏟아 내기 시작하니 연달아 헛구역질이 나왔다. 기침까지 섞여 버려 엉망진창이었다. 감기약하고 술은 상극이라 오후에는 약을 먹지 않았었다. 오전의 약 기운이 남아 있었나. 과식을 한 것도 아닌데 속이 뒤집힌 걸 보면 분명 이유는 그것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헉헉거리며 더 이상 나올 것이 없을 만큼 비워냈다. 정신이 번쩍 들만큼 차가운 물로 세수를 하고 싶었다.

진여원은 그의 손수건으로 내 입술을 문댔다. 안 되겠다 싶어 손수건을 대신 받아 들고 화장실로 뛰어갔다. 몇 번 다리가 꼬였지만 다행히 엎어지지는 않았다. 화장실에 와서도 헛구역질을 몇 번 하고서야 속이 가라앉았다.

세면대에 몸을 기대 입을 물로 헹구고 찬물로 얼굴을 마구 비볐다. 술기운이 사라지기는커녕 입 안에 코가 매울 정도로 독한 알코올이 맴돌았다.

나프탈렌 냄새가 또다시 속을 자극해 재빨리 화장실을 빠져나왔다.

“아……. 죽겠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는데 진여원이 보이지 않았다. 치사한 새끼, 더러워서 그냥 갔냐.

비틀비틀거리며 손수건을 구겼다. 아무래도 택시를 불러 집에 가야 할 것 같았다. 그나마 정신력으로 간신히 버티고 있는데, 조금만 더 있으면 땅바닥에 앉아 잠들 것 같았다. 그래도 쇼핑백부터 가져와야지.

나는 반쯤 눈을 감은 채로 걸었다. 탁- 하고 무언가가 정수리에 부딪혔다. 앞으로 걸으려 하는데 벽에 부딪힌 건지 제자리걸음만 했다.

누군가 내 이마를 손가락으로 꾸욱 밀어 올렸다. 벽이라 생각한 게 진여원이었다.

“잡아.”

진여원이 쇼핑백을 내밀었다. 나보고 들라는 줄 알고 끈을 휙 잡았다. 그런데 진여원도 손을 빼지 않았다. 끈을 잡고 있는 서로의 손이 맞부딪혔다. 진여원이 그 상태로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나는 쇼핑백에 질질 끌려가는 모양이 되어 그를 따라갔다.

내가 토해서 더럽냐. 이렇게 갈 거면 차라리 손이나 잡아 주지. 아니, 잡긴 뭘 잡아.

눈을 감고 손이 이끄는 방향을 따라 반복적으로 걸었다. 군대에서 야간행군을 이렇게 했었다.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잠든 채로 발만 움직이는 행군. 맨 앞줄이 길을 잘못 들면 뒷줄도 도랑에 처박히는 불상사가 벌어지곤 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때와는 달리 마음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었다. 집까지 이렇게 데려다줬으면 좋겠다.

삑, 소리가 들리고 난 뒤에 진여원이 멈췄다. 나는 여전히 다리를 제자리서 굴리고 있었다. 순간 내가 지금 군대 야간행군 중이었나? 그런 착각이 들었다.

눈을 떠서 주변을 둘러보는 것과 동시였다. 진여원이 나를 자동차의 조수석에 구겨 넣었다. 나는 그대로 조수석에 뻗어버렸다.

문을 닫은 진여원이 보닛을 도는 걸 봤는데 잠깐 눈을 감았다 뜨니 어느새 그가 운전석에 앉아 있었다. 그 몇 초간 잠이 들었나 보다.

나는 운전대를 잡는 그를 보며 중얼거렸다.

“음주운전인데에……. 맥주 얼마나 드셨어……요?”

“반 잔.”

“아……. 반 잔. 그럼 훈방 조치해 드리겠슴다.”

입 안에 남은 알코올에 입술을 달싹이며 팔짱을 꼈다.

“지갑.”

“저 돈 없는데에…….”

돈은 없지만 일단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진여원이 내 지갑을 휙 채 가더니 내 신분증을 꺼냈다. 그는 내비게이션을 작동시켜 신분증에 적힌 주소를 검색했다.

“주소는 제에……가 말씀드릴 수 있는데요오…….”

“옹알이 해?”

나도 내 발음이 샌다는 건 알고 있다. 더는 말을 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조수석 창밖을 쳐다봤다. 코로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또 코로 뱉었다. 그러려고 한 건 아닌데 씩씩대는 숨이 삐져나왔다. 더는 몰려드는 수마를 막을 수가 없었다.

숨결이 너무 뜨거워 입까지 벌리고 눈을 감았다. 이대로 내일 아침까지 푹 자고 싶었다. 내려서 집에 올라갈 생각조차도 지금은 하기 싫었다.

나는 의자의 자동 레버를 눌러 주욱 뒤로 내려갔다. 어쩐지 내 침대보다 아늑한 쿠션이 나를 반기는 듯했다.

진여원의 어이없는 웃음소리를 들은 것 같기도 했다.

***

“으……. 머리야.”

짹짹거리는 새소리에 정신이 퍼뜩 돌아왔다.

몸을 일으키자마자 머릿속에서 한바탕 전쟁이 벌어졌다. 술 먹은 다음 날만큼 금주를 강력히 결심할 때도 없다.

바닥을 기다시피 걸어가 정수기의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알코올로 꽉 막혔던 목구멍이 시원하게 뚫렸다.

집에 돌아와서 옷도 벗지 않고 잤는지 심지어 하이탑 흰색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나는 꿈지럭거리며 운동화를 벗었다. 비스듬히 세워 둔 전신 거울에 거지꼴을 한 남자 하나가 비춰졌다.

머리는 새가 둥지를 틀어도 좋을 만했고 뺨과 눈은 퉁퉁 부어 있었다. 거울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는데 내 어깨 뒤로 살색이 보였다.

기겁을 하고 놀라 휙 고개를 돌렸다.

이불을 허리께까지만 덮은 남자가 내 침대에서 자고 있는 중이었다. 침대 끝으로 기어가 벽을 보고 자는 남자의 얼굴을 확인했다.

“류준……이…… 왜?”

류준이 들어오는 햇빛이 거슬리는지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아니, 류준이 왜 우리 집에 있어! 설마 어제 내가 미령이네 가게를 갔던가?

그것보다 아무리 취해도 밖에서 만난 상대를 집까지 데려오는 경우는 없었다. 대체 내가 집에 어떻게 들어왔더라……. 물을 가득 떠서 또다시 마셔 가며 생각에 잠겼다.

“미쳤다, 미쳤어.”

진여원의 심장 소리를 손으로 느끼고, 귀로도 듣겠다고 그에게 비비적거린 게 생각났다.

진여원의 차에서 잠든 것과 그가 나를 깨운 것 또한 기억났다. 거울에 비친 얼굴을 보고 머리를 쥐어뜯었다.

파노라마처럼 듬성듬성 배열된 조각들이 짜 맞춰져 나가기 시작했다.

***

한참 잘 자고 있었는데 누가 내 어깨를 흔들었다.

왜 자는 사람을 깨우고 그래. 거칠게 쳐내자 이번엔 뺨을 흔들었다. 짜증을 확 내며 눈을 떴다.

진여원이 핸들에 한 팔을 걸치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지끈지끈한 머리를 손으로 꾹꾹 눌렀다. 조금 잤는데도 술기운은 여전했다. 마치 우리 오피스텔까지 순간이동을 한 것처럼 느껴졌다.

“감삼……니다.”

“감을 왜 사.”

“감사……합니다.”

발음을 정확하게 하려고 노력하며 고개를 꾸벅했다. 힘이 없는 머리가 자동차 기어까지 내려갔다가 휙 올라왔다. 그러자 머리가 댕 울렸다. 나는 조수석의 문을 열며 말했다.

“포카리스웨트 한잔하시고 가실래요? 아, 게토레이 있다. 게또레이. 그거 싫어하시죠? 그럼 저 내리겠습니다.”

저 혼자 말하고 결론 내리며 조수석 문을 닫았다. 다시 잘 가라며 꾸벅 인사하는데 조수석 창문이 내려갔다.

“박석연. 오늘은 이불 안 차도 돼.”

“예……. 예?”

진여원 말에 대충 대꾸하다가 불현듯 기시감이 느껴졌다.

‘이거 기억하면 내일 이불 차고 싶을 텐데, 필름 끊기길 기도해.’

끊겼던 필름이 술기운에 힘입어 복구되어 나갔다. 끊긴 필름은 꼭 이렇게 만취해야 돌아오는 몹쓸 습성이 있었다.

진여원에게 술 취해서 전화를 했을 때 사라졌던 5분이 우후죽순으로 떠올랐다. 그래서 그다음 날 찼어, 안 찼어, 라고 물어봤던 거구나.

고개를 혼자 주억거리면서 점점 멀어지는 진여원의 차를 봤다. 그가 보지도 않을 테지만 손을 흔들었다.

“진독사 새끼야. 여기까지 데려다줬으면 집에 잘 들어갔나, 이런 것 좀 확인하고 그럼 덧나냐.”

대답할 사람도 없는데 혼자 웅얼웅얼거렸다.

그래, 내가 여친도 아니니 방에 불이 켜지는 것을 확인해 주길 바라지는 않는다.

눈앞의 계단이 울렁울렁 춤을 췄다. 난간을 잡고 기어 올라가다시피 하다가 곧 주저앉았다. 조금만 쉬다 가자. 난간에 머리를 기대고 숨을 색색 쉬었다.

그런데 오늘은 왜 이불 차지 말라고 했을까. 오늘도 이불 차라는 말을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취해서 그런지 아무것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월요일에 회사가면 곽일영과 이재화에게 삼육구 특별 연습이라도 시켜야지라는 생각만 들뿐이었다.

흔들, 흔들.

누가 또 내 어깨를 어지럽게 흔들었다. 진여원이 내가 걱정돼서 돌아온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눈을 확 떴다.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수위 아저씨가 인상을 구기고 있었다. 그럼 그렇지.

“석연 총각! 일어나!”

“예에. 일어나겠습니다.”

“술을 먹어도 항상 이렇게 먹어. 한동안 괜찮더니! 아이고! 빨리 들어가서 자.”

“예예예. 오늘은 이불 안 차겠습니다, 예예.”

“저건 또 웬 헛소리야. 쯧쯧. 어서 들어가 자. 안 그래도 무서운 세상인데 남자라고 안전한 거 아니야.”

“그렇죠. 남자라고 안전한 세상 아닌데, 우리 수위 아저씨가 그 독사보다 낫네요. 덜렁 여기다 내려 두고 인사도 없이 그냥 갔어요. 게또레이 먹자고 했는데.”

“내가 보기엔 석연 총각이 또레이구만 무슨 소리야.”

수위 아저씨가 한숨을 푹푹 내쉬며 1층 관리실로 향했다. 나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일어섰다. 집으로 힘겹게 걸어 올라가면서 잔상이 두 세 개로 보이는 휴대폰을 터치했다. 진여원에게 전화를 할 것만 같아 문 앞에서 휴대폰을 꼭 쥔 상태로 정신을 차리려 했다.

진여원은 나쁜 놈은 아닐지라도 착한 놈도 아니다. 진여원은 호모포비아는 아니지만 이성애자다. 진여원이 내게 호감을 갖고 있는 이유는 후배라는 위치와 내 디자인 때문이다. 그리고 박석연은 동성의 호감을 착각하지 말아야 하는 게이다.

박석연은 그 누구에게도 두 번 다시 마음을 주는 일은 하지 않기로 했다. 마구 파헤쳐지고 정리되지 못한 마음을 가진 박석연이 울기 때문이다.

코끝이 시렸다.

이런 밤은 혼자 있으면 청승맞게 찔찔댈 수 있는 날이었다. 휴대폰의 저장 목록을 죽죽 내리며 류준을 찾아냈다.

거는 데 망설임은 없었다.

***

“개또라이 박석연.”

부은 눈을 손으로 마구 비볐다. 류준에게 전화한 이후로는 다시 필름이 잘려 나가 있었다. 손을 뒤로 뻗어 엉덩이를 만지려다 말았다.

찝찝한 느낌도 없고, 옷부터 시작해서 신발까지 신고 있었으니 류준과 섹스를 한 것 같지는 않았다. 상의를 탈의하고 바지만 입고 있는 류준을 흔들어 깨웠다.

“야, 류준아.”

류준이 인상을 쓰고 머리를 털어 냈다.

“……어. 형, 일어났어?”

나와는 다르게 녀석의 머리 상태는 양호했다.

“야, 어제……. 너랑 나랑……. 하, 그러니까. 내가 널 부른 것까지는 기억하는데, 그 뭐랄까.”

횡설수설하는 나를 보며 류준이 기지개를 켰다.

“형, 임포는 아니지?”

“무슨 소리야?”

아침마다 모닝 발기는 꼬박꼬박 한다. 오늘은 술기운에 좀 처져서 그렇지 임포는 아니었다.

“빨아도 서야 말이지. 신발 벗기려니 아주 발버둥 치고 난리고, 난 밑에서 형 발기시키겠다고 열심히 혀 놀리는데 형은 자더라.”

입이 쩍 벌어졌다.

“……미안하다.”

“대체 술을 얼마나 먹은 거야?”

“보드카 한 병? 콜라랑 섞어서.”

류준이 내 손에 들린 머그잔을 빼앗아 가서 제가 물을 마셔 댔다. 어제 한껏 토를 한 탓에 배가 허했다.

냉장고를 열었는데 웬걸, 포카리스웨트가 안에 빼곡히 놓여 있었다.

“이건 뭐야…….”

“사 오라며.”

“내가?”

“포카리스웨트 노래를 불러 대지 않나, 자전거를 타러 나가자고 찡찡대질 않나. 누구야?”

“뭐가 누구야.”

“형이 지금 좋아하는 상대 말이야.”

“……그런 거 없는데.”

최대한 심드렁하게 대꾸하며 냉장고를 탁 닫았다.

류준은 컴퓨터 의자에 올려 둔 자신의 상의를 걸쳐 입었다.

“아침부터 촬영 있는데도 와 줬더니 너무한 거 아니야.”

그러나 투덜대는 말과는 다르게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내가 류준 같은 타입을 만나는 이유 중 하나는 뒤끝이 없다는 점이었다. 류준은 연애가 아닌 성욕만 채우기에는 완벽한 상대였다.

“그……. 시간 괜찮으면 할까?”

“할 생각 있는 사람이 지금도 술 냄새 풀풀 풍기고 앉아 있겠어.”

류준이 내 꼴을 보더니 코웃음 쳤다.

“샤워하면 되지.”

불쑥 내 앞으로 다가온 류준이 내 사타구니를 쥐었다. 겉에서 매만지는 손길에 허리를 슬쩍 뒤로 뺐다.

“이거 봐. 전에 페팅할 때랑 다르잖아. 그땐 몸 달아서 비비더니.”

류준이 팔찌 두 개를 겹쳐 매며 내 방을 걸어 나갔다. 녀석이 구두 앞코를 툭툭 두드려 신발을 맞췄다. 야야, 신발 금방 망가진다. 나는 속으로 그런 소리나 해댔다.

“형 같은 사람을 몇 명 아는데, 그런 사람들은 몸 따로 마음 따로 안 되더라고. 피곤하게 사는 거지.”

“원래 타고난 건 고치기 힘들거든.”

“형, 기운 내. 김영대인가 김대영이 그러는 것도 이해가네.”

“왜.”

“뚫고 싶은데 못 뚫으니까. 원래 사람이 그러면 안달 나잖아.”

“그러다 먹으면 또 시들고.”

“정답.”

“가라, 앞으론 진짜 섹스하고 싶을 때 아니면 연락 안 할게.”

류준이 조금 짓궂게 눈을 찌푸렸다.

“거기 잘 씻어. 내 침으로 범벅됐을 거야.”

내 사타구니를 가리키더니 그대로 나가 버렸다. 문이 닫히자마자 바지를 죽 내려 옷을 훌렁훌렁 벗고 욕실로 향했다.

그나마 류준이라서 다행이었다, 김대영 같은 새끼였으면 내가 발기하거나 말거나 뒤를 뚫었을 거다.

나는 샤워를 마치고 나와 류준에게 조심히 가라는 문자를 보냈다. 물론 답장은 도착하지 않았다. 해장할 생각으로 짬뽕을 시키고 침대를 뒹굴거렸다.

‘박석연. 오늘은 이불 안 차도 돼.’

그 말이 자꾸 떠올라 오히려 더 이불을 발로 차고 싶어졌다. 진여원은 나를 고뇌에 빠뜨렸던 소문의 근원지였다.

설사 내 오해라고 한들 변명조차 안 했던 놈 아니던가. 어쩌면 내게 변명을 할 필요조차 못 느꼈으니 그랬겠지만…….

차라리 진여원이 유부남이었으면 했다. 그러면 이런 고민조차 하지 않았을 텐데…….

띵동띵동, 짬뽕이 도착함과 동시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손바닥에 콩콩콩거리던 느낌을 지우려고 주먹을 쥐었다가 펼치기를 반복했다.

***

커다란 유리창을 멍하니 쳐다봤다. 토, 일 내내 낮잠을 잤더니 밤에 잠을 설치는 바람에 새벽같이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해야 했다.

하이탑 운동화는 깨끗이 닦아서 신발장에 넣어 두고 맞춤 운동화로 대신했다. 폭신폭신했던 감촉이 떠올라 하이탑을 신고 싶었지만, 왠지 발이 들어가지질 않았다.

회사의 커다란 창문들이 빛을 반사하는 바람에 눈알이 시큰거렸다. 뒤에서부터 바람이 불어와 머리를 매만지고 고개를 돌렸다.

부드러운 체인 소리가 내 옆에서 멈춘 탓이었다. 진여원이 린스키에서 한 발을 내리고 있었다. 구겨졌던 프레임은 새것같이 매끈했다.

“볼 때마다 새로워?”

“그러……네요, 건물이.”

그의 가슴팍에 손을 댔던 감촉이 생각나버려 마주 보기가 힘들었다.

“자전거. 다 고치셨나 봐요.”

“어제.”

“그럼 제 자전거는…….”

“직접 와.”

진여원이 페달을 밟아 앞으로 나갔다. 자전거 위에 올라탄 남자의 등을 보니 심장이 두근두근했다. 새로운 페티시에 대해 눈을 뜨고 있는 것 같았다.

곽일영은 발 페티시, 난 자전거 페티시.

그래, 난 자전거 페티시였던 것이다.

간단하게 결론을 내리고 버릇처럼 카푸치노 한 잔을 뽑기 위해 주차장 방향의 에스프레소 머신기로 향했다.

머신에서 카푸치노가 쪼로록 컵에 쌓여 가는 것을 구경했다. 뚝, 뚝, 빗방울처럼 떨어지기 시작할 때 입구로 손을 넣었다. 그와 동시에 누군가의 손도 들어왔다. 허준성 이 자식이 또 시비를 걸려나 싶어 고개를 확 틀었다.

진여원이 그사이에 카푸치노 컵을 쑥 빼갔다. 맞닿았던 손등이 덴 것처럼 화끈거렸다.

“드시고 싶었으면 말씀을 하시지…….”

말꼬리를 늘여 가며 카푸치노를 새로 눌렀다. 진여원의 시선이 내 옆얼굴에 머물렀다. 시선을 피하는 게 더 그를 의식하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커피 잘 안 드시지 않습니까.”

입을 컵에 대고 있는 진여원을 향해 말했다.

“하도 맛있게 먹기에.”

나온 커피를 마시다가 콜록하고 튀어나올 뻔한 것을 막았다. 내가 카푸치노를 자주 먹긴 하지만, 그걸 진여원이 알고 있다는 것에 더 놀라웠다.

커피 먹다 체하겠네. 왜 저렇게 쳐다봐.

“박석연 씨 이상한 데 점이 있네.”

진여원이 내 목덜미를 가리켰다.

“점이요?”

고개를 돌려서 내 목덜미를 보려고 했지만, 당연히 보일 리가 없었다.

“그러면 보여?”

진여원이 눈을 접고 웃었다. 정말 기분이 좋아서 웃는 것이 아니었다.

혹시 내가 오바이트한 것에 대해 앙심을 품고 있었나? 그뿐만이 아니었다. 자전거를 부수고, 전화해서 헛소리까지 지껄인 직원이었다.

“제가 그날 실수를…… 해서 죄송합니다.”

“그게 실수였어?”

진여원이 툭 내뱉었다. 진여원이 카푸치노를 들고 나를 지나쳐 가는 동안 그의 말을 곱씹었다. 내가 토한 것에 대해 말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럼 걸리는 것은 딱 하나뿐이었다. 내가 그의 심장에 손을 대었던 일.

분명 일부러 그러냐고 물었었다. 손바닥을 내려다보다가 그 손을 올려 목덜미를 매만졌다. 주차장과 연결된 입구에 붙어 있는 커다란 거울 앞에 섰다.

고개를 비틀며 시선은 거울을 향한 채 목을 이리저리 둘러봤다. 귀 바로 밑에 길고 동그란 자국이 나 있었다. 거무튀튀하게 살이 변색된 것이 점은 아니고……. 키스마크였다.

“류준, 이 자식이.”

섹스는 불발이었지만 얌전히 간 줄 알았는데 내가 자는 동안 나름의 복수를 한 듯했다.

주차장에 차를 댄 건지 시야의 끝에 슈트를 입은 재운 선배가 보였다. 나는 길게 늘였던 목을 원위치 했다.

“우리 석연이 유연성 연습해?”

어느새 재운 선배가 내 뒤에 와서 섰다. 나는 거울에 비친 선배를 보고 말했다.

“일찍 출근하셨네요.”

“오늘부터 캐주얼하고 윰 쉬즈팀 새 기획 들어가잖아. 출근부터 힘 좀 줬지.”

“어떤 기획이요?”

“벌써부터 일 얘기 말자고. 석연이 캠핑장에서 뭐 재미있는 일 없었어? 이 선배 웃게 좀 해 주지?”

“사장님 앞에서 토한 얘기면 될까요?”

푸하하하, 재운 선배가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폭소했다. 엘리베이터로 가면서도 선배가 연방 낄낄거렸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으세요.”

“지금은 석연이 네 목덜미를 누가 그렇게 세게 빨았나 싶어서.”

“눈에 확 보여요?”

“음.”

선배가 내 목덜미에 시선을 고정했다. 목적지가 2층인 내가 먼저 내리려 하자 재운 선배가 뒤늦게 말했다.

“석연이 너를 눈여겨보면?”

그럼 진여원이 나를 눈여겨봤다는 소린가? 월요일 아침부터 김칫국을 사발로 들이켜는 중이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동안 적당히 기른 뒷 머리카락을 끌어 내렸다. 카푸치노를 마시지도 못하고 목덜미에만 손을 대고 이걸 하루 종일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했다.

고심한 것과는 다르게 먼저 출근한 곽일영도 이재화도 내 목덜미의 이상함에 대해서 알아보는 일은 없었다. 9시 5분이 되자마자 정신없이 회의실로 모이게 된 것도 한몫했다.

절반도 마시지 못한 카푸치노를 책상에 두고, 노트만 쥔 채 회의실로 향했다.

디자인 팀이 전부 모였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회의실에는 진여원과 재운 선배, 그리고 우리 팀뿐이었다. 우리 팀은 타원형 테이블 중앙에 앉아 재운 선배와 진여원을 마주 봤다.

나는 등받이가 얕은 의자에서 등을 떼어내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재운 선배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우리 쪽으로 다가와 파일 세 개를 하나씩 나눠 주었다. 평소의 장난기 섞인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각 팀마다 나눠 준 파일은 동일합니다. 이번 기획은 캐주얼 부서와도 연관되어 있기에 제가 참여하게 됐고요.”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앞장을 뒤로 넘겨봤다.

[rain way]

그 안에는 기획명이 커다랗게 프린트되어 있었다. 이번엔 진여원이 말을 이었다.

“이번에 증원한 팀을 포함해 총 네 팀이 디자인 싸움을 하게 될 겁니다. 레인 웨이 프로젝트는 말 그대로 레인슈즈를 겨냥한 기획입니다.”

이와 비슷한 프로젝트는 체일 슈즈에서 작년에 선보인 적 있는 기획이었다.

비 소식이 많은 여름을 겨냥하여 젊은 층에게 레인슈즈를 판매하고자 내보인 프로젝트였는데, 체일 슈즈는 들인 돈의 절반도 거두지 못해 여름 내내 적자로 고전해야 했다. 한 철에만 신을 수 있는 신발은 아무래도 일반적인 슈즈에 비해 판매량이 떨어진다.

“이미 타 브랜드에서 작년에 선보인 적 있는 기획이고,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는 것도 다들 알 겁니다. 박석연 씨는 그 이유에 대해서 잘 알고 있을 것 같은데.”

진여원이 들고 있던 펜이 내 쪽으로 향했다. 물론 이유는 체일 슈즈에 몸담고 있던 내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체일 슈즈의 레인 상품은 헌터의 아류작이었습니다.”

레인부츠 시장은 이미 영국 브랜드가 장악중이었다. 헌터의 가격대는 15~30만 원 선으로 나름 저렴한 편에 속했다. 헌터 부츠와 별다르지 않은 체일 슈즈의 상품을 50만 원이나 주고 사는 사람은 드물었다. 구두 시장에서도 체일 슈즈가 정신을 놨다며 혹평을 쏟아 내기도 했었고.

“그러니 우린 윰만의 독자적인 디자인을 선보일 겁니다.”

말이야 쉽지, 레인슈즈는 재질 자체가 한정적이었다.

“다음 달 5일에 윰의 각 지점에서 발매할 예정이고, 단 4종만 선택할 겁니다. 각 팀에서 하나씩만 통과될 수도 있고, 한 팀에서 전부 통과될 수도 있겠죠.”

한마디로 이번 기획은 인센티브가 지급된다는 소리였다.

“나는 이재화 팀에 거는 기대가 큽니다.”

신뢰가 담겨 있는 진여원의 말에 우리 팀 전원이 그와 눈을 마주쳤다. 분명 우리가 아닌 다른 팀에게도 같은 소리를 했을 것이다. 그래도 대표자의 저런 한마디가 직원에게 기운을 북돋아 주는 건 당연했다.

진여원은 대표자로서 본받을 만한 인물은 맞았다. 다만 내 심장을 두드리는 사람으로서는 부적합했다.

“질문 있으면 지금 하세요.”

“인센티브 얼마 주실 예정이세요?”

곽일영이 헤실거리며 웃었다.

“50퍼센트. 레인 웨이는 고정적인 판매를 위해 내보이는 기획이 아닙니다. 윰의 한정판에 대한 인식을 잡아 주기 위해서죠.”

당장 사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한다. 그게 명품 브랜드 한정판의 슬로건이었다. 뒤늦게 한정판을 알고 난 구매자가 프리미엄을 붙여 사는 일도 수두룩했다.

대표적인 예로는 초반 샤넬을 들 수 있는데, 그들은 리미티드 제품을 선보임으로써 고객들에게 한정판이라는 만족감을 안겨 주었다.

그것보다 50퍼센트라는 말에 내 귀도 열심히 팔랑거렸다. 진여원의 목소리가 달콤하게 들린 것도 필시 그 때문이겠지.

“누가 보면 박석연 씨는 이미 인센티브를 받은 줄 알겠어요.”

재운 선배가 내 표정을 보며 놀려 댔다. 나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괜스레 입가를 긴장한 채로 얼굴을 들었다.

진여원과 눈이 마주친 순간, 앞으로는 아예 땅만 보고 다니자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도 내가 먼저 시선을 피하며 파일을 뒤로 넘겼다. 인센티브 매뉴얼과 헌터 부츠와는 다른 개성을 중시하라는 지침서였다.

“질문은 없는 것 같으니 이만 들어가 보세요.”

셋이 나란히 인사를 하고 나서야 회의실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문밖에는 새로 인원을 증원한 팀이 서 있었다. 그들에게도 간단히 목례만 하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이재화가 하아- 하고 한숨을 길게 뿜어냈다.

“난 사장님만 보면 왜 이렇게 긴장되는지. 새로 오신 이사님도 사람 긴장되게 하기는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예, 그러네요.”

이재화의 말에 나도 반은 동의했다. 나야 재운 선배를 원래 알고 있던 사이니 상사로서 부담감은 그리 크지 않았다. 진여원은 언제나 부담되지만.

마주친 시선에 평소와 다른 무언가가 담겨 있는 것 같았다. 그게 뭔지는 정확히 꼬집어 내기가 힘들었다.

나는 식어 버린 카푸치노를 입 안에 담았다. 뜨거울 때보다 달달한 맛이 더 강했다.

“그날 괜찮았어?”

곽일영이 손을 꼼지락거렸다.

“미안했죠?”

“응.”

“그럼 두 분 삼육구 연습 좀 해요.”

“석연 씨, 나는 잘했어요. 딱 한 번 걸린 거라고요.”

그 한 번의 흑기사에 나는 훅 갔고.

“다음부터는 대신 안 마셔드립니다.”

“우리 이거 기획 끝내고 석연 씨 돈 딴 거로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곽일영이 귀엽게 방실거렸다. 다음에도 게임을 한다면 대신 마시게 될 것 같은 이 기묘한 감각은 뒤로하고 대답했다.

“소고기 쏩니다.”

“최고야!”

다음 주 중에는 부모님이 계신 시골로 내려가 용돈이나 드리고 올 생각이었다. 얼굴 못 뵌 지도 벌써 석 달이었다.

“자자, 흥분은 좀 가라앉히고. 오늘부터 새 기획 시작됐으니 잘해 봅시다. 총 세 제품 우리 팀에서 전부 나오게 하는 겁니다.”

“제품 네 개잖아요?”

곽일영이 대꾸했다.

“우리 팀은 세 명이니 욕심은 적당히 부려야죠. 다른 부서에게도 한 개는 양보합시다.”

이재화가 자신이 생각해도 후한 인심 같다며 흐뭇하게 웃었다. 허준성이 우리 팀을 괄시하는 게 아니라 만날 물만 먹었기에 저리 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어떤 이유에서건 깐죽대는 건 타당한 행동이 아니었다.

“아, 과장님.”

“말해요.”

“오늘부터는 사무실 문단속을 단단히 했으면 좋겠습니다. 보통 제가 마지막으로 나가지만, 제가 외근 나가거나 할 때는 부탁드릴게요.”

“왜요?”

이재화가 영문을 모르겠다며 되물었다.

“여기서 그럴 일은 없겠지만, 전에 체일 슈즈 있을 때는 좀 그런 일이 있었거든요.”

“그런 일?”

“그……. 디자인을 훔쳐 가고 그랬던 좋지 않은 일이요.”

“박석연 씨.”

이재화가 실망이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내가 너무 현실에 찌든 것 같아 보였나? 민망함에 카푸치노만 다시 홀짝거렸다.

“집에 갈 때 작업지 다 안 가져가요? 나와 곽 대리는 전부 챙겨 가는데 말이죠. 같은 팀이라도 그건 주의해야죠.”

알고 보니 나보다 더 확실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도 날 의심하는 건가 싶어서 서글프기도 했다. 물론 그런 의미는 아닐 것이다.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는 것일 뿐이지.

“예, 이제부터는 가져가겠습니다.”

“그럼 나랑 곽 대리는 시장조사 좀 다녀올게요. 석연 씨는 내일 중으로 혼자 다녀와요.”

“신입 사원 한 명만 더 들어오면 좋겠네요. 저 왕따 안 당하게요.”

“석연 씨, 진짜 왕따 당하는 사람은 농담으로도 그런 말 못해.”

곽일영의 눈썹이 측은하게 처졌다. 외근 나갈 때면 거의 둘이 같이하는 이유가 아마 곽일영 때문인 듯했다. 나는 운동화를 벗어 삼선 슬리퍼로 갈아 신고 곽일영에게 내보였다.

“죄송해요, 그냥 섭섭하다는 말을 달리 했던 거예요. 기운 내요.”

“응. 완전 나고 있어.”

곽일영이 내 발을 홀린 듯 바라봤다.

왠지 저 눈이 자전거를 탄 진여원을 봤을 때의 내 눈과 닮았을 것 같았다. 제발 착각이기를 바랐다.

***

[옥상, 테니스 한 판.]

회사 카페테라스에서 점심을 먹자마자 재운 선배에게서 온 문자였다.

대학 시절 나를 못 이긴 게 여태껏 마음에 남아 있었나.

간식으로 양갱 하나를 먹어 가며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점심으로 먹은 베이컨과 소시지의 느끼함을 양갱이 달래 주고 있었다.

얼마 전 양갱 마니아들의 추천으로 엄청 맛있다는 수제 양갱을 열 세트나 주문했었다. 난지도에서 딴 상금이 아니었다면 꿈도 못 꿨겠지만, 맛은 가격 값을 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통유리를 빠져나와 옥상 문을 열었다. 바람이 통하지 않는 통유리 안이 후덥지근해서 발걸음이 빨라진 건 당연했다.

네트를 사이에 두고 진여원과 재운 선배가 테니스를 하는 중이었다. 옷도 운동복으로 갈아입었는지 슈트 차림들이 아니었다.

타앙-, 진여원의 테니스 채에 맞은 공이 시원한 속도로 재운 선배에게 날아갔다. 모서리 라인에 다다른 공을 재운 선배가 가까스로 쳐냈다. 이번엔 반대 모서리를 향해 진여원이 공을 날렸다.

하여간 저 인간 운동경기에서도 저렇게 사람을 엿 먹이지.

나는 양갱을 씹으며 둘의 팽팽한 경기를 구경했다. 재운 선배의 얼굴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갑자기 재운 선배가 테니스 채를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야! 진 사장! 자꾸 모서리로 칠래?!”

“억울하면 하 이사님도 하시든가.”

“안 되겠다 2:1로 하자.”

재운 선배가 빨리 오라며 내게 손짓했다. 진여원이 손등으로 이마를 쓱 닦았다.

덜컹, 자전거가 없는데도 내 안이 막 요동질쳤다.

그래, 난 안경 페티시다.

진여원이 안경을 써서 저런 거다. 페티시를 순식간에 뒤집었다. 나는 구비되어 있던 테니스 채를 쥐고 재운 선배의 옆으로 가서 섰다.

진여원은 우리 둘을 보며 픽 웃었다.

“돈 걸어.”

그렇게 말한 재운 선배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돈이요?”

“20만 원.”

“예?! 왜요?”

“게임이니까.”

“2만 원도 아니고 20만 원이라뇨. 저 돈 없어요.”

재운 선배가 진짜야? 싶은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순간이었다.

“있을걸.”

진여원이 툭 대꾸했다.

“캠핑장에서 딴 돈은 다 썼어요, 이미.”

재운 선배의 손이 내 뒷주머니로 쑤욱 들어왔다.

“으앗! 주세요!”

선배가 지갑을 휙 열어 수표 석 장을 꺼내 내게 흔들어 보였다. 공돈이었지만 평일 중으로 은행에 들려 넣을 생각으로 가지고 나온 것이었다.

“없다더니 30만 원이나 있네?”

“이사님, 저 그 돈 쓸 데 있어요.”

“우리가 이기면 되잖아. 걱정마라 석연아, 돈까지 걸린 경기에서 승부욕 하나는 네가 제일이잖냐. 그리고 형아 믿지?”

“이사님이 절 믿어야 할 판인데요.”

2:1이면 아무래도 우리 쪽에 승산이 있었다. 진여원이 치는 것을 보아하니 나랑 비슷한 수준 같았고…….

어떻게 할래? 소리 없는 말로 팔랑팔랑, 재운 선배가 내 수표를 흔들었다. 저기 네트 밑을 보니 이미 놓여있던 다른 수표들이 보였다. 눈을 부릅뜨고 확인해보니 무려 10장에 달했다.

난 3장이고, 저긴 5장씩이니까……. 저 돈을 보니 없던 욕심이 덤벼들었다. 그래, 까짓 거 이기면 그만이지.

나는 재운 선배의 손에 있는 내 수표를 받아서 모아둔 수표 위에 같이 얹었다.

“해요.”

130만 원 배(盃) 테니스 경기였다.

“경기는 점심시간 끝나기 10분 전까지.”

진여원이 손목시계를 보며 말했다. 나도 손목시계를 보고 시간을 확인했다. 앞으로 20분 남아 있었다.

“시간이 부족하니 서브는 점수를 딴 쪽이 넣는 걸로 하고 2:1이니 짝수, 홀수 득점에 상관없이 서브 방향은 자유로. 어때?”

“좋습니다.”

“오케이.”

나와 선배가 순서대로 대답했다.

“그리고 박석연 씨.”

“예.”

“졌다고 울지 마.”

“제일 대학의 테니스의 황자라고 들어보셨습니까?”

대학교에서 한창 테니스 시합을 벌일 때의 내 별명이었다. 물론 그 소문이 나기 전이었지만.

“공 물어오는 포메라니안이 아니고?”

재운 선배가 옆에서 속닥거렸지만 무시했다.

나는 테니스 채의 그립감을 느끼며 다리를 적당히 벌려 섰다. 진여원은 소매를 걷어 올리고는 테니스공을 툭툭 튕겼다.

“서브는 가위바위보로?”

“예, 좋습니다.”

재운 선배가 이기라며 나를 대신 네트로 내보냈다. 진여원과 네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우뚝 섰다.

“안경 벗으셔야 할 텐데요. 공 잘못 맞으면 아프십니다.”

진여원의 시선이 잠시 내 목덜미에 머물렀다. 픽 웃던 입술이 벌어졌다.

“작업할 때는 쓴다고 했던 것 같은데.”

“…….”

그래, 돈 따는 것도 작업이지.

나는 입술을 안으로 말았다가 다시 뱉었다. 괜히 헛생각하지 말자며 불시에 가위바위보를 외쳤다.

[가위, 주먹.]

젠장, 내가 가위였다.

가위바위보 운은 그날로 끝났던 건가.

운이라 하니 부산에서 얻은 다시마 세 개 중, 두 개의 불행은 서울에 올라와 얻었는데 나머지 한 개가 뭘까 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부탁이니 모쪼록 조용히 지나가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실망한 재운 선배에게 그래도 나만 믿으라고 말했다.

탕! 진여원의 서브가 강하게 날아왔다. 내 쪽을 노린 서브에 놓치지 않고 공을 받아치려는 순간이었다.

재운 선배의 테니스 채와 내 것이 엉켜들었다. 띠잉, 채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했다. 공은 저 뒤로 통통 구르고 있었다.

“선! 아니 이사님. 반 나눠서 하죠. 제가 오른쪽, 이사님이 왼쪽이요. 넘어오기 없기예요.”

“그래, 미안.”

재운 선배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왼쪽으로 걸어갔다. 이번에도 진여원의 서브였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치는 순간 그의 셔츠가 올라가 탄탄한 복부가 슬쩍 보였다.

나도 모르게 고인 침을 빠르게 삼키며 중앙으로 날아온 공을 되받아치려 했다. 또다시 선배의 채와 내 것이 맞물렸다.

“박석연!”

“이사님!”

서로가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했다. 진여원은 반대편 코트에서 낄낄대고 있었다. 아니, 사실은 그냥 재미있다고 웃는 것뿐인데 돈이 걸린 싸움이라 곱게 보이지가 않았다.

선배와 자리를 반 나누니까 치사하게 중앙으로 던지고, 인간이 그러고 싶냐?

금세 이마에 맺힌 땀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이번에는 진여원의 서브가 내게로 날아왔다. 지지 않을세라 기세 좋게 타앙하고 튕겨냈다. 손목이 찌릿찌릿했다.

진여원은 사이드라인 모서리로 뛰지 않고 테니스 채를 흔들거린 채 나를 가만히 바라봤다. 공이 라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밖으로 빗겨 나갔다.

저 재수 털리는 진독사.

근데 생각을 배반하고 눈은 그를 자꾸만 담고 있었다.

“석연아, 너 진짜 믿어도 되냐?”

“오랜만이라 그래요. 몇 번 치다 보면 익숙해질 거예요.”

진여원이 테니스공을 채에 올리고 튕기며 말했다.

“작전 시간 따로 줘?”

“괜찮습니다.”

“꼭 이기자, 석연아.”

선배는 돈 때문이 아니라 진여원의 콧대를 눌러 주고 싶은 것 같았다. 근데 그건 나도 동감이었다.

네트를 아슬아슬하게 넘어 날아온 공이 이번에도 내게로 향했다. 진여원의 공이 내 옆구리를 맞췄고, 그 공을 치려한 나는 요상한 자세로 손을 꺾어야 했다.

“으악!”

재운 선배가 열 받을 만했다. 저 인간 테니스 방식이 꼭 소시오패스 같았다. 그가 나를 보며 테니스 채를 어깨에 걸쳤다.

“황자님이라 곱게만 컸나.”

진여원의 독설과 그에 버금가는 행동이 평소의 배는 증가한 것 같았다.

“여태 페어플레이하는 사람하고만 경기해 봐서요.”

“그럼 이참에 다른 걸 경험해 봐.”

공이 날아와 내 얼굴을 빗겨 갔다. 테니스 채를 앞으로 잡은 채로 꼼짝없이 굳어버렸다. 이번 건 진여원의 서브 실패였다. 자칫하면 그대로 맞았을 거란 생각에 뺨이 멀쩡한가를 손으로 확인했다.

그가 한 번 더 서브를 실패하면 우리 쪽으로 서브권이 넘어온다. 제발 이번에도 빗나가길 바라며 그의 서브를 기다렸다. 센터로 날아온 공은 선배와 가까웠다.

괜히 내가 다가가서 엉키느니 선배가 치기를 기다렸다. 공이 통통통 뒤로 굴러가고 선배와 나는 서로를 허망하게 바라봤다.

“나는 네가.”

“저는 이사님이.”

갈 줄 알았지…… 라는 말이 삼켜졌다.

복식을 해 본 적이 없어서 손발이 안 맞으면 혼자인 것만 못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사님, 그냥 저 믿고 나가 계실래요?”

“……믿는다, 그럼.”

“예.”

재운 선배가 네트에서 조금 떨어진 지역에 털썩 앉았다. 땀을 뻘뻘 흘리는 게 체력적으로 이미 한계였던 듯했다. 넓어진 코트를 외려 마음 편히 여기며 진여원을 향해 섰다.

“이제 규정대로 가죠. 사장님께서 3점 획득 하셨으니 왼쪽에서 서브 넣으세요.”

“규칙을 안다고 잘하는 건 아니지.”

“모르는 것보단 낫죠.”

왼쪽에서 날아든 공을 아래서 위로 쳐올리며 뛰었다. 치기 쉽게 위로 올라 솟은 공을 진여원이 스매시로 내리꽂았다. 강하게 날아온 공을 바닥에서 아슬아슬하게 받아 내며 네트를 넘겼다.

이 상태면 진여원의 공격만 반복될 게 분명했다. 세기가 점차 강해지는 공의 속도를 늦추기 위해 네트 앞으로 다가갔다. 팔을 높이 들어 테니스 채 가운데에 정확하게 공을 맞췄다.

사이드라인 안쪽을 한 번 튕긴 공이 밖으로 나갔다.

“우오! 박석연! 그래 그거야!”

나는 숨을 고르며 선배를 향해 브이 자를 그렸다.

“제법이네.”

진여원이 바닥의 공을 내게로 던졌다.

“제법 수준이 아닐걸요.”

“보면 알겠지.”

아직 여유 있는 진여원에게 보란 듯이 강력하게 서브를 넣었다.

***

코트에 대자로 뻗어서 하늘을 올려다봤다. 숨을 헉헉거리며 코도 잡았다. 과호흡 때문에 코가 쓰라렸다.

전에는 3세트를 뛰어도 할만했는데 지금은 20분 만에 녹초가 되어 버렸다.

진여원은 숨이 차 괴로워하는 내 옆에 앉았다. 재운 선배는 이길 희망을 버린 그 순간부터 자리를 떠나고 없었다. 물론 돈은 두고.

“박석연 씨 큰일 났어.”

“헉, 허억……. 뭐가요.”

“게임도 지고, 돈도 잃고.”

진여원도 숨을 골랐다.

“다음엔 허억……이길 겁니다.”

진여원의 손에 들린 수표 뭉치를 노려봤다. 고스톱도 개평이란 게 있는데 조금은 돌려주지 않으려나 하는 마음이 살짝 들었다.

“기대되네.”

그것을 끝으로 진여원이 제 지갑에 그 수표를 쏙 넣었다.

두고 봐라. 인센티브로 다시 다 뜯어내 주마.

진여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캔 하나를 내게로 던졌다. 나는 누운 상태로 내게 날아드는 것을 잡았다.

성큼성큼 걸어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미간을 구기고 바라봤다. 지금 나한테 있어 제일 큰일은 돈을 잃은 것도 아니요, 승부에서 진 것도 아니었다.

바로 진여원에게 끌리고 있다는 것.

나는 뺨에 시원한 캔을 문댔다. 여름 하늘이 가을처럼 구름 한 점 보이지 않았다.

숨은 아직도 거칠어 정리가 되지 않는데 기분은 시원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이렇게 실컷 뛰어 본 건 오랜만이었다.

대학 1~2년은 김대영과의 관계만 고달팠을 뿐 학교생활 자체는 행복했었다. 그것도 소문이 난 이후부터는 엉망이 됐지만.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했을 때도 아직 그 소문을 기억하는 무리들이 있어서 퍼지는 건 또 순식간이었다.

곽일영이 진짜 왕따 당하는 사람은 그런 소리 못한다고 했지. 그런데 그건 아니다. 거기에 개의치 않는 척, 나는 혼자라도 괜찮다며 허세를 부리는 사람도 있었다.

사람을 그리워하지만 그저 스스로를 아웃사이더라 칭한다. 그건 나 자신을 위로하기 위한 궁색한 변명이었다. 재운 선배와도 계속 연락하며 지낼 수 있었던 건, 서로가 그 일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가끔 그때 일에 대해 말하게 되는 일이 생겨도 나는 나대로 신경 쓰지 않는다며 넘겨 버렸고, 선배 역시도 일부러 나를 배려하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진여원도 그랬다.

그는 내가 체일 슈즈에서 잘린 이유조차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 건 위로한다고 마음이 달래지는 것도 아니며, 내가 잘못한 게 있어야 위로를 받아도 든든하다.

나는 그때도 지금도 잘못한 게 없었다. 내가 게이인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니까.

시간이 흐를수록 그때의 소문은 진여원이 아니었을 거란 생각에 무게가 실리고 있었다.

내 애인이 이러이러하게 나쁘게 굴 때가 많지만, 사실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그렇지 마음은 정말 좋은 사람이야.

나쁜 놈을 만나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늘어놓는 변명이었다.

장황하게 연인의 나쁜 점을 늘어놓지만 정작 헤어질 생각은 없다. 왜냐하면 사랑에 눈이 멀어 백번의 못된 행동이 한 번의 다정함으로 무마되기 때문이다. 대학 때 나와 김대영의 관계가 그랬듯이.

당시의 나는, 김대영은 나쁜 놈이지만 나를 사랑하는 마음은 누구보다 클 거라며 자기 위안을 삼곤 했었다.

그렇기에 진여원이 호모포비아이며 나를 더러운 종자로 치부한다는 김대영의 말도 곧이곧대로 믿었다. 원래도 개차반이었던 김대영이 더욱더 최악으로 변한 건 학교 내에 퍼졌던 내 소문 때문이라고만 생각했었다.

원망의 화살은 저절로 진여원에게 향했다. 진여원 때문에 김대영과 나의 관계가 망가졌다며 그를 탓했다. 이미 망가져 있던 사랑이 수면으로 드러난 것뿐인데, 그때는 내 사랑에 문제가 있었다는 걸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내 사랑은 잘못되지 않았다. 잘못된 건 내 성향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사람들이었다. 그 정당성을 위해 진여원을 원망했다.

그러나 나는 이제 이러이러하게 나쁜 놈이면 그냥 나쁜 놈이라는 것을 안다. 그 또한 어떤 변명으로도 납득될 수 없다는 것도.

대학 때는 진여원이 독설로 유명한 것만 알았지 그의 성격에 대해서는 하나도 몰랐었다. 지금 내가 아는 진여원은 게이들이 눈앞에서 나체로 춤을 춰도 무시하고 지나갈 사람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다가도 문득 의심이 일었다.

사람 보는 눈 없는 내가, 진여원에게 끌린다고 그를 좋게만 생각하는 건 아닐까 하고.

눈을 가린 팔뚝을 떼어 내자마자 눈을 크게 떠야했다. 이미 간 줄 알았던 진여원이 팔짱을 끼고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직 계셨.”

말도 끝나기 전이었다. 진여원이 손에 들고 있던 박스를 가볍게 내려놓았다.

[국내산 찹쌀 1프로 함유. 양갱 24개입]

“이걸 왜?”

“위로금.”

돈은 잃었지만 양갱이라도 얻었으니 다행인가.

나는 그가 준 양갱 박스를 잡고 몸을 일으켰다.

“점심시간 끝났어.”

“예, 내려가겠습니다.”

양갱을 손에 든 채로 진여원을 따라갔다. 후덥지근한 통유리를 지나 자체 냉방이 되는 내부의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마자 정면 거울에 서로를 보는 시선이 얽혀 들었다.

더위가 식지 않아 내 뺨은 빨갛게 익어 있었다. 테니스를 한 게 천만다행이었다. 그냥 마주쳤다고 해도 순식간에 얼굴이 달아올랐을 테니까. 왜냐면…….

그의 안경 속에 숨겨진 눈이 저번 날과 같은 열기를 띠고 있어서…….

그날도 그는 지금과 같은 표정으로 말했었다.

‘박석연. 오늘은 이불 안 차도 돼.’

‘귀여웠으니까.’

눈을 깜빡였다. 불현듯 진여원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나보고 귀여웠다고?

저 싸늘한 인간이 그런 말을 했을 리가 없었다. 술기운에 환청을 들은 것이라 확신했다. 그런데도 나는 엘리베이터가 3층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후회 중이었다.

키스마크가 보이는 방향으로 섰다는 것에 대해서 말이다. 그의 시선이 왜인지 계속 목덜미에 머물러 있는 것만 같았다.

“박석연이 대체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걸까.”

진여원이 중얼거렸다.

나는 그가 엘리베이터를 빠져나갈 동안 양갱만 들고 멀거니 서 있었다.

***

“석연 씨, 요새 왜 그렇게 운동을 열심히 해?”

“이사님 때문에요.”

곽일영이 땀을 한바탕 흘려 샤워하고 돌아온 날 이상하게 쳐다봤다.

벌써 일주일 째 옥상 테니스장에서 재운 선배와 특훈을 하고 있었다. 내 돈을 네가 잃게 만들었으니 너도 꼭 연습해야 한다는 이사의 압박 때문이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점심시간만 되면 재운 선배에게 들들 볶였다. 돈도 많은 사람이 그 돈을 잃은 게 그렇게 억울한가 싶었다. 가진 돈으로 따지면 내가 제일 억울해야 하는데 말이다. 덕분에 부모님 뵙고 용돈 드리는 일은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양말을 신으려는 나를 곽일영이 아쉬운 눈으로 쳐다봤다. 발가락을 곽일영의 앞에서 꼼지락거렸다.

곽일영이 내가 움직이는 방향에 따라 어쩔 줄 몰라 하며 흥분해 댔다. 놀리는 재미가 톡톡히 있는 상사였다.

“석연 씨, 지금 일부러 그러는 거지?”

“아니요, 무슨 말씀을.”

일부러 너스레를 떨었다.

“석연 씨가 그렇게 웃는 거 처음 봐.”

“혹시 제가 귀엽게 웃습니까?”

“아니, 발 빼곤 그다지.”

곽일영이 레인슈즈 디자인을 끄적거리며 한 방을 날렸다.

하하……. 곽일영의 저 조그만 입술을 콕 잡아 주고 싶었다.

“왜 누가 귀엽대?”

곽일영이 나를 휙 쳐다봤다.

“아…… 아니 뭐…… 꼭 그런 건 아니고요.”

딴청을 피우며 삼선 슬리퍼에 발을 넣었다. 곽일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사람 취향 한번 독특하네.”

진여원은 이로써 곽일영에게 취향 독특하다는 말을 두 번이나 들었다.

한 번은 안세라, 또 한 번은 나.

요 일주일 사이에 세상의 온갖 고뇌란 고뇌는 오롯이 내 뇌에 담긴 기분이었다. 회사에서 바닥만 보고 다니느라 오백 원짜리를 주운 게 벌써 세 번째였다.

자리에 앉아서 나도 모르게 오백 원에 새겨진 학을 끄적거렸다. 용솟음치는 학의 날개에 심혈을 기울여 명암을 넣었다.

이렇게 놀 수 있는 것도 이재화에게 일단 슈즈 한 켤레를 허락 받았기 때문이었다. 곽일영은 책상에 늘어지다시피 엎어졌다.

“좋겠다.”

“도와 드려요?”

“응, 이거 봐봐.”

곽일영이 디자인지를 내게 보여 줬다. 노란색 숏부츠였다.

발목 라인을 따라 윰의 로고인 ‘Y’가 달려 있었는데, 풍기는 재질은 금속이 아닌 나무 같았다.

“레인슈즈 자체가 어차피 젊은 층이 신으니까, 이거 그냥 귀엽게 가는 게 어때요.”

“어떻게?”

“윰 ‘Y’ 자 로고에 나뭇잎을 입히는 걸로요. 애들이 그린 것 같이, 솜사탕 느낌으로…….”

‘Y’ 자의 윗부분에 동그란 원을 그렸다. 원의 색은 녹색으로 넣고, 로고는 진회색 액세서리로 장식하면 눈에 띌듯했다. 특이한 옷을 입는 가수들이 입어 주면 꽤 먹힐 것도 같았고.

곽일영이 오오, 탄성을 내뱉으며 색을 칠했다. 지금 내가 통과한 신발도 곽일영의 도움이 없었으면 한참 골머리 썩었을 것이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빨리 OK를 받아서 더 슬픈 건 왜일까. 그만큼 사적으로 정신을 쏟을 시간이 많아졌다. 사무실을 벌컥 연 이재화가 뒤늦게 문을 노크하듯 두드렸다.

“석연 씨, 디자인 자료 들고 회의실로 가 보세요. 사장님이 기다리십니다.”

“예.”

OK받은 디자인을 챙겨서 빨리 회의실로 향했다. 조금만 늦어도 요새 심기가 불편하신 사장님에게서 불호령이 떨어질 테니 서둘러야 했다.

반쯤 열려 있는 회의실을 빠끔히 들여다봤다. 다른 팀 직원들 몇몇도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여기서 재운 선배는 보이는데 아직 진여원은 도착하지 않았는지 자리에 없었다.

다행이다. 늦게 들어가 눈길을 받는 것보다 먼저 들어가 앉아 있는 게 확실히 더 나았다.

“염탐해?”

문에 들이민 얼굴을 황급히 빼냈다. 파스텔톤 카디건이 시야에 들어와 고개를 올렸다. 진여원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와 눈이 이렇듯 마주친 것이 대체 몇 번인지도 모르겠다.

“아, 아뇨. 지금 들어갑니다.”

부리나케 안으로 들어가 직원들이 앉아 있는 쪽에 나도 착석했다. 뒤따라 들어온 진여원이 재운 선배의 옆으로 가 서로 몇 마디를 나눴다.

이쪽에서 진여원을 흘끔 봤지만 이번에는 그와 눈이 마주치지는 않았다. 혹시 그간 계속 눈이 마주쳤던 건 괜히 내가 그를 의식하다가 벌어진 우연이 아닐까 싶었다.

그 착각을 깨주기라도 하듯 진여원의 눈이 이쪽을 향했다. 나는 고개를 꾸벅하고 내 디자인에 눈을 박았다.

나도 그냥 대놓고 그를 봐줄 수도 있었지만, 요사이 계속 피하던 버릇이 몸에 배었다. 일단 내 마음이 가라앉기 전까지는 이런 식으로 넘어가는 게 좋았다.

게다가 진여원의 발언에 이것저것 신경 쓸 여력 또한 없었다. 그가 나를 좋아한다고 고백한 것도 아니고, 그저 귀여운 부하 직원이라 생각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거기에 설레발을 치다간 죽도 밥도 안 된다.

살면서 깨우친 이치는 김칫국과 설레발은 신상에 이롭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사람의 마음도 디자인처럼 뚜껑을 까 보기 전까지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모른다.

기획 1차 OK 사인을 받은 인원은 나름 포함해 총 여섯 명이었다. 슈즈는 네 켤레만 발매되니 여기서 또 나가떨어지는 인원들이 있을 것이다.

허준성 팀에서 세 명, 그 옆 부서 팀에서 또 두 명, 우리는 나로 한 명이었다. 디자인 발표 순서는 내가 제일 마지막이었다. 고소하게도 허준성은 1차에서 아예 탈락한 것 같았다. 어쩌면 곽일영처럼 열심히 그리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하나하나 발표하는 걸 귀담아듣다가 왜인지 내 디자인이 탈락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디자인보다 말발들이 어마어마했다. 내 차례가 왔을 때 다소 쓴 입맛을 다시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공장에 부탁한 샘플부터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사실 고무 재질 자체를 선호하는 편이 아니어서 내 것은 레인슈즈라 보기에는 좀 어려웠다.

“박석연 씨 제품은 특이하게도 힐이 있네요?”

재운 선배가 물었다.

“예, 기존의 헌터 제품과는 차별화를 두고 싶었고 또한 아름다움을 강조하고 싶었습니다.”

가보시가 들어간 힐 바닥에는 미끄럼을 방지하기 위한 고무 패드가 깔려 있었다.

“보시다시피 토오픈 형식의 힐에, 발등을 덮는 부분은 투명 아스테이지를 사용하였고 가보시를 감싼 부분은 소가죽을 이용해 실버를 덧칠했습니다.”

실버 부분은 투명 유리 구두 같이 보일 만한 착시현상을 가져왔다. 전체적으로 실버색이 들어간 부분은 가보시와 굽뿐이며 나머지 부분은 전부 투명했다.

“그건 박석연 씨 취향이 가미된 겁니까?”

진여원의 물음에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대답했다.

“……예, 사실은 그렇습니다. 조금 유치한 발상이긴 하지만 이미 <엘리스리스>로 주목을 받은 바도 있기에 비 오는 날의 신데렐라 콘셉트로 갈까 합니다. 레인슈즈 자체가 젊은 층을 겨냥한 이벤트고, 한정판의 특성상 평범한 느낌보다는 특별한 인상을 심어 주려 했습니다. 얼마 전 윰에서 설문한 조사에서도 여성들의 80퍼센트 이상이 페디큐어에 관심이 있다는 자료를 받아 봤습니다. 여름철 페디큐어는 숨기기 위한 꾸밈이 아닌 보여 주기 위함이니, 제 디자인은 고객의 발을 더 돋보일 수 있는 상품이라고 생각합니다.”

“보기엔 불편해 보이는데요.”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온 재운 선배가 내 제품을 가져가더니 앞뒤로 돌려봤다.

“사이즈가 맞는 여직원 세 분께 시착을 부탁드렸고, 하루 종일 착용했을 때의 불편함은 극히 적었습니다. 밑창에는 미끄럼을 방지하기 위해 흡착 형식의 고무 패드가 붙어 있습니다. 고무 패드는 사실……. 접착식 브래지어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왔습니다.”

“하하, 박석연 씨. 그걸 지금 말할 필요는 없잖아요.”

재운 선배가 큭큭거렸다. 어차피 재질에 대해서 다 나와 있는데 돌려 말해 뭐 하나 싶었다. 진여원은 재운 선배에게서 구두를 가져가 유심히 안과 밖을 살폈다.

“취향 한번 특이하군.”

남들은 듣지 못했겠지만 나는 분명 들었다. 진여원이 나를 빤히 쳐다봤다. 어쩐지 홧홧하게 느껴지는 시선은 그가 다른 직원들을 바라보는 때와는 확실히 달랐다.

저 인간이 왜 자꾸 나를 착각하게 만들고 구렁텅이로 밀어 넣으려는 건지 모르겠다.

이번에는 나도 그를 똑바로 바라봐 주었다.

어차피 내 분홍 자전거를 회수하러 가려면 진여원의 집을 직접 방문해야 하니 피해서 뭐하나 싶었다.

“통과시켜요.”

진여원의 말에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흘렸다. 남들이 보지 못하도록 가슴을 부풀려 올렸다가 후 내뱉었다. 확실히 여러 사람 앞에서 발표하는 건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고서야 힘들었다.

여섯 개 중 통과된 슈즈는 내 것과 허준성 팀의 것 하나였다. 총 두 개였으니 이제 남은 것도 두 개였다. 우리 팀에서 전부 나오면 좋을 텐데……. 나 역시 이기적인 생각을 해 가며 자리를 정리했다.

진여원에게 있는 구두를 가지러 그에게로 걸어갔다. 그사이에 재운 선배도, 나보다 일찍 발표를 마쳤던 다른 직원들도 회의실을 떠나고 있었다.

“가져가도 될까요?”

진여원이 들고 있던 구두를 앞에 내려놓았다. 내가 손을 뻗자 그가 구두를 다시 들었다.

“자전거.”

“……예?”

“안 찾아가?”

“오늘 중으로 찾아뵙겠습니다.”

진여원이 구두를 내려놓지 않은 채로 나를 올려다봤다.

왜인지 무릎을 굽혀 시선을 맞춰 줘야 할 것 같은 압박감이 들었다. 그뿐인가, 일주일이 넘도록 내내 참아 왔던 궁금증과 함께 내 안에서 덮은 뚜껑이 달칵달칵거리며 열어 달라고 아우성이었다.

마지막 사람이 나가며 회의실의 문이 쿵 굳게 닫혔다. 나는 그걸 한 번 돌아보고 후, 또다시 짧게 숨을 뱉었다.

“사장님.”

이미 나간 말 주워 담지 않기로 했다.

“왜 자꾸 절 보시는 겁니까.”

진여원이 구두를 내려놓았다. 그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왜 저렇게 빤히 쳐다봐. 이 인간이 내 심장에 무슨 짓을 한 거야. 그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번번이 들었던 생각은 이번에도 어김없었다.

“그것도 그……런 눈으로요.”

나를 미친놈 취급해도 별수 없었다. 내가 이성애자에게 거리를 두는 놈이긴 해도 아주 둔한 사람은 아니었다.

“어떤 눈.”

“사람 착각하게 만들 만큼……. 그……런 눈이요.”

“나만 그래?”

나만 그러냐니……?

그럼 나도 저렇게 묘한 눈빛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는 말인가?

미간이 저절로 심각해지자 진여원이 말했다.

“못생긴 곶감이네.”

역시나, 진여원은 단순히 나를 놀린 거였다. 왠지 그의 손에서 놀아난 기분에 울컥거리는 화가 치솟았다.

“저 안 못생겼는데요?”

“알아.”

할 말이 없게 만드는 대답이었지만, 그런데도 그가 나를 가지고 놀았다는 사실에 마음이 가라앉지를 않았다.

내가 게이라서 한번 장난질이라도 쳐 보고 싶었나 보지? 사람 보는 눈이 언제나 바닥을 친다는 걸 또다시 확신했다.

“놀릴 사람 찾는 거라면 다른 사람 알아보시죠. 저 그렇게 한가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찔러도 그렇게 반응해?”

“아뇨, 욕하죠. 욕해 드려요?”

더는 진여원의 장난에 놀아나고 싶지도 않았다.

“박석연.”

그가 내 이름을 불렀다.

“똑똑하다며.”

내가 똑똑한 것과 지금 이 상황이 무슨 상관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말 없이 구두만 챙겼다. 진여원이 안경을 벗어 손에다 걸쳤다. 그는 내 행동 하나하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를 괄시하던 대학 동기들의 눈이 저랬던가.

아니라고 확신하는 순간 쥐고 있던 구두를 놓칠 뻔했다.

달칵달칵, 내 안에서 요동치던 뚜껑이 기어코 펑! 열려 버렸다. 기폭제는 진여원이었다.

“설마 해서 묻는 겁니다……. 저한테 관심…… 있으십니까?”

아니시겠죠? 하는 뉘앙스로 물었다.

잠시 침묵하던 진여원이 손에 걸치고 있던 안경을 아예 테이블에 내려놨다. 나 역시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 시선을 뗄 수 없었다.

화악- 순간 진여원이 내 손목을 잡아끌었다. 테이블 하나를 사이에 두고 그에게 끌려갔다. 코앞까지 다가온 진여원의 얼굴에 눈도 깜빡하지 못했다.

“그걸 이제 알았어? 늦어, 반응이.”

가늘게 접힌 눈을 보자마자 잡힌 손목부터 전신으로 열이 퍼져 나갔다. 잠시 숨어 있던 심장이 콩콩콩 다시 활동을 재개했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설마 하는 내 질문에 진여원이 준 대답이 머릿속을 점령해 버렸다. 동그랗게 떠진 눈을 깜빡이지도 못하고 그와 계속해서 시선만 맞췄다.

부풀어 오른 심장이 가슴까지 옥죄여 숨조차 막혀 버렸다. 붙들린 내 손목의 맥이 그의 손을 두드리지는 않을까 싶었다. 손목 하나일 뿐인데 솜털마저 민감하게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마치 살갗만 스쳐도 하루 종일 그 느낌을 되새기던 십대로 되돌아가는 것만 같다.

“사장님…… 바이셨……습니까?”

“아니.”

그의 한마디에 정신없이 들끓던 머리가 적잖이 차가워졌다. 바이도 아닌 사람이 나한테 관심을 가질 이유는 없었다.

“자랑은 아니지만. 저는 일반적인 남자 사원들과는 다릅니다.”

왜인지 내 성향을 대놓고 말하기가 힘들었다. 그가 잡은 팔목 위를 검지로 톡톡 두드렸다. 뛰고 있는 내 맥과 같은 속도로 두드리는 것만 같았다.

“계속해.”

“사장님은……. 이성애자시고요.”

“그런데?”

말문이 막혔다. 다소 조심스럽게 말했던 것이 무색해지고 있었다.

나한테 관심 있다고 말한 사람은 진여원인데 정작 주객이 전도되어 버렸다. 이 순간까지도 뭐가 저리 당당한지 모르겠다.

그의 손에서 약간 힘이 빠졌다 싶었을 때 얼른 잡힌 손을 빼내어 구두를 품 안에 가뒀다. 진여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그제야 눈을 한 번 깜빡이고 그를 올려다봤다.

그가 회의실 테이블을 돌아 내 옆으로 다가왔다. 급히 챙기느라 손끝에 걸쳐지다시피 한 구두를 올려 주며 나를 쳐다봤다.

“끌리는 걸 어쩌라고.”

당황해 정신을 못 차리는 동안 진여원의 반듯한 구두 소리가 뒤로 멀어지고 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을 때 정신을 차리고 뒤를 돌았다.

문을 열고 잠시 멈춰 선 진여원의 뒤로 회의실을 찾는 다른 팀들이 보였다. 그가 가볍게 그들의 인사를 받은 뒤 말했다.

“박석연 씨, 고민할 필요 있습니까?”

그 말을 끝으로 진여원이 회의실을 완전히 빠져나갔다.

행여 다른 직원에게 오해라도 살까 봐 눈치를 살폈지만, 아무도 진여원이 한 말에 이상함을 느끼는 사람은 없어 보였다.

회의한 내용을 고민하지 말라는 뜻으로만 받아들였을 테니, 나 혼자만 멍청히 입을 벌리고 서 있을 뿐이었다. 그가 두고 간 안경이 테이블을 덩그러니 차지했다.

‘고민할 필요 있습니까?’

오히려 고민이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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