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7/18)

7장

고교 시절, 우리 학교에는 펜싱부가 있었다.

합반으로 남녀 간의 썸이 주를 이루는 가운데 동성에게 독보적인 인기를 유지하던 여학생이 있었는데, 펜싱 부원인 강희재였다.

강희재는 오전 수업만 들어오곤 했고, 그 얼마 안 되는 수업 시간에도 깨어 있는 모습을 본 적이 드물었다. 짧게 자른 커트 머리와 170이 넘는 커다란 키에 길쭉길쭉한 팔다리가 특히 돋보였었다.

여학생들의 팬레터가 종종 강희재의 책상 서랍을 채웠고, 강희재는 그것을 읽어 보지도 않고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그녀는 이름마저도 중성적인 데다 예쁘기보다는 잘생긴 얼굴이었다. 나 또한 강희재에게 두근거렸던 적이 있었다.

펜싱부들이 경기를 보여 줬던 학교 축제 날이었다. 펜싱 투구를 벗으며 젖은 머리를 흔드는 모습에 잠시 넋을 잃어야 했다. 그 덕에 난 보이쉬한 여자를 좋아하는 건가? 라는 딜레마에 빠지기도 했었다.

하늘 높은 줄을 모르고 치닫던 강희재의 인기가 끝난 것은 고3 초였다. 펜싱을 그만두고 공부로 전향한 강희재는 머리를 기르기 시작했다. 여름쯤 돼서는 같은 반 남학생과 교제를 시작했고, 같은 반 여학생 몇몇은 배신감을 느껴 했다.

지금 생각하면 강희재가 딱히 남성스럽지는 않았던 것 같다. 겉모습만 보고 제멋대로 판단한 무리들이 제 이상에 맞지 않으니 또 멋대로 그녀를 욕했을 뿐이었고.

나는 딱 한 번 젖은 머리를 봤던 때를 제외하고는 강희재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었지만, 그녀의 남자 친구에게는 지대한 관심이 있었다.

강희재의 남자 친구였던 문영진은 아마 내 첫사랑이었을 것이다. 강희재가 조금은 부럽기도 했었다. 아무리 보이쉬했다고 한들 그녀는 여자였으니까.

십대 때는 이성애자들도 동성에게 끌리는 일이 가끔 있다고들 한다. 하물며 남녀공학에서도 있었으니 남고나 여고에서는 왕왕 벌어지는 일이겠고.

그때는 손가락질 받을 행동이 아니지만, 사회에 나오고 나서도 그 성향을 버리지 못한다면 동성애자라는 낙인이 찍혀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그런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결국 동성을 향한 동경은, 질풍노도의 시기에 지나가는 한철 바람만도 못한 게 대부분이었다.

혹시 진여원은 십대 때 겪지 못한 동성을 향한 동경을 내게 품고 있는 것인가 싶었다.

물론 1초도 생각할 필요 없이 아니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내가 진여원보다 잘난 게 뭐가 있던가.

하루 종일 생각해 보면 그보다 잘난 점 한 개 정도는 찾을 수 있을까…….

자전거나 부수고, 카페 음식이나 축내고, 회식 때도 토하도록 먹고, 가위바위보에서도 돈 따고 또 토하고, 스파이크나 신고 나가고…….

더 생각하다간 얼굴도 못 들고 다니겠다. 내가 그에게 한 짓들을 생각하니 웬만한 부처라도 이마에 금이 갈 것 같았다.

그러나 그에게 뻔뻔하게 굴 수 있던 이유는 소문을 낸 범인이 진여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만일 아니라면 어쩌지?

그가 맞으면 또 어쩌고.

진여원이라는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책상 서랍을 열어 안경을 유심히 바라봤다. 회의실에서 진여원이 두고 나간 안경을 돌려줄 기회가 없었다. 소나기 내리던 날 빌려 입은 그의 옷 역시 아직 내 책상 아래에 남아 있었다.

사실 기회가 없었다는 건 거짓말이고, 며칠간이나 그를 만나지 않으려고 피해 다닌 게 진실이었다. 이렇게 시간이 지나면 전부 없던 일로 돌아갈 수도 있을 것도 같아서.

진여원도 딱히 나를 찾거나 부르지 않는 걸 보니, 갑작스러운 충동에 길을 벗어날 뻔한 걸 후회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석연 씨, 그거 뭐야?”

곽일영이 의자를 끼릭끼릭 끌어서 내 쪽으로 다가왔다.

“안경이요.”

“눈 나빠?”

“눈이 좀 피로해서 안경을 살까 고민 중이에요.”

거짓말을 술술 내뱉었다. 그러고는 진여원의 안경대를 펼쳐서 얼굴에 썼다.

“고민하는데 왜 남의 안경을 가지고 있어?”

“……예?!”

“그거 사장님 안경이랑 똑같은데?”

둔한 줄 알았더니 누구보다 예리한 곽일영이었다.

“곽 대리님 안경에도 관심 있으셨어요?”

“명품이잖아.”

안경을 벗어서 안경다리 부분을 확인하니 명품 로고가 새겨져 있었다. 곽일영이 전에 몸담고 있던 회사 제품이라 아무래도 더 눈에 들어왔던 듯했다.

“돌려……드리려고요.”

“그럼 빨리 돌려줘. 사장님 자기 물건 손대는 거 엄청 싫어하잖아.”

“그래요?”

“회식하다가도 옷에 뭐 묻으면 바로 들어가셔.”

“결벽증이 있으신가 보네요.”

토한 나를 차에 태울 때 얼마나 이를 갈았을까. 그래서 나를 잡아 주는 대신 쇼핑백 끈으로 끌고 간 거였어?

자기 물건 손대는 것도 싫어하는데 자전거까지 고장 냈으니 나를 엿 먹이려고 수작 부리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옷이 담긴 쇼핑백 안에 안경을 벗어 올려두고 운동화로 갈아 신었다. 머리를 식힐 겸 시장조사를 나갈 생각으로 신고 온 진여원 작(作) 하얀 운동화였다.

꽤 오래전에 친구 하나가 너희는 외근 시간에 땡땡이를 치면 그만이지 않느냐며 부럽다는 말을 했었다. 시장조사가 곧 디자인의 결과로 직결되는 일이 많다는 것을 모르니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사무실에 틀어박혀 앉아 디자인을 그린다면 고립된 결과물만 나오게 된다. 인터넷이라는 좋은 시각 매체가 있지만,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직접 보고 만지는 것만큼 도움 되는 일도 없다.

“저 시장조사 좀 다녀올게요.”

“같이 갈까?”

“곽 대리, 얼마 전에 다녀왔잖아요.”

창가 바로 앞 상석에 앉아 있는 이재화가 한마디를 날렸다. 곽일영이 이재화가 보지 못하도록 눈썹을 찡그렸다. 잔소리꾼이야. 내게 속닥거렸다.

나는 가방에서 밴드 하나를 꺼내 양 뒤꿈치에 미리 붙였다. 이렇게 대비하면 적어도 까질 일은 없었다. 이 운동화 자체가 발목을 부드럽게 감싸서 다칠 일은 없어 보이지만, 대비해서 나쁠 건 없었다.

청색 서류 가방 안에 펜과 디자인 습작 노트를 집어넣었다. 대놓고 시장조사 나온 것을 보이면 백화점이나 동대문 사람들의 시선이 곱지 않았다. 특히 백화점의 경우는 물건을 사는 척 둘러보는 것이 상책이었다. 회사 방침이 자유로운 편이라 캐주얼 복장은 이럴 때 도움이 되긴 했다.

마지막으로 서랍에 넣어둔 양갱 박스에서 양갱도 하나 꺼내 가방에 담았다.

“시간도 시간인데 오늘은 그냥 곧바로 퇴근해요.”

“그러겠습니다.”

곽일영이 내 신발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좋겠다. 나도 같이 가고 싶은데.”

“다음에 가요.”

아예 쇼핑백까지 챙겨서 사무실을 나왔다. 어차피 자전거도 찾으러 가야 하니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전부 건네주고 정리하면 될 일이었다.

진여원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굴면 나도 편히 그래 줄 생각이었다. 양갱을 까 먹으며 로비를 걸어 나갔다. 가까운 명동부터 들렀다가 동대문으로 이동할 노선을 그렸다.

올해는 어떻게든 면허를 따 볼까. 내년에는 작은 차 한 대도 뽑고, 주말에는 술이나 퍼마시는 게 아니라 여행이라도 다니면 지금보다는 보람차겠지? 부모님 뵈러 가기도 편하겠고.

물론 실행하기 전 단계인 상상에 지나지 않았다. 지하철을 타고 명동에서 내려 백화점 출입구로 들어갔다. 걷는 동안 폭신폭신한 신발 덕에 발이 피곤하지는 않았다.

한여름에 어울릴 법한 슈즈들이 전 브랜드 시장을 장악 중이었다. 이번 시즌은 화사하면서도 산뜻한 화이트와 베이지 컬러가 대세인 듯했다.

명품 브랜드 매장에서 가보시가 없는 구두를 구경했다. 발등을 감싼 베이지색 가죽 띠의 넓이는 3cm가 될까 말까 했다.

발목 스트랩은 가죽 대신 실크 끈을 이용해 발레슈즈처럼 교차시킨 모양이었다. 힐은 족히 10cm는 되어 보여 연약하리만치 예쁜 슈즈지만 실용성은 현저히 떨어졌다.

직원이 여자 친구 선물하시게요? 하면서 다가오자 알아서 보겠다며 친절을 사양했다. 직원은 자연스레 내가 신은 운동화를 확인했다.

신발 가게를 가려면 가지고 있는 신발 중 가장 좋은 것을 신고 가라는 말은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몇몇 개의 구두를 눈여겨 봤다가 백화점 쉼터에 앉아 참고할 만한 것들을 끄적였다. 루부탱 매장에서 본 비비드 컬러의 잔상이 눈앞을 아른거렸다. 많은 백화점 중에 명동을 선택한 건 루부탱 매장이 국내에 몇 곳 없기 때문이었다.

유니크한 디자인을 선보이는 브랜드이니만큼 이걸 왜 출시했지? 하고 물음표가 뜨는 디자인들도 있었지만, 대체적으로 눈이 호강하는 매장이었다.

천천히 1층과 2층 매장을 돌다 마지막으로 윰에 도착했다. 윰은 명품 브랜드 사이에서도 센텀시티에 버금가는 명당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진독사 돈 엄청 깨졌겠는데.

공짜로 입점했다는 얘기는 거짓말이겠지? 분명 지금으로선 회사가 흑자를 보지는 못할 것 같았다.

그사이 메인에 붙어 있던 안세라의 사진은 사라진 상태였다. 대신 익숙한 외국 모델이 자신이 신은 구두를 야한 손길로 훑고 있었다. 윰은 여타 브랜드와 같이 한여름 신상들이 매장에 가득했다.

문득 이상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레인슈즈 기획에 대해서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미 때가 늦은 기획이지 않나. 체일 슈즈의 경우에도 4월 말부터 진행했었는데…….

다른 생각에 잠겨서 끌로이와 콜라보했던 구두를 보는데, 직원은 내 신발에 붙은 윰의 로고를 유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대체 언제 발매된 상품인가 하는 눈빛이었다. 물론 카피라고 보는 것 같지도 않았다. 카피를 뜨려면 판매가 되고 있는 제품이어야 할 테니 의아한 것도 이해는 갔다.

콜라보가 전시된 라인을 지났더니, 벽에 레몬색 나뭇가지가 길게 뻗어 있었다. 나뭇가지의 중간 중간에는 구두가 올려져 있었다.

다른 매장보다 시각적인 끌림은 더 많았고, 슈즈 역시 국내 브랜드답지 않은 파격적인 느낌으로 가득했다. 그래서 그런지 평일인데도 손님들이 꽤 있었다.

내가 다 흐뭇해지는 바람에 천천히 한 바퀴를 더 둘러보고 밖으로 나왔다. 그러면서도 계속 머리를 맴도는 건 레인슈즈 기획에 대해서였다.

지금부터 작업에 들어가면 적어도 8월경에 출시가 될 텐데, 늦어도 한참 늦다. 뭐, 어차피 나 같은 일개 직원이 알 바 아니지만.

백화점을 다 돈 다음 동대문으로 넘어가고자 하니 7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생각한 것보다 백화점에서 시간을 더 많이 지체해버렸다. 그래도 시장조사할 동안은 진여원에 대해서 덜 떠올릴 수 있었으니 수확은 있었다.

백화점을 나오다 서류 가방 매장에 눈이 갔지만 가격도 보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다음 달 월급까지는 좀 참자. 카드로 함부로 긁다 보면 한도 끝도 없다. 아직 자전거 할부금도 남아 있지 않나.

진여원이 대신 받아 준 15만 원은 그날 밥값을 포함해 어디인가로 다 나가 버렸다. 돈은 만 원이라도 은행에 넣지 않으면 도깨비놀음처럼 사라지곤 했다.

쇼핑백을 든 채로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이대로 진여원의 집에 자전거를 찾으러 갈 심산이었다.

피할 수 없다고 즐길 수도 없지만, 왜인지 좀 억울했다.

나는 진여원의 말 하나에 이렇게 휘둘리고 있는데, 그는 아무렇지 않은 것 같아서.

내가 연애를 하지 않는 이유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게 바로 이거였다. 불필요한 감정 소모. 애초에 감정이 생기지 않는다면 살아가는 데 골머리 썩을 일은 돈 문제뿐이었다.

이래서 시나브로가 무서운 거다. 감정이 어느 기점으로 터지고, 조금씩 흘리다 보면 걷잡을 수 없는 사태에 도달한다. 나는 지금 애써 벌어지려는 둑을 막고 있는 중이었다.

사람을 사귀고 있을 때보다 솔로일 때가 훨씬 편했다. 왜 그 편안함을 포기하고 힘든 길을 가고자 하는지는 나 자신도 모르겠다.

흘러내리는 쇼핑백의 끈을 돌려 쥐었다. 진여원의 집은 여전히 버스를 두 번이나 갈아타야 했다.

버스 정류장에 있던 윰의 광고도 어느새 전자기기 제품으로 바뀌어 있었다. 정원 딸린 주택 길을 따라 걸으며 진여원의 집에 도착했다.

낮은 펜스 너머로 보니 개나리도, 녀석의 집도 없었다. 빈자리에는 내 자전거만 우뚝 서 있었다. 8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니 진여원도 집에 와 있을 것 같았다.

초인종을 누르려고 하는데 검지가 펴지지 않았다. 그래서 주먹으로 누르려는데, 또 앞으로 나가지지가 않았다.

“내가 무슨 죄졌냐.”

혼잣말을 하고 초인종을 꾸욱 눌렀다. 긴장하고 있던 것도 무색하게 감감무소식이었다. 이번에는 망설임 없이 다시 누를 수 있었다. 세 번이나 누를 동안에도 안은 잠잠했다.

바로 저 앞에 분홍색 자전거가 있고 펜스는 턱이 이렇게 낮았다. 현관이라는 관문에 걸려 서 있는 시간이 아까워졌다. 일단 진여원에게 문자를 넣었다.

[어디십니까?]

딱 5분만 기다리자고 마음먹었다. 손목시계의 초침이 움직이는 것을 내려다봤다. 딱 300번 움직일 동안만 기다리자며 펜스 앞에 섰다. 일단 쇼핑백을 펜스 너머로 넘겨 두고 주변을 둘러봤다.

자전거만 가지고 나오면 될 거다. 그래, 난 도둑 같은 게 아니야. 속으로 되새기며 훌쩍 펜스를 넘었다. 그때였다. 끼익- 브레이크 소리치고 부드러운 마찰이 들렸다.

나는 뒤를 돌아 사람을 확인했다. 그리고는 재빨리 펜스를 다시 넘어 원래 있던 자리에 섰다. 땀을 흘리고 있는 진여원을 보니 자전거를 타고 동네 한 바퀴라도 돌았나 싶었다.

“잘 뛰네.”

“오셨습니까.”

“웬 도둑이 이렇게 어설픈가 했지.”

“도둑이라니요. 문자 드렸는데 답이 없으셔서요. 귀찮게 해 드리기 싫어서 조용히 가져가려 했습니다.”

청산유수로 나오는 말에 나 자신에게 감사했다.

쫄지 마, 박석연. 관심 있다고 고백한 건 내가 아니라 저놈이다.

진여원이 내가 보낸 문자를 확인한 뒤에야 자전거에서 내렸다. 나는 대문을 연 그를 조용히 따라 들어갔다. 스프링클러가 물줄기를 내뿜을까 걱정돼 그의 뒤만 졸졸 따라갔다.

진여원은 분홍 자전거 옆에 자신의 린스키를 세웠다.

“그럼 가져가겠습니다.”

별말을 하지 않는 걸 보니 내 예상이 맞는 것 같았다.

애들도 아니면서 왜 사람 헷갈리게 만들어. 시간만 낭비하게 만들고.

갑자기 짜증이 치솟았다. 나는 바구니 자전거의 핸들을 꽉 잡았다.

“예쁘네.”

진여원이 나와 자전거를 보고 말했다. 내가 신은 흰색 신발이 분홍색 프레임과 어울리긴 했다. 그래도…….

“제가 사장님께 예쁨받을 짓을 했는지는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시큰둥한 말투에도 진여원은 나를 덤덤하게 바라봤다.

“잘 아네.”

잊고 있었다. 내가 말발로 저 인간을 이길 수는 없다는걸.

쇼핑백을 그에게 쑥 내밀었다.

“사장님 겁니다.”

“밥은?”

“저녁 약속 있습니다.”

“취소해.”

“…….”

진여원이 내 쇼핑백은 받지도 않고 성큼성큼 집으로 향했다. 뒤통수에 쇼핑백을 던지고 싶은 욕구가 물씬 피어올랐다.

일방적인 말에도 무시할 수 없는 이유는 그가 까마득한 상사이기 때문이었다. 그래, 단지 그 이유 때문이다.

솔직히 약속 있다는 말은 호기나 부린 거고 집에 가 봐야 엄마가 보내 준 김치와 밥 하나만 놓고 먹을 텐데, 적어도 진여원은 바비큐에 버금가는 음식은 내놓지 않을까.

속으로 변명을 해 대면서 그를 따라갔다. 그의 집 내부는 여전히 깔끔했다. 진여원의 집을 통틀어서 그나마 복잡한 곳은 통유리로 된 작업실뿐이었다. 전에 봤던 디자인이 아닌 새로운 남성 슈즈가 유리에 대강 그려져 있었다.

“발 닦아 줘?”

진여원이 들어오지 않고 서 있는 내게 말했다.

“제가 개나리입니까?”

운동화를 벗어서 성큼성큼 걸었다.

주방으로 향하는 그를 따라간 뒤 식탁에서 서성거렸다. 싱크대에서 손을 씻은 진여원이 냉장고를 열어 여러 반찬들을 꺼냈다. 남자 혼자 살면서 가족들이 사는 집보다 반찬 종류가 더 많았다.

내가 좋아하는 깻잎무침과 그가 말한 토마토 장과에 김치는 적잖이 네 종류는 됐다.

진여원이 커다란 냉장고 옆에 놓인 김치 냉장고에서 네모난 통을 하나 꺼냈다. 간장 소스에 재워 둔 건 무려 장어였다.

“손 닦아.”

그는 멀뚱히 선 나를 향해 싱크대를 턱짓했다.

나는 싱크대로 가서 손세정제로 거품을 냈고, 그는 그동안 프라이팬을 예열하더니 장어를 얹었다.

그가 나무젓가락을 내게 내밀었다. 무심결에 젖은 손으로 받아 들고는 의문을 띄웠다.

“뒤집어.”

진여원이 나를 주방에 놔두고 제 방으로 들어갔다. 전면 유리로 되어 있는 집이라 그가 어디서 뭘 하는지 다 보였다.

일부러 프라이팬에 신경을 쏟아붓고 아직 익지도 않은 장어를 뒤적뒤적거렸다. 그러다 내가 대체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지 싶었다.

젓가락을 내려놓으려다가 달달한 간장과 고소하게 익는 장어 냄새에 침이 고였다. 인간이란 참으로 본능적인 생물임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양념이 지글지글 끓는 장어를 실시간으로 뒤집었다. 슬랙스에 반소매 셔츠로 갈아입고 나온 진여원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젓가락을 얌전히 그에게 양도했다.

“먹는 건 잘하던데.”

“살점 떨어져 나간 장어는 저 주세요.”

내가 굽다가 부서뜨린 장어를 말했다. 가만히 지켜보기도 뭐해서 식탁에 부지런히 수저와 젓가락을 내려놨다. 그가 그릇에 밥을 담더니 다 익은 장어를 나란히 그 위에 얹었다.

소스도 감칠맛 나게 뿌려 내 자리에 올렸고, 나머지 한 개는 자신의 자리에 두었다. 순식간에 완성된 장어 덮밥을 어안이 벙벙해서 바라봤다.

“매일 이렇게 드세요?”

“그럴걸.”

진여원이 앉는 걸 보고 나도 저기 놔둔 쇼핑백을 가져와 앉았다. 장어를 하나 잡아서 입에 넣자 입 안에서 살살 녹아내렸다.

점심 먹은 뒤로 위를 채운 건 양갱 하나였으니 충분히 배고플 만한 시간이었다. 달달한 장어와는 다르게 토마토 장과가 시큼하게 입 안을 맴돌았다.

마주 보고 앉아서 식사를 하고 있노라니 기분이 묘했다. 집에서 이렇게 누군가와 밥을 먹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 입이 튀어나올 만한 건 진짜로 부서진 장어를 내 밥그릇에 담아 줬다는 것이다.

“설거지는 제가 할게요.”

“식기 세척기가 박석연보다 더 뛰어나지 않을까.”

나한테 관심 있는 게 날 갈구기 위한 관심이 아닐까 싶었다.

“대체 제 어디에 관심이 있으십니까?”

진여원이 내리고 있던 시선을 들었다. 또다. 저렇게 빤히 쳐다볼 때면 조용하던 심장이 나를 들쑤셨다.

“건방진 점.”

무슨 대답을 기대했기에 이렇게 기운이 빠지는 걸까.

“여태 살면서 저보고 건방지다고 한 사람은 사장님밖에 없었습니다. 제 어디가 건방집니까?”

물론 이 말투조차도 건방지긴 했다. 그래도 그딴 점이 마음에 든다고 하는데 누가 헤벌쭉 웃을까.

“얼굴이.”

쇼핑백에 있던 안경을 꺼내 얼굴에 썼다. 그 상태로 밥을 우걱우걱 먹었다. 밑바닥이 보일 때까지 한마디도 안 하고 장어와 밥을 씹었다.

“그 우스꽝스러운 모습은 뭐야.”

입에 남은 잔해를 꼭꼭 씹어 삼키고 나서야 대답했다.

“이러면 유순해 보일까 싶어서 썼습니다. 이참에 저도 안경 하나 맞춰야겠습니다.”

“우스꽝스럽다고 말한 것 같은데.”

진여원이 식사를 마치며 수저를 내려놨다.

“사장님, 이런 식으로 저 놀리는 거 정말 약 오릅니다.”

장어고 뭐고 그냥 집에 갔어야 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식기 세척기에 빈 그릇들을 담았다. 반찬 뚜껑도 닫아 냉장고에 집어넣고 미처 마시지 못했던 물도 들이켰다. 식탁 또한 깨끗이 닦아 식사의 잔해를 없앴다.

식기 세척기 앞에 쭈그리고 앉아 어떻게 동작시키는 건지 한참을 헤맸다. 스타트라고 쓰여 있는 버튼을 눌렀는데 세척기가 움직이질 않았다.

이거 고장 난 거 아니야? 연달아 버튼을 누르는데도 세척기는 조용했다.

저기 콘센트에 세척기의 코드로 추정되는 게 뽑혀져 있었다. 나는 한달음에 다가가 코드를 꼽고 세척기를 작동시켰다.

진여원은 바삐 움직이는 나를 식탁에 앉아 가만히 구경하는 중이었다. 내가 헤매고 그럴 때 좀 알려 주면 덧나냐?

“잘 먹었습니다.”

위잉- 돌아가는 세척기를 돌아본 뒤 말했다. 쇼핑백과 안경은 그 자리에 그대로 놔뒀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여전히 뜻 모를 미소만 입에 머금고 있는 진여원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웬일로 진여원이 나를 따라 나왔다.

“박석연.”

현관에 서서 운동화의 앞코를 두드리고 있는데, 진여원이 나를 불렀다. 딱딱하게 반응하자 그가 내게로 손을 뻗었다.

움찔,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진여원이 더 빨랐다. 한 차례 웃은 그가 들고 있던 안경을 내 얼굴에 씌웠다.

“그만 좀 놀리시죠.”

“왜 놀린다고 생각해. 구분 못해?”

“뭐가요.”

그러면서 진여원을 올려다보는데 ‘귀여웠으니까.’ 그 말이 떠올랐다. 그때도 저렇게 나를 봤으니까.

귀가 화끈화끈거렸다. 안경테가 차갑기에 더욱 내 체온이 실감났다. 나는 뜨거워진 귀를 손으로 매만지며 투덜거리는 말투를 자아냈다.

“구분 못하는 건 사장님이신데요. 안경 거꾸로 씌워 주셨습니다.”

나는 일부러 뒤집어씌운 것 같은 안경을 벗어 내렸다.

“벗은 게 더 취향이긴 해.”

벗은 건 안경일 뿐인데 전라가 된 것 같은 창피함이 밀려왔다. 나는 일부러 안경을 고쳐 썼다. 오기도 있었다.

“작업 중이야?”

“아뇨, 저는.”

“작업은 내가 할 테니 넌 넘어올 준비나 해.”

괜히 고집 부리지 말라는 듯했다. 진여원의 말에 머릿속까지도 쿵쾅쿵쾅거렸다. 나는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제자리에서만 서성거렸다.

진여원이 현관 벽에 기대어 팔짱을 끼고 나를 내려다봤다.

“더 볼일 남았어?”

방금까지 작업을 운운하던 남자가 안 가냐는 듯 구는 바람에 삼키고 있던 진심을 내뱉었다.

“전 이성애자와는 절대 안 만납니다.”

“그간 날 열심히 피해 다닌 이유겠고.”

대놓고 피하지는 않았는데 알아차린 그가 용했다.

“싫다는데 강요할 순 없지.”

진여원의 대답에 마음이 꽁기꽁기했다. 이렇게 끝이구나 싶었다.

정말 내게 관심이 있다면 저렇게 쉽게 수긍할 수는 없다. 사람 마음이 어디 TV 채널처럼 마음대로 돌려지는 것이던가.

나는 현관 문고리를 눌러서 앞으로 밀었다. 꼼짝도 안 하기에 안으로 여는 것임을 깨닫고 휙 힘을 주어 당겼다.

나가려는 내 등 뒤로 진여원의 목소리가 닿았다.

“난 나대로 밀고 나갈 테니까.”

거의 동시에 문이 닫혔고, 나는 멀뚱멀뚱 현관을 돌아봤다. 방금 그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될지도 몰랐다. 그저 내 마음이 나를 배신한 채 설레고만 있었다.

뒷걸음을 치다시피 해서 자전거의 운전대를 잡았다. 그렇게 대문을 열고 나올 때까지도 한 번도 뒤를 돌지 못했다.

심장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닐까, 그래서 이렇게 지끈거리는 건가. 체일 슈즈에서 실시한 종합 검진을 받은 게 반년이 채 되지 않았다. 그때는 몸에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습한 바람이 불어와 몸을 휘감으니 천천히 정신이 돌아왔다.

내 손에는 아직 진여원의 안경이 들려 있었다. 잠시 서서 그걸 내려다보다 얼른 바구니에 담았다. 지금 당장 돌려주러 갈 생각은 들지 않았다.

휴대폰에 이어폰을 꽂고 자전거에 올라탔다. 이대로 미령이네 가게로 질주하고 싶었다. 하지만 내일은 회사를 가야 하고, 여기서 한참 멀기도 해서 현실적인 벽에 부딪혔다. 그저 미령에게 전화를 거는 수밖에 없었다.

신호음이 가는데도 귀가 멍했다. 나는 뭐에 홀린 사람처럼 바람을 맞으며 자전거를 몰았다.

[석연이 무슨 일?]

가게 노래 소리에 미령의 목소리가 섞여들었다.

“미령아, 바쁘냐?”

[아니.]

“아무래도 나.”

잠시 뜸을 들이자 미령이 재촉했다.

[너, 뭐.]

“이성애자한테까지 매력을 방출하나 보다.”

[미친놈. 술 좀 작작 마셔라.]

“안 취했어. 누가 나보고 자꾸 감이라고 하는데 말이야.”

[왜 곶감이라고 하디?]

“뭐? 어떻게 알았어?”

놀라 자전거에서 내려 핸들을 끌며 걸었다.

[너 늙었잖아.]

“야! 아니거든. 홍시라고도 했거든?!”

[누군지 몰라도 제대로 봤네. 너 물러 터졌잖아.]

“미령아. 나한테 불만 있냐?”

[아니, 그래서 누군데? 나도 아는 사람이야?]

“넌 모르는 사람이야.”

[그래서 잤어, 안 잤어?]

결국엔 그 질문부터냐.

“안 잤어. 그럴 수도 없어. 여친도 있던 사람인데 남자 몸 보면 아마 깰지도 모르지.”

[돈은 많아? 생긴 거는?]

“전반적으로 명품일걸.”

[김대영처럼 헛다리 짚은 거 아니고?]

“그 새낀 짝퉁이고, 이 사람은…… 명품인 것 같은데…….”

[이거 콩깍지 씌였구만. 내가 봐주고 싶다, 박석연 어지간히 사람 보는 눈 없어야지.]

“그러니까 말이다.”

[그래서 그 사람이 너 좋대? 애정적으로?]

“관심은 있다는데.”

[관심 있다는 말 자체가 애정의 신호탄 아니냐? 야야, 전화로 하지 말고. 우리 가게 와라.]

“나 내일 출근해야 돼. 그리고 자전거 끌고 가고 있어.”

[그럼 답은 나온 거 아니냐?]

“무슨 답.”

[너도 마음 있으면 일단 만나 봐. 그럼 그 사람도 착각인지 아닌지 알겠지.]

“이성애자인 것도 걸리지만…….”

그것보다 더 걸리는 건…….

“내가 애타는 게 싫어서 그래.”

미령에게는 솔직하게 말했다.

[더 솔직해지지? 상대가 이성애자라서 무서운 건 아니고?]

“……맞아.”

잡힌 고기에 먹이를 주지 않는 자들이 많다는 것도 알고, 흥미로 게이 바를 찾은 남자와 만나다가 피를 본 녀석들도 제법 알고 있었다.

진여원의 말에 얼씨구나 달려들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어쩌면 키스를 하자마자 비참한 꼴이 났을지도 모른다.

[이것도 무섭고, 저것도 두려우면 아무도 안 만나는 게 좋지.]

“명답이다.”

심지어 회사의 사장님이신데, 수틀려 봐라. 그날로 모가지지.

미령에게 이 말까지는 하지 못했다. 미령과 전화를 끊고 나서도 자전거에 올라타지 못했다.

진여원은 내게 관심 있다고 말하기까지 고민이 없었을까? 내가 게이가 아니었다면 진여원도 쉽게 말하지는 못했겠지.

자격지심에 가까운 읊조림이 쏟아져 나왔다. 진여원이 어째서 예전 여자친구와 헤어졌는지 궁금했다. 하긴 그 이유를 듣는다고 한들 뭐가 달라지려나. 남녀의 헤어짐도 딱히 그럴싸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닐 테니까.

그와 함께 소나기를 맞은 날부터 얻었던 열병은 감기약을 먹어도 낫는 법이 없었다. 앞서 그 누구도 만나지 말걸. 그랬으면 아무 고민 없이 진여원을 만날 수 있었을 것이다. 적어도 지금이 아닌 스물살 때였다면 더 낙천적이었을 텐데…….

미령의 곶감이라는 표현에 절절히 공감했다. 늙은 곶감이라고 했지. 황당한 웃음이 나와 버렸다. 게이 바도 어린 녀석들 천지라 슬슬 명함도 내밀기 힘들어진 건 사실이었다.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함은 내게도 있었다. 우리 부모님도 평생 살아 계시지는 못할 테고, 나는 가족도 없이 홀로 남겨질 게 뻔했다. 내가 돈에 환장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돈마저 없으면 비참하다 못해 옥상을 또다시 선택할지도 몰랐다. 그럼 그때는 나를 다잡아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겠지.

“박석연, 또 시작이다.”

우울해지려는 기분을 힘겹게 떨쳐 냈다.

힘내자, 아자. 시간이 해결해 주리라. 딱 한 달만 버텨 보고 그때도 진여원이 지금처럼 굴면 좀 생각해 볼까? 배부른 소리나 하고 앉아 있었다.

내가 2주만 버텨도 언제 그랬냐는 듯 떨어져 나갈 수도 있었다. 일로서 사람을 신뢰하는 건 객관적이니 쉬울지 몰라도 보이지 않는 감정을 신뢰하기란 어려웠다. 나 같은 사람은 더더욱.

“김대영 씹새. 날 현실에 찌든 인간으로 만들다니. 좆같은 새끼.”

나 뚱뚱하다며 퇴짜 놓은 놈 이름은 생각나지 않았지만, 그놈에게도 같이 욕을 퍼부어 주었다.

집에 도착할 때까지 장장 한 시간을 욕하니 분이 한결 가라앉았다. 가라앉은 분과는 다르게 마음은 저 혼자 들떠서 살랑살랑거렸다.

***

어젯밤만 해도 분홍색 자전거를 타고 출근할까 했지만, 일어나자마자 버스를 선택했다. 어쩐 일인지 버스가 평소와는 다르게 한산했다.

운이 좋네, 라고 생각한 날은 꼭 불운이 찾아오곤 했다. 그건 내 삶의 법칙이었다. 아직 다시마 한 개의 법칙도 남아 있었다.

곽일영과 이재화는 오전부터 공장에 가 있어 나 혼자 내내 사무실을 지켜야 했다. 시장조사를 마치고 온 터라 여름 이후에 대비할 가을 신상을 끄적거리면서도 꺼림칙한 무언가가 어제부터 지금까지 가시질 않았다.

레인슈즈 기획의 의문점이 왜 이렇게 내 안을 맴도는지 모르겠다. 진여원도 모자라 별 쓸데없는 생각을 한다면서 사내 메신저를 클릭했다.

[대표1]

[이사1]

둘이 상단에 떠 있었다.

물론 대표1인 진여원의 대화명은 [진독사]로 내가 저장해 놓은 상태였다. 내가 메신저를 클릭한 건 저장문구를 바꾸기 위해서였다.

나는 [진독사]를 [진득이]로 바꿔 넣었다. 진드기처럼 내 머릿속에서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으니 이게 딱이었다. 볼 때마다 떼어 내려고 노력해야지.

이것 봐라. 시작도 안 했는데 나 혼자 또 애타고 있었다. 막상 시작되면 그의 열애설 하나에도 하루 종일 우울할 건 당연지사였다. 그렇다고 애교나 부리면서 나 말고는 다른 사람 보지 말라며 징징댈 수도 없었다. 그건 내가 생각해도 징그러웠다.

불현듯 새 창이 올라오며 대화창이 깜빡깜빡거렸다. 화들짝 놀라는 바람에 마우스를 쥐고 있던 손이 자판에 탕 부딪혔다.

대화를 건 사람은 ‘이사1’이었다.

[석연아, 뭐 하냐?]

얼얼한 손을 문지르고는 재운 선배의 메시지에 답을 주었다.

[일이요.]

[요새 테니스 치러 왜 안 올라와. 지금 할래?]

[일해야죠.]

[아~ 나 심심해 죽겠는데. 뭣 좀 재미있는 얘기 없어?]

[없어요. 심란합니다.]

[뭔데? 뭔데?]

[별건 아니에요. 일할게요.]

[오늘 진 사장도 없는 것 같은데 빼지 말고 테니스 한판 하자. 2:1로 내가 이길 방법 하나 알았는데 연습 좀 해야 돼.]

진여원이 없다고? 오전에 자전거를 본 것 같은데 그사이 나갔나.

책상에 올려 둔 휴대폰이 진동하기에 확인하니 스팸 문자였다. 나는 다시 자판을 두드려 답을 주었다.

[저 한동안은 2:1로 하기 싫어요.]

지금은 진여원하고 마주치기가 영 껄끄러웠다.

[1:1로 해.]

[이사님이 사장님이랑 둘이 하세요.]

[그건 사양하고 싶은데.]

메신저 상이지만 말투가 좀 이상해서 작은 창을 유심히 들여다봤다. 새로운 대화창이 뜨면서 저절로 창이 넘어가 있었다.

깜짝 놀라 뒤로 밀려난 선배의 창을 확인했다. 연습 좀 해야 돼, 라는 글에서 끝나 있었다. 이후의 부분은 전부 진득이와 얘기를 나눈 거였다.

하여간 꼭……. 운 좋다고 생각한 날은 이렇다니까.

행여 실수한 건 없나 싶어 진여원과의 대화를 확인했다. 다행히도 문제 삼을 건 없어 보였다.

[죄송합니다. 메신저가 엉켰습니다.]

[전화기.]

내 휴대폰은 아닐 테고 사무실 전화기를 확인했다. 전화선이 뽑혀 있었다. 조만간 마의 바이오리듬이 찾아올 곽일영이 벌인 짓 같았다.

그날이 다가오면 곽일영은 가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을 했다. 지난 마의 날에는 내 자리에 똥 모형을 올려놨었지. 전화선을 꽂고 나서야 다시 컴퓨터 앞에 앉을 수 있었다.

[전화선이 뽑혀 있었네요.]

[사장실. 레인슈즈와 박석연 포함해서.]

자판 위에서 주먹을 꽉 쥐었다. 이 인간은 채팅 상에서도 말이 짧았다.

그리고 내가 물건이냐? 나까지 포함하게? 혹시 내 슈즈를 퇴짜 놓으려나. 이미 통과했는데 변덕을 부릴 리는 없겠지?

샘플을 모아 둔 진열장에서 240 사이즈의 투명 구두 한 쌍을 품에 안았다. 그의 안경과 함께 패턴도 필요할지 몰라 바리바리 챙겨 들었다.

사무실 문을 잠그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계단으로 올라갈 수 있었는데 괜스레 시간을 끌고 싶어 지하에 있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내가 기다리는 엘리베이터 말고 옆쪽이 열렸지만 타지 않았다.

나는 뒤늦게 온 엘리베이터에 몸을 싣고 거울을 확인했다. 뚱한 얼굴이 구두와 패턴을 안고 있었다. 게다가 잠도 제대로 못 잤기에 눈이 좀 부어 있었다.

사장실 앞에 서서 손이 아닌 구두 굽으로 문을 똑똑 두드렸다. 들어오라는 소리에 문을 열었다. 진여원은 의자가 아닌 책상 끄트머리에 앉아서 서류를 확인하고 있었다.

“사장님, 저 왔습니다.”

인사를 하고 문을 닫았다. 진여원은 내가 소파까지 다가갔는데도 고개를 들지 않고 있었다.

마냥 서서 그의 말을 기다리다가 소파 테이블에 조용히 안경을 내려두었다.

“줘 봐.”

진여원이 말했다. 나는 구두를 내밀고 다시 뒤로 물러났다.

그가 구두를 손 위에 올려두고 살펴봤다. 괜히 투명한 걸로 만들었다. 저렇게 보니 꼭 유리 구두를 만지는 왕자님 같은데……. 거기까지만 생각했다. 정신을 놨지, 내가.

“이거 출시하고 싶어?”

“예? 통과된 거 아니었습니까?”

“예스야 노야.”

“저……는 당연히 예스인데요.”

예스라는 대답이 너무 뻔뻔했나? 이미 통과한 건데 왜 저렇게 보는 건지 모르겠다.

“혹시 기획 엎어졌습니까?”

“왜 그렇게 생각해.”

진여원이 흥미를 보였다.

“어제 시장조사를 다녀왔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기획 타이밍이 이상해서……요.”

설명하고 있는데 진여원이 책상을 벗어나 내 쪽으로 다가왔다.

한 발 한 발 뒤로 무르자 테이블이 종아리를 쿡쿡 찔렀다. 내 손에 들린 패턴을 가져가는 그와 나의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웠다. 나는 입에서 튀어나오려던 헛바람을 간신히 막았다.

“계속 해, 왜 끊어.”

패턴을 쳐다보는 눈길이 무심했다.

“아…… 예…….”

그런데 이 상태로……?

진여원과 내 거리가 한 뼘에 불과했다. 입술을 안으로 말아 혀로 축여서 메마름을 달랬다.

“8월이나 되어야 출시가 될 텐데……. 그게, 너무 늦은 기획이 아닌가 싶어서 그렇습니다.”

말을 다 하고 고개를 숙였다. 사장실은 에어컨이 돌아가 시원하기만 한데, 내 손바닥에 땀이 차고 있었다.

“똑똑해. 박석연 씨.”

칭찬인데도 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정말 기획이 엎어졌다는 소린가? 그런데 또 그것도 아닌 것 같고…….

기획이고 나발이고 지금 맞닿을 만큼 가까이 있는 진여원이 신경 쓰여서 미칠 지경이었다.

“칭찬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어제처럼 후다닥 뒤도 안 보고 나가려는데 진여원이 말했다.

“내 말 아직 안 끝났는데.”

멈칫하고 문을 등지고 서서 그를 바라봤다. 진여원은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내게 다가왔다.

“무슨 말씀이요…….”

갑자기 목이 메는 바람에 그에게 들리지 않도록 목을 가다듬었다. 안경을 벗은 그는 가볍게 입을 열었다.

“우리 얘기.”

순간 우리 애기로 들어서 가슴이 철렁했다. 이젠 헛것까지 들리고 있었다.

“업무 시간이라 사장님도 저도 바쁩니다. 저희 얘기는.”

“업무가 아니라 이리저리 피하는 누구 때문에 바쁜 것 같은데.”

젖은 진여원의 입술에 자꾸 시선이 갔다. 나는 메말라 있는 목을 축이려 간신히 침을 삼켰다.

주변의 향 때문인지 목구멍에 사탕이 걸린 듯 달고 텁텁했다. 고양이 앞에 쥐처럼 궁지에 몰려 몸이 조여드는 기분이기도 했다.

류준이 말처럼 몸 달아서 비비는 나란 놈이 진여원 앞에서는 왜 이렇게 긴장하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왜 그렇게 긴장해.”

움찔한 것을 숨긴 채 최대한 태연하게 말을 자아냈다.

“회사에서 이러시면 업무방해죄로 신고……할지도 모릅니다.”

진여원은 신고 참 좋아해, 라는 말을 할 것 같았다. 그러니 평소처럼 투덕거리다가 빠져나가면 그만이었다.

“내가 뭘 할 줄 알고.”

진여원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한껏 섞여 있었다. 예상치 못한 말에 뒤로 문고리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달콤한 향이 뒤섞인 묘한 기류에 감각이 마비되어 가는 것 같았다.

똑똑- 그 순간 밖에서 사장실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숨통이 확 트였다.

“누가…….”

말을 하며 문을 여는 것과 동시였다.

쾅! 한 뼘도 채 열리지 않았던 문이 거칠게 닫혔다. 당황해 그를 올려다봤다.

진여원의 손이 문고리를 잡고 있던 내 손에 겹쳐졌다. 그가 손을 쥔 채로 힘을 주었다.

달칵, 문을 잠그는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이번엔 산통 깨지 마.”

진여원의 얼굴이 내게로 내려왔다.

“뭐, 읍…….”

삽시간이었다. 시원하고도 달콤한 혀가 메마른 입 안을 핥았다. 코끝에 진여원의 뺨이 닿고 머무른 그의 향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습기를 잔뜩 머금은 입술이 내 입술을 탐하며 촉촉함을 불어넣었다. 발끝이 찌릿거려 신발 안에 숨은 발가락이 오그라들었다.

타당, 안고 있던 구두를 떨어뜨려 버렸다. 나도 모르게 슬며시 눈을 감고 그의 뺨에 코를 문질렀다. 잠시 떨어져 나간 그의 입술이 젖은 숨결을 불어넣으며 내 입가를 두드렸다.

허리를 감싸 안은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가 얽힌 혀를 세게 빨아들였다. 아찔한 감각에 눈앞이 번쩍였다.

“으흡…….”

고개를 틀어 진여원의 입술에서 벗어나니 곧바로 따라와 쪼는 듯한 키스를 퍼부었다. 도망친 나를 탓하듯 그가 내 아랫입술을 아릿하게 깨물었다.

물러나려 해도 진여원과 문이 앞뒤로 버티고 있었다. 내리누르는 듯한 키스에 얼굴이 뒤로 넘어갔고, 힘이 빠진 허리를 그가 단단히 부둥켜안았다.

먹힌다. 달콤하게.

머릿속에 떠다니는 말은 두 가지뿐이었다. 짙어지는 키스만큼 호흡이 거칠어졌다. 입 안이 진여원의 달달한 향으로 가득 찼다.

똑똑똑- 멍한 귀를 노크소리가 파고들었다. 놀라 억지로 입술을 떼어 낼 때 내 송곳니가 진여원의 입술을 긁어 내렸다.

하아……. 가쁜 숨을 고르며 초점이 흐려진 눈으로 진여원을 응시했다. 필연적으로 그의 입술에는 생채기가 생겨나 있었다.

그러게 왜 키스를 해. 차라리.

“말로…… 하시죠.”

웅얼거리는 말이 새어 나갔다.

“피하느라 그럴 틈이 있어야지.”

진여원이 고개를 삐딱하게 하고 나를 내려다보며 속삭였다.

“약은 나도 올라.”

진여원의 말투에서 왜인지 조바심이 묻어나오는 것 같았다.

“아! 뭐야, 진 사장 안에 있지?”

문밖에서 재운 선배의 목소리가 들렸다. 흐리멍덩했던 정신에 찬물이 끼얹어졌다. 얼른 뒤를 돌아 잠긴 문을 열려 했다. 진여원이 내 등에 바짝 상체를 댔다.

“박석연 씨 남자니까 잘 알잖아.”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울렸다.

“대놓고 피하면 불타오르는 거.”

달칵, 나보다 먼저 진여원이 잠긴 문을 풀었다. 그의 숨이 닿았던 귀에 후유증이 남아 손으로 그러쥐었다가 떼어 냈다.

나는 벌컥 열리는 문에 뒷걸음질 쳐서 재운 선배와 마주했다. 나보다 더 놀라 보이는 선배가 들고 있던 서류를 뒷면으로 뒤집었다.

“뭐야, 둘이 안에 있는데 왜 말도 없고 문을 잠그고 그래.”

“아, 그게…….”

나는 우물쭈물하며 바닥에 떨어진 구두를 주웠다. 선배는 서류 뒷면을 앞으로 한 채로 진여원에게 넘겼다. 자연스러운 행동이었지만 직원이 보면 안 되는 기밀이라도 담겨 있는 듯싶었다.

진여원이 건네받은 서류를 소파로 휙 던졌다.

“뭐야, 진 사장. 입술은 왜 그러냐?”

그가 상처 난 아랫입술을 손으로 매만졌다. 마치 그제야 상처를 알아차린 사람 같았다.

“급하게 먹다가.”

재운 선배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와중에 나만 얼굴로 뜨거운 열이 올라왔다.

“뭐가 얼마나 맛있기에 그렇게 급하게 드셨나.”

진여원이 천천히 나를 훑더니 시선이 입술에서 멈췄다.

화끈거리는 얼굴로 또다시 불이 지펴졌다. 이제는 거울을 보지 않아도 알 수가 있었다. 표정 관리가 안 되고 있다는 것을.

“저기, 전 나가 볼 테니 말씀들 나누세요.”

선배가 여간 이상한 게 아니라며 미심쩍어했다. 에둘러 자리를 피하고자 재빨리 사장실을 빠져나왔다.

품에 구두를 안고 손으로 얼굴을 부채질했다. 차가울 게 분명한 복도 벽에 뺨을 마구 문지르고 싶었다.

아니, 저 인간은 심장을 들쑤시는 것도 모자라 왜 사람 온도까지 좌지우지하는 건지.

최대한 벽에 붙어 차가움으로 열기를 달래며 걸었다.

“석연아.”

툭, 어느새 따라 나온 재운 선배가 내 어깨를 쳤다.

“우리 석연이 진 사장한테 혼나기라도 한 거야?”

“아뇨.”

차라리 혼나면 다행이게.

“근데 얼굴이 왜 이렇게 빨개. 낮술 했어?”

재운 선배의 농담에 아직 축축한 입술을 다시며 말했다.

“당장 한잔하고 싶네요.”

“한동안은 바빠서 술은 무린데, 대신 테니스 칠까?”

“일해야죠.”

테니스 노래를 불러 대는 선배와 엘리베이터까지 나란히 걸었다. 가느다랗게 눈을 뜨고 나를 지켜보던 선배가 말했다.

“석연이, 석연치 않은데. 진 사장도 그렇고, 뭐지…….”

선배가 이사실로 가지 않고 내 옆에 섰다.

키스하는 숨소리가 들렸을 리도 없을 테고, 진여원의 입술을 찢어 놓은 사람이 나인 것도 모를 텐데 선배 말처럼 마음은 석연치 않았다.

“혹시 선배, 레인슈즈 기획 엎어졌어요?”

머리에 떠다니는 키스를 지우기 위해 일부러 다른 얘기를 꺼냈다.

“음……. 아니?”

잠시 생각하는 척하던 선배가 고개를 저었다. 뜸을 들이는 말투에 또다시 석연치 않아졌다.

어차피 나야 내 디자인만 출시하면 그만이다. 그 문제가 아니라도 머리는 충분히 복잡했으니까.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올라타자 재운 선배가 손을 흔들었다. 2층으로 내려오며 손끝으로 입술을 매만졌다. 진여원의 뺨의 온기와 상큼달달했던 맛이 입 안에 되새겨졌다. 입을 달싹이며 중얼거렸다.

생각보다 맛……있네.

엘리베이터 문에 비친 얼굴은 멍청하기 그지없었다.

***

내 디자인 종이에는 빙글빙글 펜을 돌려놓은 자국만 가득했다. 멍한 정신으로 끄적거렸던 그림도 어느덧 펜의 소용돌이에 파묻혀 있었다.

키스를 안 해 본 것도 아닌데 전에는 어떤 느낌이었는지 생각나지 않았다. 진여원의 입술 감촉만 둥둥 떠다녔다.

공장에서 돌아온 곽일영이 고개 숙인 내 앞으로 손을 휙휙 흔들었다.

“석연 씨, 그만 멍 때리고 이것 좀 봐봐.”

곽일영이 공장에서 받아 온 가을 신상 메리제인슈즈를 내보였다. 그러면서 하트 모양 라인스톤을 슈즈의 앞코에 내리눌렀다.

“여기다가 이렇게 큐빅 붙일 생각인데 어떨 거 같아?”

“…….”

“석연 씨? 어떨 거 같냐고.”

“튀어…… 나갈 것 같네요.”

내 심장이. 그것도 진여원 때문에.

“뭐? 안 되는데, 튀어 나가면 안 돼.”

널을 뛰고 있는 심장에 손을 대고 책상에 엎드렸다. 그 손을 머리로 올려 옆머리를 쥐어뜯었다.

한 달만 지켜보긴 뭘 지켜봐. 키스 한 번에 정신을 놓을 지경인데.

이러다 진여원보다 내가 더 먼저 그에게 빠져드는 건 아닌지 걱정이 앞섰다. 진여원은 관심 있다고 했지 내게 사귀자고 고백한 건 아니었다.

물론 우리가 달력에 ‘오늘부터 1일’이라며 사귄 날짜를 표시할 나이는 아니었지만…….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렇게까지 별로였어?”

곽일영이 왜 저렇게 시무룩한가 싶었다.

“미안.”

나는 곽일영이 왜 사과하는지도 모르고 책상에 뺨을 눌렀다.

“곽 대리님. 우리 오늘 술 한잔할래요?”

“나 술 못 마셔.”

“알아요. 맛있는 안주 사 드릴게요. 그날 딴 돈 다 잃어서 소고기는 못 사 드리지만요.”

책상에 달라붙어 있던 뺨을 떼어 내 이재화를 향했다.

“과장님은 어떠세요?”

“와규 꼬치 정도는 사 줄 수 있어요?”

“당연히요.”

“그럼 끝나고 갑시다.”

이재화가 검지를 들어 천장을 가리켰다. 일이나 잘 끝내고 가자는 제스처였는데 진여원이 있을 위층 사장실이 생각나 버렸다.

내가 별명 하나는 기가 막히게 지었다. 진득이. 좀 머릿속에서 떨어져 나가라.

다시 얼굴을 책상에 붙이자 곽일영이 큐빅을 떼었다가 붙였다가 진지한 얼굴로 고민하고 있었다.

“거기에 붙이면 예쁘겠네요.”

곽일영이 그가 할 수 있는 한 인상을 최대로 구기고 나를 쳐다봤다.

“아까는 붙이지 말라며!”

“제가요?”

“석연 씨……. 혹시 알코올성 치매 온 건 아니지?”

치매 말고 볼매는 있네요, 진여원이라고. 말만 하면 다 진여원이 생각나니 중증이었다. 그래 봐야 키스 한 번인데 뭐 이리 난리야. 이 나이 먹고 순진한 척 떨고 앉아 있냐.

“아오!”

머리를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재화와 곽일영이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죄송해요. 저 커피 좀 마시고 올게요.”

나는 민망한 목소리로 작게 말했다.

회의실에서 커피를 하나 뽑아 복도를 걸어 나갔다. 비상구를 열어 계단 난간에 팔을 기댔다.

무성하게 잎을 이룬 나무들이 건물 밑으로 빼곡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진여원의 손이 닿았을 건물에 내가 들어와 있었다. 그마저도 기분이 묘하게 술렁거렸다.

생각해 보면 그의 말대로 피하면 불타오르는 건 누구나 마찬가지였다. 차라리 대놓고 진여원의 눈앞에서 알랑거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생겼던 관심도 없어지려나?

그건 그것대로 또 섭섭했다. 하필 내 마음을 파고들기 시작한 게 어째서 진여원일까. 아니 진여원이 아니더라도 기본적으로 이성애자는 누구든 사양이었다.

앞니로 종이컵을 잘근잘근 물었다. 복잡한 속내와는 다르게 날씨는 기가 막히게 좋았다.

남은 커피를 마시며 숨을 크게 들이켰다. 더운 바람이 속 안에 머무르자 몸의 열기도 후끈 달아올랐다. 내일부터는 아이스커피로 갈아타야 하나.

차오른 열을 식히기 위해 푸른색을 띠고 있는 나뭇잎을 내려다봤다. 그 시야의 밑으로 진여원이 보였다.

그는 자전거에 올라탄 채 귀에 이어폰을 꽂고 있었다.

올려다보지 마라, 올려다보지 마라.

속으로 말하며 그를 관찰했다. 이 근래 피하기 바빠 이렇게 대놓고 보는 것이 오랜만이었다. 전이였다면 퉤 하고 안으로 튀었을 텐데, 지금은 입술만 달싹거릴 뿐이었다.

휙 진여원이 고개를 들었다. 때마침 눈이 딱 마주쳤다. 자기를 쳐다보는 걸 어찌 알았는지 귀신이 따로 없었다.

“어디…… 가십니까.”

나도 그를 이제 발견한 척 굴었다. 대신 2층이어서 조금 목소리를 키워야 했다.

그는 다리 한쪽으로 바닥을 지탱하고 꽂았던 이어폰을 빼냈다. 핸들이 고개를 삐딱하게 비틀고 있는 모습이 산책하다 쉬고 있는 것처럼 여유로워 보였다.

“약국.”

나도 모르게 그의 입술로 시선이 쏠렸다. 여기서 상처는 보이지 않았다.

“……별로 안 죄송하다는 건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미안할 짓을 했어?”

“아뇨. 미안한 짓은 사장님이 하셨죠.”

“안 좋았어?”

그의 직구에 잠시 잠깐의 당황을 숨기고 곧장 말을 내뱉었다.

“……안…… 좋았는데요.”

“그럼 나만 좋았던 걸로 해.”

예상치 못한 그의 말에 딩- 머리가 울렸다. 픽 웃는 저 남자가 조금 전까지 내게 키스를 했던 사람이라고는 실감나지 않았다.

내 머리를 백지로 만든 진여원은 페달을 밟아 건물을 돌아 나가기 시작했다. 진짜 약국을 가는 건 아닐 것이다. 어딜 가든 내 알 바 아니지만 말이다.

나는 진여원의 자전거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쳐다봤다. 그가 불렀던 노래가 내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심지어 시작될 주말은 여느 날보다도 더 길게 느껴질 것 같았다.

진득이가 괜히 진득이겠나, 원치 않아도 내 속에 붙어 있을 것을 직감했다.

이건 전초전이었다.

그를 좋아하게 될 것이 분명한 심장의 울림이었다.

***

진여원이 게이 바의 테이블 끄트머리에 앉아 독한 술을 마시고 있었다. 대학생인 그의 모습은 지금보다는 확실히 어려 보였다. 어디가 어떻게 어려 보이는지 딱 꼬집을 순 없지만 말이다.

김대영이 저거 보라며 팔꿈치로 나를 툭 쳤다. 김대영에게 울분의 감정이 생기질 않는 걸 보니 이건 꿈이었다. 꿈인 것을 인지하면서도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과거의 한 장면.

내 마음대로 흘러간다면 아마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갔을 것이다.

꿈속의 내가 진여원에게 다가가 함부로 입을 나불거리기 시작했다.

‘선배, 혼자 오셨어요?’

김대영도 이쪽으로 다가와 입을 같이 놀렸다.

‘야~ 신기하네. 석연이가 하도 오자고 졸라서 와 봤는데 게이 바 진짜 신세계다.’

김대영은 로열패밀리 문턱이 닳도록 드나드는 주제에 진여원 앞에서 일반인 코스프레를 하고 있었다. 거기다 대고 나는 한마디도 못 하고 얌전히 있었다. 진여원은 대답 없이 제 앞에 놓인 술을 연거푸 마셔 댔다.

그는 이미 술에 취해 있던 것 같았다. 그를 많이 봐 온 건 아니었지만 이렇게 취한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평소라면 아웃팅의 위험에 아는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자리를 피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마 기뻤던 것 같다. 그가 잘못 들어온 것이라면 술을 주문하기 전에 인상을 찌푸리고 가게를 나갔을 테니까.

동경하던 선배가 나와 같은 성향을 가졌을지 모른다는 사실에 조금 들떠 있었다. 그렇게 그를 보다가 문득 생각난 건 그의 연인에 대해서였다.

분명 진여원에게는 서미유라는 여자 친구가 있었다. 그녀는 그보다 몇 살 위의 연상인 우리 학교 졸업생이었다.

진여원이 원체 유명하다 보니 그의 여자 친구마저도 동기들 입에 자주 오르내렸다. 그가 졸업을 하면 바로 결혼을 할 것이라는 소문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생각 없는 말을 뱉어 내기에 이르렀다.

‘선배 여자 친구는 혹시 눈속임이었어요?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안 될 행동 같은데…….’

진여원이 잔을 내려놓고 그제야 나를 봤다.

‘잘못 찾아 들어온 건 내 탓인데.’

진여원이 잔에 남은 술을 따르고 나서 싸늘하게 말했다.

‘사람 봐 가면서 행동해.’

그는 게이가 아니란 말이기도 했다. 김대영이 진여원의 싸늘한 반응을 보더니 나를 밀쳐 내고 자신도 이성애자임을 열심히 어필하기 시작했다. 나는 당혹감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김대영의 말을 듣지도 않던 그가 잔을 다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여원이 잠깐 휘청거렸다. 반사적으로 나는 그를 잡으려 했지만, 그가 나를 더없이 차갑게 쳐다봤다.

‘둘 다 변명하지 마. 관심 없으니까.’

계산을 하고 밖으로 나가는 진여원을 김대영이 따라 나갔다. 나는 의자에 앉아 그가 비운 잔을 내려다봤다.

가만히 술만 마시던 진여원이 싸늘해진 건 내 말실수 때문이었다. 그의 여자 친구에 대해 오해하고 던진 내 말 때문에.

진여원은 제 연인이 없는 자리에서도 허튼소리가 나오는 것을 참지 않는 남자 같았다. 그와 반대로 늘 나를 부정하는 김대영으로 인해 내 신세가 더없이 처량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정말로 조금, 그의 여자 친구가 부러워졌다.

***

발부터 허리까지 시원한 바람이 이동했다. 탈탈거리는 선풍기 소리에 둔했던 감각들이 돌아오고 햇빛이 뺨에 닿았다. 나는 끔뻑이며 눈을 떴다.

커튼 틈 사이로 이른 아침 떠오른 해가 침대를 점령하고 있었다. 순간 꿈과 현실이 잘 분리가 되지 않아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피곤함이 머물러 있는 눈가를 손으로 문질렀다.

“별 꿈을 다 꾸네.”

밤새 켜 둔 선풍기를 끄고 이불에서 벗어났다. 거울에 토끼 같은 눈이 비쳤다. 찬물로 샤워하고 나면 가라앉을 정도라 걱정은 되지 않았다.

좀 이른 시간이긴 하지만 출근 준비를 시작했다. 여유가 있으니 머리와 옷에 신경을 쓸 시간도 충분했다.

드라이기를 이용해 뒷머리를 앞으로 전부 내려 이마를 가렸다. 회사 입사 후에는 어려 보이는 게 싫어 앞머리를 세팅하지 않았지만, 오늘 같은 날은 종종 대학 때의 분위기를 내곤 했다. 모습은 같지만 알맹이는 달라졌다는 걸 스스로가 확인하는 절차였다.

드라이를 해둔 민트색 와이셔츠 소매를 두 번 걷어 올리고 핏이 잘 빠진 슬랙스를 입었다. 벨트까지 맨 다음 안에 넣었던 셔츠를 슬쩍 빼냈다.

거울에 비친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내 얼굴이 건방지다고 했던 말이 생각나서였다.

“하나도 안 건방져 보이는구만, 진득이 새끼, 내 얼굴이 어때서.”

책상 서랍을 열어 작년에 사 두었던 명품제 선글라스를 챙겼다.

여름휴가 때 쓸 생각으로 사 두었는데 체일 슈즈 기획 때문에 휴가는커녕, 시착만 해 본 선글라스였다. 가방 안에 선글라스를 통째로 집어넣었다. 외근 나갈 때나 테니스 칠 때 사용하면 딱일 듯했다.

제법 가격이 나가는 것이라 아깝기는 한데, 아꼈다 똥 되는 것보다는 낫지.

가방을 어깨에 메고 신발을 골랐다. 상품으로 받은 운동화를 신고 나갈까 하다 말았다. 자주 신으면 흰 운동화라 금세 더러워질 테니까.

스니커즈로 대신 신고 하이탑 운동화는 한번 쳐다만 봤다. 그러다 갑자기 맹렬한 분노가 치솟았다.

그때는 관심 없다며, 왜 지금 나한테는 관심을 가지냐. 물론 나도 그때는 진여원을 좋아한 건 아니었지만…….

괜히 꿈속의 진여원과 지금의 진여원이 겹쳐 보이는 바람에 마음이 싱숭생숭해졌다.

나한테 차갑게 말을 뱉은 건 대학 시절 진여원인데 마치 방금 전의 일만 같아 가슴이 저릿했다.

집을 나와 버스를 타고 가는 동안에도 뒤숭숭했던 꿈이 쉽게 잊히질 않았다. 오늘따라 버스는 왜 이리 한산한지 홀로 고독을 씹을 수 있을 만큼 고요했다. 그래서인지 생각하기조차 싫은 기억들이 몽글몽글 떠올랐다.

게이 바를 잘못 찾아온 진여원을 마주친 뒤 얼마가 지났을 쯤 내가 게이라는 소문이 학교에 퍼지기 시작했다. 김대영은 분명 진여원이 소문을 낸 거라고 말했고, 당시 정황상 의심 가는 사람도 진여원뿐이었다.

물론 지금의 나였다면 첫 용의자로 김대영을 지목했을 것이다. 순진했었지. 그걸 이용한 건 김대영이었고.

회사에서 거리가 좀 있는 정류장에서 내려서 신발을 구겨 신었다. 일찍 나온 탓에 평소와 다른 노선을 탔더니 아니나 다를까 걷는 내내 뒤꿈치가 따끔거렸다.

스니커즈를 직직 끌며 휴대폰을 꺼냈다. 기분이 엉망일 때는 아버지에게 전화하는 것만큼 좋은 처방도 없었다. 솔직히 그날 아버지가 하려다 말았던 말도 궁금했다.

오늘은 밭에 나가 계신지 집 전화 신호가 한참이나 갔다. 하는 수 없이 아버지 휴대폰으로 다시 전화를 연결했다.

[너는 일하는 시간에 허구헌 날 전화질이냐.]

다짜고짜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귀청 떨어지겠네. 아직 출근 전이야. 아버지 전화를 왜 엄마가 받아.”

[아부지 전화를 내가 받으면 안 되는겨? 어차피 내 남자여.]

“그건 그렇지. 그럼 아버지는?”

[아이구야 눈꼴시러워 죽겄네. 그놈의 아부지, 아부지 타령이야. 잠깐 바테 나갔으니까 점심때나 전화혀. 회사 바꿨때메 용돈은 언제 줄겨?]

“안 그래도 오늘 부치려고 했어. 다음 달에 갈 테니까 맛있는 거나 많이 해 놔.”

[알았으니까, 오기나 혀. 그리구마려. 아부지 업스니까 묻는 거지만……. 너 징말 여자한테는 진짜 관심이 없는겨?]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해마다 한두 번씩 묻는 말이었다. 그때마다 내가 어떤 감정으로 대답을 하는지 아마 엄마는 이해하지 못할 거다.

“왜, 엄마 친구 아들 결혼식이라도 다녀왔어?”

[이잉, 그 며늘 아가, 참 이쁘드라. 안 그래도 너 선자리 알아봐 준다 했는데 됐다 혔어.]

“그런 얘기는 다음 달에 만나면 해. 늦었어, 나 이제 회사 들어가 봐야 돼.”

아직 회사까지는 거리가 있었지만 일부러 거짓말을 했다. 엄마는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그려. 내가 괜한 소리 했으니까 신경 쓰지 말구.]

“됐어. 내가 미안하지.”

전화를 끊고 주머니에 휴대폰을 넣었다.

내가 연애를 하지 않는 이유 중에 하나는 죄책감 때문도 있었다.

결혼식을 다녀올 때마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아버지 역시 내심 부러워하고 계실 거였다. 그 집 석연이는 언제 결혼하나? 라는 말에 그저 허허 웃고 마실 테고.

여태껏 애인 만나서 쓸 돈 부모님께 용돈 한 푼이라도 더 드리는 게 낫다고 생각해 왔다. 만일 내가 게이인 것을 들키지 않았다면 죄책감은 지금보다 적었을지 모르겠다.

저기 잎이 무성하게 솟아 회사 건물을 둘러싸고 있는 나무들이 보였다. 직직, 스니커즈의 밑창이 닳는 소리도 들렸다.

회사 오솔길 통로를 따라 걷다가 다시금 분노가 차올라 멈춰 섰다. 아웃팅만 안 됐어도 부모님은 모르셨을 테고, 못난 아들놈 때문에 아파하지도 않으셨을 것이다.

발치에 놓인 작은 돌멩이를 뻥하고 차려 했다. 발이 엇나가 구겨 신고 있던 신발이 기세 좋게 하늘로 뻗어 올랐다. 신발이 다시 내려오길 기다리는데 바닥으로 자유 낙하할 생각을 안 했다.

고개를 들어 신발이 날아간 방향을 봤다. 얼기설기한 나뭇잎 위에 신발이 걸려 있었다.

“하, 이제는 별게 다…….”

일찍이 신발 멀리 던지기의 신동으로 불렸던 나지만, 이번만큼은 기쁘지 않았다. 깽깽이로 다가가 그 밑에서 점프를 뛰었다.

신발이 걸린 무성한 나뭇잎은 손에 닿을 듯 말 듯한 위치라 한 발로는 어림도 없었다. 두 다리로 서서 또다시 뛰어 올랐다.

“아침부터 진짜!”

감질나게 손끝에 닿기를 반복했다. 들고 있던 가방을 휘둘러도 소용없었다.

“석연 씨 뭐 해?”

잠기운이 충만한 곽일영이 인기척도 없이 나타났다. 나는 말 없이 손가락으로 신발이 걸린 나뭇가지를 가리켰다. 곽일영이 인상을 쓰고 올려다보더니 헉, 하는 소리를 내뱉었다.

“저게 왜 저기 올라가 있어?”

“글쎄요.”

“내가 도와줄까?”

제자리에서 점프를 퉁퉁 뛰는 곽일영이 그리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았다. 키도 나보다 한 뼘이나 작으니.

“에이, 안 되겠다. 포기하자.”

딱 세 번의 점프를 시도한 뒤 곽일영이 고개를 저었다.

“먼저 들어가 보세요. 조금만 시도하면 될 것 같네요.”

곽일영은 마의 구간이 코앞인 만큼 기운이 나지 않는지 나를 두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아침을 안 먹었더니 아무래도 당분이 부족해서 힘이 나지 않는 것 같았다.

가방에서 꺼낸 양갱을 입에 넣고 우걱우걱 씹었다. 이빨로 긴 양갱을 문 채로 흡! 하고 뛰어올랐다.

“미치겠네.”

아까보다는 더 많이 뛴 것 같은데 당최 손에 잡히질 않았다.

저 뒤에서부터 달려와서 점프를 하자 또 아슬아슬하게 손 끝에 닿고만 말았다. 차라리 엄청 높아서 엄두나 안 나면 모를까 감질나게 만드니 포기가 안 됐다.

고개를 계속 쳐들고 있으니 뒷목이 뻣뻣하게 아파져 왔다. 땀까지 나는 바람에 씩씩거리며 바닥에 쭈그려 앉았다.

신발을 노려보며 남은 양갱을 먹는데, 시야에 시원한 민트색 셔츠가 비쳐졌다. 쳐들고 있던 고개를 조금 내리자 진여원이 여상하게 나를 보고 있었다.

심장이 두근두근거렸다. 아니 지끈거려서 조금 아픈 것도 같았다.

“안녕하십니까, 사장님. 오늘은 걸어서 출근하셨나 보네요.”

“박석연 씨는 오리걸음으로 출근했나 본데.”

“설마요.”

양갱 포장지를 가방에 쑤셔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필 왜 나랑 같은 민트색 셔츠를 입고 난리야, 비교되게시리. 그보다 진여원 키 정도면 내 신발에 닿을 것도 같았다.

“사장님 혹시 점프…… 잘하십니까?”

점프라는 말에 진여원이 시선을 위로 올렸다. 그의 눈이 내 스니커즈 신발에 머물렀다. 왠지 진여원이 웃고 있는 것 같았다.

“신발이 주인을 빼닮았네.”

“제 신발이 왜요.”

“도망가잖아.”

“…….”

키스하고 나서 도망치듯 나온 건 맞는데 굳이 신발에 비교하냐. 진여원이 팔짱을 끼고 나를 쳐다봤다. 저 꼴을 보아하니 도와줄 생각 따윈 눈곱만큼도 없는 것 같았다.

당도 충분히 보충했겠다, 한 번에 신발을 잡아 당당하게 걸어가고자 하는 기세가 불쑥 솟아올랐다. 나는 잠깐 사이에 진여원을 흘끔거렸다.

꿈에서 내게 차갑게 응수했던 선배의 느낌과는 사뭇 달랐다. 그는 그 당시 여자 친구를 지금처럼 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 눈이 세모꼴이야.”

안 도와줘서 삐쳤냐고 묻는 듯했다.

“꿈속의 사장님 때문에요.”

어차피 꿈속에서 어떻게 나왔는지는 말할 생각이 없기에 고민 없이 말해 버렸다. 입술을 삐죽거리면서 제자리에서 점프를 뛰어 올랐다. 신경질적으로 손을 휘두르자 이파리에 슬쩍 닿았다.

조금만 더 높이 뛰면 될 것 같은데…….

몇 발자국 뒤에서 기세 좋게 달려와서 손을 뻗고 착지했다. 무게가 앞으로 쏠리는 바람에 손을 빙빙 저어서 간신히 균형을 유지했다.

치장하고 나온 머리도 이미 엉망이 되어 있었을 게 틀림없었다. 나는 하는 수없이 바닥에 내려놓은 가방을 어깨에 멨다.

구경만 하던 진여원이 그제야 내 쪽으로 다가왔다. 꼭 키스하던 때처럼 가까워진 터라 온몸의 맥이 펄떡펄떡거렸다.

“왜요?”

시큰둥하게 내뱉자마자였다. 진여원이 내 종아리부터 안아서 나를 번쩍 들어 올렸다.

으악!

새된 소리를 지르며 그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평소 보던 시선보다 시야가 훨씬 높아져 눈만 깜빡거렸다.

“뭘 먹고 이렇게 무거워.”

“평균 몸무게보다 적은데요.”

“신발이나 꺼내.”

팔을 쭉 올리자 신발 끈이 간신히 손에 걸렸다. 그걸 그대로 끌어 내렸다. 신발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동시에 그도 나를 안은 팔에서 힘을 뺐다.

주르륵 미끄러지듯 그의 몸을 타고 내려왔다. 입술이 아슬아슬하게 그의 이마를 스쳤다.

쿵. 쿵. 쿵. 꼼짝없이 그를 올려다봤다. 진여원도 슬쩍 고개를 내려 내 눈을 쳐다봤다.

“안 피해?”

설마 키스하려나 싶어 눈을 주변으로 굴렸다. 지나가는 회사원은 없지만 지금 여기서……?

나는 긴장한 채로 웅얼거렸다.

“……피하면 불타오르신……다면서요.”

“그랬지, 그런데.”

그의 손이 내 앞머리에 와 닿았다.

“이건 이거대로 고문이네.”

내 머리카락을 사락거리고 떠난 진여원의 손에는 이파리 하나가 들려 있었다. 진여원이 나를 지나쳐 먼저 걷기 시작했다.

나는 그의 민트색 셔츠를 멍하니 쳐다봤다. 이마에 맺혀 있던 땀이 또르륵 콧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간질거리는 땀방울도 닦지 않고서 눈을 위로 올렸다.

진여원이 나를 번쩍 들어서 높이 올려 주었던 그 시야를 다시 한번 느껴보고 싶었다. 신선함을 넘어 시원했었다. 그의 자전거 뒤에 탔을 때와 같이 한 번으로는 끝내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다.

그때보다 날씨는 더 더워졌고, 향하는 마음 또한 열기에 비례해 올라갔다.

“거참, 왜 길을 막고 그러나.”

이제 출근하는 허준성이 내게 투덜대는 소리도 저 세상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떨어뜨린 신발을 신으려고 하자 내가 또 허준성의 앞길을 막았는지 놈이 콧김을 마구 내쉬었다.

“이봐, 박석연 씨. 아침부터 나랑 장난해?”

스니커즈를 구겨 신고 나서야 허준성을 돌아봤다.

“제 얼굴, 지금 어떻습니까?”

“뭐, 뭐야.”

허준성이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러다 뒤꿈치가 박힌 돌에 걸려 엎어질 뻔했다. 꼴사납게 비틀거린 허준성이 도리어 나한테 성질을 냈다.

“썅! 게이 새끼 때문에 회사 다니기 싫어 죽겠네!”

그의 욕설에 나갔던 혼이 다시 제자리를 찾으며 정신이 맑아졌다. 손을 탁탁 털고 떨어뜨렸던 가방을 다시 들었다.

“그럼 그만두든가요. 아침부터 왜 시비입니까?”

정색하고 표정을 굳히는 나를 허준성은 얼이 빠져서 쳐다봤다. 곽일영을 뭐라고 할 것도 없었다. 허준성이 본다면 나 역시 조울증 버금가는 환자로 비춰졌을 테니까.

구겨 신은 스니커즈 안의 발이 한증막처럼 뜨겁게 달아올랐다. 어서 사무실로 돌아가 시원한 삼선 슬리퍼로 갈아 신고 싶었다.

연애를 하지 않는 이유고 나발이고, 진여원의 앞에서는 전부 무용지물이 되어 가고 있었다.

밀어내고자 하는 이유보다 상대방이 더 좋아지면, 상황은 그것으로 게임 끝이었다.

진여원. 진여원. 뱅글뱅글 그의 이름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예감이 불길하기 그지없었다.

***

불길한 건 비단 내 마음뿐만이 아니었다. 사무실에 들어오자마자 이재화에게서 믿기지 않는 소식을 접해야 했다.

‘섬머 레인데이’에 대해서였다.

섬머 레인데이는 세노스에서 출시한 레인슈즈 기획 이름이었다. 8월 1일자로 한 달간 한정 판매가 되는 레인슈즈들이 공개 버전과 미공개 버전으로 나눠져 있었다. 그 소식에 뒤집어진 건 우리 부서뿐만이 아니었다. 2층 전원이 충격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설마 싶어 인터넷에 공개된 슈즈 디자인을 보는데 우리와 겹치는 것은 없었다. 세노스에서 독자적으로 선보이는 기획 같았다. 다만 레인슈즈라는 기획이 우리와 겹칠 뿐이었다.

각 부서의 팀장들이 11시를 기점으로 3층 회의실에 모여들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들 역시 일반 사원과 같이 카오스 상태였었다. 시끌시끌하게 들끓던 소란이 종식된 건 점심시간이 되기 바로 전이었다.

긴 회의 끝에 회의실에서 내려온 팀장들의 얼굴은 생각한 것보다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산뜻해 보였다. 이재화에게 괜찮은 거냐고 물어도 그저 걱정 말라는 대답만 돌아왔다.

진여원이 나를 따로 불러 신데렐라 구두를 선보이고 싶냐고 했던 것도 마음에 걸렸다. 그는 이미 세노스의 선출시를 예상을 하고 있던 건가 싶다가도 설마 했다.

각 구두 회사는 연계되어 있는 것 같으면서도 서로 등에 칼을 꽂을 준비가 된 기업체들이었다. 기획 같은 건 기밀 유지를 바탕으로 하는 게 기본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번 기획은 대놓고 시작했었지. 뭔가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나는 후 숨을 길게 쉬고 책상에 널브러져 있는 곽일영을 쳐다봤다. 물 먹은 천처럼 흐물흐물해 보일 지경이었다.

이재화는 최근 썸이 생긴 윰 옴므팀 여직원과 점심을 먹으러 나간 터였다. 곽일영이 하도 입맛 없어 하기에 사무실에서 같이 군것질로 끼니를 대신했다.

일이 터지고 나서 재운 선배에게도 문자를 넣었지만, 몇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 답이 오지 않았다.

“곽 대리님.”

“……으응.”

대답하기 싫은데 억지로 한 티가 풀풀 풍겼다.

“너무 그렇게 늘어져 있지 말고 테니스라도 한판 하러 올라가실래요?”

“더워.”

“이럴 때일수록 몸 움직이면 좋잖아요.”

“똥 같은 소리 하지 마.”

똥 모형에 이어 똥 같은 소리라니, 황당해서 웃음만 나왔다.

점심시간에 맞춰 청소원이 복도를 청소하는지 띠이이이잉- 하는 대형 청소기 소리가 들렸다. 정말로 띠잉한 건 청소기가 아니라 내 머리였다.

만약 세노스가 선출시를 하면 아무래도 후출시를 하는 우리 회사가 타격을 입을 텐데, 금액은 내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그럼 그 손해를 고스란히 진여원이 안아야 할 텐데…….

내 주제에 진여원을 걱정하는 것도 우습지만 행여나 자신감 넘치는 진여원의 자존심이 추락하는 것은 보고 싶지 않았다. 나는 띵 하고 울리는 관자놀이를 손으로 감싸 쥐었다.

“뭐가 띵이야, 씨발!”

곽일영이 몸을 번쩍 일으키더니 성질을 버럭 냈다. 곽일영에게 독심술이라도 있나. 나한테 한 얘기인 줄 알고 놀라 그를 봤다. 곽일영은 밖에서 들리는 청소기 소리를 두고 한 말이었다. 여름이라 그런지 전에 비해 마의 구간이 더 예민해진 것 같았다.

“곽 대리님, 수면실 가서 한숨 자고 오세요. 거긴 방음 되니까.”

“으응 미안, 그럴게. 이따 깨워 줘.”

곽일영이 비척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가는 그가 사무실 문을 닫자마자 회사 메신저를 열었다.

[진득이] 라고 저장한 문구에 on 표시가 떠 있었다. 새 창을 켜 놓고는 글을 쓸까 말까 한참을 고민했다.

힘내세요. 아니면 괜찮으세요?

어떤 말을 써야 할지 도저히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지금으로서 가장 좋은 건 그냥 모른 척하는 걸까. 지우고 쓰는 일을 반복하다가 결국에 딱 한 문장을 보내고만 말았다.

[도전 신청, 받아 주시겠습니까.]

엔터를 치고 나서 후회의 몸부림을 쳤다. 어떤 또라이 직원이 사장이 빡돌아 있는데 도전 신청을 하고 앉아 있냐 이 말이다. 그래도 내가 사장인 진여원과 개인적으로 만날 자리는 테니스장뿐이었다.

창을 바라보고 있는 게 괴로워 얼른 꺼 버렸다. 그랬더니 반짝거리며 다시금 새 창이 떴다.

[옥상.]

답변을 보자마자 안도의 한숨이 흘렀다. 대답은 여전히 짧지만 그게 또 그답다 생각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휴대폰과 선글라스를 챙겼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옥상으로 올라가자마자 유리 통로 너머를 쳐다봤다. 아직 진여원은 보이지 않았다.

옥상에 먼저 자리를 잡고 그늘진 곳에 털썩 앉았다. 사실 오전에 꾼 꿈만 생각하면 진여원에게 이유 모를 얄미움이 생기긴 했다.

지금의 그가 그때처럼 나를 투명인간 취급하는 건 아니지만…….

군더더기 없는 발소리가 들리는 바람에 고개를 들었다. 어두운 계열의 트레이닝복을 입은 진여원이 테니스 채를 손에 들고 있었다.

얼굴을 보니 핼쑥하지도 타격을 입어 심기가 불편해 보이지도 않았다. 그냥 언제나처럼의 진여원이었다.

“오셨습니까.”

그늘에서 빠져나와 한여름 태양 앞에 서자 정수리가 엄청 뜨거워졌다.

“저…… 근데 말이죠. 사장님, 세노스……말입니다.”

가만히 내 말을 듣던 진여원이 내게 테니스 채를 내밀었다.

“나보고 소시오패스라며.”

“예?”

진여원의 말뜻을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확실한 건 그가 더 자세히 이야기해 주지는 않을 거라는 점이었다.

“자세히 물어봐도 됩니까?”

“경기부터.”

“혹시 손해는…….”

“구세군에 백 원 한 푼 안 넣을 사람이라면서.”

이쯤 되니 걱정한 게 무색해졌다.

오히려 평소보다 더 기고만장해 보이는 바람에 속으로 음침한 자식, 세 번 연달아 말하고 가져온 선글라스를 얼굴에 썼다.

나는 테니스 채를 휘두르며 코트 안으로 들어갔다. 반대편 코트로 간 진여원이 나를 빤히 쳐다봤다.

선글라스를 가져오길 잘했지. 최근 아이컨택 당할 때마다 눈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몰라 당혹스러웠다. 분명 동공이 흔들릴 때도 있을 것이고.

그나마 지금은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 숨통이 조금 트였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이 선글라스는 아무 의미도 없는 겁니다.”

안경을 쓸 때 작업하냐는 말을 들은 나였다. 미리 보호막을 쳐 두는 게 옳았다. 진여원이 테니스 채를 바로잡으며 말했다.

“어련하시겠어.”

웃는 걸 보니 비꼼은 아니었다.

“저번에 제가 졌으니 서브는 제가 넣겠습니다. 돈 거실 겁니까?”

“박석연 걸어.”

“저 물건 아닌데요.”

투덜거리는 와중에도 선글라스에게 다시 한번 고마웠다. 까만 코팅이 아마 흔들린 내 동공을 가려 주었을 것이다.

나는 지갑에서 5만 원을 꺼내 네트 기둥 밑에 껴 두었다. 진여원도 지갑을 열더니 나와 똑같은 신사임당을 꽂았다. 사실 더 걸고 싶은데 잃을까 봐 소심해졌다.

치사하지만 시작 소리도 안 하고 공을 위로 들어 올려서 그를 향해 강서브를 날렸다. 모서리로 날린 터라 진여원이 달려가 내 공을 받아쳤다. 그간 재운 선배와의 특훈 아닌 특훈이 있던지라 첫날보다는 치기 수월했다.

진여원의 공을 받아치려 하는데 주먹만 한 공이 위협적으로 내 얼굴을 향해 날아왔다. 반사 신경을 최대한 올려 얼굴을 옆으로 피했다. 그의 실수겠거니 하고 내 쪽에 1점을 추가했다.

내가 서브를 넣자마자 진여원이 또 내 얼굴을 향해 공을 날렸다. 2점을 추가하면서부터 속이 부글부글했다. 한 번만 더 얼굴로 날리면 이건 100퍼센트 고의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내 서브를 과감히 내 얼굴로 내리쳤다. 테니스 채를 바닥으로 내리고 언성을 높였다.

“자꾸 치사하게 치실 겁니까? 차라리 전에 치던 대로 치시죠!”

그물 네트 앞으로 다가온 진여원이 말했다.

“내가 어떻게 쳤는데.”

“모서리요!”

“하 이사랑 너랑 같아?”

할 말 없어지게 만드는 데는 아주 도가 튼 인간이었다. 그래도 지기는 싫었다.

“이러다가 제 얼굴 맞아서 다치면 어쩔 겁니까? 그리고 이 선글라스 엄청 비싼 겁니다.”

어마어마한 속도로 날아오는 테니스공에 맞으면 선글라스는 분명 반 토막이 날 것이다. 그래서 몸을 더 사리게 되는 것도 있었지만.

“잘됐네. 벗은 게 더 취향이거든. 벗어.”

선글라스를 벗으려 하다가 진여원의 말 때문에 말았다. 꿈 때문인지 그에게 오기를 부리고 싶어진 탓이었다.

그럼 대학 때는 취향이 아니었나 보지? 건방진 얼굴이 취향이면 영영 가려 주지.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테니스 채를 다시 그러쥐고 나도 그의 얼굴을 향해 공을 날렸다. 안경을 쓰지 않은 진여원은 거리낄 것 없다는 듯 공을 쳐냈다. 다시금 얼굴로 날아오는 것을 피하려다 몸이 비틀비틀거렸다.

성질이 나서 계속해서 나도 그를 맞추는 데에 온 신경을 쏟았다. 피구도 아니고 살인 테니스가 따로 없었다.

“타임! 잠시만요!”

숨을 씩씩거리며 얼굴에 가득한 땀을 쓸어내렸다. 시작할 때부터 욱신욱신거린다 했더니 뒤꿈치가 완전히 나가 버린 것 같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흰 운동화를 신고 올 걸 그랬다. 오른쪽이 왼쪽보다 더 아파 한쪽 발로 깽깽이를 뛰어서 의자로 향했다.

플라스틱 의자가 녹아내릴 정도로 햇빛에 달궈져 있어 앉은 엉덩이가 불타는 것 같았다. 진여원이 테니스 채를 내려놓더니 신발을 벗는 내게로 다가왔다.

내가 까진 뒤꿈치를 보는 동안 그는 의자에 앉지 않고 내 밑에 털썩 앉았다. 목젖을 울리며 시원하게 음료를 마시는 모습에 내 목도 같이 꿀꺽 넘어갔다.

눈동자만 옆으로 굴려 그를 봐도 선글라스를 쓰고 있으니 걱정할 것 없었다. 진여원이 내게도 포카리스웨트를 내밀었다. 그가 마시던 거였지만, 개의치 않는다는 걸 티내기 위해 입을 대고 마셨다.

진여원이 갑자기 내 발목을 턱 쥐었다. 자신 쪽으로 끌어당기는 바람에 엉거주춤 의자에서 벗어났다. 순식간에 진여원의 앞에 마주 앉은 자세가 되어 그에게 발을 맡긴 꼴이 됐다.

그가 까진 뒤꿈치를 매만졌다. 따끔따끔 쓰라리면서도 언뜻 쾌감을 닮아 있는 감각에 놀라 버렸다.

천천히 그리고 부드럽게 내 발을 훑은 그가 나를 쳐다봤다.

“신발은 신을 만해?”

“아니니까 이 꼴이 났죠.”

“누가 이거 말해.”

진여원이 스니커즈를 괄시하듯 굴었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게 직접 만든 하얀 운동화임은 알았다.

“그건……. 깔창 빼면 신을 만합니다.”

“그 우스꽝스러운 안경 좀 벗지?”

선글라스를 안경이라 말하는 진여원에게 오히려 보란 듯이 코 부분을 꾹 눌렀다.

“이러면 제 매력이 반감될까 싶어서요.”

진여원이 대답 없이 내 얼굴을 봤다. 갑자기 막을 새도 없이 진여원이 내 선글라스를 벗겨 내렸다. 휙 하고 선글라스가 코트 안으로 밀려났다.

“저게 얼마나 비싼 건지 아시면,”

“큰일이야.”

그가 내 말을 잘라 냈다. 스코어로 보자면 내가 이기고 있는데 무슨 큰일.

네트의 팔락거리는 두 장의 신사임당을 확인했다. 그러자 진여원이 꾹 내 발뒤꿈치를 눌렀다. 앗! 짧은 신음을 내지르며 인상을 구겼다.

“점점 좋아져.”

그의 말투는 여느 때와 같았지만 다르기도 했다. 언제나 똑바로 내게 부딪혀 오는 진여원이었지만, 지금만큼은 당황을 숨길 수가 없었다. 진심의 무게가 내게 와 닿았기 때문이었다.

드러난 맨눈에 그의 시선이 얽혀 들었다.

그는 마치 꿈은 꿈일 뿐이고, 현실은 지금이라는 듯했다. 뜨거운 바람이 불어와 슬쩍 눈을 찌푸렸다.

나는 입술을 안으로 말아 버렸다. 왜인지 다시 그의 뺨에 코를 문대고 싶어졌다. 나는 지금 누구보다 나 자신의 상태를 잘 알았다.

게임 오버의 신호가 깜빡깜빡거리고 있었다.

“사장님은…….”

주륵, 턱을 타고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그것을 손등으로 밀어냈다.

“고민 안 되세요?”

이성애자인 사람이 내게 감정을 품기까지의 고민이 없었을까 싶었다. 물론 그의 말대로 끌리는 건 어쩔 수 없겠지만…….

이마에서 땀이 흘러내려 와 눈이 아릿했다. 눈을 비벼 쓰라림을 없애는 내게 진여원이 말했다.

“내 감정에 태클 걸고 싶어서 그래?”

“조금은요.”

진여원이 좋아지는 것만큼 두려웠다. 밀어내고 밀어내도 부메랑처럼 돌아와 상처를 입는 사랑은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았다.

난 이렇게 고민 중인데 당신은 참 쉬운 것도 얄미웠다.

꿈을 꾸고 일어나자마자 화가 났던 건 진여원에게 섭섭해서였다. 과거의 일임에도 속상해진 이유는 하나다. 그날에는 없었던 그를 향한 애정이 생겨 버렸기에.

그래서 꿈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야속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당신이 비글이라 말하는 지금의 내가 있는 건 그때의 시절을 거쳤기 때문이었다.

같은 박석연이지만 아직 내 안에는 상처받고 움츠려 있는 내가 존재했다. 그래서 쉽게 다가온 사람에게는 결코 마음을 열 수가 없었다.

쉬운 만큼 나를 떠나는 것도 쉬울까 봐.

“사장님은 뭐든지 다 쉬우신 것 같아서요. 일도 연애도.”

“쉬워.”

내 말을 선뜻 수긍하는 진여원을 허탈하게 바라봤다. 그의 얼굴엔 차가운 기색 하나 머물러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건 뜨거운 태양의 열기 때문이 아니었다.

입 안에 촉촉하게 머물러 있는 음료의 향을 느낄 새도 없이 그가 말했다.

“너만 빼면.”

그 순간 바람이 솔솔 불어왔다.

동시에 마음이 솔래솔래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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