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8/18)

8장

문제가 생겼을 때 피하는 게 능사는 아니었다. 사랑받기 위해 살을 뺐을 때도, 옥상에 올라갔을 때도 사태를 피하지 않으니 결과물이 로또 공처럼 탁하고 나왔다.

전자는 건강이 좋아졌고 후자는 삶의 지혜를 깨달았다. 인생사 로또와 다를 바가 없었다.

다만 토요일 밤 8시 45분이면 결과가 발표되는 로또가 삶보다 명확하다는 차이점은 있었다.

로또는 마흔다섯 개의 숫자뿐이지만 삶의 변수는 무한대였다. 입사했을 때만 해도 진여원이 그렇게 증오스러울 수가 없었는데 마음이 손바닥 뒤집듯 바뀌어 버리니 세상에 이런 일이다.

“나는 못된 여자가 좋아.”

“예?”

구두 샘플을 훑어보던 곽일영이 내게 뜬금없는 말을 건넸다.

“나쁜데 발이 예쁜 여자면 최고야.”

마의 구간을 지난 곽일영은 본연의 엉뚱한 상태로 돌아와 있었다.

곽일영이 디자인한 슈즈는 토오픈 펌프스 힐로 은색과 블랙 징이 장미 가시처럼 박혀 있었다. 매끈한 에나멜 재질에 박힌 징은 섹시하지만 위험한 분위기를 풍겼다.

레인슈즈 기획이 중단되고 이어 내려온 기획은 ‘한여름 밤의 꿈’이었다. 물론 셰익스피어의 소설과는 다른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

실질적 기획 명은 ‘Fairy or Femme Fatale’ 디자인부 사이에서는 ‘3F’로 불리었다.

선녀와 악녀를 주제로 하여 이미지가 극과 극인 구두를 선보일 예정이며 광고 모델은 한 사람으로 동일했다. 즉, 한 여성이 착한 여자와 나쁜 여자의 이미지를 동시에 선보이는 형식이었다.

이번 기획은 특별함이 떨어지던 레인슈즈와는 다르게 여성들의 심리를 파고든 고도의 전략이 돋보였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하루는 악녀가, 또 하루는 선녀 같은 캐릭터가 되고 싶은 욕망이 잠재해 있는 법이다.

페어리 & 팜므파탈은 여성이 원하는 두 매력을 충족시켜 줄 수 있는 기획이었다. 처음부터 3F로 갔으면 됐을 것을 왜 진부한 레인슈즈를 진행시켰는지 여전히 아리송했다.

창가 앞자리의 이재화가 도식지를 오리며 씩씩거리고 있었다. 다른 사람의 디자인을 대신 오려 주는 것인지 연방 투덜거렸다.

“저……. 과장님.”

오만상을 보니 괜히 말을 붙였나 싶었다. 마의 날인 곽일영보다 심기가 훨씬 불편해 보였다.

“이건 왜 이렇게 만들어 가지고는! 짜증 나 죽겠네.”

이재화가 가위를 지그재그 놀리다가 탕 책상에 내려놓았다.

“불렀어요, 석연 씨?”

“그거 제가 자를까요?”

“아니에요, 내가 해야죠.”

“곽 대리님이 디자인하신 건가 봐요.”

곽 대리가 순진한 눈망울을 반짝였다.

“나 아닌데?”

“어제 내가 그린 겁니다. 거지 같이 그려 갖고는, 후.”

이재화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자기 자신을 질타하는 바람에 위로조차 할 수가 없어졌다.

나는 다시금 가위를 잡는 이재화에게 물었다.

“레인슈즈 기획, 위에서 별말 없었어요?”

“8월 초까지는 함구하라는 명이 떨어졌거든요. 지금은 말 못 해요.”

예, 대답하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직원은 몰라도 된다는 말에 삐칠 것도 없었다. 하긴 언제는 안 그랬나. 진여원도 레인슈즈에 대해서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혹시 제 자존심 상할까 봐 괜한 허세를 부린 게 아니었을까 생각하다가도 손해는 안 본다는 말이 착각을 막아 주었다.

곽일영이 기차모형 연필깎이로 심이 뭉툭한 연필을 깎았다. 시작된 더위에 가을 상품을 그려 대고 있으니 머리가 답답했다.

나는 연필깎이 구멍에 연필을 넣었다가 뺐다가 하며 장난만 쳤다.

“석연 씨 욕구 불만이야?”

곽일영이 내 연필을 가리켰다.

“왜 그렇게 쑤셔 대.”

여전히 가위질을 하던 이재화가 곽일영의 야한 발언에 관심을 보였다.

이재화와 같이 생활해 오는 동안 확실히 알게 된 건 점잖은 얼굴에 비해 생각보다 야한 농담을 즐긴다는 것이었다. 물론 대화에 끼어들지 않고 듣기만 하면서 실실 웃는 일이 태반이었다.

내 입에서 뭔가 야한 말이 나올 줄 알고 기대하는 눈치였다. 얼마든지 이재화를 충족시켜 줄 수 있었지만, 오늘은 그럴 만한 기분이 아니었다.

이건 다 진득이 때문이었다.

진여원이 못 들어오게 온몸으로 단단히 문을 버티고 있었더니 그가 나보다 더 센 힘으로 문을 마구 밀어 댔다.

버티다 못해 약간 힘이 빠지는 바람에 슬쩍 문이 열렸는데, 진여원은 그 상태에서 더 밀지를 않았다. 그렇다고 도로 닫는 것도 아니었다. 그게 지금 우리의 상태였다.

물론 내가 활짝 여는 방법도 있었다. 그러나 주저함은 나를 그 자리에 고정시켰고, 빠끔히 열린 문틈 새로 진여원을 보는 것밖에 하지 못했다.

겉보기로 감정적 약자는 진여원이었다. 그는 감정을 보여 줬지만 나는 보여 주지 않았으므로. 그런데도 실질적 약자는 나인 듯했다.

만일 내가 다가갔다가 행여 그가 흥미를 잃게 되면 내가 받을 데미지는 상상 초월일 것이다. 게다가 본래 진여원과 나의 성향은 결코 타협될 수 없는 성질이었다.

내가 주저하게 된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잠시 진여원이 길을 헤맨 것일까 봐 말이다.

“석연 씨 휴대폰 울린다.”

곽일영이 책상에 올려 둔 내 휴대폰을 툭툭 건드렸다. 디자인 종이에 박고 있던 얼굴을 들었다.

손으로 꾹꾹 눌러 보니 류준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원래도 연락을 자주 하는 사이가 아니기에 무슨 일인가 싶었다.

[형, 그거 진짜 또라이야.]

무슨 소린지 바로 이해할 수가 없었기에 잠시 밖으로 나왔다. 인적이 드문 화장실 복도까지 이동하고 나서야 류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녀석은 일을 하고 있는 중인지 주변이 시끌시끌했다.

“류준아, 또라이라니 대체 무슨 소리야?”

[형 전 남친인가, 전에 로열에서 봤던 새끼 있잖아. 그거 말이야.]

김대영을 말하는 거였다.

“그 새끼가 왜.”

[우리 소속사는 어떻게 알았는지 회사 메일로 형이랑 내 사진 날아왔었대. 전에 형네 회사로 보낸 거랑 같은 거 같은데.]

“뭐! 언제?”

[날아온 건 한참 됐다는데 사장이 어제 입국해서 깨진 건 오늘이야.]

입이 떡 벌어졌다. 그 미친놈이 이혼하더니 정신을 안드로메다로 가출시킨 게 분명했다.

“괜찮아? 넌 문제없는 거야?”

[상관없어. 그런 건 소속사가 알아서 막아 주니까.]

“진짜 미안하다. 괜히 나 때문에 엮여서…….”

[뭘 미안해. 형이나 조심하라고. 나야 괜찮은데 지금 회사에서 형 또 잘리면 어떻게 해.]

지금까지 말이 나오지 않은 걸 봐선 우리 회사로 보낸 것 같지는 않았다.

“류준아. 너 전에 그 새끼 사진 찍었던 거 남아 있지?”

[그때 형 가고 나서도 몇 장 더 찍었지. 왜?]

“그거 나한테도 좀 보내 줘라.”

[에이, 같이 똥통에 들어가진 말지?]

“그 새끼 회사로 보낼 건 아니야. 일단은 가지고 있어 보게.”

[오케이, 알았어. 바로 보낼게. 그리고 그 새끼 만나면 똥구멍 조심하라고 해. 시발 놈이 송장도 뻗을 자리 살피는데 아무 데서나 처눕네. 덕분에 사장 기분 풀어 주느라 내 좆 존나 고생했다고.]

“너……. 사장이랑도 자냐.”

주변을 살피며 조용히 속닥거렸다. 세상에 사장과 썸이 나는 경우가 드문 건 아닌가 보다.

류준은 사장이랑 자고 난 키스하고…….

[사장이 내 좆을 좀 좋아하거든. 나 들어가 봐야 돼. 보내 놓을 테니 이따 확인해 봐.]

“그래, 고맙다.”

류준과 전화를 끊고 복도 벽에 뒤통수를 댔다. 김대영이 나를 얼마나 호구 천치로 봤으면 저 지랄을 하나. 나는 거칠게 문자를 쳐 댔다.

[씨발 새끼야, 세상이 두렵지도 않냐. 아웃팅은 너만 시킬 수 있을 거 같아? 엿이나 처먹어ㅗ]

쓸데없이 기억력만 좋아서 김대영의 전화번호는 금세 떠올릴 수 있었다. 잔뜩 욕설을 첨가해서 보냈으나 답장을 기대하고 보낸 건 아니었다. 그런데도 놈이 욕을 듣고 가만히 있는 게 이상했다.

김대영 성격이라면 흥분해서 다짜고짜 나한테 전화를 할 게 분명한데, 휴대폰이 잠잠했다.

전화를 해서 한바탕 협박을 해 줄까 하다 말았다. 아직 똥통에 들어갈 단계는 아니었다. 이어 류준에게서 연달아 메시지가 도착하기 시작했다.

총 다섯 장의 사진에는 김대영과 반반한 바텀 하나가 끈적끈적하게 들러붙어 있었다.

“왜 그딴 새끼를 만나 가지고, 나란 새끼!”

주먹으로 내 뺨을 쳤다. 광대를 제대로 맞아 눈물이 찔끔 나게 아팠다. 사진을 저장하고 있는데 곽일영이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뭐 봐?”

“그냥……. 친구한테 받은 거요.”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웃었다.

“곽 대리님은 어디 가세요?”

“나 오줌.”

나도 나온 김에 들를까 하고 곽일영과 화장실로 향했다. 갓 청소를 마친 듯 깨끗한 변기 앞에 곽일영과 나란히 서서 지퍼를 내렸다.

투웅- 곽일영이 어마어마한 것을 꺼내서 변기에 조준하고 있었다. 순간 내 눈을 의심했다. 저 키에, 저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 달려 있었다.

곽일영이 시원하게 대물을 털어 내며 몸까지 떨었다.

“곽 대리님, 보기와 다르게 굉장하시네요.”

회사 내에 누구 고추가 크고 작고, 하는 소문은 암암리에 퍼지곤 했다. 화장실만 가도 알 수 있으니 말이다.

“응, 내 좆 커.”

곽일영이 순진하게 웃었다. 나도 마저 뒤처리를 하고 지퍼를 올렸다. 곽일영이 세면대의 물을 틀며 말했다.

“태어나서 나보다 고추 큰 사람 못 봤거든. 딱 한 사람 빼고.”

“누군데요?”

혹시 곽일영의 부모님인가 싶었다.

“우리 사장님.”

손을 터는 곽일영의 물기가 벙쪄 있는 내 얼굴까지 튀었다. 폭풍 같은 말을 던진 곽일영이 콧노래를 불러가며 화장실을 빠져나갔다. 분명 엄청난 게 곽일영의 하반신에 달려 있었다.

그거보다 더 크다면 대체 어떤 사이즈라는 말인가? 내가 서양인을 만나지 않는 이유는 사이즈가 부담스러운 이유도 있었다. 나는 내 손을 올려 팔뚝을 이리저리로 돌려 봤다. 설마…….

우리 사장님. 사장님.

곽일영의 목소리가 메아리 돼서 울렸다.

***

정말 의도한 건 아니었다.

왜 그런 거 있지 않나. 마음 편히 가지라 말하면 더 마음이 불편해지는 그런 상황.

의식하지 않으려 할수록 더 의식하게 되는 인체의 신비 말이다. 나는 기획차 진여원이 회의실에 도착하자마자 자꾸 시선이 아래로 가는 것을 억지로 끌어 올려야 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눈이 마주치게 되고 피하려니 시선이 도로 내려가고, 좌불안석이 따로 없었다.

“곽 대리, 밑창 색 변경하고 이틀 내로 수정해서 하 이사한테 가져가요.”

곽일영의 블랙 펌프스 힐을 둘러보던 진여원이 그것을 제 앞에 내려놓았다. 가져오라던 내 신데렐라 구두도 나란히 옆에 놓여 있었다. 서로 다른 색감의 구두가 등을 맞대고 있는 모습이 퍽 어울렸다.

“이 과장은 가을 신상에만 주력하고, 일단 팜므 버전은 곽 대리 것으로 낙점하는 것으로 하죠. 그리고 박석연 씨.”

진여원의 부름에 대답할 타이밍을 잃은 말이 입 안에서 뭉개졌다.

“박석연 씨.”

저 인간, 그사이를 못 참고 또 부르냐. 이재화와 곽일영의 시선이 내게로 쏠렸다.

“예!”

“이건 페어리 버전으로 나갈 거니 완성품으로 공장에 수주 넣어 둬요.”

내 구두를 가리키는 바람에 깜짝 놀랐다. 진여원이 이 구두를 출시하고 싶으냐고 물어보긴 했었지만, 내 것이 이번 기획에 들어가는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내 대답이 나오자마자 볼일은 다 봤다는 식으로 진여원이 도식지를 정리했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테니스장 이후에 진여원과의 관계는 거의 일과 관련된 게 다였다.

그날, 내가 쉽지 않다는 그의 말에 난 그저 침묵하는 수밖에 없었다. 생각해 보니 진여원이 나를 포기해 버리면 그걸로 끝이었다. 또한 그가 나를 정리하고자 한다면 나도 그에 응해 줘야 했다.

아니……. 사실은 진여원의 관심이 떠나가지 않기를 바랐다. 내가 건방지고 신선해서 좋다면 그에 상응하는 행동을 보여 주고 싶기도 했다.

여기까지 오니 길게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나는 이미 잡힌 물고기였고, 어느새 다 자란 열매였다.

“내일부터 일주일간 자리를 비울 겁니다. 그동안은 하 이사에게 일임했으니 잘들 해 봐요.”

적어도 해외 출장이라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사장의 출장지에 대해 궁금해하는 직원은 나뿐인 듯했다. 곽일영과 같이 나란히 구두를 수거해 가려는데 진여원이 나를 쳐다봤다.

“박석연 씨는 남아요.”

곽일영과 이재화가 짠한 눈으로 내게 무언의 위로를 건넸다. 잔소리를 들을 거라 예상하는 눈치였다.

곽일영과 이재화가 빠져나가고 회의실에는 그와 나만이 남았다. 손을 앞으로 공손히 모으고 진여원의 말을 기다렸다. 턱을 괴고 있던 진여원이 툭 내뱉었다.

“딱 일주일.”

“……예?”

“품평할 시간 더 필요해?”

혹시나 진여원은 지금껏 내가 그를 재 보고 있다고 생각한 건가?

나 그 정도로 뻔뻔하진 않은데, 뭐 하나 부족할 거 없는 남자를 재 보고 말고 할 게 있나.

나는 눈동자를 내려 그의 팔꿈치를 쳐다봤다. 이 와중에 책상에 그의 하반신이 가려져 있어 다행이라는 쓸데없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도 잠시 진여원이 몸을 일으켰다.

내 의지를 배반한 눈이 다시금 그의 하반신으로 향했다. 그가 내 눈을 보더니 나와 같이 시선을 내렸다. 눈썹이 미묘하게 비틀렸다.

진여원이 한마디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상외였다. 말없이 머신기로 이동한 그가 카푸치노 버튼을 눌렀다. 와서 먹으라는 듯이 가리켰다.

안 그래도 입이 타기에 카푸치노가 나오는 머신기로 다가갔다. 진여원이 내 머리 위에서 속살거렸다.

“뭐가 궁금해.”

“아무……것도요.”

“근데 눈이 왜 반짝거려.”

“무슨 눈……! 이요.”

“궁금하면 말해. 박석연이 궁금해하는 거 다 보여줄 수 있으니까.”

“제, 제가 뭘 궁금해합니까?”

“시선이 자꾸 닿는 곳인데 직접 말해줘?”

마치 성에 무지한 초짜 취급을 받은 기분이었다. 다 내려온 카푸치노를 손에 움켜쥐었다.

“착각하시는 것 같아 말씀드리는데 제가 사장님보다 좀 키가 작으니 저절로 시선이 45도로 내려가는 것뿐입니다. 다른 의미가 있는 게 아니고요. 그리고 욕구 불만 있는 순진한 학생도 아닌데 눈이 반짝거릴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어차피 알 거 다 아는데요.”

말하는 내내 다가온 그가 나를 궁지에 몰고 있었다.

“제법 놀아 봤나 본데.”

여유작작한 말투에 울컥 오기가 솟았다.

“그럼요, 나이가 몇인데요. 그렇게 안 보시겠지만 이래 봬도 꽤 인기 있습니다. 쫓아다니는 사람도 있었고요.”

“그런 것 같아.”

진여원이 의외로 수긍하며 웃었다. 그럼에도 웃고 있는데 웃지 않는다는 표현이 실감되고 있었다.

“그러니까요…… 사장님만 인기 많은 줄 아십니까. 경험은 오히려 제가…….”

그가 벽에 팔을 올려 나를 가둔 채 내려다봤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말을 잇지 못하고 그를 올려다봤다.

“깨물리고 싶어?”

합, 입술을 다물었다. 그리고 쥐고 있던 커피를 입으로 바짝 올려 홀짝홀짝거리기 바빴다. 일촉즉발의 상황에 후후 커피를 불며 계속 딴청이나 피웠다.

진여원은 마치 이걸 그냥, 하는 모양새로 쳐다보고 있었다. 진여원의 팔 밑으로 빠져나가려 하자 그가 손을 내려 막아 버렸다.

“손.”

커피 컵으로 입을 가린 손을 내리라는 듯 말했다.

“사장님 먼저 내리시면요.”

대꾸하는데 진여원의 얼굴이 점차 다가왔다. 옆으로 빗겨 내 뺨을 파고들어 온 그가 쪼옥 하고 내 입꼬리를 빨았다.

나는 놀라 눈만 동그랗게 떴다. 내 입술 끝을 굴리던 진여원의 말캉한 혀에 또 멍해지려 하는 때였다. 그가 와작 하고 내 입술을 깨물었다.

“윽! 뭐 하시는.”

얼얼한 통증에 손으로 입을 가렸다.

“놀아 본 박석연 씨.”

팔을 내린 진여원이 속삭였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잖아.”

안 그래? 라는 듯 굴었다. 이어 그가 나가 버리자 어리벙벙하게 회의실에 혼자 남겨졌다. 나는 진여원이 나간 문을 바라보다 설마 싶었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얼얼한 입꼬리를 매만졌다. 진여원의 웃음에 숨겨져 있던 건 희미한 짜증이었다. 어째서라고 물을 만큼 둔하지는 않았다. 혀를 내밀어 입꼬리를 핥았다.

쿵쾅쿵쾅, 진여원이 내 입술을 깨문 이유를 깨닫자마자 온몸에 열이 올랐다.

저 진독사가 질투라니…….

믿기지 않으면서도 몸이 붕붕 떠오르고 있었다. 여태 제대로 된 사랑을 해 오지 못해서, 대부분이 짝사랑이나 김대영 같은 놈들이었기에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나는 찌릿거리는 발가락을 슬리퍼로 꾸욱 내리눌러 봤다. 값싼 삼선 슬리퍼의 쿠션이 오늘따라 몰랑몰랑했다.

***

이 나이까지 부모님께 사랑받고 자라 온 건 확실했다. 그렇다고 오냐오냐 자라지는 않았다.

아버지가 불같이 화낸 때가 딱 한 번 있었는데, 고작 다섯 살 무렵이었던 듯했다. 왜 나는 날 수 없을까? 그건 어린 마음에 생겨난 단순한 물음이었다.

수십 마리의 잠자리를 실로 엮으면 녀석들이 나를 데리고 날아 줄 거라는 결론에 도달했고, 나는 미친 듯이 동네의 잠자리를 포획하기 시작했다.

잡은 잠자리의 꼬리를 실로 꽁꽁 묶어 개수를 점차 늘려나갔다. 아무리 잡아도 몸이 뜰 생각을 하지 않기에 아마 기십 마리는 잡은 것 같았다.

포획 도중에 날개가 잘린 놈은 가차 없이 바닥에 내버렸다. 그렇게 한 부대를 만들어서 집으로 가져와 침대에서 점프를 뛰어내렸다. 몇 번을 시도해도 몸이 날아오르는 일은 없었다.

‘우리 석연이 뭐 하니.’ 하며 방으로 들어온 아버지가 기겁한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어마어마한 잠자리 부대를 학대하고 있는 꼴이었으니까.

아버지는 곧장 나를 무릎 꿇리고 설교를 쏟아 냈다.

‘누가 너를 이렇게 잡아다가 묶어 놨다고 생각해 봐, 어떤 기분이겠어.’

‘그렇지만 이건 잠자리인데. 날 거야, 많이 많이 잡아서.’

‘잠자리로 못 날면 다음엔 새라도 잡을 생각이냐?’

실은 잠자리가 안 되면 새로 변경할 생각이었다. 대꾸하지 못하자 아버지가 버럭 화를 냈다.

‘석연이 네가 날고 싶어 하는 건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동물이나 곤충을 죽이면 쓰겠니. 들어오면서도 보니 마당에 죽은 잠자리가 즐비하더라. 아무리 하찮아도 생명을 죽이는 건 잘못된 거다. 만일 커다란 거인이 나타나서 네가 한 짓과 똑같이 나나 네 엄마를 잡아간다고 생각해 보렴.’

그때부터 또록또록 눈물이 떨어져 버렸다. 상상만으로도 끔찍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잠자리를 괴롭혔기 때문에 아버지나 엄마에게 잠자리의 분노가 옮겨갈까 봐 악몽을 꿀 정도였다. 그 뒤로 한동안은 개미도 안 밟으려 조심해서 다니곤 했었다.

한때는 그게 너무 심해져 개미를 밟은 녀석과 주먹다짐을 했던 일도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지금 그 기억이 떠오른 건지는 모르겠다.

잠자리의 분노에 겁을 먹거나 아버지의 설교에 눈물을 흘릴 나이도 아닌데 말이다.

어릴 때와 달리 지금 내가 두려워하는 건 어른이 돼도 감당하기 힘든 문제가 대부분이었다.

돈, 연애, 인간관계, 과거 청산 등등. 현재로서 가장 곤란한 문제는 둑이 터져 버린 감정이었다.

나는 오피스텔 거치대에 주차해 놓은 분홍 자전거를 바라봤다. 안장에 먼지가 뽀얗게 올라와 있었다. 손으로 먼지를 털어 내고 그 위에 털썩 앉았다.

다 먹은 과자봉지와 음료수 캔이 바구니 안에 들어 있었다. 어떤 몰상식한 인간이 남의 자전거를 쓰레기통 취급했는지. 심지어 버려진 음료수는 포카리스웨트였다.

손으로 캔을 와작 구기고 저기 떨어진 쓰레기통으로 휙 던졌다. 요 근래 포카리스웨트 하면 연상법의 작용으로 진여원이 떠올랐다. 그도 양갱을 볼 때 내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진여원이 없는 날들이 그리 지루하게 느껴지는 건 아니었다. 회사와 집을 오가는 것은 익숙한 생활 패턴이었고, 진여원이 없다고 한가해진 것도 아니었다.

회사는 진여원만큼이나 집요하고 까다로운 재운 선배가 버티고 있었다. 그래, 지루하진 않지만 진여원의 빈자리로 인해 실감하는 건 조금은 외롭다는 거였다.

나도 모르는 사이 매저기가 생겨 버렸나, 사사건건 내 성질을 자극하는 진여원이 그립다니. 이러다 섹스할 때 욕을 먹어야 흥분한다는 어느 바텀 꼴이 나지 않을까 싶었다. 물론 비약적인 생각이었다.

며칠간은 잘 다녀오세요, 라든지 몸조심하세요, 등등의 메시지를 보내고 싶어 머리를 끙끙 싸맸었다. 못 보낼 이유는 없었다. 그래도 하지 않은 건 진여원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은연중에 연락을 기다리는 내 심정만큼 그도 내 무소식에 애타길 바랐다.

라라라라, 라라라라~ 저도 모르게 흥얼거리는 노래가 새어 나와 자전거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대로 집에 들어갈까 고민하다 발걸음을 틀었다. 방구석에 처박혀 진여원 연상법을 펼치는 것보단 시끄러운 미령이네 가게에 앉아서 사색을 하는 편이 더 나을 거다.

회사 가방을 어깨에 맨 채로 미령의 가게로 향했다. 퇴근시간이라 그런지 버스는 사람들의 땀 냄새로 가득했다. 나도 팔을 올려 킁킁 냄새를 맡아 봤지만, 대량으로 쏟아부은 섬유유연제 냄새만 날 뿐이었다.

광고처럼 냄새가 퍼지게 팔을 교차시켜 쓱쓱 비볐다. 버스에서 내려 이번엔 바지까지 비벼 가며 걸었다. 광고와는 다르게 비벼 댄 손에서는 탄 냄새만 나고 있었다.

간판이 켜진 것을 확인하고 로열패밀리의 계단을 내려갔다. 잔을 닦고 있던 미령이 왔냐? 짧은 인사를 건넸다.

나는 미령의 앞에 앉아 곧장 녀석이 내놓은 병맥주를 손에 쥐었다. 비벼 대느라 열이 오른 손이 차게 식어 갔다.

“바쁘신 곶감이 평일에 웬일이래.”

“잠자리의 저주 때문에 혼자 있기가 무서워져서.”

미령이 저거 또 헛소리한다면서 황당해했다.

나는 맥주병을 입에 대고 주변을 둘러봤다. 오픈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손님은 한둘뿐이었다. 미령이 뒤집은 컵을 내 머리 위 스테인리스 선반에 올려 두었다. 깨끗하게 닦인 잔에선 물방울 하나 떨어지지 않았다.

“너 전에 그 명품남하고는 어떻게 잘되어 가냐?”

“잘 되고 자시고가 있겠냐.”

“그럼 섹스는 했냐?”

마시던 맥주를 뿜을 뻔했다.

“내가 무슨 섹스 못해 죽은 귀신이야? 섹스 타령 좀 그만해라.”

“왜, 섹스만큼 중요한 게 어디 있다고.”

“안 했어, 아니 내가 안 해주고 있다, 됐냐?”

미령이 눈을 가늘게 떠서 나를 떠보듯 봤다.

“요거 요거, 곰 같은 여우 새끼.”

“뭐?”

맥주를 꼴깍 삼켰다.

“그 인간 똥줄 타는 거 딱 보이는구만.”

진여원이 조급해하는 건 상상이 가지 않았다. 미령이 녀석이 그 차가운 상판을 못 봤기에 하는 소리다.

“그럴 사람 아니거든. 출장 나갔는데 뭐, 잘 있냐, 라든지 그런 메시지 하나 없더라.”

“너는?”

“올 때까지 안 하게.”

“여우 맞네.”

“나 사색 좀 하게 조용히 해라.”

“사색할 거면 집에나 처박혀 있지 여긴 왜 왔냐?”

“마음 비빌 곳이 여기뿐이라.”

“한 번 해라. 그러다 마음 맞으면 사귀는 거고 아니면 안 보면 되는 거지.”

“불가능해.”

“왜.”

“우리 사장이라.”

미령이 뜨악하며 인상을 썼다.

“하다하다 못해 이젠 사장한테까지 손을 뻗냐? 시발, 나이 차이가 대체 얼마냐? 좆도 안 서는 거 아니야?”

“사장이라고 다 나이 많은 줄 아냐? 젊어. 그래 봐야 나보다 네 살 많아.”

“뭐야, 완전 대박이네. 그럼 잡아야지 뭘 고민해.”

“예비 유부남일걸. 강제일수도 있겠고.”

“하긴 그 나이에 사장이면 집에서 주는 압박도 장난 아니겠다.”

미령 또한 내 생각과 다르지 않았다.

진여원이 나를 좋아한다고 해도 현실적으로 봤을 때 언젠가 결혼도 할 테고, 커밍아웃할 일도 없을 것이다. 나만 해도 억지로 밝혀진 경우가 아니었다면 무덤까지 가져갔을 테니까.

“아, 맞다. 김대영 그 새끼 요새 안 오더라?”

“그래? 어디 똥물에 빠져 뒈졌나 보지.”

“푸흐, 어울리긴 한다.”

내 욕 문자에도 답이 없던 걸 보면 정말 무슨 일이라도 생긴 듯했다. 어차피 김대영이 뒈지거나 말거나 내 알 바 아니었다. 혹시 나한테 해코지를 한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체일 슈즈에서 쫓겨난 이유를 진여원도 알고 있으니 말이다.

게다가 나한테는 김대영을 같이 엿 먹일 자료도 충분히 있었다. 다만 사용하지 않게 되길 바랄 뿐이었다. 류준이 말처럼 같이 똥물에 들어가는 건 원치 않았다.

“근데 요한 씨는 요새도 자주 와?”

미령이 조명에 유리컵을 비춰 보며 대답했다.

“내가 오지 말라고 했어.”

“장사 접고 싶냐? 오는 손님을 네가 왜 막아.”

병맥주 위로 거품 방울이 올라왔다. 그걸 손으로 눌러 없앴다. 미령이 앞치마에 손을 닦았다.

“요새 나랑 만나.”

“뭐?”

시끄러운 음악 소리에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

“얼굴 도장 만날 찍다 보니 어떻게 정들어서. 뭐, 꽤 귀엽기도 하고.”

강미령과 김요한, 생각지도 못한 조합이었다.

가게 손님에게 미령이 먼저 손을 뻗는 일도 몇 번 보지 못했다. 미령이는 안 그렇게 생겨서 은근 순정파였다.

보통 사귀면 1년은 기본이었는데, 문제가 있다면 미령이 좋아하게 되는 녀석들 대부분은 짝사랑에 실패해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라는 거다. 김요한도 어김없었지만 미령이라면 잘해 줄 것도 같고, 나름 어울리기도 했다.

“이왕이면 사랑도 해 줘라.”

“내가 마음 없이 만날 놈 같아 보이냐. 나는 내가 알아서 하니 됐다 치고, 박석연아 너는 말이다.”

“왜 강미령아.”

장난기 섞인 내 음성에 미령이 진지한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말을 고르는 듯 잠시 침묵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김대영 새끼 때문에 지금 온 사람한테 몸 사리는 거면 그러지 마라. 그거 그 사람한테 실례지 않냐? 죄는 김대영이 지었는데 왜 네 사장이 죗값을 치르냐.”

펑- 뒤통수가 터지듯 눈앞이 번쩍거렸다. 불시에 한 방 맞은 사람처럼 머리가 띵했다. 그만큼 미령의 말은 모든 사고가 멈출 정도로 강력했다.

죄는 김대영이 지었는데 왜 진여원이 죗값을 치러야 하냐는 말…….

반박할 수가 없었다. 사실 지금으로썬 그가 범인이 아니라는 데에 확신을 갖고 있었다. 결국, 아웃팅 사건은 내 오해로 비롯된 게 아닐까 싶기도 해서…….

나쁜 점은 아닐 거라 여기고 좋은 점만 보는 전형적인 콩깍지의 시작이라 여길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어폐가 있을 것이다.

나는 진여원의 말에 붉으락푸르락하기도 하고 재수 없음에 몸서리칠 때도 많았다. 진여원이 좋다가도 그 좋은 감정과는 다르게 종종 울컥하기도 했다. 그러니 그의 모든 것이 무조건 다 좋은 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그 이상으로 내 심장을 두드려댔다. 누구도 내게 이렇듯 다가온 사람은 없었다.

진여원은 마치 내 심장 앞에 고무줄을 대고 있는 듯했다. 쫀쫀하게 잡아당겼다가 풀었다가 압박을 주는 것 같아 한시도 긴장을 놓을 수가 없었다.

쫄깃거림과 안심이 반복되며 심장은 쿵쾅쿵쾅 날뛰었다. 불안하지만 짜릿한 자극은 내가 잠자리를 달고 날고 싶어 했을 때의 기분과 닮아 있었다.

두 다리가 땅에 닿지 않으면 두려울 테지만, 날 지탱해주는 잠자리가 있을 테니 안심할 수 있을 거다. 두려움을 이기고 날아올랐으니까 엄청 즐거울 테고.

내가 날고 싶어 했던 이유를 지금에서야 떠올릴 수 있었다. 도전정신이 강한 어릴 적 박석연이 지금의 나보다는 훨씬 용감했다. 그렇다고 잠자리를 괴롭힌 게 잘한 짓은 아니지만.

어쨌든 실제로 날지 않아도 그런 기분을 느낄 수 있다는 것 또한 깨달았다.

바로 연애였다.

지금껏 내가 알던 연애는 땅으로 곤두박질치는 비행이었다. 그 안엔 불안함만 있었지만, 아마 제대로 된 연애는 안전이 보장된 고도 비행일 것이다. 마치 잠자리와의 비행을 꿈꿨던 것처럼 말이다.

여태 해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진여원이라면…….

나는 결론을 도출하자마자 자리에서 번쩍 일어섰다.

“간다.”

미령에게 맥주 한 병 값을 내밀었다. 얼떨결에 돈을 받은 미령이 대꾸했다.

“어? 뭐야, 더 얘기하다 가지.”

“이미 결론 났거든.”

“어떤 결론.”

“나 연애할 거다.”

“누구랑.”

“명품이랑.”

“그러다 유부남 되면?”

“그러지 말라고 재롱 좀 부려 보지 뭐. 그 사람 내 재롱 잘 받아 주거든.”

생각해 보면 그랬다. 하나부터 열까지 얼마든지 내가 열 받게 만드는 상황에서도 진여원은 뭐 그럴 수도 있지, 하며 넘기곤 했다.

“존나 닭살이네. 잘되면 데려와라, 얼마나 잘났는지 나도 좀 보자.”

“그럴 일이 있을까 모르겠다, 그럼 간다.”

나는 시끄러운 가게를 빠져나와 후덥지근한 공기를 들이마시었다.

콩, 콩, 콩, 심장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리 길지 않게 느껴지던 일주일이 지금 막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그가 오면 뭐라고 말할까? 인정합니다. 나 당신에게 넘어갔으니 연애합시다. 아니 일단 계약서부터 작성합시다. 우리가 헤어져도 내가 불리하게 회사를 그만두지 않도록 말입니다.

여러 말들이 머릿속을 오갔다. 나는 진여원의 흰 운동화를 신고 버스 정류장까지 내달렸다. 땀을 한바탕 빼는 동안 수많은 시뮬레이션 중 선택된 건 딱 하나였다.

왜 연락 안 하셨습니까?

지금으로서는 그게 제일 궁금했다.

***

진여원이 선물해 준 양갱을 서랍에서 하나 꺼냈다. 이제 겨우 한 개 남아 있었다. 저번에 인터넷에서 주문한 수제 양갱도 집에서 깨작깨작 먹다 보니 어느새 동이 나 있었다.

양갱에 이빨을 박아 넣고 말캉한 느낌을 맛봤다.

양갱은 딱 씹기 직전의 이 순간이 제일이었다. 한입씩 먹지 않고 갉아 먹으면 그건 또 그것대로 묘미였다.

사무실에 아무도 없는 틈을 타서 이빨을 딱딱거리며 양갱을 갉아 먹었다. 이제는 양갱을 먹는데도 초조한 심리가 묻어나오는 것 같았다.

지나온 닷새보다 겨우 이틀 남은 시간이 더 길게 느껴졌다. 안달나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이 며칠 사이에 진여원의 마음이 변해 버리면 어쩌지 하는 노파심 때문에.

그렇기에 더더욱 전화할 용기는 생기지 않았다. 다만 그가 나를 보는 눈빛이 전과 같다면 망설임 없이 말할 생각이었다.

일단은 그럴 생각이지만 직접 보면 말문이 막힐지도 모르지.

딱딱딱, 양갱을 씹어 먹는데 쓰윽 책상으로 그림자가 졌다. 깜짝 놀라서 경기를 일으켰다.

내 옆에 선 재운 선배도 마찬가지로 놀라 몸을 울렸다.

“깜짝이야! 왜 이래? 우리 석연이 광견병 걸렸어?”

언제부터 날 구경하고 있었는지 재운 선배가 곤란하게 웃었다. 선배한테서 훅 소독약 냄새가 나는 걸 보니 수영장에서 나온 듯했다.

“선, 아니 이사님.”

선배라는 호칭이 입에 붙어 있기에 여간해서 잘 떨어지지를 않았다.

재운 선배가 적당히 젖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털었다. 이사가 좋기는 좋구나. 점심시간이 지난 지 한참인데 수영장도 마음대로 이용하고.

나도 돈 많이 벌면 윰 주식 좀 사 둬야지. 또 누가 아나, 인센티브 억 소리 나게 받아서 수석 디자이너 자리 하나 떡하니 받을지.

“내가 아는 디자이너들은 왜 하나같이 딴 세상을 자주 가는지 모르겠어.”

마치 자신은 디자이너가 아니라는 말투였다. 내 보기엔 선배도 자주 딴 세상으로 가출한다.

“아무 생각도 안 했어요. 근데 무슨 일이세요?”

“별건 아니고, 요새 별일 없지?”

“예, 저는 뭐 없죠.”

“사람들은 다 어디 갔어?”

“이 과장님은 거래처 가셨고, 곽 대리님은 팜므 슈즈 완성본 때문에 공장 가셨어요.”

“아~ 진 사장 없어서 내가 대신 직원들 격려하려니 이래저래 아주 죽겠다.”

재운 선배는 직원들 격려차 디자인 부서를 돌고 온 듯했다.

“사장님은 격려 같은 거 잘 안 하시잖아요.”

“진 사장이 과묵한 남편이라면 난 자상한 부인쯤 되잖냐.”

“과묵한 남편보다는, 독설가가 더 어울릴 것 같은데요.”

쓰레기, 갖다 버려, 제정신이야?

디자인을 퇴짜 놓을 때마다 진여원의 독설은 늘 새로운 버전으로 업그레이드됐다. 우리 회사 직원들 멘탈은 진여원으로 하여금 강철이 될 게 확실했다.

“근데 사장님 출장은 어디로 가신 거예요?”

사무실을 둘러보던 재운 선배가 곽일영의 자리에 털썩 앉았다.

“으억.”

허리를 기댐과 동시에 의자가 뒤로 벌렁 넘어갔다.

“뭐야, 곽 대리 의자가 왜 이래.”

“원래 고정 안 시켜 놓으세요. 삐걱거리면서 등받이 놀이 자주 하거든요.”

“하여튼 곽 대리 똘기는 우리 석연이 못지않다니까.”

“전 똘기가 아니라 삶의 지혜를 얻은 것뿐인데요.”

재운 선배가 낄낄 웃으면서 의자를 바로 세운 뒤에 다시 앉지는 않았다.

“진 사장 프랑스 갔어.”

“……멀리도 가셨네요.”

“뭐, 그렇지.”

재운 선배가 내 스피커 위에 세워진 [YOUM] 금속 로고(엠블럼)를 툭 쳤다.

“볼 때마다 꼭 생각난단 말이야.”

“뭐가요?”

“미유.”

움찔, 선배의 입에서 나온 진여원의 전 여자 친구 이름에 동요했다. 쓸데없이 손에 쥐고 있던 마우스를 흔들어 암전된 모니터를 밝혔다.

“여기 회사 이름 꼭 미유한테서 따온 것 같지 않냐. 미유, 미유, 미윰, 뮴, 빠르게 발음하면 말이야.”

다소 억지스럽긴 했는데 나도 중얼거리면서 따라 하니까 그런 것 같기도 했다. 동시에 정수리까지 쫙 열이 뻗쳐 나갔다.

어쭈, 결혼까지 생각했던 여자 친구를 못 잊어서 회사 이름을 윰이라고 지었나 보지? 진독사 주제에 아주 순정남 나셨구만.

나는 스피커 위에 올려진 엠블럼을 곁눈질로 쳐다봤다.

“왜 갑자기 이빨 세우고 그래.”

나도 모르게 비열한 웃음이 새어 나온 듯했다. 나는 차분히 생각하자며 가슴의 불을 진화시켰다. 재운 선배의 억측일 뿐이지 연관성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 회사의 스펠링이 ‘M’ 으로 시작했으면 재운 선배의 말을 확신해 땔감을 마구 지폈을 것이다.

“근데 진짜 별일 없는 건 맞지?”

“없는데요.”

재운 선배는 격려는커녕 내 속을 뒤집어 놓으러 온 것 같았다. 내 주변을 서성거리는 선배에게 물었다.

“이사님이야말로 달리 하실 말씀 있는 거 아니세요?”

“없는데?”

재운 선배가 고개를 흔들었다. 어울리지 않게 싱거운 반응이었다. 뒤를 돌아 나가려던 선배가 다시금 뭐라 말을 하려는 찰나였다.

내 책상 위의 휴대폰이 우우웅- 우우웅- 몸을 울려 댔다. 휴대폰과 선배를 번갈아 보자 선배가 다음에 얘기하자면서 손을 흔들었다.

나는 선배가 사무실을 나가고 나서야 울리는 휴대폰을 확인했다. [아버지]라는 글씨가 큼지막하게 떠올라 있었다. 이 시간에 전화할 분이 아닌데 무슨 일인가 싶었다.

잠자리를 죽여 호되게 혼났던 기억이 어제처럼 생생하게 떠올랐던 터라 죄지은 것 없이도 마음이 무거웠다.

“예, 아버지.”

[석연아.]

“이 시간에 어쩐 일이세요?”

아버지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아 음량을 키워 나갔다.

[……석연아.]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담배도 태우시지 않는 분인데 저렇게 목이 멜 일이 있을 리 없었다.

“목소리가 왜 그러세요, 어디 아프세요?”

[아니……. 나는 괜찮다.]

별일은 아닌가 싶어 가슴을 쓸어내렸다. 근데 나는 이라는 말이 불길하게만 다가왔다.

“어머니는요?”

[회사 끝나고 강남으로 잠시 넘어올 수 있겠니?]

“강남이요?”

아버지가 정확히 용건을 말해 주지 않으니 답답하기만 했다.

“아버지 대체 왜 그러시는데요, 엄마는요?”

[일단 와서 얘기하자.]

“와서 얘기하자니요?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요?”

어쩐지 손끝이 찌릿찌릿했다. 부지불식간에 정신이 산만해지며 오만 잡다한 생각들이 들었다.

[민영이가…….]

민영이는 아버지가 엄마를 부르는 말이었다. 민영 씨, 우리 민영 씨. 아버지는 늘 다정하게 엄마의 이름을 부르고는 했다.

“아버지 왜 그래요. 괜히 왜 저 겁주고 그러세요.”

아버지를 탓하듯 말했다. 마치 잠자리 때문에 혼나던 날처럼 별일 아닐 거라 믿고 싶었다. 아버지의 음성이 불길하기 그지없어서.

[…….]

무겁고도 긴 침묵이 이어졌다. 손이 저릿저릿거려 더는 기다릴 수 없었다.

“지금 강남 어디세요.”

[어쩌냐……. 우리 민영이 어쩌면 좋으냐. 석연아. 지금은 민영이 얼굴도 못 본다. 중환자실로 들어갔는데…… 면회도 안 되는구나.]

느리고 답답한 아버지의 목소리에 발밑이 무너지고 있었다. 휴대폰을 쥔 손목을 반대 손으로 움켜쥐었다. 그렇지 않으면 바닥으로 떨어뜨릴 것만 같았다.

“지금 어디 병원이신데요, 그러지 마시고 말씀 좀 제대로 해 주세요.”

[나는 지금 잘 모르겠다. 그냥 아무 생각도 안 나서……. 석연이 너랑 우리 민영이 생각만 나서.]

“아버지, 옆에 사람 있으면 좀 바꿔 주세요.”

암막이 쳐지는 시야를 간신히 버티고 천천히 말을 내뱉었다. 자칫하다가는 나 역시 아버지처럼 아무 생각도 들지 않을 것 같았다. 아니, 불길함에 아무 생각도 하기 싫어질 것 같았다.

나는 간호사의 목소리를 들으며 떨리는 손으로 병원 이름과 엄마가 계신 중환자실을 적었다. 전화를 끊자마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건물을 뛰쳐나가는 동안 팀원들에게 전화를 했지만, 연결이 되지 않았다. 메시지를 남길 정신도 없이 휴대폰만 꽉 쥐고 달렸고 몇 번이나 다리가 풀렸다.

이럴 때일수록 정신 차려야 한다. 언제나 든든했던 아버지가 동요하고 있는데 자식인 나마저 그럴 순 없었다.

진정되지 않는 마음으로 택시에 올라타 강남까지 향했다. 낮 시간임에도 차는 왜 이렇게 밀리는지 연방 차 안에서 다리를 떨어야 했다.

중환자실, 메모지에 적은 그 글씨가 마음을 대변하듯 마구 일렁대고 있었다. 전에 아버지가 그랬었다. 엄마가 머리 아프다는 소리를 했다고. 종합검진에서 아무 이상이 없다 했기에 별생각 없이 넘겼었다.

그때 그래서는 안 됐다. 아픈 것에는 모든 이유가 있는 법이었다. 그저 내 회사 일이 바빠서, 엄마 목소리가 평소와 같이 우렁차서 깊이 생각하지도 못했었다.

그제야 미칠 듯한 후회가 밀려왔다. 괜찮을 거라고 스스로를 안심시켜 봐도 직접 눈으로 보기 전까지는 불안함이 가라앉을 것 같지 않았다. 잔돈도 받지 않고 택시에서 내려 미친 듯이 병원 안으로 달려갔다.

부딪히는 사람들에게 미안하다는 말도 못하고 메모지에 적힌 곳으로 향했다. 저 멀리 중환자실 대기 의자에 앉은 아버지가 보였다. 달려가자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아버지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아버지의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했다. 언제 저렇게 머리가 하얗게 세셨을까. 그리고 아버지가 저렇게 왜소했던가. 조금의 충격만 가해져도 쓰러질 듯이 위태해 보였다.

나는 간신히 숨을 고르며 아버지를 불렀다. 아버지가 손을 떼고 얼굴을 들었다. 빨갛게 충혈된 눈을 바라보다 이를 악물었다. 고개를 내려 뿌옇게 흐려지는 시야를 막았다.

뒤늦게 내가 신고 온 게 슬리퍼인 것을 깨달았다. 여기까지 달려오며 혼미했던 넋이 돌아오긴 했지만 쉽게 말문이 트이지 않았다.

“…….”

목구멍이 꽉 막혔다. 간신히 목소리를 짜내어 물었다.

“엄마……. 지금 저 안에 있어요?”

아연하게 중환자실을 바라봤다.

“……그래.”

“무슨 일인지 천천히 말씀해 주세요. 괜찮으니까. 괜찮을 거니까.”

아버지의 옆에 나란히 앉아 손을 잡았다. 밭일 때문인지 손이 거칠었다. 사실은 아버지의 손이 어땠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이렇게 잡아 본 게 기억이 안 날 정도로 까마득했다.

“오전에…… 아침 일찍 나간 사람이 들어오지 않더구나. 그래서 나가 봤더니…… 밭에…….”

두서없이 떨리는 음성에 얼마나 충격을 받으셨는지 알 수 있었다. 아마도 밭에 엄마가 쓰러져 계신 걸 아버지가 발견한 듯했다.

“괜찮아요, 아버지. 엄마 강한 거 알잖아요. 별일 아닐 거예요.”

아버지의 손을 꽉 잡았다. 무너지듯이 내 어깨에 기댄 아버지가 숨이 막히는 듯 가슴을 들썩거렸다. 아버지를 벽에 기대게 하고 재빨리 중환자실 앞에 있는 간호사에게 다가갔다.

“아버지가 지금 쉬셔야 할 것 같은데, 혹시 따로 입원할 수 있을까요?”

간호사가 안 그래도 상태가 걱정됐다면서 내 어깨 너머로 아버지를 바라봤다.

“병실 빈 곳 있으니 거기로 모실게요.”

간호사가 데스크에서 링거를 꺼내 올 동안 나는 아버지를 부축해서 안내받은 병실로 이동했다. 기운이 다 빠진 아버지를 침대에 눕혔다. 링거를 맞는 걸 보고 나서야 나는 얼굴에 흥건한 땀을 겨우 닦아 내렸다.

“여기서 좀 쉬고 계세요. 전 데스크에 다녀올게요.”

아버지가 힘겹게 눈을 감았다. 저렇게 약한 모습은 태어나 처음이었다.

언제나 무슨 일이 있어도 굳건하실 거라고, 나 혼자서 착각하고 있던 것일지도 모른다. 아마 엄마와 나를 지켜 줘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언제나 필요 이상으로 강인한 모습을 보였던 거다.

대학 때 내 사건이 있었을 때도 아버지는 엄마를 위로했고, 또 나를 위로했다. 그날의 아버지는 그 누구에게도 위로받지 못했다.

중환자실 앞에서 울고 있는 다른 사람들을 보니 내 불길함도 점점 커져만 갔다. 이런 일은 다른 사람에게만 일어나는 불행인 줄 알았다.

나는 무슨 안이한 생각으로 우리 가족은 비껴갈 거라 착각한 걸까.

손을 펴서 눈을 밀었다. 화장실에 들러 찬물로 세수를 해 정신을 일깨웠다. 밖에서 누군가가 이민영 씨 보호자분 하고 크게 불러 댔다. 나는 간호사에게 급하게 달려나갔다.

카트를 든 간호사가 나를 데스크로 안내했다. 데스크에는 가운을 입은 의사가 간호사에게서 카트를 건네받았다. 의사는 나를 안심시키기 위해서인지 안심하라는 듯한 미소를 자아내 보였다.

“이민영 씨 보호자 되시는 남편 분께 먼저 말씀을 드렸는데, 따로 들으셨나요?”

“아뇨, 아버지도 경황이 없으셔서요. 제가 이민영 환자 아들입니다.”

“그래도 금방 오셔서 다행이네요, 보통 이런 상황에서는 다들 경황없어하시거든요.”

의사가 환자의 상태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데 멍한 머리는 제대로 흡수를 하지 못했다. 협심증에 의한 쇼크로 기절하신 것이며 관상동맥우회술이 필요하다는 나로선 알 수 없는 말들이 들려왔다.

내 귀에는 수술이라는 두 글자만 반복되고 있었다. 위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조금 더 늦게 발견했다면 큰일이 났을 거라는 말에도 위로받지 못했다.

다행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게 아니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때 써야 하는 말이었다.

나는 수술이 불가피하다는 말에 데스크를 꽉 쥐었다.

“크게 위독하신 건 아니죠?”

“아버님께서 빨리 조처를 하셨기에 수술만 성공한다면 괜찮아질 겁니다. 수술 자체는 그리 어려운 수술도 아니고요.”

위독하다, 그렇지 않다, 가타부타 다른 말은 없었다. 의사가 환자의 상태에 대해 쉽게 말을 하지 않는다는 건 익히 들어왔었다. 그래도 거짓말이라도 좋으니 나를 안심시켜줬으면 했다.

나는 의사가 내민 수술 동의서에 사인을 하려다 멈칫했다. 긴 글 중 한 구절이 유난히 눈에 밟힌 탓이었다.

‘본 수술 및 마취(또는 검사)로써 불가항력적으로 야기될 수 있는 합병증 또는 환자의 특이체질로 우발적 사고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환자가 수술 도중 사망할 수도 있다는 우회적인 글에 의사를 올려다봤다.

“이건…….”

“아, 그 부분에 대해선 방금 전에 고지해 드렸는데 다시 말씀드릴까요?”

“수술을 안 하면……. 많이 위험하신 겁니까?”

“현재로서는 그렇습니다. 협심증은 갑자기 찾아오는 불청객이라고도 하죠. 빨리 발견했으니 막힌 동맥을 처치하는 게 우선입니다.”

수술이 불가피하다는 말에도 선뜻 사인을 하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방법이 없었다. 의사가 최선을 다해 수술을 성공시키는 것만 바라야 했다. 나는 망설이던 손에 힘을 주었다. 수술 동의서와 입원 약정서 두 곳에 사인을 하고 나서야 의사에게 물었다.

“지금 면회는 불가능합니까?”

“환자분이 쇼크로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셨습니다. 수술 전까지 정신이 드신다면 면회가 가능할 겁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무기력했다. 엄마는 저기 쓰러져 있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말뿐이었다.

“저희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의사에게 의무적인 대답을 듣고 난 뒤 대기실 의자로 가 털썩 앉았다. 차가운 벽에 등을 대자 한기가 오소소 올라왔다.

중환자실 내부는 보이지 않아 엄마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 알 수 없었다. 자꾸만 손에 고이는 식은땀을 바지에 닦아 내며 휴대폰을 꺼냈다.

이재화에게 전화를 걸어 병원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나서야 한숨을 돌렸다.

내가 조금만 관심을 가졌다면, 내 일에만 정신을 팔지 않았더라면…….

아무리 후회를 해도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어려운 수술이 아니라고 했으니 금세 일어나실 것이 분명했다. 나쁜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을 억지로 내리눌렀다.

그 사이 진이 다 빠져 머리를 벽에 기댔다.

누군가의 비명 같은 울음소리, 면회를 온 사람들, 정신없이 다니는 의사와 간호사가 현실감 없이 다가왔다.

잠시 꿈이 아닐까 하는 생각조차 들었다. 괜찮다, 괜찮을 거다. 같은 말을 되뇌며 눈을 감았다. 물속에 잠긴 것처럼 몸이 무겁게 가라앉고 있었다.

***

“……님.”

누군가 내 어깨를 흔들었다.

“박석연 님?”

나를 흔드는 사람은 카트를 들고 있던 간호사였다. 머리를 털며 어지러운 기운을 몰아내려 했다.

“이민영 환자분 정신 차리셨는데, 만나 보시겠어요? 면회 시간 이제 10분 정도 남았거든요.”

“예!”

벌떡 일어났다. 엄마가 눈 뜬 게 면회 시간이라 천만다행이었다. 서둘러 아버지에게 들렀지만 간신히 잠이 드신 상태라 깨우지는 못했다.

준비를 마치고 중환자실로 들어가며 망연자실한 얼굴로 나오는 다른 이의 가족들을 봤다. 넋을 놓은 얼굴들을 보며 나 역시도 그들과 다르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침대에는 상태가 심각해 보이는 환자들로 가득했다. 눈을 질끈 감고 간호사의 뒤만 따라갔다. 간호사가 커튼을 젖히자 가늘게 눈을 뜨고 있는 엄마가 보였다.

괄괄하던 엄마가 저렇게 파리하게 질려 있는 모습에 참았던 눈물이 왈칵 올라왔다. 무거워 보이는 링거 네 개가 엄마의 위로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엄마가 입을 벙끗하며 내 이름을 불렀다.

석연아. 이리 온나, 하고 부르는데 너무 목소리가 작아 제대로 들리지가 않았다.

링거가 엉키지 않도록 팔과 다리를 고정시켜 놓은 모습에 눈앞이 뿌옇게 변했다.

“밭에 목숨 걸었어? 왜 거기까지 가서 쓰러지고 그래! 왜 사람 속상하게 만드냐고.”

엄마가 손을 까닥거리며 나를 불렀다.

“엄마 수술…… 해야 된다…… 하디?”

“여기 의사 선생님들 엄청 베테랑이라니까……. 빨리 일어날 생각이나 해.”

“얼굴 펴라. 나 안 죽는다.”

엄마는 한 자 한 자 똑바로 말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기운이 금세 빠져 바람이 새는 목소리만 들렸다.

나 주그믄 너 아부지…… 시름시름 앓다 죽을 테고……. 그러면 석연이 너 혼자 남는데……. 못 죽는다. 나는 너 두곤 절대 못 간다.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간호사가 짧은 면회 시간이 다 됐다며 매정하게 커튼을 쳤다. 도저히 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간호사가 내 등을 두드렸다. 귀가 멍해지고 그냥 눈물만 계속 나왔다.

나 혼자 남을까 봐, 그래서 저렇게 강하게 지내셨다. 다른 가족도 못 가질 나 때문에 자신들 다 떠나면 나 혼자 남을까 봐 끝까지 악착같이 살아남겠다고 하셨다.

다시 중환자 대기실 소파에 주저앉다시피 했다. 옆에 앉은 아주머니가 내게 티슈를 건넸다.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끅끅대는 숨을 삼켰다. 눈알이 전부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당신들이 무슨 죄를 지어 나 같은 놈을 만나서 이리도 고생을 하는지 죄스러움에 몸이 움츠러들었다. 고생만 시켰다.

아버진 나 때문에 퇴직도 앞당기셨고 엄마는 친구들에게 우리 아들은 아직 결혼할 생각 없다며 늘 변명을 해야 했다. 곧 수술이 시작된다는 간호사의 말에 더는 혼자 있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있는 병실로 비척비척 걸어가 누워 계신 침대 앞에 앉았다. 이름도 모르는 아주머니가 준 티슈로 얼굴에 남아 있는 눈물의 잔해를 닦아 내렸다.

언제 깨어나셨는지 아버지가 옆으로 누워 나를 보고 있었다.

“괜찮……으세요?”

눈물은 감춰도 맹맹한 목소리는 숨길 수가 없었다.

“그래……. 네 엄마는?”

“수술 들어가셨어요. 길어도 네 시간이면 된대요. 어려운…… 수술이 아니라 괜찮대요.”

“너도 여기 좀 누워서 쉬어라.”

이 상황에서도 날 걱정하는 아버지에게 더없이 죄송할 뿐이었다.

“괜찮아요. 좀 더 쉬세요. 수술 끝나면 말씀드릴 테니까.”

어깨를 늘어뜨리고 천장을 올려다봤다. 병실에 달린 째깍대는 시계침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왔다.

네 시간이면 충분하다는 말과 달리 여섯 시간이 넘도록 수술은 끝나지 않았다. 수술이 진행되는 동안 두 손을 포개고 이름 모를 신에게 빌었다.

기도하는 나는 지옥에 서 있는 것만 같았다. 끔찍했다.

***

수술은 무사히 끝났어도 이틀간이 문제였다. 수술 후 합병증이 생기는지 부정맥이 발생하진 않는지 중환자실에서 나올 때까지는 안심할 수가 없었다. 다행히 부작용 증상은 일어나지 않아 일반 병실로 옮긴 것이 오늘 오전이었다.

하루는 밤새 중환자 대기실을 지키고, 또 그다음 날은 입원실에서 새우잠을 자야 했다. 새벽만 되면 엄마는 가슴이 불타는 것 같다며 고통스러워했다. 자다 말고도 식은땀을 흘리며 너스콜을 몇 번이나 눌러야 했다.

출근시간 전까지 나도 한두 시간밖에 자지 못한 터라 울렁거리는 멀미가 일었다. 오피스텔에서 가져온 옷을 갈아입는 나를 엄마가 기운 없는 얼굴로 바라봤다.

“니는 오늘부터는 니 집에 가서 자라.”

잔뜩 갈라진 목소리에 고통이 스며들어 있었다.

“이번 주만 여기서 지낼 거야. 의사 선생님이 차도가 좋아서 금방 퇴원할 거라니까 밥도 잘 먹고.”

“그러면, 나가 이대로 쓰러질 사람이 아닝게.”

“그런 사람이 심장 떨어지게 만들어!”

“어디서 큰소리여. 사람이 살다 보믄 수술도 하구 그런거지.”

“안 그런 사람들도 많아. 갔다 와서 말해. 나 회사 가야 돼.”

“괜히 피곤하다구 사람들 괴롭히지 말구.”

“알았어. 아버지 내 오피스텔 들렀다 온다고 했으니까 잠시만 혼자 있어.”

“이잉, 갔다 와.”

소독약 냄새가 자욱한 병원을 나와 지하철역으로 걸어갔다. 무슨 정신으로 이 이틀을 보냈는지, 다시 겪는다면 아마 내가 먼저 죽고 말 것 같았다.

유난히 눈부신 햇빛에 시린 눈을 비비며 역으로 들어갔다. 출근 대란이라 지하철에는 앉을 자리도 없었다. 손잡이를 잡고 꾸벅꾸벅 졸며 회사로 향했다.

여의도역에 다다라서는 자칫 내리는 곳을 놓칠까 봐 억지로 잠을 깨워야 했다. 회사로 걸어가면서도 몰려오는 졸음에 연방 걸음을 비틀거렸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회사는 멀게 느껴지는지, 그대로 고꾸라질 것만 같았다.

나는 천 리 길을 달려온 사람처럼 기운 없이 카페테라스로 향했다. 진한 아이스커피를 주문해 원샷하고 다시 빈 잔에 커피를 채웠다. 과도한 카페인에도 정신이 맑아지는 법은 없었다.

먼저 출근한 이재화와 곽일영이 어제에 이어 오늘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마중했다.

“석연 씨, 어머니는 좀 괜찮으셔?”

“예, 많이 좋아지셨어요. 수술 후 나쁜 증세는 아직 없대요.”

“다행이다.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다고.”

“그래요, 엊그제는 정말 눈앞이 새까맸다니까요.”

두 사람 모두 제 일처럼 챙겨 주는 덕에 수술 다음 날도 오전에 조퇴할 수가 있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우리끼리 뭉치자고 했잖아. 꼭 물어봐야만 알려주고! 난 첨에 석연 씨가 아픈 줄 알고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곽일영이 내 팔뚝을 잡고 흔들었다.

“죄송해요.”

“빨리 기운 내. 석연 씨 기운 없으면 나도 힘들어.”

“그럴게요.”

둘을 향해 애써 웃었다. 자리에 앉아 어제 펼쳐 놓고 나간 디자인 종이를 정리했다. 곧바로 휴대폰도 꺼내 충전기를 연결했다.

배터리가 나가 있는 게 언제부터인지도 몰랐다. 암전된 화면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눈을 꾹꾹 눌렀다.

빈속에 커피를 마셨더니 더 울렁거리는 것 같았다. 순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이를 악물고 화장실로 한달음에 달려갔다. 토를 해도 묽은 위액이 섞인 커피만 쏟아져 나왔다.

먹은 게 없어 헛구역질을 몇 번 하고 세면대에서 입을 헹궜다. 눈이 퀭하게 내려앉아 꼴이 말이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진여원이 돌아오는 날이었다.

불과 미령이네 가게를 다녀올 때까지만 해도 그가 오기를 바라는 부푼 기대에 젖어 있었는데, 역시나 사람 일은 모를 일이다. 헛웃음이 나올 뿐이었다.

행여 이재화와 곽일영이 걱정할까 봐 오바이트한 기색을 지우고 나서야 사무실로 돌아갈 수 있었다.

휴대폰에는 메시지가 몇 통이나 도착해 있었는데, 스팸 사이에 섞인 문자 하나가 내 눈을 사로잡았다. 보낸 이는 진여원으로 문자는 단출했다.

[답장 보내.]

이 인간은 대체 무슨 답장을 보내라는 건지. 깔깔한 입 안을 물로 달랬다. 단 일주일 만이었다. 그런데도 진여원을 본 지가 까마득한 것 같았다.

솔직히 그를 보고 위로받고 싶었다. 나 정말 힘들었노라고, 엄마 잘못될까 봐 세상이 무너질 만큼 무서웠다고 털어놓고 싶었다. 나는 답장을 보내지 않고 휴대폰을 원래 자리로 돌려놓았다.

“수면실 가서 좀 자고 올래요?”

이재화가 내 앞으로 칼로리바 하나를 내밀었다.

“어제 꽤 잤어요. 감사해요, 잘 먹겠습니다.”

억지로 입 안에 뻑뻑한 칼로리바를 쑤셔 넣었다. 커피도 같이 입에 넣어 칼로리바를 물렁하게 만들어 목구멍으로 넘겼다. 아무래도 억지로 버티다가는 쓰러지지 않을까 싶었다. 호의를 받아들이고 차라리 나중에 집중해서 일을 하는 편을 선택했다.

“저, 조금만 자고 오겠습니다. 세 시간만요.”

“응응, 내가 이따 점심 먹을 때 깨워 줄게.”

둘에게 고개를 꾸벅하고 사무실을 나왔다. 고개를 양옆으로 왔다가 갔다가 풀며 엘리베이터 앞으로 다가갔다. 수면실이 2층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 한 층 차이에도 힘겨움을 느꼈다.

1층에서 올라온 엘리베이터가 내 앞에서 열렸다. 허준성이 나를 보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나는 표정 지을 힘도 없어 그대로 지나쳐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허준성이 엘리베이터 문을 잡더니 지껄였다.

“초상이라도 났어요? 아침부터 왜 그딴 얼굴입니까.”

“회사 잘리든 말든 주먹부터 나갈 거 같으니까 제발 주둥아리 좀 다물어요.”

놈을 본 이래로 최고로 황당한 얼굴이었지만 통쾌하지도 않았다. 그의 손을 탁 쳐내고 엘리베이터 3층 버튼을 눌렀다.

3층의 수면실로 향하는 동안 아무도 마주치지 않기를 바랐다. 왜 유독 힘들고 모습이 안 좋을 때만 사람들을 마주치는지 모르겠다.

커피를 홀짝이던 재운 선배가 나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평소처럼 웃는 걸 보니 아직 우리 팀만 내 사정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어? 우리 석연이, 어디 아파?”

“예, 조금요.”

“얼굴이 아주 반쪽이 됐네. 진 사장이 보면 내가 혹사시킨 줄 알겠어.”

“그러게요.”

선배의 농담에 가볍게 응수하고는 수면실로 걸어갔다. 선배가 따라오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한숨 자고 괜찮아지면 바로 연락해. 점심이라도 같이 먹게.”

대답할 힘이 나지 않아 고개만 끄덕거렸다. 어두운 수면실에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몸을 던졌다. 푹신한 스프링이 병원에서 혹사당한 등을 달래 주었다.

나는 시체처럼 가만히 누워 가슴에 손을 포갰다. 등에 셔츠가 배겼지만 꼼짝도 하지 못했다. 눈을 감았다. 3초, 2초, 1초. 0을 세기도 전에 순식간에 수마에 빠져들었다.

***

눈을 천천히 꿈뻑거리다가 화들짝 놀라서 일어났다. 벽면에 달린 형광 시계가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여섯 시간이나 정신없이 잔 것이었다. 그래도 꽤 잤다고 무겁던 몸이 가벼워져 있었다.

부리나케 침대 시트를 정리하고, 계단으로 달려 내려가서 사무실 문을 열었다. 이재화와 곽일영이 동시에 잘 잤어? 하고 물었다.

“죄송합니다. 깨워 주실 줄 알고…….”

“응, 지금 깨우러 가려고 했는데 알아서 일어났네. 사장님이 찾으셔서 잠깐 외근 나갔다고 했어.”

“사장……님이요.”

“아무래도 우리보다는 석연 씨가 직접 말씀드리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사유도 사유지만 잔다고 하기에는 좀 그렇잖아. 아마 사장실에 계실 테니 다녀와.”

“예, 감사합니다.”

요 며칠 계속 감사하다는 말만 전하고 있었다. 나는 위에서 내려왔던 것도 무색하게 다시 3층으로 향해야 했다.

잠기운도 아예 없앨 겸 비상계단으로 걸어 올라갔다. 반쯤 열린 사장실에서 다소 언성이 올라간 재운 선배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엿들으려고 한 것은 아니었으나 들어갈 타이밍을 놓쳐 버렸다.

“우리 손해 제로로 수렴한 거 새어 나가면 백 프로 의심할걸? 그니까 내 말은 적어도 몇 천만 원 정도는 손해 보는 척하자 이거지.”

“내가 왜.”

“야, 진 사장. 그 정도 손해로 국내 브랜드 등 돌리지 않는 게 어디야.”

“어차피 손해 보든 안 보든 말은 돌게 마련이야. 이 바닥 하루 이틀 있어? 아예 억 단위로 손해 봐주고 기획 뺏긴 회사라고 동정심이라도 받을까?”

“내 말은 적어도 상도덕은 지킨 척 굴자 이거지.”

“상도덕 어긴 건 그쪽이고.”

“그건 그런데. 미끼는 우리가 흘렸…… 아, 아니다. 몰라. 머리 터지겠네! 그럼 네가 알아서 해.”

“그럴 생각이야.”

“하여튼 간에, 이번 주 금요일에 10시까지 디바리 대표 만나고 와. 꼭 가라, 자리 주선해 놨어. 너한테 할 얘기 있다더라.”

재운 선배의 목소리가 가까워진다 싶더니 빠끔히 열린 문이 휙 열렸다. 선배가 나를 보고 눈을 키웠다.

“어라, 석연이 언제 왔어.”

언성을 키운 것을 잘못 들었나 싶을 정도로 평이했다.

“방금요.”

“그래?”

선배가 무슨 말이라도 들었나 싶은 기색으로 나를 살폈다. 내가 듣지 말아야 할 대화인 것 같아 못들은 척 의문 섞인 눈으로 바라봤다.

“몸은 좀 괜찮아?”

“예, 좋아졌어요.”

“다행이네. 진 사장, 석연이 왔다.”

재운 선배가 사람 좋게 웃고는 진여원에게 목소리를 높였다.

“난 볼일 봤으니 들어가 봐.”

“예.”

선배가 먼저 나오고 이어 내가 노크를 하고 들어갔다. 문이 달칵하고 닫혔다. 나는 숙인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진여원의 미간에 설핏 인상이 가 있었다.

일주일 만에 보는 얼굴이 새롭기도 하고 또 가슴이 울렁일 정도로 익숙하기도 했다.

“외근은?”

“……잘 다녀왔습니다.”

“밥은.”

“먹었습니다.”

진여원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휴대폰을 잡았다. 어디론가 전화를 연결한 그가 단팥죽 두 그릇을 주문했다. 웬 단팥죽인가 싶어서 멀뚱히 서 있었다. 손님 접대용 소파를 가리키기에 걸어가서 앉았다.

“저 부르셨다고요.”

“불렀지.”

그런데도 용건은 꺼내지 않기에 내가 다시 말을 이었다.

“왜……. 부르셨습니까.”

“피죽 먹이러.”

내 얼굴이 피죽도 못 얻어먹은 것처럼 보였나 보다. 소파에 덩그러니 앉아 있는 동안 진여원은 책상 위에 걸터앉아 서류들을 훑어보고 있었다.

그간 인정하진 않았지만 지나칠 정도로 잘생긴 옆모습에 사실 몇 번이고 넋을 놓을 때가 있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흘끗흘끗 그를 쳐다봤다.

한참을 서류에 머물렀던 진여원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박석연, 무슨 일 있어?”

미간의 인상이 서류를 볼 때보다 더 진해졌다.

“일은요, 무슨. 단팥죽 기다리는데요. 제가 두 그릇 다 먹어도 됩니까?”

“일단 이거부터.”

진여원이 바닥에 놓인 쇼핑백을 내게로 휙 패스했다. 커다란 박스가 쇼핑백 안에 담겨 있었다. 나는 부스럭거리며 쇼핑백 안에서 상자를 꺼내 테이블에 올려놨다.

상자 뚜껑을 열자 흰 운동화를 선물 받았을 때처럼 고운 포장지에 신발이 싸여 있었다. 그걸 벗겨 내 신발 한쪽을 들었다. 두꺼운 밑창의 옆면에 은색의 테두리가 둘러져 있었다. 은박을 입힌 것처럼 반짝반짝거렸다.

전에 이것과 비슷한 모양을 본 적이 있었다. 진여원의 거실에 놓여 있던 낡은 캔버스화였다. 희고 낡았던 그것과 달리 이 캔버스는 짙은 다홍색을 띠고 있었다. 꼭 천연 염색된 홍시색 같기도 했다.

하이탑 흰 운동화보다는 단조롭고 익숙한 형태였지만, 그만큼 친숙한 느낌이 들었다.

“혹시 이거 제 겁니까?”

진여원은 말없이 신발을 두 손으로 쥐고 있는 나를 봤다.

“저 왜 주시는 겁니까.”

“까다로워서.”

제가요, 아님 제 발이요. 물으려는 순간이었다.

똑똑똑, 밖에서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주문한 지 10분밖에 안 된 거 같은데 초스피드다. 내심 감탄하고 있자 배달부의 손에서 단팥죽 두 그릇이 테이블로 내려왔다.

옥색의 도자기 그릇에 단팥죽이 한 가득이었고, 꽃무늬 떡이 그 위를 예쁘게 장식하고 있었다.

진여원이 값을 치르는 동안 나는 랩을 벗겨 냈다. 단팥죽에서 모락모락 김이 올라왔다. 사실 입맛은 그리 돌지 않았지만 원체 좋아하는 단팥이다 보니 밥보다는 나았다.

수저 포장지까지 뜯어내 팥죽에 푹 담갔다. 남은 한 개의 팥죽은 진여원 쪽으로 밀었다. 그러면서도 팥죽이 묻을까 다홍색 신발을 상자 안에 고이 넣었다.

그는 내 맞은편 소파에 앉아 나를 구경하기만 했다. 단팥을 싫어하나 보지. 나는 이왕 시켜 준 거 염치없이 다 먹을 생각이었다.

단무지와 함께 단팥죽을 위에서부터 떠먹었다. 꽤 실력 있는 주방장 솜씨인지 엄마가 해 주던 맛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번에는 그릇 깊은 곳의 단팥죽을 한 수저 떠서 후후 불었다. 식을 동안이나마 그에게 말을 건넸다.

“생각해 보니 전 사실 팥이 엄청 싫었던 거 같네요.”

내 말에 진여원이 적잖은 의문을 띄웠다. 그를 한참 보다 보니 포커페이스인 표정에서도 읽어 낼 수 있는 감정들이 꽤 됐다.

“어머니 고향이 시골이어서 방학만 되면 시골로 내려가 놀았거든요. 화장실도 푸세식이라 귀신이 나올까 봐 무서워서 볼일 보는 게 싫었는데, 내내 참았더니 할머니가 병 걸린다고 겁주시더라고요. 근데 팥을 한 움큼 먹고 화장실에 들어가면 귀신이 팥을 싫어해서 주변에 오지도 않는대요. 그래서 그다음부터 팥을 억지로 물고 화장실에 갔어요. 팥이 없을 때는 양갱을 대신 가져갔고요.”

“그래서?”

그의 잘생긴 얼굴에 보일 듯 말 듯한 미소가 맴돌았다.

단팥도 달고, 진여원이 날 보는 시선도 달아서 마음이 썼다. 지나치게 달아서.

“먹다 보니 이게 또 엄청 맛있는 거예요. 그 이후로 싫어하는 것도 계속 먹고, 또 하다 보면 익숙해진다는 걸 알았고요.”

“어른이네, 박석연.”

나는 거의 바닥을 보인 그릇에 수저를 내려놓았다. 쓱 입을 닦고 옆에 놓인 물까지 마셨다.

“그럼 제가 앱니까.”

퉁명스러운 어조로 대꾸하자 진여원도 평소와 다른 점을 느끼지 못했는지 더는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오지는 않았다. 여기에 더 있다간 약한 소리가 나올 것만 같았다.

쇼핑백에 신발을 넣고 진여원의 팥죽을 봤다. 그의 것은 아직 손도 대지 않아 왔던 그대로였다. 어차피 배달부가 와서 가져갈 것이기에 쇼핑백만 들고 일어섰다.

“잘 먹었습니다, 그리고 이건 감사히 잘 받아 가겠습니다.”

“정말 아무 일 없어?”

“예, 정말 없습니다.”

진여원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고 사장실을 나오려는 때였다.

“박석연.”

문고리를 잡고 밖에 서서 그의 말을 기다렸다.

“시간 더 필요해?”

“……아주 조금만 더 주시면 안 됩니까?”

“아주 조금이면 얼마나.”

그건 나도 모르겠다.

“정말…… 아주 조금이요. 나가보겠습니다.”

행여 동요하는 모습이 비춰질까 봐 더는 진여원을 보지 못했다. 문을 닫고는 쇼핑백을 손안에 그러쥐었다. 비상계단으로 향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인생에도 비상구가 좀 있었으면 좋겠다. 힘든 일이 생기면 어떻게든 빠져나갈 수 있게 말이다.

쇼핑백을 벌려 쥐어 박스를 내려다봤다. 정말 홍시 같은 스니커즈였다. 그리고 온전히 나를 위해 진여원이 만든 운동화 같았다.

비상계단에 쭈그리고 앉아 쇼핑백을 끌어안았다. 아직도 너무 달아 입 안이 쓰기만 했다.

쥐가 나는 다리를 두드리며 슬리퍼를 벗었다. 박스에 담긴 신발을 꺼내 주섬주섬 양발에 끼워 넣었다.

홍시 신발이 햇빛에 비쳐 발그레해지는 것처럼 진하게 물들었다. 몸을 일으켜 보자 신발은 기가 막히게도 완벽했다.

분명 세상에 어떤 신발도 나한테 이렇게 딱 맞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

아주 조금씩이지만 모든 게 좋아지고 있었다. 수술한 지 나흘 만에 부정맥이 발생해 애를 먹었지만, 일반적인 치료로도 충분히 완치할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로 인해 퇴원일이 길어지긴 했어도 엄마는 잘 먹고, 또 그만큼 잘 움직였다. 엊그제부터는 내가 집에서 출퇴근을 해도 괜찮을 정도였다. 물론 퇴근시간에 맞춰 꼬박꼬박 병실을 찾은 건 당연했다.

몸을 씻고 나온 아버지가 내 방을 죽 둘러봤다. 그간 왔다 갔다 하기는 했지만 제대로 보는 건 오늘이 처음이신 듯했다.

코 고는 소리 듣기 싫다고 쫓겨난 것이지만, 엄마로선 고된 간호에 한시도 쉬지 못한 아버지를 생각해 한 말이었다.

“생각보다 깨끗하게 사는구나.”

“적어도 일주일에 한두 번은 청소해요.”

“그래, 그래야지. 남자 혼자 산다고 엉망인 것만큼 보기 싫은 건 없다.”

나는 침대에 앉은 아버지에게 맥주 한 캔을 내밀었다.

“너 요새도 술 자주 마시는가 보구나.”

“샤워하고 한두 잔은요.”

나도 캔 맥주를 하나 따서 입에 흘려 넣었다.

“그래도 석연이 네가 있어서 얼마나 든든한지 모른다. 그때만 생각하면 나는 까마득해서.”

“더는 생각 마세요. 앞으론 좋은 생각만 해요.”

“그래, 그래야지. 그나저나 너 회사는 별일 없는 거냐? 근래 많이 힘들었을 텐데…….”

“직원도 사장님도 좋은 사람들이라 괜찮아요. 감사할 뿐이죠.”

“여원이 그 친구가 사장이라고 했었지?”

“……예.”

맥주의 탄산을 입에서 없애 가며 목구멍으로 넘겼다. 아버지도 시원하게 맥주를 들이켰다. 내가 술 잘 먹는 건 아버지를 닮아서였다.

“저희 사장님이 조교일 때 아버지 밑에서 일했다고 하셨죠?”

“그랬지. 어찌나 완벽주의자든지 내가 다 애를 먹을 정도였다. 허허.”

내가 보기엔 진여원이나 아버지나 막상막하였다. 그러고 보니 전에 ‘하물며 석연이 너 때도…….’ 그런 말씀을 하시다 말았다.

그러나 쉽게 되물을 수 없는 건 진여원 때문은 아니었다. 아버지에게 다시금 내 대학 시절을 상기시켜 드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분명 나보다도 더 괴로운 기억으로 남아 있을 테니까.

“이제 자요. 아버지도 많이 피곤하실 텐데.”

“그래, 침대에서 같이 잘까?”

“스프링 내려앉아요.”

나는 바닥에 남는 이불을 펴서 누웠다. 사이좋게 천장을 보고 누웠지만, 아버지와 달리 나는 한참이나 잠들지 못했다.

나는 엎치락뒤치락하며 이불을 다리 밑까지 내렸다. 저 신발장 안에 보관한 홍시 스니커즈가 잠결에도 눈에 아른거렸다.

아마 아버지가 계시지 않았으면 꺼내서 신어 보고 잠이 들었을 것 같았다.

***

아침에 일어나니 아버지는 먼저 병원에 가셨는지 없었다. 회전하는 선풍기의 고개만 내 쪽으로 내려져 있었다. 또다시 아침의 시작이었다.

5분 만에 간단 샤워를 마치고 밥 대신 냉동고에 있는 비비빅을 꺼냈다. 이른 오전부터 땀이 날 정도로 더웠다. 바야흐로 진정한 여름이 시작된 것이다.

나는 퇴근 후에 엄마에게 가져다줄 속옷을 챙겨 가방에 넣었다. 아버지가 시골집에서 가져오신 것이었다. 막대 아이스크림을 입 안에 녹여 가며 출근길을 재촉했다. 점심시간에는 은행을 들러 돈을 뽑아야 했다. 오늘이 병원비 1차 지급 날이었다.

병원비로 700만 원이 넘게 들었지만 의료보험공단에서 95프로 환급을 해 준다고 하니 한편으론 다행이었다. 한동안은 정신없는 날들이 계속 이어질 것 같았다.

가던 도중에 김밥 집에 들러 이재화와 곽일영이 좋아하는 치즈 김밥 일곱 줄을 샀다. 김밥이 들어 두툼해진 비닐봉지를 그러쥐고 회사로 향했다.

지금 몸담은 회사가 체일 슈즈가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체일 슈즈였다면 이렇듯 내 사정을 봐주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저 혼자만 힘드냐며 손가락질했을 수도 있겠지.

회사의 분위기는 한 사람, 한 사람으로 인해 달라지는 경우가 많았다. 누군가 다른 이의 험담을 하기 시작하면 너도 나도 분위기에 편승하는 게 파벌의 시초였다.

체일 슈즈는 이미 그러한 분위기를 주도하는 자들이 높은 직급부터 포진해 있었다. 회사 분위기가 아무려면 어떤가, 제 일만 잘하면 되지 라는 소리는 그런 분위기를 겪어 보지 못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말이었다.

따지고 보니 김대영이 아니었으면 이 좋은 회사로 옮길 생각도 못 했을 것이다. 처음으로 놈에게 엎드려 절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물론 개새끼인 건 변함없지만.

이재화와 곽일영이 도착하기 전에 온 터라 그들의 자리에 각각 세 줄과 두 줄씩 김밥을 따로 올려 두었다. 나머지 한 줄씩은 진여원과 재운 선배의 몫이었다.

치즈 김밥을 좋아하는지 아닌지까지는 알 겨를이 없었다. 먼저 3층의 사장실을 들러 문이 잠긴 것을 확인하고 문고리에 비닐봉지를 걸었다.

이어 남은 김밥 하나를 손에 들고 재운 선배의 방으로 향했다.

환기 중인지 이사실이 활짝 열려 있었다. 밖에서 똑똑 문을 두드리자 소파에 손을 대고 푸쉬업을 하던 선배가 들어오라며 손짓했다.

“아침 드셨어요?”

“아직.”

“이거 치즈 김밥인데 좀 드세요.”

“야~ 우리 석연이 예쁜데 야박하네. 한 줄이 뭐야, 한 줄이.”

“다음에 더 사다 드릴게요.”

은박지를 건네받은 선배가 쓱쓱 까더니 입에 김밥 두 개를 휙 집어넣었다.

“석연이 너 그날, 솔직히 불어라.”

느낌이 왔다. 사장실에서 엿 들은 걸 말하는 것이라고.

“뭘요.”

“다 들었지?”

“아닌데요.”

그때와 똑같이 딱 잡아뗐다.

“연기를 하려면 제대로 하든가, 거짓말 참 못해요. 동공 흔들리는 거 그냥 무시해 준 거야.”

“제가 워낙 순수하다 보니까 거짓말을 못하네요.”

재운 선배가 크크거리며 웃었다.

“어차피 곧 알게 될 거니까 뭐 상관없지.”

“세노스 레인슈즈 얘기요?”

“어. 세노스에서 우리 기획 가져간 거 맞거든.”

설마 싶었지만, 그 정도는 나도 눈치 채긴 했었다. 선배가 이번에도 김밥 두 개를 입에 넣고 씹었다.

“낚싯대 흔든 건 윰이지만. 우린 처음부터 레인슈즈 기획할 생각 없었거든.”

“예?”

애초에 기획할 생각이 없었다니? 내 입에 김밥이 있었으면 그대로 내용물이 다 내보여졌을 것이다.

“어떤 멍청이가 여름 다 끝나갈 마당에 레인슈즈를 기획하냐? 허울 좋은 포장으로 둘러씌운 거지. 한정이다 뭐다 말이야.”

“그럼 왜…….”

“윰이 신생이다 보니, 여기저기서 압박 들어오거든. 어떻게든 내리누르려고 하고 말이야. 그런데 먼저 세노스가 선제공격 개시한 거지. 시장 인지도 있는 지들이 우리보다 더 먼저 레인슈즈를 선보이면 우리가 피박 쓸 거라 생각한 거야.”

“그럼 세노스가 아니라도 다른 브랜드에서 먼저 발표했을 수도 있었겠네요.”

“아니.”

재운 선배가 눈을 접으며 짓궂게 웃었다.

“진 사장이 낚싯대는 세노스한테만 흔들었어. 자자, 그럼 우리 일개 직원은 여기까지.”

“야박한 건 이사님인데요.”

“꼬우면 위로 올라와.”

“수석 디자이너 자리를 욕심부리고는 있죠.”

“하극상할 생각이야?”

무슨 말인지 몰라 어리둥절하게 있었다. 선배가 눈썹 한쪽을 치켜 올렸다.

“너희 팀 곽일영이 수석 디자이너인 거……. 몰랐어?”

“곽 대리님이요?”

“수석 디자이너보다 대리가 좋대. 발음이 좋다나.”

생각해 보니 곽일영다웠다.

진여원 앞에서도 인센티브가 몇이냐며 변죽 좋게 물었던 것과, 아무리 친구라도 평소 이재화와 직급 차이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하긴 수석 디자이너이기에 한 달에 두 번 쉬는 것도 받아 주는 거겠지. 사실 별로 궁금하지 않던 사소한 미스터리가 풀렸다.

“기운도 좀 찾은 것 같은데 테니스 한판, 어때.”

“그럼……. 딱 한판만요.”

8시 30분을 가리키는 시간을 확인하고 말했다.

출근 시간이 가깝다 보니 엘리베이터가 연방 바쁘게 움직였다. 기다리느니 뛰자는 선배와 함께 계단을 올랐다.

테니스장의 공들이 바람에 함부로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걸 다 주워 바구니에 담고 한 개만 꺼내 바닥에 튕겼다.

문득 진여원이 내 발 사이즈를 어떻게 기가 막히게 알아냈는지 감이 왔다. 저 네트 옆에서 그가 내 발을 손에 쥔 적이 있었다.

손만으로 사이즈를 감지했다는 게 놀랍기는 했지만, 진여원이 어디 보통 인간이던가.

“박석연! 와라!”

선배의 고함에 기합이 팍 들어가 있었다.

“그럼 갑니다.”

왼손에 든 공을 위로 던져 테니스 채로 내리쳤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모서리 쪽으로 공이 거침없이 날아갔다. 한발 늦은 재운 선배가 째려보듯 나를 봤다.

“누가 그 사장에 그 부하 아니랄까 봐 모서리로 치냐.”

“이번 건 실수였습니다.”

“말 나와서 하는 말인데, 우리 석연이 사장님께서 오늘 내 목 짤짤 잡을 거 생각하니 벌써부터 아찔하다.”

서브한 공을 쳐 내는 선배가 목소리를 키워 가며 코트를 뛰어다녔다. 나도 똑같이 코트를 뛰며 물었다.

“뭐 잘못하셨어요?”

“잘못은 안 했지. 허억, 걔네 아부지가 요새 나 엄청나게 들볶잖냐? 괜히 윰 와 가지고는 고생만 지지리 한다.”

나는 공을 맞받아치며 숨을 골랐다. 선배가 라인 밖으로 나간 공을 주워 오며 말했다.

“결혼을 영 안 할 생각인지 선 자리 들어오는 족족 다 퇴짜 놔서 말이지, 걔네 아부지 아주 약 올랐어. 오죽하면 날 포섭해서 거짓말까지 시키냐. 하여간 독한 건 둘 다 똑같다니까.”

“거짓말……이요?”

“딱 한 번만 사정하는 바람에 디바리 팔아먹었지. 오후에 만나면 의심할 거 같아서 오전으로 잡았다더라. 디바리 대표는 웬걸 화장 곱게 한 아가씨가 앉아 있겠지.”

‘이번 주 금요일에 10시까지 디바리 대표 만나고 와. 꼭 가라, 자리 주선해 놨어.’

그때 그 말이 그거였나. 나는 날아오는 공을 피하지 못한 채 그대로 허벅지에 맞아야 했다. 다리에 맞고 구르는 공을 주우며 자문했다.

박석연, 새삼스레 뭘 놀라고 그러냐. 이미 예상하고 있던 거 아니었어? 라고.

그나 나나 부모님을 안심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은 같았다. 그들이 떠나도 우리가 혼자 남지 않는 것. 그래서 나는 그의 선물이 정말 달고도 썼다.

내 욕심만으로 부모님 가슴에 대못을 박을 수는 없었다. 이미 엄마의 가슴엔 죽을 때까지 지워지지 않는 상처가 남았으니까.

나 혼자 좋자고 엄마가 했던 말들을 도저히 지워 버릴 수가 없었다.

사람이 다 좋은 것만 하고 살 수는 없는 법이고, 하기 싫은 것도 억지로 하다 보면 익숙해지는 것이다.

내가 가정을 꾸려 가족과 함께 부모님을 뵈러 가면, 엄마도 더는 자식놈 걱정 없이 편하게 여생을 지내실 수 있을 거다.

처음부터 나 하나만 마음먹으면 모두가 좋아질 수 있던 삶이었다.

진여원도 후에 내 선택에 감사할지도 모른다. 잠깐 남자한테 빠져 평범한 길을 벗어날 뻔했다고 안도하는 때가 올지도…….

그래, 나 역시 결혼하고 보니 내 성향이 바이임을 깨달을지도 모르지 않나.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고 있다. 내가 결혼은 무슨.

깊이 생각하지 않으려 했지만, 막상 닥쳐 보니 날아온 공이 하나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가슴이 아팠다.

나는 공을 기다리고 있는 선배에게 서브를 넣으려다 팔을 내렸다.

“이사님.”

“왜?”

“여기까지 해도 될까요? 아직 몸이 안 좋아서요.”

재운 선배가 정말 어디 아픈가 하며 나를 살폈다. 공을 바구니에 던져 넣고 테니스 채도 보관함에 넣었다.

“너 진짜 어디 크게 아픈 건 아니지?”

“피곤이 쌓여서 그런 것 같아요.”

재운 선배는 혼자라도 놀아야겠다며 벽과 마주 봤다. 스쿼시처럼 벽과 싸울 생각인 것 같았다. 나는 계단 난간을 잡으며 내려왔다.

욱신욱신, 언제나 그렇듯 신발이 또 말썽이었다. 흰 운동화나 홍시 스니커즈를 신고 나왔다면 뒤꿈치가 다칠 일은 없었을 텐데…….

“박석연은 발도 왜 이렇게 못났냐.”

마치 진여원이 하는 듯한 말투를 자아냈다. 처음엔 나보고 못생긴 감이라고도 했었다. 더 못생겨졌다면서 놀리기나 해 댔고.

이제는 왠지 알 것도 같았다. 정말 그가 내가 못나서 한 말이 아님을. 그래도 선물 주면서까지 잘 신으라는 말은 못 할망정 까다로워서 준다고 하다니.

독설은 잘해도 진여원 정말 연애는 못한다. 그런데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둘 다 바보였다.

***

점심시간이 지나서야 출근한 진여원은 곽일영의 구두에 최종 오케이 사인을 내렸다.

내 것은 이미 완료가 되었으니 3F 기획이 코앞으로 다가왔어도 조급할 건 없었다. 바로 가을 신상 준비가 시작될 테지만, 일단은 한숨 돌리는 타이밍이었다.

“아이스크림!”

곽일영이 애들처럼 꽥 소리를 질렀다.

“사다 드려요?”

“비비빅 빼고.”

이재화가 말했다.

“과장님 저 자꾸 팥남 취급하시네요, 싫어하는 사람한테는 안 권합니다.”

“가위바위보 해서 진 사람이 사 오는 걸로 하죠.”

이재화가 내 말을 쏙 잘라냈다.

“그냥 제가 다녀올게요. 곽 대리님은 쌍쌍바, 과장님은 스크류바 맞죠?”

아이스크림 종류를 두 번이나 확인하고 카페테라스로 내려왔다. 아이스크림 냉동고는 음료수 진열대 밑에 놓여 있었다. 잘 팔리지 않는 비비빅은 없어서 대신 인절미 아이스크림을 찾아냈다.

쑥- 내 손 위로 누군가의 손이 들어왔다. 고개를 옆으로 틀었다. 어쩐지 예상은 했지만 진여원이었다.

“줄 좀 서시죠.”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조용히 말했다.

“양심이 없거든.”

몇 번 안을 뒤적거리고 나온 그의 손은 맨손이었다. 나도 쥐고 있던 아이스크림을 전부 내려놓고 허리를 폈다.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여기서?”

“아뇨.”

진여원이 먼저 성큼성큼 걸었다. 주차장으로 향하는가 싶더니 나를 돌아보고는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

3층으로 올라가는 동안 다른 직원 몇몇과도 마주쳤다. 아무리 인기가 많은 사람이라도 사장이라는 직급 때문인지 다들 입을 조개처럼 다물고 있었다. 내 입도 지금은 마찬가지였다.

사장실로 따라가며 정리되지 못한 생각들을 차분히 풀어나갔다. 사실은 정리하고 말 것도 없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단 하나였다.

나는 사장실의 문이 닫히는 걸 확인하고 그를 마주 봤다.

이제는 안경을 쓴 모습도, 그렇지 않은 모습도 좋았다.

내 말이 끝남으로써 어떤 결과가 벌어져도 나는 회사만 다닐 수 있으면 족했다. 멀리서 구경만 하는 것 정도는 괜찮을 것이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말을 훅 뱉었다.

“선보셨다면서요.”

진여원은 놀라지도 않고 잠시 생각에 잠긴 듯 굴었다. 그러다 이내 나를 쳐다봤다.

“변명 같은 거 안 하시는 분이니 긴말 안 하겠습니다. 앞으로도 쭉 선보세요.”

“그걸 왜 네가 정해.”

모르고 갔다고, 재운 선배와 아버지에게 속아서 갔다고 말할 수도 있는데 그는 말하지 않았다. 나는 정말로 확신했다. 이 사람은 나를 아웃팅시킨 사람이 아니었다.

맞다, 상황이 어찌 되었든 진여원은 아니었다. 그리고 이제 그런 것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사장님은 잠시 길을 잘못 든 거니 원래 가던 길 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저 역시도 정신 차리고 선보려고 합니다.”

진여원의 분위기가 평소보다 더 고요하게 가라앉고 있었다. 그는 마치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변명 다 빼고, 하고자 하는 말이 뭐야.”

“……선보시라고요.”

내 말에 그의 시선이 더없이 차가워졌다.

“그럼 딱 잘라 퇴짜 놔.”

가슴이 지끈거렸다.

“제가…….”

그의 말대로 딱 잘라 퇴짜를 놓으면 되는데도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퇴짜 놓으면 끝나는 겁니까?”

내가 당신에게 끌리는 감정도, 당신이 나를 향한 감정도 말로써 끝낸다고 정말 사라질까?

다물려 있던 그의 입매가 모양 좋게 움직였다.

“박석연.”

나를 부를 때의 그의 입 모양은 언제나 내 시선이 그곳에 머물게 했다.

“내가 널 좋아하는 게 잘못된 길이야?”

추궁하는 듯한 그의 말은 나를 굳게 하기에 충분했다. 사람을 좋아하는데 성별은 상관없었다. 다만 좋아한다는 마음만으로 모든 현실이 해결되는 건 아니었다. 진여원 역시도.

“결혼……하셔야죠.”

“안 해.”

“앞으로 이런 식으로 선은 보실 거잖아요.”

“안 봐.”

단호한 어투에 눈꺼풀이 깜빡, 깜빡, 빠르게 경련했다. 그를 거부할 수 있는 모든 이유가 단 두 마디의 대답으로 사라져 버렸다.

“근데 저는…… 해야 합니다.”

진여원이 내 진심을 파헤치듯 나를 봤다.

“저도 그냥 남들처럼 좀 편하게 살고 싶습니다. 더 이상 부모님께 걱정 끼쳐 드리기도 싫고요. 그러니까……. 사장님이 대신 저 퇴짜 놓으시면 안 됩니까? 솔직히 저 사장님 퇴짜 놓으러 왔는데……. 도저히 못하겠습니다.”

진여원이 기가 막힌 듯 입술을 비틀었다.

그런데 이렇게 그를 보고 있자니 천하의 패륜아가 되어 부모님이 아닌 진여원을 선택하게 될 것만 같았다.

“네가 퇴짜 놓는 거랑 내가 하는 거랑 뭐가 달라.”

“그래야 제가 회사 편하게 다닐 수 있지 않겠습니까? 사장님이 절 퇴짜 놓으시는 거니까 불합리한 처사를 걱정하지 않아도 될 테고요. 전 윰이 좋습니다. 계속 여기에 있고 싶습니다.”

일부러 그랬다. 나 같이 열 받게 하는 놈 따로 없으니 정이나 떼라고. 이 상황에서도 제 일터나 월급만 걱정하는 이기적인 놈이라고.

이것으로 그의 마음이 떠나 버리면, 아무리 내가 그를 좋아해도 소용없는 일이 될 거다. 그렇게 된다면 내가 부모님을 등질 일도 없을 테니까.

“전 사장님이 아니라 저희 부모님을 선택했습니다. 그분들 가슴에 더는 못을……. 못 박겠습니다.”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나는 표정이 무너지는 것을 애써 막아야 했다. 그런데 어째서 그가 지금 나보다 더 아파 보이는 건지 모르겠다.

꾹 다물린 내가 좋아하는 입술과 나를 쳐다보는 저 시선이 상처를 담고 있는 것 같아서 뱃속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맴돌던 혼잣말들이 속에서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진독사, 나 말이지. 당신 오면 우리 연애 한번 화끈하게 해 보자고 말하려고 했는데, 입이 안 떨어지더라. 울 엄마 저렇게 병실에 누워 있고, 아버지야말로 내 몰골보다 더한데 지금 내가 그깟 사랑 타령할 수는 없잖아. 엄마가 그러더라고. 나 혼자 남을까 봐 쉽게도 못 죽겠다고. 근데 웃긴 게 왜 하필 엄마가 이때 쓰러졌는지 그게 정말 속상하더라. 그런 생각을 하는 나 자신이 더없이 경멸스러워서…….’

진정 나 스스로에게 회의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박석연.”

침묵하던 그가 이내 내 이름을 불렀다. 여느 날과 달랐다. 답답하게만 느껴지는 부름이었다.

“너 정말 어렵다.”

머리가 어질했다. 내가 모를 깊이를 가진 그의 음성에. 그에게 다가가 저 굳어 버린 얼굴에 손을 맞대고 싶었다. 그러지 않도록 주먹을 꽉 그러쥐었다.

“그럼 다 이해하신 것으로 알고 들어가 보겠습니다.”

이 이상 버틸 수 없음에 뒤를 돌았다. 돌자마자 시야가 흐릿하게 변했다. 더딘 발걸음에 힘을 주고 턱을 당겨 올렸다. 문을 열고 나오는 등 뒤로 진여원의 목소리가 스며들었다.

“왜 잡지도 못하게 만들어.”

시야가 완전히 가려지는 바람에 급히 사장실의 문을 닫았다.

나도……. 어려웠다. 내게도 진여원이 그랬다. 너무 어려운 사람이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빙빙 주위를 돌기만 했었다.

나한테 관심 있다는 게 거짓말은 아닐까, 내가 좋아하게 되면 마음이 식는 게 아닐까, 어렵게만 생각해서 시작도 하지 못했다.

지난 생각을 털어 버리듯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두 주먹으로 눈을 꾹 눌렀다 떼어 냈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옥상에 죽으러 올라간 적도 있었는데 이 정도도 못 버틸까 봐.

그런데 까마득한 옥상 밑을 내려다보던 그날보다 마음은 오늘이 더 힘겨웠다. 그대로 바닥만 보며 3층 복도를 걸어 나갔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또 그것을 타고 내려가고, 심부름 받은 아이스크림을 사 들고 나서야 사무실 앞에 설 수 있었다.

표정 관리를 해야 하는데 자꾸 얼굴이 일그러졌다. 문고리를 잡으려는 순간이었다. 벌컥, 사무실 문이 열렸다.

“뭐야, 하도 안 와서.”

곽일영이 투덜거리다 말았다.

“석연 씨 울……어?”

곽일영이 발을 동동 구르며 나를 올려다봤다. 나는 곽일영에게 아이스크림을 내밀었다. 숨을 크게 들이켠 후 곤란하게 웃었다.

“설마요.”

“근데 얼굴이 왜 그래.”

“비비빅이…… 없어서요.”

“그런 거 가지고 왜 울상이야. 내 거 반 나눠 줄게.”

곽일영이 쌍쌍바를 반으로 나눠 내 손에 쥐여 주었다. 입에 딱딱한 아이스크림을 집어넣자 차가운 기운이 혀를 아릿하게 마비시켰다.

“다네요.”

사실은.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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