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9/18)

9장

크리넥스 티슈를 연달아 세 번 뽑았다. 휴지로 얼굴을 닦아 내리자 티슈가 단단한 돌멩이처럼 말렸다.

에너지 절약이다 뭐다 해서 건물 냉방 온도가 26도로 유지되니 오늘처럼 무더운 날에는 쪄 죽기 딱 좋았다.

시원한 팔뚝에 뜨거운 손을 대고 열을 식혀 나갔다. 곽일영은 창을 가린 블라인드를 올려 장풍을 쏘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뭐 하세요.”

“기 쏴.”

“무슨 기요.”

“비 오라고. 너무 더워.”

나도 곽일영의 옆으로 가 그와 같은 자세를 취했다. 이재화만 저것들 뭐 하나 싶은 눈으로 쳐다봤다.

“근데 석연 씨 어머니 다 나은 거 아니었어?”

곽일영이 하늘을 향해 손을 뻗은 내게 속닥거렸다.

“예, 다음 주 중에는 퇴원하실 거 같아요.”

“근데 요즘 왜 그래, 상태 영 이상해.”

시선을 내리자 곽일영의 가마가 보였다.

“제가요?”

“응, 나 한참 조울증 심했을 때 보는 거 같아. 하나도 안 신나는데 신나는 척하는 거. 겪은 사람들은 알아.”

디자인만 수석이 아니었다. 곽일영이 저래 보여도 인생사에서는 선배였다.

“고민 있으면 말해 봐. 듣는 건 해 줄 수 있어.”

곽일영 가마가 두 개였네. 쓸데없는 것을 발견하고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수석 디자이너 자리 노리려고 했는데, 곽 대리님이라 포기할까 고민 중이에요.”

“누가 그래?”

“하 이사님이요.”

“쓸데없는 걸 말하는 사람이네.”

그러게요, 저도 조금은 동감합니다. 재운 선배만 아니었으면 진여원이 속아서 선볼 일도 없었을 것이다. 나는 무슨 미련이 남아서 또 이런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곽 대리, 석연 씨.”

이재화가 고개를 돌려 우리를 불렀다. 그의 뺨에 햇빛이 직구로 내리꽂혔다.

“블라인드 좀 닫읍시다. 내 머리통 타겠어요.”

이재화의 머리가 검은 도화지고 창문은 돋보기였나. 이재화가 따끔거린다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어! 온다! 대박! 나 신기 있나 봐.”

해는 여전히 밝은데 정말로 창문에 뚝뚝 물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누가 위에서 물을 뿌린 게 아니라면 여우비가 맞았다. 앉아 있던 이재화까지 창문으로 다가와 말했다.

“오~ 여우 시집가는 날이네요.”

“아닌데요, 호랑이가 장가가는 날인데?”

다 큰 두 남자가 서로 제 말이 맞다면서 아웅다웅거렸다.

“둘 다 맞아요. 여우랑 호랑이랑 둘이 결혼한 거니까.”

“뭐?!”

곽일영과 이재화가 동시에 대답했다. 다들 알고 있는 전래동화인 줄 알았는데 아닌가 보다.

“구름이 여우를 짝사랑했거든요. 그래서 둘이 결혼할 때 해 뒤에 숨어서 운 거라고 하던데. 뭐, 전래동화니까요.”

처음 듣는 동화였는지 둘 다 나를 경의에 차서 바라봤다.

“여우비는 예측을 못하잖아요. 맑은 날인데 옷 버리니까 짜증 나서 마음이라도 달래려고 귀여운 얘기나 지어낸 거 아니겠어요?”

이번엔 실망이었다. 마치 산타클로스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아이들에게 얘기해 준 기분이었다.

자욱한 구름이 해를 숨겼고, 가느다랗던 빗줄기는 어느새 소나기로 바뀌어 있었다.

쏴아아아 하는 빗소리가 사무실 안까지 들려왔다. 보고 있노라면 시원해져야 하는데 빗줄기에 시야만 흐릿해졌다.

무슨 생각해.

들릴 리 없는 진여원의 물음이 그날처럼 귓가를 맴돌았다. 만일 그가 묻는다면 소나기처럼 찾아왔던 사랑을 몰랐다고 대답하고 싶었다.

소년과 소녀처럼 너무 어려서 감정을 인지하지 못한 건 아니었지만, 어른이라고 감정을 다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유리창에 부딪히는 비를 올려다봤다. 그도 나처럼 그날을 떠올리고 있었으면 했다.

내리는 비가 지겨워졌는지 두 사람은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나는 볼일이 생각난 사람처럼 조용히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복도를 죽 걸어 비상계단의 문을 열었다. 난간 밖으로 팔을 뻗어 비를 맞았다. 축축하고 시원하게 달라붙는 빗줄기가 팔뚝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

청량한 비 냄새에 섞인 담배 향이 근처에서 맡아졌다. 나는 밖으로 뻗은 손을 거두고 계단 아래를 내려다봤다. 유리막이 쳐진 건물 외벽 밑에 선 남자 둘이 보였다. 진여원과 재운 선배였다.

금연 건물이라 안에서 피우지 못하고 밖으로 나간 것 같았다. 비가 오는 날이라 그런지 올라오는 담배 냄새 역시 짙었다. 담배를 태우고 있는 진여원의 모습이 퍽 낯설었다.

재운 선배와 대화를 나누던 진여원의 시선이 불현듯 이쪽을 향했다. 황급히 들어가려고 했지만, 몸이 꼼짝하지 않았다. 점차 거세지는 비만이 시야를 방해할 뿐이었다.

시원한 비는 좋았지만 그가 잘 안 보이게 된 건 야속했다. 손에 흥건하던 빗물이 철 계단으로 떨어졌다. 바람마저 불어와 옷에 빗물이 점점이 묻어났다.

내가 먼저 그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힘겹게 문 안으로 한 발 뻗었다. 그런데 진여원이 담배를 태웠던가. 직접 본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젖어버린 손으로 마른 뺨을 문질렀다. 이제 와 별 신경을 다 쓴다.

진여원은 진여원, 나는 나, 그렇게 살기로 해 놓고서는 말이다.

나는 여지 하나 남겨 두지 않았고, 그는 나 때문에 뒤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왜 잡지도 못하게 만들어.’

그 말이 마지막이었고 그게 아마도 우리의 끝이었다.

***

칼퇴근을 하자마자 우리 부서 전원이 테라스에 모였다. 전원이라고 해도 총 세 명으로 단출했지만, 모인 이유는 아마 나 때문인 듯했다.

이재화는 갓 구운 스콘과 함께 음료를 트레이에 담아 가져왔다. 곽일영은 코코아, 이재화는 아메리카노, 나는 카푸치노였다.

셋 다 입맛부터 시작해 성격들이 딴판이지만 트러블 없이 지내는 게 새삼 신기했다.

“석연 씨, 전에 조퇴했던 거 있잖아요.”

이재화는 아메리카노가 담긴 컵의 뚜껑을 열었다.

“예.”

“그거 사유 작성 안 했더라고. 그래서 얼마 전에 내가 대신 작성해서 하 이사님께 제출했어요. 근데 하 이사님한테는 따로 말씀 안 드린 거예요?”

“조만간 말씀드리려 했는데……. 죄송합니다.”

그간 정신이 없어서 차일피일 미루던 것 때문에 이재화가 고생을 한듯했다. 곽일영은 차가운 코코아에 빨대를 꽂아 쪽쪽대고 있었다.

“그래요, 그 건은 일단 각설하고. 오늘 모이라고 한 건 별다른 건 아니에요. 이제 3F 판매 시작되니까 다 같이 파이팅하자는 차원에서 모인 거니 얼굴들 펴고요. 엊그제 광고 나온 거 봤는데 느낌이 아주 좋아요. 우리 기획 뺏어간 세노스는 고전 중이라고 하니 우리만 잘되면 되는 겁니다.”

“맞다, 그거 기획자가 김대영이라며?”

빨대를 잘근잘근 씹던 곽일영이 진여원 그곳 발언에 이어 두 번째 폭풍을 안겨 줬다.

“어? 김……대영이 누군지 곽 대리님도 알고 계세요?”

국내시장이 워낙 좁다 보니 알음알음 안면들이 있긴 했다. 그러나 곽일영은 해외 브랜드 출신이었다.

“응, 알아. 내 군대 후임이었거든.”

“…….”

말문이 막혔다. 김대영이 후임이라는 소리보다 곽일영이 군대를 다녀온 게 더 놀라울 따름이었다.

“이상한 놈이었거든? 만날 비누 주워 달라고 하고, 이병 애들 괴롭히고. 하여간 성격은 안 좋았어. 근데 석연 씨는 어떻게 알아?”

“아……. 학교 선배였어요. 근데 세노스 레인슈즈 기획자가 김대영이라고요?”

“응, 걔야. 학교 선배면 안됐다는 생각 들겠네. 아마 세노스는 기획 물먹으면 기획자가 옴팡 뒤집어써야 할걸? 세노스 사칙이 그래서 난 스카우트 제의 왔을 때 쳐다도 안 봤거든.”

“아, 참고로 나는 제의 못 받았어요.”

이재화가 흠 하고 스콘을 씹어 먹었다. 재운 선배에게 듣기로 세노스에게 낚싯대를 흔든 건 윰이라고 했었다.

그런데 그걸 덥석 문 게 김대영이었다니……. 내가 아는 김대영은 그렇게 멍청한 놈이 아니었다. 오히려 약삭빠르게 살아나가는 쥐새끼였다.

역시나 사람은 맘씨 곱게 써야 한다. 김대영 봐라, 남의 기획 가져가고 이러니 벌을 받지. 그럼 나는 더한 벌을 받으려나……. 뻔뻔하고 이기적인 죄질은 엄청 무거울 텐데.

“왜 비웃어?”

“제가요?”

“응, 그리고 말이지. 석연 씨 그 팜므 구두 있잖아.”

“예.”

곽일영이 부끄러움을 숨기듯 뺨을 붉혔다.

“그거 자기 생각해서 만든 거다?”

“제가 못됐어요?”

“응! 난 맨날 보고 싶은데 맨발 보여 주는 건 어쩌다 한 번이잖아. 그러니까 못됐지.”

“발이라도 예뻐서 다행이네요.”

“그래서 내 이상형이야.”

곽일영이 배시시 웃었다. 이재화는 곽 대리의 조증 다시 시작됐다면서 혀를 쯧쯧 찼다.

우리는 남은 스콘을 마저 하나씩 먹고 자리를 정리했다. 테라스에 앉아 퇴근하는 사람들을 둘러보다가 나도 모르게 진여원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서둘러 시선을 거두어들였다. 여느 때보다 술이 필요한 날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동안 술은 한 입도 대지 않았다.

술을 먹으면 더 감정적으로 변할 테니, 어떻게든 맨정신으로 버텨야 했다. 그게 얼마나 갈지도 모르고서 말이다.

***

나는 감사하게도 이재화의 차를 얻어 타고 집으로 와 바로 뻗었다. 빨리 모든 게 다 좋아졌으면 했다.

부모님도, 내 감정도, 그리고 어쩌면 나 때문에 상처받았을지 모르는 진여원까지도. 언제나 시간이 해결해 주곤 했으니 이번 역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는 홍시 스니커즈가 놓여 있을 신발장을 누워서 올려다봤다.

띠띠띠릭- 현관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물먹은 솜 같은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집에 올 사람이라고는 아버지밖에 없어 그리 놀라지 않았다. 아버지가 구두를 가지런히 벗어 놓고는 비닐봉지를 들고 들어왔다.

“엄마는요?”

“병원에 있지. 코 고는 소리 시끄럽다고 날 또 쫓아냈지 뭐냐.”

“혼자 계셔도 괜찮으시대요?”

“그래, 요샌 밤에도 통증이 거의 없는 것 같더라.”

아버지는 들고 있던 비닐봉지를 불쑥 내밀었다. 그 안에는 맥주 두 캔과 함께 서비스로 나오는 작은 땅콩이 담겨 있었다.

“저 한동안 금주할 생각인데.”

“한 캔 정도야 뭐 어떠냐.”

맥주 한 캔이라 봐야 혈색만 좀 돌고 말 뿐이었다. 아버지는 침대에 나는 바닥에 앉아 맥주를 땄다.

“괜히 시골로 내려갔나 싶다. 안 그랬으면 이렇게 가끔 술도 같이했을 텐데.”

“엄마가 워낙 도심을 싫어하니까요.”

“그렇지. 다음 주면 너도 한결 편해질 거다.”

퇴원 날짜가 잠정적으로 잡히긴 했는데, 확실한 건 그때 가 봐야 할 것 같다고 전해 들었다.

“밭만 매지 말고 운동 좀 하시라고 전해 주세요. 제가 말해 봐야 핀잔만 날아와요.”

“말해 봐야 나도 욕만 먹지.”

우리 둘 다 동시에 사투리가 섞인 엄마의 욕설을 생각하고 있었다.

갑자기 침대에서 엉덩이를 반쯤 일으킨 아버지가 반으로 접은 봉투 하나를 꺼냈다.

“이거 받아라.”

“이게 뭔데요?”

“네 엄마 수술비 네가 냈지 않냐. 이걸로 통장에 다시 채워 넣어라. 엄마 몰래 모아 둔 돈이니 모른 척하고.”

“대단하시네요, 엄마 몰래 비상금 어떻게 모으셨어요.”

“……그러게나 말이다. 석연아, 그런데 나도 잘 모르겠다. 이게 잘하는 짓인지도 모르겠고.”

아버지의 표정이 전에 없이 어두웠다. 비상금 모아 두었던 사실만으로 저렇게 죄책감을 느끼시는 건가.

“어차피 다 환급받을 텐데, 나중에 환급받으면 주세요.”

“일단은 받아라. 너도 네 생활해야지.”

강경하게 내 손에 쥐여 주시는 바람에 일단은 책상에 올려놓는 것으로 합의를 봤다.

안에 남은 맥주를 흔들어 확인하고는 짭짤한 땅콩을 입에 넣었다. 씹을 생각도 들지 않아 혀에서 한참을 굴리다가 아버지를 올려다봤다.

“아버지.”

그러고서도 한참이나 말을 잇지 못했지만, 아버지는 나를 재촉하지 않았다.

“나…… 선볼까요.”

내 말에 아버지의 손에 들린 맥주 캔이 한 차례 기울어졌다.

“네 엄마 때문에 그러냐.”

“불안하게 하기 싫어서요. 아버지 엄마한테도 미안하고…….”

“그럼 상대 여자한테는 미안하지 않은 거냐.”

“세상 누구보다 잘해줄 수는……. 있어요.”

“거짓된 마음으로?”

엄하게 나를 쳐다보고 있었지만 눈만은 깊었다.

결혼을 한다면 가족을 속이고 게이 바를 다니지도 않을 테고, 성실한 남편이 될 자신도 있었다. 다만,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은 되지 못할 거다. 그러나 그게 가장 못할 짓이라는 것을 나도 안다.

그러면……. 대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이렇게 괴로울 거라면 남들과 다르고 싶지 않았다.

솔직히 결혼도 입 밖으로 꺼낸 것일 뿐, 과연 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없었다. 나 또한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같이 살 수는 없다.

아버지에게 어떤 대답도 하지 못한 채 빈 맥주 캔만 봉지 안에 집어넣었다. 아버지는 손에서 캔을 빙빙 흔들기만 했다. 나는 바닥에 이불을 펼치고 리모컨을 찾았다.

침묵이 싫어 TV 전원 버튼을 누르려는데 아버지가 다시 앉으라며 손짓했다. 양반다리를 하고 이불 위에 앉아 아버지를 바라봤다. 잔소리나 조언을 할 때처럼 턱밑의 주름이 단단해졌다.

그런데도 침묵은 여전했지만, 차분히 아버지의 말을 기다렸다. 이윽고 긴 한숨을 쉬더니 입을 여셨다.

“우리 석연이 항상 생각이 많아서 탈이었지. 친척들이 예쁘다고 이것저것 챙겨주는 호의도 미안해하고. 그래서 그런지 오히려 주변 사람들이 너 모르게 선물도 사 주고 그랬단다.”

내가 그랬나 싶어 눈썹을 매만지며 쓰게 웃었다.

“할머니가 사 줬던 레고도 조각 하나를 잃어버렸다며 어찌나 울던지. 그때는 그냥 없어진 게 슬퍼서 운 것인지 알았는데 돌이켜 보니 아니더구나. 선물해 준 사람 정성을 생각했기 때문이었다는 걸 말이다. 하도 순해서 밖에 내놓으면 누가 괴롭히지나 않을까 항상 전전긍긍했다. 세상살이 걱정만큼 그리 팍팍한 거 아닌 것도 알고, 좋은 사람도 많다는 걸 알면서도.”

“순하긴요, 저 엄청 이기적이고 못됐어요.”

“정말 못되고 이기적인 사람들은 저 자신이 그렇다는 것도 알지 못해. 그리고 생각이 많은 게 어떨 때는 좋다가도 또 어떨 때는 독이 될 때도 있지. 그 친구도…….”

아버지의 목소리가 꽉 막혀 있었다. 뭐라고 하셨는지 다시 물으려는 것보다 이어진 말이 더 먼저였다.

“때론 침묵하는 게 나을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는데,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나이가 들면 오히려 판단이 더 흐려지는 것 같아서 말이다.”

내가 늦둥이라 아버지의 나이가 적은 편은 아니었다. 결혼도 그 나이대 분들에 비해 늦으셨고.

초등학교 다닐 때는 친구들이 박석연 너희 부모님 엄청 늙었다며 놀리기도 했었다. 그래서 학부모 참관회만 끝나면 꼭 다툼이 일어났었다.

싸움을 잘하는 편은 아니라 입술이 터져 집에 왔을 때도, 아버지는 그냥 쓰게 웃으면서 내 등을 두드려 주었다. 원래 그런 분이셨다.

나는 생각에 잠겨 있는 아버지를 보며 안달하지 않았다. 꼭 필요한 말이 있다면 언제고 해 주실 분이었다. 그저 TV만 켜고 옆으로 드러누웠다.

선풍기의 타이머를 맞춰 새벽에 꺼지도록 설정해 놓고 멍하니 화면만 바라봤다. 이 근래 쭉 그래왔듯이 잠은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부서 사람들에게 폐만 끼치는 터라 지각은 꼭 면해야 할 텐데…….

진여원한테 상처 주면서까지 다니고 싶다고 말하던 회사인데 보란 듯이 잘 다녀야지 않겠나.

열대야가 엄습하기 시작한 밤이지만,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복잡한 머리를 비우려고 두 눈을 꼭 감았다. 그러다 문득 의문 하나가 머리를 들었다.

내가 그를 선택하지 않는다고 해서 나를 둘러싼 모두가 다 좋아질까 하는 의문이.

그러나 간신히 잠이 들 때까지도 아무것도 확신할 수가 없었다.

***

“얼마 신지도 않았는데…….”

이른 오전부터 홍시 스니커즈를 내려놓고 중얼거렸다.

홍시 스니커즈의 하얀 끈에 작은 먼지 하나가 달라붙어 있어 살살 떼어 냈다. 오전부터 이렇게 여유를 부리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나보다 먼저 일어난 아버지에게 오늘은 푹 쉬시라고 말했지만, 한사코 거부하셔서 막을 수가 없었다.

엄마를 엊그제 뵙고 못 뵈었으니 오늘은 나도 병원에 가 볼 생각이었다. 물론 그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나는 신발에 묻어 있는 먼지들을 탁탁 털어 내고 상자 안에 담았다.

이건 이제 내 것이 아니다. 진여원을 거절한 주제에 그의 마음이 담긴 선물을 계속 가지고 있는 것도 뻔뻔했다.

나는 그에게 받은 그대로 쇼핑백에 담아 출근 준비를 했다. 같은 건물 안에 있지만, 그와 만나는 우연은 생각보다 자주 일어나지 않았다.

3F 광고만 남겨 두고 있어 우리 팀의 휴식은 아직 이어지고 있었으니, 딱히 전체 회의를 할 일도 없었다.

사실 지난 며칠은 출근하는 진여원의 모습을 볼 수 있을까 싶어 테라스에 일부러 앉아 있던 적도 있었다. 커피를 뽑으러 괜히 1층까지 내려가기도 했었다.

그것도 곧 자괴감이 느껴져서 그만뒀다. 이상하게도 아무 일도 없던 전보다 끝이 난 지금에서야 진여원이 더 많이 생각났다.

일찍 나온 덕인지 차도 얼마 밀리지 않아 회사에 금세 도착할 수 있었다.

곧바로 3층으로 올라가 사람이 없는 복도를 거닐었다. 사장실 앞에서 한참을 서성거리다가 잠긴 문고리에 쇼핑백을 걸었다.

묵직하게 흔들거리는 쇼핑백을 손으로 꽉 잡아 고정시켰다. 눈에 자꾸 밟혔지만 애써 뒤도 안 보고 2층으로 걸어 내려왔다.

수영이라도 하면 기운이 나려나 싶어 투명한 창 밑을 확인했다. 이른 시간이니만큼 아무도 없었다.

나는 탈의실 문을 열고 들어가 옷을 훌렁훌렁 벗어젖혔다. 수영장 특유의 소독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괜스레 코를 훌쩍거리고는 수영복으로 갈아입었다. 샤워실에 들렀다가 수영장으로 들어가려는데, 물이 쏟아지는 소리에 깜짝 놀랐다.

소리의 근원지를 쳐다보니 재운 선배가 벽에 손을 대고 머리부터 물을 맞고 있었다. 자아도취에 취한 듯한 선배에게 다가가 등을 툭 쳤다.

“으악, 뭐야!”

재운 선배가 경기를 일으키는 바람에 내가 다 무안해졌다.

“일찍 나오셨네요.”

“놀랐네. 귀신인 줄 알았잖아. 그보다 너 마침 잘됐다.”

선배가 다짜고짜 엄한 표정을 지었다.

“혼내야 될 거 있는데, 따라와.”

그러면서 밖으로 나가는 게 아니라 수영장으로 향했다. 어쩐지 진지해 보이는 선배를 따라 수영장 스타트 라인에 나란히 섰다.

마른 수영장 바닥에는 두 사람의 물 묻은 발자국만 남아 있었다. 선배가 물에 들어가지는 않고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그 바람에 다리만 물에 담겼다.

“너도 앉아.”

“……예.”

혼내는 건 둘째 치고 일단 수영이나 한판 하자고 할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물에 담긴 발이 굴곡져 울렁울렁거렸다.

“우리 석연이 사람 섭섭하게 만드는 데 뭐 있더라. 이 마음 넓은 이사님이 화날 정도면 말 다 했지, 안 그래?”

나는 고개만 틀어 선배를 향했다.

“이 과장한테 들었는데 내가 사장 대리할 동안 조퇴했었다며, 어머니 수술 때문에.”

안 그래도 한 소리 들을 건 예상했었다.

“퇴원하고 잘 해결되면 말씀드리려고 했어요. 요즘 꽤 좋아지셨고요.”

“너 인마, 그러는 거 아니야. 내가 이 과장보다 못한 사이도 아니고, 그런 건 직접 말했어야지.”

“죄송……합니다.”

실은 여러 사람 걱정 끼치기도 싫어 엄마 퇴원하신 후에 보고만 할 생각이었다.

“누가 사과 듣고 싶대? 그래도 좋아지셨다니 다행이긴 하다.”

재운 선배가 짝 소리가 나게 내 등을 후려쳤다.

“선배는 별일 없으시죠?”

생각보다 손이 매워 등을 매만져 가며 물었다.

“나야 거짓말로 선보게 했던 거 때문에 진 사장한테 죽다 살아났지. 수명이 10년은 줄었을 거야.”

선배가 볼을 입 안으로 홀쭉하게 빨아들였다. 피골이 상접한 표정에 픽 웃고는 발로 물장구를 퉁퉁 튕겼다.

“석연아 있잖냐…….”

문득 아버지에게 전화를 받기 전에 선배가 말을 주저했던 때가 생각났다. 또다시 선배가 쓰읍하고 말을 주워 담기에 이르렀다.

“저한테 하실 말씀 있으시면 괜찮으니 편하게 하세요.”

“내가 고민 많이 했는데 말이야. 김대영이 말이지.”

발장구를 치던 행동을 멈췄다.

“저도……. 그 기획 얘긴 들었어요.”

“아니, 그건 됐다 치고. 너 전에 체일 슈즈 있을 때 그놈 때문에 잘린 거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잘린 이유가 아웃팅 때문인 건 물론 선배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세한 내막까지는 얘기한 적이 없었다.

“그렇긴 한데. 혹시……. 저에 대한 게 회사로 또 왔어요?”

“아아……, 그럼 맞나 보네.”

설마 하던 기우가 맞아떨어지는 것 같았다. 류준에게만 간 줄 알았는데 마찬가지로 내게도 왔던 것이다.

“혹시 대학 때 소문 퍼진 것도 그 새끼 때문 아니냐? 내가 설마설마 했는데 말이야.”

“저도 지금 와 생각하면 처음 말 나간 건 김대영, 그놈일 것 같아요. 근데 저희 회사에는 익명으로 온 게 아니었어요?”

“응. 회사 물 흐리지 않는 게 좋지 않겠냐며 직접 보냈다던데. 그 새낀 우리가 친한 동기인 줄 착각하는 것 같더만.”

진짜 개새끼야, 하면서 재운 선배가 비웃었다.

“일단 우리 쪽으로 온 팩스는 잘 처리하긴 했는데, 진 사장도 그렇고 나도 영 열 받는 게 안 풀려서 말이지. 근데 우리 석연이 귀여운 줄만 알았더니 막 야한 짓도 하고 그러네?”

진여원도 봤구나…….

재운 선배에게 들킨 것보다 그게 더 마음에 걸렸다.

“나이가 몇인데요. 그리고 그런 거 보게 해서 죄송해요.”

“아냐, 새삼 우리 강아지 대단했어. 옆에 놈 잘생겼드만.”

하하…… 빈 웃음을 얼굴에 덧칠했다.

“근데 대체 언제 왔던 거예요?”

“음, 나 이사 취임하고 좀 뒤니까, 아마 너 부산 출장 다녀오고 나서 바로였을 거야.”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류준보다도 내 쪽으로 먼저 팩스를 보낸 거였다. 게다가 게이 바에서 반반한 바텀을 하나 끼고 왔을 때도 이미 보내 놓은 상태였고.

그래서 류준하고 있는 날 보자마자 놀랐고, 내게 다시 만나자고 질질대기는커녕 그 바텀에게 나에 대해 까 대기 바빴던 거였나?

미리 알고 있었다면 그날 초상을 치러 줬을 것이다.

“말할까 말까 엄청 고민했는데 진 사장은 그냥 함구하라고 하질 않나, 그래도 일단은 얘기하는 게 낫겠다 싶어서 말이야. 이 이사님 정말 고민 많이 했다?”

진여원 정말 치사하다. 평소처럼 독설을 내뱉으며 사생활 관리나 잘하라고 말하지. 나 상처받을까 봐 숨겨서 왜 지금 더 힘들게 만들고 그러냐. 이러면 미련만 남잖아.

내가 사람 보는 눈 없어서 당신을 놓친 것만 같아서.

“그래도 그 새끼 크게 한 방 먹었으니까 이제 웬만해선 안 깝칠 거다.”

“저 때문에……. 죄송합니다.”

“사과받으려고 말한 거 아니야. 우리 일 잘하는 디자이너 괴롭히는데 그걸 가만 놔둬? 난 그때 진여원 그렇게 화난 거 태어나서 처음 봤거든. 알고는 있었지만 절대 적으로 돌리고 싶지는 않더라. 어우, 살 떨려서 그냥.”

선배는 엄살을 떨 듯 맨어깨를 교차해 쥐고 바르르 떨었다.

“그러고 보면 우리 석연이가 일을 잘하긴 하나 봐.”

선배가 내 얼굴로 물을 퍼 올렸다. 입 안과 코로 매운 물이 들어왔어도 괴롭지 않았다.

그냥 진여원이 화가 났었다는 거, 그 말 하나만 계속 반복됐다.

당신 생각보다 나 정말 많이 좋아하긴 했나 보다. 나는 바닥에 달라붙은 허벅지를 떼고 일어났다.

“수영 안 해?”

“얘기하다 보니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수영장 벽면에 달린 시계를 가리켰다.

“이사님은 마음껏 수영하다 가마. 너도 꼬우면 위로 얼른 올라오고.”

“노력해 볼게요. 그리고……. 항상 고맙습니다.”

꾸벅 인사를 하고 샤워실로 걸어갔다. 찰박찰박, 내가 걷는 자리마다 내 미련처럼 질척한 잔해가 남았다. 하반신만 대충 물로 닦아 낸 뒤에 탈의실에 걸어 둔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간 나만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에 조금은 화도 나면서 속상하고 또 미안하고……. 평소라면 공존할 수 없는 감정들이 마구 뒤섞여 요동쳤다.

나는 물을 먹어 맹맹한 코를 눌렀다가 떼어냈다. 캐비닛에 등을 대고 서서 쓰라린 기운을 가라앉히던 그때였다. 탈의실로 들어오자마자 상의를 벗던 남자와 눈이 딱 마주쳤다.

밖에서 땀이라도 흘리고 왔는지 머리카락이 젖어 있었다. 더운 날이니만큼 자전거를 타고 와 그런 것도 같았다.

“오셨습니까.”

손에 셔츠를 쥔 진여원이 이쪽으로 저벅저벅 걸어왔다. 그가 나를 어쩐지 고압적으로 내려다봤다.

“박석연. 심보 한번 못됐군.”

예감했다. 내가 돌려준 신발을 그가 발견했다는 걸 말이다.

‘왜 그러셨습니까, 왜 날 감쌌습니까? 왜 이런 나 때문에 화가 났습니까?’

입 밖으로 자꾸만 약한 소리들이 나가려 했다. 나는 그것을 억지로 삼켜 넘겼다.

“이미 알고 계신 거 아니셨습니까? 저 원래 건방지고 고약합니다.”

쾅! 갑자기 귀 옆에서 커다란 굉음이 울렸다. 그가 열어 두었던 자신의 캐비닛을 거칠게 밀어 닫았다.

숨을 멈추고 그를 올려다봤다.

“회사 계속 다니고 싶다면서.”

“…….”

“그럼 그 건방진 생각부터 고쳐먹어.”

말없이 그를 응시하자 그의 미간에 얕은 주름이 잡혔다.

“지금 대체 뭐 하자는 거야.”

“저도…… 모르겠습니다.”

나도 모르게 움직인 손이 그의 손에 들린 셔츠를 붙잡고 있었다.

“너.”

진여원이 나를 차갑게 불렀다.

“뭐가 그렇게 비밀이 많아.”

“조퇴 건 때문이라면……. 그때는 경황이 없었습니다.”

“변명 참 잘해.”

그의 비꼼에 나 역시 마음이 편치 않았다.

“변명이라도 안 하면 오해가 생길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 나란 사람은 당신처럼 모든 일에 완벽하지 않아서, 마음마저도 접는 게 쉽지 않아서 변명투성이였다.

“사장님은 변명 잘 안 하신다고 하셨죠. 근데 모든 사람이 다 사장님 같은 거 아닙니다.”

진여원이 내 손을 쓱 내려다보며 대꾸했다.

“할 말 더 남았어?”

“…….”

“끝났으면 놓지 그래.”

울컥해 숙인 코끝이 뜨거워졌다.

스르륵 그의 셔츠를 잡은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미련 없이 내게서 등을 돌렸다.

이 자리에 못 박혀 바닥만 내려다보는 동안 그는 내게 한 번도 시선을 두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끝났으면 놓지 그래.’

전과 달랐다. 툭툭 내뱉었어도 감정이 섞여 있던 말투가 아닌 일말의 감정도 없는 차가움만이 느껴졌다.

내가 그를 선택하지 않음으로써 모두가 다 좋아질 삶일까 하는 질문에 이제야 답이 내려졌다.

다른 이들은 모르겠으나 우리 둘은 상처받았다는 것.

그것도 아주 많이 말이다.

***

이재화의 신호탄이 진짜였는지 ‘Fairy or Femme Fatale’의 대대적인 광고가 TV나 버스, 지하철에서 쏟아지기 시작했다.

집에 들렀다가 병원으로 가는 길에서도 광고를 몇 번이나 접할 수 있었다.

나는 병실에 도착하자마자 구비해 둔 슬리퍼로 갈아 신었다. 아버지는 엄마의 팔과 다리를 주무르다가 내가 나타나자마자 멋쩍은 얼굴로 나가신 뒤였다.

아마 세상에 아버지만큼 엄마를 사랑하는 사람은 없을 것 같았다. 사랑을 받고, 받은 사랑만큼 베풀 수 있는 상대를 만날 수 있는 것이야말로 엄청난 행운이었다.

부모님이지만 두 분의 관계가 부럽지 않다면 거짓말일 거다. 나는 오랜 병실 생활에 지루해진 몸을 들썩거리는 엄마에게 말했다.

“사과 먹을래?”

“이잉, 깎아 와.”

나는 자리를 잡고 앉아 TV를 보면서 사과를 깎았다.

“석연이 너도 먹어라잉? 이거 빨리 먹어 치워야지, 비싸 보이는데 상하면 아깝잖여.”

엄마가 침대 옆 서랍에서 박스 하나를 꺼내 보였다.

“뭐야, 웬 양갱이야?”

한지로 감싼 박스를 열어 보니 직사각형 모양의 양갱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공장에서 뽑아내는 게 아닌 수제 양갱이었다.

각 양갱은 십자 모양의 리본이 매어져 있었다. 보라색, 밤색, 노란색, 형형색색으로 맛깔스럽게 반짝거렸다.

“선물용으로 들어왔나 보네.”

“이잉, 난 싫으니께 너나 마이 먹구, 집에 가지구가.”

“나야 좋지.”

지금은 먹을 생각이 들지 않아 뚜껑을 다시 닫았다. 집에 갈 때 챙겨 갈 생각으로 쇼핑백에 넣어두고 마저 사과를 깎았다.

드라마가 시작되기 전인지 엄마가 틀어둔 TV에서는 광고가 한창이었다. 세제 광고가 끝나고 화면이 까매지며 곧 ‘YOUM’ 로고가 떠올랐다.

나는 사과를 깎던 것을 멈추고 광고에 집중했다. 하얀 레이스 치마에 품이 넉넉한 블라우스를 입은 모델이 버스 정류장에 서 있었다.

모델과 같은 얼굴을 한 또 다른 여자는 레더 팬츠에 무지 민소매를 걸쳤다. 투명한 구두와 블랙 구두를 신은 모델이 정류장 끝과 끝에 서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1인 2역이었지만, 화장이 달라서 전혀 다른 사람 같아 보이기도 했다. 상대방의 모습을 홀린 듯 바라보던 모델이 점차 서로의 거리를 좁혀 나갔다.

거울에 비치는 것처럼 서로 손을 맞댄 순간, 연기처럼 화면이 확 퍼져나가며 [Fairy or Femme Fatale] 이라는 멋들어진 글씨가 떠올랐다. 미국의 한석봉이 썼나. 필체가 기가 막혔다.

대략 13초 밖에 안 되는 광고였지만, 사람의 시선을 단숨에 휘어잡는 묘한 힘이 있었다.

“방금 광고 우리 회사야.”

생각 없이 광고를 바라보고 있는 엄마를 향해 말했다.

“그려? 우짠지 구두가 반딱반딱하드라니.”

“아까 그 구두 둘 중에 하나를 내가 만든 거고.”

엄마가 등받이 쿠션에 허리를 내리누르며 관심을 보였다.

“잉? 어떤 거였냐?”

“맞혀 봐.”

“시커먼 거?”

“반대.”

“아이구야, 사내 새끼가 여자 구두를 그르케 이쁘게 만든다냐.”

“하는 일이 여성 구두 디자인이니까 그렇지.”

“너 물 먹을 때도 새끼 손까락 하나 올리고 먹는 거 아녀?”

나는 딱딱 소리 나게 썬 사과를 그릇에 담아 엄마의 무릎 위에 올려 주었다. 게이라고 해서 다 여성스러울 거라는 건 편견이었다. 바텀이지만 마초스러운 놈들도 수두룩했다.

말해 봐야 이해하지 못할 테니 그냥 침묵하기로 했다. 왜인지 엄마도 포크에 찍힌 사과를 쳐다보기만 했다.

“속 안 좋아? 간호사 불러?”

“에이, 갠찮다.”

이내 포크를 들었지만 먹지는 않았다.

“너 말이다. 아부지가 그러는데. 선 자리 알아봐 달라 했다면서.”

“…….”

미니 냉장고에서 생수통 하나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렇다는 듯이 고개만 끄덕여 주자 엄마가 발끈하며 몸을 일으켰다.

“언 놈이 우리 구한 아들놈 가슴에 대못을 박은 겨!”

“무슨 소리야. 그런 거 없어.”

“딴 놈이 아니면 대체 뭐여.”

“우리 좀 더 편하게 사는 쪽이 좋잖아. 이제라도 나만 정신 차리고 마음잡으면 그만이야.”

갑자기 엄마가 나한테 사과를 집어 던졌다.

“못난 놈의 새끼, 니 새끼! 나이는 똥꾸녕으로 처먹근겨?”

계속 사과가 날아왔다. 뺨에 맞은 사과가 축축한 흔적을 남기고 떨어졌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지르고 엄마를 쳐다봤다. 엄마는 눈까지 빨갛게 달아올라서 씩씩거리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내가 언제 너보고 결혼하라구 했냐! 니가 뭣하러 마음을 잡아야 하냔 말이여! 막말로 니가 못된 심보 품은 것도 아니구 정신을 놓은 것도 아닌데, 왜 그런 소리를 하는 겨!”

가슴을 탁탁탁 치려는 걸 막았다.

“상처 터지면 어쩌려고 그래!”

엄마의 처진 입꼬리 밑으로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믿어지지 않았다. 처음으로 엄마가 내 앞에서 눈물을 보이고 있었다.

“나 혼자 남을까 봐 무섭다며! 그래서 속 끓는다며! 안 그렇게 해 주겠다는데 왜 울어.”

“이 못난 놈아. 난…… 나는 그냥 너만 행복하면 되는데. 왜 너가 가슴 눌러 가며 사느냐, 이 말이여. 너가 한 번이라도 아, 이 사람이 갠찮은 사람이다, 하고 데려온 적이나 있냐 말이다. 남자를 좋아한다면서 만나는 인간도 없구, 너는 인간이라면 다 싫어하는 거 아녀?!”

괜찮다고 나를 위로해주시는 아버지조차 행여 내가 남자를 만나는 모습을 직접 본다면 나를 경멸하지는 않을까, 엄마는 가슴을 쥐어뜯지는 않을까 늘 두려워했었다.

그런데 당신들이 진정으로 염려했던 것을 나는 몰랐다. 아무도 만나지 않는 내 모습이 문제였던 거다.

말 그대로 아무도 만나지 않고 살다가 두 분 가시고 나면, 나 혼자 남겨질까 봐.

난 못나다 못해 멍청한 자식이었다.

나는 바닥에 난잡하게 떨어진 사과를 주워 담았다.

“나 엄마 아들이라……. 진짜 다행이다.”

낯간지럽게 안아 주지는 못하고 조용히 말했다. 행동은 하지 못했어도 말은 진심이었다.

“그려, 넌 다행인 줄 알어. 나 같은 부모가 어딨냐.”

나 잘났다고 말하는데 그냥 웃음만 나왔다. 하나도 닮지는 않았지만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진여원이 생각나서.

남들처럼 진짜 사랑이라는 거, 나도 진여원하고 해 보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그에게 상처를 줬고 그를 놓쳐 버렸다.

싸늘하게 나를 두고 가던 모습을 떠올리니 두 번 다시 손을 뻗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의 등은 이미 늦었다고 말하는 듯했으니까.

“그래도 말여, 너가 손주는 못 앵겨 줘도 돈 잘 주는 회사는 기똥차게 들어갔음 됐지 뭘 그르냐.”

“이제 광고 하나 나온 거야. 이번 달 월급도 안 들어왔어.”

“누가 광고 말해. 격려금 말했지. 니 아부지가 안 전해 주드나?”

“응? 무슨 격려금?”

회사에서 사원들 경조사 때마다 격려금이 나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건 내 명의의 통장이나 내게 직접 전달되는 것이었다.

“뭐 그리 멍청한 표정을 짓고 난리여. 나 잘 때, 너 사장이 찾아와 아부지랑 속닥속닥거리고 갔단 말여. 너 아부지 혹시 그거 숨긴 거 아니여? 우짠지. 내 약 기운에 비몽사몽혀서 기억 못 할 거라고 생각혔나 본데, 내 매의 눈은 못 피혀.”

“사장님이…… 왔었다고? 우리 회사 사장님?”

머리에 뭔가가 관통한 듯 띵해졌다.

“그려. 어이구, 아주 훤칠하드만. 아주 그냥 여자 여럿 울리겄어.”

“언제……? 대체 언제?”

“며칠 됐지. 둘 사이에 봉투 오가기에 저 인간이 나 몰래 숨기겠거니 혔지.”

문득 바닥에 내려놓은 양갱 박스로 시선이 향했다.

“엄마, 그럼 이것도……?”

“건 몰러. 내 정신이 멀쩡히 돌아왔을 때 나가 버렸으니까. 왜? 문제 있냐아?”

나는 망연자실하게 양갱 박스를 다시 꺼내 무릎에 얹었다. 빤히 쳐다보며 숨을 죽였다.

아버지는 비상금이라고만 했지 격려금에 대해선 언급도 하지 않았었다. 이상하긴 했었다. 아버지는 엄마 몰래 비상금을 모아 두는 분이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내게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 하기도 했었다. 아마도 진여원은 자신이 여기에 온 걸 알리고 싶지 않아 한 것 같았다. 그래서 아버지도 침묵한 것이다.

상자를 다시 열어 보니 예쁘게 생긴 양갱이 반짝반짝거렸다.

그는 몇 번이나 내게 다가왔고, 나는 상처만을 줬다. 이제 진여원은 나를 받아들이지 않을 거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서는 안 된다. 내가 아무리 뻔뻔해도 그 정도의 염치는 있었다.

나는 바닥에 떨어졌던 과일을 쓰레기통에 우르르 쏟아 버렸다. 사실은 염치 따위 신경 쓰지 않고 그에게 달려가고 싶었다.

내 못난 생각에 우리가 이렇게 됐으니 못다 한 시작 다시 해 보자며 매달리고 싶었다. 그리고 한편으론 두려웠다. 그는 이미 마음 정리가 다 끝났다며 나를 내쳐버릴까 봐.

결국 전부 내 탓이었고, 내가 견뎌야 할 죄였다. 나는 그저 모두가 다 좋아질 삶을 위했던 것뿐이었다.

내 어리석음에 온몸이 바닥으로 꺼져 버리는 것 같았다. 저기 놓인 양갱만이 묵직하게 심장을 눌렀다.

***

“아, 취한다.”

흰 운동화를 내려놓고 중얼거렸다.

시야의 운동화가 막 일렁거리는 이유는 저기 마구 굴러다니는 맥주병들 때문이었다. 맥주 네다섯 병에는 취기가 돌지 않아 패기 좋게 열댓 병을 먹었더니 고개가 픽픽 아래로 쓰러졌다.

벌렁 드러누워서 얼굴 옆의 신발을 쳐다봤다. 휴대폰은 침대 구석에 처박아 놔서 다행이었다. 안 그랬으면 번호를 눌렀다가 지우는 일을 하염없이 반복했을 것이다.

전에 그를 정리하고자 할 때 제일 먼저 진득이라 저장된 번호를 지웠었다. 일부러 번호를 기억하지 않으려 재빨리 삭제 버튼을 눌렀지만, 머릿속에는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보고 싶네.”

진여원……말고.

“개나리……. 나리, 나리 개나리.”

흥얼거리다가 몸을 일으켰다. 알코올 때문에 목이 탔다. 냉장고에 물도 다 마시고 없어 슬리퍼를 신고 밖으로 나왔다.

수위 아저씨가 쯧쯧거리며 내 상태를 살폈지만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확, 음주 자전거를 해 버려? 저기 놓인 분홍색 자전거를 쳐다봤다. 그러다 다치면 내 손해지. 가뜩이나 마음도 아픈데 몸까지 아프면 큰일이다.

걸어서 편의점에 들러 포카리스웨트 두 개를 계산했다. 뚜껑을 돌려 꿀꺽꿀꺽 마셨다. 술 때문인지 이온 음료가 물처럼 넘어갔다. 밍밍하다. 원래 이런 맛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좀 더 상큼하고 달아야 했다. 잘못 샀나 싶어 눈 가까이 페트병을 올려 글씨를 확인했다. 초점이 맞지 않아 글씨가 뭉개져 보였다. 어쩌면 짝퉁일지도 모른다는 결론을 내리고 말았다.

집에 돌아와서 전에 남겨둔 보드카와 맥주를 섞어 벌컥벌컥 마셨다. 취하긴 해도 머리는 여전히 멀쩡한 것 같았다. 자꾸만 진여원이 생각나니까 말이다.

왜 나 몰래 나한테 잘해 주고 그랬냐? 생색이라도 좀 내지. 내가 불쌍해 보여서 적선이라도 한 거냐.

사실은 그런 게 아니란 걸 알아서 이런 소리를 지껄이는 나 자신이 더 싫었다.

“등신, 천치, 나가 뒈져라.”

중얼중얼거리다가 침대 구석에 처박아 두었던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끊어, 라는 한마디라도 듣고 싶었다. 이래서 술을 마시면 안 됐다. 아니 애초에 술을 마시지 않으면 버틸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맨정신으로 버티기가 너무 힘드니까.

나는 가물가물한 눈으로 숫자를 빤히 봤다. 손이 어긋나버려 여러 번이나 그의 번호를 지우고 써야 했다. 그러다 뚜르르 하고 신호음이 갔을 때 황급히 꺼 버렸다.

깜짝 놀란 눈을 들어 주변을 살폈다. 주변은 고요했다. 누구도 나를 말리는 이는 없었다.

나는 다시 검지로 탁 하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이번엔 뚜르르 가는 신호음을 가만히 들었다.

체감으로는 엄청나게 긴 신호음이 가고 달칵, 상대방이 받는 소리가 들렸다.

“…….”

[…….]

그와 나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차가운 목소리라도 듣고 싶었는데 정작 그렇게 되면 마음이 더 아플 것 같았다.

이대로 전화가 끊어질까 봐 나는 다짜고짜 말을 쏟아냈다.

“저 내일 필름 끊길 거니까……. 전에 그 노래 좀 불러 주시면 안 됩니까?”

[…….]

정신이 조금이라도 돌아오면 이렇게 뻔뻔하지 못할 것 같아서 바닥에 놓인 술을 다시 벌컥벌컥 마셨다.

“제가요……. 사장님. 제가 포카리를 사 왔는데요, 편의점에서 막 짝퉁을 파나 봐요. 전에 먹던 그 맛이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노래라도 좀 불러 주시면 안 되겠슴니까……아.”

끝에 가서는 혀가 꼬여 엉망진창이었다. 물론 발음은 처음부터 문제가 있었을 것이다. 이제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조차 모르겠다.

[…….]

“대체 저 신발 왜 주셨어요? 신발 주면 도망가는 거 모르……십니까?”

들리는 한숨만 아니었으면 아마 끊어졌다고 생각했을 만큼 조용했다.

나는 그게 또 못내 슬퍼서 혼자 마구 말을 내뱉었다. 행여 얘기하고 있는 동안에는 그가 끊지 않을 거라고 믿고 싶었다.

그냥 지금은 당신 숨소리라도 듣고 싶었다.

“노래 좀 불러 주세요. 저만 빼고…… 저 빼고……. 다 쉽다면서요.”

같은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한 것 같았다. 술 때문에 붕어 머리가 됐는지 불러요, 불러 주세요. 하는 말만 재차 흘러나왔다.

[너…….]

차가웠다. 더위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왜 이렇게 제멋대로야.]

머리가 너무 지끈거려 흰 운동화를 베개 삼아 베고 누웠다. 나도 내가 제멋대로인 거 안다.

그래도…….

“이게……. 이게…… 다 너 때문이잖아. 네가 나한테 신발 줘서 내가 도망간 거잖아.”

씩씩거리는 숨이 새어 나왔다. 괜히 진여원이 나 쫓아내려고 신발 선물을 준 것 같았다. 이 역시도 말도 안 되는 억지라는 걸 알지만…….

“내가……. 나는……. 안 그러고 싶었는데…….”

서러움에 머리끝까지 차오른 슬픔을 내리눌렀다. 나도 이제 늦은 거 아니까 조금만 다정하게 대해 주었으면 좋겠다.

[너? 누가 반말하래.]

여전히 차가운 말투에 휴대폰에 얼굴을 바짝 댔다.

“내……맘이다, 왜.”

반말은 너만 하고 나는 못할 줄 알아.

팔로 눈을 가린 채 가슴을 들썩였다. 그와 동시에 뚝 하고 전화가 끊겼다. 내 뺨에 눌려서 꺼진 건지, 진여원이 먼저 끊은 건지도 구분이 안 됐다.

제아무리 술에 취했어도 다시 할 용기는 생기지 않았다. 혹시나 진여원에게서 전화가 걸려올까 싶어 쏟아지는 수마 속에서도 몇 번이나 정신을 다잡았다.

그러나 10분이 지나도 20분이 지나도 다시 걸려오는 일은 없었다. 나는 운동화를 벤 채로 중얼거렸다.

“너……. 왜 이렇게 매정해.”

휴대폰을 품 안에 그러쥐고 눈을 감았다. 이상하게도 운동화가 소나기에 흠뻑 젖듯이 축축해지고 있었다.

***

깨질 것 같은 머리를 감싸 쥐고 일어났다가 전쟁 통이나 다름없는 방을 보고 입을 벌렸다.

맥주병 몇 개가 엎어져 내용물을 겔겔 흘리고 있었고, 아껴 두었던 보드카는 아예 바닥을 드러내 보였다. 포카리스웨트는 뚜껑이 따진 채 옆으로 누워 있었다.

나는 관자놀이를 마사지해 주며 더럽혀진 방을 정리해 나갔다. 그러면서 머릿속도 차차 정리하기 시작했다.

“하……. 나란 새끼, 진짜 나가 죽어야겠다.”

필름이 끊기기는커녕 싸늘한 진여원의 목소리마저 생생했다. 솔직히 어느 정도의 모험도 있었다.

술을 잔뜩 먹고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전화하면 그가 혹시 나를 받아 주지는 않을까. 그도 나를 여전히 좋아하니 하는 수 없다며 용서해 주지는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들.

와장창 깨진 지금에서야 바보 같은 짓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월요일부터 진여원의 얼굴을 어떻게 볼지 쥐구멍이라도 찾아야 했다.

그래도 하나 다행인 건 우리가 같은 회사라는 것이다. 그가 너무 보고 싶을 때 우연을 가장해서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위안으로 삼았다. 그가 날 투명인간 취급해도 어쩔 수 없지만…….

방을 다 치우고 찬물로 샤워를 하고 나와서도 숙취는 가시지 않았다. 혹시나 싶은 괜한 기대에 휴대폰을 만져 보기도 하고, 진동이 울릴 때마다 두근거리며 확인했다. 그러나 대개가 스팸문자였다.

오후 늦게 일어났는데도 주말은 쏜살같이 지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시트에 머리를 비비며 숙취와 함께 찾아온 감정의 괴로움에 신음했다.

잠깐 잠이 들었다 깼을 때가 되니 창밖으로 해가 어둑하게 지고 있었다. 기대는 이제 제로로 수렴되는 중이었다.

그에게서 전화는 걸려오지 않을 테고, 끝난 줄도 모르고 미련을 붙잡고 있던 나는 진실을 곧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쾅, 쾅, 쾅.

현관에서 굉음이 들려왔다. 누군가가 문이 부서져라 두드리고 있었다.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비밀번호를 알고 있는 아버지는 아닐 테고, 인터폰을 두고 문을 두드릴 수위 아저씨 또한 아니었다.

나는 급히 현관으로 나가 문을 확 열어젖혔다. 엄청나게 인상을 구기고 있는 현관 밖의 남자를 보고 나서야 눈을 깜빡였다.

“선배……?”

멍청하게 재운 선배를 부르자, 선배가 짜증을 버럭 내면서 안으로 들어왔다.

“아, 진짜! 한창 주희 만나고 있는데 진여원이 찬물 끼얹잖아. 주희 맘 풀어 주려면 일주일은 갈 텐데, 대체 뭐냐 이건?”

투덜대던 선배가 팔에 끼고 있던 하얀 상자를 내게 내밀어 보였다. 나는 그걸 받지도 못한 채 쳐다보기만 했다.

“뭐 해? 얼른 받아.”

그런데도 내가 멍하니 있자 선배는 내 발 밑에 상자를 내려놓았다.

“이게……. 뭐예요?”

“뭐긴 뭐야. 진 사장이 너 가져다주라고 한 거지.”

“선배가 왜…….”

어안이 벙벙해서 말도 어리숙하게 나왔다.

“이걸로 선 거짓말한 거 땡쳐 준다고 하더라. 하여간 사람 부려 먹는 데는 뭐 있다니까. 괜히 이직해서 이게 무슨 꼴이야. 퀵 이용하면 될 걸 대체 뭐기에 휴일에 나를 부르냐고.”

나는 상자 앞에 쭈그려 앉았다. 이건 내가 그에게 돌려준 홍시 스니커즈 상자와 생김새가 같았다.

“뜸 들이지 말고 빨리 열어 봐. 나 바로 주희한테 가 봐야 돼. 대체 뭐기에 그러는지 나도 좀 보자고, 응?”

나는 박스 옆에 붙어 있던 테이프를 떼어 내고 선배를 올려다봤다. 재운 선배가 답답하다면서 나 대신 상자 뚜껑을 휙 열었다.

홍시 스니커즈는 어김없이 흰 포장지에 감싸여 있었다.

“뭐야……. 지금 신발이나 주라고 나 부른 거였어? 장난해?!”

얼마나 대단한 걸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재운 선배의 실망과 분노가 여기까지 느껴졌다.

그러나 나는 아니었다. 나는 믿기지 않는 눈으로 포장지를 떼어 내 신발을 품에 안았다.

상자 한편에 성의 없게 놓인 종이 한 장이 보였다. 그 종이에는 매직으로 쓴 듯 거칠고 두꺼운 글씨가 쓰여 있었다.

누가 도망가래.

누가 봐도 대충 쓴 것 같았다. 그러나 누가 도망가래. 그 서툰 글씨가 나를 휘어잡았다. 이건 도망가라고 준 신발이 아니었다.

저 짧은 글은 그가 내게 보낸 연애편지였다.

진여원, 당신 정말 예측 불가능한 사람이다. 흔한 편지도 한 번 안 써 봤나. 저렇게 짧은 연애편지는 태어나 처음 받아 봤다. 그런데도 내게는 장문의 편지보다 훨씬 더 막강하게 다가왔다.

“석연아 너 혹시.”

재운 선배가 나와 시선을 맞춰 앉았다. 심각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진여원 돈 떼어먹었냐?”

나는 무릎에 안고 있던 신발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신발에 발을 끼워 맞춰 넣었다. 여전히 완벽한 내 신발이었다. 나는 끈을 단단히 묶으며 대답했다.

“아니요. 돈 말고 다른 거.”

종이의 글귀가 내게 말하고 있었다.

나한테 달려오라고.

나는 망설이지 않고 자리에서 번쩍 일어섰다. 재운 선배는 영문을 모른 채로 앉아 있었다. 나는 앞코를 툭툭 두드리며 정면을 향했다.

“그래서 지금 갚아 주러 가려고요.”

더는 이 마음을 지체할 수가 없었다. 재운 선배가 나를 부르기도 전에 현관을 박차고 나왔다.

나는 건물을 달리지 말라는 수위 아저씨의 목소리도 무시하고 오피스텔을 뛰쳐나갔다. 내 발에 딱 맞는 홍시 스니커즈가 더 빨리 달리라며 내 뒤를 가볍게 받쳐 주었다.

후덥지근한 바람이 몸통을 감싸고 코끝까지 뜨거운 열기가 올라왔다. 그래도 멈출 수가 없었다. 타고 갈 택시가 보이지 않아 여의도 방향으로 계속 달리기만 했다. 인도를 내달리다가 택시 한 대가 와서 섰을 때는 이미 몸이 흠뻑 젖은 뒤였다.

에어컨이 고장 났다는 기사의 말에도 괜찮다며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빨리, 조금 더 빨리 그에게 도착하기만를 바랐다.

당장이라도 진여원이 보고 싶었다. 늦은 시간임에도 도로는 여전히 꽉 막혀 있었다. 진여원의 집에 거의 다다라서는 참지 못하고 택시를 뛰쳐나왔다.

진여원은 종꽃 슈즈를 신은 나를 어이없게 웃으며 쳐다봤었다.

분홍 자전거 뒤에 나를 태우고 노래를 불러 주었고, 우리는 소나기 내리는 날의 풍경을 함께 보았다.

결코 짧지 않은 그 순간들이 뿌예진 시야를 지나갔다.

나무에 매달린 신발을 내려 주기 위해 그가 나를 안아 주었던 날 또한 떠올랐다.

그때는 몰랐었다.

그건 절대 사소한 기억들이 아님을.

우리는 짧은 여름에 내리는 소나기처럼, 삽시간에 서로에게 젖어 버렸다. 그래서 지금 나는 그가 준 신발을 신고 그에게 달려가고 있었다.

헉헉거리는 숨을 고르지도 못했다. 그의 정원이 가까이 보이자 심장은 더욱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가슴 밖으로 튀어 나갈 것 같은 박동이 더 빨리 달리라며 나를 재촉하고 있었다.

펜스 너머로 은은한 조명이 내려앉은 정원이 보였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나는 앞뒤 보지 않고 펜스를 훌쩍 뛰어넘었다. 숨을 몰아쉬며 자전거가 있는 것을 확인했다.

한달음에 현관으로 달려가 문을 달칵달칵거렸다. 열리지가 않았다. 그렇다면 억지로라도 열어야 했다.

만일 연애편지가 아니라 완전한 이별을 고하는 선물이었다고 말한다면, 이번에는 매달려 볼 생각이었다.

그 쉬웠던 비밀번호조차도 누를 여유가 없었다. 쾅쾅! 문을 거세게 두드렸다. 일자 문고리를 잡아 다시 열어 보려는 순간이었다.

휘익, 문이 열리며 몸이 앞으로 튕겨 나갔다. 끌려가듯 들어간 몸이 진여원의 가슴팍에 탁 하고 부딪혔다.

나는 그의 가슴에 손을 대고 깜짝 놀란 눈을 들었다.

콩, 콩, 콩, 그의 심장 소리를 처음 들었던 날과 같았다.

“문……이 왜…… 안으로.”

갑작스레 그의 품에 안긴 것에 당황하며 말을 어버버거렸다. 그러고 보니 그의 현관문이 안으로 열렸던 것조차 잊고 있었다.

“설계 미스.”

진여원은 자신이 설계 실수를 했음에도 당당하게 내뱉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눈만 껌뻑거렸다.

“넌 실수 안 해?”

“하……죠.”

많이…….

중얼거리며 그의 가슴에서 손을 떼어 냈다. 손바닥에는 거칠게 뛰던 그의 박동이 남아 있었다.

기대해도 되는 걸까? 아직도 그의 심장이 이렇게 뛰고 있으니까.

나는 그를 올려다봤다. 그가 나를 보던 눈빛은 전과 한 치도 달라지지 않은 것만 같았다.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또 어떤 말로 시작해야 할지 머리가 하얗게 바래 갔다. 그냥 이렇게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박석연 잡기 진짜 어렵네.”

대수롭지 않게 나온 말에 쿵쾅쿵쾅 내부가 시끄러워졌다. 그는 나를 포기한 게 아니었다. 내가 어렵게 돌아오는 동안 손을 뻗고 있던 거였다.

“……속상했거든요. 사장님 선봤다는 소리도 그렇고, 저 때문에 부모님 아팠던 것도 그렇고.”

나는 이렇게 흐트러져서 달려왔는데, 그는 깔끔한 차림인 것도 아주 조금 억울했다.

“그리고.”

그는 마치 서운한 것이 있으면 다 말해 보라는 듯했다.

“사실은, 사장님 같은 사람 만나면……. 제가 애달파질까 봐 싫기도 했습니다.”

“또.”

“사장님은 변명 좀 하셔야겠습니다.”

“…….”

“…….”

우리 둘은 서로를 말없이 쳐다봤다. 설마 그가 변명할 거리를 생각하고 있나 하는 착각마저 들었다.

“매력 없어.”

순간 움찔했다. 내가 그에게 따지듯 굴어서 매력이 없다고 말하는 건가 싶어서. 왜인지 긴장한 채로 그를 볼 수 밖에 없었다.

“변명하는 남자.”

“…….”

결국은 자신이 매력적이라는 소리였다. 거기에 그래 너 잘났다고 대꾸해 주려 했다. 그러나 이젠 그의 진심을 알기에 조용히 투덜거리기만 했다.

“말도 짧고, 변명도 안 하고, 상자에 그 편지도 말이죠. 그게 뭡니까…….”

이 남자는 연애편지도 선물도 서툴기 짝이 없었다.

“연애 얼마 못해 보셨죠.”

나는 괜히 그를 탓하듯 말했다.

“맞아.”

화악, 진여원이 내 팔을 잡아당겼다. 섞여들었던 시선처럼 안겨 맞닿은 심장도 콩콩콩 울려 댔다.

“그러니까 박석연이랑 이런 짓 저런 짓, 못해 본 거 다 해 볼 생각이야.”

박석연이랑.

고개 숙여 나를 부른 그의 입술을 홀린 듯 바라봤다. 진여원의 입술에 닿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그에게 부딪혔다. 진여원도 내 허리를 꽉 부둥켜안았다. 서로의 뜨거운 숨결이 흩어져 갔다. 순간 입 안으로 진여원의 달달한 향이 화악 퍼져 나갔다.

나는 몽롱하게 흐려지는 눈을 감았다.

뺨을 타고 땀이 흘러내렸고 메마른 입술에는 촉촉함이 내려왔다. 마치 소나기를 흠뻑 맞은 것 같았다.

소나기와 사랑에 준비된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애써 둘 다 피하려 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옷은 볕에 마를 테고, 자신도 모르게 찾아온 사랑은 알아서 심장을 두드릴 테니 말이다.

진여원은 피할 수 없는 소나기처럼 무방비한 내게 다가왔다.

젖어 버린 옷이 내 책임이듯, 생겨난 감정 또한 내 몫이었다.

소년과 소녀의 사랑도 소나기처럼 시작됐듯 언제나 그렇게 둘은 닮아 있었다.

그래서 사랑은 한소나기다.

[3권(한바탕 내리는 소나기 뒤에)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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