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박석연 1(3권) (10/18)

박석연 1

솔직한 사람이라고 해서 마음에 있는 말을 다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말의 파급력이란 실로 어마어마해서 내뱉고 후회해도 이미 늦은 법이기 때문이다.

질문 역시도 잘 생각하고 던져야 한다. 적반하장이 아닌지, 상대에게 답변을 듣고 실망하지는 않을지 가늠해야 하니까.

신상 준비로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 이렇듯 멍 때리는 일이 잦았다. 원인은 이미 알고 있다.

머릿속 한구석에 자리 잡고 좀체 나가 주지 않는 질문이 문제의 근원지였다.

‘이봐, 진득이. 대체 내 어디가 좋은 거야. 원래 당신 게이도 아니잖아.’

확인받고 싶고, 확인받아도 또 받고 싶은 게 사람의 마음 아니던가. 특히 연인 사이에 있어서는 더욱이 그럴 것이다.

그게 심화하면 애정 결핍이 되겠지만, 한 번쯤은 물어볼 수도 있는 질문이었다.

타이밍을 노려 아무렇지 않게 뱉어야 하는데, 이게 자꾸만 의식하다 보니 온종일 틈만 노리다 끝났다.

일 얘기 하는 도중 뜬금없이 던질 수도 없는 노릇이고…….

나는 턱을 괸 채로 검은색 색연필로 구두의 옆면을 색칠했다.

광택이 없는 칙칙한 블랙이 어울릴 만한 가죽 펌프스였다.

앞코가 뾰족한 모양을 띠고 있어 요즘 같이 흉흉한 세상에 흉기로도 충분할 듯했다. 저 뾰족한 부분으로 제대로 차 주면 어디고 성할 데가 없을 것이다.

힐도 좀 더 가늘고 길게 디자인을 수정했다. 힐은 사람 뼈도 박살 낼 정도의 강도를 가졌다. 그러니 힐에 발등뼈가 부러진 사람도 있겠지.

기본 펌프스 스타일이었던 구두에 음흉함이 더해져 갔다.

최근 즐겨 보는 드라마 <두 번째 기회>의 악역 단발머리 여자에게 제법 어울릴 것도 같았다.

PPL이 아무 때나 들어오는 건 아니니 그냥 상상만 했다.

구두를 디자인할 때 아, 저 사람에게는 이런 스타일이 어울리겠다는 생각 자체가 영감으로 작용했다.

다른 이들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랬다. TV를 즐겨 보는 이유 중의 하나도 그 때문이고.

전력 절감이다 뭐다 해서 26도로 유지되는 사무실은 흡사 찜통 수준이었다.

진여원, 안 그렇게 생겨서 국가가 정한 법은 아주 기가 막히게도 잘 지키신다.

물론 규정 온도는 28도지만, 폭염이 지속되는 날에는 22도까지 내리길 바라는 마음이 절실했다.

체일 슈즈는 각 사무실마다 에어컨이 있었는데…….

그렇다고 체일 슈즈가 그립다는 건 절대 아니다. 그곳 사무실 온도 조절은 상사 마음이었다.

팀장 놈이 더위 추위를 엄청나게 타지 않던 작자라 여름에는 땀을 흘려 가며, 겨울에는 장갑을 끼고 디자인을 그려야 했다. 괜히 덥다고 에어컨 막 돌려 대다간 상사 눈 밖에 나기 십상이었다.

책상 밑 발에도 땀이 차는 것 같아 의자를 휙 뒤로 뺐다.

슬리퍼 안의 발가락을 꼼지락꼼지락대서 습한 기운을 없애려 했다. 옆에서 하아, 하아, 내뿜는 열기가 무한정으로 방출되고 있었다.

곽일영이 입을 헤벌리고 내 발을 내려다봤다.

아예 슬리퍼 밖으로 빼내서 발가락 전체를 오므렸다가 펴자 헉! 하는 탄성이 터졌다.

“방금 그거 한 번만 더 해 봐. 예쁘다.”

“이거요?”

하면서 발가락을 접었다가 펴기를 반복했다.

“둘이 그만 좀 놀아요. 회사가 발장난 하는 곳입니까?”

곽일영과 한숨 돌릴 겸 잠깐 놀고 있자 역시나 바로 한 소리가 나왔다. 이재화의 심기가 불편한 게 비단 더위 탓은 아니었다.

우리 팀의 현재 스코어가 12:1이기 때문이었다.

신상으로 내보인 디자인은 열두 개, 채택된 건 단 한 개였다. 이 정도로 고전을 한 건 입사 이래 처음이었다.

보통 대여섯 개 중 한 개 정도는 꼭 오케이를 받고는 했으니 말이다.

진여원의 눈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것 같았다. 그나저나 평소라면 곽일영도 입을 삐죽이고 말 텐데, 오늘은 쌍심지를 켜고 이재화를 노려봤다.

“왜 그러세요?”

둘이 무슨 싸움이라도 했나 싶었다.

“열 받지 않아?”

“열 받죠.”

“그치?”

“예, 더우니까요.”

곽일영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아니, 아니 그거 말구. 이 과장 솔로부대 탈출했잖아. 이제 우리 부서의 역적이야.”

곽일영은 솔로부대의 선봉장처럼 이를 갈았다.

이재화와 3층 윰 옴므 여직원이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된 소식은 일파만파로 퍼져 나갔다. 그 직원이 미인이라 눈여겨 둔 남직원들의 질투도 만만치 않았다.

“그래도 예쁜 사랑하라고 응원해 줘야죠.”

곽일영이 잔뜩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석연 씨도 커플이야? 애인 생겼어?”

“노코멘트요.”

말을 딱 잘라 내 주고 책상 안으로 의자를 끌어당겼다.

똑똑, 누군가가 사무실을 노크했다. 우리 셋의 시선이 전부 문 쪽으로 쏠렸을 때 문이 빠끔히 열렸다.

“안녕하세요.”

들어온 사람은 옆 부서에 새로 들어온 신입사원이었다. 눈동자만 굴려 우리 사무실을 구경하던 신입이 들고 온 무언가를 쓱 들어보였다.

“사장님께서 전직원에게 돌리신 거예요. 드시고 일하시래요.”

신입은 스무디가 담긴 커다란 컵 세 개를 빈 책상에 올려두었다. 내가 일어나서 다가가자 다시 꾸벅 인사를 해왔다.

“잘 먹을게요.”

“저……. 근데 여기도 쉬즈 부서입니까?”

“예, 그런데요.”

당연한 걸 묻는 신입사원이었다. 사무실 문에도 [디자인부]라는 문패가 달려 있었다.

“다른 건 아니고, 여기 부서는 사람이 얼마 없어서요. 전 인원이 제일 없는 쪽으로 배정될 줄 알았거든요.”

영업부, 인사부, 디자인부 등 모든 부서를 통틀어 우리가 사람이 가장 적긴 했다. 보통 한 팀에 인원은 최소 열 명 이상이었다.

저리 대놓고 물어보는 걸 보니 신입치고 넉살도 좋았다.

“우리 부서 왕따 부서라서 그래요.”

불쑥 말을 던진 곽일영이 딸기 맛을 가져가 빨대를 물었다.

“……예?”

신입이 적잖이 당황해했다.

“이렇게 딱 세 명 있는 거 보면 몰라요?”

이번엔 이재화였다. 그는 오렌지 맛을 가져갔다. 나는 필연적으로 좋아하지도 않는 망고 맛을 선택해야 했다.

아……. 망고는 좋아해도 망고 맛 제품은 싫은데.

어쩔 수 없이 노란 스무디를 빨대로 휙휙 저었다. 신입은 여전히 말을 잇지 못하고 우리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마찬가지로 우리 셋이 빨대를 물고 신입을 쳐다봐 주자 아차 싶은 얼굴로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내가 말하기도 뭐하지만, 우리 팀은 존재감이 없으면서도 이상하리만치 눈에 띄었다.

적은 인원으로 타 부서만큼 디자인을 배출해냈기 때문일 거다.

점심시간이나 테라스에서 브런치를 먹을 땐 늘 인원에 묻혀 구석으로 옹기종기 밀려나지만, 디자인 회의가 열릴 때는 나름 돋보이는 편이었다.

망고 스무디를 쪼로록 빨아올리자 새콤 달달한 맛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곱게 갈린 얼음이 입 안을 시원하게 달래 주었다. 그러나 목구멍까지 유지되던 시원함은 가슴께에서 금세 사라졌다.

아마 내 몸의 열기에 잠식당한 것 같았다.

같은 가격이면 팥빙수 같은 거나 사 주지.

사내 메신저 창을 열어 [진득이] 옆에 on 표시가 들어온 걸 확인했다.

대화창을 엶과 동시에 화면이 깜빡깜빡거렸다. 타이밍 한번 기가 막혔다.

[퇴짜.]

순간 깜짝 놀라 망고 스무디를 삼키지도 못했다.

퇴짜 라는 말에 내 심장이 철렁한 건 당연했다.

물론 지금 온 메신저의 뜻은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오전 중에 올려 보낸 디자인이 아웃된 걸 말했다.

근데 하필이면 퇴짜라는 말을 쓰냐.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라는 게 사람 마음인데 말이다.

나는 키보드를 타타닥 두드렸다.

[말씀 전하겠습니다. 그리고 음료 잘 마시겠습니다.]

컵을 잡자 송골송골 맺힌 물방울이 손바닥에 묻어났다.

진여원이 회식은 잘 시켜 줘도 이렇게 따로 직원들에게 음료를 돌린 적은 없었다.

뭐 설레발이라고 하면 할 말은 없겠지만, 나 더위 잘 타는 거 알고 일부러 전원에게 쏜 건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었다.

아무렴 어떤가.

[앞으로 쏘실 때는 스무디 말고 팥빙수 같은 걸로 해 주세요. 저 스무디 별로 안 좋아합니다.]

가만히 모니터를 보며 답변을 기다리는데 아무런 말이 도착하지 않았다.

그러다 반짝 새 글이 떠올랐다.

[?]

……진짜 진득이 정떨어지는 데는 뭐 있다.

물음표 달랑 하나 보내는 건 대체 무슨 심보냐?

하긴, 박석연 너 먹으라고 준비한 건데 다음부터는 참고하마. 이런 빈말을 할 사람이던가.

[사장실.]

곧장 이어서 세 글자가 떠올랐다.

내 얼굴 보고 싶으니 사장실로 오라는 뜻 역시 아닐 거다. 새 디자인과 더불어 퇴짜 당한 디자인을 가지고 내려가라는 소리였다.

나는 망고 스무디를 마우스 옆에 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장님이 호출하시는데, 디자인 완성된 거 있으시면 주세요.”

음료를 먹으며 잠시나마 행복에 잠겨 있던 이재화와 곽일영이 현실을 깨닫고 급격히 우울해졌다.

이재화 것 한 장, 곽일영 것 두 장 그리고 내 것 한 장. 이렇게 디자인지를 들고 사무실을 나왔다.

이번 신상은 아무래도 여유가 있는 만큼 공장에 수주 넘기기 전, 진여원이 하나하나 살펴서 수정을 요구하는 중이었다.

엘리베이터 거울에 얼굴을 들이대 눈곱 같은 건 없는지 꼼꼼히 확인했다. 이리저리 얼굴을 둘러보고 나서야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사장실로 성큼성큼 걷는데 무슨 기대가 있어서인지 몰라도 심장이 가슴을 두드렸다.

차렷 자세를 하고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리고 똑똑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라는 말에 문을 열었더니 진여원은 의자에 등을 한껏 기대 앉아있었다. 나는 쳐다도 안 보고 디자인지만 확인하는 중이었다.

그는 자칫 지루해 보이기도 했다. 힐끔, 그제야 나를 본 진여원이 자세를 바로잡고 손을 내밀었다.

순간 디자인지가 아닌 내 손을 올려 주면 어떤 반응을 할지 궁금해졌다.

물론 실행할 패기는 없었다.

“총 넉 장입니다.”

디자인지를 가져간 진여원이 나를 빤히 쳐다봤다.

서늘하게 빠진 눈매를 안경이 감춰주진 못했다.

스무디 같은 얼음 음료보다 진여원의 얼굴이 더 시원해 보이는 건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다.

“여긴 정말 시원하네요.”

시원해진 게 진여원의 사장실 끄트머리에 놓인 에어컨 때문이라고 결론 내렸다.

직원 사무실은 중앙 냉방인데, 아마 재운 선배의 이사실도 여기처럼 개별 에어컨이 있을 것 같았다.

진여원이 동그란 펜 꽂이에서 연필 하나를 꺼내 내게 건넸다. 나는 연필만 들고 멀뚱멀뚱 서 있었다.

“뭐 해.”

“뭘 해야 합니까.”

“작업.”

그가 턱짓으로 내 뒤쪽 접대용 테이블을 가리켰다.

“여기서요?”

“교무실에서 반성문 안 써 봤어?”

“써 봤죠.”

한두 번 정도. 속으로만 횟수를 셌다.

“가서 반성해.”

“제가 뭐 잘못한 게 있습니까?”

아까 스무디 싫다며 설레발 친 것 때문에 저러나 싶었다.

진여원의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두근거리던 가슴에 찬물이 끼얹어지는 것 같았다.

“너무 많아서 문제지.”

그는 오전에 퇴짜놓은 우리팀 디자인지를 내밀었다. 한마디로 이따위 디자인을 내놓았으니 반성하며 제 눈앞에서 수정하라는 뜻인가보다.

나는 연필과 함께 종이를 한껏 움켜쥐고 테이블로 걸어갔다. 소파에 털썩 앉아 아웃당한 내 디자인을 찾았다.

이왕 아웃시킬 거 도움 될 만한 말이라도 써 주면 오죽 좋아.

뒤꿈치가 트인 슬링백 스타일 디자인을 찾아 펼쳤다.

앞코는 덮여 있고, 뒤꿈치 부분은 가죽끈으로 고정하는 슬링백은 대중적인 코드였다.

앞뒤가 꽉 막힌 구두보다는 뒤꿈치가 트여 있는 구두를 선호한다는 설문 조사에 중점을 뒀는데, 너무 대중성에만 치중했는지 내가 봐도 평이한 디자인이긴 했다.

근데 여기서 대체 뭘 어떻게 건드리라는 건지…….

의류처럼 획기적인 디자인을 내놓기는 어려운 게 구두의 기본 베이스는 착용감이었다. 그러다 보니 나올 수 있는 디자인도 한계가 있었다.

연필을 입에 문 채로 진여원을 흘끔 봤다. 그 역시 나를 보고 있었다.

누가 먼저 본 건지, 아니면 지금 동시에 마주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상사를 대할 때의 긴장감과 진여원과 좁은 공간에 있을 때의 두근거림이 동시에 얽혀들었다.

안경 안에 숨은 그의 눈 안에는 직원이 아닌 온전히 나를 바라볼 때의 다정함만 머물러 있는 것 같았다.

이상하기도 했다.

서늘하다 못해 차가운 저 얼굴에서 이런 감정을 느낄 수 있다니 말이다.

“지금 여기서 수정……은 어렵겠는데요.”

침묵을 참지 못하고 내가 먼저 깨 버렸다.

삐걱- 의자에서 그가 일어났다. 뚜벅뚜벅 내 앞으로 걸어오는 동안 눈도 깜빡이지 못했다.

“박석연 씨.”

그가 내 위에서 나를 불렀다.

침을 꿀꺽 삼키고 그를 올려다봤다.

무슨 말을 하려고 저렇게 나를 부르나. 설마……. 아니겠지. 아닐 거야, 라고 위안했다.

그간 진여원을 대놓고 피하거나 그의 부름에 다른 이를 대신 내세운 적은 없었다. 물론 회사일 이후에 단둘이 남는 일은 피하는 중이었다.

진여원이 어째서냐고 묻는다면…….

“단체 더위 먹었어?”

생각지도 못한 말이 나오는 바람에 무슨 말인지 한참을 헤아려야 했다.

투욱- 그가 내 디자인 위에 올려 둔 넉 장의 종이를 보고 깨달았다.

이번에도 퇴짜였다.

대체 무슨 신발을 원하는 거냐? 물에 뜨는 경이로운 신발이라도 발명해야 만족할 셈인가 싶었다.

“다시……. 제출하겠습니다.”

연필과 디자인지들을 그러쥐고 일어났다.

코앞에 진여원의 입술이 보였다. 그 입술에서 픽 하고 한숨이 나왔다.

“언제 벗게 할 거야.”

“벗……는!”

저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할 줄은 몰라 버벅거렸다.

진여원이 제 안경을 툭툭 두드렸다.

아……. 확실히 이해했다. 아직도 그가 내게 작업 중이라는 것을.

벗는다는 소리를 나만 이상한 쪽으로 생각했다. 아니지, 분명 저 인간이 일부러 날 놀린 거다.

“그것보다 하도 퇴짜를 많이 맞아서 얼른 수정해야겠습니다.”

박석연, 하고 또 부른다면 진여원에게 홀릴 게 분명했다. 서둘러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 사장실 문으로 쪼르르 걸었다.

그가 팔짱을 끼고 기막히다는 듯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박석연 저게 대체 왜 저러나, 하는 표정 같기도 했다.

사장실 문을 쿵 닫고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로 복도를 질러 나갔다.

내가 제아무리 진여원 앞에서 뻔뻔하게 행동한다 해도 아주 철판을 깔지는 못했다.

그에게 신발을 받자마자 앞뒤 안 보고 달려갔지만, 그것으로 만사 오케이 된 건 아니었으니까.

진여원에게 미안하기도 했고, 나 자신의 염치없음에 자괴감이 들기도 했다.

여기서 조금 더 솔직해지자면 다른 고민 때문이었다.

진여원을 찾아갔던 날, 우리는 그냥 한 침대에 누워 자기만 했다.

어마어마한 내 숙취와 더불어 긴장이 풀리는 바람에 바로 쓰러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아침에 일어나 옆에서 곤히 자고 있는 진여원을 내려다보며 꿈은 아닐까 진부하게 내 뺨을 꼬집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가 깨기 전,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기에 진여원은 빈 침대를 보고 황당해했을 거다.

진여원의 심정이 어땠을지는 그냥 내 예상이므로 확신하진 못했지만 말이다.

몸에 콤플렉스가 있어 옷 벗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의 고민을 이해했다.

몸이 어떻게 생겼든 어때, 사랑하는 사람인데 말이야. 그렇게 말해도 몸을 드러내 보였다가 상대방의 낌새가 탐탁지 않으면 트라우마가 생겨 버릴 건 당연했다.

별 쓸데없는 고민이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이성애자를 만난 건 이번이 처음이라 염려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여태 여자와만 몸을 맞대 왔을 테니 남자 몸에 이질적인 느낌은 당연히 들 것이다.

괜히 잤다가 생각과 많이 다르다고 멀어지면…….

생각만으로도 머리가 어질했다.

미령의 말이 맞았다. 정말 좋아하기 전에 한 번 해보고 마음 맞으면 만나는 게 오히려 속 시원한 절차였다.

퇴짜 맞은 디자인지로 복잡한 머리를 툭툭 쳐 가며 사무실로 돌아왔다.

이재화와 곽일영은 재판 선고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불안한 눈이었다.

“석연 씨 자책까지 할 정도야?”

곽일영이 종이로 머리를 치는 나를 보고 말했다.

“그 정도는 아니에요, 라고 말하고 싶은데 전부 다 퇴짜래요.”

이재화가 스무디의 빨대를 빼서 아예 컵째로 마셨다.

나는 디자인 종이들을 각자에게 나눠 주었다.

방치해 둔 컵에서 흘러내린 물방울이 마우스 근처를 적시고 있었다. 얼음이 녹아 점성이 거의 없어진 스무디를 빨대로 푹푹 쑤셨다.

망고 맛 스무디가 목마름을 없애 주기는커녕 물만 더 당기게 만들었다.

어떻게 수정해야 될지 모르는 디자인뿐만 아니라 진여원과 과연 아무 문제없이 몸을 맞댈 수 있을까, 지금 당장 해결할 수 없는 그런 문제들에 한숨만 푹푹 나왔다.

“구두에 모터 장착해야겠어.”

곽일영이 중얼거렸다.

“그래도 퇴짜 맞을 거 같은데요.”

“그럴까? 그럼 바퀴는? 힐 대신 바퀴를 다는 거야. 롤러스케이트처럼 타는 거 어때.”

“표절이죠.”

바퀴 달린 롤러슈즈는 근 십 년 주기로 유행을 탔다. 나도 어릴 때는 신나서 신고 다니긴 했었다. 그러나 운동화에 바퀴는 나름 어울려도 구두는 영 아니었다.

그야말로 팀의 멘탈이 박살난 상태였다.

이것도 주입식 교육의 폐해인가…….

이번 신상의 주제가 정해져 있지 않으니 망망대해에서 헤매고 있는 꼴이었다.

수정해도 발매가 불가능할 것 같은 디자인은 저 옆으로 미뤄 두고 단 한 장만을 남겨 두었다.

진홍, 핑크, 화이트가 교차된 플로럴 무늬의 토오픈 슈즈였다. 꽃이 모티브인 패턴인 만큼 밝은 배색이 주를 이루지만, 포인트를 주기 위해 검정 색연필을 들었다.

진여원에게 받아 온 연필은 책상 빈 공간에 비스듬히 놓여 있었다.

이제 보니 연필 몸통은 파인 흠 하나 없이 매끈했고 심은 뾰족했다.

내 필통에 들어가 있는 연필들은 뭉툭하거나 심이 나간 것들 대부분인데 이런 점에서도 그와 나의 차이를 발견하고 있었다.

왜 그래도 무질서 속의 질서라고들 하지 않나.

내 책상과 필기도구들이 좀 정신없어도 작업하는 데 지장이 있는 건 아니었다. 진여원이 너무 깔끔한 것뿐이다.

발등에 그려 둔 꽃무늬 패턴 위에 아카시아 꽃술을 그려 넣었다.

흰색 잎에 꽃술 중심만 검은색으로 그려내니 확실히 전보다는 특징이 도드라져 보였다.

직접 구두로 뽑아 보면 디자인으로 보는 것보다 더 괜찮을 수도 있었다.

사비를 들여 공장에 수주를 넣을 생각으로 디자인을 스캔했다.

박석연 씨, 종이로 보는 것과 직접 보는 건 다르군. 잘했어. 진여원의 그런 칭찬을 기대하는 건 절대 아니다.

종이에서는 그저 그래 보이는 디자인이지만, 완성했을 때 훨씬 그럴싸한 경우가 있었다. 평면과 입체의 차이라고 해야 하나. 그러나 대부분 디자인이 별로면 완성품은 더 별로였다.

지금 내 심정은 모 아니면 도였다.

김요한에게 보낼 메일에 소재, 재질을 설명한 파일까지 첨부했다. 미령에게서 별말이 없는 걸 보니 둘이 잘 사귀고 있는 것도 같았다.

슬쩍 곽일영을 보자 입 밖으로 혼이 빨려 나간 사람처럼 얼굴이 천장을 향해 있었다. 이재화는 두말할 것 없었다.

“확실히……. 평소보다 더 까다로우신 거 같네요.”

이재화가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러게, 이렇게까지 다 퇴짜 놓는 일은 거의 없는데. 우리 팀 미움받았나 봐.”

둘 사이에 두런두런 대화가 오갔다.

“우리 팀만 퇴짜 맞는 거 아닌 것 같으니 너무 걱정 마세요.”

진여원의 책상에 놓여 있는 여러 디자인들 중 채택된 건 없어 보였다. 고전하는 직원들이 우리뿐만이 아니란 소리였다.

‘Fairy or Femme Fatale’ 기획이 예상보다 훨씬 좋은 평을 듣고 있기에 다음 신상에 이목이 쏠린 건 당연했다.

정확한 판매량은 모르지만 품절된 매장도 속속 나오는 걸 보니 이번 달 월급 통장은 두둑할 것 같았다.

통장이 배불러지니 돈에 대한 미련도 전보다는 덜했다.

전 같으면 격려금을 날름 먹어 치웠을 텐데, 지금은 질문과 함께 격려금을 돌려줄 시기만 노리고 있었다. 물론 회사에서 지급하는 규정 격려금은 빼고 돌려줄 생각이었다.

안 그래도 엄마 퇴원하면서 환급받은 돈으로 수술비는 이미 충당된 뒤였다.

김요한이 메일을 수신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포털 사이트 메인 화면으로 돌아갔다.

앞서 선보인 내년 트렌드들을 확인하며, 눈여겨 볼 거리들은 따로 즐겨찾기를 추가했다.

조울증이 있는 사람처럼 심각하게 잡지를 뒤지기도 하고, 30초간 웃으며 디자인을 그리다 버리고,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었다.

생각해 보니 복잡하게 내 머리를 차지한 모든 문제의 근본은 진여원이었다.

내 인생의 공과 사, 두 가지가 진여원에게 걸쳐져 있었다.

내가 이렇게까지 순진한 놈이었던가. 일단 홀딱 벗어서 나 당신과 같은 거 달린 남자요. 이래도 흥분됩니까?

그렇게 직구로 질러 보는 게 가장 편한 방법이긴 했다. 하지만 편한 방법에는 그리 좋지 않은 결과가 따라온다.

인생사에 깨우쳐 온 진리였다.

“캠프파이어 하자, 우리 디자인 종이 다 모아서 활활 불태워 버리자.”

실실거리는 곽일영의 벌게진 눈이 기괴했다.

스피커 옆에 놓인 미니 달력을 확인했다. 역시나 곽일영에게 마의 구간이 다가오는 중이었다.

달력에서 눈을 거두는 때, 모니터에 신규 메시지가 깜빡거리는 게 보였다.

[9시 우리 집. 박석연 도망금지.]

두둥- 하는 소리가 어디에선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

첫사랑은 고등학생 때였다. 본격적인 연애를 해 본 건 대학 시절이었다.

호기심에 게이 바만 찾지 않았으면 김대영과 사귈 일도 없었을 것이다.

당시 미령은 로열패밀리의 아르바이트생이었고, 김대영은 꽤 잘 나가는 탑으로 인기가 있었다. 갓 대학에 입학한 새내기를 꼬시는 일은 김대영에게 있어 식은 죽 먹기였을 거다.

물론 나도 처음부터 김대영에게 관심이 있던 건 아니었다.

‘이런 데 처음이야? 그럼 형이 잘 챙겨 줄게.’

‘형이 요즘 너한테 관심이 가는 거 같다. 넌 어때?’

그때는 누군가가 내게 관심을 가져 주는 것만으로도 기뻤었다.

내게 술을 진탕 먹이는 꼴을 보고 저 새끼 또 저렇게 작업 치는구만, 속으로 미령이 혀를 찼다는 사실은 아주 나중에나 들을 수 있었다.

같이 섹스하고, 학교에서 밥을 먹고, 주말에는 이따금 놀러도 가고. 내가 처음 배운 연애는 그게 전부였다.

마음 한구석은 무언가 허전한데, 그게 도통 뭔지는 알지 못했다. 시간이 흘러서 깨달은 건 나는 처음보다 김대영을 훨씬 좋아하게 됐다는 거고, 놈은 내가 손에 잡힌 순간부터 흥이 식었다는 사실이었다.

자유연애, 좋다 이거다.

그런데 상대방에게 동의를 구하지 않은 자유연애는 착취였다.

나는 애정을 퍼부었고 김대영은 그것을 주워 먹으며 만족했다. 착취 동의서에 도장을 찍지 않았건만 시나브로 감정이 고갈되어 가고 있었다.

언제나 나 말고 다른 남자를 만나는 김대영을 기다리며 휴대폰만 내내 쥐고 있었다.

‘그래도 우리 석연이가 최고지.’

지금이라면 지랄한다며 바로 빠이빠이 손을 흔들었을 테지만, 그때는 그 말에 안심했었다.

콩깍지가 씌면 바닥에 바닥까지 감정을 고갈시키고 나서야 정신이 돌아온다. 그리고 그때는 이미 후회해도 늦어 버린 상태고.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가 딱 그 상황이었다.

나쁜 남자 신드롬이 왜 나왔겠나. 나만은 그 나쁜 남자에게 특별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는 근거 없는 기대에서 나온 것이다.

나 또한 헌신적인 애정을 보여 주면 김대영이 언젠가는 내게 정착할 거라고 생각했었다.

물론 김대영은 나쁜 남자가 아니라 그냥 개새끼였다.

방학이 되면 해외로 둘이 놀러 가자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놈이었다. 당연히 지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놈에게 적잖이 감사하는 부분도 있었다. 말뿐인 인간치고 제대로 된 놈이 없다는 것을 알게 해 주었으니까. 그 후로는 사람을 잘 믿지 못하게 된 것도 포함해서 말이다.

생애 첫 연애가, 연애의 환멸을 느끼게 해 주었으니 그것참 아이러니했다.

그리고 지금껏 지켜 온 환멸을 깨부순 사람은 진여원이었다.

얼마나 막강하던지 간신히 버티고 있는 게 고작이었다. 더욱이 신기한 건 이 인간이 내게 마냥 다정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회사에서 편의를 봐주는 것도 아니며, 운동으로 내기를 할 때도 봐주는 법을 못 봤다.

그래도 ‘박석연’ 하고 나를 부르면 이 안쪽이 따끈따끈해져 갔다.

“우리 가게가 너 사색하는 장소냐? 아예 절이나 가지 그래. 평일이라 장사도 안 되는데 말이야.”

미령이 맥주 한 병 시켜 놓고 몇 시간이나 죽친다며 핀잔을 줬다. 시간을 자꾸 확인하는 걸 보니 김요한이 오기로 했나 보다.

“넌 요한 씨 기다리냐?”

“둔하면서 이런 건 또 귀신같네. 박석연 씨의 연애 사업은 어때, 좀 잘 되어 가셔?”

미령은 연애하겠다는 내 선포만 들었을 뿐, 그 이후로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는 모르고 있었다.

내가 생각해도 폭풍 같은 한 달이었다. 구구절절 사연을 말하기도 귀찮았다.

“그럭저럭.”

간단히 대답만 주었다.

“벤츠에 올라탄 기분은 어때.”

미령과 대화하다 보면 마치 내가 섹스광이라도 된 듯했다.

“아직 시승도 안 했거든.”

손님이 없는 틈을 타 맥주를 마시는 미령이 눈을 크게 키웠다.

“왜 똥차만 올라타 봐서 부담스러워서?”

“어……. 좀 부담스럽지……. 사이즈가.”

미령이 맥주를 마시다 멈칫했다. 별 시답잖은 이유라면서 비웃음을 지었다.

“얼마나 큰데?”

“안 봐서 몰라.”

“넌 사이즈를 상상만으로 짐작하냐?”

“화장실 소문.”

“아…….”

미령도 곧 알아들었다. 남자 화장실에 프라이버시 따위는 없었다.

“딱히 그뿐만은 아닌데. 마음의 준비를 좀 해야 해서.”

“몸도 아니고 마음의 준비?”

“그 사람 남자랑 자 본 적 없잖냐.”

“안 설까 봐 그래?”

“몰라……. 그러면 엄청 상처 받을 거 같은데.”

입 안에 맥주 주둥이만 물었다가 떼어냈다.

“눈 딱 감고 오럴부터 해. 고자 아니면 서겠지. 아, 너 빠는 거 싫어하지.”

오럴은 받는 것도 하는 것도 별로였다. 내가 할 때는 입이 뻐근했고, 받을 때는 정신이 몽롱해져 무방비하게 변해 가는 게 싫었다.

쾌감에 신음하는 나를 빨아 주는 상대는 멀쩡한 눈으로 바라볼 테니 말이다.

빈 맥주병에 턱을 대고 있자 미령이 얼굴을 가까이 가져왔다.

“노인 좆도 발딱 세우는 액체형 비아그라 하나 공수해 줘?”

“몰래 타서 먹이라고?”

“어. 맛은 좀 이상한데 커피에다 섞어서 주면 모를걸.”

“커피 잘 안 마시는 사람이야.”

맛이 이상하다면 포카리스웨트에 섞어 봤자 들키는 건 시간문제다. 몰래 먹일 생각은 1퍼센트도 없는데 뭘 이딴 생각을 다 하냐. 한심했다.

“근데 넌 먹어 봤냐?”

미령이 어깨를 들썩였다가 고개를 저었다.

“안 먹어 봤는데 맛이 이상한 걸 어떻게 알아.”

“그냥 사람들이 그렇다는 거지.”

“새끼, 뭘 속이고 그래. 나이 들어 안 서는 거 아니냐?”

늙은 곶감이라는 말을 내심 담아 두고 있던 터였다.

미령을 궁지로 몰아가는데 타악 내 앞으로 손 하나가 올라왔다. 옆에 앉은 사람을 보니 김요한이었다.

“잘 서던데요.”

김요한이 엄지를 척 들어 보였다. 곽일영을 짝사랑하며 힘겨워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얼굴 살까지 통통하게 올라 탱글탱글했다.

마치 나 연애합니다― 라고 적혀 있는 얼굴이었다.

미령과 김요한이 서로 묘한 눈길을 주고받았다.

“네네, 두 분이 예쁜 사랑하세요.”

저는 갑니다. 비죽 웃어 주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김요한이 불쑥 말했다.

“오늘 박석연 씨가 보내 준 디자인 너무 화려하지 않아요?”

“아……. 그거요. 샘플 보고 결정할 거라.”

이런 데서 일 얘기는 싫다던 사람이 왜 이러시나. 연애하더니 일도 신나나 본데.

곽일영의 솔로부대 심보가 내게도 전염된 것 같았다. 문제는 난 솔로가 아니라는 거다. 적어도 지금은.

“그럼 그걸 진 사장님이 통과시켰다고요?”

그 디자인이 그렇게 최악인가? 난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개인적으로 부탁드린 건데, 메일 내용 안 보셨어요?”

“음. 디자인만 봤죠.”

“구두장이들 거기까지 하지?”

미령이 갓 만든 레모네이드를 김요한과 내 사이에 올려 두었다. 제 애인이라고 술도 못 마시게 하는 걸 보니 정말 단단히 빠지긴 했나 보다.

나도 휴대폰의 시간을 확인했다. 지금부터 출발하면 진여원 집에 딱 9시에 맞춰 도착할 수 있을 듯했다.

“난 이만 가야겠다.”

“왜, 더 있다 가지.”

“약속 있어.”

“애인 만나러 가냐?”

고개만 끄덕거렸다.

“약 진짜 필요 없냐?”

“없거든!”

김요한의 얼굴에는 잔뜩 의문이 서려 있었다.

“아 맞다. 요한이, 박석연 애인 누군지 모르지? 쟤네 사장이라는,”

“야!”

상체를 바짝 굽혀 미령의 입을 틀어막았다.

김요한이 고개를 약간 비딱하게 해 생각에 잠겨있더니 금세 경악에 차서 나를 바라봤다.

“진……사장님?”

입 가벼운 자식. 목덜미를 벅벅 긁었다.

“그런 건 아니고, 그냥 미령이가 착각한 거예요.”

김요한의 눈이 미령을 향했다.

미령이 입꼬리를 장난스레 내리며 고개를 저었다. 검지를 세워 제 가슴을 툭툭 쳤다. 쟤가 아닌 나 믿지? 하는 모습이었다.

늙어서 안 서냐고 한 번 놀렸다가 도리어 독박이나 맞았다. 역시나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다. 미령이와 김요한이 이런 사이가 될 줄 짐작했다면 진여원에 대해서 입도 뻥긋 안 했을 텐데.

“석연 씨.”

“……예.”

김요한이 눈썹을 팔자로 늘어뜨렸다. 왜 저런 표정인가 싶었다.

“망상하는 거 아니죠?”

하하…….

소리 없는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럴지도 모르죠.”

김요한을 안 믿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믿음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행여 진여원에게 피해가 갈 만한 일은 미연에 방지해야 한다.

그러니까 내가 망상증 환자 취급받아도 어쩔 수 없었다. 요상한 표정을 짓고 있는 김요한에게는 샘플을 잘 부탁한다는 말로 끝을 맺었고, 미령에게는 가운뎃손가락을 흔들어 주었다.

아마도 김요한이 망상을 운운한 이유는 복합적일 것이다.

진여원이 완벽한 이성애자인 줄 알기 때문에. 또는 진여원이 연애를 하는 것 자체가 상상이 되지 않아서.

왜인지 뒤의 가설에 불이 들어왔다. 나 역시 입사 초반만 해도 독설로 부인을 들들 볶을 거라며 오해했었다. 진달래가 부인 이름이라고도 생각했었지. 지금 생각하니 왠지 웃겼다.

가게를 빠져나오는 동안 들어오는 몇몇 녀석이 나를 품평하듯 위아래로 훑었다. 어디 가도 빠지지 않는 스타일이라 자부하건만 진여원 앞에서는 내놓은 자부심도 도로 수거해야 했다.

버스정류장으로 향하긴 했는데, 진여원의 집으로 가는 버스 한 대는 눈앞에서 보내 버렸다.

여러 버스의 노선이 겹치는 구간이라 3분만 기다리면 또 다른 버스가 올 터였다.

약이나 받아 올 걸 그랬나. 전광판을 올려다보며 괜한 말을 중얼거렸다.

전광판이 새로운 버스 진입을 알려오는 순간 복잡다단한 머리도 싹 비워져 나갔다.

나답지 않게 무슨 예민한 고민이냐. 윗도리 싹 까고 바지 내리고 보시오, 그래도 흥분됩니까? 물어봐 주면 장땡이다.

진여원이 잠시 움찔하기라도 하면 뒤도 안 보고 집에 가서 술이나 퍼마시면 그만이고.

들어오는 버스를 쳐다보고 있자 주머니에서 휴대폰이 진동했다.

나는 재빨리 새로운 메시지를 확인해 봤다.

[내일로 변경.]

진여원에게서 온 문자를 보자마자 휴대폰을 패대기치고 싶었다.

“아오, 진짜!”

쇠뿔도 단김에 빼려고 했더니 이 인간이 방해를 한다. 버스를 보내며 꾹꾹 휴대폰을 눌렀다.

[왜요.]

답장을 보내자마자 전화가 걸려왔다. 이럴 거면 처음부터 전화를 하지.

흠흠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전화를 받았다.

“예, 여보세요.”

저도 모르게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나가 버렸다. 약속 취소했다고 삐친 사람으로 비춰질 것만 같아 내심 찜찜했다.

[내일 와.]

“내일이 불금인 건 알고 계십니까?”

[그런데.]

“저도 친구들 만나서 놀고 좀 그래야죠.”

그래, 사실 나 삐쳤다.

진여원 바쁜 건 아는데 그의 일정에 내가 좌지우지된다는 걸 알리기는 싫었다.

[놀아 그럼.]

휴대폰을 귀에 붙인 채로 하, 어이없는 웃음만 뱉었다.

[9시까지만.]

“제가 초등학생입니까? 그리고 말이죠. 오라 가라 한다고 제가 다 맞춰 드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면 크나큰 착각이십니다.”

지나가는 버스를 힘주어 보고 말했다.

[억울해?]

“억울할 건 없죠.”

[난 억울한데.]

정곡을 찔러 버리니 할 말이 없었다.

내 멋대로 진여원을 밀쳐내려고 했다가 마음을 뒤바꿨으니 정작 억울한 사람은 진여원이었다.

알긴 잘 알고 있는데 진여원은 내게 뒤흔들린 사람 같지가 않았다. 먼저 작업 건 것도 그인데 애타는 마음은 내가 더 큰 것도 같아서.

“저 묵비권 행사해도 됩니까.”

휴대폰 저 너머에서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늦지 마.]

낮게 나온 목소리에 귀가 간질거렸다. 여운을 느낄 새도 없이 진여원이 전화를 끊었다.

아직도 간지러움의 잔해가 남아 있는 귀를 손바닥으로 비볐다.

늦지 마.

목소리에도 무게가 있다는 걸 알았다. 그 한마디로 고동이 빨라지니 말의 힘이 이런 걸지도 모르겠다.

물론 내일 9시를 딱 지켜 갈 생각은 없었다. 친구들과 논 척이라도 해야 되지 않겠나.

하루 종일 목 빠지게 당신만 기다렸다는 행동은 꼴사나웠다.

집으로 향하는 버스가 서는 곳은 반대편 정류장이었다. 건널목이 저 끝에 있어 쓸데없이 발품을 팔아야 했다.

앞에 작은 돌멩이 하나가 있었지만 발로 차는 짓은 하지 않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