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여원 2 (13/18)

진여원 2

소녀와 헤어져 돌아오는 길에, 소년은 혼자 속으로, 소녀가 이사를 간다는 말을 수없이 되뇌어 보았다. 무어 그리 안타까울 것도 서러울 것도 없었다. 그렇건만, 소년은 지금 자기가 씹고 있는 대추 알의 단맛을 모르고 있었다.


소년은 근동에서 제일가는 이 덕쇠 할아버지네 호두를 어서 소녀에게 맛보여야 한다는 생각만이 앞섰다. 그러다,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녀더러 병이 좀 낫거들랑 이사 가기 전에 한 번 개울가로 나와 달라는 말을 못해 둔 것이었다.


바보 같은 것, 바보 같은 것. -황순원의 소나기 중-

전화벨 소리가 소설에 집중하던 정신을 일시에 깨뜨렸다. 번호의 주인은 하재운이었다. 스피커폰으로 연결해 볼륨을 올렸다.

[사장실이냐?]

“그러니까 받았겠지.”

[아……. 그러네. 기다려 봐 갈게.]

얼빠진 소리를 던진 하재운이 전화를 끊었다. 며칠 전 도서실에서 가져온 황순원의 소나기를 덮었다. 다시 읽어 본 건 근 십수 년만이었다.

책을 즐겨 읽는 편이라고는 해도 문학책보다는 잡지의 빈도수가 월등히 많았다. 더욱이 풋내 나는 사랑이야기는 평소 읽는 책과는 거리가 멀었다. 다시 읽어 보고 싶어진 건 아마 박석연 때문이이었다.

바보 같은 것, 바보 같은 것.

소년의 혼잣말이 내게로 돌아왔다. 소나기의 소년은 소녀가 죽을 때까지도 제 감정의 정체에 대해 인지하지도 못했다. 소나기처럼 찾아온 사랑을 끝끝내 몰랐으니까.

‘사랑이 계산대로 되겠어? 억지로 좋아하려고 해도 소용없는 게 사람 맘이지. 반대로 어느 순간 정신 차려 보니 그 사람에게 푹 젖어 있는 것도 그렇고. 넌 나한테 폭우인데 너한테 나는 가랑비도 안 되는 게 진짜 억울한 일이지. 그런데 그게 사람 마음이야. 억울한데 억지로는 안 돼. 나만 마음 아파하는 것도 지쳤어. 헤어지자는 이유 한번 거창하다면서 넌 변명이라고 생각할 거야. 그래도 진실인 걸 어떻게 해? 너도 엿 먹어 볼 때가 올 거야. 진여원, 네 인생에 사랑 한 번 안 찾아오겠니?’

미유의 신랄한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박석연을 자전거 뒤에 태웠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은 술김에 그랬다고 여겼다. 보슬비가 얼굴에 묻어오는 동안 흥얼거리던 노래 또한 오로지 술 탓이라고 여겼다.

초여름 날, 선 얘기나 들먹이는 아버지를 만나는 동안 머리에 떠오른 사람은 오로지 박석연뿐이었다. 단순히 불쾌한 상황이었기에 유쾌한 박석연을 떠올린 것이라 치부했다.

불쾌함을 지우고자 박석연을 불렀을 때 어땠던가. 스파이크를 신고 나온 꼴을 보고 역시나 예상을 빗나가지 않는다고 생각했었다.

‘제가 선배한테 뭐 잘못한 거라도 있어요? 혹시 그 일 때문입니까? 그래서 그런 소문을 퍼뜨리셨어요?’

그 말을 건넸던 후배의 얼굴은 사실 잘 생각나지 않았었다. 내게 남아 있는 박석연의 기억은 잔뜩 처져 있던 등뿐이었다. 그리고 그 등은 누군가의 뒷모습과도 닮아 있었다.

미유가 내게 이별을 고했을 때, 그녀는 내가 붙잡아 주기를 원했었다. 어떤 말을 해 주면 기뻐할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후회 역시 하지 않았다. 해 줄 수 있는 일은 미련조차 남지 않게 보내 주는 것뿐이었다.

지금은 기억조차도 희미했지만, 당시의 이별은 나를 얼마간 혼란스럽게 했었다. 술은 잊기 위함이 아닌 한껏 태워 털어 내기 위한 촉매제였다.

내가 어떤 마음으로 그녀를 봐 왔던가. 그녀는 또 어떤 마음으로 나를 봐 왔던가. 어째서 그녀를 잡지 않았나. 그 누구에게도 묻지 않았던 의문에 대한 해답은 의외의 곳에서 찾아왔다.

그건 박석연의 등이었다.

꼿꼿한 듯 하지만 잔뜩 위축되어 있는 뒷모습은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끝이 왔음을 알면서도 가느다란 희망을 놓지 못하는 어리석음이라는 것을.

그 등은 누군가의 옆에 붙어서 볼품없는 앙상한 가지처럼 휘청거리고 있었다. 거리에서 우연히 발견한 박석연의 뒷모습에 발걸음이 이끌린 건 충동이 아니었다.

단지 차이를 알고 싶었을 뿐이었다. 놓을 수 있는 나와, 놓지 못하는 녀석의 어떤 점이 다른지.

나 역시 미유를 사랑했다고 여겼으나 그녀가 내게 말했었다. 정말 사랑한다면 이별은 있을 수 없으며 또 놓아서도 안 된다고. 그러나 나는 그녀가 고한 이별을 받아들였다. 또 그녀를 놓아주었다.

어느새 등은 적응이 쉽게 되지 않는 음습한 공기 속으로 들어갔고 이내 사람들 사이에 섞여 버렸다.

등은 웃고 떠들지만 불안해 보였다. 상대방의 눈치를 봐 가며 점점 더 위축되어 갔다. 박석연은 차가운 상대방에게 애써 달라붙어 있기만 했다. 그런데 어째서 그녀와 저 등이 닮아 보이는 것일까.

오래 생각하지 않아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그녀와 박석연은 상대방의 애정에 굶주려 있었다. 그래서 둘 다 같은 비참함을 띠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왜 그녀가 준비되지 않은 결혼을 서두르려 했는지 깨달았다. 내 자체가 그녀에게는 불안함이었다. 그녀가 가진 감정과 내 감정의 무게는 지나치게 달랐다.

나는 그녀를 아꼈을 뿐이고, 그녀는 나를 사랑했다. 그 차이였다. 미유는 그것을 읽어 냈기에 견디다 못해 이별을 고했을 것이다. 모든 것이 허탈해짐과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나려 한 때였다.

박석연이 웃으며 다가왔다.

‘선배 여자 친구는 혹시 눈속임이었어요?’

게이 바임을 알고 있었다. 또한 타인의 착각 정도는 아무렇지 않았다. 그럼에도 화가 났던 건 술기운에 찾아온 연민 때문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안 될 행동 같은데.’

‘잘못 찾아들어 온 건 내 탓인데, 사람 봐 가면서 행동해.’

박석연의 눈이 당황으로 흐려졌다. 미유처럼 보답받지 못할 감정을 흘리는 녀석이 도리어 그녀를 걱정하고 있으니 얼마나 반어적인가.

그래도 박석연보단 그녀가 좀 더 현명했다. 그랬기에 이별의 결심도 빨랐을 것이다. 열심히 변명하는 김대영과 한마디도 꺼내지 못하는 박석연에게 신물이 나기 시작했다. 아니, 어리석은 건 나였다.

제 감정 하나 알아차리지 못해 그녀를 닮은 뒷모습을 따라 들어왔다. 궁색한 변명 따위는 듣고 싶지 않았다.

‘둘 다 변명하지 마, 관심 없으니까.’

더는 촉매제가 필요 없었다. 내부의 혼란함은 이별로 생겨 버린 것이 아님을 알았기에.

모든 것은 죄책감에서 비롯되었다. 또한 나 자신에 대한 환멸이었다. 그녀의 시간을 빼앗았다. 그녀만큼 사랑해 주지 못했다. 받은 사랑을 돌려줄 놈도 되지 못했다.

더는 그녀를 닮은 박석연을 보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그 어떤 말도 남겨 두지 않고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날, 만일 내가 본 등을 따라 습한 공기 속으로 들어가지 않았더라면 박석연의 진실이 드러날 일 또한 없었을 것이다.

언제나 소문은 단 한 사람에 의해서 시작되지만, 여러 사람의 추측들이 더해질 때 비로소 추진력을 얻는다. 서서히 박석연을 궁지로 몰아넣은 소문의 근원지는 김대영이었다.

김대영은 박석연을 희생시켜 저 자신을 지켰다. 목격자인 나에게 결백을 주장하기 위해 주변인을 동원했고, 김대영이 결백해질수록 박석연은 집단에서 소외됐다.

일종의 게임 같기도 했다. 먼저 소문을 퍼뜨린 쪽이 승리하는 게임. 승리자는 김대영이었고 박석연은 게임에서 수 한 번 쓰지 못하고 물러났다.

그 모든 건 시간이 흐르면 잊힐 타인의 사정이었다. 그럼에도 박석연의 말이 뇌리에 선명하게 남았던 건 무더운 여름날 봤던 모습 때문이었다.

집단에서 소외된 박석연은 학교를 하염없이 올려다보고 있었다. 모두가 지나다니는 곳에 홀로 멈춰 서 있었다. 박석연은 수군거리는 사람들의 소리조차 듣지 못하는 듯 미동도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야 뒤를 돌아섰지만, 표정은 담담했다. 박석연은 벤치에 앉아 있는 나를 발견해 다가왔다.

‘덕분에 군대 갑니다. 다시는 볼 일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선배.’

스쳐 지나가는 얼굴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뒤를 돌아 걷기 시작한 박석연의 등을 봤다.

그제야 어깨가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떨림은 시야에서 멀어질 때까지 한참이나 지속됐다.

소문의 근원지로 김대영을 한 번쯤은 의심할 수도 있던 것 아니었나. 그러나 박석연은 순수하게도 놈을 믿었던 것 같았다. 사랑한다는 이유였을 테니 더없이 어리석었다.

그리고 그것은 나는 절대 겪을 수 없을 감정이라고 생각했다.

똑똑똑.

일방적인 노크 소리에 머릿속을 맴돌던 과거의 기억이 끊어졌다. 하재운이 허락도 없이 문을 벌컥 열었다. 찍찍 슬리퍼를 끌고 들어온 하재운이 다짜고짜 불평부터 쏟아 내기 시작했다.

“진 사장, 우리 캐주얼 런칭에도 좀 신경 좀 써 주지?”

“투정 부리러 온 건 아닐 테고.”

대답하며 의자를 뒤로 끌어냈다.

“뭐 그건 아니고.”

뒷짐을 지고 있던 하재운이 책상 위로 쓱 무언가를 내밀었다. 포카리스웨트였다.

“일단 뇌물부터 받아라.”

“내 능력으로도 충분히 살 수 있는 건 뇌물이라 하지 않지.”

“좀! 그냥 넘어가는 꼴을 못 봐요. 이번에 애들 대거로 뽑았다며.”

신입사원을 기용한 건 맞았다.

“그런 김에 석연이 나 주면 안 되냐?”

“그건 내 건데.”

“그래, 모든 사원이 다 네 거긴 하지.”

“모든 사원이 왜 내 거야. 필요 없어.”

고교 때부터 봐 왔지만 눈치는 약에 쓸래야 없는 녀석이었다.

“암튼 진 사장, 네가 몰라서 그래. 그거 여자 구두뿐만 아니라 캐주얼 쪽에도 저력 있어. 걔 대학 때 디자인 내놓은 거 못 봤지? 저번에 대박친 플랫슈즈만 봐도 그래, 엄청 캐주얼한 쪽이지 않냐.”

장황하게 설명을 늘어놓는 것을 보니 캐주얼부 신입사원 중에 눈에 차는 인재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옴므와 쉬즈로 괜찮은 인재들을 전부 돌린 터였다.

“스카우트도 재능이야.”

“진 사장 잘난 거 알지. 근데 내가 사람 보는 눈 없는 걸 어쩌냐.”

캐주얼 부분은 하재운에게 일임되어 있기에 녀석에게 사원 배정 권한도 있었다. 물론 내가 스카우트한 인재는 열외지만.

“박석연은 안 돼.”

“와, 치사하다. 막말로 너 나 아니었으면 걔 받지도 못했어. 내가 연결시켜 준 건 잊었냐?”

“스카우트 예비 명단에 체일 슈즈, 박석연도 있었을걸.”

말의 진의를 가리듯 하재운의 눈빛이 게슴츠레해졌다.

“진짜냐?”

“가짜면?”

하재운이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괜찮은 녀석들 좀 추천해 줘. 애기들만 데리고 대체 뭘 하라는 거야. 그러지 말고, 석연이 반년만 빌려줘.”

“곽일영은 대여 가능해.”

“걘 감당 안 돼. 한 달에 절반이 조울증인데, 난 그 꼴 못 봐준다. 석연이는 대체 왜 안 되는데.”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자 하재운이 입을 다물었다. 정적이 3초 정도 흘렸을 무렵 빠끔히 사장실의 문이 열렸다. 박석연이 동그랗게 눈을 키우고 나와 하재운을 번갈아 봤다.

“말씀……이 없으셔서요. 들어가도 됩니까?”

“어, 그래! 석연아. 마침 잘 왔다.”

하재운이 반색하자 박석연이 구두 한 켤레를 품에 안고 쭈뼛거리며 들어왔다. 오전 중으로 보여 줄 샘플이 있다더니 저거였나?

자신 있던 사내 메신저 말투에 비해 태도는 상반됐다. 박석연이 통통한 앞발로 살금살금 걸어오는 새끼 강아지처럼 발을 사푼사푼거리며 다가왔다.

“이거 말씀드린 샘플입니다.”

박석연이 토오픈 슈즈의 굽을 잡아 내밀어 보였다. 꽃인지, 잡초인지 모를 무늬들이 구두 전체를 둘러싸고 있었다. 굽까지 플로럴 천이었다. 정신분열증 환자가 그려도 저거보다는 덜 정신없을 듯한 형색이었다.

“자신 있다며.”

“샘플이 오기 전까지는 그랬……습니다.”

하재운이 기웃거리며 박석연의 구두를 내려다봤다.

“헉.”

하재운의 속마음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내가 박석연을 못 주는 이유.”

박석연이 들고 있는 구두로 대답을 대신해 주었다. 한참 좋은 디자인을 쏟아내다가 이번 신상부터 막혀 버린 시점에서 박석연을 캐주얼 부서로 돌리는 건 극약처방이었다. 매너리즘을 극복하지 못하고 샛길로 빠져나가게 만들어 봐야 마이너스 작용밖에 더 있겠나.

박석연의 재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분야는 캐주얼이 아닌 여성 구두이기도 했다. 정적임과 화려함을 동시에 배출할 수 있는 인재는 그리 많지 않다.

이쪽 업계에서 잘 쓰면 황금, 못 쓰면 쇳덩어리라 불리는 곽일영만 해도 디자인 분야는 블랙과 화이트 톤으로 한정되어 있었다. 그런 면에서 박석연은 황금 알을 낳는 거위긴 하지. 다루기 까다로워서 문제지만.

단순한 부하 직원이었다면 얼마든지 손안에서 굴릴 수 있었다. 내 감정을 좌지우지하는 존재이니만큼 시한폭탄이나 다름없었다. 그것도 언제 어디로 튀고 터질지 모르는.

심각하게 미간을 구긴 채 입술을 뚱하니 내민 박석연을 향해 쓰레기통을 가리켰다.

“안 버리고 뭐 해.”

“이건……. 제가 수정해서 신을 겁니다.”

박석연이 내민 구두를 도로 제 품에 껴안았다. 오기도 박석연답다. 화려한 꽃무늬 플랫슈즈라도 만들 셈인가 보지. 피식 웃음이 나오는 것을 안으로 삼켰다.

평소라면 퇴짜 맞고 귀가 쳐져 밖으로 쪼르르 나갔을 테지만, 오늘만큼은 뭔가 불만이 있는 듯 입술을 꼼질거렸다.

“와, 진 사장 심하네. 직원 디자인이 아무리 이상하다지만, 기운을 북돋아 주지는 못할망정 진짜 너무한 거 아니냐.”

퇴짜 맞은 건 박석연인데 하재운이 오히려 더 성화였다. 녀석이 박석연을 아끼는 것은 안다.

그건 선배로서 후배를 바라보는 시선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기에 정작 중요한 순간에는 놓을 수 있는 그 정도의 위치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박석연을 달라는 말에 아까처럼 평정을 유지하지는 못했을 테고.

일전에 김대영이 윰으로 팩스를 보냈을 때만 해도 그렇게까지 물 먹일 필요는 없는 것 아니냐며 내게 훈수를 둔 녀석이었다. 아마 박석연 또한 관계의 깊이를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하재운이 아껴 줌에도 제멋대로 나서지 않는 거다.

다소 똑똑하고 제 이득을 챙길 줄 알지만, 타고나길 영악하진 못했다. 사람 이용 같은 건 할 줄 모르는 숙맥이니까.

생각에 잠긴 박석연을 쳐다봤다. 곧 동그란 콧대가 위로 들렸고, 시선이 마주쳤다.

“조언 한마디쯤 해 주시면 안 됩니까.”

그러고는 제 구두를 내려다봤다.

“오버하지 마.”

너무 잘하려고 할 필요 없다는 말을 알아들었을런지는 모르겠다. 표정을 보아하니 심술이 난 것 같긴 한데…….

“충고. 엄청나게 감사합니다.”

박석연이 나와 하재운에게 고개를 숙인 뒤에 기운 없이 걷기 시작했다. 박석연에 등에 대고 약간 목소리를 키웠다.

“박석연 씨.”

박석연이 저게 대체 무슨 말을 하려나 싶은 눈초리로 나를 돌아봤다.

“요즘 연애하느라 신나나 봐.”

지나치게 화려해.

품에 안긴 구두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순식간에 박석연의 얼굴이 홍시가 되어 버렸다. 하재운을 힐끔거리며 눈치를 보더니 웅얼거렸다.

“꼭 저만 신나는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그럴 리가.

“나도 신나.”

박석연의 뺨부터 시작해 귀까지, 물통에 풀어헤친 물감처럼 색이 퍼져 나갔다.

“그래도 그건 버려.”

박석연이 귓불을 손으로 매만지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고집하고는. 구두로 얼굴에 부채질하는 박석연이 빠져나가자 하재운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내게 들이밀었다.

“뭐냐, 박석연이랑 너랑 둘 다 연애하냐?”

“어.”

“대체 누구랑?”

이 정도면 눈치라도 챌 법하건만, 서로 다른 사람과 연애를 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 있었다.

“너도 알아.”

“뭐냐, 내가 아는 사람이야?”

“그럴걸.”

음료 뚜껑을 달칵 땄다. 달짝지근한 내용물을 마시다가 미지근함에 도로 내려놓았다.

“석연이는 남……자겠고, 넌 설마 미유 다시 만나냐?!”

“유부녀를 내가 왜.”

하재운의 특기가 유감없이 발휘됐다. 눈치 없음 더하기 착각하기.

“아니……. 그 뭐냐. 너 미유 이후론 누구 사귄 사람도 없어서 아직 못 잊은 게 아닌가 했는데, 그건 아닌가 보다?”

“뇌물 퇴짜야.”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하재운에게 미지근한 캔을 툭 쳤다. 하재운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허, 희한하네. 하고 대꾸했다.

의자를 밀고 일어나 옷걸이에 걸어 둔 넥타이를 맸다. 구두 진열대 옆에 비스듬히 세워 둔 거울에 전신을 비춰 보며 소매의 커프스를 정리했다.

“어디 가냐.”

“출장 준비.”

“그래, 대표님 안 계시는 동안 이 몸이 불살라 회사를 지키마.”

“그럼 이것부터 처리해.”

반으로 접은 서류 한 장을 건넸다. 하재운이 펼쳐 보더니 기가 막힌 웃음을 자아냈다.

“에라이, 이런 거나 나 시키고. 일단은 적힌 대로 처리한다.”

차 키와 함께 지갑을 손에 쥐었다. 서류 봉투를 마지막으로 챙겨 사장실을 빠져나왔다. 뒤따라 나온 하재운이 슬리퍼를 끌며 이사실로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진 사장. 만나는 사람 기회 되면 꼭 소개시켜 줘라.”

또 어떤 착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굳이 지금은 물어보지 않겠다며 웃었다. 무시하고는 비상계단을 열었다.

후끈한 공기에 넥타이를 맨 목덜미가 갑갑해졌다. 장마가 지나간 뒤로 비 소식은 없었다. 소나기라도 퍼부어 주면 한풀 더위가 꺾일 텐데…….

언제는 예측하고 소나기를 맞았나. 오란다고 오는 비가 아니니 아쉬워할 필요도 없었다.

주차장에 세워 둔 차에 털썩 앉았다. 운전석 문을 열어 둔 채로 안에 고여 있던 열기를 밖으로 방출시켰다. 시동을 걸고 차가운 바람이 나올 때까지도 핸들에 올려 둔 서류만 툭툭 건드렸다.

내비게이션이 정각 2시임을 알렸다. 안이 적당히 시원해졌을 때쯤 문을 닫고 조수석에 서류를 던졌다. 주차장을 빠져나오며 습관적으로 주변을 쓱 훑었다.

저 멀리 인도만 나 있는 벤치에 앉아 있는 박석연이 보였다. 퇴짜 맞은 구두를 애꿎은 무릎에 내려치고 있었다.

갑자기 고개를 휙 들은 박석연이 내 차를 발견한 듯 이쪽을 유심히 보다가 주변을 두리번두리번 확인했다. 그리고 뭔가를 결심한 듯 뒤늦게 손을 흔들었다.

분명 내가 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겠지.

이를 악물고 흔든 주먹을.

황당한 웃음이 저절로 나왔다.

제 할 말은 다 하는 편이어도 대놓고 개념 없이 굴지는 않는다. 몰래 법인 카드 긁고서도 눈치를 보지 않았던가. 눈물이 쏙 빠지게 혼낼 때 역시 책임감을 미루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다.

물론 그것들은 아마 박석연이 나를 오해하고 있을 때 벌어진 일이었을 거다. 제 대학 시절을 악몽으로 만든 이로 생각했을 테니…….

시선만 슬쩍 내려 서류 봉투를 확인했다.

그러나 그때와 지금은 다르지.

자전거 뒤에 앉았던 박석연이 내 옷깃을 꽉 잡았을 때의 감각이 떠올랐다.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스멀거리며 올라왔었다.

축축하기도 하고, 눅눅하기도 한 엄청난 습기를 닮아 있었다. 그것 또한 보슬비 때문이라 생각했었지. 아니, 남자인 박석연에게 이끌리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그렇게 여겼던 것일지도 모른다.

바보 같은 것, 바보 같은 것.

소년의 외침이 또다시 머릿속을 맴돌았다. 만일 더 늦게 깨달았다면…….

이제 와 박석연을 놓치는 것은 상상조차도 할 수 없었다. 그건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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