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연 3
“못돼먹은 진독사, 말을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냐고.”
퇴짜 맞은 구두를 허벅지에 내리쳤다. 가뜩이나 더워 죽겠구만, 사람 약 올리기나 하고 말이야.
“오버하지 마. 오버하지 마.”
진여원의 싹퉁머리 없는 말투를 따라 하며 토오픈 슈즈에 화풀이를 했다. 거기다 재운 선배 앞에서 연애하느라 신나냐느니 그런 말을 왜 하느냔 말이다.
눈치채면 어쩌려고!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퇴근시간도 한참 남아 차가 다닐 시간대가 아닌데도 웬걸, 검은 세단 하나가 주차장에서 쓰윽 빠져나왔다.
‘1.5, 1.5’의 시력을 자랑하는 눈답게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저건 진여원의 재규어였다.
밖으로 빠져나가는 진여원의 차를 향해 주먹을 쥐고 때리는 시늉을 하려다가 혹시나 해 인사하듯 주먹을 흔들기만 했다. 어차피 한참 멀어서 보이지도 않을 것 같았지만.
“나는 퇴짜 놓고, 충고도 거지같이 해 주고는 어디 놀러 나가기라도 하시나 보지.”
땡땡이가 아니란 걸 안다. 나보다 바쁘다는 것도 알고. 그런데 재운 선배 앞에서 나름 야심 차게 준비한 내 디자인을 그렇게 무시해도 되냐 이거다.
못나도 내 자식이었다. 괜히 구두에 화풀이한 게 미안해져 옆으로 밀어둔 구두를 허벅지 위에 올렸다. 그리고 내 자식을 내려다봤다.
사실……. 너무 화려하긴 했다.
최근 디자인이 잘 안 풀리다 보니 점점 색을 추가하고, 이런저런 무늬들도 막 넣게 되곤 했다. 역시나 과한 건 부족한 것만 못했다.
그래도 일단은 머리를 쥐어짜 내야 하니 이런 돌연변이가 나오는 거다. 대체 언제 박 대리로 승급되려나. 스카우트가 아닌 만큼 고속 승진은 물 건너간 듯했다.
어떻게 하면 인센티브를 많이 받을 수 있을까, 또 어떻게 하면 직급이 올라갈까 고민하는 건 회사원이라면 당연한 욕심이 아닌가. 다만 욕심이 능력을 앞설 때 헬게이트가 열리는 거다.
능력은 한 뼘만큼밖에 안 되는데 욕심이 두 뼘이 되게 되면 자기 비하가 시작된다. 그것을 넘어서면 내 디자인은 훌륭한데 남들이 알아주지 못하는 거라는 매너리즘에 봉착하게 되고……. 다행히 내가 그 단계는 아니었다.
사실상 그 정도로 내 디자인에 엄청난 자신감이 있는 건 아니라 남들 눈이 이상하다는 소리는 못하겠다.
따지고 보면 오버하지 말라는 진여원의 충고도 일리는 있었다. 제 능력 이상의 것을 바라지 말라는 뜻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부우우웅, 부우우웅.
주머니에서 휴대폰이 진동했다. 곽일영이 나를 찾나 싶어 재빨리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진득이]
액정에 커다란 글씨가 떠올랐다. 타이밍이 기가 막혀서 가슴이 철렁했다. 설마 봤겠어. 아닐 거다, 그랬으면 진즉에 더 먼저 전화를 했겠지. 흠흠 목을 가다듬고 태연하게 전화를 받았다.
“예, 박석연입니다.”
[오늘부터 출장.]
“말씀 없으셨잖아요.”
잠시 잠깐 뒷담화를 까긴 했지만, 연인이 갑자기 출장 가겠다는데 누가 좋을까.
“언제 오십니까?”
[사흘.]
“아……. 예. 잘 다녀오세요.”
[배웅 인사가 참 화끈해.]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아~ 혹시 아까 제가 사장님 차보고 손 흔든 거 말씀이십니까?”
먼저 선수를 쳤다. 까맣게 선팅이 되어 있어서 그가 나를 자세히 봤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나무들 사이에 묻혀 있는 벤치라 당연히 안 보일 거라 생각했고.
[흔들었지.]
“예, 제대로 보셨네요.”
[주먹을.]
“…….”
삐끗, 귀에 붙이고 있는 휴대폰을 놓칠 뻔했다. 재빨리 단단히 잡고 말을 이었다.
“다시 시력 검사하셔야겠네요. 안경 꼭 쓰시고요. 그럼 끊습니다.”
할 말이 없을 땐 재빨리 끊는 게 상책이었다. 내가 먼저 통화 종료 버튼을 검지로 꾹 눌렀다.
제아무리 사귀는 사이라고 해도 상대방이 사장이니, 그의 마음이 식어 변심하면 날아가는 건 내 목이었다. 아마 그 전에 심장이 날아가겠지만.
생각만으로도 이렇게 가슴이 아픈데 진짜로 진여원이 내가 싫어졌다고 하는 날에는 저기 회사 테니스장에 올라가 세상 비관하고 병나발 불지도 모르겠다.
다시 휴대폰이 울리지는 않을 것 같기에 주머니에 도로 넣었다. 플로럴 구두를 양손에 하나씩 잡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무 그늘을 벗어나자 따가운 햇볕이 얼굴을 쏘아 댔다. 산책로를 따라 건물로 들어갔다. 후덥지근한 밖에 비해 건물 내부는 엄청 시원했다. 그 몇 분만 시원할 뿐 건물 안에 있다 보면 금세 더워지고는 했다.
출장이 사흘이랬다. 그럼 그동안은 얼굴 못 보는 거겠지. 전화라도 자주 해 주면 좋을 것 같은데…….
우리가 전화를 해 봐야 일방적으로 내가 떠들기만 할 것 같지만 말이다. 사무실로 돌아오자 팀원들이 하나같이 내 반응을 살폈다.
나는 구두를 내 자리에다 올리고는 손을 들어 목을 긋는 표시를 했다. 역시나 싶은 표정들이었다. 그들이 봐도 퇴짜는 이미 예상한 일이었나 보다.
“난 이거 괜찮은 것 같은데.”
곽일영이 내 플로럴 구두를 가져가며 말했다.
“쓰레기통에 넣으라던데요.”
오늘 곽일영이 입고 온 티셔츠는 괴팍한 표정의 미키 마우스가 그려져 있었다. 새미의 것은 개살구와 닮은 개가 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부서 내에서 티셔츠 대결이 한동안 지속될 것 같았다.
“석연 선배 와이셔츠 되게 유니크하네요.”
나마저 그 배틀에 끼워 넣으려는지 새미가 입을 열었다.
“그냥 평범하죠.”
대답하는 것과 동시에 사무실의 전화기가 울렸다. 그간 전화는 막내였던 내가 받아야 했지만 이제는 새미의 몫이었다. 그럼에도 손이 반사적으로 전화기로 뻗어 나갔다.
새미의 손이 더 빠르게 수화기를 낚아챘다. 발신자와 이야기를 나누던 새미가 불쑥 내게 전화를 넘겨주었다. 입 모양만으로 누구냐고 묻자 새미가 이사님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예, 전화 바꿨습니다.”
[석연아 아까 내가 못한 말이 있었는데.]
휴대폰으로 하면 될 것을 굳이 사내전화를 이용한 게 의아했다.
“무슨 말씀이요?”
주머니에 담긴 휴대폰을 꺼내자 부재중 전화 표시가 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재운 선배였다. 내가 못 받은 거였구나 하며 재운 선배의 말을 경청했다.
[이번 단합대회 말이야. 나랑 팀 먹자.]
“설마 선…… 아니 이사님도 참가하십니까.”
목소리의 톤이 저절로 높아져 주변을 의식했다. 이미 늦었다. 세 쌍의 시선이 내게 와 닿았다. 이번에는 고개를 푹 숙이고 속닥거렸다.
“어떤 경기 참가하시게요?”
[나야 당연히 테니스지. 수영은 잘하는 놈들 많아서 위험해. 개인전, 팀전 있으니까 우린 팀전 나가자.]
수화기를 어깨로 내리눌러 귀에 붙인 채로 새미를 쳐다봤다. 이왕 하는 팀전이라면 재운 선배가 아닌 새미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입사원이라 아는 사람도 별로 없을 테니 나라도 챙겨 줘야하지 않겠나.
“저 이미 할 사람 있는데요.”
[석연이 이 이사님 버리는 거냐.]
“에이, 그런 건 아니고요.”
[속은 뒤틀려도 진 사장하고 팀 해야겠네.]
회사의 대표라는 사람들이 상금 걸린 게임에 꼭 참가를 해야겠습니까?
입 밖으로 내뱉을까 하다가 여전히 보는 눈이 있기에 참았다.
“그럼 꼭 이겨 드리겠습니다.”
[오케이, 덤벼~!]
재운 선배가 호탕하게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나는 곽일영이 도로 내 책상에 올려놓은 플로럴 구두를 상자에 담았다.
진여원에게 수정해서 내가 신을 거라고 엄포를 놨지만 그럴 용기는 없었다. 플랫슈즈나 분홍 자전거는 소화할 수 있어도 화려한 꽃무늬는 무리였다.
설사 내가 신고 돌아다닌다 해도 허준성이 분명 그러겠지. 저 게이 새끼 드디어 돌았구나-라고. 압정에 꽂아 둔 립스틱 광고 잡지를 떼어 냈다. 대충 일에 집중할 준비를 해 놓고서는 곽일영과 이재화에게 물었다.
“저기, 혹시 과장님하고 대리님 단합대회 나가실 거예요?”
동시에 “아니.” “아니요.”라는 말이 들려왔다.
“석연 씨는 나갈 거지? 꼭 상금 타서 맛있는 거 쏴.”
“가능할지 모르겠네요. 사장님하고 이사님도 참가하신대요.”
“아, 그럼 수영으로 상금 타긴 힘들겠네.”
곽일영은 나보다도 포기가 더 빨랐다. 전에 진여원과 수영 경기를 펼쳤을 때 의도치 않은 심판을 봤던 사람이 곽일영이었다. 한 끗 차이로 내가 진 것을 알린 장본인이기도 했다.
“테니스로 나갈 거예요. 그건 좀 승산이 있을지도 모르거든요. 그래서 말인데 새미 씨.”
곽일영을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고 새미를 향했다.
“저랑 같이 팀전하시겠어요?”
“음, 프라이베이트…… 아, 그래. 개인전! 개인전은 안 나가세요?”
의외로 회사원들은 유학파를 그리 반기지 않는다. 유학 다녀왔다는 것만으로도 회사 내에서 가산점을 받는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새미 넌 내게 고마워해야 한다. 말끝마다 영어를 섞어 써도 나는 개의치 않으니 말이다.
“방금 팀전 같이 나가자는 제안 받았는데, 이미 팀 있다고 거절했거든요.”
“오케이, 그럼 좋아요. 앞으로 같이 연습하죠.”
새미가 팔뚝을 내밀었다. 나도 팔을 새미에게 걸어서 잡아당겼다. 외국식 친밀감 또는 파이팅 포즈였다.
“나 삐친다.”
곽일영이 대놓고 제 감정을 드러냈다.
“1등 하면 맛있는 거 쏠게요. 곽 대리님은 응원해 주세요.”
“연습도 구경할래.”
“그래요.”
곽일영에게 들들 볶이다시피 하는 나를 이재화만이 흐뭇한 미소를 띠고 바라봤다. 어째 예감이 좋지 않았다. 애인 생겼다고 나한테 곽일영을 떠넘기려는 것 같은 분위기가 농후했다.
웃고 있는 이재화를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봤다. 물론 건방지게 보이지는 않도록 나도 미소를 담았다. 이재화가 왜 그러냐는 듯 더 짙게 웃었다. 역시 이재화도 보통은 아니었다.
“보니까 우리 부서 사람들 다들 큐트한 사람들뿐이네요.”
새미의 취향 한번 누구처럼 특이했다.
나는 진여원이 없는 사흘 동안 엄청난 디자인을 뽑아낼 생각으로 마음을 다잡았다. 당연히 테니스 연습에도 힘 쏟을 예정이었다. 1등 상금이 벌써부터 눈앞에 아른거렸다.
***
혼자인 살림에도 왜 이렇게 쓰레기랑 치울 것이 많은 건지, 가정주부가 존경스러웠다. 엄마에게 줄 잡지 부록을 쇼핑백에 담아 넣고 미니 청소기로 바닥을 정리했다.
쓰레기통 안에는 양갱 봉지가 한가득이었다. 양갱도 거의 다 먹어 새로 주문할 타이밍이었다. 아무래도 당뇨가 걱정되니 먹는 횟수를 적당히 줄이기로 했다. 커피도 줄이면 더 좋을 텐데……. 그나마 담배를 하지 않아서 다행인가.
쓰레기를 종량제 봉투에 옮겨 담다가 동작을 멈췄다. 그러고 보니 진여원이 다시 담배를 태웠던 것 같은데 최근에는 어떤지 보지 못했다. 내가 속 썩였을 때만 피웠던 건가…….
그 생각만 하면 기분이 시무룩해질 정도로 미안한데 나 때문에 끊었던 담배를 피운 거라면 귀가 화끈거렸다. 그가 나를 정말 좋아하는 게 맞는 것 같아서 말이다.
한계선까지 쓰레기로 차오른 종량제 봉투를 꽉 묶었다. 분리수거랑 페트병을 들고 건물 밖으로 걸어 나왔다. 쓰레기들을 다 버리고 나서 자전거 거치대로 향했다.
자전거 안장에 앉은 먼지를 탁탁 털어 냈다. 또 어떤 개념 없는 놈이 내 바구니 안에다 아이스크림 봉지를 넣어 놨다. 어차피 잘 타지도 않는 거 그의 집에다 가져다 놓을까? 안 그래도 회사 끝나고 그의 집에 갈 때는 유용하게 쓰일 것 같다는 생각을 한 차였다. 나는 아이스크림 봉지를 쓰레기통으로 가서 버린 뒤 집으로 돌아왔다.
과장을 더해 코딱지만 한 방을 치우는데도 거의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진여원네 집은 치우려면 족히 반나절은 걸리겠지. 샤워를 하고 나와 침대에 뒹굴뒹굴거리며 휴대폰을 손에서 떼어 놓지 않았다.
드라마를 보다가 간혹 휴대폰을 보고, 할 일 없이 컴퓨터를 끄적거리다가도 휴대폰을 확인했다. 이 인간은 자정이 넘어 하루가 지날 때까지 전화하지 않을 심산인 듯했다.
결국 참지 못하고 내가 먼저 전화를 걸었다. 투박한 연결음이 한참이나 갔다. 귀에서 떼어 내 흘러가는 시간을 보니 거의 1분에 육박하고 있었다. 끊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에 진여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말해.]
말해, 라니……. 용건도 없는데 전화한 게 민망해져버렸다.
“출장은 잘 가셨나 해서요.”
[아직 얘기 중이야.]
“그럼 나중에 전화 드릴게요. 아, 그리고 내일 제 자전거 사장님 집으로 좀 가져다 놓겠습니다.”
[그렇게 해.]
“그럼 일하세요.”
전화를 끊었다. 그의 목소리를 들었는데도 마음이 휑했다. 그래도 출장 잘 간 거 확인했으면 됐다, 하고 잘 준비를 하고 누웠다.
밖에서부터 취객이 고래고래 노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올해 계약이 끝나면 이사 갈 때는 술집이 없는 곳으로 물색해 봐야겠다. 취객이 아예 우리 오피스텔 밑에 자리잡았는지 노랫소리가 더욱 거세졌다.
‘울~고 싶어라. 울고만 싶어라아아!’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듣는 사람 울고 싶어질 만큼 구슬픈 목소리였다.
아저씨, 세상살이 고돼도 우리 같이 힘냅시다. 속으로만 응원의 메시지를 날렸다.
TV까지 끄고는 가슴에 두 손을 포개 올렸다. 취객의 노래를 자장가 삼아 눈을 감았다. 계속 같은 부분만 반복하는 바람에 응원을 날렸던 마음을 싹 거두고 싶었다.
나는 귀를 막고 다른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라라라라 라라라라 날 좋아한다고~
라라라라 라라라라 널 사랑한다고~
곽일영처럼 헤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출장 끝나고 돌아오면 이번에는 꼭 다시 불러 달라고 졸라 봐야지. 안 해 줄지도 모르지만 또 누가 아나. 계속 부탁하면 옜다, 인심 써서 해 줄지도.
취객의 소리가 점차 들리지 않게 되고 귓가를 맴도는 포카리스웨트 송이 이내 진여원의 목소리로 뒤바뀌어 있었다. 자장가로는 불합격이었다. 이렇게 심장이 콩콩콩 뛰니 말이다.
***
삐삐삐- 삐삐-
날카로운 알람 소리에 갖은 인상을 써 가며 몸을 일으켰다. 아침마다 느끼는 거지만 딱 한 달 정도만 기상에 허덕이는 일 없이 실컷 자 보고 싶었다.
옆집에서 쾅! 벽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내 알람 소리 때문에 시끄럽다고 신경질을 부리는 듯했다. 서둘러 알람을 끄고 침대를 벗어났다.
겨울이었으면 어제 샤워했으니 머리만 감고 나갔을 텐데 여름은 이래서 안 좋았다. 몸이 부르르 떨릴 만큼 찬물을 몸에 끼얹어 잠기운을 몰아냈다.
자전거를 타고 나가고자 했던 어제의 결심이 눈 녹듯 사라지고 있었다. 그래도 이왕 일찍 일어난 김에 실행해야지.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리면 땀이 날 것 같기에 선풍기를 강풍으로 틀었다.
두피만 대강 말리고 나서야 옷을 입었다. 활동하기 편한 배기팬츠에 품이 넉넉한 티셔츠를 걸치고, 충전기를 꽂아둔 휴대폰을 두근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밝혀 봤다.
그러나 부재중이나 메시지 한 통 없었다.
많이 바쁜가 보지, 그냥 좋게 생각했다. 오늘은 서류 가방 대신 가죽 백팩을 멨다. 체일 슈즈에서 작년 여름휴가 비용을 받았을 때 큰맘 먹고 구입한 명품이었다. 가죽이 때 탈까 봐 기분 전환하는 날이 아니면 메는 일이 드물었다.
착화감이 좋은 슬립온 슈즈를 신고 곧장 집을 나섰다. 자전거 거치대에 도착했을 때 바지주머니 속에서 휴대폰이 울려 댔다.
드디어 왔구나 싶어 입에 미소를 건 채 휴대폰을 꺼냈다. 진여원이 아닌 것을 확인하고 살짝 실망은 했지만 그래도 재빨리 전화를 받았다.
“응, 엄마.”
[너 휴가 때 올 껴?]
불과 얼마 전에 수술한 사람답지 않게 목소리가 괄괄했다. 엄마 건강 상태에 대해서 걱정은 이미 덜은 후였지만, 목소리를 들으니 재차 안심이 됐다.
“가야지. 나 휴가 다다음 주야.”
휴대폰에 이어폰을 꽂으며 대답했다. ‘1828’ 비밀번호를 맞춰서 뱀처럼 똬리를 튼 자물쇠를 풀었다.
하루 사이 또 바구니에 쓰레기가 놓여 있었다. 맥주 캔인 걸 보니 어제 고성방가를 했던 취객 짓일 가능성이 높았다.
[너 지금 뭐 하는데 그러케 부산시려운겨.]
“자전거 타고 회사 가려고.”
[아이구, 이 엄니 보니까 건강 신경 쓰이나 본데, 밥이나 잘 챙기 먹어라잉.]
“아침은 원래 안 먹는 거 알잖아. 회사 가서 대충 때울 거야. 뭐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 내려갈 때 사 들고 갈 테니까.”
[돈. 그거면 충분해.]
누가 돈 귀신 아니랄까 봐.
“알았어. 기대하고 있어 봐. 나 이번에 단합대회에서 1등 하면 큰돈 안겨 줄 테니까. 아버지는 뭐 하셔?”
[어제 옆집 놈이랑 술 처묵고 여태까지 주무신다.]
“너무 구박하지 말고 해장국 맛있게 해 드려. 나 그럼 회사 갈게.”
[그려. 잘 댕겨온나.]
전화가 끊어진 것을 확인하고 차트 100위 듣기를 눌러 볼륨을 키웠다. 모자를 가지고 나오지 않은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지만, 다시 집에 들르기에 여간 귀찮은 게 아니라 그냥 페달을 밟았다.
전화를 너무 일찍 끊었나 싶기도 했다. 이왕 이어폰을 꼈는데 좀 더 엄마와 이야기를 할 걸 그랬다.
친구들 얘기 들어보면 밖에서 있던 일들을 시시콜콜 집에서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나는 아니었다. 엄마가 워낙 말이 많다 보니 나도 같이 떠드는 게 일상이었다.
형제가 있었다면 나도 지금보다는 말이 적었을지 모르겠다. 자식이 나 하나뿐이니 다른 건 못해 드려도 말 상대 정도는 꼭 하고자 해 왔다.
익숙하지 않은 신곡들을 들으며 진여원과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난 여태껏 그가 부족함 하나 없이 자라온 사람이라고 여겼었다. 그의 어머니에 대해서 단편적으로 알게 됐을 뿐이지만, 그의 삶이 평탄하지는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초심 때문에 가지고 있다는 낡은 캔버스만 봐도 그랬다.
아버지는 행정실에 계셨던 만큼 진여원에 대해 자세히 알고 계실 것 같았다. 물어보고 싶은 마음과 그를 서서히 알아가고 싶은 마음이 공존했다. 약간의 유혹은 있었지만 나는 후자를 택했다.
회사에 가까워질수록 땀이 이마에서 뚝뚝 떨어져 내렸다. 페달을 힘차게 밟을 때마다 바람도 거세졌지만, 더위가 가실 리는 없었다. 도중에 편의점에 들러 포카리스웨트 하나를 샀다. 뚜껑을 돌려 따서 벌컥벌컥 마셨다.
자전거를 타는 그가 왜 이 음료를 즐겨 마시는지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다. 목에서부터 가슴께까지 음료수가 지나가는 곳마다 시원함이 남았다. 다시 핸들을 잡고 페달을 밟았다.
백팩을 메고 나오길 잘한 것 같았다. 애초에 가방 자체가 화려하다 보니 분홍색 자전거를 끌고 가는 나를 이상하게 눈여겨보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패션에 관심이 많은 사람으로 치부하고 마는 거겠지.
회사에 도착하니 지각을 갓 면하기 전이었다. 진여원이 평소 린스키를 세워 두는 곳에 나도 자전거를 세우고 얼른 건물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주차장에서 로비로 연결되는 벽에 개구리처럼 찰싹 달라붙었다. 차가운 벽이 내 열기를 적잖이 흡수해 가고 있었다. 이번엔 뒤로 돌아서 등을 댔다. 그 짓을 딱 세 번 반복하고는 곧장 사무실로 올라갔다. 신입직원 새미만 출근해 있는 상태였다.
“좋은 아침입니다.”
가방을 내려두며 인사했다. 나는 축축한 등을 사무실의 선풍기로 가져갔다.
“뛰어오셨어요? 스웻이 엄청나요.”
“자전거 타고 왔거든요.”
“석연 선배, 사장님하고 취미가 같으시네요.”
그냥 생각 없이 던진 말이겠지만 괜히 내 가슴은 뜨끔했다.
“취미까지는 아니고, 운동하면 좋잖아요. 근데 몇 시에 출근하셨어요?”
새미가 손가락 여덟 개를 펼쳤다. 규정 출근시간은 9시까지였다. 내가 신입사원일 때는 9시에 맞춰 가는 게 고작이었다. 새삼 새미가 대단해 보였다.
잡지를 쌓아 두었던 벽면 책장이 어제와 다르게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그 뿐만 아니라 메시지 전달 대용으로 사용하는 화이트 보드판도 매직의 흔적 하나 없었다.
“사무실 청소하신 거예요?”
“시간이 남아서요.”
다시 보니 새미가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손수건만 한 걸레를 들고 있었다. 저게 바로 예쁨받는 신입사원의 바른 자세구나. 도리어 내가 새미에게 배우고 있었다.
선풍기 앞에 쭈그리고 앉았던 다리를 일으켰다. 곽일영의 자리에 있는 물티슈로 얼굴을 닦아 내렸다. 걸레로 자신의 책상을 닦은 새미가 이번에는 내 책상까지 치워 주었다. 고마움에 고개를 꾸벅하자 새미가 내게 B4용지 한 장을 건넸다.
“이건…….”
새로운 공고문이었다. 굵은 글씨로 쓰여진 내용은 사내 직원에게 징계를 내리겠다는 것이었다.
“이사님이 바빠서 저한테 출력 부탁하셨어요. 사장님의 전달 사항이기도 하고요. 아직 신입이라 제가 붙이기에는 좀 그런데 도와주시겠어요?”
“저도 짬밥이 얼마 안 돼서 과장님 오면 부탁드려 볼까요?”
새미는 내가 들고 있는 종이 가운데를 쿡 찍어 가리켰다. 시선을 내려 새미가 가리킨 부분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눈이 부릅떠지며 입 또한 벌어졌다.
공고문의 내용이 워낙 막강해 징계받는 직원까진 확인하지 못했었다. 나는 공고문을 다시 확인했다.
[정직 사유: 풍기위반 사내 품위위반]
“이…… 이거……. 무슨 풍기문란이요?”
“아, 그건 삭제하고 사내 품위위반으로 출력하라고 했어요.”
“품위위반이라고 해도…….”
“그건 잘 모르겠는데 과장님이 애인하고 회사에서 야한 짓 한 거 같은데요.”
팔랑팔랑 내 손에서 종이가 떨어져 내렸다.
혹시…….
그날 자료실에서 섹스를 한 사람이 이재화와 그의 연인이었나……? 새미가 떨어진 종이를 주워 올리며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많이 놀라셨어요?”
아니 그것보다 이런 공고 사항을 새미에게 부탁한 게 의아했다.
“이사님과 사장님하고 꽤 친하신가 봐요.”
“이사님은 별로. 사장님 동생하고 알죠.”
“진……달래요?”
이번엔 새미가 놀랐다.
“석연 선배도 아세요?”
“아뇨, 그냥 얘기만 들었어요. 검사라고…….”
“공부 잘해요. 난 디자인 잘했고. 애인도 예뻐요.”
진달래의 애인이 개나리일 리는 없고.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다시 돌려받은 공고문을 손톱을 씹으며 내려다봤다. 좍좍 찢어서 없던 일로 만들어 주고도 싶었다.
이재화가 정말 회사에서 섹스를 했다면 충분히 혼나고도 남을 상황이지만 얼마나 창피하려나. 종이만 들고 전전긍긍했다.
“새로 출력해야죠.”
“잠시만요.”
때마침 사무실의 문이 열리며 “좋은 아침!” 하고 기분 좋게 외친 이재화가 들어왔다. 눈이 돌아가게 화려한 형광 노랑 셔츠를 입은 곽일영도 뒤따라 들어왔다.
나는 마주 인사를 해 주지도 못하고 종이를 뒤집어 들었다. 이재화는 내 태도에 별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는지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곽일영도 당당하게 걸어와 가방을 탁 내려놓았다. 곽일영이 나를 돌아보더니 자신의 셔츠가 어떠냐는 듯 굴었다.
“눈부시네요.”
“그치?”
“눈알이 빠지도록요.”
저기다 경봉만 쥐여 주면 야밤에 가로등 하나 없는 도로 정리도 가능할 듯했다.
“어? 근데 그거 뭐야?”
곽일영이 내 손에 들려 있는 종이에 관심을 가졌다. 새미가 그것을 확 빼앗아서 곽일영의 앞에 내보였다.
“징계 공고문이요.”
말릴 새도 없이 곽일영이 종이에 시선을 박고 있었다.
“뭐야, 이 과장이 왜 징계를 먹어?”
덜컥, 이재화가 앉아 있던 의자를 뒤로 밀쳐 내고 일어났다. 그러더니 성큼성큼 우리들에게로 다가왔다. 뭔가 켕기는 게 있는 반응이었다.
이재화가 새미가 들고 있는 종이를 건네받고 곧 손을 파르르 떨었다. 얼굴이 삽시간에 하얗게 바래 갔다. 이건 확인 사살이었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팀원들의 뒤쪽에서 문이 쾅 하고 열렸다. 모두가 문을 돌아봤다. 재운 선배가 장난기 없는 딱딱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 과장, 이사실로 바로 올라오세요.”
제 할 말만 전한 재운 선배가 진여원 버금가는 싸늘함만을 남기고 사라졌다.
“어떻게 해. 대체 뭔 짓 저지른 거야?”
곽일영이 발을 동동 굴렀다. 이재화가 공고문을 반으로 접고 푸욱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잔뜩 처진 어깨로 사무실을 비척비척 걸어 나갔다. 이재화가 나가고 나서 우리 셋이 머리를 맞댔다.
“이 과장 진짜 2주간 정직될까?”
“메이비.”
“선처를 부탁드려 봐야죠.”
우리끼리 이야기해 봐야 답이 나올 리 없었다. 나란히 셋이 자리에 앉았다. 가방을 정리하고 책상에 디자인지들을 펼쳤다.
당장 디자인을 그려 내지 않아도 버릇처럼 자리잡은 행동들이었다. 곽일영이 가방에서 호두를 꺼내 오독오독 씹었다. 다시 주섬주섬 안으로 손을 넣더니 내게도 호두 봉지 하나를 건넸다.
“잘 먹을게요.”
“머리 잘 안 굴러갈 때 먹으면 좋대. 호두가 꼭 사람 뇌처럼 생겼잖아. 뇌를 먹는다고 생각해.”
투명한 호두 봉지를 보니 입맛이 쏙 사라졌다. 진짜 사람 뇌 같이 생겼다.
곽일영은 내 옆으로 흘끔 눈을 굴리더니 이내 새미에게도 한 봉지 내밀었다. 새미가 활짝 웃으며 그것을 받아 들었다.
“땡큐. 그리고 곽 대리님이 위너십니다.”
새미가 곽일영의 셔츠를 가리키더니 엄지 두 개를 척 올렸다. 곽일영의 심술 맞은 눈초리도 어느새 수그러들었다. 훈훈하게 부서애가 다져지는 가운데 여전히 이재화의 문제는 남아 있었다.
“근데 이 과장이 여친이랑 회사에서 야한 짓한 거야? 풍기문란이면 그런 거잖아.”
“섹스 같은데요.”
새미가 쐐기를 박았다.
“대체 어디서?”
“사람 없는 데서겠죠?”
나는 두 사람의 말이 오가는 가운데 침묵을 유지했다. 자료실인 것 같아요, 라고 고자질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정확한 물증이 있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이재화가 정말로 회사에서 섹스를 한 거면 될성부른 나무 떡잎부터 보인다는 속담이 입증되는 것이었다. 워낙에 야한 얘기를 좋아했지 않나.
“에이씨, 그 자식은 가뜩이나 신상도 안 풀려 죽겠는데 정직까지 먹으면 어째.”
친구라 걱정해 주는 줄 알았는데 신상 걱정이 더 먼저였다. 역시 수석 디자이너는 아무나 되는 게 아닌가 보다.
“석연 씨는 왜 이렇게 말이 없어.”
곽일영이 뇌, 아니 호두를 오독오독 먹었다.
“말.”
한마디를 뱉어 주자 곽일영이 씹힌 호두를 드러내 보이며 입을 벌렸다.
“그런 재미없는 말 말고, 나 기운 좀 나게 발 보여 주면 안 돼?”
나는 인심 쓰듯 슬립온 슈즈를 벗었다. 발목 양발까지 벗어 주자 곽일영의 뺨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조울증만 적당하면 저런 모습은 귀여웠다.
“와우!”
새미가 내 발을 보더니 탄성을 내질렀다. 새미도 곽일영 쪽으로 다가가 그 옆에서 다리를 굽혀 앉았다. 동료 둘이 나란히 내 발을 구경했다.
그 많은 사람들 속에서 유리 구두를 신었던 신데렐라가 이런 부담스러운 마음이지 않았을까. 아무 생각 없이 보여 준 건데 시선이 쏠리는 바람에 삼선 슬리퍼 안으로 발을 숨겼다.
“발볼 진짜 좁아.”
“그치? 최고야. 우리 석연 씨 발은. 저 슬리퍼도 내가 사 준 거다?”
곽일영이 새미에게 반말을 쏟아 냈다. 내가 입사했을 때도 저렇게 갑자기 말을 놨었지. 발을 책상 안으로 숨기려 하자 새미가 내 종아리를 턱 잡았다.
“생각났어요.”
새미가 금세 잡은 종아리를 놓고 자기 자리로 달려가서 앉았다. 그러더니 연필을 들어 디자인지에 쓱쓱 무언가를 그려 댔다. 나와 곽일영은 대체 어떤 걸 그리려나 하고 새미의 도화지에 집중했다.
전과 같이 패턴을 따는 게 아니라 곧바로 구두 스케치에 들어가고 있었다. 크로키를 그리는 미술학도 버금가게 손을 놀린 새미가 앞코가 뾰족한 펌프스를 탄생시켰다.
발볼이 들어가는 부분이 지나치게 좁아 대중적인 판매는 불가능할 것 같았다. 구두의 전면은 파란색과 하늘색의 색연필로 명암을 넣어 그러데이션 효과를 자아냈다. 발바닥은 붉은색으로 마감했다.
새미가 순식간에 완성시킨 구두 디자인지를 내게 내밀었다.
“선배, 어울릴 것 같아요.”
“예쁘긴 한데 여성 구두는 사양하겠습니다.”
내가 크로스드레서도 아니니 이런 구두를 신을 일은 평생에 없을 것이었다. 나도 가방에서 필통을 꺼내 새미가 디자인한 구두의 발볼을 조금 더 넓혔다.
구두 굽도 올리고 발바닥이 닿는 라인에 곡선을 가미했다. 발등은 발바닥 라인에 따라 더 섹시해 보일 수 있었다.
“이러면 시중에 팔 수도 있을 것 같네요.”
새미가 호오, 하는 입 모양을 하고는 디자인을 받아 갔다.
“석연 선배는 위로 올라가는 게 좋겠습니다.”
“그거야 누구나 바라는 바죠.”
“본인 디자인보다 다른 사람 디자인 편집을 더 잘하는 것 같은데요.”
쩌적, 가슴에 스크래치가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기다려 봐라. 새미 너도 진여원도, 침이 떨어질 만큼 어마어마한 신상을 내놓을 테니. 새미로 하여금 투지가 더 불탔다.
어째 조용한 곽일영을 보니 새미에게 지지 않을세라 부지런히 손을 놀리고 있었다. 신입사원 하나로 부의 열기가 더해지는 것도 다소 신기했다.
나는 잘라 두었던 잡지를 빤히 바라봤다. 황금 펄 립스틱 색을 보니 뭔가가 생각날 것 같기도 한데 안개가 낀 듯 머리는 뿌옜다. 이건 저 광고를 본 순간부터 이어져 오던 알쏭달쏭함이었다. 영감이 오는 건 확실했다. 다만 구체화되지 않을 뿐이었다.
마우스를 움직여 일러스트레이터를 열었다. 립스틱과 비교하며 일러스트레이터에서 가장 근접한 색상을 뽑아냈다. 컴퓨터로 작업하는 디자이너들도 제법 많았지만, 공장과 연결되어 있는 큰 회사의 경우는 손수 그리는 일이 더 많았다.
나만 해도 컴퓨터보다는 직접 그리는 게 더 편했다. 오늘처럼 색연필로는 낼 수 없는 색감을 정할 때만 이용하곤 했으니까.
나란히 앉은 셋이 한창 작업에 몰두하는 도중이었다. 재운 선배에게 불려 갔던 이재화가 사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오고 있었다. 한참 동안 잔소리를 들었는지 이재화의 얼굴이 반쪽이 되어 있었다.
“괜찮으세요?”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나머지 인원들도 마찬가지로 기립했다. 문을 열고 망연자실하게 서 있는 이재화의 손에는 공고문이 아닌 흰 봉투가 들려 있었다.
봉투는 이재화의 하얗게 바랜 얼굴색과도 비슷할 정도였다.
“이거.”
우리는 침을 꿀꺽 삼키고 이재화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재화는 우리가 궁금해하는 흰 봉투를 들어 보였다.
“모텔비로 주신 거랍니다.”
확인 사살 두 번째였다. 진짜 회사에서 섹스를 했구나. 그런데 저게 사표를 내라는 봉투도 아니고, 시말서도 아닌 돈 봉투라니! 그것도 모텔비라는 소리에 셋 다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재화는 놀라는 우리의 반응을 보며 문을 닫았다. 그러고는 자신도 믿지 않는다는 듯 아주 나지막하게 말했다.
“사장님께서…….”
***
그야말로 폭풍 같던 이재화의 발언은 하루 종일 우리 팀의 입방아에 오르내렸다. 새미 보고 뽑으라던 공고문은 아마 경고에 지나지 않던 것 같았다. 진짜 공고를 붙일 것이었으면 애초에 우리 부서가 아닌 인사부에서 해결했을 테니까.
진여원도 진여원이다. 모텔비를 쥐여 줌으로써 이재화에게 죄책감을 더 불러일으켰다. 그것도 출장 간 사이에 재운 선배를 통해 시키다니, 아주 용의주도했다.
이재화는 진여원이 돌아올 때까지 그야말로 좌불안석일 것이다. 그러나 비단 좌불안석이 이재화뿐만은 아니었다.
나 역시 잠잠한 휴대폰을 보며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다. 대체 언제 전화를 줄 거냐? 내가 하기는 부담스러운 걸 모르는 건가.
그냥 내가 해 버려? 아니 그랬다가 왜 이렇게 귀찮게 구냐는 소리를 들으면 나도 나름 상처 받는다.
립스틱과 같은 색을 프린트한 종이를 펼쳐서 패턴을 잘라 나갔다. 종이 패턴으로나마 연결시켜 보면 기성품으로 나왔을 때 대강 어떤 모양인지 가늠할 수가 있었다.
플로럴 슈즈에 대한 애착은 버리고 깔끔하지만 눈에 확 띄는 메탈 소재를 선택했다. 메탈 소재는 두 종류로 구분이 되곤 했다. 싼 티와 부티로. 촌스러움과 세련됨 또한 한 끗 차이이기 때문에 광택 나는 소재는 양날의 검이었다.
색감의 농도와 메탈의 광택이 조화를 이루어야 진정한 메탈릭 슈즈로써 그 진가를 발휘한다. 패턴을 자른 것을 강력접착제를 이용해 붙여 나갔다.
점차 완성이 되어 갈수록 생각한 것 이상으로 잘빠진 슈즈가 탄생되고 있었다. 날카로운 앞코와 가느다란 굽이 연약하지만 강한 이미지를 풍겼다.
외유내강이 뭐 이런 건가. 혼자 속으로 중얼거려 가며 메모지에 ‘박음질 최대한 촘촘히’ 라고 적어 넣었다.
올해 초에 외국 브랜드에서 발표했던 메탈릭 슈즈도 색감 미스로 고전을 면치 못했었다. 나도 잡지를 보면서 왜 저런 촌스러운 색으로 결정했을까? 하는 의문을 가졌었지.
거기에 비하면 지금 내 손에 있는 슈즈는, 새미의 말투를 빌리자면 트렌디한 색감을 자랑하고 있었다. 두 손에 올린 구두 모형을 곽일영에게 살며시 내밀어 봤다.
곽일영은 검은색 색연필로 도화지를 까맣게 칠하고 있었다. 마치 심리치료를 받는 아동 같았다. 곽일영은 뒤늦게 내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신발과 내 얼굴, 또 내 얼굴과 신발을 번갈아 내려다봤다.
“자기, 완전 이쁘다!”
곽일영이 내게서 슈즈를 가져갔다.
“메탈릭 소재로 할 생각인데 조언하실 것 있으면 좀 도와주세요.”
“아냐, 이건 그냥 이걸로도 완벽해. 석연 씨 오랜만에 완전 멋지다.”
“다행이네요.”
한숨을 돌렸다. 보통 디자인을 뽑아내는 데 걸리는 시간은 대중없었다. 전구처럼 반짝 머리에 불이 들어오는 날에는 한 시간이면 뚝딱 해치울 수도 있고, 또 어떤 날은 일주일도 넘게 걸렸다. 만드는 건 삽시간이니 결국 슈즈 디자인도 아이디어 싸움이었다.
“나 이거 나오면 꼭 살 거야.”
“설마 신으시게요.”
“몰랐어? 나 슈즈 콜렉터잖아. 원래 예쁜 건 쓰지 않고 보기만 해야 된다고.”
곽일영의 호들갑에 이재화도 새미도 내 구두로 시선을 던졌다. 시종일관 혼을 빼놓고 있던 이재화는 내 구두를 보더니 책상을 탁탁 쳤다.
“그거 공장에 수주 넣어서 사장님 오면 보여 드리는 거 어때요.”
“괜찮을까요?”
“애인 있으면 사 주고 싶을 정도네요.”
나는 게이지만 남자 놈들이 여자의 구두를 볼 때 어느 면에서 매력을 느끼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1차로 굽이 가늘어야 하며, 2차로 발볼이 한 손에 들어올 만큼 작아 보이는 착시현상을 불러일으켜야 했다. 발만 봐도 그 여자를 지켜 주고 싶은 본능이 생긴다나.
“그리고 말이죠. 그거 보여 드리면 이제 다른 말씀은 하지 않으실 거 같은데…….”
이재화가 나를 방패막이로 사용하려 하고 있었다. 그러게 왜 회사에서 섹스를 해 가지고 저러나 싶다가도 얼마나 급했으면 그랬을까 싶기도 했다.
나는 미리 그려 둔 도식지를 접어 서류 봉투에 넣었다. 오후 6시마다 택배를 수거해 가는 기사에게 전달할 생각이었다. 진여원이 출장에서 돌아올 때쯤 되면 구두도 완성될 것 같았다.
김요한에게 따로 전화를 넣어 내일쯤 택배가 도착할 거라며 미리 말을 해뒀다. 미령과는 잘 되어 가고 있는지 목소리가 전에 없이 밝았다.
너희는 봄이고, 난 장마냐. 연락 좀 해라, 진여원.
메탈릭 슈즈 모형을 손안에서 굴려 댔다. 출장지 가서 바람이라도 난 건 아니겠지? 당연히 그 진여원이 바람을 피운다는 건 가히 상상되지 않았다.
말투는 밉상이지만 뒤에서 구린 짓을 하고 다닐 사람은 아니었다. 하긴 열 길 물속은 알아도 사람 속은 모른다고 했다. 룸살롱 가서 흥청망청 놀지 누가 알아.
슬금슬금 요상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채워 나가기 시작했다. 와작, 메탈릭 구두 모형이 손안에서 구겨졌다. 놀라 손에 힘을 빼고 구겨진 종이를 펼쳤다.
자칫 망가질까 싶어 스피커 위에 구두를 올려 두고 턱을 괬다. 빨리 보여 주고 싶다. 진여원이 완성품을 보고도 어떤 말을 할지 내심 기대가 됐다.
아니 사실은 그런 것 따위 다 제치고……. 진여원이 보고 싶었다.
부둥켜 껴안고 스킨 향을 맡으며 그의 품에서 꿈뻑꿈뻑 잠들고 싶었다.
***
입을 쩌억 벌려 하품을 했다. 바 테이블에 뺨을 대고 맥주병을 올려다봤다. 그 누가 한눈에 봐도 지루해 보이는 모습일 것이다.
내가 편하게 풀어질 수 있는 장소는 집과 바로 여기 로열패밀리뿐이었다. 미령이 이곳에서 일하지 않았다면 종종 찾아오는 일도 없었겠지만.
평일이라 그런지 손님이 나를 포함해 대여섯 명밖에 없었다. 노래도 신나는 곡이 아닌 발라드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노래 때문에 지루한 건 아니었다.
“휴대폰 좀 그만 노려봐라.”
미령이 칵테일 셰이커를 흔들었다. 녀석은 요즘 신수가 훤해 보였다. 나는 미령에게 한 소리를 들었음에도 바 테이블에 올려 둔 휴대폰을 내려놓지 않았다.
“요한 씨는?”
느릿하게 고개를 들며 대답했다.
“조금 있다 오기로 했어.”
“둘이 데이트하려면 새벽이나 가능하겠다?”
“꼭 그런 건 아니지. 보고 싶으면 평일에도 잠깐 얼굴 볼 수 있는 거고. 평소에는 요한이 출근할 때 전화 좀 하다가 나는 잠들지.”
밤낮이 서로 뒤바뀐 사이라도 연애하는 데 별 지장은 없나 보다. 그런데 우린 뭐냐. 다른 사내커플들처럼 우리도 연애를 하는 건 맞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평범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재화네 커플처럼 같이 출근하고, 퇴근하는 건 상상도 되지 않았다. 아무래도 직급의 차이가 어마어마하니 그렇겠지. 거기다 남남 커플이니만큼 더더욱 조심해야 하고.
그래, 거기까진 다 좋다 이거다. 내일이면 출장이 끝날 사람이 여태껏 함흥차사였다. 처음은 내가 걸었으니 적어도 두 번째는 진여원 네가 걸어야 하지 않겠냐.
나 좋다는 사람이 내 목소리는 안 듣고 싶나 보다. 내가 몇 번이고 다시 하려고는 했지만, 그때마다 불쑥 튀어나온 마음이 나를 막았다.
어차피 며칠만 지나면 볼 텐데 뭐가 그리 조급해서 전화를 거냐. 진여원도 그렇게 생각하니까 하지 않는 것이 분명하잖아. 나만 안달 내면 뭐해.
감정적 약자의 위치를 새삼 실감했다. 솔직히 엄청 섭섭했다. 그 전에 출장 갔을 때도 그는 내게 연락 한 통 없었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계속 이런 일이 반복될 텐데 그럼 나는 그때마다 이렇게 전전긍긍해야 하는 건가.
속이 답답해져 맥주를 벌컥벌컥 마셨다.
“너 내일 회사 안 가냐.”
“안 갔으면 좋겠다.”
“적당히 마셔라, 너 지금 벌써 네 병째야.”
“이거 가지곤 끄떡없어.”
“그래, 그러다 훅 가지.”
딸랑딸랑, 조용한 노래가 흐르는 가게에 종소리가 크게 울렸다. 무의식적으로 들어오는 사람을 바라봤다.
김요한은 브이넥에 편안한 바지 차림이었다. 미령과 김요한의 얽히는 시선 사이에 야릇한 분위기가 형성됐다.
“모텔 가라, 모텔.”
미령을 향해 구시렁거렸다. 그사이 김요한이 내 옆에 와서 앉았다. 앞에 놓인 맥주병을 보며 혀를 찼다.
“무슨 일 있어요?”
“아무 일도요.”
“구두 도식지 받아 봤어요. 이번 거 엄청 괜찮던데요.”
그간 지켜봐 온 결과 김요한의 눈도 진여원 버금가게 높은 편이었다.
“일은 잘 풀리는데 연애는 아닌가 보네…….”
김요한이 걱정스레 중얼거렸다. 곽일영을 짝사랑하며 울적해하던 게 엊그제인데 이젠 남의 사랑을 걱정해 주고 있었다.
나는 맥주를 한 병 더 주문하며 남은 절반을 들이켰다. 크하, 하고는 입술을 쓱쓱 문질렀다.
“상식적으로 말이죠. 출장 가고 이러면 전화 정도는 해야 되는 거 아닙니까?”
말이 술술 나오는 걸 보니 취기가 돌기 시작했나 보다. 속 안에 쌓아두었던 투덜거림을 막을 수가 없었다.
“명품이 출장 갔냐?”
“그냥 그렇다는 거지.”
“근데도 연락 없는 거면 너 별로 안 좋아하나 본데.”
미령의 폭탄 같은 말에 병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랬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다 저렇게 생각할 거다. 내가 이상한 게 아니었다.
“망상은 아니거든요.”
무슨 말을 꺼내려는 김요한에게 내가 먼저 선수를 쳤다.
“미령 씨, 저도 맥주 한 병 주세요.”
“내일 일해야 하지 않아?”
“괜찮아요, 한 병쯤은.”
둘의 주변으로는 훈훈한 공기가 떠다니는 가운데, 내 주변 공기만 음습한 것 같았다.
미령이 하는 수 없다는 듯 김요한에게 뚜껑이 따진 맥주를 내밀었다. 이것도 차별이냐? 나는 병따개랑 같이 주더니, 제 애인이라고 직접 따주고 그런다.
미령이 맥주를 들어 짠을 하자는 시늉을 했다. 나는 들고 있던 맥주로 입구 부분을 탁 쳐 주었다. 술이 꼴깍꼴깍 잘도 넘어갔다. 엄마가 퇴원한 뒤로 오랜만에 마시는 술이었다. 그래서인지 평소보다 취기도 빨리 도는 것 같았고.
“내 얘기 좀 들어봐.”
“듣고 있거든.”
그러면서 미령이 만들어진 칵테일을 저 끝에 앉은 손님에게 가져다주었다.
“진짜 진 사장님하고 만나요?”
김요한이 조심스럽게 물어봐야 할 말을 대놓고 쏟아 냈다.
“안 믿기시나 봐요.”
미령만 아니었다면 김요한은 절대 그와 내가 만난다는 사실을 알 리 없었을 것이다.
“저도 가끔 안 믿겨요. 그럼 망상인가.”
“회사에서 조심하셔야겠네요.”
“그러고는 있는데……. 아니 조심할 것도 없어요. 막말로 나를 사람들 앞에서 덮치는 사람도 아니고.”
숨을 크게 들이켰다 내뱉었다. 가게에 머물러 있는 담배 연기 때문에 오히려 속만 매캐해졌다. 김요한과 맥주를 한 병, 두 병 이어 갔다. 김요한의 자리에도 맥주가 적당히 쌓여 갈 때쯤 미령이 테이블 앞에 손을 탁 내려 두었다.
“요한이 넌 여기까지.”
어쭈, 멋진 척하네.
“난 더 마셔도 되냐.”
“그럼, 진상 부리지 않고 매상 올려 주는 VIP 손님인데.”
“서럽다, 나도 다정한 사람 좀 만나고 싶다.”
“명품이라며. 집이나 한 채 사 달라고 해.”
“퍽이나 사 주겠다. 나 데킬라로 좀 줘.”
“석연 씨 내일 출근하려면 적당히 하셔야 할 것 같은데. 내일 오전에 구두 보낼 건데 괜찮겠어요?”
“언제나처럼 요한 씨가 잘해 주시겠죠.”
스트레이트 잔에 올려진 레몬을 쭙쭙 빨아 먹었다. 그리고 그대로 원샷.
“아……. 취한다.”
“저거 진짜 취했구만.”
오랜 친구 사이니만큼 미령은 내 버릇을 알고 있었다. 진짜 취할 때만 저 말을 내뱉는다는 것을.
“한 잔 더!”
스트레이트 잔을 쾅 내려놨다. 미령이 내가 주문한 것을 주기도 전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손님 쪽으로 걸어갔다.
“근데 둘이 데이트는 어떻게 해요?”
그 틈을 타 김요한에게 순수한 질문을 던졌다. 살아오면서 데이트다운 것을 해 본 적이 없어서 남자 둘이 뭘 해야 할지는 나도 잘 몰랐다.
“저희는 같이 티브이 보고, 밥 먹고, 얘기하고, 섹스도 하죠.”
그건 나도 진여원하고 함께했던 것들이다.
“생각보다 별거 없네요.”
“그렇죠. 뭐 대단한 게 있겠어요.”
나는 휴대폰을 검지로 뱅글뱅글 돌렸다.
“전화 기다리는 거면 먼저 해 봐요.”
“이미 먼저 했죠. 계속 저만 하기는 억울하잖아요. 귀찮게 구는 것도 같고.”
“술 먹으니 엄청 솔직해지네요.”
“그런가…….”
혀에서 힘이 풀리고 있었다. 눈을 다잡고 얼음물을 들이켰다. 주문을 받고 돌아온 미령이 내게 새로운 데킬라를 쓰윽 내밀었다.
“저쪽 분이 쏘시는 거랍니다.”
미령이 턱짓으로 남자 두 명이 앉아 있는 곳을 가리켰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같이 마시자는 듯 손짓하는 바람에 쓰게 웃는 것으로 거절을 대신했다. 그리고 그 데킬라 잔은 놔두고 따로 주문을 넣었다.
같이 놀지도 않을 거면서 저들이 사 주는 것을 먹었다간 시비가 붙을 수도 있었다. 데킬라 한 잔에 말싸움이 생기느니 내가 내고 말지.
“왔다!”
“왔어!”
미령과 김요한이 입 모아 외쳤다. 오긴 뭐가 와. 마른 오징어를 잘근잘근 씹으며 휴대폰을 내려다봤다.
[진득이]
진여원이 내 휴대폰을 울리고 있었다.
“뭐야……. 어떻게 알았어.”
저들에게 진여원을 진득이라고 저장했다는 말은 한 적이 없었다. 둘 다 신기라도 있나.
“네가 이 시간에 전화 올 사람이 누가 있겠냐. 얼른 받아 봐.”
고개를 끄덕거려가며 휴대폰을 두 손으로 쥐었다.
우우우웅, 우웅, 진동이 손바닥을 간질였다. 참 빨리도 전화한다.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끊어지기 전에 얼른 통화 버튼을 터치했다.
“와~ 바쁜 우리 진 사장님이시다.”
이성을 거치지 못한 말이 막 튀어 나갔다.
[취했군.]
“어? 어떻게 아셨슴……니까.”
[옹알이 적당히 하고, 어디야.]
내가 무슨 세 살배기 애들도 아니고 옹알이가 뭐냐.
“어디면 어쩌……끅……시게요.”
맥주 거품이 올라오며 딸국질이 새어 나왔다.
[만나게.]
쿵! 당장 만나겠다는 그의 말에 서운했던 감정조차 희미해져 갔다.
“여기가 어디……ㄴ……지…… 말하면 아심까. 여기 로열패밀린데, 알랑가몰라.”
웅얼웅얼거리는데 뚝 전화가 끊어졌다. 황당함에 머리끝까지 올라왔던 술기운이 아주 잠깐 사라졌다.
“나쁜 자식. 왜 끊고 난리야.”
“뭐래요?”
“뭐래?”
김요한과 미령이 순차적으로 말을 내뱉었다.
“옹알이하지 말라던데…….”
두 사람이 뭘 기대했는지는 몰라도 잔뜩 실망한 표정이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휴대폰을 옆으로 밀쳤다. 물컵에 손을 넣어 얼음을 꺼내 와작와작 씹었다. 한 개를 더 꺼내 입술에 문질렀다. 일방적으로 끊어진 휴대폰을 다시 앞으로 가져왔다.
젖은 손으로 액정을 만지니 물방울이 동그랗게 올라왔다. 그 물방울을 손으로 톡 눌러 비볐다. 술기운이 도니 오기도 더 기승을 부리는 것 같았다.
속상하다. 미령처럼 다정다감하게 챙겨 주는 건 바라지도 않는다. 그래도 일이 바빠서 연락 못 했다는 말 정도는 해 줄 수 있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진독사가 날 왜 좋아하는지이…….”
미령에게 얼음을 더 달라며 유리컵을 내밀었다.
“나는 왜 좋아하는지이…….”
말꼬리를 늘이는 것에 재미 붙이고는 입을 쩝쩝 다셨다. 집에 가다가 양갱이나 하나 사 먹어야지.
미령이 나를 애잔한 얼굴로 쳐다봤다. 유리컵에 얼굴을 처박고 뜨겁게 달아오른 목구멍을 식혀 나갔다.
“사람이 말이여, 그르는 거 아니여.”
손가락 하나를 들어서 누구인지도 모를 사람을 향해 입을 열었다. 미령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갑자기 튀어나온 내 사투리에 김요한이 황당해하고 있었다.
엄마 말투를 따라 하다 보니 발밑이 무너지던 병원에서의 기억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다 마신 맥주병 주둥이에 입을 대고 눈썹을 늘어뜨렸다.
“들어봐아, 진독사가 울 엄마 병실도 찾아왔었단 말이지. 격려금도 주고 가고…… 후……. 안 그렇게 생겨선 엄청 밝히…….”
혼잣말을 지속하다 합 입을 다물었다. 아직 그 정도의 이성은 남아 있어 다행이었다.
딸랑딸랑, 뒤에서부터 종소리 한번 예쁘게 들려왔다. 휙 고개를 꺾어 보자 눈 돌아가게 잘생긴 남자 하나가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검은 슈트에 모양 좋은 행커치프가 꽂혀 있었다. 넥타이 색도 슈트에 기가막히게 어우러졌다.
새끼, 잘생긴 데다 스타일도 좋네. 저런 남자 만나는 놈이 누군지나 한번 보자……. 하는데 그 남자가 내 옆에 와서 앉았다.
나는 게슴츠레한 눈을 껌뻑이며 헤죽 웃었다. 내 남자였다.
“이게 누구우……십니까.”
혀가 꼬부라져서 발음이 새고 있었다. 진여원이 내 앞에 놓인 술병으로 시선을 가져갔다.
“여기 어떻게 아셨슴까?”
알코올로 말라붙은 입을 쩝쩝대며 말했다. 진여원을 보는 김요한의 눈이 불거질 듯 커졌다. 미령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진여원은 아무 말도 없이 내 얼굴만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의 만면에 불쾌한 기색이 머물러 있는 듯했다. 어쭈, 연락도 없던 사람이 누군데 저런 표정이냐.
“저 술 마시다 갈…… 겁니다. 말리지……끅……. 마세요.”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진여원이 갑자기 내 손목을 탁 잡았다.
김요한을 만류했던 미령이처럼 내가 걱정돼서 그러나 보다. 이거 봐라, 내 애인도 나 챙겨 준다.
하아- 술 때문에 힘겨운 몸을 늘어뜨렸다.
“이거 말고.”
그가 내 손에서 맥주를 빼앗아가더니 말했다.
“제일 독한 술로.”
그가 미령에게 양주를 주문했다. 내 대신 멋지게 막 마셔 주고 그러려는 거냐? 난 그런 거 다 필요 없는데.
헤롱헤롱한 상태로 진여원의 어깨에 머리를 툭 올렸다. 미령이의 가게가 이래서 좋긴 하다. 누구 눈치 볼 필요도 없이 붙어 있을 수 있으니까. 아……. 김요한이 있었지.
미령이 양주 한 병을 따서 진여원의 앞에 내려 두었다. 진여원이 언더락 잔에 얼음을 넣더니 양주를 쪼르르 따랐다.
그대로 들이켤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가 내 손에 대신 잔을 쥐여 주었다. 풀린 눈으로 호박색 액체를 흔들었다. 그리고 시선만 올려 진여원에게 이게 뭐냐는 듯 의아함을 담았다.
“마셔.”
“…….”
당황한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김요한도, 미령도 대체 무슨 상황인지 몰라 하는 것 같았다.
“저…… 마셔……요?”
“마시다 갈 거라며.”
그랬지. 그건 그냥 오기와 비슷한 거였는데……. 진독사 너 진짜 나쁘다. 남들처럼 말리지는 못할망정 술을 따라 주냐. 양주 잘 마시지도 못하는데 말이다.
잔에 입을 대고 한 번에 훅 털어 넣었다. 목구멍이 지글지글 타는 것 같았다. 진여원이 곧바로 내 잔에 양주를 채웠다. 기가 막혀서 입을 벌리고 그를 향했다.
진여원이 손을 까닥거려 나보고 마시라는 태도를 취했다. 입술을 꽉 깨물고 양주를 들이켰다.
“컥, 쿨럭.”
독한 알코올이 역류하며 미처 마시지 못한 술이 턱을 타고 질질 흘러내렸다. 진여원이 티슈로 입가를 닦아주면서 말했다.
“더 마실 생각이야?”
다정하지만 어쩐지 심술이 머문 말투에 입술을 안으로 바짝 말고는 고개를 휙휙 저었다. 일어선 그가 내 팔을 잡아 휙 몸을 들어올렸다.
“남은 거 키핑!”
미령을 향해 크게 외쳤더니 진여원이 툭 내뱉었다.
“다 버려요.”
그러고는 카드로 내가 먹은 맥줏값까지 싹 계산을 마쳤다. 미령과 김요한에게 제대로 인사도 하지 못하고 가게 밖으로 끌려 나왔다.
김요한은 우리가 밖으로 나갈 때까지 헛것을 본 사람처럼 멍해 있기만 했다. 지상으로 올라오자마자 잡힌 팔뚝이 욱신욱신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잠시 멈춰 서 있으니 그도 그제야 팔을 놔주었다. 진여원이 가자는 식으로 고개를 까딱거렸다.
앞서 걸어가려는 그를 뒤에서부터 껴안았다. 세상이 물속이 잠긴 것처럼 울렁울렁거렸다. 나는 질질 끌려가는 모양새로 그의 배 앞에서 손을 맞잡았다.
“주정뱅이.”
꾸짖음은 아니었다. 습한 바람을 타고 온 목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몽실몽실해졌다. 나는 실실 웃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우스꽝스럽게 매달린 꼴이 됐다.
“애인한테……. 술이나 먹인 게 누군데, 후우.”
그의 허리를 붙들고 질질 걷는 동안 그가 내 팔뚝을 꽉 잡아주었다. 슈트에 숨겨진 진여원의 탄탄한 등이 뺨에 문질러졌다. 뜨끈뜨끈한 감촉이 좋아 연방 얼굴을 비볐다.
갑자기 그가 걸음을 멈췄다. 넥타이를 끌어 내리더니 내 손목을 앞으로 더 당겨 교차시켰다. 그러고는 넥타이로 칭칭 묶기 시작했다.
“이게 뭐……예요.”
“안전벨트.”
매듭까지 꽉 지은 그가 다시 걷기 시작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우리를 하나같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다. 나는 앞으로 손목이 묶인 채로 그가 걷는 대로 다리만 질질 끌었다.
“진여원이…… 나 납치한다.”
그가 듣지 못하도록 중얼거렸다. 납치당하는 사람이 납치범의 등에 포옥 기댔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한참이나 그에게 매달려 가야 했다. 불이 환한 편의점이 시야에 포착됐다. 나는 편의점 쪽으로 몸을 잔뜩 기울였다.
“양갱, 양갱 먹을래.”
당장 입 안에 달달한 팥양갱을 넣고 싶었다. 진여원이 기막힌 한숨을 토해 내는 듯했다. 그가 편의점으로 터벅터벅 걸었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매미처럼 그에게 매달린 꼴이었다.
편의점으로 들어가자마자 직원이 우리를 번갈아 보기 시작했다. 심지어 양갱은 카운터 앞 쪽에 배치되어 있었다.
진여원이 양갱을 한 움큼 사서 계산대에 내밀었다. 어차피 이 근처 전부 게이 바라 얼굴 팔릴 일은 없었다.
우리가 야한 짓을 한 것도 아닌데 뭐 어떤가. 진여원이 날 업은 것도 아니니 창피해 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차라리 업는 편이 눈에 덜 띌 것 같았다. 진여원이 자신의 배 앞으로 묶인 내 손에 양갱 몇 개를 쥐여 줬다. 이 상태로는 먹을 수가 없었다. 나중에 손 풀어 주면 먹어야지 하고는 양갱을 꽉 잡았다.
편의점에서부터 또 얼마간 더 걷자 진여원의 재규어가 보였다. 그가 재규어의 앞에서 내 손목을 묶은 넥타이를 풀어 주었다. 진여원의 등에 기댔던 상체가 주르륵 밑으로 내려갔다.
주저앉을 뻔한 걸 그가 재빨리 잡아 주었다. 이게 다 양주를 먹어서 그런 거다. 평소에 취해도 이 정도까지는 아닌데…….
그는 나를 조수석에 구겨 넣고 보닛을 돌아 운전석에 앉았다. 진여원이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벨트를 매 주려는지 알고 얌전히 있었다. 그런데 진여원이 들고 있던 넥타이로 다시 내 손목을 칭칭 묶었다. 양갱을 쥐고 있어서 반항도 하지 못했다.
“왜……?”
그는 대답 없이 안전벨트까지 채웠다. 진여원이 자동차의 시동을 걸어 골목을 빠져나갈 준비를 했다.
양갱을 먹으려는데 손이 묶여 있어 포장지를 뜯을 수가 없었다. 눈앞에 떡을 두고 못 먹는 바람에 짜증이 확 치솟았다. 나는 묶인 두 손목을 허벅지에 내리쳤다.
“뭡니까. 후우…… 진짜. 전화도 안 하고…….”
짜증은 양갱 때문에 났는데 화는 다른 곳에 풀고 있었다. 아니, 양갱은 아무래도 좋았다. 진짜 속상한 건 그가 연락을 하지 않았다는 거니까.
“이번에도 그렇고……. 저번에도…….”
전에 출장 갔었을 때 진여원이 그랬다. 출장 다녀올 동안 자신을 품평해 보라고. 고백 비스무리한 걸 뱉어 놓고는 출장지에 가서는 연락 한번 없었다. 그때는 우리가 사귈 때가 아니니 그렇다 치더라도 지금은 다르다.
“왜 전화 안 하셨어요?”
나는 미간을 모으고 물었다. 진짜 궁금했다. 행여 그도 내 전화 기다렸다고 말하면 조금은 봐줄 생각이었다.
“보고 싶어지니까.”
그는 정면만 본 채로 차를 몰고 있었다. 잘못 들었나 싶어 멍한 귀를 묶인 두 손으로 문질렀다.
아무리 취했어도 헛소리를 듣는 지경까지는 아니었다. 내 목소리 들으면 보고 싶어서 못 참을까 봐 그런 거였어? 어쩌면 취기 때문에 내 멋대로 해석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러……엄…… 그때는 왜 안 했습니까?”
“언제.”
“품평하고 답…… 달라고 했을 때.”
의자 시트에 어지러운 머리를 마구 비볐다.
“안달 난 거 들킬까 봐.”
삽시간에 술기운이 화악 날아갔다. 눈을 깜빡깜빡거리며 진여원을 쳐다봤다. 저런 어마어마한 말을 참 간단하게도 내뱉는다. 게다가 다정함 따위는 한 치도 없는 말투였다.
“웃지 마.”
“저……. 안 웃는데에.”
그런데도 헤헤 하는 바람 빠진 소리가 나왔다.
“나 되게……. 좋아하는구나. 진여원 나 엄청 사랑하나 보다.”
재차 같은 말을 반복했다. 입꼬리가 올라가서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또 반말해.”
“우욱. 토…… 나올 것 같아.”
“참아.”
진여원이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목구멍까지 치미는 토기를 간신히 막아냈다. 조수석에서 이리저리 굴러가며 발버둥을 쳤다. 빨리 집에 도착해서 눕고 싶었다.
내일 회사 어쩌지……. 진여원한테 엄청난 구두도 보여 줘야 하는데…….
진여원이 차에 놔두었던 생수통을 건넸다. 나는 뚜껑이 따진 생수통을 묶인 두 손으로 붙잡았다. 입가로 질질 흘려가며 물을 마셨다.
물통을 다 비운 뒤에 에어컨 바람이 나오는 곳에 얼굴을 바짝 가져갔다. 한결 토기도 가라앉는 것 같았다.
도로를 멀미 나도록 달린 재규어가 어느 순간 부드럽게 멈춰 섰다. 창밖으로 그의 정원이 보였다.
꼭 순간 이동한 것 같네. 나는 묶인 손으로 안전벨트를 풀고 밖으로 나와 섰다. 비가 오려는지 공기가 축축했다.
앞에 놓인 펜스를 뛰어넘으려는 순간이었다. 펜스 끄트머리에 다리가 걸려 그대로 고꾸라졌다. 눈앞이 까맣게 바랬다. 잔디에 박은 코가 저릿저릿했다.
뒤에서부터 급히 다가온 그가 혀를 차며 내 몸을 일으켰다. 나는 코를 문지르며 인상을 썼다. 그가 내 뺨을 잡아 들어 올렸다.
진지한 눈으로 내 얼굴 여기저기를 확인하고 있었다.
“……아파요.”
“알아.”
“진짜 아파.”
그에게 묶인 두 손목을 내밀어 보였다. 그러니까 이거 풀어라. 이것만 아니었어도 코부터 박을 일은 없었다.
그가 손바닥으로 내 코를 닦아 주더니 넥타이를 잡아끌어서 걷기 시작했다. 그가 대문을 열었다.
연행되는 사람처럼 질질 끌려가며 아직도 통증이 이는 코를 훌쩍거렸다. 신발을 벗자마자 나는 거실에 대자로 뻗었다. 대리석 바닥이 시원했다.
진여원이 나를 내려다보며 소매의 커프스를 풀었다. 슈트를 벗어 내리는 그의 발목을 잡았다.
“우리 진실 게임 한 번 하죠……오…….”
그가 슈트를 소파에 던지며 대답했다.
“해.” 라고.
이왕 술도 잔뜩 먹었겠다, 평소에 물어보지 못하는 거 다 쏟아내려고 굳게 마음먹었다. 솔직히 술기운은 처음보다는 많이 물러난 뒤였다. 그래도 세상이 일그러져 보이는 건 여전했다.
“결혼. 진짜 안 하실 거……요?”
그가 내 앞에 안방 다리를 하고 앉더니 피식 웃었다. 잘못 나간 말투를 정정하기엔 늦어 버려서 일부러 더 담담한 척을 했다.
“나 혹시 첩으로 삼고……끅, 막 아파트 같은 거 얻어 주는 거 아님……까.”
생각만으로도 분노가 일어 말투가 딱딱해졌다.
“드라마 좀 그만 봐.”
그가 손목의 넥타이를 움켜쥐었다. 그대로 나를 질질 끌고 가기 시작했다. 쭉쭉 미끄러지니 누워서 스케이트를 타는 기분이었다. 문득 욕실로 끌려가는 시야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낡은 캔버스가 보였다.
“신발…… 저거 누구 겁니……까.”
욕실로 들어가지 않으려 단단히 버티자 그가 손을 놓았다. 다시금 내 앞에 앉아 손을 얼굴로 가져왔다.
그의 엄지손가락이 내 입 안으로 들어왔다. 축축하게끔 침을 묻히더니 그 손으로 내 코를 문질렀다. 아직도 흙이 남아 있었던 듯했다.
“선물 받았어.”
“누구한테……?”
“열다섯 살 무렵인가……. 생일 선물로.”
“첫……사랑이 준 겁니까?”
진여원이 눈동자만 돌려 캔버스를 한 번 쳐다봤다. 다물려 있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성장기라 몸은 빠르게 자라는데 교복이나 신발을 새로 살 여유가 없었어. 구겨 신다 보니 저렇게 됐지. 그리고 오이디푸스도 아닌데 어머니가 첫사랑이겠어?”
말을 마친 그가 나를 곤란하게 내려다봤다. 저 신발은 어머니의 선물이었다. 교복이나 신발을 새로 살 여유가 없었다는 말이 잘 믿기지 않았다.
풍족하진 않았지만 나는 부족함 없이 자라왔었다. 자라나는 몸에 맞춰 항상 옷이나 신발도 새로 사곤 했으니. 그런데 그는 그것조차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로또……되셨나 봐요.”
주둥이를 때려 주고 싶었다. 이 상황에서 할 말이 그것밖에 없냐, 나는.
진여원이 대꾸 없이 나를 욕실 바닥으로 이동시켰다. 그가 내 셔츠 단추를 풀며 말했다.
“이번엔 내 차례지?”
무슨 차례……싶다가 곧 깨달았다. 맞다, 우리 진실게임하고 있었지. 나는 그가 내 바지를 쉽게 벗길 수 있도록 엉덩이를 들어 주었다.
“근데요. 저 아직 안 끝났는데……요.”
딸꾹질이 올라오는 것을 참아냈다. 잘못하다간 맥주도 역류할 것 같았다.
“하나 더……. 물어봐도 됩니까.”
‘진득이. 대체 내 어디가 좋은 거야. 원래 당신 게이도 아니잖아.’ 내내 안을 맴돌던 물음이었다. 마저 남은 술기운을 전부 여기에 털어 넣기로 했다.
“언제부터…… 저한테 관심 있었습니까…….”
진여원이 드레스셔츠의 단추를 톡, 톡, 풀기 시작했다. 그 상태에서 나를 쳐다보는데 심장이 벌렁벌렁거렸다. 이런 걸 쓸데없이 잘생겼다고 하는구나. 새삼 느꼈다.
“…….”
셔츠를 벗던 진여원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곧 생각났다는 듯 모양 좋은 입술이 벌어졌다.
“마약 했을 때부터?”
마약이라니…….
‘혹시 사장님…… 제가 귀여우세요?’
‘마약해?’
내가 패기 넘치게 물었을 때 그가 내준 대답이었다. 그때는 내 말을 헛소리로 치부한 듯싶더니 사실은 그때부터 나한테 관심을 가졌던 거구만!
나는 콧대를 빳빳하게 세웠다.
“술 깼으면 직접 해.”
그가 샤워기를 끌어와 내 손에 쥐여 주었다. 눈치는 진짜 귀신같이 빠르다. 술기운은 아직 남아 있었지만, 아까같이 몸이 널브러질 정도는 아니었다.
비척대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면에 있는 거울을 쳐다보다 깜짝 놀랐다. 백년 사랑도 식을 만한 거지 하나가 거울에 비치고 있었다.
코뿐만이 아니라 뺨에도 거뭇거뭇한 흙이 묻어 있었다. 샤워기에 물을 틀어 얼른 얼굴을 씻어 내렸다. 이런 모습으로 언제부터 관심 있었냐는 말을 물었다니……. 민망했다.
“바통 넘길게요.”
몸을 씻으며 말했다. 약간의 긴장을 가지고 그가 물어볼 말을 기다렸다. 욕조의 샤워기를 든 그는 아무 말 없이 제 몸을 닦고 있었다. 나는 물을 최대한으로 차갑게 틀어 그를 향해 뿌렸다.
“안 하십니까?”
그가 거품을 낸 타월을 내게로 툭 던졌다. 묶여 있는 손으로 놓치지 않고 한 번에 받아 냈다. 술 마셨어도 운동 신경은 여전했다.
“안 해. 박석연 술 깨서.”
손 안에 부드러운 거품이 묻어났다. 만취해 있었으면 대체 뭘 물어보려고 한 건데?
궁금했지만 저 인간이 말 바꾸는 건 죽었다가 깨어나도 없을 일이었다.
“그럼……. 이것 좀 풀어 주시죠.”
그가 욕조 샤워콕을 잠그고 손목을 내민 내게 다가왔다.
진여원은 넥타이를 풀어 줄 생각도 하지 않고 대신 내 몸을 닦아 주기 시작했다. 쓱쓱 그의 손이 지나가는 자리마다 거품이 흘러내렸다.
정신이 바짝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가 만질 때마다 몸이 흐물흐물해졌다. 마치 데자뷔 같았다. 그의 발기한 성기를 보고 나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생각보다 많이 밝힌다니까.
“눈앞에서 살랑대는데 밝히지.”
내가 입 밖으로 말을 내뱉었나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는 내 허리를 확 둘러 안더니 다짜고짜 가슴을 한 입 베어 물었다.
“으읏.”
처음부터 거칠게 내 젖꼭지를 괴롭히는 진여원의 머리를 떼어 내려고 했다. 괴롭힘을 당한 젖꼭지 한쪽은 금세 발갛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
“하, 할 거면 침실로…….”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가 나를 어깨에 들처 업었다. 손도 묶인 채였기에 풀어달라고 버둥거리자 그가 내 엉덩이를 찰싹 때렸다.
“앗!”
“침대로 가자며.”
그는 도착한 침대에 나를 내려두었다. 아까 얼마나 거세게 빨았는지 젖꼭지는 시트에 스치기만 해도 찌릿찌릿한 통증을 안겨 주었다.
그가 내 팔을 위로 움켜쥐었다. 묶인 손목 때문에 벗지 못한 셔츠가 몸에 축축하게 달라붙었고, 물을 먹은 넥타이는 내 손목을 더욱 거세게 졸랐다.
“이제 푸…… 풀어 주…… 읏!”
넥타이를 풀어 달라는 말을 하기도 전에 그가 내 유두를 와작 깨물었다. 아직 몸 안에 머물러 있는 술기운 때문인지 늘어진 몸이 예민하게 반응했다.
다리로 그를 밀어내려 하는 것도 이내 막혀 버렸다. 그가 자신의 무릎으로 나를 내리눌렀다. 취한 건 나인데 행동은 진여원이 더 그래 보였다.
깨물었던 유두에 미안함을 표시하듯 그가 혀로 슬쩍슬쩍 핥았다. 하아……. 언제 또 짜릿한 자극이 올지 몰라 한숨을 쉬면서도 긴장을 풀지 못했다. 대체 왜 이걸 풀어 주지 않는지 모르겠다.
“왜…….”
의문을 잔뜩 담아서 손목을 흔들었다.
“누구는 일정 앞당겨서 왔는데 누구는 게이 바에 가 있고 말이야.”
가게에 들어오자마자 표정이 안 좋았던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내가 그곳에 있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거다. 그래도 누굴 꼬시러 간 것도 아닌데 이렇게 벌을 받는 이유를 모르겠다. 작업 들어온 것도 찜찜할 구석 하나 없이 물리친 나였다.
“거기 일하는 사람이 친구……입니다. 이상하게 생각 안 하셔도 되거든요.”
“누가 박석연 업어갈까 봐 걱정돼.”
무성의한 어투는 여전했지만 그 안에 담긴 말 때문에 삽시간에 몸이 익었다.
“그거 알아? 너만 보면 다 먹어치우고 싶어.”
“제, 제가 무슨 양갱……입니까?”
“그건 너나 좋아하지. 난 이게 훨씬 나아.”
그가 젖꼭지를 다시금 빨아 당겼다. 아읏, 막을 수 없는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의 입술이 점차 아래로 내려가더니 혀로 음모를 간질였다. 진여원의 얼굴에 내 좆이 함부로 문질러졌다. 그가 내 것에 살짝 혀를 대었다가 안타까울 정도로 슬슬 핥아 올렸다.
이대로 얼른 그의 입속에 들어가고 싶었다. 진여원이 내 기대를 배반하며 더 아래로 향했다. 무릎을 잘근 깨물고 내 다리를 들어 올렸다.
가볍게 쥐어진 종아리에 닿는 손길에 쾌감이 일었다. 그가 복사뼈를 혀로 동그랗게 덧그렸다. 전신이 움츠러들었다. 발가락도 안으로 굽어 파르르 떨렸다.
발등에 자잘한 키스를 내리는 그는 오므린 내 발가락을 입 안에 넣었다.
“아…… 하, 하지마요!”
처음 느끼는 생소한 감각에 참지 못하고 흐느꼈다. 따뜻하고 물컹거리는 혀가 나를 자극했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 성감대가 있었다.
내가 억지로 발을 빼내려 하자 그는 마치 오기가 생긴 사람처럼 팔에 힘을 단단히 주었다. 날카로운 송곳니가 내 발등을 긁었다. 으흑……. 이를 악물어도 신음은 흘러나왔다.
눈을 깜빡거릴 때마다 습기가 올라왔다. 지독한 자극에 눈가마저 제어력을 상실했다. 그가 손끝으로 종아리를 훑어 내렸다가 손등으로 쓸어 올렸다. 복숭아뼈에 입술을 맞댄 그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넥타이로 묶인 손으로 내 것을 꽉 쥐었다. 진여원은 내 허벅지를 벌려 그 안을 파고들었다. 도착적인 광경이었고, 그 역시 다른 날보다 더 흥분하는 듯했다.
그가 바짝 선 기둥을 내 아래에 문질렀다. 연한 살이 쓸려 나가듯 거칠었다. 아무런 윤활제도 없이 그가 진입을 시도하자 아래가 빡빡하게 벌어졌다. 잘 들어가지 않기에 그는 새어 나온 쿠퍼액으로 구멍을 비볐다.
귀두는 들어가겠지만 더 삽입은 불가능할 것 같았다. 나는 엉덩이를 뒤로 무르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엎드린 채로 진여원의 좆을 빨았다. 이미 한 번의 경험으로 목구멍 깊숙이 저것을 삽입하는 방법을 알았다.
혀를 잔뜩 아래로 내리누르고 단단한 성기를 삼키기 시작했다. 그가 내 머리를 꾹 눌렀다. 엄청난 압박감에 축축했던 눈가에 더 열이 오르고 코도 맹맹해졌다.
목구멍 깊이 쑤셔 박은 상태에서 그가 내 얼굴을 붙들었다. 그대로 움직이자 목젖이 성기에 찔러 올려졌다. 기침이 터져 나올 때마다 자극이 되는지 오히려 더 거칠게 허리를 움직였다.
그만하라며 그의 허벅다리를 내리쳤다. 자유롭지 못한 만큼 반항도 보잘것없었다.
“흐앗, 쿨럭. 허억……헉…….”
좆을 뱉어 내자마자 원망을 가득 담고 그를 째려봤다. 허벅지에 올려 둔 내 손목을 그가 잡아서 내리눌렀다.
털썩 침대에 등이 닿았다. 진여원의 것이 어슴푸레한 조명을 받고 번들거렸다. 자극당한 입에서 잔뜩 솟아난 타액에 흥건히 젖어 있었다.
“가학에도…… 취미가 있으셨습니까.”
“몰랐어?”
“……몰랐습니다.”
진짜인가 싶어서 진지하게 그를 바라보는 때였다.
“내가 그렇게 하면 네가 흥분하는 거.”
그가 설핏 웃으면서 바짝 흥분한 내 성기를 커다란 손바닥으로 감쌌다. 이거야말로 정말 몰랐다. 놀랍게도 괴롭힘에 흥분하는 몸을 타고난 것인가 싶어 당혹스러웠다.
“제가……. 설마…….”
“하여간.”
귀엽기는. 진여원이 입술을 부딪쳐 오며 동시에 내 안을 단번에 쑤셔 박았다. 흐읍! 그의 입술에 비명이 막혔다. 자비 없이 뿌리까지 처박은 채로 나를 끌어안았다.
맞닿은 가슴에서 그의 심장이 쿵쿵쿵쿵 바삐 뛰고 있었다.
가득 들어찬 좆에 버거워하며 숨을 의식적으로 몰아쉬기 바빴다. 이렇게 무지막지하게 넣으면 어쩌냐.
“박석연.”
내 목덜미에 그의 숨결이 퍼져 나갔다.
“말해 봐…….”
그에게 손목을 붙들린 채로 멍한 눈을 떴다. 빠듯한 내벽 안에서 성기가 움찔거리며 자리를 잡았다. 그의 말을 헤아릴 사이도 없이 빡빡함에 앓는 소리만 냈다.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건지.
그가 허리를 퍽퍽 쳐올리기 시작했다. 이전에도 그가 물었다. 박석연이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걸까 하고. 더 이상 과거를 떠올릴 여유도 없었다. 아니, 이제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그가 내 안을 엉망으로 쑤셔 대고 있기에 허공에 뜬 다리를 그의 허리에 감쌌다.
그와 내 몸이 원래 하나처럼 달라붙어 가고 있었다. 벌어진 입이 바싹바싹 메말랐다. 그의 것이 배꼽까지 꿰뚫고 올 때마다 잔기침과 삼키지 못한 침이 흘러나왔다. 아아……. 괴로워…… 그래도 좋……아. 귀가 멍해 내가 아닌 다른 이가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진여원이 나를 부서뜨릴 것처럼 쾅쾅 내리박았다. 스프링의 탄력이 그의 행위를 도우며 나를 궁지로 몰아갔다. 손을 내려서 좆을 잡고 싶었다. 여전히 잡혀 있는 손목을 빼낼 수가 없었다.
괴로움에 그를 불렀다. 진여원……. 진여원……. 소리가 되어 나오지 못한 말들이 입 안에서 뭉개졌다. 그는 안쪽을 질척하게 휘저었다. 성기가 밖으로 나가는 순간 내벽이 온통 긁히는 것 같았다.
참을 수가 없었다. 이대로 그에게 몸을 내주었다가는 아래가 전부 망가질 듯했다. 내 손목을 잡은 그의 손등을 긁으며 간신히 목소리를 짜냈다. 제발……. 그만…….
“여원 선배……!”
움찔- 그가 한계까지 좆을 들이민 채로 행동을 멈췄다. 뱃가죽을 찔러 올라오는 충격에 흐린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진여원이 거친 숨을 정리하듯 길게 내뱉었다. 그가 부여잡은 손목을 놓더니 내 뺨을 쓸어내렸다.
“……다시 불러 봐.”
“……아으읏.”
나는 눈도 깜빡이지 못한 채 허리만 뒤틀었다. 어서 빨리 나가 주었으면 했다. 어쩌면 안이 그의 정액으로 서둘러 젖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애원하듯 손을 내려서 그의 어깨를 감쌌다. 풀어 주세요. 나지막하게 속삭이며 그를 바라봤다. 그가 내 팔을 자신의 목 뒤에 걸었다. 그러고는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나는 그의 위에 올라탄 채로 울상이 되어 갔다. 너무 깊어진 연결에 몸이 자꾸만 비틀렸다. 그의 탄탄한 배에 성기가 함부로 짓눌려지니 뭔가가 위로 튀어 올랐다.
묽은 액이 가슴팍에 묻고 나서야 내가 사정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지독한 쾌감에 흡사 두려울 지경이었다.
몸이 빳빳하게 굳었다. 그 역시 더 빠듯하게 좁아진 내 안을 탐닉하며 턱을 핥아 올렸다. 뾰족하게 심이 솟은 유두가 그의 몸에 쓸렸다. 또 한 번의 자극에 안이 옴죽거리며 좆을 쥐어짰다.
진여원의 것도 크게 요동치며 정액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어디까지 쏘아 올리는 것인지도 가늠되지 않았다. 배 안이 전부 그의 정액으로 젖어 내리는 것만 같았다. 그는 내 허리를 부서뜨릴 듯 잡았다.
“하아…… 하…….”
달뜬 숨이 연방 흩어졌다. 그의 어깨에 뺨을 기댄 채로 사정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진여원도 참았던 것인지 전보다 내 안을 적시는 시간이 길었다.
나는 고개를 올려 그의 턱에 쪼듯이 키스를 퍼부었다. 그가 얼굴을 내려 내 입술을 삼켰다. 울컥, 그 순간에도 정액이 맞물린 틈 사이로 흘러내렸다.
가쁜 숨에 단내가 나는 입술에 키스하던 그가 나를 침대에 눕혔다. 그제야 힘이 다 빠져 그의 목에 걸린 팔을 빼냈다.
괜한 심술에 그의 아랫입술을 살짝 씹었다. 그리고 혀로 핥고는 중얼거렸다.
“……졸려요.”
거짓말이 아니었다. 평소의 배로 술을 마셨으니 당연했다. 아무 생각도 하기 싫었다. 이대로 잠들지 못하면 수명이 절반은 줄어들 것 같았다.
그가 내 안에서 나가 주지 않는 바람에 나는 또다시 힘겹게 말했다. 졸려. 졸립다고. 그의 입술을 물고 있을 힘도 없었다.
“이건 어쩌고.”
그가 재차 발기한 좆을 느릿하게 돌렸다. 이쪽은 진이 다 빠져 버렸는데……. 한 번 했다 하면 무조건 세 번은 채웠다.
진득이……. 그 별명이 딱이었다. 이제는 버틸 재간이 없었다. 나는 몰라요…… 몰라. 무책임하게 웅얼거렸다. 몸과 정신이 녹진하게 풀려 까무룩 시야가 좁아져 버렸다.
***
어디선가 새소리가 들려왔다. 그것도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
슬며시 눈을 뜨는 순간, 머리를 관통하는 찌르르함에 끄응 신음 소리가 새어나왔다. 손으로 관자놀이를 비벼 가며 몸을 일으켰다.
이번엔 허리에서 찌르르함이 올라왔다. 평소 술을 먹은 다음 날보다도 몸의 상태가 더 최악이었다. 나는 엉덩이를 끌어서 침대 헤드에 비스듬히 등을 기댔다. 뒤늦게 주변을 둘러봤다.
밖에서 들려오는 새소리만 빼면 이 안은 썰렁할 정도로 고요했다. 욕실도 조용한 걸 보니 진여원은 집에 없는 것 같았다.
나를 이 모양 이 꼴로 만들어 놓고 설마 저는 회사를 갔다 이거냐. 손목을 내려다봤더니 붉게 묶인 자국이 남아 있었다. 내일만 돼도 멍이 든 것처럼 푸르스름하게 변색될 것 같았다.
아래로 축축 처지는 고개를 들어 정면의 벽시계를 쳐다봤다. 짧은 바늘이 ‘2’에 가까웠다. 그래, 지금은 새벽 2시다. 분명 그럴 거다.
그런데 새벽 2시에 해가 뜨면 세계의 종말이 아니고 뭐겠나. 나는 자리에서 부리나케 일어났다. 다리가 꼬여 넘어질 뻔했기에 침대를 잡고 버텼다.
“으……. 아파 죽겠네.”
엉덩이 안쪽뿐만 아니라 골반까지 둔통을 동반했다. 비 오는 날 두들겨 맞은 것처럼 온몸 어디고 성한 데가 없었다. 이를 악물고 한 발 한 발을 떼었다. 침실의 유리를 잡고 거실을 바라다봤다.
저 대리석 바닥 위를 질질 끌려갔던 것이 생각났다. 심지어는 펜스에 걸려 거하게 고꾸라졌었지. 나는 거실을 지나쳐 주방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머그잔에 물을 가득 따라서 숨도 안 쉬고 목을 축였다.
다시 물을 채우고 컵을 든 채로 거실로 나왔다. 빨리 씻고 회사 가야하는데. 왜 늦었냐고 물어보면……. 변명할 거리가 없었다. 마음 같아선 회사고 뭐고 한숨 더 자고 싶었다. 괴로워 죽겠다. 비척거리며 옷을 가지러 침실로 돌아왔다.
불현듯 전신 거울을 스쳐보다 경악했다. 내가 잘못 본 건 아닐까 싶어 거울로 가까이 다가갔다. 눈가에 시퍼런 멍이 들어 있었다. 콧대는 부어서 주먹으로 한 대 맞은 사람 같기도 했다.
“이게 뭐야…….”
코를 매만지자 눈물이 찔끔 나오도록 아팠다. 눈가도 마찬가지였다. 생각보다 상태가 심각했다. 나는 절뚝거리며 휴대폰을 찾아봤다.
내 옷도, 휴대폰도 당최 보이지가 않았다. 침실을 샅샅이 뒤지다가 거실로 걸어 나와 소파와 테이블도 확인했다. 여기도 없으면 작업실인가 싶어 그쪽으로 몸을 틀었다.
전면 유리창에는 제법 큼지막한 글이 적혀 있었다.
[쉬어.]
열중쉬어, 차렷. 그다음은 쉬어. 군부대에서 수천 번이고 해 왔던 자세가 떠오르는 글귀였다. 나는 손으로 멍이 든 눈가를 가늠해 가며 더듬었다. 눈 밑의 움푹 파인 뼈 부분이 제일 아팠다.
달걀로 마사지를 해 줘야 하나. 그런데 오늘따라 집은 왜 이리 넓게 느껴지는지. 아니, 원래도 심각하게 넓긴 했다. 주방으로 갈 생각도 하지 못하고 거실 바닥에 드러누웠다.
꿈틀거리며 침대로 기어가려는 몸짓도 부질없었다. 천장을 보고 누워서 숨만 쌕쌕댔다. 앞으로 내가 또 술을 먹으면 개다. 펜스도 뛰어넘지 말아야지. 대문 놔두고 도둑놈처럼 다닌 것에 대한 벌을 이제야 받는 것 같았다.
더위도 느껴지지 않을 만큼 대리석 바닥이 찼다. 진여원은 나 때문에 에어컨을 틀어 놓고 간 것 같았다. 몸이 으슬으슬 떨릴 정도였다.
더 있다간 감기까지 얻을 것 같아서 억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굼벵이가 형님 소리 할 정도로 느리게 걸었다. 침대에 풀썩 눕자, 세상을 다 가진 듯한 여유가 찾아왔다.
이대로 토실토실한 개나리나 껴안고 잤으면 좋겠다. 사장이 쉬라고 했으니 알아서 얘기도 전했겠지만, 확신할 순 없었다. 베개를 끌어 내려 오는데 손끝에 딱딱한 무언가가 닿았다. 그렇게 찾고 찾았던 내 휴대폰이었다.
부재중 3통화. 전부 사무실 전화번호였다. 이것 봐라. 내가 이럴 줄 알았다. 결근한다고 진여원이 대신 전달만 해줬다면 전화가 걸려올 일은 없었을 것이다.
나는 곧장 사무실로 전화를 연결했다. 투박한 벨소리 대신 윰의 광고 음악이 잔잔하게 흘러나왔다.
[헬로, 윰 쉬즈 디자인부입니다.]
새미가 활기차게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저 박석연입니다.”
[어! 왓썹! 석연 선배, 왜 출근 안 하세요.]
“제가 몸이 너무 안 좋아서 오늘은 쉬어야 할 것 같은데요.”
[오케이, 목소리 진짜 아프게 들려요. 말씀드릴 테니 몸조리 잘하세요. 우리 테니스도 해야죠.]
“내일은 꼭 출근할게요. 그럼 말 잘 부탁드려요.”
전화를 끊고 휴대폰을 베개 옆에 놓아두었다. 이불을 코까지 끌어 올렸다. 깃털처럼 가벼운 마찰에도 코가 욱신거렸다.
내일 회사 가면 이목이 집중될 것 같았다. ‘석연 씨, 누구랑 싸웠어?’ 충분히 예상되는 질문이었다.
이게 다 진여원 때문이다. 손만 자유로웠으면 엎어질 일도 없었을 거다. 설사 고꾸라지더라도 손으로 막아냈을 테고.
미령이네 가게에 한 번 갔다가 별꼴을 다 당했다. 이제 보니 모든 문제의 근원지가 바로 로열패밀리가 아닐까 싶었다. 김대영이 사진을 찍어 나를 잘리게 한 일도 그렇고…….
결과적으로는 진여원을 만날 수 있었으니 놈에게 감사해야 하나. 개뿔……. 호구가 따로 없다. 그렇게 당해 놓고도 감사하긴 뭘 감사해.
김대영 새끼도 이젠 아예 포기했는지 내 욕설 문자 이후로 연락이 없었다. 놈이 내 인생에서 조용히 꺼져 주는 게 날 도와주는 거다.
새들도 어디론가 떠나갔는지 정적이 흐르기 시작했다. 내 숨소리만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가만히 누워 있는데도 숨이 거친 걸 보니 정말로 몸이 안 좋긴 한 것 같았다.
회사에 있을 시간에 이렇게 누워 있는 것도 못내 마음에 걸렸다. 내가 두 번 다시 평일에 섹스하나 두고 보자. 진여원이 야한 얼굴로 나를 홀려도 꾹 참아 내야 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과연, 내 얕은 인내심이 어디까지 발휘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