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박석연 4 (16/18)

박석연 4

이른 오전부터 회사는 축제 분위기로 들썩거렸다. 오전은 정상 업무였지만 오후부터 시작될 단합대회에 다들 마음이 들떠 있는 것 같았다.

어째 난지도로 캠핑을 갔을 때보다 얼굴들이 더 상기되어 보였다. 이유는 충분히 예상가능 했다. 이름만으로도 위용한 자태를 자랑하시는 포상금 때문이었다.

새미도 긴장되는지 연방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했다. 곽일영과 이재화는 나와 새미의 기운을 북돋는데 여념이 없었다.

“1등, 꼭 1등 하는 거야.”

곽일영이 내 얼굴이 아닌 발을 향해 외쳤다. 새미와 근 일주일간 옥상에서 특훈을 한 터라 어느 정도 자신감은 상승해 있었다.

공고가 뜬 이후로 테니스장과 수영장이 사람들로 바글바글했다는 건 말해 봐야 입 아팠다. 그 대신 사원들의 실력을 객관적으로 구경할 수는 있었다.

지켜본 결과 힘겨운 상대는 진여원과 재운 선배의 조합일 듯했다. 재운 선배만 어떻게 공략하면 1등을 거머쥘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새미 씨, 우리 좀 치사하지만 이사님 위주로 공격 넣죠.”

“하 이사님이 그 팀의 구멍인가 봐요.”

그리고 우리 팀의 구멍은 너다.

새미도 선배처럼 파워나 스피드는 좋은데 정확도가 떨어졌다.

“그래도 하 이사님 얕보면 안 돼요. 잘하시는 편이거든요.”

“석연 선배보다요?”

“음……. 아뇨.”

바로 대답해 줄 수 있었지만, 재운 선배의 위엄을 지켜 주기 위해 잠시 생각하는 척을 했다.

“전 선배만 트러스트, 믿습니다.”

새미가 선배, 선배 나를 따르는 모습이 퍽 예뻐 보였다. 곽일영이 질투만 하지 않으면 좀 더 대놓고 챙겨줄 수 있을 테지만, 그 점은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집에서 가져온 반소매 셔츠와 바지를 미리 꺼내 두었다. 옷이 가벼워야 경기도 잘 풀리는 법이다. 새미도 보란 듯이 반바지를 쓰윽 꺼내 들었다.

“1등 하면 선배 150만 원, 저 150만 원.”

역시 내가 예뻐하는 후배답게 돈 계산도 밝았다.

“그건 당연합니다. 한턱 쏘는 것도 반반 부담하고요”

“콜.”

그때였다. 똑똑, 투지를 불태우고 있는 가운데 노크 소리가 파고 들었다.

“박석연 씨 거요!”

불친절한 목소리 낸 퀵 배달 아저씨가 사무실 앞에 서 있었다. 내가 문 앞까지 나가자 상자를 툭 던져 주고 바쁘게 사라져 버렸다.

샘플이 오고 가는 일이 많아 회사에서 고정적으로 계약을 맺은 퀵 회사였는데, 담당자에게 붙임성은 해바라기 씨만큼도 없었다.

하루 이틀 보는 사이도 아닌데 인사라도 해 주면 좀 좋아. 나는 보낸 이 김요한을 확인하고 상자를 부욱 뜯었다.

공장에 수주를 넣었던 메탈릭 슈즈가 안에 담겨 있었다. 금세 제작될 거라는 말과는 달리 시간이 2주일 이상이나 소요됐다. 아마도 메탈릭 소재가 까다롭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휴가 바로 전에 도착했으니 다행이었다.

박스 안에서 구두가 번쩍 빛나는 것 같은 착시 현상이 들었다. 습자지를 벗겨 내며 구두를 들어 올렸다.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슈즈는 금색의 펄이 은은하게 들어가 고급스러운 광택을 자랑했다. 손으로 훑었다가 떼어내면 금색 물결이 묻어 나올 것만 같았다.

바로 이거다. 이건 백퍼센트 통과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과장님, 저 사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이재화는 협박과도 같은 공고문 경고를 받은 후로는 전에 없이 점잖은 상태였다. 오늘은 날이 날이니만큼 속으로는 신나할 테지만 말이다.

“그래요, 꼭 오케이 받기를 바랍니다. 제발.”

나도 제발이었다. 이 메탈릭 슈즈가 내 능력의 한계였다. 나는 사내 메신저를 통해 먼저 진여원에게 운을 뗐다.

[엄청난 거 가지고 올라갑니다.]

신난 마음에 엔터를 누르고 나서야 후회했다. 기대를 많이 하면 곤란한데…….

전에 열무국수도 기대치를 낮춰 놨던 터라 맛있게 먹었던 거였다. 다시 말을 정정하려는 와중에 답신이 도착했다.

[가져와.]

정정하기는 이미 늦어 버렸다.

어쩔 수 없이 구두와 그가 전에 했던 말에 따라 박석연 나 자신을 포함해서 사장실로 올라갔다. 엘리베이터의 거울에 신발을 이리저리 비춰 보기도 했다. 직접 보는 것보다 거울에 비춘 게 더 반짝반짝 예뻐 보였다.

사장실의 문은 어쩐 일인지 빠끔히 열려 있었다. 그 안에서부터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올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개인 에어컨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다.

문을 노크하고 안으로 발을 들였다. 턱을 괴고 앉은 진여원이 내가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뒷짐을 진 상태로 구두 또한 그 뒤로 숨겼다.

“말씀드린 것과 달리……. 뭐 그렇게 그리 대단한 건 아닙니다.”

“난 기대되는데 어쩌지.”

진여원이 얼른 내놓으라며 손을 까딱거렸다. 슬리퍼 소리도 내지 않고 그에게 다가갔다. 괜히 기대치를 높여 놔서 본전도 못 찾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잘하면 대리야.”

그가 구두를 내밀기도 전에 엄청난 포상을 내걸었다. 메탈릭 슈즈 하나로 내가 대리가 되느냐, 사원으로 남느냐가 판가름 나는 것이다.

자신은 있었는데 검사를 하는 상대가 진여원이다 보니 오케이 사인을 받을지 확신할 수는 없었다.

우물쭈물하자 진여원이 책상을 톡톡톡 쳤다. 이 이상 시간을 지체했다간 그가 나를 사장실에서 쫓아낼지도 몰랐다.

약간의 망설임을 담아 슈즈를 휙 내밀었다. 진여원이 구두 한쪽을 내 손에서 가져갔다. 선생님에게 숙제 검사를 받는 학생처럼 손바닥에 땀이 고였다.

그가 구두를 손 위에 올려서 모양을 확인했다. 진여원의 손가락이 가는 구두 굽을 타고 내려왔다. 여성용 슈즈를 매만지는 손길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의 연인으로는 남자인 나보다 여자가 더 어울릴 것이라고. 중대한 진급시험을 앞두고서 별 쓸데없는 생각을 다 했다.

“걱정돼?”

구두에서 시선을 떼어 낸 그가 입을 열었다. 지금 내 얼굴이 어둡다면 아마 구두 때문은 아닐 것이다.

“조금은요.”

“애태우는 게 취미야?”

“예?”

그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책상을 돌아 나오며 내 품에 구두를 안겨 주었다.

“신어 봐.”

“예?!”

꽥 소리쳤다. 플랫슈즈는 얼마든지 신어 볼 수 있었지만 힐이 있는 구두는 무리였다.

“안 들어갈 텐데요.”

샘플 사이즈는 나한테는 작은 250이었다. 여성 슈즈의 경우 260까지 나오지만 광택이 진한 메탈릭 슈즈는 길어질수록 아름다움이 떨어지기에 250을 이 구두의 가장 큰 사이즈로 정해 두었다.

내가 이것저것 말해 봐야 그럼 다른 모델 데려오라고 할 것이 뻔했다. 그간 여성용 신발을 신어 보지 않은 것도 아니었기에 이제 와서 창피하다며 뺄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슈즈 디자이너가 자기 작품을 신는 게 뭐 어떠냐. 나는 스스로를 위로하며 하이탑 운동화와 양말을 벗고 바닥에 섰다. 차가운 바닥에 닿은 발바닥이 시원했다.

숨을 짧게 뱉은 후 구두에 발을 집어넣었다. 높은 힐에 적응을 못해 몸이 휘청거렸다. 탁, 반사적으로 진여원을 붙잡았다. 그대로 나머지 구두에도 발을 넣었다.

발볼이 좁은 편이라 앞은 쏙 들어갔는데 구겨 넣은 발뒤꿈치는 꽈악 조였다. 나는 그를 잡고 있던 손을 놓고 허리를 똑바로 들어 일으켰다.

앞으로 고꾸라질 것 같은 어색한 느낌이 들었다. 높은 구두를 신고 돌아다니는 여자들에게 경의를 표했다. 물론 슈즈 디자이너로서 할 말은 아니지만.

이렇게 마주 보고 서 있자니 그의 앞에서 플랫슈즈를 선보였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만 해도 그는, 그냥 재수 없는 사장이었을 뿐이었다.

어느새 진여원에게 이렇게 빠져 버렸을까……. 새삼 묘한 기분이었다.

“돌아볼까요?”

그가 말하기 전에 내가 선수를 쳤다. 이번에는 절대 팔을 벌리지 않고 돌 생각이었다. 그가 말없이 손짓으로만 돌라는 행동을 취했다.

뒤뚱거리면서 도는 동안 균형이 흐트러져 어쩔 수 없이 팔을 벌렸다. 한 바퀴 빙 돌고 나서야 다시 팔을 탁 붙였다. 그가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것 같았다. 그도 어쩌면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구두에서 내려와야 하나 아니면 더 돌아야 하나 고민하는 때였다.

“축하해. 박 대리.”

삐끗, 그의 엄청난 발언에 발목이 뒤틀렸다. 진여원이 팔을 뻗어 나를 콱 움켜쥐었다. 나는 믿기지 않아 구두를 벗으면서 그에게 물었다.

“저 진짜 대리 된 겁니까?”

체일 슈즈는 연수만 채우면 저절로 진급하는 시스템이었다. 거기서 과장을 달았다고 해도 이런 뿌듯함은 없을 거다. 원하던 대학에 입학했을 때의 기쁨이 딱 이랬던 것도 같다.

그때는 방방 뛰며 신나했지만 이제는 나이가 있으니 오두방정을 떨 순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진여원에게 진한 키스라도 퍼부어 주고 싶었다. 그랬다간 도로 직급을 빼앗겠지.

“설마……. 농담은 아니시죠?”

하이탑을 도로 신으며 재차 확인받으려 했다. 그가 나를 지나쳐 걸었다.

왜 말을 안 하냐. 진짜 나 놀린 거냐! 속으로나마 언성을 내질렀다. 문 앞에 선 그가 툭 내뱉었다.

“따라와.”

나는 하이탑의 앞코를 탁탁 쳐서 발을 완전히 넣었다. 메탈릭 구두는 손가락에 끼운 채로 그의 뒤를 쫓았다. 비상구로 향한 진여원이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어디 가십니까.”

따라가며 물었지만 역시나 가뿐히 무시당했다.

진급이 농담이었다면 이 뾰족한 구두 굽으로 뒤통수를 찍어 주마. 제일 질 나쁜 농담이 사람 들뜨게 했다가 가라앉게 만드는 거였다.

막힘없이 1층까지 내려간 그의 목적지는 카페테라스였다. 아직 근무시간이라 회사원들은 몇 명 보이지 않았다.

카운터 근처에 선 진여원이 곧장 양갱 박스 두 개를 잡았다. 내 품에 그 박스를 고스란히 안겨 주었다.

대리는 농담이고, 이거나 처먹으라는 소린가 보다. 속이 부글부글했다. 내가 로또라도 붙어서 회사를 차리고 말아야지, 서러워서 어디 살겠나.

“승진 선물.”

깜짝 놀라 양갱 박스를 떨어뜨릴 뻔하다가 재빨리 끌어 올렸다. 진짜 박 대리였다. 농담이 아니었다. 입꼬리가 슬금슬금 올라가는 것을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

“감사합니다.”

양갱과 구두를 힘주어 품에 껴안았다. 귀한 선물을 한가득 받은 기분이었다. 나는 다시금 비상구로 가는 진여원을 따라잡았다.

축하해 줬으면 여운이라도 좀 남겨 줘야지, 그냥 가냐. 나는 계단을 오르는 그의 뒤에서부터 말을 던졌다.

“그런데……. 이게 답니까?”

기분은 좋긴 했지만 승진 선물이 양갱 두 박스면 너무 검소하다.

수제 양갱이면 몰라도…….

“뭘 더 바래.”

“돈 많으시잖아요. 명품이시라면서요.”

진여원이 계단의 중간에서 멈춰 섰다. 위로 향하던 몸을 돌려서 나를 내려다봤다. 사방이 뚫려 있는 계단 밑으로 나뭇잎들이 사락사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빛을 고스란히 쬔 철제 계단은 뜨거운 열기를 방출하고 있었다. 그와 반대로 입고 있는 진청색 셔츠 때문인지 진여원은 무척 시원해 보였다.

“아파트라도 한 채 사 줘?”

나는 그 시원해 보이는 모습을 눈에 담다가 입술을 씰룩댔다. 내가 전에 술에 취해서 한 말을 지금 여기서 갚아 주려는 심보인가 보다.

“주신다면 받죠.”

지지 않을세라 대꾸했다.

“더 좋은 집 놔두고 왜.”

아파트보다 더 좋은 집……? 그의 말을 되새겨 봤다. 바로 생각나는 건 진여원의 유럽풍 집뿐이었다. 단순히 집이라기보다 저택이라고 불러야 맞겠지만.

“혹시 사장님 집 말씀하시는 겁니까? 근데 그게 제집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럼 이사해.”

콩콩콩, 콩콩.

축하해, 박 대리에 이어 이사해 라는 발언에 기어코 심장이 널뛰기 시작했다. 철제 계단의 열기가 하이탑 운동화를 뜨겁게 달궜다.

“설마 동거하자는 겁……니까?”

“아니.”

푸시식 김이 빠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가슴을 두드리던 울림도 다시 잦아들려 하고 있었다.

“프러포즈한 건데.”

“!”

물음표가 머릿속을 한 가득 떠돌아다니니 그가 나를 놔두고 다시 올라가기 시작했다. 심장이 탭댄스를 췄다. 믿기지가 않았다.

저 진독사가 저런 말을 하다니.

아니, 원래도 무성의한 말투로 폭탄 발언을 자주 날리던 그였다. 나는 어버버거리며 멍하니 양갱과 구두를 내려다봤다.

무드도 로맨스도 없는 고백이었다. 그러나 내가 상상해 왔던 그 어떤 고백보다도 강렬하게 느껴졌다.

나는 뜨끈뜨끈한 계단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메탈릭 슈즈를 옆에 두고 양갱 박스를 뜯었다. 그리고 뭐에 홀린 사람처럼 급히 포장지를 뜯어냈다.

진급과 진여원의 고백……. 문득 내가 가진 모든 운이 이것으로 끝난 건 아닐까 불안해졌다.

누가 그랬었지, 너무 행복하면 불안하다고. 지금 내가 딱 그랬다. 그래도 다행히 큰 걱정은 들지 않았다.

진여원에게 혼났던 일과, 김대영을 마주했던 일, 엄마의 입원까지……. 이미 다시마 세 개의 불행은 나를 지나간 뒤였다.

포장지 안에서 살점을 드러낸 양갱을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오물오물 씹으며 입 안에서 맴도는 맛을 중얼거렸다.

“달다…….”

자꾸만 입꼬리가 비죽비죽 위로 올라가려고 했다. 나는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했다. 기어코 실실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

한참을 비상구 계단에서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사무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 시간이 꽤 걸린 탓인지 부서 사람들의 얼굴이 영 좋지 않아 보였다.

저 구두가 퇴짜를 맞으면 대체 어떤 걸 내놓아야 하나 싶은 표정들이었다. 나는 일부러 어깨를 늘어뜨렸다.

양갱과 구두를 품에 안고는 힘없이 책상으로 돌아와 앉았다. 그리고 책상 위에 그것들을 투욱 올려놓았다.

“석연 씨, 표정이 왜 그래.”

곽일영이 내 팔뚝을 붙잡았다. 눈썹이 팔(八)자로 잔뜩 처져 있었다.

“사장님께서…….”

꿀꺽, 여기저기서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통과 시켜 주셨습니다.”

“으아! 뭐야! 진짜 나 엄청 놀랐다구.”

곽일영이 메탈릭 구두를 들어서 나를 퍽퍽 내리쳤다. 뾰족한 굽에는 내가 찍히고 있었다. 그런데도 별로 아프지 않았다.

“그리고 저……. 휴가 끝나면 대리랍니다.”

곽일영이 최고다, 신나! 하면서 더 세게 내리쳤다. 새미와 이재화도 축하한다며 진심 어린 축하를 건네왔다. 특히 이재화는 마음의 짐을 던 사람처럼 만면에 평온함이 가득했다.

과장님, 회사에서 섹스는 안 되어도 키스는 가능한가 봅니다. 키스는 가끔 사장님도 하거든요. 나는 속으로나마 이재화에게 조언을 건네주었다.

부서 사람들도 이렇게 좋고, 진여원은…… 더…… 좋다.

나를 괴롭혔던 지난 시간들과 혼자여도 괜찮다며 스스로를 다독였던 날들은 이런 오늘을 맞이하기 위한 시련이었나 싶었다. 올라갈 계단은 아직도 많겠지만, 전과 달리 내 옆에는 진여원이 있을 테고.

행여 언젠가 그가 나를 놓으려고 해도 나는 단단히 붙잡고 놓지 않을 거다. 이럴 거면 왜 사랑하게 만들었냐며 횡포를 부려야지. 당신이 내게 절대 질리지 않았으면 했다. 이런 행복을 맛봤으니 전과 같은 불행은 절대 참아낼 수 없을 것이다.

만일 헤어지자고 하면 회사 옥상에 올라가서 만천하에 진여원이 나랑 사귀었다며 까발릴 테다. 내 엉덩이 엄청 혹사시킨 주범이고, 생각보다 가학적인 성향도 있으며, 사람 심장 들쑤시는 말도 막 내뱉는 못된 사장이라고.

상상만으로도 마음이 울컥거렸다. 어쩔 수 없었다. 걱정이 많은 건 타고난 성격이었다. 나는 책상에 뺨을 대고 남들 모르게 가슴에 손을 가져갔다. 벌렁벌렁거리는 움직임이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이 아니었다.

***

쿵쾅쿵쾅, 벌렁벌렁.

단합대회가 시작되면서 심장이 더없이 날뛰었다. 운동하는 진여원이 잘생겨서라거나 우리 팀이 잘 나가고 있기 때문은 아니었다.

지금은 명백한 분노로 심장이 움직이는 중이었다.

“열…… 받아!”

‘열’자에 힘을 주어 이를 갈았다. 허준성을 포함해 다섯 팀이나 토너먼트로 이기고 결승전에 올라왔더니 예상대로 진여원&재운 선배 팀이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이미 다섯 팀을 상대하느라 체력은 거의 고갈이 난 상태였다. 게다가 오늘 불쾌지수는 모든 사람들이 엄청난 불쾌감을 느끼는 80이란다.

햇볕이 강렬해 얼굴 이곳저곳이 따끔따끔거렸다. 모자를 챙기지 않은 것이 천추의 한이었다. 진여원과 재운 선배 팀은 모자에 손목 아대까지,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저 팀 또한 예선부터 거치고 올라왔을 텐데 체력적인 문제는 전혀 없어 보였다. 나는 잠시 쉬는 타임을 틈타 작전을 바꾸기로 했다.

새미에게 미안하지만 이제 우리 팀의 구멍은 바로 나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평소에 체력 좀 다져 놓을걸.

“새미 씨, 제가 이사님 맡을 테니 사장님 좀 부탁드려요.”

원래는 내가 진여원을 맡기로 했었다. 그러나 그에게서 날아온 공을 간신히 쳐 내는 게 고작이었다. 새미가 힘겨움에 숨을 헐떡이는 나를 안쓰러운 시선으로 동정했다.

“괜찮으시겠어요? 얼굴 하얗게 질렸어요, 석연 선배.”

새미가 내게 수건을 내밀었다. 고맙다는 말도 못하고 얼굴을 닦아 내렸다. 녀석에게 수건을 도로 건네자 새미가 내 목덜미를 쓱쓱 문질러 주었다. 착한 녀석. 거기도 땀이 흥건했나 보다.

작전을 새로 짜며 상대편이 어떤 상태인지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반대편 코트에 선 진여원은 라켓을 가볍게 든 채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뭔가 한참이나 싸늘한 느낌인데, 그게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여태 그와 테니스 경기를 여러 번 해 왔지만 오늘처럼 힘에 부친 적도 처음이었다. 설마 그동안은 좀 봐줬던 거란 말인가. 아니, 내 급격한 체력 저하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것인지도 모른다.

삑! 심판을 보는 타부서 신입사원이 호루라기를 불었다. 쉬는 타임 끝을 알리는 소리였다.

나는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라켓을 쥐었다. 결승전 경기는 총 세 게임. 5포인트씩 연속 세 번을 따내야 이기는 시스템이었다. 딱 5포인트만 채우면 끝나는 예선전 토너먼트와는 달랐다.

현재 게임 스코어 2:0으로 지고 있는 가운데, 마지막 한 게임을 남겨 두고 있었다. 단합대회이니만큼 정규 테니스 규칙과는 다르지만, 점수를 따내야 한다는 건 변함없었다.

이번 서브권은 진여원 팀에게 있었다. 토스를 하는 진여원이 정확한 임팩트 지점에서 공을 내리쳤다. 반동에 그의 셔츠가 훌렁 올라가자 구경꾼들의 환호가 터졌다. 물론 백이면 백, 여직원들이었다. 내가 구경꾼이었다면 거기에 나도 추가 됐겠지만…….

뒤쪽 대각선 방향에 있던 새미가 진여원의 공을 받아쳐 냈다. 거센 공의 스피드를 이겨내느라 흐압! 하는 소리가 뒤따랐다.

나도 그 소리에 힘입어 결의를 다졌다. 300만 원이 코앞인데 놓칠 순 없다. 재운 선배가 높이 뜬 공을 스매시로 내리꽂았다.

나는 공이 바운드될 때를 기다렸다가 땅에 맞고 튀어 오르는 것을 좌측에서부터 쳐 올려 냈다. 수비형으로 날아가는 바람에 연이어 진여원의 강력한 스매시가 날아왔다.

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간 공이 사이드라인 근처를 아슬아슬하게 치고 나갔다. 헉헉 숨을 고르며 뺨을 매만져 봤다.

공이 스쳐 지나가는 순간 솜털이 일어날 만큼 소름이 돋았다.

“사장님 좀 살살해 주세요.”

새미가 손목을 돌려가며 앓는 소리를 했다.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도 아니고 인간적으로 너무했다.

당신들은 고전하는 사원들이 안쓰럽지도 않냐? 어째 대표 두 명이 피도 눈물도 없었다. 나는 상대 팀이 서브를 넣기 전에 네트를 사이에 두고 말했다.

“사장님은 직원애(愛) 같은 건 없으시죠?”

헐떡거리는 내게 진여원이 공을 들었다 놓으며 말했다.

“누구 챙기기도 바빠.”

그러고는 곧장 서브 라인으로 빠졌다. 대체 누가 누구를 챙긴다는 건지! 더는 화낼 틈도 없었다. 날아오는 서브를 다시금 새미가 받아쳤다.

재운 선배와 나, 그리고 진여원과 새미의 구도로 한동안 랠리가 이어졌다. 대체 한 점도 못 따는 건 무슨 경우란 말인가.

햇볕이 워낙 강렬해 눈앞이 가물가물했다. 이러다 일사병 얻고 쓰러지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어지럼증이 더해지는 데다 흐르는 땀이 거슬려 팔뚝으로 이마를 쓸어 올리는 순간이었다.

텅- 하고 이마에 엄청난 충격이 왔다. 만취한 것처럼 세상이 핑글 돌았다. 바닥에 털썩 엉덩방아를 찧고 앉았다. 내 이마를 거세게 내리쳤던 공이 통통통 뒤로 굴러가고 있었다.

펜스에 고꾸라진 지 겨우 몇 주였다. 눈의 멍도 이제야 다 가셨는데 혹까지 나게 생겼다. 지끈지끈한 머리를 내리누르자 새미가 급히 달려왔다.

“선배, 괜찮아요?”

새미가 내 등을 두드렸다.

“아……어……. 괜찮……아요”

생각보다 세게 맞았는지 말이 뭉개져 나왔다. 억지로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다시 머리가 띵했다. 새미가 내 팔뚝을 잡아 일으키려는 순간이었다. 누군가 나를 탁 낚아채서 들어 올렸다.

“게임 끝. 박석연 팀 승리.”

진여원이 내 팔뚝을 잡고는 심판을 향해 말했다. 어느새 다가온 재운 선배도 걱정스레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왜요, 아직 더 남았는데.”

주변에 둘러 앉아 구경하던 직원들도 이렇게 게임이 끝나는 건 바라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우리가 이겼다는 건 말도 안 됐다.

“반칙했으니 탈락이지.”

“반칙이요?”

“내가.”

아찔한 정신을 챙겨가며 그의 말을 들었다.

“2과 3등은 10분 뒤 사장실로 모여요. 장새미 너도.”

진여원이 나를 부축해 옥상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이마를 움켜쥐고 주변을 둘러봤다. 그가 다친 나를 끌고 가는 데에 대해서 이상한 얼굴을 하는 직원들은 없어 보였다.

어째서인지 딱 한 명, 재운 선배만을 제외하고는.

나를 엘리베이터에 가둔 진여원이 내 이마를 살폈다.

“좀 봐주면서 하지……. 이게 뭡니까.”

괜한 투정을 부려 봤다. 이건 분명 이마도 아프고, 체력도 바닥이 난 터라 마음이 약해져서 그런 거다.

3층 버튼을 누른 진여원이 내 앞머리를 휙 깠다. 그러고는 다시 머리카락을 원위치시켰다.

원래도 말이 없는 사람이지만 왜 지금은 한마디도 안 하는지 좀 섭섭했다.

부축해줄 필요까지는 없는데 사장실에 도착할 때까지도 나를 꽉 붙들고 있었다. 오전에는 날 그렇게 설레게 하더니 지금은 얄밉기만 한 사람이었다.

사장실에 들어가자마자 그가 에어컨의 온도를 최대로 낮췄다. 나는 후들거리는 다리 때문에 소파에 털썩 앉았다.

“이렇게 이겨도 하나도 안 좋습니다.”

미니 냉장고에서 캔을 꺼낸 그가 내 이마로 가져왔다.

“아예 눈탱이 밤탱이를 만들지 그러셨어요. 새미…… 신입사원도 사장님을 뭐라고 생각하겠습니까.”

새미가 진여원의 동생과 아는 사이라고는 해도, 진여원을 심보 못된 사장으로 볼까 봐 걱정됐다. 그가 상금을 주기 싫어서 기를 쓰고 직원을 이기려는 것처럼 보여졌으면 곤란하다.

“박석연.”

캔보다 더 차가운 그의 부름이었다.

“일부러 그러는 거면 그럴 필요 없어. 충분히 열 받았으니까.”

대체 당신이 뭣 때문에? 인상을 쓰고 그에게 따지려 하는 순간이었다.

똑똑, 아직 10분도 되지 않았건만 누군가가 사장실을 노크했다. 들어오라는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서늘했다.

우리 밑으로 2, 3등을 거머쥔 팀들이 상기된 얼굴로 사장실을 채웠다. 그사이에 새미도 껴 있었다. 새미는 제 손으로 이마를 가리키곤 입 모양으로 괜찮아요? 물었다. 나는 고개만 몇 번 끄덕거렸다.

이마에 대고 있던 캔을 떼어 내고 소파에서 일어났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맞으니 지친 몸은 살 것 같은데 이마는 더 욱신거렸다.

마지막으로 재운 선배가 사장실로 들어오고 있었다. 선배는 나와 진여원을 번갈아 보며 혼돈에 빠진 사람처럼 얼빠진 표정을 했다.

“모두 수고 많았습니다. 내 실수로 단합대회가 이렇게 끝나서 미안하게 됐습니다. 어쨌든 시작되는 휴가도 잘 보내길 바랍니다.”

진여원이 책상에 놓여 있던 흰 봉투를 3등, 2등 순서로 쥐여 주었다. 3등을 한 허준성이 역시, 우리 사장님이 최고라며 온갖 아부를 떨었다. 저렇게 대놓고 아부하면 쪽팔리지도 않냐.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순서대로 상금을 받은 팀들이 나가자 부산스러웠던 사장실도 곧 고요해졌다. 어부지리로 1등을 한 새미와 나는, 나란히 서서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형, 우리 1등 아닌 거 같은데 안 받아도 오케이.”

새미가 눈썹을 긁적이며 말했다. 직원들이 다 나갔다고 곧장 말을 놓는 것에 조금 놀라 버렸다. 외국에서 살다 와서 그런가 하고 금세 이해했다.

재운 선배가 우리 옆으로 오더니 내 이마에 시선을 고정했다.

“괜찮아?”

“예, 괜찮아요.”

“괜찮은 녀석이 그렇게 엎어져.”

“아까는 그냥…… 잠깐 햇빛 때문에 어지럽기도 하고, 충격에 엎어진 거예요.”

나는 이마를 문지르며 멋쩍게 웃어 보였다. 진여원이 봉투를 세워 툭툭 책상을 쳤다. 이왕 주겠다는 거 안 받을 이유 없었다. 나는 그를 향해 공손히 두 손을 내밀었다.

“감사히 잘 쓰겠습니다.”

내민 손 위에 한참이나 아무것도 떨어지지 않았다. 진여원은 내가 아닌 새미에게 흰 봉투를 건네주었다.

얼떨결에 받아든 새미는 어떻게 할까 고민하는 듯하더니 씨익 보조개가 파이도록 웃었다.

“형, 땡큐. 잘 쓸게.”

새미가 봉투를 한 번 흔들었다.

“선배, 반 나눠 줄게요.”

내게는 속닥거리듯 말했다. 나는 민망해진 손을 뒤로했다. 꾸벅 인사를 하는 내 머리 위로 말이 떨어졌다.

“박석연은 남고.”

새미가 왜 저러지 싶은 얼굴로 나와 진여원을 쳐다봤다. 나도 저 인간이 왜 저러는지 궁금했다. 새미는 고개를 한 번 갸웃거리더니 사무실에서 보자는 말만 남기고 사장실을 빠져나갔다.

어느새 사장실에는 나와, 진여원, 재운 선배만이 남아 있었다. 진여원이 선배에게는 따로 나가라는 말 같은 건 하지 않았다.

“하 이사.”

“어? 응.”

재운 선배가 진여원의 부름에 얼빠진 대답을 했다.

“소개시켜 달라고 했었지.”

“뭐? 아…….”

“박석연.”

나를 부르는 줄 알았는데 그냥 이름만 말한 거였다. 나는 대체 무슨 소린가 싶어 미간을 찌푸렸다.

“뭐……?”

재운 선배가 나보다 더한 인상을 쓰고 되물었다. 나는 중간에 껴서 알쏭달쏭함만 키워 나가고 있었다.

“다시 얘기해 줘?”

“야! 아니, 아니. 그러니까.”

재운 선배가 손가락으로 나와 진여원을 번갈아 가리켰다.

“연애를 하는 게…… 너희 둘이라고?!”

쾅! 테니스공에 맞았을 때보다 더 큰 충격이 내리꽂혔다.

평소와 같은 태도와 평소와 같은 말투로 재운 선배와 나를 경악 속으로 빠뜨린 진여원은 무심히 책상에 걸터 앉아있을 뿐이었다.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이 자리에 못 박힌 듯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아니, 이렇게 굳어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나는 빠르게 머리를 흔들고 진여원을 올려다봤다. 그리고 헛웃음을 지어내 보였다.

“하……하하……! 무슨 그런 농담을. 테니스공 맞은 건 사장님이신가 봅니다. 하……하하.”

입만 벙긋거리며 웃었다. 재운 선배는 내 말을 듣지도 않는 것 같았다. 그때였다. 타이밍 좋게 사장실의 내선 전화가 울렸다. 진여원이 손만 움직여 스피커폰을 눌렀다.

[사장님, 수영 경기 끝났는데 위로 올려 보낼까요?]

팔짱을 낀 진여원이 전화기 방향을 향해 슬쩍 몸을 기울이며 대답했다.

“아니, 내가 내려갑니다.”

스피커폰을 끄고 그가 마저 남은 상금 봉투를 잡았다. 나를 몇 초간 물끄러미 보더니 이내 사장실을 나가 버렸다.

재운 선배와 나, 둘만 남은 사장실에 참을 수 없는 정적이 흘렀다. 선배를 만난 이래로 단둘이 있는 게 이렇게 불편한 적은 처음이었다.

진여원의 말에 선배가 저렇게 당황하는 것도 이해는 했다. 혹시 게이놈이 자기 친구 꼬신 것으로 오해하는 건 아닐까? 괜히 눈치를 보게 돼 찝찝한 마음으로 선배를 불렀다.

“저기 있잖아요, 선배.”

“석연아.”

동시에 선배도 나를 불렀다. 다시 한번 정적이 흘렀다.

“그래, 예쁜…… 사랑해라.”

정신이 어딘가로 가출해 버린 듯한 선배가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나는 입술을 꾹 다물고 어깨를 두드리는 손만 쳐다봤다.

“그리고 그, 뭐냐. 진 사장이 널 막 어떻게 한 건 아니지?”

“예?”

재운 선배가 심각한 얼굴로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어쩐지 이상하더라니……. 그날 자전거 가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그럴 놈이 아닌데…….”

그날 자전거 가게라면……. 설마 ‘마약해?’를 말했던 그날인가. 그게 어쨌든 간에 지금 내가 할 말은 하나뿐이었다.

“……죄송합니다. 선배.”

“야! 그게 무슨 소리야! 왜 네가 죄송해.”

버럭 화를 낸 재운 선배가 이윽고 긴 한숨을 토했다.

“지금 내가 이러는 건 진여원이 너랑 사귀어서 그런 게 아니라, 아니 그건 맞는데. 일단 석연이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건 아니야.”

재운 선배가 소파에 풀썩 주저앉았다. 내게도 앞에 와서 마주 앉으라며 손짓했다. 나는 선배를 바라보고 앉아 이마를 만지작거렸다.

이런 후폭풍을 안겨 주고 저는 쏙 빠져나가다니……. 진여원 두고 보자.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진 사장이…… 그러니까 석연이 너를…… 그런 거지?”

“……네?”

“그렇지, 강아지는 진 사장 미워했지. 진짜 그럼 진여원이?”

재운 선배가 계속 중얼거렸다. 혼자 말하고 혼자 판단 내리는 것을 보며 나는 가만히 있었다.

작업의 시작은 아마도 진여원이었지만, 그걸 말할 생각은 없었다. 선배가 어떻게 생각하든 나로 인해 진여원이 정상적인 길을 벗어난 건 맞았다. 입맛이 썼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곧이어 안정을 찾은 선배의 목소리가 들렸다.

“석연아, 넌 다 좋은데 말이야. 이거 하나만 정확히 하고 가자. 무슨 일 있을 때마다 네가 다 감수하고 업고 가는 상황은 만들지 마라. 너 대학 때도 그 소문 터졌을 때 군대 바로 간 거 보고 얼마나 내가 답답했는지 아냐? 저번에 어머님 일도 그렇고…….”

나는 그저 이마만 끄적거릴 뿐이었다.

“안 그렇게 보여도 무서운 녀석이라 걱정되는데. 설마 협박 같은 거 당한 건 아니지?”

진여원 당신 어떻게 세상을 살아왔기에 절친이 저런 소리를 하냐.

“그런 거 아니에요.”

쓰게 웃었다.

“그럼 그때 그 신발 배달도 그런 거였냐?”

“아……마도요.”

“와, 음흉한 자식일세.”

그건 동감이었다.

“그럼 설마 아까 그것도……. 진여원이 질투한 거고?”

이번 것은 물음표였다.

“질투요?”

“그, 장새미가 너 땀 닦아 주고 챙겨 주고 그럴 때부터 엄청난 한기가 느껴지더라니……. 진 사장 표정이 얼마나 싸했는지 아냐? 허허…… 허…… 세상에나 만상에나다.”

설마 진여원이 그랬을까 싶었다.

“진 사장 그동안 너랑 테니스할 때 엄청 봐주면서 하더만, 오늘은 아주 전력을 다하더라.”

“그동안 봐줬다고요?”

“그러니까 내가 돈내기에 너도 끼게 만들었지. 석연이 너한테는 이상하게 약하더라고. 그래서 우리가 딸 줄 알았는데 잃은 건 의외였지만. 크크.”

나는 그것도 모르고 진여원과 내 실력이 비슷하다며 목청을 높였다. 그러고 보니 음흉한 건 재운 선배도 마찬가지다.

“진여원, 이거 이거……. 늦게 배운 도둑질이 날 새는 거 모른다더니. 아니 이럴 땐 얌전한 고양이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가 맞냐?”

목이 메면서까지 속담 풀이를 하는 선배에게 음료수 캔을 내밀었다. 선배는 아직 시원한 이온음료를 꿀꺽꿀꺽 단숨에 원샷했다.

그런데 어째서 진여원이 질투를 했다는 말에 다시금 심장이 콩알 튀기듯 콩콩거리는 건지 모르겠다. 나도 참 별수 없었다.

“그래, 우리 석연이 보통은 아니지, 그렇지. 으하하, 진짜 이건 세기의 쇼크다.”

드디어 혼돈의 도가니에서 벗어난 선배가 특유의 낄낄거림으로 웃기 시작했다.

“놀릴 거리 생겨서 완전 신나는데. 석연아, 나중에 새미랑 진하게 한번 부둥켜안기라도 해 봐라. 진 사장 어떤 반응 보일지 궁금하다. 크흐흐.”

그 친구에 그 친구였다. 달칵, 문소리에 고개를 틀었다. 역시나 양반은 못 되신다. 진여원이 들어오고 있었다.

상금을 건네주고만 올라왔는지 생각보다 빨리 돌아왔다. 재운 선배가 소파에서 일어났다.

“야~ 진 사장 예쁜 사랑 하세요~”

재운 선배가 진여원을 놀리듯 머리 위로 하트를 그렸다. 진여원이 무표정한 얼굴로 대꾸했다.

“그럴 생각이야.”

이번에도 당황한 건 재운 선배였다. 본전도 못 건지는 모습이 어째 내 모습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

그런데도 공으로 내 이마를 강타시켰던 진여원에 대한 얄미움은 저 대답 덕에 사라졌다. 사실 미운 마음은 진작 없어진 지 오래다.

재운 선배가 우리 주희 보고 싶다면서 너스레를 떨었다.

“석연이 휴가 잘 보내라. 저기 계신 음흉한 씨랑 말이야.”

“예……. 선배, 아니 이사님도요.”

재운 선배는 나가면서도 연방 우리를 놀리듯 히죽거렸다.

휴가가 끝나도 한동안은 선배의 놀림거리가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어쩌면 내내 우려먹을지도 모르겠다.

다시 사장실의 문이 닫히고 나서야 그와 단둘이 남았다. 진여원이 책상 위에 있던 휴대폰을 들었다.

풀어 두었던 손목시계까지 채우는 걸 보니 퇴근할 모양인 듯했다. 나 역시 사무실로 돌아가서 가방만 가져오면 퇴근 준비 완료였다.

“사장님, 재운 선배한테 그렇게 말해도 되는 겁니까?”

“안 될 이유 있어?”

“저랑 같은 쪽……되신 건데요.”

“사실인데 왜.”

진여원, 왜 또 사람 설레게 만들고 그러냐. 나는 올라가는 입꼬리를 숨기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사무실로 돌아가서 가방을 챙길 생각으로 몸을 틀었다.

박석연- 하고 진여원이 나를 불렀다.

“바로 퇴근해.”

저 말은 같이 자전거를 타고 퇴근하자는 소리였다. 나는 사장실의 문을 연 채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주차장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오늘 오전에는 저 먼저 일어나서 휭 가 버렸기에 지각을 겨우 면한 터였다. 몇 번이나 그의 집에서 자전거를 타고 출근을 했지만, 언제나 그렇듯 나를 깨워 주는 일은 없었다.

솔직히 나랑 동반 출근하면 이상한 소문 퍼질까 봐 그런 줄 알았다. 재운 선배에게도 대놓고 말한 것을 보니 그건 아니었다.

그럼 설마, 나 조금이라도 더 자라고 배려해 준 건가? 나는 시작되는 설레발을 머릿속에서 지워 나갔다.

사무실로 내려오니 새미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곽일영과 이재화의 자리는 주인 없이 이미 텅 빈 뒤였다. 아마 단합대회 도중에 몰래 빠져나갔지 않나 싶었다.

“석연 선배, 여기.”

새미가 제 몫은 이미 빼갔는지 내게 봉투를 내밀었다.

“고마워요, 새미 씨. 그리고 고생 많았어요.”

“우리 이 돈으로 저녁이나 할까요?”

“미안한데 약속이 있어서, 다음에 해요.”

미안함을 만면에 담았다. 새미는 괜찮다며 사람 좋게 웃어 보였다. 더는 시간을 지체하지 않았다. 백팩을 등에 메고 새미보다 먼저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앞으로 일주일간은 출근의 지옥에서 해방이다. 낮 12시까지 실컷 자야지. 못 본 드라마도 몰아보고, 진여원하고 시골도 내려가고. 발걸음이 전에 없이 가벼워졌다. 비상계단을 통해 주차장으로 다다다 내려갔다.

린스키 위에 올라탄 남자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색감 좋은 라운드 셔츠에, 핏이 잘 빠진 바지와 청회색 로퍼까지. 삼박자가 완벽했다. 나는 분홍 자전거로 한달음에 걸어갔다.

내가 입고 온 옷도 나름 분홍 자전거와 어울리는 스타일이었다. 누가 뭐라 하면 잘나가는 패션 디자이너라고 우기지 뭐, 어떠냐.

내가 자전거에 앉기 무섭게 그는 먼저 페달을 밟기 시작했다. 하여간에 배려라고는 씨알만큼도 없다. 섬세하지도 못하고 말이다. 재빨리 나도 페달을 밟았다.

회사 오솔길 통로를 빠져나가며 진여원의 등을 바라봤다. 갑자기 이마가 욱신욱신거렸다. 자전거 운전대를 한 손으로 잡고 이마를 비볐다. 휘청거리는 바람에 재빨리 핸들을 고쳐 잡았다.

진여원은 내가 자전거를 타다 자빠져도 그냥 갈 인간이었다. 그러니 내 앞길은 내가 책임져야지.

이번에 받은 상금으로 잘 나가는 자전거나 한 대 살까? 그럼 그와 나란히 달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진여원의 등이 점차 가까워졌다. 내가 속도를 올리지 않았음에도 말이다. 배려 없는 인간이라는 말 취소다. 속으로 한 말을 지워 가며 그와 나란히 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습한 바람을 맞으며 시작될 휴가를 실감하고 있었다.

전에 없이 들뜨는 이유는 아마도 휴가를 함께할 진여원이 있기 때문일 거다.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고, 그를 좋아하게 되었음을 알았을 때처럼 마음도 솔래솔래 흔들렸다.

***

내가 이럴 줄 알았다. 그래서 처음부터 버스를 타고 가자고 하지 않았나.

나는 지옥의 문턱을 수십 번이고 밟고 온 사람처럼 진이 다 빠져 버렸다. 진여원의 재규어는 물 만난, 아니 초원을 만난 짐승처럼 미친 듯이 고속도로를 질주했다.

라디오라도 틀어 정신을 분산시키려고 해도 저 인간이 족족 꺼 버리니 문제였다.

“사장님!”

“다 들려.”

소리 안 질러도 들리는 거 나도 안다.

“제발 속도 좀 줄이세요! 제발요. 다치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그가 내 말을 사뿐히 무시하고 액셀러레이터를 더 세게 밟았다. 나는 내내 공짜 놀이기구를 타고 있다는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려 했다. 그런데 놀이기구는 안전이라도 보장되지, 이건 고정벨트 없는 자이로드롭에 버금갔다.

휙휙 지나쳐 가는 풍경을 뒤로하고 고개를 숙였다. 가방을 열어 입가심용으로 가지고 나온 월남땅콩을 꺼냈다. 인터넷으로 양갱을 주문했더니 서비스로 딸려온 품목이었다.

봉지를 푹 찢어서 입에 넣고 아그작 아그작 씹었다. 먹는 데 집중하니 불안한 마음은 처음보다는 적잖이 가라앉았다.

하나씩 아껴서 먹는 것도 이내 감질났다. 아예 고개를 젖혀 입에 털어 넣었다. 진여원의 재규어가 차선을 바꾸며 내 몸을 뒤흔들었다.

동시에 동그랗고 딱딱한 월남 땅콩이 목구멍에 탁 걸려들었다.

그것도 두 개나.

“컥.”

켁, 켁, 소리를 내뱉으며 월남 땅콩을 빼내려 했다. 하지만 목구멍에 딱 맞는 퍼즐처럼 끼워진 월남땅콩이 도무지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가슴에서부터 시작된 스산한 기운이 코끝을 치고 올라왔다. 눈가가 압박되어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교통사고가 나서 죽는 게 아니라 월남땅콩 때문에 목이 막혀 죽는구나.

기가 막힘에 눈물이 주룩주룩 흘러내렸다. 이건 숨이 막혀 생리적으로 흐르는 것이지 슬퍼서가 아니었다.

퍽, 퍽, 퍽, 진여원의 손바닥이 거세게 내 목덜미를 내리쳤다. 얼굴이 앞으로 튀어 나가며 켁 하는 짧은 소리와 함께 목구멍을 막고 있던 월남땅콩도 바닥에 떨어졌다.

“허어……허억…… 쿨럭……컥…….”

목을 감싸 쥐고 놀란 눈으로 진여원을 향했다. 그가 전에 없이 인상을 잔뜩 구기고 나를 노려봤다. 나는 손바닥으로 눈을 마구 비볐다.

어느 순간부터인지는 몰라도 그가 속도를 줄여 갓길을 달리고 있었다. 이게 다 너 때문에 벌어진 일인데 왜 그렇게 째려보냐. 자칫하면 죽었을지도 몰랐다. 억울함이 하늘을 찔렀다.

“왜 그렇게 세게 때립니까!”

버럭 화를 냈다. 숨통이 트이고 나니 목덜미가 저릿거렸다. 눈알이 안 튀어나온 게 다행이었다.

“지금 그게 중요해?”

처음 보는 얼굴로 화를 내는 그가 내 손에 꽉 쥐어진 월남땅콩 봉지를 채갔다. 그것을 그대로 바닥에 쏟아 버렸다.

“먹을 건데 왜 버려요!”

“먹고 싶으면 갈아 먹어.”

그가 싸늘하게 대꾸했다. 진여원이 다시 핸들을 두 손으로 잡았다.

갓길을 벗어나 차선으로 돌아온 차가 웬일로 규정 속도를 유지하며 달리기 시작했다. 죽을 뻔한 사람은 나인데 저리 성질을 내는 것에 빈정이 상해 버렸다.

나는 바닥에 굴러다니는 월남땅콩을 주웠다. 다시 먹지는 못하니 봉지에 넣어서 버릴 생각이었다.

씩씩거리는 숨을 삼키며 땅콩을 전부 주워 담았을 때가 돼서야 그를 쳐다봤다. 여전히 미간에 금이 간 얼굴로 운전을 하는 중이었다.

이렇게 보니 그는 화가 난 게 아니라 꼭 초조한 사람 같았다.

저 진독사가 나 죽는 줄 알고 놀랐나 보다.

“이게 다……. 운전을 거칠게 하니까 그런 거잖습니까.”

조금 주눅이 든 목소리로 말했다. 그가 길게 한숨을 토해 냈다.

“그깟 월남땅콩 때문에…….”

박석연을 잃을 뻔했어. 기가 막히지.

그가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월남땅콩 때문이 아니라 운전 때문이……죠.”

그가 핸들을 톡톡톡거렸다. 그러다가 오른손을 내 뺨에 가져다 댔다. 그의 손바닥에서부터 식은땀이 진득하게 묻어 나왔다.

당신, 땅콩 때문에 나 죽을까 봐 엄청 무서웠구나.

웃기면서도 슬펐다. 나는 피식하고 웃음이 새어 나오는 걸 막지 못했다. 그가 웃고 있는 내 뺨을 꾹 옆으로 밀었다.

연이어 고속도로를 달리는 동안 그는 여러 번이나 계기판을 확인했다. 흡사 목줄을 매어 놓은 재규어가 된 것 같았다.

나는 포카리스웨트를 들어 꼴깍꼴깍 마셨다. 쓰라림이 남아 있던 목구멍을 부드러운 이온음료가 달래줬다.

“앞으로 조금만 더 가면 되겠네요.”

“휴가 신고식 한번 대단해.”

“제가 그러고 싶어서 그랬습니까……. 그래도 일단은 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절대 일찍 죽고 싶지 않다. 진여원 당신 말대로 이런 짓 저런 짓, 못해 본 거 다 해 봐야지. 그것도 우리 같이.

진여원이 내비게이션의 안내를 따라 차선이 좁아지는 도로로 진입했다. 주변은 어느새 고즈넉한 시골 풍경으로 변해 있었다.

높은 건물들도 없었고 탁 트인 논밭의 전경만이 보였다. 파릇파릇한 색에 눈이 시원해지는 느낌이었다.

같은 풍경이 반복되는 도로를 한참이나 더 달리고 나서야 익숙한 동네가 보이기 시작했다. 차 한 대가 간신히 지나다닐 수 있는 좁은 길은 전과 다름없이 비포장도로였다.

차가 거칠게 흔들리며 엉덩이도 들썩들썩거렸다. 저기 보이는 빨간 지붕을 지나고, 그다음 두 개의 집을 지나면 곧 도착이었다.

“이제 저 두 집만 지나면 돼요.”

창밖을 가리켰다. 집이 가까워져 오니 진여원이 좀 더 속도를 줄였다. 우리가 오는 걸 알고 있는 덕인지 집의 파란 대문이 양쪽으로 활짝 열려 있었다.

나는 진여원에게 마당 안에 주차를 하라며 훈수를 뒀다. 그리고 주차가 끝나기가 무섭게 조수석에서 내려섰다.

“으……. 살 것 같다.”

기지개를 켜자 입에서 요상한 소리가 나왔다. 차 소리가 들렸으니 엄마나 아버지가 나와 볼 거라 생각했건만 대청마루는 잠잠했다. 내가 먼저 신발을 벗고 대청마루로 뛰어올랐다.

안방의 미닫이문을 허락도 없이 열었다. 안에는 이불이 곱게 접혀 있었고 커다란 캐리어 두 개만 덜렁 놓여 있었다.

밭이라도 가셨나? 나는 빠끔히 방으로 내밀었던 얼굴을 거뒀다. 차에서 내린 진여원도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가 서 있는 왼쪽 벽면에는 농기구들이 주르륵 서 있었고, 오른쪽은 등목을 할 수 있는 수돗가가 있었다. 텃밭을 가꾸는 사람이라 그런지 이 풍경에 그리 안 어울리는 건 아니었다.

“밭에 나가셨나 봐요. 안 계시네요.”

부모님께는 회사 대표님이 주말농장 체험하고 싶어서 방문한다는 말을 핑계로 둘러댔다.

지금 당장 부모님께 그와 내 관계에 대해 말할 생각은 없지만, 뜻 모를 긴장감이 맴돌았다. 상견례도 아닌데 말이다.

내가 생각하고도 우스워서 목덜미를 긁적거렸다. 그사이 그가 대청마루까지 다가와 털썩 앉았다. 바람이 살랑살랑 그와 내 사이를 파고들었다. 나도 얼른 그의 옆으로 가 앉았다.

“어릴 때는 뭐 하고 놀았어.”

진여원이 흥미롭게 주변을 살펴보고 있었다. 왜인지 뿌듯함이 감돌았다.

“비석치기 진짜 재미있는데 하실래요? 대신 제 돌멩이에 맞아서 눈탱이 밤탱이 돼도 모릅니다.”

테니스 경기를 복수할 기회였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진여원이 피식거렸다.

시골 풍경에 어우러진 그는 회사에서 보던 모습보다 훨씬 여유로워 보였다. 나는 그 옆모습을 홀리듯 보다 애써 눈을 떼고 정면을 향했다.

“애들 때는 이런 대청마루 밑이 진짜 무서웠거든요. 내려다보면 귀신이 엎드려 있을 것 같고, 손이 휙 뻗어 나와 제 발목 잡을 것 같아서 말이죠.”

두 손을 뒤로해 마룻바닥을 짚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어차피 같은 하늘일 텐데도 서울보다 여기서 올려다보는 게 훨씬 깨끗해 보였다.

“팥 물어.”

그는 내가 전에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가 나를 빤히 쳐다보는 것이 느껴져 애꿎게 뺨만 문댔다.

“이제는 안 무섭거든요? 그러고 보니 양갱을 안 챙겨 왔네요. 엄마가 사 뒀을 것 같기도 한데…….”

양갱을 찾으러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는 때였다. 그가 내 손목을 움켜쥐었다. 그냥 옆에 앉아 있으라는 무언의 행동이었다. 딱히 지금 먹고 싶은 것도 아니라 얌전히 앉아 있기로 했다.

“상상되네.”

“뭐가요.”

“꼬맹이 박석연이 뛰어노는 거.”

아마 진여원의 머릿속에는 새끼 비글이 여기저기 물어뜯는 풍경이 펼쳐져 있겠지.

“그거 아세요?”

고개만 옆으로 해 그를 향했다. 진여원도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원래 제 꿈이 슈즈 디자이너는 아니었거든요.”

그럼 뭔데? 라고 물어봐 주지는 않았다. 언제는 대답을 기대했었나.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애들 때부터 엄청 날고 싶어 해서 파일럿이 되려고 했거든요. 공부를 어느 정도 하긴 했지만, 파일럿이 될 정도는 아니라 포기해야 했지만요. 근데 웃긴 건 여태껏 비행기 한 번 못 타 봤어요.”

이 동네서 뛰어놀던 어린 박석연은 제가 커서 슈즈 디자인을 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 일은 진짜 모르는 거다.

“사장님은 설마 사장님이 꿈이었던 건 아니죠?”

진여원 어릴 때도 엄청 예쁘거나 잘생겼었을 것 같은데, 나중에 사진이나 보여 달라고 졸라 봐야겠다.

“모르겠네, 뭐가 되고 싶었는지.”

“꿈도 희망도 없는 어린이였나 보네요.”

“살기 바빠서.”

그도 팔을 뒤로 뻗어 몸을 지탱했다. 편안한 자세로 나를 바라보는 모습에 또 한 번 가슴이 울렁거렸다.

“생각해 보면 구두 한 켤레 정도는 직접 지어 드리고 싶었던 것 같아.”

그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 같았다. 조용히 경청하는 내게 그가 말을 덧붙였다.

“돌아가시기 전에.”

예상치 못한 말에 눈꺼풀이 경련했다. 말을 못하신다는 것은 들어서 알고 있었으나 이 세상 분이 아니신 줄은 몰랐다.

나는 그에게 어떤 위로의 말을 건네야 할지 몰라 주저했다. 그런 나와 달리 그는 덤덤해 보였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내가 그래왔듯이 시간이 흘렀다고 과거의 고통이 사라지는 건 아니라는 것을.

과거는 바래져도 고통은 이따금씩 찾아오곤 했다.

“돌아가신 지……. 좀 되셨나 봐요.”

“좀 됐어.”

그는 바람에 사락거리는 내 머리카락을 매만져 주었다.

“오래돼도 안 아프다거나 괜찮은 건 아니거든요. 저도 되새기면 아플 때가 많아서 압니다. 막 화도 나고 내가 왜 그때 그랬을까, 또 그때는 왜 하지 못했을까 하는 후회도 되고.”

나는 그를 향해 완전히 돌아서 앉았다.

“그래서……. 앞으로는 후회하기 싫습니다.”

솔직한 심정을 말했다. 당신과의 관계도, 나로 인해 상처받은 부모님에게도. 그리고 내 주변에 모든 이에게 후회할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나도 그래.”

내 머리카락을 만지는 진여원의 손을 잡으려는 때였다.

“석연이 왔나!”

엄마의 우렁찬 목소리에 놀라 그에게서 몸을 휙 떼었다. 나는 부리나케 자리에서 일어섰다. 묘한 우리의 모습을 들켰을까 봐 간이 콩알만 해졌다.

다행히 별다른 기색 없이 함박웃음만 짓고 들어오는 엄마를 보자 안심했다. 엄마는 병원 생활 동안 빠졌던 살이 원상 복귀되어 있었다.

“어디 갔다 와?”

“이잉, 바테 잠깐 댕겨왔는데, 그 사이에 올 줄은 몰랐지.”

“안녕하십니까.”

진여원이 엄마를 향해 허리를 굽혔다. 엄마가 들고 있던 쟁기를 뚝 떨어뜨리며 반색했다.

“아이구야, 어찌 그리 훤칠한겨. 너 아부지 젊었을 땐 명함도 못 내밀것다 야.”

진여원이 다소 당황하고 있었다. 엄마의 입에서 나오는 찰진 사투리를 알아듣기 위해 말을 곱씹는 것도 같았다.

“사장님이랑 나랑 구면이지. 저번에 내 병실 찾아왔을 때 말여, 비몽사몽혀 갖고 인사도 못했으니까.”

“……많이 호전되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덕분에 말끔히 나았지. 근데 말여 우리가 낼 모레까지 마을회관서 단체 모임 가는데 말여. 타이밍이 아주 안 좋은데, 어쩌냐.”

“어디 놀러 가?”

저번 주에 전화했을 때만 해도 그런 말은 없었다.

“이잉, 니 아부지가 꼭 가고 시프다고 혀서, 며칠 전에 결정 된겨. 니들, 아니 대표님이 오신다고 해서 맛있는 거라도 해드리려고 했는데 우짠다냐. 니 아버지가 가자구, 가자구, 아예 귀에 딱지가 앉게 얘기 하는디.”

대문에서부터 아버지가 자전거를 끌고 들어오고 계셨다. 도색이 다 벗겨진 시골용 낡은 자전거였다.

아버지는 나와 진여원을 보더니 엄마만큼이나 반갑게 미소 지었다. 진여원이 인사를 건네자 아버지가 악수를 청했다.

“잘왔어요, 여원 군. 석연이에게 듣자 하니 주말농장을 다닐 생각이라면서요.”

진여원이 그런 거였어? 하면서 시선만으로 내게 말을 건네는 것 같았다.

“예, 실장님께서 주말농장을 운영하실 거라는 말을 전해 들었습니다.”

“허허,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잖아요. 행정실 그만둔 지가 얼만데 실장은 무슨.”

“아직 실장님이 입에 익어서요.”

진여원이 미소 지었다.

“그래요, 호칭은 차차 바꾸고. 석연이, 재수네 밭 알지?”

“재수네? 당연히 알죠.”

재수는 어릴 때 같이 놀았던 시골 사는 녀석이었다.

“그 집 옆에 주말농장 하우스 있으니 잘 안내해 드려라.”

“알았어. 근데 어디로 여행 가?”

“이잉, 우리 제주도 가기로 했지. 나는 싫다고 했는디 말여.”

“이번이 아니면 언제 우리가 제주도에 가 보겠어요.”

아버지가 엄마를 달래듯 굴었다.

“그야 그렇지만서도.”

“여원 군 여기까지 왔는데 챙겨주지 못해서 미안해요. 그래도 이왕 왔으니 편히 쉬다 가요. 휴가 삼아 온 것일 텐데 어른들 있는 것보다는 편할 겁니다.”

“별말씀을요.”

아버지와 진여원 사이의 공기가 부드러웠다. 행정실에서 같이 일했던 적이 있어서 그런지 서로 불편해하는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럼 언제 가는데?”

“봉고 곧 온다고 했으니까 슬슬 나가 봐야지.”

“그렇게 빨리?”

“이잉, 왜 니도 갈텨? 돈만 주믄 오케이여.”

“내가 무슨 제주도야. 두 분이 데이트하는데 방해할 생각 없어.”

“그려, 잘 생각했다. 그리고 석연이 너 빨리 이리 와 바라.”

성격 급한 엄마가 부엌으로 오라며 손을 까딱까딱거렸다. 엄마가 먼저 부엌 쪽문으로 쏙 들어갔다. 나는 머리를 부딪칠 것만 같아 허리를 굽혀야했다.

아궁이를 지필 수 있는 부엌 안에는 어울리지 않게 냉장고와 가스레인지가 있었다. 아궁이만 빼면 전부 현대식이었다. 엄마가 김치 냉장고를 열더니 그 안에 있는 것을 가리켰다.

“이거시 수박이여, 같이 나눠 먹구 말여. 그리고 이거.”

이번엔 냉장고였다.

“석연이 너 좋아하는 잡채랑 부추전, 동그랑땡이랑 튀김 음식 있으니까, 렌지에 데워 먹구.”

“뭘 이렇게 많이 했어.”

냉장고에 한가득인 음식을 보니 벌써부터 침이 꿀꺽 넘어갔다. 특히 잡채는 진짜 오랜만이었다.

“글구 말여. 양갱은 요 있다.”

연양갱이 계란판 옆에 놓여 있었다.

“알아서 챙겨 먹을 테니 걱정하지 말아. 제주도 갈 거면 전화해서 미리 말이라도 하지 그랬어.”

“나는 하려고 했는데, 너 아부지가 시시콜콜 뭐 하러 이야기 하냐구 하지 뭐여. 생각해 보니 그런 거 같기도 하고 말여. 너 사장도 우리 없는 게 더 편할 거여. 아무래도 우리가 어른이니까 불편하겄지.”

“그런 거 없어.”

엄마와 같이 부엌을 나오자 저기서 아버지와 진여원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그쪽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일은 잘하는 편입니다.”

그가 나를 보더니 눈을 접으며 말했다. 아버지가 괜히 나 일 잘하냐며 노파심을 내비쳤나 보다.

“아버지, 가 보셔야 한다면서요.”

“그래야지. 여원 군도 다음에 기회가 되면 꼭 같이 한잔해요.”

“기대하겠습니다.”

부모님은 나와 진여원을 남겨 두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안방에 캐리어가 왜 있나 했었는데 여행 때문이었다. 나는 다소 민망해져서 진여원을 올려다봤다.

“저 진짜 몰랐어요.”

“뭘.”

“두 분 여행 가시는 거요. 그냥…… 오해마시라고요.”

“난 좋은데.”

진여원의 발언에 눈을 크게 키웠다. 부모님이 캐리어를 끌고 나오고 계시기에 당황한 기색을 얼른 얼굴에서 지웠다. 대청마루로 다가가 대신 짐을 들어 드렸다.

“올 때 돌하르방이나 감귤 초콜릿 같은 건 사 오지 마.”

“너는 왜 낭만이 읍는겨. 제주도 하믄 그 두 개 아녀.”

“낭만이 밥 먹여 줘? 돈 아까워.”

캐리어를 질질 끌자 진여원도 옆에 와서 다른 하나를 잡았다. 탈탈거리는 소리를 내며 다가온 봉고차 한 대가 때마침 대문 앞에 도착했다. 마을회관이라고 적힌 스티커가 봉고 뒷유리에 붙어 있었다.

나는 봉고차의 문을 열어 캐리어를 안에다 실었다. 봉고에 타고 있던 동네 사람들이 밖으로 나와 진여원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박 선생네 아들들인감?”

머리가 희끗희끗한 남자 노인이 물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나는 어른들을 향해 인사했다. 진여원도 마찬가지였다. 어른들이 저마다 반갑다며 손을 내밀고, 잘생겼다며 진여원의 팔뚝을 매만졌다.

나한테는 잘생겼다는 소릴 안 하는 게 참 씁쓸하긴 했다. 이래 봬도 평균 이상인데 말이다. 그래도 왠지 조금 신선했다. 진여원이 당황하는 건 보기 드문 일이니까.

“그쪽이 형이고, 이쪽이 동생인가벼?”

아주머니 한 분이 진여원, 그리고 나를 가리켰다.

“아니여, 저분은 울 석연이 회사 대표님이여.”

봉고에 올라타는 엄마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어이구야! 대표면 사장님이시잖여.”

“글제. 엄청 큰 회사여. 우리 주말농장 하신다고 오신겨. 니들 과연 설 사람이 오겠냐고 무시했던 거 전부 사과혀.”

“우리는 얼른 갑시다. 비행기 시간 늦겠어요.”

아버지가 엄마를 다독였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흥분한 엄마를 진정시키는 사람은 언제나 아버지였다.

진여원은 사투리의 난타 속에서도 옅은 미소만 입에 걸치고 있었다. 저 인간 나한테는 저런 얼굴 보여 주지도 않으면서 동네 어르신한테는 서비스 한번 과했다.

“그럼 잘 다녀오세요. 우린 한 이틀 정도만 있다가 올라갈게.”

“그려, 음식 다 챙기 먹구 말여. 부족하진 않을 것이여.”

“예, 그럼 다들 잘 다녀오세요.”

더 잔소리를 하려는 것을 봉고의 문을 닫아 막았다. 봉고는 다시 엔진이 탈탈거리는 소리를 내며 좁은 비포장도로를 빠져나갔다.

내 혼을 쏙 빼놓은 동네 어르신들이 떠나고 나서야 후- 한숨을 돌렸다.

“정신없었죠?”

“나쁘지 않았어.”

“잘생겼다고 해서요? 좋으시겠어요.”

“박석연은 운도 좋아. 나 같이 잘난 남자를 잡고.”

그가 고개만 삐딱하게 해서 나를 쳐다봤다. 그래, 솔직히 두근거렸다.

진독사 당신 잘난 거 아는데 그렇게 입 밖으로 말하면 스스로가 민망하지 않나. 하긴 잘난 만큼 자신감을 갖는 건 좋다.

나는 그와 다시 대청마루에 나란히 앉았다. 그도 이제야 숨을 돌리는 듯했다.

“생각해 보니까 말이죠. 제가 더 대단한 거 아닙니까? 사장님 같은 사람을 잡았으니까요.”

“그렇게 해.”

지금 선심 쓰냐…….

따지기도 입 아파 뒤로 벌렁 누웠다. 저 위로 하늘을 이동하는 뭉게 구름이 보였다. 착시현상이라 느낄 만큼 아주 느릿느릿했다. 진정 오랜만에 느끼는 여유로움이었다.

나도 나중에 나이 들면 귀농해서 살까. 그럼 그때도 진여원이 옆에 있어 주려나……. 상상은 되지 않았다. 갑자기 하늘이 가려지는 대신 그의 얼굴이 한눈에 들어왔다.

“박석연.”

“왜……요.”

키스할 만큼 거리가 가까웠다.

“회사 때려치우고 밭이나 가꾸며 살까.”

눈을 한 차례 깜빡였다. 진여원이 나를 내려다보는 눈빛에는 농담기가 전혀 없어 보였다.

“진심 아니시죠?”

“나중에.”

대답하며 그가 내 옆에 드러누웠다. 키스를 할지 몰라 각오하고 있던 마음이 민망해졌다.

둘이 나란히 하늘을 올려다봤다.

나중에……. 늙어서 회사를 운영할 힘도 없어지면 혹시 그때 귀농하자는 소린가 싶었다. 과연 우리가 그때까지 이렇게 나란히 누워 있을 수 있을까.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지든 간에 그래도 지금은.

“하, 기분 좋다.”

팔을 넓게 벌려서 그의 가슴팍에 올렸다. 그가 자신의 심장 위로 내 손을 잡았다. 잔잔한 풍경과는 다르게 크게 박동하는 심장이 느껴지고 있었다.

***

하품을 하며 눈을 비볐다. 누워서 하늘을 바라보다 어느새 스르륵 잠이 들어 버렸다. 몸을 일으켜 옆을 내려다보니 진여원이 내 옆에서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바람이 마루를 휘감고 지나갈 때마다 그의 머리카락이 사락사락 흔들렸다. 이리저리 둘러봐도 흠잡을 데 하나 없는 얼굴이었다.

나는 그의 얼굴 위에 대고 손을 흔들었다. 그림자가 지는데도 그는 눈 하나 찌푸리지 않았다. 안방 다리를 하고 앉아 오른쪽 왼쪽으로 상체를 기우뚱거렸다.

깨우고 싶은 마음 반, 이대로 편히 자게 하고 싶은 마음 반이었다. 그때 진여원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고는 잠기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왜 웃어.”

“좋아서요.”

휘익, 불시에 그가 나를 잡아끌어 당겼다. 그의 몸 위에 엎어지는 것과 함께 입술이 겹쳐졌다. 맞부딪힌 입술의 얼얼함을 느낄 새도 없이 혀가 입 안을 파고들었다.

가슴 포켓에 꽂혀 있던 안경을 그가 옆으로 빼냈다. 나는 그의 몸에 찰싹 맞붙으며 올라타 윗입술을 혀로 간질였다. 하반신에 찌릿찌릿한 자극이 몰려왔다.

흥분한 진여원의 것이 내 허벅 다리에 문질러졌다. 동네 사람들 대부분이 제주도로 떠났을 테니 눈치 볼 것도 없었다. 아니지, 안 간 사람도 있을 텐데…….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상체를 떼어 냈다. 진여원이 떨어지지 못하도록 내 목덜미를 감싸 쥐었다. 그가 다시 나를 끌어당겼다.

어느새 지퍼를 열고 들어온 손이 내 성기를 세게 쥐었다. 흣- 고개를 돌려 대문을 바라봤다. 다행히 지나다니는 사람은 없었다. 어차피 밖에서는 잘 보이지도 않는 위치였다.

나도 그의 지퍼를 주욱 내렸다. 단단하게 발기한 그의 것을 꺼내 내 것과 함께 문질렀다. 비벼지는 것에 만족하지 못한 그가 한 데 맞잡고 거칠게 훑었다. 연한 살갗이 벗겨져 나가는 것만 같았다.

그의 선단에 내 귀두가 마구 비벼졌다. 예민한 부분을 계속해서 자극하자 짜릿한 전류가 손끝과 발끝에 몰려들었다. 고환도 같이 묵직해졌다.

하아, 좀 더 세게. 거기 비벼 줘요.

그의 턱에 대고 웅얼웅얼거렸다.

“밝히긴.”

습한 숨결이 흩어져나갔다.

“누가…… 할 소리를. 앗!”

그가 두 개의 성기를 하나로 감싸듯 거세게 쥐었다. 나는 낮은 탄성을 내지르며 그에게 몸을 내맡겼다. 진여원이 내 뒷머리를 눌러 제 입술에 닿게 했다. 빠르게 움직이는 아래와 같이 키스도 점차 짙어졌다.

“앗!”

그가 삽시간에 위치를 바꿔 나를 마루에 내리 눕혔다. 설핏 찌푸려진 진여원의 미간을 손을 뻗어 매만졌다. 마찰이 가속되며 스멀스멀 사정의 기운이 올라왔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다. 서로의 성기에서 정액이 터져 나왔다. 그가 귀두를 움켜쥐어 정액이 튀어 오르려는 것을 막았다.

아…… 안 돼……. 시원하게 쏟아 내지 못하는 느낌에 하반신이 달달 떨렸다. 싸야 돼요. 그의 셔츠를 움켜쥐었다.

진여원은 손안에 가득 받아 낸 정액으로 내 좆을 마찰했다. 가려움과 통증이 번갈아 찾아들었다. 미처 막지 못한 정액이 셔츠에 방울져 있었다.

그는 허리를 떼어 내며 젖지 않은 쪽 손으로 자신의 좆을 훑었다. 전화기가 놓인 테이블 옆에 놓인 두루마리 휴지가 보였다. 나는 옷이 더 더러워질까 봐 움직이지 못하고 거기로 손만 뻗었다.

진여원이 대신 휴지를 잡아서 손에 빙글빙글 감았다. 그가 대신 정액이 묻은 옷을 쓱쓱 닦아 주었다. 그래도 갈아입어야지. 정액은 세탁하지 않는 이상 잘 지워지지가 않았다.

몸을 일으키다가 뒤늦은 창피함이 몰려왔다. 깨끗한 시골 풍경 속에서 두 남자가 서로를 위로해 준 행동이 말이다. 한편으로는 부모님 몰래 야동을 본 청소년이 된 것도 같았다.

부모님이 없는 집에서 이런 짓을 하다니…….

나는 슬며시 머리를 드는 죄책감을 마음속의 망치로 내리쳤다. 혼자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진여원은 차에서 우리가 가져온 캐리어를 꺼내 왔다.

그가 마루에 캐리어를 펼쳐 놓더니 내게 셔츠를 던졌다. 폴랑거리며 내려오는 셔츠를 잡아 옆에 가지런히 내려두었다.

정액이 묻은 상의는 벗고 슬리퍼를 신었다. 생긴 게 꼭 목욕탕 슬리퍼 같았다. 나는 뒤늦게 열린 대문을 굳게 닫고 수돗가에 섰다.

옷을 갈아입던 진여원이 상체를 탈의하고 돌아다니는 나를 쳐다봤다.

“사장님은 안 씻으셔도 되겠지만, 전 누가 싸 댄 정액 닦아야 하거든요.”

묻지도 않았건만 변명하듯 내뱉었다. 수도꼭지에 연결된 호스를 잡고 속옷까지 벗었다. 수도꼭지를 돌리자 끼릭끼릭 소리가 났다. 찬물이 하반신에 와락 쏟아져 내렸다.

“으, 차거!”

발을 동동 구르며 아래를 닦았다. 비누가 보이지 않아 차가운 물로만 연거푸 헹궈야했다.

수도 펌프에 걸려 있는 수건으로 하반신을 가리고 마루까지 내달렸다. 물탱크에 담겨 있는 도시 물은 적당히 시원했지만, 지하에서 올라오는 시골 물은 얼음계곡 저리가라였다.

삽시간에 몸이 차가워져 어깨를 바르르 떨며 옷을 갈아입었다. 진여원은 손을 닦은 티슈를 쓰레기통에 휙 던졌다.

이 치사한 인간, 캐리어에 물티슈 있었으면 있다고 말을 하지! 누군 찬물로 씻었는데! 열어 둔 캐리어를 일부러 쾅 소리 나게 닫았다.

지퍼까지 다시 잠근 캐리어를 끌어다 건넌방으로 가져갔다. 방에는 얇은 인견 이불 한 채가 보였다. 베개도 하나였다.

아마도 저쪽 사랑방에 나머지 이불을 가져다 두셨겠지. 진여원이 나랑 같이 잘 거라는 생각은 전혀 못 하셨을 테니까.

방을 죽 훑어보는데 나무 서랍 위의 액자가 보였다. 저건 내가 고등학생일 때 찍은 가족사진이었다. 사진 안에서는 두 턱을 자랑하는 박석연이 멍청하게 웃고 있었다.

이 안으로 진여원이 들어옴과 동시에 나는 탁 소리 나게 액자를 덮고 서랍을 등졌다. 진여원이 내게 다가오자 거리가 점차 가까웠다.

나는 손만 뒤로 뻗어 엎어진 액자를 서랍 끝으로 자연스럽게 밀었다. 그러나 진여원의 손이 내 어깨너머를 휙 넘어와 액자를 낚아챘다.

“으앗! 안 돼요!”

진여원이 내 키보다 더 높게 액자를 들어 올렸다. 고등학생 박석연이 좀 전보다도 더 후덕하게 웃고 있는 것 같았다.

“동생이야?”

이 인간 다 알면서 물어보는 거다.

“…….”

“나중에 소개시켜 주지 그래.”

“여기서 한 15kg 찌면 만나실 수 있어요.”

진여원이 액자를 유심히 바라보며 피식거렸다. 동네 어르신들에게 보여 줬던 얼굴보다도 훨씬 매력적이었다.

“귀엽네.”

그가 내 손에 액자를 올려 주었다. 귀엽다니……. 진여원 취향 특이한 건 알아줘야겠다. 그가 액자에 계속 관심을 보이는 것 같아 서둘러 화제를 전환했다.

“아버지 자전거 타고 앵두나무 보러 가실래요? 여기서 좀 멀거든요. 그리고 나간 김에 인삼 밭도 좀 구경하고.”

어떠십니까? 하고 쳐다봤다.

그는 웃음기를 머금은 채 가늘게 눈을 접더니 도로 방을 나가 버렸다. 그가 사진에 금세 관심을 꺼 줘서 다행이었다.

나는 액자를 서랍 안에 고이 넣어 두었다. 물론 내가 과거처럼 뚱뚱해진다고 해도 그가 나를 버리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더는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나는 대청마루로 나와 홍시 스니커즈를 신었다. 그는 아버지가 세워 둔 자전거를 내 쪽으로 끌고 오고 있었다.

“잠시만요!”

신발 끈을 단속하고 서둘러 부엌으로 달려갔다. 김치 냉장고를 열어서 커다란 수박을 꺼낸 뒤에 칼을 챙겼다.

칼을 어떻게 가져갈지 고민하다가 아궁이 위에 놓인 신문지로 날카로운 부분을 여러 번이나 감쌌다. 진여원이 부엌 쪽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수박을 한 손에 안고 신문지에 싼 칼도 들고 나왔다. 자전거에 앉아 있는 진여원의 뒷주머니에 칼의 손잡이를 푹 꽂아 넣었다. 나는 흠 하고 그 뒷모습을 구경해 주었다.

“이렇게 보니 잘생긴 사이코패스 살인마 같습니다.”

“면회 와.”

“농담이라도 그런 말씀 마시죠.”

나는 자전거 짐받이에 뒤돌아 앉았다. 수박을 배에 얹어 단단히 한 손으로 잡고, 나머지 손은 벌린 사타구니 사이로 짐받이를 쥐었다.

“자, 출발합시다.”

“어디로.”

“이 동네 큰길은 하나예요. 샛길로 빠지지 말고 그냥 달리면 돼요.”

진여원이 자전거에서 내려섰다. 나를 태운 채로 자전거를 끌고 가 대문을 열었다. 다시 올라탄 그가 페달을 밟기 시작했다.

고르지 못한 땅에 엉덩이가 퉁퉁 튀었다. 게다가 녹슨 자전거의 체인이 기름칠을 해 달라는 듯 신음했다. 어쩌면 두 남자의 무게에 힘겨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럼에도 속도가 붙고 점차 푸른 대문이 멀어지고 있었다. 뒤를 보고 달리는 기분이 상쾌했다.

“떨어지지 않게 조심해.”

“어쩐 일로 제 걱정을 다 해 주십니까.”

“수박 말이야.”

그럴 줄 알았다. 구수한 시골 냄새가 향수를 자극했다.

우리가 달리는 길의 좌측은 철조망이 쳐져 있었다. 그 안의 광활한 숲은 옛날부터 누군가의 사유지라고 했었다. 그리고 오른쪽은 집과 밭들이 늘어서 있었다.

저기 최 씨 할머니의 인삼밭이 보이기 시작했다. 인삼밭의 차광막이 끝도 없이 줄지어 있었다. 다행히 인삼 농사를 잘하고 계신 듯했다. 어쩌면 최 씨 할머니는 돌아가시고 그 후손이 이어서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인삼밭을 지나자 산신령 같은 할아버지를 만났던 산의 입구가 나왔다.

진여원이 끼익, 그곳에서 멈춰 섰다.

“앵두나무 있는 데는 더 가야 돼요.”

“박석연이 무거워서.”

진득이……. 아픈 데를 찌르고 난리다. 주먹으로 수박을 내리쳤다. 소리가 찰진 걸 보니 속도 알찬 것 같았다.

나는 다시 속도가 붙는 자전거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안장을 꽉 쥐었다. 진여원에게 잔뜩 등을 기대고 다리를 왔다 갔다 했다.

이왕 무겁다고 한 거 더 힘들게 만들어 줄 생각이었다.

“저 하나만 좀 물어봐도 됩니까.”

대답이 없는 건 긍정이었다.

“윰 회사 이름 말입니다. 혹시 전…… 여자 친구한테서 따온 겁니까?”

재운 선배의 말이 내내 꺼림칙하게 남아 있었다. 도저히 묻지 않고서는 참기 힘들었다.

진여원이 그렇다고 하면 마음속에 돌탑이라도 쌓아 올려 인내심 수련이라도 해야 했다. 마음이 좁아서 진여원이 조금이라도 다른 이를 마음에 두는 것은 못 참겠으니까.

“박석연 착각 풀어 주려면 24시간도 부족하겠어.”

맞닿은 등이 울렸다.

“그럼 뭔데요.”

“몸값이 비싼 이름이긴 하지.”

몸값? 진여원이 전 여자 친구를 저렇게 지칭할 것 같진 않았다. 바퀴가 커다란 돌멩이를 밟고 지나가자 퉁 하고 엉덩이가 튀어 올랐다.

“작명 회사한테 질투해?”

“작명…… 회사…….”

나는 멍하게 중얼거렸다. 윰의 출처는 의외의 곳에서 나왔다. 하기는……. 회사 이름 짓는데 개인적인 사연을 담는 사람은 드물겠지. 사람 이름도 돈 주고 짓는 세상인데 회사명은 오죽하겠나.

이제 재운 선배의 말은 콩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곧이 안 들을 거다. 그러고 보니 나를 피라미드 회사로 꼬신 사람도 재운 선배였었다. 그걸 잊고 있었다니.

“어?!”

내가 소리를 크게 지르자 진여원이 자전거를 세웠다. 브레이크에서도 끼익 하는 소리가 났다.

“앵두나무가…… 없어졌네요.”

앵두나무가 서 있던 자리에는 나무 대신 정자가 놓여 있었다. 주인이 뽑아 버린 건가. 어릴 때는 멋모르고 몰래 따먹었지만, 지금은 그냥 구경만 할 생각이었는데…….

아쉬운 마음에 두 다리를 땅에 딛고 내려섰다. 진여원의 머리카락은 적당히 젖어 있었다. 나 진짜 무거웠나 보다.

나는 수박을 노크하듯 두드리며 말했다.

“저기서 먹고 가실래요?”

주인 없는 정자를 가리켰다. 진여원이 제 뒷주머니에서 쓱 칼을 꺼내 들었다. 밝아서 망정이지 어두운 데서 봤으면 잠재적 범죄자 취급을 받기에 딱 좋았다.

그와 나는 자전거를 정자 옆에 세워두고 신발을 벗었다. 나는 정자에 올라가 칼을 말았던 신문지를 풀었다. 정자 바닥에 그 신문지를 깔아 두고 수박을 반으로 쪼갰다.

쩌적- 살이 꽉 찬 수박이 갈라지며 주변으로 상큼한 향이 퍼져 나갔다. 반쪽을 또 반으로 잘라 내 그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나머지는 내가 쥐었다.

수박을 한입 크게 베어 물고 정자 밖의 풍경을 구경했다. 동네 사람들 대부분이 여행을 떠났는지 지나치게 고요했다.

여기저기서 나뭇잎들이 부딪히는 소리와 이따금 개 짖는 소리만 들렸다. 이렇게 있으니 신선놀음이 따로 없었다.

“엄청 좋죠?”

그에게 으스대듯 굴었다.

“그러네.”

말투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입에 담고 있던 수박씨를 퉤 하고 장난스레 뱉었다. 수박씨가 진여원의 턱으로 날아가 붙었다.

내가 해 놓고도 가슴이 철렁했다. 진짜 얼굴로 뱉은 게 아닌데 거기까지 날아갈 줄은 몰랐다.

“죄송……합니다.”

장난이 심했던 것 같아 수박 물을 삼키며 말했다. 그래도 이왕 뱉은 거 웃긴 모습이나 눈에 담아 둘 생각으로 그를 빤히 쳐다봤다.

웬걸, 턱밑의 수박씨가 점처럼 보였다. 게다가 금욕적인 느낌에 섹시함마저 풍기고 있었다. 수박씨를 붙이고도 웃기지 않은 인간은 진여원뿐일 것 같았다.

턱에 붙은 수박씨를 떼어 낸 진여원이 이번에는 내 턱을 들어 올렸다.

“복수하시게요?”

불안한 눈으로 올라간 고개를 내리려 했다.

“얼굴 대.”

“꼭 하셔야 합니까.”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연인 사이에도 통용되는 법칙이라는 말인가. 그의 진지한 얼굴을 보니 진짜 내 얼굴에 뱉을 생각인 것 같았다.

그래, 뱉어라 뱉어. 또 누가 아냐. 나도 진독사처럼 섹시한 점이 탄생할지.

눈알에 씨가 박히면 곤란하니까 턱을 빳빳이 내밀고 눈을 감았다. 눈을 감았는데도 얼굴에 그늘이 지는 게 느껴졌다.

화악- 수박씨 대신 아삭거리는 수박이 내 입 안으로 들어왔다. 갑작스러운 과일 키스에 나는 감았던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진여원의 입속에 있던 과일은 차가울 때보다 더 달콤하게 느껴졌다. 그가 턱 끝에 맺힌 과일 물을 핥아 올렸다. 그러고는 슬쩍 눈썹을 찌푸렸다. 그가 입 안에서 수박씨를 뱉어냈다.

“뱉는 방법도 가지가지야.”

저 씨도 내 입에서 옮겨 간 거였다. 이번에는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니 시침을 뚝 뗐다. 그가 복수하는 줄 알고 괜히 긴장했다. 안 그랬으면 더 진하게 키스할 수 있었는데.

툭, 툭, 투투툭. 머리 위로 무언가가 부딪혀 내려앉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올려 보니 정자의 지붕만 보일 뿐이었다.

나는 수박을 다시 한입 먹고 진여원의 어깨너머를 봤다. 햇볕은 여전한 가운데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자전거 안장도 이미 흠뻑 젖어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우산이라도 가져올 것을 그랬나. 날이 이렇게 좋은데 비가 올 줄은 산신령도 몰랐을 거다. 나는 수박을 내려놓고 가만히 내리는 비를 바라봤다.

빗줄기는 점차 더 굵어지고 뜨겁게 몸을 달구던 햇볕도 먹구름에 가려지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내릴 건가 본데요.”

걱정스레 말했다.

“이런 날 자전거 타 본 적 있어?”

그는 나와 달리 태평했다.

“보슬비 내리는 날은 있었죠.”

당신 뒤에 처음 탔던 날.

“그것보다 더 기분 좋을걸.”

진여원이 바지를 툭툭 털고 일어섰다. 남은 수박은 아깝지만 도로 가져갈 방도가 없었다. 나는 수박을 정자 밖에 있는 밭에 거름 대신 뿌렸다.

칼만 다시 신문지로 돌돌 말아서 바지 뒷주머니에 손잡이를 꽂았다.

진여원은 내리는 비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전거의 안장에 앉았다. 그의 넓은 어깨가 빗물로 금세 젖어 들어갔다. 이번에는 그의 뒤에 똑바로 앉아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마구 내리치는 빗줄기가 얼굴에 맞고 튕겨져 나갔다.

“꽉 잡아.”

진여원이 자전거를 굴리기 시작했다. 위에서 곧게 내리던 비가 사선이 되어 부딪혔다. 그와 내 몸은 굵은 비에 속수무책으로 젖어 갔다.

그의 허리를 껴안은 손이 물기로 자꾸 미끄러져 내렸다. 나는 손이 빠지지 않도록 깍지를 꼈다. 빗소리에 진여원의 듣기 좋은 목소리가 흘러들어 왔다.

“……라라 라라라라 날 좋아한다고.”

조르지 않아도 그가 알아서 노래를 불러 주고 있었다. 나는 그의 등에 뺨을 문댔다. 그리고 이어 나도 노래를 불러 나갔다.

“라라라라 라라라라 널 사랑한다고.”

깍지 낀 손에 웃고 있는 듯한 그의 울림이 느껴졌다.

우리의 위로 떨어지는 빗줄기가 사랑스러웠다.

그의 옷깃만 붙잡았던 보슬비 내리던 날과는 달리, 나는 그의 탄탄한 몸을 내 멋대로 끌어안았다. 시야는 더 뿌옇게 흐려지고 있었다.

“나에게 반했다고 넌 내게 말했지. 설레이는 이 마음 멈출 수 없어~”

나는 노래를 흥얼흥얼거렸다.

“음치야.”

바닥에 고인 빗물을 헤치고 달리던 진여원이 면박을 줬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재차 노래를 흥얼거렸다.

그가 커다란 느티나무 밑에서 잠시 자전거를 세웠다. 나뭇잎들이 비를 막아 주고 있었지만, 워낙 거센 소나기를 피하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자전거가 멈췄음에도 그를 안고 있던 팔을 풀지 않았다. 나는 그에게 조용히 말했다.

“마치……. 소나기 같네요.”

순식간에 사랑에 젖어 버린 우리도 마치 소나기 같았다. 피할 수 없이 다가온 소나기는 다시 한번 우리의 몸을 두드리고 있었다.

“동감이야.”

그가 느티나무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소나기를 즐기는 사람처럼 시원스럽게 빗속을 질러나갔다.

나는 그의 온기에 흠뻑 젖은 몸을 내맡기며 생각했다. 그리고 촉촉하게 젖은 입술을 열어 중얼거렸다.

역시, 사랑은 한소나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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