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여원 0
[스카우트 명단 보고서]
진여원은 헤드 헌터에게서 받은 스카우트 명단을 눈으로 훑어 내려갔다. 국내외 브랜드를 총망라하여 신진 디자이너들의 포트폴리오를 확인했다.
사소한 장식, 특이하지만 부담스럽지 않은 패턴 사용, 향후 미래까지 전부 계산 하에 스카우트할 인재를 결정해야 했다. 신생 브랜드이니만큼 스카우트에 성공하는 사례가 드문 것이 당연하겠지만, 진여원은 여태 눈여겨 봐둔 인재를 놓친 적이 없었다.
디자이너의 능력에 따라 값을 치른다. 그것이 윰의 모토였다. 진여원은 사진이 포함된 스카우트 명단 중, 단 한 장의 서류를 톡톡 두드렸다. 얼굴이 낯익다 했더니 역시나 대학 후배였던 녀석이었다.
진여원은 박석연의 이름을 확인한 뒤 그 서류를 옆으로 치웠다. 박석연의 서류는 스카우트가 불가능한 목록으로 넘어갔다. 과감한 디자인을 출시할 수 있는 인재가 될 테지만, 진여원은 박석연을 포기하는 쪽으로 마음을 굳혔다.
대학 때의 오해를 지금껏 안고 있을 것이 분명한 상대에게 스카우트를 권할 생각은 없기 때문이었다. 박희재를 생각하면 데려오고 싶기도 하지만……. 어떻게 할까. 진여원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박희재는 대학원 시절 진여원에게 조언가의 역할을 해준 행정실 직원이었다.
진여원도 처음부터 박희재와 말을 나누고 지낸 것은 아니었다. 그들이 가까워지게 된 것은 어느 날의 일이 있고 나서부터였다.
‘들었어요? 박 실장님 아드님이 전부터 게이라고 소문 파다하게 퍼졌다던데, 진짜인가 봐요. 아휴, 나 같으면 얼굴 못 들고 다니지.’
점심을 먹고 돌아오던 박희재는 행정실 문밖에 서서 들어가지도 못하고 서성거렸다. 하루 이틀 있는 일이 아니니 험담이 끝난 후에야 자리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때 자리에 앉아 작업을 하던 진여원은 그들을 향해 차가운 말을 던졌다. ‘일 안 하십니까. 남일 신경 쓰기 전에 본인 일부터 합시다.’ 진여원이 별 뜻 없이 내비친 말에 박희재는 더없이 마음의 위안을 받았다. 그리고 진여원를 낳아 준 생모가 암으로 투병을 시작한 것도 그즈음이었다.
친부에게로 간다면 행정실에서 일할 것 없이 호화스러운 생활을 누렸을 텐데, 진여원은 차라리 몸이 힘든 삶을 택했다. 박희재는 그런 진여원에게 주제넘은 충고를 단 한 번 건넨 적이 있었다.
‘성공하려면 뭐든지 이용해야 하죠. 남을 짓밟으란 소리는 아닙니다. 다만 지금 여원 군에게 주어진 것이 있으면 놓치지 않는 게 현명한 선택일 겁니다.’
진여원은 박희재의 그 말 하나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원하는 것을 이룰 때까지는 친부의 밑에서 지내기로. 투병 생활을 하는 어머니의 병원비도 필요한 상황이었다.
진여원은 가끔 아들인 박석연의 이야기를 꺼내는 박희재에게 미안한 감정을 가질 때가 있었다. 소문이 퍼지게 된 계기에 자신도 일조를 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진여원은 생각을 멈췄다.
스카우트 불가능 목록으로 빼 두었던 박석연의 서류를 다시금 끌어왔다. 체일 슈즈 정도면 썩 나쁘지 않은 브랜드였다. 입사한 지도 꽤 되어 보였고.
진여원은 무표정한 박석연의 증명사진을 내려다봤다. 진여원은 평소보다 오랜 시간을 서류를 보는데 투자하는 중이었다.
***
그 시각, 하재운은 진여원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아끼는 후배 박석연이 개인적인 사연으로 해고를 당했다는 말을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인재를 구하는데 열을 올리고 있는 윰이 떠오른 건 하재운으로선 당연했다. 박석연이 진여원을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지금으로서는 윰만한 회사가 없었다.
하재운은 전화가 연결되자마자 용건을 급히 쏟아냈다.
“여원아, 너희 쉬즈 디자인팀 사람 다 구했냐?”
[아직.]
“그럼 나 스카우트하는 거 대신에 다른 사람 좀 꽂아 넣자.”
이미 하재운도 스카우트 제의를 받은 터였다. 현재 진행 중인 기획만 아니었다면 하재운 역시 진작 이동했을 것이다.
[낙하산은 사양인데.]
“제트기 수준이야 걱정 마라. 그리고 너도 아는 사람인데 말이지…….”
[뜸 그만 들이고.]
딱 자르는 친구의 말투에 하재운이 혀를 찼다.
“박석연이라고. 일은 잘해. 감각도 뛰어나고.”
[박석연……?]
“걔 디자인 진짜 괜찮거든. 체일 슈즈에 있던 게 아까울 정도야. 포트폴리오 보낼 테니 확인해 볼래?”
하재운은 다른 말 다 빼고 박석연에 대한 칭찬만 늘어놓았다.
[…….]
진여원에게서 아무런 말이 없었다. 하재운이 다시 박석연의 칭찬을 늘어놓으려는 순간이었다.
[다음 주 중으로 면접 방문하라고 해.]
예상외의 즉답에 하재운이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로써 하재운도 마음의 짐을 덜었다. 과거에 박석연을 피라미드 회사로 끌어들였던 과오를 털어 내는 순간이었다.
좋은 회사를 연결시켜 주었으니 박석연도 더는 피라미드 회사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 것이라 여겼다. 물론 둘 사이의 문제는 하재운으로서는 크게 알 바가 아니었다.
하재운이 기분 좋게 씨익 웃었다.
“그래, 잘 생각했다. 그럼 면접 가라고 말한다?”
뚝, 일방적으로 전화가 끊어졌다. 어차피 한두 번 있는 일도 아니었기에 하재운은 개의치 않았다.
***
사표를 내겠다던 박석연이 회사 건물을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던 진여원은 그 등을 보고 브레이크를 잡았다.
회사를 올려다보는 등에서는 미련이 뚝뚝 묻어 나왔다. 대학 때와 변한 것이 없어 보였다.
진여원이 페달을 밟아 지나치려는 순간이었다. 건물에 머물렀던 박석연의 시선이 진여원에게로 이동했다.
예상대로 전과 달라진 건 없었다. 적어도 겉모습은. 그러나 지금 보이는 눈빛 하나만큼은 놀라웠다.
세월은 강산을 변하게 한다더니 박석연은 휘청대던 대학 시절과는 다르게 단단해 보였다.
“저기 사장님!”
박석연이 진여원을 불렀다.
“저…… 혹시……. 직원 구하셨습니까?”
적대감으로 뭉쳐 있던 박석연이 개인적인 감정보다는 현실적인 상황을 우선시하고 있었다.
“30분 뒤에 사장실로 와요. 박석연 씨.”
시건방진 눈이 진여원을 향했다. 진여원은 그 눈을 마주하며 말을 덧붙였다.
“아니면 연봉 협상 여기서 할 건가.”
진여원은 다시 페달을 밟아 박석연을 지나쳐 갔다.
원래부터 스카우트 명단에 있던 인재였으니 연봉은 부르는 만큼 맞춰 줄 생각이었다. 저 건방진 디자이너에게서 나올 디자인들도 궁금하고.
진여원은 주차장으로 향하며 중얼거렸다.
그때보다는 지금이 훨씬 볼만한데. 쓸 만하겠어.
자전거를 세운 진여원은, 저 자신이 기분 좋은 미소를 머금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화창한 하늘만 한번 올려다봤다.
자신의 전신이 누군가로 인해 흠뻑 젖게 될 거라는 것을, 그때의 진여원은 모르고 있었다.
[한소나기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