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박석연 4 (18/18)

***

이렇게 묵직한 감각은 아주 오랜만이었다. 그것도 하루 반나절이 지났는데도 엉덩이 안쪽뿐만 아니라 한창 장염에 걸렸을 때처럼 뱃가죽이 욱신욱신했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근육이 비명을 질러대니, 내 성대도 몇 차례나 앓는 비명을 냈다.

마음 같아선 휴가를 달라며 엄포를 놓고 싶었지만 입사 이래 장염 한 번, 엄마 수술 한 번으로 근무 성실도는 떨어졌다. 자세만 바꾸지 않으면 아무렇지 않으니 최대한 똑같은 포즈를 유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메일함을 열어 샘플을 택배로 보냈다는 김요한의 메시지를 확인했다. 직장인들의 비애인 월요병이 내게도 도졌는지 디자인 도식지만 내려다봐도 눈앞이 깜깜했다.

사실 월요병이라기보다는 아이디어 고갈 쪽에 가까웠다.

“석연 씨, 주말 사이에 얼굴이 반쪽이 됐어.”

곽일영은 해바라기가 크게 프린팅된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오늘은 조증이 도지는 날인가 보다.

“기를 뺏겼거든요.”

실컷 안에 싸 놓고서는 샤워하라며 닦달하던 진여원이 생각나 야속해졌다. 물론 한숨 자고 일어나니 이곳저곳 깨끗이 닦여 있긴 했었다.

진이 다 빠져 깊이 생각하지 못했는데, 진독사가 나를 닦아 줬을 생각을 하니 갑자기 입이 떡 벌어졌다. 몸 어디 할 곳 없이 다 봤을 것 아닌가. 이제 와 별걸 다 창피해한다. 엉덩이 구멍도 훤히 보여 줘 놓고서는…….

문득 앉아 있는 곽일영의 하반신으로 시선이 쏠렸다. 곽일영이 헤헤 웃으며 제 티셔츠 밑자락을 잡아 내렸다.

“예쁘지? 이거 해바라기 티셔츠 보자마자 사고 싶어서 엄청 혼났어. 백만 원이나 줬다?”

벌어진 입이 다물어질 새도 없었다.

“무슨 셔츠를 백만 원이나 주고 사요.”

자고로 여름 티셔츠는 장당 만 원 정도가 적당했다. 아니면 9,900원이든가.

“우리 구두도 그 정도 가격하는데 왜?”

“그……거야 그렇지만.”

명품 브랜드에서 일하는 직원은 보통 명품에 관심없음류, 지나치게 넘치는류로 나뉘었다. 체일 슈즈에 다닐 때 직원들이 명품에 미쳐 카드빚에 허덕이는 꼴을 자주 봤었기에 타산지석으로 삼았다.

물론 명품을 싫어한다고 말한다면 내 자격지심이겠지만, 티셔츠 한 장에 수표를 지불할 패기는 없었다.

“수석 디자이너 월급이 엄청난가 봐요.”

“엄청난지는 모르겠는데, 이거 여섯 장은 살 수 있어.”

곽일영이 티셔츠를 가리키며 제 월급을 까발렸다. 자연스레 생명수당과 잔업수당을 못 받은 게 생각나 버렸다.

테이블에 올려 두었던 격려금을 그냥 가지고 나오는 건데……. 후회막급이다.

덜컥-

사무실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노크도 없이 문을 열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사장실로 불려 갔던 이재화가 인자한 미소를 띠우며 안으로 들어왔다. 마치 내 면접을 봤던 때처럼 자애로운 상사의 이미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재화의 뒤로 키가 190cm는 되어 보이는 남자 하나가 따라 들어왔다.

“주목!”

그래봐야 두명 뿐인데 이재화가 주목을 외쳤다.

“우리 부서에 새로 들어온 신입사원입니다. 자, 인사해요.”

신입사원을 기용한다는 말은 전에 전체 미팅에서 들은 기억이 있었다. 이재화의 등 뒤로 얼굴 하나가 올라와 있는 장신의 남자가 허리를 반듯이 굽혀 인사했다.

“하이, 안녕. 잘 부탁합니다. 새미라고 불러 주시면 됩니다.”

새미? 유학파인가? 남자는 곽일영의 해바라기 무늬에 버금가는 큼직한 장미꽃 셔츠를 입고 있었다.

커다랗고 붉은 장미꽃에 매달린 줄기가 셔츠의 밑단까지 죽 그어져 있었다. 줄기 때문인지 곽일영 것보다는 좀 더 깔끔해 보였다.

곽일영이 인사를 하는 새미의 셔츠를 본 다음에 제 것을 내려다봤다. 새미도 곽일영의 셔츠를 눈여겨보더니 눈에 부릅 힘을 줬다. 마주친 두 남자의 눈에 파팟 하고 전류가 튀었다. 필시 기분 탓이리라.

“이 친구는 스물여덟 살이고, 회사는 우리 윰이 처음이랍니다. 외국물 먹고 온 친구라 한국말이 좀 짧을 수도 있으니 잘들 대해 줘요.”

이재화가 곽일영과 나를 두고 장황하게 연설했다. 영어 이름이 샘(Sam)인가 보지? 새미는 애칭이고. 누가 알려주지 않은 호칭에 대해 곱씹고 있는데, 새미가 이쪽으로 걸어왔다.

“웨얼, 나 어디 앉아요.”

발음이 좀 이상해서 그렇지 한국말은 곧 잘하는 것 같은데…….

“석연 씨 옆자리에 앉아요.”

이재화가 내 오른쪽 빈 책상을 가리켰다. 나는 빈자리에 쌓아 두었던 잡지책과 디자인지들을 한데 끌어모아 내 자리에 옮겼다.

곽일영이 어울리지도 않게 텃세를 부리는 상사처럼 새미를 한껏 노려봤다. 내 옆에 앉은 새미가 씨익 하고 웃었다.

새미는 곽일영의 시선은 가뿐히 무시하더니 나를 향해 손을 쓱 내밀었다. 나 역시 악수에 화답하며 잘 부탁한다는 인사를 건넸다.

“여기 부서 사람 완전 없어요.”

새미가 당연할 만한 말을 던졌다.

“예. 저도 들어오고 나서 알았는데 사회 부적응자 부서라네요.”

외국인 특유의 제스처로 어깨를 들썩였다.

“반대로 능력자 집단이란 소리. 오케이.”

제 좋을 대로 해석한 새미가 더 짙게 웃자, 숨겨져 있던 보조개가 푹 파였다. 생긴 건 나쁘지 않은데 웨얼이라든지, 하이라든지 좀 재수없는 말투로 들려서 인기는 없을 것 같았다.

“새미 씨 들어오기 전에는 석연 씨가 막내였으니까 잘 챙겨 줘요. 드디어 막내 탈출이네요. 하하.”

이재화는 요즘 옴므 부서 여자친구와 잘되어 가는지 함박웃음 만발이었다.

“재수 없어.”

곽일영이 입을 삐죽거렸다.

“왜 그래요.”

조용히 물었다. 곽일영이 의자 바퀴를 끼릭끼릭 끌어와 내 옆에 찰싹 붙었다.

“내 티셔츠가 예뻐, 쟤 티셔츠가 예뻐?”

“둘 다 예뻐요.”

일이야, 나야. 그 물음에 버금가는 어려운 질문이었다. 빈말을 던지자 곽일영의 심기가 더 불편해졌다.

“내가 다음 주에 저거 사려고 했단 말이야.”

“같이 입고 다니면 되죠. 같은 부서 커플티 좋네요.”

“…….”

곽일영이 윗니로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새미는 이유도 모를 곽일영의 적대적인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제가 쓸 자리를 정리했다.

아아, 느낌이 온다 와. 곽일영과 새미의 관계가 그리 우호적이지 못할 거라는 게. 가뜩이나 사람도 적어 괄시당하는 부서인데 삐걱이면 곤란하다.

“석연 씨? 그렇게 부르면 돼요?”

새미가 미처 수거하지 못한 내 디자인지를 내밀며 말했다.

“예, 저도 입사한 지 오래 안 돼서 아직 대리는 못 달았거든요.”

“그래도 석연 씨는 경력자잖아.”

의자를 끌고 자리로 돌아간 줄 알았더니 곽일영은 아직도 내 옆에 붙어있었다.

“뭐, 경력직으로 이동한 건 아니니까요.”

탁, 자리로 돌아가려 방향을 튼 곽일영의 의자가 내 의자에 부딪혔다. 지이잉- 허리부터 목덜미까지 다이렉트로 전기가 내달렸다.

책상에 주먹을 쥔 손을 올리고 저릿한 감각이 사라지기를 기다렸다. 오랜만에 섹스를 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 대단한 걸 쑤셔 박는데 그 누가 멀쩡할 사람이 있겠나. 통증이 한바탕 지나가자 이마에 솟은 식은땀이 느껴졌다. 축축한 이마를 티슈로 북북 닦아 냈다.

새미의 자리에서 가져온 잡지책을 책상 빈 공간에 차곡차곡 쌓아 올렸다. 자료실로 가져가면 그만인데 지금은 일어나기도 싫었다.

가장 위에 올려 둔 잡지책이 미끄러지며 내 앞으로 툭 떨어졌다. 저절로 펼쳐진 잡지책을 닫으려는데, 어느 한 곳에 시선이 고정되어 버렸다. 단순한 광고 페이지였다.

펄감이 가미된 황금색 메탈릭 립스틱을 모델이 제 입술에 대고 있었다. 립스틱 색으론 그리 추천하고 싶지 않았지만 색감 자체는 특이했다.

필기도구 통에서 얼른 커터 칼을 꺼냈다. 구두의 색감으론 괜찮을 것 같아서 서둘러 그 페이지를 잘라 냈다. 한 건 물었다 하며 오려 낸 종이를 보고 씨익 웃었다.

“막 바뀌어요.”

새미가 불쑥 말을 붙여왔다.

“뭐가요.”

“화냈다, 지쳤다, 놀랐다, 웃었다. 그것도 1분 동안 일어난 일 같아요. 엄청 배리어스해요.”

내 표정이 다양하다는 뜻인 줄은 알아들었다.

“예에, 제가 원래 다이내믹한 남자라 이해하세요.”

새미의 말투를 고스란히 따라 하며 대답했다. 그리 불쾌해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오히려 제 말투를 인정받은 것 것처럼 당당해 보였다.

책상 정면 보드판에 오려 낸 잡지를 압정으로 꽂았다. 뒤에서부터 돌아가는 선풍기에 종이가 팔락팔락거렸다. 건물 에어컨 온도를 마음대로 내릴 수 없으니 이재화가 그의 집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지금 같은 더위에는 18도로 낮춰도 모자랄 판국인데, 국가에서는 일꾼들의 고충 따위는 염두에 두지 않고 전기세 아끼라며 난리였다.

재능이란 자고로 좋은 작업 조건에서 꽃피는 법이었다. 학교만 해도 학생들이 더위에 허덕여 공부에 열중하지 못하면 미래적으론 국가의 손해다.

이젠 더위 때문에 국가의 안위를 걱정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지금 눈앞의 걱정은 달리 있는데 말이다. 신상 디자인, 그 글씨가 머릿속에서 경고음을 울리며 돌아다녔다.

현재 연애는 뻥 뚫린 고속도로, 일은 꽉 막힌 귀성길 도로였다. 아니지, 아직 연애도 뻥 뚫렸다고 하긴 뭐했다.

어제만 해도 진여원은 밤늦게 집으로 가는 나를 잡지도 않았다.

자고 가라는 말을 하면 됐습니다, 저도 저희 집 있습니다. 하고 멋있게 오려고 했건만 그는 현관에서 팔짱을 끼고 피식거린 게 다였다.

그 집에서 나를 열렬하게 배웅한 건 개나리와 개살구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왜 그 두 녀석들을 데려온 건지는 묻지 못했다.

달칵달칵, 마우스를 놀려 메신저 창을 열었다. [진득이 on] 그가 접속해 있다는 표시가 떠 있었다. 말을 할까 말까 한 3초간 고민하다가 자판을 두드렸다.

[근데 개나리, 개살구 왜 데려오신 겁니까. 그냥 궁금해서 묻는 겁니다.]

쓰고 나니 용건도 없는데 어떻게든 말을 붙여 보려는 작업남이 된 것 같았다. 게다가 답변은 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설마 한 번 잤다고 관심 없어졌으니 버리겠다 이거냐!

반짝, 새 글이 떠올랐다.

[난 언제 박석연이 신상을 줄지가 궁금한데.]

적어도 내게 관심을 끊은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기분이 좋지도 못했다. 인간이 아픈 데를 찌르고 있어!

[곧이요. 기대하시죠.]

어차피 답변이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기에 메신저 창을 꺼 버렸다.

“곽 대리, 석연 씨, 새미 씨.”

이재화가 박수를 짝짝 쳐서 주위를 환기했다.

“이번 신상 말입니다. 어떻게든 다음 주까지 세 켤레는 통과시켜야 합니다. 기존 인원들은 디자인 고갈 상태니 새미 씨가 힘 좀 써 봐요.”

새미는 조금 부담스럽네요, 하면서 뺨을 긁었다.

“그런데 저번 ‘페어리&팜므파탈’은 어느 부서에서 제작한 거죠?”

새미가 그 부분에 흥미가 있다는 듯 굴었다.

“우리 곽 대리랑 석연 씨 작품이죠. 그 이후론 영 진척이 없어서 문제지만요.”

이재화도 누가 진독사 부하 아니랄까 봐 독설이 일취월장했다.

“오~ 리얼리? 엄청 예쁘던데. 내가 여자였으면 꼭 겟했을 거예요.”

새미가 엄지를 척 들어 보였다. 곽일영은 새미의 칭찬에도 여전히 티셔츠에 앙심을 품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일단 억지로라도 손에 연필을 쥐었다. 뭐라도 그리는 시늉이라도 해야 했다. 신입 사원까지 들어온 마당에 슬럼프에 빠진 걸 드러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평소에 생각나는 대로 소재를 그려 두는 스케치북을 펼쳤다. 그러고는 서류 가방을 열어 가져온 호박 양갱을 꺼냈다.

과자나 빵 종류라면 너도나도 달라고 했겠지만, 양갱은 남에게 빼앗길 일이 거의 없었다. 이 맛있는 걸 왜 몰라주는지 모르겠다. 뭐, 뺏길 일은 없어서 나야 좋지만.

팥 양갱은 집에서만 먹을 생각으로 그의 집에서 돌아오자마자 냉장고에 넣어 두었다. 국화꽃 함은 그가 준 신발 상자 옆에 가지런히 놓아두었고.

하나둘씩 내 집에 진여원의 흔적이 늘어나고 있었다. 내 책상 밑에 놓인 홍시 스니커즈도 그의 흔적이었다.

기분 좋게 양갱 비닐을 까서 입에 넣었다. 고구마 맛을 닮은 호박이 달달하게 입 안으로 퍼져나갔다. 흘끔, 홍시색 스니커즈를 내려다보려는데 새미가 내 손의 양갱을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하나 드릴까요?”

“왓, 그거 뭔데요.”

“양갱이요.”

외국물 먹어서 양갱도 모르나.

“오, 그거 팥 들어간 거. 난 별로예요.”

“그럴 줄 알았어요.”

나는 보란 듯이 양갱을 반 잘라 먹었다.

“아, 그리고 얘기 들으셨는지는 모르겠는데 수영장이랑 헬스장, 옥상의 테니스장, 전부 무료예요. 카페테리아 메뉴는 사내 직원들에게는 전부 반 가격이고요.”

“땡큐~ 다른 것들도 천천히 알려 주세요. 직장 퍼스트라서 많이 부족할 거예요.”

나도 입사 후 한 달 정도 지나서 깨달은 사실이 있는데, 우리 회사 카페테리아는 일반인들도 출입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사원증을 목에 걸고 있느냐 아니냐로 사내 직원과 일반인이 구별됐다.

새미는 신입의 마음가짐답게 목에 사원증을 걸고 있었다. 원래 짬밥 좀 되는 인원들은 갑갑해서 벗어 버리기 일쑤였다.

넥타이보다는 낫지만 요즘 같은 더위에는 가느다란 끈 하나도 찝찝함을 더하곤 했다. 새미의 사원증에서 무심히 시선을 떼려는 순간이었다. 순간 세 글자가 내 눈을 휘어잡았다.

사원증에 박힌 이름 석 자 때문이었다. [장새미] 이름이 Sam이 아니라 진짜 새미였다. 다소 놀란 내 표정에 새미가 왜 그러냐며 와이? 라는 말을 건넸다.

“외국 어디에서 살다 오셨어요?”

“뉴욕이요.”

그러시군요. 고개만 작게 끄덕였다.

“근데 왜 한국을?”

유학파라면 국내가 아닌 해외 브랜드 쪽으로 입사 지원을 했을 텐데, 의아했다.

“우리 패밀리가 전부 한국으로 돌아왔거든요. 여기 오너랑 한 약속도 있었고요.”

여기 오너라면 진여원 아닌가.

“오너가 회사 차리면 입사하기로 약속 했었거든요. 그때는 농담인 줄 알았는데 스피드하네요.”

“그렇군요.”

좋겠다, 장새미는. 스카우트도 받고. 나보다 연봉도 센 거 아닌가 모르겠다. 그때 괜히 허세부리지 말고 5천을 불렀어야 했는데…….

진여원에게 당신 나 좋아하니 월급 좀 팍팍 올려 주쇼- 라고 말해 볼까 하다 독설만 맞고 KO당할 장면이 그려지는 바람에 마음을 접었다.

옆에 앉은 새미는 회사에 적응하기도 전에 작업을 시작하고 있었다. 흘끔 보자 엄청 빠른 손놀림으로 디자인을 그려 나갔다.

새미는 구두 모양이 아닌 패턴을 그리고 있었다. 박음질을 해야 구두가 탄생하는 평면 패턴이었다. 특이하네. 신기해서 구경하고 있는데 새미가 손은 여전히 움직이면서 나를 쳐다봤다.

“블랙, 블랙.”

내 눈을 보며 본토 발음으로 검정을 외친 새미가 볼펜으로 발등 패턴 부분을 동글동글하게 칠했다. 일사천리에 스케치를 끝내더니 그걸 옆으로 밀어 두고는 구두를 그려 나갔다. 보아하니 패턴을 연결시킨 구두였다. 공간 지각능력의 천재인가.

곽일영을 이은 또 다른 괴짜의 탄생인 듯했다. 갑자기 내 왼쪽 팔을 곽일영이 잡아끌었다. 왜 그러냐며 입 모양만 움직이자 곽일영이 눈썹을 갸륵하게 만들었다.

“나한테만 관심 가져 줘.”

“누가 보면 곽 대리님이 저 짝사랑하는 줄 알겠어요.”

농담조로 말했다.

“사랑해!”

“제 발을요.”

곽일영이 고개를 연거푸 끄덕거렸다. 나는 의자를 천천히 뒤로 밀었다. 하도 앉아만 있었더니 엉덩이가 축축했다.

갑작스러운 충격만 오지 않으면 다행히 걷는 데 무리는 없었다. 마치 근육통에 걸린 몸을 쿡 찌르면 아프지만, 가만히 있으면 아무 느낌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곽일영과 새미가 동시에 나를 올려다봤다.

“커피 좀 뽑으러 갑니다.”

내가 자리에서 비켜서자마자 곽일영 vs 새미 구도의 티셔츠 배틀이 시작됐다.

내가 보기엔 둘 다 이상한 셔츠구만.

문으로 걸어 나가며 입고 온 내 셔츠를 내려다봤다. 곰돌이가 하트 풍선을 들고 V를 그리고 있었다. 쇼핑몰 모델이 입은 모습을 보고 대충 장바구니에 담은 것이었는데, 문득 곰돌이 무늬가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뭘 입으면 어떠냐 싶어 슬리퍼만 죽죽 끌었다. 설상가상으로 머신이 있는 회의실에는 이용 중이라는 팻말이 걸려 있었다. 이왕 나왔으니 커피를 포기하고 사무실로 돌아가기는 아쉬웠다.

때마침 2층에 머물러 있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1층으로 내려갔다. 욱신대는 허리를 최대한 바짝 세우고 카페테리아로 다가갔다.

사원증을 걸고 오지는 않았지만 이미 직원과 안면이 있기에 주문하는 데 문제는 없었다. 계산서에 이재화 팀이라고 체크하고 아이스 카푸치노를 주문했다.

오늘따라 일반인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수두룩했다. 어쩌면 다른 팀에 들어온 신입사원들일 수도 있겠지.

사각 얼음이 동동 뜬 카푸치노를 손에 들고 음료가 진열된 냉장고를 쳐다봤다. 꼭대기 칸에는 포카리스웨트가 빡빡하게 들어차 있었다.

그가 생각나 버리는 바람에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시원한 포카리를 진여원에게 사주고 싶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갑에만 돈을 넣고 다니니 동전 한 푼 나오지 않았다.

물론 우리팀 앞으로 달 수도 있었지만, 내 돈으로 직접 사는 게 아니면 의미가 없었다. 다시 올라갔다가 내려올까 고민하며 뒤를 돌았다.

코끝에 까슬까슬한 셔츠가 스쳤다. 뒤에 있는 사람과 이렇게 가까웠는데도 몰랐던 걸 보니 내 몸 상태가 심히 불량한 것 같긴 했다.

손바닥으로 코를 문지르며 상대를 올려다보는데 놀랍게도 진여원이었다. 그는 냉장고의 문을 열어 내 머리 위에서 포카리스웨트 하나를 꺼내 들었다.

캔에 맺혀 있던 물방울이 또록 하고 내 정수리에 떨어져 내렸다.

“식사는 하셨습니까.”

직장인들의 빈말 공동 1위는 좋은 아침입니다. 식사는 하셨습니까? 였다. 진부하지만 상사에게 할 말은 그것뿐이었다. 여기서 너 때문에 내 엉덩이가 아작 났다! 할 수는 없으니까.

“박석연 씨는.”

주말 내내 나를 박석연이라 부르던 이가 시침을 뚝 떼고 ‘씨’ 자를 붙이니 기분이 묘했다. 물론 어투는 여전히 오만불손했다.

“먹어야죠.”

진여원이 나를 빤히 쳐다보며 캔의 뚜껑을 땄다. 재운 선배도 카운터에서 무언가를 주문하고는 내 쪽으로 다가왔다. 아마 둘이 같이 어디를 다녀왔다거나 대화를 나눈 듯했다.

대표와 이사가 카페에 출현하자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뭘 알 수 있냐면 저기 딱딱하게 긴장하고 있는 낯선 사람은 신입사원이고, 제 할 일만 하는 사람들은 윰 사원들이 아니라는 것.

“우리 석연이 냄새 맡고 왔어?”

“무슨 냄새요?”

재운 선배가 싱글싱글 웃었다.

“밥 냄새.”

사료 냄새가 아닌 게 어디냐.

“무슨 밥이요?”

“빨리 올라가서 사장님하고 잘생긴 이사님하고 식사하고 온다고 전해.”

재운 선배가 내 등을 휙 밀었다. 앞으로 밀려나자 등줄기에서 찌릿하고 반응이 왔다. 이를 악물고 손에 힘을 주자 투명 플라스틱 컵의 카푸치노가 출렁거렸다.

캔에 가려진 입술은 보이지 않지만, 웃고 있는 것도 같았다.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가슴이 부글부글 끓었다.

“하 이사, 함부로 만지지 마. 문다.”

이제 보니 날 놀리는 웃음이 아니라 기분 나쁨을 내포한 가짜 웃음이었다.

뭐야, 진여원. 재운 선배가 내 등 밀었다고 한 마디 해준 거냐? 그래도 아직은 용서 못한다. 집에 가는 나를 붙잡지 않은 죄는 크다.

“신입사원도 왔으니 그 친구랑 같이 먹을게요.”

“오, 이거 봐라. 감히 이사님이 권유하는데 어딜 내빼. 얼른 올라갔다 와.”

사실 점심이야 누구와 먹어도 상관없지만 올라갔다가 내려오기가 싫어 거절한 거였다. 그럼에도 두 번 거절할 이유는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그럼 다녀와서 말씀드려도 돼요. 먹으러 가요.”

먼저 입구로 나서려는데 진여원이 내 발을 가리켰다.

“그 꼴로?”

그가 내 삼선 슬리퍼를 시선으로 찔렀다. 종꽃 신발에 이어 두 번째였다. 저 잘빠진 주둥이가 생긴 것만큼 예쁜 말만 내뱉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긴 그러면 진여원이겠나.

“갈아 신고 오겠습니다.”

슬리퍼를 끌며 엘리베이터로 걸었다. 강아지, 뒤뚱거리는 게 진짜 새끼 강아지 같네. 재운 선배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지만 애써 무시했다.

엉덩이에 힘을 팍 주고 걸음을 옮겨봤다. 어째 몸에 힘을 빼고 있는 것보다 훨씬 편해졌다. 사무실로 돌아가 팀원들에게 ‘사장, 이사’와 밥을 먹고 온다고 하니 그 누구도 부러워하지 않는 눈치였다.

나도 선후배 사이만 아니었다면 그리고 진여원이 전 같이 싫었다면, 점심 먹자는 소리에 손사래를 쳤을 것이다.

타이밍이 나쁜 건지 좋은 건지 오늘은 진여원 작(作) 홍시 스니커즈를 신고 왔다. 부드러운 운동화 안에 발을 넣고는 다시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진여원과 재운 선배는 로비 정문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 다 따라오라는 소리도 없이 걷기 시작했다. 나도 쪼르르 그들의 뒤를 따라갔다.

누가 보면 대표들에게 한 소리를 듣는 부하 직원의 쓸쓸한 뒷모습으로 오해할 법했다. 허준성이 보고 또 헛소리를 지껄일지 모르기에 허리를 펴고 당당하게 걸었다.

묵직한 통증도 버티다 보면 곧 익숙해질 것이다. 회사 오솔길을 걸어 나가며 둘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엿들을 생각은 아니지만 들리는데 귀를 막을 수는 없었다.

“겨울 커버지 나온 거 봤는데 엄청 괜찮더라. 10월호에 실어 달라고 했는데 너무 이르진 않겠지?”

“그것도 늦어.”

“뭐가 늦냐. 10월이면 반소매도 입는구만.”

“앞으로는 신상 작업 더 일찍 들어갈 거니까.”

“아, 그래. 그렇지. 우리 강아지는 알고 있어?”

귀만 연 채로 부지런히 뒤를 쫓고 있는데 재운 선배가 내게 물었다.

“말 안 해 주셨으니 모르는데요.”

걸음이 조금 늦춰졌다. 나 역시 재게 놀리던 발걸음에 작은 여유가 찾아왔다.

“이번 신상 끝나면 바로 내년 상반기 디자인 들어가고 그다음은 바로 하반기. 스케줄 빡빡하게 진행될 거야. 하 이사님이 왔으니 더 앞서가는 윰이 된 거지.”

매년 3월이 되면 각 잡지마다 한 해 트렌드의 큰 줄기는 발표되는 편이었다. 이미 십수 년 전부터 업계에 자리를 잡은 해외 명품 브랜드들은 1년 치 신상을 전년도부터 작업하기도 했고.

윰은 이제 설립된 지 1년도 안 된 브랜드였다. 진여원이 무리수를 둔다고 따지고 싶지만, 어쩐지 저 인간은 절대 실패 없는 경영을 할 것만 같았다.

스케줄이 빡빡해진다면 결국 직원들만 죽어나는 꼴이었다. 진독사, 아주 뼈까지 우려먹어라.

“다 들려.”

진여원이 나를 훑어봤다. 설마 속으로 생각한 게 입 밖으로 나갔나 싶었다. 그럴 리가 없지. 여전히 내 입은 꾹 다물려 있었다.

“우리 석연이 이번 신상으로 페어리 같은 것 좀 한번 내놔 봐. 강아지 소개시켜 준 이 선배 어깨에 힘 좀 주게.”

“페어리는 그냥 어쩌다 나온 거라서요.”

“그래? 플랫슈즈도 그렇고 우리 석연이 순수 디자인의 대가인 줄 알았지.”

재운 선배와 몇 마디 주고받는 동안 무심히 앞만 보던 진여원이 말했다.

“디자인 주인은 팜므파탈에 가깝지.”

설마 진여원의 눈에는 내가 저항할 수 없는 매력을 가진 섹시한 남자로 보인다는 소린가?

“저한테 치명적인 매력이 있나 보죠?”

나는 농담을 응수하듯 툭 내뱉었다.

“넘치니까 잘 막아.”

안경 안의 진여원의 눈이 묘하게 접혔다. 순간 심장이 덜컹했다. 내가 섹시하긴 개뿔, 진여원이 옴므파탈의 화신같이 느껴졌다.

“그렇지 우리 석연이 매력이 넘치다 못해 흐르지. 크흐, 잔차도 물어뜯는데 말이야.”

다행히 재운 선배가 있어 심장이 마구 난동을 부리지는 않았다. 나는 두 남자의 동시 공격에 입이 조개가 됐다. 재운 선배가 괜히 진여원 친구가 아니겠지.

그 둘이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른 채 나는 다시 다리만 바삐 놀렸다. 그러다 멈춰 선 가게 앞에서 얼이 빠져 간판을 올려다봐야 했다.

[천국 김밥]

중역들하고 하는 점심이니 솔직히 성대한 만찬쯤은 기대했었다. 이게 웬걸, 내 돈으로도 충분히 사 먹을 수 있는 김밥집이었다. 돈 많은 놈들이 더 하다는 이야기는 토씨 하나 틀린 것 없었다.

약간의 실망감을 안고 가게로 들어가 4인석 테이블로 향했다. 진여원과 선배가 마주 보고 앉는 바람에 어디에 앉아야할지 고민이 됐다.

진여원과 아이컨택이 되는 위치보다는 옆이 났겠지 싶어 그의 옆에 털썩 앉았다. 재운 선배가 수십 종의 메뉴가 적힌 메뉴판과 펜을 내게 내밀었다.

별 고민 없이 치즈 라볶이, 참치김밥, 고구마 돈가스에 체크를 하고 선배에게로 돌렸다. 선배는 만둣국, 진여원은 순두부찌개였다. 다들 단품으로 먹는데 나만 여러 종류를 시킨 것 같아 민망해졌다.

어차피 회사도 먹고살자고 다니는 건데 뭘 신경 쓰나. 나는 얼음이 다 녹아 희석된 카푸치노를 테이블 끄트머리에 올려 두었다.

“박석연 씨는 욕심도 많아.”

진여원이 주문서를 제출하는 내게 말했다. 내가 시킨 거 그래 봐야 만 원 조금 넘는다.

“사장님은 쪼잔하시네요.”

“진짜 너희 뭐냐. 하하, 웃겨 죽겠다. 진 사장 왜 이렇게 우리 석연이 건드려. 그러다 네가 물린다?”

잘한다 재운 선배! 속으로 응원했다.

여태껏 내 감정을 깨닫지 못했다면, 저 인간 볼 때마다 심장이 벌렁거리는 게 울컥울컥 화가 나기 때문이라고 여겼을 거다.

“이사님 말씀대로 물리면 꽤 아프니 조심하시죠.”

“그 정도 상처쯤이야.”

내가 물어 봐야 흠집만 조금 남고 말 거 같냐? 속으로 구시렁거리는데 진여원이 내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실컷 물고 뜯어봐.”

진여원이 내 입술로 자신의 손을 가져왔다. 순간 나도 모르게 그의 잘빠진 손가락을 콱 깨물 뻔했다.

진여원이 검지와 중지를 튕겨 내 입술을 톡 쳤다. 인상을 확 쓰고 손으로 입을 가렸다. 동시에 우리가 주문한 음식들이 푸짐하게 차려지기 시작했다.

나는 아릿한 아랫입술을 윗니로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는 수저로 순두부찌개를 성의 없이 휘졌더니 말했다.

“말랑말랑하네.”

그러면서 시선은 내 입술을 향해 있었다. 너희들 대체 뭐냐? 그런 표정으로 재운 선배가 흥미진진한 눈빛을 던졌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뻑뻑한 참치김밥을 입에 욱여넣었다. 이어 라볶이의 면발을 강탈당하기 전에 누구보다 빨리 젓가락을 놀렸다.

먹는 것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했다. 진여원이나 재운 선배와 눈이 마주치지 않으려면 말이다.

***

내가 채 밥을 다 먹기 전에 재운 선배는 전화를 받고 먼저 일어섰다. 선배의 만둣국은 이미 빈 그릇이었다. 왜 전에도 이런 식으로 진여원과 둘만 남은 적이 있지 않았나.

그때와 달리 달라붙어 앉아 있으니 괜히 그를 더 의식하게 됐다. 그가 수저를 움직일 때마다 팔이 내게 맞닿았다가 떨어지길 반복했다.

나는 돈가스 속에서 흘러내린 고구마를 수저로 긁어모았다. 돈가스 소스와 어우러진 단 고구마가 입 안에서 질척하게 녹아들었다.

흘끔 진여원을 보자 그는 내가 떠 온 물을 마시고 있었다. 슬슬 일어나려는 것 같아 나도 따라갈 준비를 했다. 진여원은 가자는 소리도 없이 일어나서 계산을 마쳤다.

그 사이 내가 먼저 문을 열고 나가 서 있자 그가 뒤따라 나왔다. 부드러워 보이는 진여원의 머리카락이 햇빛에 사락사락거렸다.

만져 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손가락을 구부려 참아 냈다. 뒤따라 걷던 조금 전과는 다르게 그와 나란히 걸었다. 서로의 걸음도 어쩐지 더 더뎌진 것만 같았다.

“어제 저 보내고 푹 주무셨나 봐요. 전 식은땀 흘리면서 혼자 걸어갔는데.”

언제까지고 그는 말이 없을 것 같아 내가 먼저 건넸다. 진여원은 앞을 본 채로 대답했다.

“섭섭해?”

“제가 왜요.”

“난 섭섭한데.”

진심이 담긴 말투에 놀라 고개를 올렸더니, 그도 나를 내려다봤다.

“박석연이 자고 갈 줄 알았거든.”

화악, 더운 열기를 머금은 바람이 그와 내 사이를 돌아 나갔다.

괜한 오기 부리지 말고 자고 갈걸. 갈아입을 옷도 없고 해서 돌아간 건데…….

아주 약간, 아니 솔직히는 많이 후회됐다. 그래도 집까지 데려다주지 않은 건 여전히 기분 상했지만.

“그거 때문이었어?”

“무슨?”

“입.”

튀어나왔다는 손짓에 나는 손을 올려 입을 만져 봤다. 원래 입술이 튀어나온 건 당연했다.

“김밥집 데려가서 삐친 줄 알았지.”

“제가 앱니까? 먹는 거 가지고 삐치게. 그리고 김밥집 종류도 다양해서 저도 좋아하거든요.”

투덜거리면서도 화는 나지 않았다. 더운 바람을 만끽하며 걷는 기분도 나른하니 좋았다. 빛을 받은 홍시 스니커즈가 달콤한 색으로 반짝거렸다.

진여원의 감색 셔츠와도 색이 비슷했다. 반소매 밑으로 드러난 그의 팔뚝을 지나 커다란 손에 시선이 머물렀다.

꽉 쥐고 걷고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가능할 리 없기 때문에 상상만 하고 말았다. 내가 게이인 것이 슬프지는 않아도 이럴 때는 씁쓸했다.

박석연 좋게 생각하자. 어차피 사내 커플들도 대놓고 손잡지는 못하니까.

회사 오솔길을 차분히 돌아 건물로 들어가는 동안 우리는 아무 말도 나누지 않았다. 이제는 어색할 것도 없었다. 나는 진여원과 나란히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그리고 내가 먼저 2층에서 내렸다.

간다 만다 서로 아무런 인사를 나누지 않았지만 그게 또 자연스러웠다. 한여름의 거리를 함께 걸어오면서 내내 머릿속을 맴돈 말이 있었다.

당신이 나 퇴짜 놓지 않아서 진짜 다행이다. 그 말이.

얼른 사무실로 들어가서 입가심으로 양갱을 먹고 싶었다. 진여원이 준 것으로 말이다.

나는 셔츠 자락을 펄럭이며 기분 좋은 바람을 생성해 냈다. 그 좋아하는 커피도 뽑지 않고 사무실로 바삐 발걸음을 옮겼다.

***

퇴근 시간이 되자마자 쓸데없이 마우스만 끄적거리던 행동을 멈췄다. 퇴근 30분 전부터 하던 반복행동이었다.

슬럼프에 빠져 있는 곽일영과 나는 제대로 된 디자인 한 장 그리는 일 없이 시간을 때워야 했다. 나야 종종 진여원을 생각하느라 지루하지는 않았지만, 곽일영은 온종일 몸만 배배 꼬았다.

이재화는 애인이 기다린다며 쏜살같이 나가 버린 뒤였다. 남은 우리도 서둘러 자리를 정리했다. 새미가 오후 내내 그려 둔 도식지를 이재화의 자리에 올려 두었다.

나도 저런 때가 있었지. 머리에서 샘솟듯이 아이디어가 나왔던 사회 초년생 때가 말이다.

내 재능과 개성은 체일 슈즈가 다 버려 놨다. 나 스스로가 생각해도 변명 한번 치졸했다. 버리긴 뭘 버려, 애초부터 그리 천재성이 있던 것도 아니었는데…….

서류 가방에 스케치북을 집어넣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왼쪽 오른쪽으로 허리 스트레칭을 했더니 오전보다는 아주 살 만했다.

인체 치유의 신비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니겠나. 나는 시무룩해 있는 곽일영의 등을 두드렸다.

“곽 대리님, 저녁이나 같이할까요?”

“아니야. 집에 갈래.”

“그래요, 그럼.”

곽일영은 자기 의사가 확실한 편이라 뭐든 두 번 권하지 않아도 되는 편리함은 있었다. 원래도 인사치레 같은 건 없는 사람이었고.

“그럼 저랑 드실래요?”

새미가 자연스럽게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럴까요?”

곽일영이 새미의 셔츠를 눈에 불을 담고 노려보더니 그대로 사무실을 나가 버렸다. 이제 보니 곽일영 뒤끝 작렬이다.

마지막으로 새미와 함께 사무실을 정리하고 밖으로 나왔다. 직원들로 바글바글한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왔다.

평소같이 로비를 지나가려는데 사내 공고판 앞이 북적거렸다.

“왓, 사람 봐. 저기 뭐예요?”

“무슨 공고라도 나왔나 본데요.”

나랑 새미는 대체 뭔가 싶어 그 앞으로 기웃기웃 다가갔다. 공고판에는 B4용지보다 큰 사이즈의 종이가 붙어 있었다.

[x월 xx일 단합대회

종목: 테니스, 수영

상금: 1등 300만 원, 2등 60만 원, 3등 30만 원.

성별: 남녀 따로

참가기준: 1인 1종목]

참으로 간단명료하고 전달력이 뛰어난 공고문이었다. 공고문도 사장을 닮나 보다.

그나저나 1등 상금 금액에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남녀 할 것 없이 상금에 대한 욕심으로 눈이 번들거렸다.

저들끼리 어떤 종목에 나갈 것이며, 또 상금을 타면 뭐 할 것인지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었다. 물론 김칫국을 마시는 사람들 속에 나도 속해 있었다.

“저 날짜면……. 베케이션 전날이네요.”

새미 말대로 단합대회 일자는 바로 휴가 전날이었다. 단합대회라고 해도 난지도 캠핑장처럼 자발적 참가이기도 했다.

휴가철에 매출이 상승하는 업계 특성상 남들보다 휴가가 늦어 다들 기운이 빠져 있던 차였는데, 상금 금액 하나로 훅 열기가 치솟았다.

“새미 씨는 뭐 참가하실 거예요?”

“음. 1인 1종목이니까 테니스가 굿이겠네요. 석연 선배는요?”

새미가 어느새 나를 선배라 부르고 있었다. 변죽이 좋아 그런지 어색한 느낌은 전혀 없었다.

“저도 테니스요. 수영보단 테니스가 더 자신 있어서요.”

“오, 라이벌이네요.”

“그러게요.”

덩치로 따지면 새미에 비해 내가 한참 밀리지만, 어차피 테니스는 기술이 중요했다.

설마 진여원이나 재운 선배가 직접 참가하진 않겠지? 직원들 사기 돋으려고 내놓은 대회일 테니 아마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새미 씨, 저녁 뭐 먹을래요? 외국에서 살다 왔으면 찌개 이런 건 싫겠어요.”

“노~! 완전 좋아해요. 부대찌개 나이스.”

“근처에 부대찌개집 있는데 거기로 가죠.”

김칫국을 마시게 한 공고문을 뒤로하고 정문을 빠져나왔다. 새미가 없이 혼자 퇴근을 했다면 주차장 쪽으로 빠져나왔을지도 모르겠다. 진여원의 자전거가 있나 없나 확인도 할 겸 말이다.

서류 가방을 오른손에 쥐고 오솔길을 걸었다. 신발이 걸렸었던 나무를 올려다보자 피식 웃음이 나왔다. 돌아보니 별일이 다 있었다.

“석연 선배 슈즈 베스트 아이템이네요.”

“이거요?”

앞으로 걸으며 자랑하듯 발을 위로 들었다. 허리가 지잉 울리긴 했으나 참을 만한 수준이었다.

“어디 브랜드예요?”

“……윰이요.”

진여원이 만든 것이니 따지고 보면 이 홍시 스니커즈도 윰 브랜드 제품이긴 했다.

“출시 안 한 건가 봐요.”

“이건 딱 하나 있는 거라서요.”

“어쩐지……. 입사 전에 윰에서 출시한 디자인 전부 봤는데 그건 없었어요.”

새삼 새미가 대견해 보였다. 내가 갓 체일 슈즈에 입사했을 때는 회사에 적응하기 바빠 기존 제품들을 일일이 뒤져 보진 못했었다.

“우리 잘해 봐요. 다른 부서에 비해 인원이 얼마 안 돼서 매달 통과시켜야 하는 양도 채우기 힘들거든요.”

“오케이! 헬퍼로서도 잘 부탁드려요.”

서로 마주 보며 다시금 정식 인사를 했다. 이재화와 곽일영은 워낙 친한 터라 외근도 같이 나가는 일이 태반이었다. 그때마다 은연중에 왕따 느낌을 받곤 했는데 새미가 생겼으니 앞으로 홀로 사무실에 남는 일은 없을 것이다.

습하고 매연이 가득한 도로를 지나 부대찌개집 건물로 들어갔다. 이미 내부는 퇴근한 회사원들로 만원이었다.

다행히 남아 있는 자리가 있어 메뉴판을 보지도 않고 부대 2인분을 주문했다. 기본 반찬이 테이블에 나열되고 체인점답게 금세 찌개를 담은 냄비가 나왔다.

“음~ 스멜.”

아직은 아무 냄새도 나지 않는데 새미가 너스레를 떨었다. 나는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휴대폰을 꺼내 물병 옆에 놨다.

액정을 툭 두드려 화면을 밝혀 봤지만, 현재 시각과 오늘 날짜만 떠 있었다.

뭐, 딱히 진여원의 연락을 기다리는 건 아니었다. 그래 아니지만, 인간적으로 퇴근했으면 전화 한 통 정도는 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그렇다고 내가 먼저 하기는 뭐했다. 나야 일개 직원이니 칼퇴근하면 그만이지만 진여원은 남아서 더 일을 할 수도 있으니까. 행여 방해가 될까 봐 못하겠다.

“약속 있어요?”

새미가 연방 휴대폰을 확인하는 내게 물었다.

“아뇨, 없는데요.”

젓가락을 입에 넣고 고개만 저었다. 부대찌개가 끓기만을 기다리며 계란말이로 헛헛한 속을 달랬다. 부대가 끓자마자 라면을 투척해서 2분 정도만 삶고, 꼬들꼬들한 면발을 건져 입에 넣었다.

부대찌개의 핵심은 바로 이 면발이었다. 햄과 라면을 한 데 뭉쳐 밥까지 함께 먹었다. 진여원은 부대찌개 먹을 때도 햄 한 점 안 먹을 것 같았다.

부르르르, 부르르르.

물병 옆의 휴대폰이 빙글빙글 돌며 진동했다. 입에 라면을 가득 담고 눈만 휙 내려다봤다.

[진득이]

커다란 글씨가 화면에 가득했다. 저장된 이름을 새미가 볼까 봐 손바닥으로 휴대폰을 가리고서 끌어왔다. 물 한 잔과 함께 다 씹지도 못한 라면을 억지로 삼켰다.

“예, 박석연입니다.”

[누가 몰라.]

전화 와서 엄청 기뻤긴 한데 말투는 영락없었다.

“퇴근 하셨습니까.”

[아직.]

“일 남으셨나 봐요.”

[어디야.]

나는 주변을 둘러보고 대답했다.

“부대찌개 집이요.”

휴대폰 건너편에서 잠시 침묵이 흘렀다.

“새로 입사한 친구와 같이 저녁하고 있습니다.”

나도 모르게 변명 아닌 변명을 하고 있었다.

[기특하네.]

진여원의 칭찬에 콧대가 높아지기는커녕 살짝 미안해졌다. 당신은 일하고 있는데 나만 신나서 라면을 흡입한 것 같아서.

“몇 시까지 계실 겁니까.”

[집으로 와.]

“집이요?”

뚝-

사람이 되묻는데 그냥 끊어 버리는 이런 경우가 있나. 물론 못 들었기 때문에 다시 물은 건 아니었다. 진여원과 함께 평일을 보내게 될 거라는 생각은 해 보지 못했기에 놀라서 물은 것뿐이었다.

바쁜 사람인 것도 아는 데다 그가 매일 나를 보고 싶어 할 만큼의 로맨티시스트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었다.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나우?”

“아뇨. 애프터 해도 돼요.”

햄을 건져 먹는 속도를 현저히 늦췄다. 진여원하고 같이 식사를 할 수도 있으니 위를 좀 남겨놔야 했다. 그래도 새미에게 미안해서 먹는 시늉은 했다.

새미가 좀 전보다는 빠르게 젓가락을 놀렸다. 아마 나를 배려하는 듯했다. 눈치도 제법 빠르고 기특한 부하 직원이었다.

잘해 줘야지. 신입사원이 회사에 적응하기 위한 난이도는 고3 말에 전학 온 학생에 버금갔다. 좋은 상사보다는 나쁜 상사가 훨씬 많았고, 제출한 디자인으로 평가가 내려지는 직업이다 보니 서로 간의 라이벌 의식이 팽배했다. 어느 회사를 가든 마찬가지겠지만 적응하는 한두 달이 가장 힘겨운 법이다.

부대찌개를 다 비우고 여운 같은 건 두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새미가 더치페이하자는 걸 그냥 내가 냈다. 불편해하는 기색이 강해서 입사 첫날이니까 괜찮다는 말로 새미를 달랬다.

건물 밖으로 나와 버스 정류장까지는 같이 걷고, 버스는 따로 탔다. 나는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쐬어 가며 진여원의 집까지 남은 정류장 개수를 셌다. 앞으로 다섯 역.

정류장 수가 점차 줄어들 때마다 신발 안의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빨리 내리고 싶어 애가 타고 있었다.

내일부터는 자전거로 출퇴근을 할까. 그래, 퇴근 후에 진여원이 부르면 나란히 자전거 타고 가면 되겠다. 분홍색 자전거가 심히 눈에 띄긴 하지만 모자 쓰면 그만일 테고.

목적지에서 내려 뜨거운 열기가 올라오는 아스팔트를 걸었다. 고무 밑창이 녹아내릴 듯 태양에 예열된 바닥이 뜨거웠다.

빨리 겨울이나 돼라. 더위는 막을 수가 없지만 추위는 껴입으면 해결되니까. 한겨울이 되면 춥다고 진여원한테 달라붙어도 이상하지 않겠지.

문제다, 문제.

벌써부터 그에게 빠진 티를 내고 있었다. 이래서 그동안 연애를 하지 않은 거였다. 앞뒤 안 보고 그 사람 하나만 생각하게 될까 봐서.

어느새 정원의 낮은 펜스가 보이기 시작했다. 걸음도 점차 빨라졌다. 언제나처럼 대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벨을 누를까하다 그냥 펜스를 훌쩍 뛰어넘었다. 커다란 개집은 있었는데 녀석들이 보이지 않았다. 그 하루 사이에 주인에게 돌아간 모양이었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현관문으로 다가갔다. 웬일로 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에어컨의 냉기에 오면서 흘린 땀이 씻겨 내려갔다.

홍시 스니커즈를 벗고 거실에 올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고개를 왼쪽으로 틀자 작업실 유리 앞에 서 있는 진여원이 보였다.

유리에는 남성용 구두로 보이는 스케치가 간단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가 매직으로 –B라는 색상 코드를 휘갈겨놓고는 나를 내려다봤다.

나는 그 밑에서 고개만 꾸벅했다. 진여원이 들고 있던 매직으로 글씨를 써 내려 갔다. 마저 색상 코드를 써넣는 건가 했다.

[밥해]

내가 알기론 ‘밥해’라는 색상 코드는 존재하지 않았다.

“뭐 드실래요?”

“박석연이 잘하는 거.”

유리를 사이에 두고 서로의 목소리가 오갔다.

“저 음식 솜씨 진짜 별론데요.”

진여원은 내 말을 제대로 듣지도 않고 매직 뚜껑을 닫았다.

“밥하고 김치찌개 정도면 됩니까? 참고로 맛은 보장 못 합니다.”

“앞으로도 얻어먹기만 할 셈이야?”

“누가 들으면 제가 빈대인 줄 알겠습니다. 일단 해 보긴 하겠습니다.”

팔을 걷어붙이려 했는데 반소매라 손만 민망해졌다. 그는 뒤를 돌아 작업실 책상으로 향했다. 뒤태도 진짜 저렇게 잘 빠졌냐. 입만 조금 순화되면 최고의 애인감이었다.

주방으로 들어가며 진여원을 흘끔 흘끔거렸다. 그가 의자에 앉아 무언가를 골똘히 보고 있었다.

앞으로도 얻어먹기만 할 셈이야? 그 말을 되새김질하니 마음이 꽉 차는 것 같았다. 앞으로도 라는 말은 미래였다.

우리가 마주 보고 식사를 할 수 있는 일들이 단발적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질 거라는 약속이었다. 신부 수업까지는 아니어도 나도 음식 몇 개 정도는 배워 놔야겠다.

냉장고를 열어 안에 있는 재료들과 음식들을 확인했다. 어디서 사 온 건지 열무김치가 커다란 통에 담겨 있었다. 소면을 삶아서 열무에 비벼 먹으면 딱이겠다.

홈바의 찬장을 뒤져 가며 소면이 있을 만한 곳을 뒤졌다. 스파게티 면은 보이는데 그보다 가느다란 소면은 찾기가 힘들었다.

스파게티 면으로 열무국수를 만들면 이상하려나……?

상상만으로도 속이 뒤집어지고 있었다. 홈바의 서랍은 왜 이렇게 많은지, 열어 보는 일만 해도 한참이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불투명한 유리 찬장을 열었다.

“찾았다!”

유레카를 외치듯 소면을 잡았다. 어차피 삶아 먹는 소면이니 유통기한을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인덕션 위에 냄비를 올려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부대찌개를 조금 먹기를 잘했지, 열무국수 한 그릇 정도는 거뜬히 비울 수 있을 만큼 위가 넉넉했다.

뜨거운 물에 소면을 넣어 보글보글 삶았다. 소면이 엉키지 않게 수시로 냄비 안에 젓가락을 넣고 흔들었다. 면발 하나를 잡아 올려 씹어 봤더니 면발이 기막히게 탱글탱글했다. 내가 삶았지만 진짜 훌륭했다.

얼른 찬물에 소면을 씻어 내고 열무김치를 꺼냈다. 빈 유리그릇 두 개에 소면을 두 주먹씩 동그랗게 말고 열무김치 국물을 쏟아부었다. 면발이 먹음직스럽게 빨갛게 물들었다. 마지막으로 열무김치를 소면 위에 수북이 올렸다.

처음 만든 거지만 겉모습은 아주 그럴싸했다. 완성된 것을 한 젓가락 입에 넣는데 맛이 2프로 부족했다. 조금 밍밍하기도 하고, 괜찮은 것 같기도 하고 아리송한 맛이었다.

이럴 땐 검색이 최고지. 휴대폰을 꺼내 열무국수 만드는 법을 검색해서 속독으로 읽어 내려갔다. 진여원이 나올지도 모르니 슬쩍 눈치도 봐 가면서 화면에 집중했다.

검색하는 걸 진여원에게 들킨다고 해서 큰일이 나는 건 아니지만, 누구의 도움도 없이 스스로 한 거라며 생색쯤은 내고 싶었다.

일단 맛은 보장 못한다고 기대치를 낮춰 놨으니 맛은 적당하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또 누가 아나, 생각보다 맛있어서 감탄할지.

대충 보니까 설탕이나 매실을 넣어야 한다고 쓰여 있었다. 설탕을 두 스푼씩 넣고 식초도 한 스푼 추가했다. 다시 한번 소면과 함께 국물을 마셨다. 이번엔 내가 다 감탄할 지경이었다. 엄마가 해 준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맛이었다. 이제 보니 엄마도 설탕을 들이부었구만.

오이를 썰어서 올려 두고 진짜 마지막으로 냉장고에 있던 방울토마토로 장식을 마쳤다. 아마 그의 텃밭에서 자란 토마토일 것이다. 데코까지 완벽한 국수를 내려다보자 왜인지 뿌듯해졌다.

나무젓가락과 함께 그릇을 들고 그의 작업실로 종종 걸었다. 서류 페이지를 넘기는 진여원의 옆에 타악, 하고 완성품을 내려놓았다.

“맛은 보장 못 합니다.”

“세뇌 좀 그만 시키지?”

들켰나. 그래도 짐짓 평정을 유지하며 서 있었다. 그가 나무젓가락을 잡는 순간이었다.

요리 경연 대회에 나간 참가자들의 마음이 십분 이해되고 있었다. 입이 바짝 말라 혀로 아랫입술을 축였다.

그가 소면을 열무 국물에 풀어 한 움큼 먹었다. 나도 침이 꿀꺽 넘어갔다.

그런데 딱 한입을 먹은 진여원이 젓가락을 소면에 꽂아 넣었다. 그리고 그릇을 다시 내게 내밀었다.

맛없다 이거냐? 반응 한번 뚜렷했다. 진짜 까다로운 새끼다. 좀 연인이 만들고 그랬으면 맛없어도 맛있게 먹어 줘야 하는 거 아니냐.

나름 괜찮은 맛이라며 칭찬을 바란 마음이 푸시식 식었다. 그에게서 그릇을 빼앗아 오듯 낚아챘다.

진여원이 안경을 벗으며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적반하장격인 그의 반응에 나는 참지 못하고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진짜 정떨어지는 거 아십니까? 저 나름 엄청 열심히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반응이 그게 뭡니까.”

괜히 서러워졌다. 나는 당신 생각에 부대찌개도 제대로 먹지도 않고 부리나케 왔는데 진짜 별것 가지고 사람 마음을 이렇게 만든다.

“정 한번 쉽게 떨어져.”

“반대로 생각해 보시죠. 제가 음식 못한다고 미리 말했지 않습니까.”

“누가 맛없대?”

진여원이 여상하게 대꾸했다. 그는 평소와 똑같은데 내 목소리만 날이 서고 있었다.

“그럼 왜 도로 주는 건데요.”

“같이 먹자고.”

진여원이 서류를 탁 덮으며 말을 이었다.

“식탁에서.”

그럼…… 그렇다고 끝까지 말을 해야지.

“2분.”

그 안에 정리한다는 말에 나는 또다시 조개가 되어 그릇을 들고 작업실을 나왔다. 민망함에 온몸이 화끈화끈거렸다.

괜히 서럽다며 씨근덕댔는데, 그래도 그게 꼭 내 탓만은 아니다. 그 많은 한국말 놔뒀다가 뭐하나. 의사 전달을 확실하게 해야지. 사람 착각하게 만들고…….

식탁에 나란히 그와 내 국수를 올려 두고 난장판이 된 주변을 정리해 나갔다. 열무가 담긴 통은 다시 냉장고에, 칼과 냄비는 싱크대에 담갔다.

의자에 앉아 젓가락으로 면을 휘적거리는 때 진여원이 주방으로 들어왔다. 그가 나를 마주 보고 앉았다. 젓가락을 쥐고는 그가 툭 말했다.

“참 어려워.”

“마찬가지입니다. 제발 말 좀 길게 해 주시죠.”

애원이라기보다는 따지는 어투에 가까웠다.

“얼마나 더.”

진여원이 저 자신은 모르겠다는 듯이 대답했다. 여태껏 제 말투에 대해서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나 보다.

“방금도 같이 먹을 거니까 가지고 가. 이렇게 말했으면 되는 거 아닙니까.”

“노력해 볼게.”

“시도도 해 주세요.”

진여원이 국수를 시원하게도 먹었다. 얄미웠던 감정도 사르르 녹았다.

“항상 말이 없던 사람과 살아서 그런 거니 박석연이 이해해.”

진여원이 차분히 면을 삼키고 대답했다. 말이 없던 사람? 그 사람과 같이 살았다고? 머리가 하얗게 바래 갔다. 분명 결혼은 하지 않았다고 했었다.

“설마……. 이혼하셨습니까?”

“그러길 바라는 것 같은데.”

그의 호적을 벌써 몇 번째나 내멋대로 고쳐 쓰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그럼 누군데요.”

나는 열무 국물만 후룩 떠 마셨다.

“어머니.”

면발을 삼키고 있었으면 그대로 사레가 들릴 뻔했다. 예상치도 못한 사람이었다. 우리 엄마는 워낙 말이 많아서 말 없는 어머니는 상상이 되지 않았다.

“……사장님만큼 말이 엄청 없으신 분이신가 봅니다.”

“나보다 더.”

진여원보다 더 말이 없다면 아예 한마디도 안 하는 수준일 텐데…….

“정확히는 말을 못 하셨다는 게 맞겠지.”

“…….”

생각지도 못한 그의 대답에 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나를 쳐다보는 그를 마주 응시하기만 했다. 어쩐지 그는 내가 묻지 않으면 더는 말을 하지 않을 것 같았다.

“어디가……. 안 좋으셨나 봐요.”

“글쎄.”

그가 다시금 국수를 먹었다. 이어질 말을 기다리고 있으니 대수롭지 않은 듯 입을 열었다.

“딱히 어디가 안 좋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어. 원래 말을 못 하던 분이었으니까.”

그런 사연이 있었다면 미리 말을 해 주지……. 속으로 진여원 욕을 해 댔던 게 미안해졌다. 덩달아 입맛도 싹 사라졌다. 그리고 이유도 모르게 눈가가 뜨거워졌다. 그에게 얼마나 내가 생각 없는 놈으로 비춰졌을까.

“그런 얼굴 하라고 얘기한 거 아니야.”

내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기에 저렇게 쓰게 웃는 건가. 나는 손으로 이마를 문질러서 펼쳤다. 그는 샌드위치를 먹던 때처럼 보는 사람이 식욕이 돌 정도로 맛있게 먹고 있었다.

나는 젓가락을 깨작거리며 열무나 씹었다. 내가 제대로 먹지 않으니 진여원이 내 것의 절반을 가져갔다. 그가 먹는 것을 구경하며 남은 국수를 마저 입에 넣었다.

내가 속이 좁은 사람이어서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은데 좀체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그가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날 때까지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진여원이 식기 세척기 안에 그릇과 젓가락을 넣었다. 나를 지나쳐 주방을 나가려던 그가 우뚝 멈춰 섰다.

“박석연.”

그의 부름에 바짝 얼굴을 들었다.

“맛있었어.”

진여원은 매력적인 미소를 입술에 걸쳤다. 생각지도 못한 칭찬에 완전히 굳어 버렸다. 별말씀을요, 그런 인사치레도 목구멍에서만 맴돌았다.

나를 당황하게 만든 진여원은 유유히 작업실 쪽으로 사라졌다.

맛있었어.

그가 한 말을 주방에 혼자 남아 중얼거렸다. 동동 떠다니는 오이를 젓가락으로 건져 냈다. 그릇을 두 손으로 잡고 국물을 꼴깍 마셨다. 시큼 달달했다. 마치 그와 내 사이처럼 느껴지는 맛이었다.

***

진여원이 일을 할 동안 나는 하릴없이 TV만 쳐다봤다. 일에 방해되지 않을 정도로 볼륨을 줄이고 귀를 바짝 세웠다.

화면에선 패션 잡지사를 소재로 한 월화 드라마가 한창이었다. 나는 드라마에 집중하다가 힐끔 진여원을 훔쳐보는 걸 반복했다. 기분이 몽실몽실했다.

일 끝나고 한 지붕 아래에서 같이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게 아직은 실감 나지 않았다. 소파에서 일어나자 늘어났던 가죽이 수축하는 소리를 자아냈다.

홈시어터가 놓인 테이블 끄트머리에는 낡은 캔버스화가 보였다. 전부터 뭘까 싶었던 운동화였기에 이번에도 가만히 응시했다.

내 홍시 스니커즈와 닮은꼴인 신발로 손을 가져가봤다. 어째서인지 만지기는 꺼려졌다. 그에게 사연 있는 물건일 것 같아서. 그렇지 않고서는 모델하우스에 버금가는 깔끔한 집에 낡은 신발이 있을 리가 없었다.

“뭐 해.”

“으악!”

곧장 뒤에서 들리는 음성에 경기를 일으켰다. 캔버스에 정신이 팔려 있어서 인기척조차 느끼지 못한 탓이었다. 벌렁거리는 심장에 손을 올리고 한숨을 후 내뱉었다.

“일은 다 끝나셨습니까.”

“방금.”

“혹시……. 디자인하신 거면 저 구경 좀 해도 됩니까?”

베낄 생각은 아니지만 적잖은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안 돼.”

진짜 치사하다. 그런데 뒤이어 지금은, 이라는 말이 들렸다. 그럼 대체 언제 되는 거냐. 물어봐야 정상적인 대답이 돌아올 것 같지도 않아서 포기했다.

진여원이 내 옆에 서더니 낡은 캔버스를 제 손에 쥐었다. 어림잡아 250에서 260정도 되는 사이즈 같았다.

“궁금해?”

그가 신발을 내려놓으며 해진 것과는 다르게 예쁘게 매진 리본을 톡 건드렸다.

“그다지요.”

솔직한 심정은 궁금해 미치겠다.

“물어보면 대답해 주실 겁니까?”

“초심 때문에.”

대답을 들었음에도 머릿속에는 물음표가 떠다녔다. 진여원과 함께하다 보면 누구든 스무고개의 달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씻어.”

그가 셔츠를 뒤집어 벗으며 침실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나는 내일도 똑같은 옷을 입고 출근해야 할지도 몰랐다. 팔뚝을 들어 킁킁 냄새를 맡아 봤다. 다행히 섬유유연제 향이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었다.

제아무리 깨끗하다 하더라도 이 무더위에 같은 옷은 입는 건 꺼림칙했다. 신입사원인 새미도 나를 단벌 신사로 보면 곤란하지 않나.

나도 진여원을 따라 침실로 들어갔다. 민무늬 셔츠를 꺼내는 그에게 물었다.

“저 내일 입을 옷 좀 빌려주시면 안 됩니까?”

“잘 어울리는데 왜.”

진여원이 하트 풍선을 들고 있는 곰돌이를 가리켰다.

“똑같은 옷을 내일도 입을 순 없잖습니까.”

그가 왼쪽 붙박이장을 밀었다. 그 안에는 여름 드레스셔츠와, 캐주얼한 티셔츠가 한가득이었다. 여름 내내 매일 다른 옷으로 갈아입어도 부족하지 않을 숫자였다.

그 앞으로 걸어가 대충 사이즈가 맞을 만한 7부 깅엄체크 셔츠를 꺼냈다. 흰색과 푸른색으로 체크가 어우러져 전체적으로 시원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밤색 벨트에 베이지 슬랙스 바지를 입으면 꽤 괜찮을 듯했고, 홍시 스니커즈에도 어울릴 것 같았다.

머릿속으로 내일 입을 옷을 상상하는데 진여원이 바지까지 훌렁 벗었다. 욕실 가서 벗지 왜 여기서 그러냐. 그의 하반신이 자꾸 의식되는 바람에 시야를 최대한 위로 올렸다.

“먼저 씻으세요.”

설마 같이 씻자. 이러는 건 아니겠지?

당연히 아니었다. 진여원은 원래부터 먼저 씻을 생각이었다는 듯 옷가지들을 가지고 욕실로 걸었다.

나는 그의 뒷모습을 대놓고 바라봤다. 야채를 많이 먹어서 그런가 어깻죽지부터 엉덩이라인까지 이어지는 선이 예술이었다.

휙, 갑자기 진여원이 나를 돌아봤다. 숨을 멈추고 깅엄 셔츠만 만지작거리는 척을 했다. 흘끔 보니 그의 좆이 머리를 들고 있었다. 엉덩이 안쪽이 벌써부터 시큰거리는 것 같았다.

“저…… 오늘은 안 할 겁니다. 아니, 못합니다.”

저 크기론 며칠에 한 번도 무리였다.

“김칫국은 한 번만 마셔.”

진여원이 가드를 단단히 치는 내게 찬물을 끼얹고는 욕실로 사라졌다. 얼마 기다리지 않아 쏴아아- 하고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 내가 열무 김칫국을 이미 먹었긴 했지만, 저리 말하니 재수가 털렸다. 너는 별로 안 하고 싶은가 보지? 그러면서 거기는 왜 세웠냐?

내일 입을 옷을 테이블 위에 올려 두고는 나도 옷을 훌렁훌렁 벗었다. 전라가 돼서 욕실 문 앞에 섰다. 예고도 없이 문을 벌컥 열었다. 진여원은 놀라지도 않고 샤워기의 물로 몸을 씻어 내리기만 했다.

찰박, 찰박, 발바닥에 차가운 물이 묻어났다. 오전부터 밤까지 혹사당한 발바닥이 마사지를 받는 것처럼 시원해졌다.

나는 진여원의 뒤를 지나 대형 욕조로 들어가 그곳에 매달린 샤워기를 잡았다. 다음에 진여원 없을 때 욕조에 물 가득 받아 놓고 신선놀음이나 해 봐야지.

머리카락까지 축축이 젖은 진여원이 갑자기 샤워 콕을 잠갔다. 앞으로 흘러내려 온 머리를 대충 뒤로 넘기고는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샤워기를 든 채로 다가오는 그를 멀거니 쳐다봤다.

“……왜 오십니까?”

“왜 들어왔는데.”

“씻으려……고요.”

진여원의 태도에 약이 올라서 나도 아무렇지 않게 샤워만 하고 나갈 생각이었다. 진여원이 욕조 안으로 한 발 디뎠다. 그러고는 내 손에 있는 샤워기를 빼앗아 갔다.

그의 젖은 몸이 내 상체에 달라붙었다. 처음 살을 맞댄 것도 아닌데 긴장감은 여전했다. 그가 내 뒤의 홀더에 샤워기를 걸자 상체가 더 꾹 맞닿았다.

스윽 내려오던 손이 내 목덜미부터 등줄기를 훑었다. 그의 손끝에서부터 찌릿찌릿한 전기가 생성되는 것만 같았다.

내 엉덩이 뼈를 문지르던 그가 손가락을 아래로 미끄러뜨렸다. 나는 서둘러 그의 손목을 붙들었다.

“저 아직 부어 있어서 안 됩니다.”

“봐봐.”

진여원이 속살거렸다.

“보긴 뭘 봅니까!”

“두 번 본다고 닳아?”

그가 중지를 엉덩이 사이로 가져가 구멍을 매만졌다. 진짜로 부어 있는지 뜨끈뜨끈한 열이 그곳에서부터 올라왔다. 진여원이 잘게 신음하는 나를 넓은 욕조 턱에 앉혔다.

그도 내 밑에 앉더니 다짜고짜 성기를 뜨거운 손으로 감싸 쥐었다. 어느새 반쯤 발기하고 있는 것이 그의 손에서 한번 더 부풀어 올랐다. 진여원이 고개를 내려 내 것을 입에 품으려 했다. 화들짝 놀라 그의 어깨를 잡았다.

“뭐, 뭐 하시는 겁니까.”

“몰라서 물어?”

“저 펠라 별로 안 좋아합니, 앗!”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질척한 입속으로 내 좆이 삼켜졌다. 습한 동굴에 순식간에 삼켜지는 느낌에 그의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가 혀로 내 기둥을 마찰하며 안으로 거세게 빨아 당겼다. 뿌리까지 뽑힐듯한 힘에 엉덩이가 저절로 들렸다. 쾌감과는 반대로 당황스러움에 어안이 벙벙했다. 진여원이 망설임 없이 내 것을 물 줄은 전혀 몰랐다.

고개를 숙여 그의 머리를 더욱 깊이 감싸 안았다. 츄릅거리는 소리가 욕실을 울렸다. 귀두를 굴리던 그의 혀가 요도를 꼿꼿하게 파고들었다.

이내 기둥을 한 번에 삼켜서는 죽죽 빨아올리기까지 해 소리 없는 신음만 내뱉으며 연방 끙끙거려야 했다. 가늘게 뜬 눈앞이 뿌옇게 흐렸다.

아랫배가 딱딱하게 굳을 정도로 직접적인 자극에 사정감이 노도와 같이 밀려오고 있었다. 진여원이 내 허벅지를 움켜쥐고 성기를 한계까지 빨아들이는 그 순간이었다. 도저히 참지 못하고 정액을 배출했다.

“하읏!”

그에게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그의 입 안에 고스란히 정액을 쏘아 올리며 손만 파르르 떨었다.

그의 젖은 머리카락에서 손등을 타고 흐르는 물방울의 감각마저 예민한 자극으로 다가왔다. 내가 사정을 하는 동안에도 그는 여전히 내 좆을 빠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좋은데, 벗어나고 싶은 그런 정반대의 기분이 들었다.

사정이 완전히 끝나고 나서야 그가 내 성기에서 입을 떼어냈다. 그는 손에 정액을 뱉어 욕조 바닥에 떨어뜨렸다. 실처럼 느른하게 이어지는 정액이 밑에 고여들었고, 설마 싶건만 그가 얼마정도는 삼켰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숨을 몰아쉬며 정액과 타액으로 축축한 좆을 내려다봤다. 진여원의 입술에도 뿌연 사정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혹시…… 처음부터……. 이쪽이셨던 거 아닙니까.”

펠라는 나도 거부감이 드는 행위였다. 진여원이 허리를 들어 일으켜 내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비볐다. 비릿한 정액 맛에 저절로 인상이 써졌다. 그가 혀로 내 입술을 핥으며 말했다.

“박석연이니까.”

평소에는 미운 말만 골라 하면서 지금처럼 종종 사람 심장을 들쑤셔 놓을 때가 있었다. 이번엔 그가 욕조 턱에 앉아 나를 밑으로 잡아 내렸다. 나는 여운을 느낄 새도 없이 그의 좆을 눈앞에 두고 무릎을 꿇어야 했다.

“꼭……. 해야 됩니까…….”

받기만 할 생각은 아니지만, 인간적으로 이건 입에 넣기에도 부담스러웠다. 바로 코앞에서 목도하니 새삼 내 엉덩이가 대견할 지경이었다.

진여원은 내 구시렁거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뒤통수를 감싸 제 것으로 잡아 내렸다. 내게 펠라를 하는 동안 잔뜩 흥분했던 것으로 보이는 그의 좆이 코에 퉁하고 부딪혔다.

불만스레 진여원을 올려다보고는 혀를 밖으로 내밀었다. 선액으로 축축한 그의 귀두를 쓱 핥았다. 귀두만 살짝 입 안에 넣었는데도 입꼬리가 팽팽하게 벌어졌다. 혀의 뒷면을 이용해 그의 귀두를 자극하며 쪽쪽 빨아 당겼다.

그때마다 내 머리를 감싼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입을 최대한 커다랗게 벌려서 점차 그의 좆을 삼켜 나갔다. 중간까지 들어왔을 때 귀두가 목젖을 툭 건드렸다. 입 안에서 침이 마구 샘솟았다.

진여원에게서 새어 나오는 낮은 음성이 나를 자극했다. 이건 좋아하지 않지만 나도 진여원만큼은 예외로 칠 수 있을 것 같았다.

좀 더 빨아들이고 싶은 욕망에 그의 허벅지를 잡고 상체를 기울였다. 잔뜩 힘을 주어 빨아들이는 상태로 고개를 뒤로 뺐다. 그의 좆이 입 안에서 점차 부피를 키워 나가고 있었다.

파핫 하고 뱉어 내자 그가 더욱 거세게 나를 내리눌렀다. 순식간에 입 안으로 처박힌 좆에 목젖이 벌렁 뒤집어졌다. 번쩍하고 눈에 불꽃이 튀었다.

“으흣……흡.”

그의 것에 막혀 기침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깊이 처박힌 좆이 목구멍을 압박하며 점차 안으로 진입했다. 목 안쪽이 억지로 열리고 있었다.

도저히 참지 못하고 진여원의 허벅지를 밀어내며 고개를 뒤로 빼냈다. 나를 내리누르던 그의 손보다 더 거센 힘으로 그에게서 벗어났다.

“켁, 쿨럭. 쿨럭…… 컥…….”

가슴을 두드리며 붉어진 눈으로 그를 노려봤다.

“누구……컥……. 죽일…… 습니까.”

누구 죽일 일 있습니까! 외치고 싶었지만 기침에 가려져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진여원이 내 입가에 흥건한 침을 손으로 닦아 주었다.

남은 고통에 기침을 내뱉고 있는데 진여원은 어째 내 꼴을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지금은 내 마음이 뒤틀려서 그렇게 보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밭은기침이 잦아들자 탁탁 가슴을 두드리던 것도 멈췄다. 나는 따끔따끔한 목구멍을 침을 삼켜 달래 가며 그의 좆을 재차 물었다.

목 깊숙이 들어왔던 좆의 앞부분이 질척한 타액으로 끈끈했다. 차분히 입 안과 목구멍을 넓혀 가며 그의 것을 삼키니 아까보다는 살만했다.

그의 좆을 쭉 빨아올리며 안으로 넣기를 반복했다. 길이 트여서인지 갑갑하긴 해도 뱉을 정도는 아니었다. 순간 그가 허리를 탁 쳐올렸다.

“켁.”

이쯤 되니 눈이 세모꼴로 치솟았다.

“대체 왜!”

손등으로 입술을 닦아 내며 그를 째려봤다.

“귀여워서.”

“……!”

벌어진 입술을 다물지도 못했다. 욕정의 열기가 가득 담긴 것 같은 그의 눈이 내 가슴팍에 머물렀다. 그러고는 천천히 더 아래로 내려왔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내 성기와 사타구니에 짙은 시선이 닿았다.

설마 넣고 싶어서 저러는 건 아니겠지…….

“제가……. 분명 못……한다고 했는데요.”

“들켰네.”

진여원이 피식거렸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욕조의 물을 틀더니 나를 그 안으로 휙 잡아 올렸다.

“오늘은 그냥 샤워만,”

“해, 욕조 목욕도.”

그는 다시 욕조를 나가려는 나를 붙든 채로 등받이에 엎드리게 만들었다.

진여원을 만류하려는 동작보다 그가 내 엉덩이를 벌려 쥐는 게 더 빨랐다. 그가 부어 있는 내 구멍을 혀로 쓱 핥아 올렸다.

“앗!”

펠라보다 더 큰 충격이 전신을 휘감았다. 황급히 손을 뒤로해 그의 어깨를 밀었다. 진여원이 매끄러운 혀로 내 구멍을 달래 주듯 핥았다.

“읏……! 하, 하지 마요.”

말캉말캉한 혀가 은밀한 부위를 자극하는 탓에 정신까지 말랑해졌다. 그가 축축한 입술로 쪼옥 하고 내 엉덩이까지 깨물고 빨았다. 참을 수 없는 간지러움에 발가락이 오므라들었다.

물이 차기 시작해 발목까지 잠긴 내 발을 그가 손으로 훑었다. 드러난 발바닥에 손가락을 미끄러뜨리며 발가락까지 문질렀다. 하반신이 전부 진여원 때문에 녹아내리고 있었다.

아래를 핥던 그의 혀가 주욱 꼬리뼈까지 올라왔다. 내 등 또한 간질이며 삽시간에 뜨거운 숨결이 목덜미에 와 닿았다. 넓은 욕조 턱에 늘어진 내 상체를 진여원이 내리눌렀다.

그의 좆이 엉덩이에 묵직하게 올려졌다.

“넣고 싶어, 박석연.”

그가 내 귓가에서 속삭였다. 정신이 멍해서 아무래도 좋을 지경이었다. 게다가 나 역시 지금 당장 그와 몸을 겹치고 싶었다. 손을 뒤로해 그의 성기가 내게 더 닿도록 만들었다.

진여원이 딱딱하게 선 좆을 구멍에 문질렀다. 욱신욱신 둔통이 있음에도 어서 들어오기만을 바랐다. 꾸욱- 그의 좆이 열을 내는 구멍 안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천천히 들어오던 좆이 어느 순간 내 안을 가차 없이 관통했다.

짧은 비명을 내지르고 내 허리를 잡고 있는 그의 손을 움켜쥐었다. 갑작스러운 침입에 일어난 통증을 참아냈다. 그도 뜨거운 한숨을 토해 내며 허리를 콱 처올렸다. 내 숨만큼이나 거칠었다. 그는 마치 갓 섹스를 알아버려 흥분을 자제 못하듯 거칠게 내 안을 탐하기 시작했다.

뺨이 욕조 턱에 마구 비벼졌다. 그는 뿌리까지 쑤셔 넣은 것을 단숨에 뽑았다. 아래가 젖혀지는 느낌에 흐느낌이 새어 나왔다. 그가 내 목덜미를 잘근잘근 씹었다.

진여원이 부딪혔다가 떨어져 나가자 엉덩이가 때려 맞는 것처럼 화끈거렸다.

“아……. 오늘은 빨리…….”

그에게 애원하듯 말을 웅얼거렸다. 진여원이 내 허리를 두 손으로 포개어 안았다. 찰박, 찰박. 거친 움직임에 따라 차오르는 물도 거세게 요동쳤다.

안쪽 내벽도 부어 있어 그의 좆이 날카로운 송곳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쾌락만을 따라 움직이는 짐승처럼 나도 그에 맞춰 허리를 놀렸다.

그가 전립선을 찔러 올릴 때마다 성기를 쥐고 재빨리 흔들었다. 아……아아……. 정신이 나가 버릴 것만 같았다. 그가 크게 허리를 돌리며 내 안을 제멋대로 찌르고 넓혔다. 그 또한 내게 정신없이 빠져 있는 것 같았다.

박석연- 나를 부르는 흥분에 겨운 목소리가 평소보다도 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욕조 턱에서 얼굴을 떼고 허리를 바짝 당겨 올렸다. 좆이 내 안에서 한껏 물리자 진여원의 목구멍에서 탁한 숨이 흘렀다.

그러더니 아래가 해질 정도로 내 구멍을 빠르게 오갔다. 그 기세에 더는 버티지 못하고 그가 밀어붙이는 대로 흔들렸다. 진여원의 것이 내부에서 한바탕 요동쳤다. 사정의 순간이었다.

나도 사정을 늦추려 잡고 있던 고환에서 손을 떼고 성기를 흔들었다. 욕조 벽에 내 정액이 팟 튀어나갔다. 그의 정액도 내 안을 함부로 쏘아 대는 바람에 전신이 움찔움찔거렸다.

그는 사정하는 동안 내 배를 꽉 누르면서 내부가 더 압박되게 만들었다. 입을 벌린 채로 안을 가득 채운 그의 것을 느꼈다. 확실히, 진여원과의 섹스는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거칠었다. 그러나 그가 나를 이 지경으로 탐하는 것에 가슴이 들떴다. 그가 정말 나를 좋아하는 것 같아서 말이다.

나보다 뒤늦게 사정을 끝낸 그가 쑥 좆을 빼냈다. 허벅지를 타고 정액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진여원이 손가락 두 개를 구멍에 넣고는 옆으로 비죽이 벌렸다. 왈칵왈칵 한 번뿐인 사정에 어마어마한 정액이 쏟아져 내렸다.

나는 지친 몸을 물속으로 풍덩 담갔다. 가슴께까지 잠긴 물에 숨도 턱턱 막혔다. 진여원이 내 앞에 앉아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 주었다. 안 그래도 눈을 찌르던 머리카락이 답답했던 차였다.

“저 내일…….”

목소리가 완전히 쉬어 있었다.

“참기 힘들어.”

이번엔 진짜로 쉴 거라고 말하려 하는데 그의 말이 더 빨랐다.

“눈앞에 있는데.”

“그럼…… 하아……. 그동안은 어떻게 참으셨……습니까.”

기운 없는 손을 들어 물 위를 착 때렸다. 물방울이 진여원의 가슴팍에 닿고만 떨어졌다.

“못생기고 못 먹는…… 감이라면서요.”

그가 물속에 담긴 내 몸을 돌렸다. 그리고 뒤에서부터 끌어안았다. 나는 등을 그에게 기대고 뺨은 어깨에 비스듬히 올렸다. 진여원이 내 배를 살살 어루만졌다.

“못 생긴 감이 먹으라던데.”

내가……. 술 취했을 때 그랬던 것 같긴 했다.

“저 내일……. 쉴 겁니다.”

“출근해.”

“와……. 너무한다…… 진짜.”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혼잣말을 토해 냈다. 회사에서는 디자인을 짜내는 머리를, 집에서는 섹스에 몸을 혹사당하는 꼴이었다. 따지고 보면 월급이 두 배가 돼야 이치에 맞는다.

“수면실 뒀다 뭐해.”

“혹시……. 회사에서도 저 보고 싶어서 그러는 겁니까.”

김칫국을 다시 한번 들이켜봤다. 그런데 진여원에게서 아무런 말이 나오지 않았다.

설마 진짜냐? 싶어 고개를 꺾어 그를 올려다봤다. 그는 충분히 무심해 보일 만한 얼굴로 내 몸을 닦아 주고 있었다.

여전히 대답이 없기에 나는 욕조 턱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아직 남아 있던 정액이 단번에 아래로 흘러내렸다. 좀체 기운이 돌아오지 않아 욕조 턱에 다시 주저 앉아야 했다.

진여원이 내 발목을 휙 잡았다. 그리고 동글동글한 샤워타월로 내 몸을 쓱쓱 문질렀다. 우리 회사 대표의 시중을 받는 사람은 나뿐일 거다. 물론 엉덩이를 내줘야 한다는 커다란 단점은 있지만.

온몸에 거품을 둘러 준 진여원이 마지막으로 발만을 남겨 두었다. 샤워타월을 물 위에 띄운 그는 거품이 잔뜩 묻어 있는 손으로 내 발을 문질렀다.

꾹꾹 지압을 해주니 엄청 시원했다. 그는 내 발가락 사이에 손가락을 끼워 넣고 부비부비거렸다.

“으앗, 간지러워요.”

“쉬즈 모델해도 되겠어.”

그가 거품 사이로 군데군데 살색이 보이는 내 발을 톡톡 쳤다. 내 발을 한 손에 움켜쥔 그가 엄지손가락으로 발등을 훑었다.

나는 바닷가에서 모래 사이로 숨겼던 때와는 다르게 그에게 고스란히 발을 내주었다. 창피한 건 여전하지만 그의 손길은 기분 좋았다.

졸음이 몰려와 눈을 꿈뻑꿈뻑거리자 그가 내 새끼발가락을 콱 눌렀다. 그러더니 곧 샤워기를 가져와 내 머리부터 뿌려 대기 시작했다.

차라리 잘됐다 싶어 나도 샴푸를 짜서 머리에 비볐다. 그가 물을 뿌려 대고 있어 거품이 생길 새도 없이 머리카락이 씻겨 나갔다.

깨끗이 닦여 개운해진 몸을 일으켜서 그제야 욕조 밖에 섰다. 욕실에 비치된 커다란 수건으로 전신을 감쌌다. 이대로 바닥에 누워 자고 싶었다.

진여원이 제 몸을 씻는 동안 나는 뚜껑을 덮은 변기에 앉았다. 왜 안 나가냐는 말을 하면 진심은 아니지만 업어 달라고 패기를 부리려 했다. 그는 끝까지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욕조의 물을 빼고 나온 진여원이 제 몸도 수건으로 닦아 내렸다. 물기를 잔뜩 머금었던 진여원의 몸은 여전히 탄탄했다.

“배 아파서 그래?”

놀라웠다. 다소 걱정스레 나온 그의 말에.

사실은 아픈 건 엉덩이 안쪽이었지만 일부러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그가 내게 등을 보이더니 내 팔을 목에 감아 번쩍 들어 업었다.

신발을 내려 주던 날처럼 시야가 위로 휙 솟았다. 진짜 업어 줄 줄은 몰랐는데……. 헤헤, 웃다가 그의 어깨에 얼굴을 대고 입술을 살짝 올려 말했다.

“보기보다 마음 약하시네요.”

욕실을 나와 침실로 걷는 그가 대답했다.

“박석연한테만.”

그의 어깨의 온도가 갑자기 확 낮아졌다. 아니, 내 뺨의 온도가 올라간 것이었다. 침실까지 나를 잘 업고 온 그가 침대로 나를 휙 내던졌다.

스프링이 내리눌렸다 올라오며 내 몸도 찌르르 울렸다. 하여간 끝이 좋은 꼴을 못 본다. 나는 이불을 목까지 끌어 올려 덮었다.

진여원도 수건으로 대충 머리를 털어 내고 내 옆에 누웠다. 정면에 걸린 벽시계를 보니 이제 겨우 11시였다.

아직 자기는 이르지만 사장이 출근하라고 했으니 최대한 체력을 비축해 두는 수밖에 없었다. 그가 이불 속에 고치처럼 묻힌 나를 끌어안았다. 품에 안긴 채로 그를 올려다봤다.

잘생긴 얼굴에 어둑어둑한 침실의 조명이 더해지니, 한여름의 밤의 환상처럼 묘한 분위기가 흘렀다.

망상이 아니냐는 김요한의 말이 다시금 생각났다. 눈을 부릅뜨고 그를 쳐다봤다. 망상일 리가 없었다.

솔직히 이 인간을 내가 짝사랑한 것도 아니었지 않나. 오히려 미워했었지. 이런 날이 올 줄은 부처도 알라신도 몰랐을 것이다.

그가 내 젖은 머리카락을 쓱쓱 털어 냈다. 깔끔 떠는 사람이라 젖은 게 찝찝한가 보다. 가만히 누워 있다가 문득 궁금함이 들었다. 나는 참지 않고 물었다.

“이번 신상이요. 직접 디자인하시는 겁니까?”

그간 시중에 출시된 윰의 상품 중에서 그의 디자인은 없던 것으로 기억한다.

“누구 팀이 부진해서.”

낮은 목소리는 듣기 좋았지만, 내용물은 아니었다.

“그렇지 않아도 노력하고 있습니다만.”

“만은 왜 붙여.”

변명하지 말고, 노력한 만큼 좋은 결과물을 내놓으라는 소리였다. 그런데 어디 세상일이 노력한다고 다 잘되나. 그럼 너도나도 실력자겠지.

결과물에 집착하는 이 물질만능주의 현대인 같으니라고. 속으로만 구시렁거렸다.

“휴가 때 시간 비워 놔.”

“설마 밖에서 데이트라도 하게요?”

대수롭지 않게 말하면서도 어쩐지 몸이 화끈화끈거렸다.

“못할 건 뭔데.”

“저…… 근데. 휴가 때 부모님 뵈러 내려가려고 했는……데요.”

아쉽게 됐어, 하면서 진여원이 생각보다 빨리 포기했다. 그의 품으로 더 꼬물꼬물 기어들어 가며 중얼거렸다.

“혹시 시골 가 본 적 있으세요?”

“아니.”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만 자라신 겁니까.”

“그랬지.”

“그래서 인간미가 없으시구나.”

그가 웃는지 젖은 머리 위로 짧은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제가 전에……. 방학 때만 되면 시골 내려갔다고 했던 거 기억하세요?”

그가 홍시 스니커즈를 내게 줬던 날이었다.

나는 그의 앞에서 팥죽을 먹으며 하릴없는 말들만 늘어놨었다. 내 상황을 얘기하지도 않았고, 그저 그에게 향하는 마음을 접으려고만 했었다. 다시금 그때의 감정이 생각나 가슴이 저릿저릿했다.

진여원은 내가 얼마나 미웠을까. 수영장 탈의실에서 그렇게 화낸 것도 이해했다. 그래도 그는 나를 잡아 줬다. 말 짧은 진여원 탓할 것도 없었다. 나도 참 모질었으니까.

“계속해.”

내가 한참이나 말이 없자 그는 내 머리카락에 대고 속삭였다. 나는 아팠던 기억을 지우듯 담담하게 말을 시작했다.

“시골 내려갈 때마다 진짜 재미있었거든요. 동네에 앵두나무가 하나 있었는데 초등학생일 때도 제 허리까지밖에 안 왔었어요. 주인이 따로 있는 나무였는데 만날 제가 몰래 따먹어서 엄청 욕먹었죠.”

지금 부모님이 살고 계신 집도 그 앵두나무가 있는 곳에서 제법 가까웠다. 돌아가신 외할머니 집 근처로 귀농하신 걸 보면 엄마도 옛 추억이 그리웠던 것 같다.

“시골 살던 녀석들이랑 자치기도 하고 비석치기도 하고 그랬는데……. 비석치기 하다가 제가 돌멩이를 잘못 던져서 한 놈 다리가 찢어졌던 적이 있었거든요. 때마침 산에서 망태를 이고 내려오던 할아버지가 피가 나는 그 녀석 다리에다 약초 같은 걸 얹어 주더라고요? 진짜 신기하게도 피가 뚝 그치데요. 지금 생각하면 산신령 같은 게 아니었나 싶은데…….”

혼자 중얼중얼 떠들다 입을 다물었다. 왠지 그가 자고 있는 것 같았다. 사람 민망하게 말이다.

“주무……시나 보네요.”

“더 얘기해.”

그가 나를 더욱 세게 끌어안아 자신의 품에 가뒀다. 조용할 뿐이지 내 얘기에 경청하지 않는 것은 아닌 듯했다.

“사장님은 그런……. 추억 같은 건 없으세요?”

“…….”

어릴 때를 회상하듯 그는 말이 없었다. 그러나 이내 대답이 돌아왔다.

“없는 것 같네.”

“공부만 하셨나 봐요.”

그래서 진여원은 회사의 대표고, 난 일개 직원인가 보다.

“저도 안 가 본 지 하도 오래 되어서 요새는 어떤지 모르겠어요. 이번에 가면 앵두나무가 아직 있는지 보려고요. 최 씨 할머니네 인삼 농사도 제대로 되나 궁금하고.”

“그걸 네가 왜.”

남의 농사를 걱정하는 내가 이상하긴 했다. 그래도 그럴 만한 사연은 분명 있었다.

“인삼 농사 8년 정도 걸리는 거 모르시죠? 내내 돈을 들여서 인삼을 키워야 하거든요. 하이리스크 하이리턴이라고 얘기하면 쉽게 이해하실 것 같은데.”

진여원에게서 대답이 나올 거란 기대는 애초에 버리고 말을 이었다.

“최 씨 할머니네가 인삼 농사를 8년에 걸쳐 했는데, 수확하기 바로 전에 도둑놈한테 전부 털렸어요. 그때가 저 초등학교 5학년 때인가 그랬는데, 최 씨 할머니가 암막을 쳐 놓은 인삼밭에 앉아서 통곡하던 게 잊히지 않더라고요. 저까지 서러워져서 같이 덩달아 울고 그랬죠.”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말씀하길 최 씨 할머니가 목매달지 않은 게 용할 정도였다고 했다. 그 후 1년 정도 있다가 다시 인삼 농사를 시작했는데, 그 이후 어떻게 됐는지는 나도 몰랐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것도 그즈음이었으니까.

사실 진여원에게 이런저런 시골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따로 있었다. 휴가 때 별일 없으면 나와 같이 시골이나 가자고 운을 떼어 보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같이 갑시다. 그렇게 속 시원히 말하지 못했다. 행여 그가 조금이라도 부담스러워할까 봐 걱정이 됐다.

부모님에게 이 남자가 내 연인이다 소개시킬 생각은 추호도 없으나 진여원의 입장에서는 찜찜할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원래 이성애자였던 사람이니까……. 

그걸 생각하자 기분만 울적해졌다.

“더 얘기해.”

“자려고요, 졸리네요.”

나는 뜨거운 그의 팔뚝에 얼굴을 올렸다. 그리고 눈만 두어 번 깜빡거리다 이내 꽉 감았다. 진여원은 내 불안 따위는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나를 처음과 같은 힘으로 안아 주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몸이 피곤함에도 쉽게 잠들지 못했다. 그의 고른 숨소리를 듣고 나서야 잠을 청하기 시작했다.

잠들기 전 속으로 한 가지 바람을 중얼거렸다. 앞으로 좋은 날, 좋은 일만 있었으면 좋겠다. 내 이런 생각들이 전부 기우이길 바랄 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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