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화 〉방송 세 달째(22)
외투를 입었다.
고양이를 쓰다듬었다.
밥그릇에 사료를 듬뿍 담아주자 고양이가 당황한 듯 뒷걸음칠 쳤다.
“이거 먹으면서 기다려.”
다 챙겼나?
나는 옷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지갑, 휴대폰, 그리고 식칼.
다 챙겼다.
언제까지고 당하면서 살지는 않을 것이다.
받은 것이 있다면 갚는다.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이모가 혼자 올까 아니면 이모부를 데리고 올까.
뭐가됐던 좋다.
내가 해결해야 할 일.
손가락을 움직였다.
바라봤다.
잘 움직인다.
그래, 됐다.
갑작스러운 일이었지만, 언젠가 벌어졌을 일.
한걸음을 내딛을 때 마다 심장이 무거워진다.
무섭다.
강한 척 했지만 무섭다.
난 약하다.
알고 있었다.
두렵다.
이 역시 알고 있었다.
식은땀이 흐른다.
다리가 형편없이 후들후들 떨린다.
숨이 거칠어진다.
잠시 멈춰서 심호흡을 했다.
겁먹은 모습을 보여줘선 안 된다.
나는 악의에 익숙했다.
이런 상황에 내가 보일 모습은 하나 밖에 없었다.
당당한 모습.
내가 어리 숙한 모습을 보인다면, 빈틈을 보인다면, 내 빈틈을 비집고 들어와 나를 물어뜯을 것이다.
첫 모습이 중요했다.
입술을 씹었다.
으-득-
입술이 터졌다.
피가 터졌다.
피가 터져 비릿함이, 내 정신을 맑게 해줬다.
흥분이 가라앉았다.
투두둑- 떨어지는 핏방울을 무시했다.
나는 죽은 눈으로 약속된 장소의 벤치에 앉았다.
꽤나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 다가오고 있었다.
옷에 관해서 잘 모르지만 대충 봐도 비싸보이는 옷들.
나는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꾸민다고 꾸민 것이겠지만,어울리지 않는 것을 한껏 치장한 것이 광대 같아 보였다.
자.
흉내인지, 연기인지, 연극인지, 가짜인지, 진심인지, 진짜인지
시작하자.
강한 모습을 보이기 위해, 수십 가지의 행동과 수백 가지의 말이 떠올랐다.
“다 필요 없어...”
내 본심을 보이자.
더는 나를 건드릴 수 없게.
더는 내 근처 사람들을 괴롭힐 수 없게.
만약 안 된다면.
품에 넣어온 식칼의 냉기가 느껴졌다.
벤치에서일어나 다가온 여성을 바라봤다.
첫 말은 뭐라고 말해야할까.
잠시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이모.”
울그락불그락 거린 이모는, 그 사람은, 아니.
뭐라고 불러야 할까.
내 뺨을 내려쳤다.
짝-!
얼얼하다.
터진 입술에서 피가 튀었다.
옷에 튀었다.
네모미님이 사주신건데.
내가 상념에 빠져있자 내 손목을 강하게 잡은 이모는 나를 끌고 가려 했다.
“미친년...넌 교육부터 다시 받아야해...!”
“...교육?”
무슨 교육을 말하는 걸까.
나보고 별 같잖은 이유를 대며 자퇴를 권한 인물이 바로 이모 아니던가.
아, 혹시 그 노예생활을 ‘교육’이라고 말한 걸까?
내가 반항할 거란 생각을 안 하는지, 앞만 보고 나를 끌고 가는 이모.
나는 힘을 줘 걸음을 멈췄다.
내 행동에 소리를 지르는 이모.
“사람들 다 보는데 부끄럽게 뭐하는 짓이야!!!!!!”
시끄럽다.
말이라고 하기엔, 가치가 없었다.
비명이라고 하기엔, 처절함이 없었다.
소리는 내나, 그것에 뜻이 없었다.
그렇기에 그저 소음.
오로지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기심으로 인한 괴성이자, 소음.
나는 소음을 듣자, 몸에 떨림이 멈췄다.
아.
이모는 더 이상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괴물.
인간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무섭지 않았다.
그렇기에 존중이 필요없었다.
“야...”
“넌, 넌... 미쳤어... 그 못된 년들이 들낙거릴 때부터 막았어야 했어.”
“...말 조심해...”
‘아니‘ 라고 내 말을 끊은 괴물은내 눈동자를 바라봤다.
“남자도 왔었지? 그렇지? 네 이모부가 몸 좀 팔아보라 했을때는 들은 척도 안하더니, 아하하하하! 그래, 몇 명에게 대줬니, 얼마를 받았니, 그리고 그 돈은 어떻게 했니?”
이 와중에 돈타령이라니.
그보다 어떤 발상을 해야 저런 식으로 생각할 수 있는 걸까.
한심했다.
“더러운 년... 키워준 은혜도 모르고...”
키워준 은혜?
저 말이 헛소리라는 것은 내가 옷을 벗으면 간단히 검증할 수 있었다.
내 몸에 난 흉터들은 모두 그 집에서 만들어 진거니까.
고개를 저었다.
더 이상 들어줄 필요가 없었다.
그저 소음, 시끄러울 뿐이었다.
나는 손을 뿌리치고 괴물의 뺨을 때렸다.
진한 화장이 손에 묻어나왔다.
“역겨워...”
오물이 묻은 것 같았다.
굳이 몸을 쓰지 않아도 됐다.
말로 따질 수 있었다.
수십 가지, 수백 가지도 넘게 따질 수 있었다.
나는 차분히 괴물을 응시했다.
하지만 그것도 말이 통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나는 손가락을 비비었다.
무언가 찐득한, 불쾌한 촉감.
“이익...! 창녀주제에!”
안 들린다.
소음이다.
가치도 뜻도 처절함도 없다.
그저 소음, 상대할 가치도없다.
짜증만 날 뿐이었다.
나는그저 내가 할 말을할 뿐이었다.
“내 인생에서 이제 손때, 나는 지금 행복해, 건들 지마, 이 이상 다가 오지마.”
이건 경고였다.
괴물의 눈동자를 바라봤다.
광기에, 흔들리는 눈동자가.
화를 참지 못하고 씩씩거리는 숨결이.
역겹다.
더럽다.
“내 언니가 너 때문에죽었어... 네 애비가 너 때문에 죽었어... 그런데 이렇게 도망간다고?”
내 약점을 건드렸지만, 이미 말이 아닌 소음으로 치부한 시점부터.
괴물이 내뱉는 소음은 내 약점이 아니었다.
하여, 우위는 나에게 있었다.
“야, 아니.”
침을 삼켰다.
피 맛이 난다.
눈을 감고, 깊게 숨을 들이 마시고, 내뱉었다.
눈을 떴다.
“이모, 이건 내 마지막 존중이야.”
나는 손을 뻗었다.
화장이 묻은 손을, 괴물의 옷에 닦았다.
“진짜로...”
“창녀주제에...”
다시 한 번 나를 내려치려 든 손을, 나는 가만히 올려봤다.
“때릴 거야?”
정말로?
그토록 두려웠던 이모가, 한 없이 작아 보인다.
화를 통제하지 못해 부들부들 떨리는 손이 안쓰러워 보인다.
추했다.
사람이 이토록 추 할 수 있을까.
“...근데 있잖아, 이모, 이모부는 그 사실을 알아?”
“...?!”
흠칫 놀라는 괴물.
나는 한발자국 다가갔다.
뒤로 한발자국 빼는 괴물의 귓가에 속삭였다.
“목사님이랑 불륜 하는 거... 알아?”
나를 감금하고 노예로 부렸다.
그래서 나는 집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을 보고 들을 수 있었다.
“이모....”
“그, 그런 걸 누가 믿는다고!”
“야...다시 한 번말할게...”
괴물의목울대가 움직였다.
목이 마른가?
나는 최대한 해맑게 웃어줬다.
“돈 좋아하잖아...? 이혼하기 싫지...?”
직접 돈 번적은없고, 남에게달라붙어 사는 괴물.
그래, 괴물이라는 이름도 아깝다.
기생충.
그것이 이모의 본 모습이었다.
“자, 이제 꺼져...”
이를 으득으득 간 기생충이 내 뺨을 내려쳤다.
고개가 돌아갔다.
입 안이 터진 것 같았다.
아래라고 생각했던 내가, 기어오르니까 화가 났나?
“퉤...”
피를 뱉어냈다.
그리고 웃었다.
“자, 어쩔래?”
팔을 벌렸다.
스산한 바람이 나를 쓰다듬고 지나갔다.
“역겨운 년...”
기생충이 뒤를 돌아 자리를 벗어났다.
“아...아하...아하하하하....하하하하...”
그 뒷모습이 안보일 정도가 돼서야 나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무서웠다.
하지만 별거 아니었다.
미친 듯이 웃었다.
이렇게 쉬운 것이었다.
고작 이런 것에 나는, 나는...
고개를 떨궜다.
눈물이 흐를 것만 같았다.
“멋있었어요.”
나는 익숙한 목소리에 눈물을 꾹 참으며 고개를 들었다.
저, 멀리서 서예님이 생긋- 웃으며 걸어왔다.
“서, 서예님...”
“잘하셨어요, 자. 이제 집에 가요.”
서예님이 뻗은 손을, 잠시 쳐다보다 손을 잡았다.
손으로 전해져 오는 체온은 따뜻했다.
그래, 이제 집에 갈 시간이었다.
서예님과 발을 맞춰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