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화 〉방송 여섯 달째(11)
건물은 생각보다 작았다.
다만, 알찼다.
뭐라고 해야 할까.
빌딩의 2~3층을 통째로 빌려 쓰고 있었는데.
문에는 게임의 대표 캐릭터가 새겨져있었다.
그리고, 복도에 설치되어 있는 여러 캐릭터의 등신대들.
내가 생각한 영세한 게임회사와는 무언가 다른 것 같았다.
무례일수도 있었지만, 나는 조금 더 작은 규모의 건물과, 조금은 지저분한 것을 생각했었다.
그것에 대해 마음속 깊이 사과를 건네고는 여성분을 졸졸 뒤 쫓으며 주변을 두리번, 두리번.
유저 수가 400명도 안 되는 게임회사가 어떻게 이런 규모를 유지 할 수 있는 걸까?
무언가 전작이 있어, 거기서 수입이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문 너머로 보이는 사람들의 숫자만 해도 어림잡아 40명이 넘었다.
“오아아...”
“아, 여기에요.”
“예...?”
회의실이라고 이름표가 붙어있는 문을 바라보았다.
이 문 역시, 게임의 대표캐릭터가 그려져있었다.
이쯤 되면 슬슬 무서운데...
“으으응...”
문을 열고 들어서자 상상한 그대로의 회의실이 나왔다.
거대한 원형 탁자에, 의자가 9개.
사뭇, 칙칙할 수도 있는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사방에 도배되어 있는 캐릭터 그림들.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더욱 말랑말랑해보인다.
그림인 것을 알면서도 만져보고 싶은, 그런느낌.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담당자분이 오실거에요! 혹시 마시고 싶으신 것 있으신가요?”
“어...무, 물이면 되요...!”
내가 멍 때리고 있자 여성분은 친절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이내 종이컵에 물을 한잔, 건네줬다.
종이컵을 받아들고, 홀짝이며 눈을 굴리는 사이.
회의실에 놓여 진 시계만이 째각- 거리며 침묵을 허용치 않았다.
“언제 오시려나...?”
그렇게 많은 시간은 지나지 않은 것 같았다.
휴대폰을 수시로 꺼내 봐도 3분도 지나지 않은 시간.
다만, 낯선 곳에 이렇게 혼자 남겨져 있자니 살짝 불안했다.
“후아...후하...!”
괜히 소리 내어 심호흡해보기도 했고, 볼을 짝- 소리나게 때려 평상심을 유지하려 애써보려 했으나, 얼마 못가 그냥 포기해버렸다.
될 대로 되라지...
무슨 나쁜 일이 있기야 하겠는가.
“아, 늦었죠? 죄송합니다... 급한 일이 있어서 그것 좀 처리하느라 늦었네요.”
젊다, 그리고 훈훈하게 생겼다.
그런데, 책임자라고 했으니, 높은 사람이겠지.
나는 혼자서 궁상떨던 것을 숨기며, 애써 밝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어, 얼마 안 기다렸어요!”
“하하... 일단, 계약서부터 보실까요?”
“아... 네...!”
정확히 어떤 게임인지, 어떤 모델인지,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전부, 계약서가 정상적일 때에나 허용되는 것들이었다.
저렇게 자신감 넘치는 것을 보면 장난을 치진 않으셨겠지만.
신중해서 나쁠 것은 없지 않은가.
건네받은 계약서의 내용은...
-
계약서의 내용은 터무니없이 좋았다.
수상할 정도로 정말 터무니없이 좋았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걸까.
혹시, 무슨 이상한 조항이 있는 건가 싶어 몇 번이고 다시 살펴봤지만, 이상한 것은 없었다.
그렇다면 내가 망설일 이유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계약서에 내 사인과 지장을 찍고는 바로 사진 스튜디오로 향했다.
토끼귀와 토끼꼬리가 부끄럽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예로부터 전해져 오는 말이 있지 않은가.
‘거절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돈이었다.’
내가 돈에 욕심이 없다한들, 돈의 소중함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너무 급하게 행동하는 것은 아닌지 잠시 고민했지만.
이건 급해야 했다.
솔직히, 이런 말 하긴 뭣하지만, 저분들이 조건조정에 들어가도 할 말 없는 수준 아닌가.
“우...”
근데, 그건 그렇고, 사진 촬영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가족사진도 찍어 본 적이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나에게 믿고 이런 좋은 조건으로 일을 맡겼다면, 최소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해야 했다.
물론, 사진작가의 지시에 따라 하면 된다지만.
“답답하시지 않을까...”
나는 초짜였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했다.
좋은 조건이 걸린 초짜.
일도 못하는데, 조건은 좋다?
욕먹기 딱 좋은 포지션 아닌가.
“후아...”
의자에 앉아 바닥에 닿지 않는 다리를 휘적이며 불안감을 표시하고 있을 때.
대기실로 들어선 스태프로 보이는 남성이 나에게 종이가방을 건네주었다.
“아, 이걸로 갈아입어주시면 되요!”
“아...네...!”
종이봉투를 살며시 열어보자 마법소녀가 입을 법한 화려한 옷이 나를 반겼다.
파란색과 흰색, 검은색이 뒤섞인. 뭐라 해야할까.
전통적인 마법소녀 복장.
“윽...”
게다가 종이가방 가장 밑에 깔려있는 토끼귀와 토끼꼬리까지.
“그래에... 토끼후드와 다를 거 없는 거야...”
눈 딱 감고 입고, 제대로 해서 한 번에 끝내자.
“멍멍...멍멍...”
내 리액션도 만만치 않지 않은가.
이런 것에 하나하나 부끄러워 했다가는 오늘이 다 지나도 일을 못끝낼 것이 분명했다.
애써 마음을 다잡으며 옷을 갈아입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대기실에 울려 퍼졌다.
다 입고, 토끼꼬리를 치마에 고정, 토끼귀를 머리에 착용했다.
움찔-
“흐갹...!”
방금 토끼 귀 움직이지 않았나?!
기분 탓이 아니었다.
진짜 움직였어 이거!
“으아아...!”
특수제작으로 움직인다고 듣긴 했지만, 설마 정말 움직일 줄이야.
“촬영 준비 끝났어요!”
“아...아, 네...!”
나를 부르는 소리에, 마른침을 삼키고는 거울로 다시 한 번 옷을 점검했다.
치마가 오랜만이라, 다리가 허전했지만, 그것 외엔 문제없었다.
내가 죽고 싶을 만큼 부끄럽다는 것을 빼면 말이다!
“으으...”
대기실의 문을 살며시 열자, 쏠리는 시선이 따가워 고개를 푹 숙였다.
“진짜 귀여우시다!”
나와 함께 온 게임사 여성분이 나에게 칭찬을 건넸지만 그저 부끄러울 뿐.
빨리 이 것을 끝내고 싶었다.
“시, 시작하죠...!”
“아, 그럼 이렇게 해보실까요?”
“네...!”
사진작가의 말에 촬영장 위로 오른 나는 눈을 질끈 감고는 큰 소리로 대답했다.
“양손을 머리 양옆으로 옮겨 봐요, 손은 피시고, 손가락은 오므리시고...”
시키는 대로 따랐다.
이게 무슨 포즈지.
내가 생각한건 진짜 모델들처럼 멋들어진 포즈를 취하는 것이었는데.
“손가락을 살짝만 굽혀볼까요?”
사근사근 듣기 좋은 목소리에, 손가락 끝을 살짝 오므렸다.
“좋아요, 귀엽네요.”
“아앗...”
칭찬은 됐다고 말하기에도 어려워서 얼굴만 붉히자 주변에서 웃음 소리가 들려온다.
귀엽다느니,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하찮냐느니 하는 소리들.
다만, 포즈를 풀수도 없어 속으로 투덜거리고있자, 사진작가가 말을 계속해서 이어나갔다.
“자, 그럼 이제 살짝만 몸을 기울여 주세요, 아 너무 기울였어요, 조금 만 덜.”
“아, 네...”
“자, 일단 한컷 찍을께요!”
카메라에서 나온 빛이 눈을 괴롭혔지만, 눈물을 글썽이면서도 버텨냈다.
이제 얼마나 남은 걸까...!
한 장만으로 끝나진 않겠지.
오들오들 떨면서 다음 지시를 기다리고 있자, 스태프가 다시 나에게 어떤 옷을 건네줬다.
“그걸로 갈아입고 한 장만 더 찍을게요!”
“아...? 네...!”
이렇게 빨리 끝난다고?
예상외의 말에 기분이 좋아져 종이가방을 들고 대기실로 들어가 열어보았다.
“이, 이거...”
종이가방에서 꺼낸 옷을 살펴보았다.
익숙한 것이었다.
"내가 방송에서 입던 토끼후드잖아... 색은 다르긴 하지만...!“
흰색의 토끼후드티, 그리고 반바지.
“이게 게임과 관련 있나...?”
갸웃거리면서도 일단, 입으라니 입긴 하겠는데.
무슨 연관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행히 아까의 그 마법소녀 옷보단 거부감이 덜했다.
방송에서 자주입어서 그런 걸까.
짧은 한숨을 쉬며 대기실에서 나와 아까보다는 조금 더 당당하게 촬영장으로 걸었다.
“자 이번 포즈는... 네...”
사진 작가에 말에 따라 포즈를 취했고, 사진을 찍었다.
"정말 귀엽네요..."
"부끄러우니까...제발 그런 말 하지 말아주세요..."
사진 두장만에 내 HP는 바닥을 보이고 말았다.
촬영장 바닥을 짚고 오열하고 싶은 마음을 꾹 참았다.
사진만 찍는다고끝이 아니었고.
아직, 일거리가 한가득이나 남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