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7화 〉 방송 열 한달째(4)
* * *
문제가 생겼다.
아주 사소한 문제.
배가 고팠다.
굶는 것쯤은 익숙하니까괜찮겠지 라며안이하게 생각했던 것이 잘못된 걸까.
고작 사흘 굶었다고 속이 쓰리다.
아니, 굶은 것은 아니지.
오랜만에 설탕물로 배를 채웠다.
그때와 달라진 것이 있다면 수돗물이 아닌 생수를 사용했다는 것.
하필 장을 보기 전이라 집에 있는 게 물밖에 없었다.
어차피, 이주 후면 정산날짜니까 조금만 버티자며 한숨을 쉬었지만.
오랜만에 굶자 몸이제대로 적응하지못했다.
돈을 빌려서 생활하고정산 날에갚는 것을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나, 남에게 손을 벌리기 싫었다, 그리고 조금 두렵다.
내 돈은 다 어디다 쓰고 돈을 빌리냐고 물어보면 도대체 뭐라고대답해야 할까.
전 재산을기부했다고?
그렇게 말하면 분명 혼나겠지.
시무룩해져서 주인님을 쓰다듬었다.
그러자 최근 간식을 주지 못해서 삐진 것인지, 내 손길을 받아들이지 않고 벌떡 일어나 저 멀리 자리를 잡고 나를 가만히 쳐다보는 주인님.
할 말이 없다.
사료는 많이 남아있긴 했지만, 간식이 하나도 없었다.
주고 싶어도줄 수없는 상황.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 듯, 주인님은 기어이 고개까지 휙 돌려 내 시선을 피했다.
“우으으... 진짜5만 원정도만남길걸...”
나도 이제 돈을 번다고, 많이 번다고.
뿌듯한 자기만족을 느껴보고자, 그리고 과거를 반성하고자너무 무리했다.
자각은 있었다.
내 주제에안 맞는금액이라는 것을.
하지만, 내가 누군가!
10억을 쓰레기더미에 던져준 사람!
그때는 오히려 불쌍한 이들을 위해서 기부하는 금액이, 너무 작은 것 같아 미안했다.
10억을 그렇게 허무하게 날려버리고, 기부에는이천만 원도안 되는 돈이라니.
하지만 당장 아무리 먹고 싶어도 배달비가2000원이상이면 안시켜 먹는현실과는 거리감이 있었다.
그리고그제야나는 자각할 수 있었다.
내경제 관념이기이하게 뒤틀려있다는 것을 말이다.
만원부터몇백만 원까지는많아 보인다.
그런데,천만 원부터억 단위까지는 적어 보인다.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싶었지만, 실제로 그랬다.
10억을 한번 손에 쥔 적이 있고, 그것을 허무하게 날린 전적이 있는 만큼.
그리고 만원이 없어서 고생하고 또 고생했던 전적이 있는 만큼.
내 경제관은 정말로 이상했다.
물론, 지금은 그것을 깨달았지만, 그대로 더 이어졌다면 분명 큰일이 났을 것이다.
오히려이번 기회에확실히 알게 되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심장이두근거려...”
설렘으로 두근거리는 것이 아닌 공포로 두근거렸다.
이번엔 기부라는 좋은 일에 써서 그나마 다행이지.
만약 이걸 발견하지 못하고 후일 무슨 일이 벌어졌다면 정말로 아찔했다.
돈이라도 꾸준하게 벌면 그것도 조금은 안심할 수 있겠으나.
모두가 알다시피 인터넷방송이라는 것은 수명이 정말 정말 짧았다.
언제 툭 하고 무너져 내릴지 모른다는 소리다.
...
나 같은경우엔 방송이 그렇게 무너져 내린다면 현실에서도 끝이겠지만.
아무튼, 이걸 이야기하는 건 아니고.
결국 원론적인 이야기였다.
돈을 아껴써야 한다.
“응...”
지극히 당연한 소리였지만, 새삼스레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지금 기부를 한 것은 어쩔 수 없다 치지만, 앞으로는 하더라도 정도껏 해야지, 이번 같은 일은 벌어져선 안 되리라.
나는 등을 바닥에 비비는 주인님을 잠시 바라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주인님에겐 안 된 일이지만 앞으로 간식의 비중도 조금 줄여야겠다.
아낄 수있는 모든 부분을아껴야...
아닌가?
갑작스레 든 생각.
어차피 방송이망한다면난 그걸로 끝인데, 방송이 망한 후를 걱정하며 돈을 아낄 필요가 있을까?
조금은 삐뚤어져도 괜찮지 않을까?
막 먹고, 막입고... 막기부해도 괜찮지않을까...?
이 역시 타당한 말이었다.
방송이 망한 후를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방송이 끝난다는 소리는 내 생명이 끝난다는 소리와 마찬가지였다.
그 후를 위해 돈을 모을 필요가 정말로 있을까?
잠시 고민해봤으나 정답은 나오지 않았다.
방송이망하지 않더라도돈은 모아놓긴해야 한다, 갑자기 돈이왕창 들일이있을지 어떻게 안 단말인가.
그리고 그렇다고 구두쇠처럼 엄청나게 아낄 필요도 없겠지.
200원 차이 소금을 고민할 정도나머리 감을때 물세를 걱정할 정도까지는 아니란 소리.
정확한 해답은 없었지만, 결국 지금처럼 살면 된다는 이상한 합의안이튀어나와 버렸다.
“...그래도 주인님 간식은 변함없어.”
오히려간식을 안 주고 있다보니정상 체중으로 내려가고 있는 것이 눈에 보였다.
이젠 고양이답게 높이 점프도 뛸 수 있었다.
주인님의간식 통제는앞으로도 계속해야겠지.
주인님이 나를 싫어하더라도 나는 주인님의 건강이 걱정되는 것을 어쩌겠는가.
어깨를 으쓱이고는 주인님을 바라보자, 주인님이 나를 흘깃 쳐다보더니,하악질을했다.
설마 내 마음을 들킨 건가 싶어, 시선을 피하고는 휘휘 불리지 않는 휘파람을 불어보았다.
“휘...휘이...!”
그런 내 휘파람 소리에 폭 한숨 쉬는 주인님.
고양이의한숨 소리는정말이지 특별했다.
그저 한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대상을 정말로 한심한 존재로 만드는 힘이 깃들어있었다.
“주인님 나, 그렇게한심해...?”
부정의 야옹이나오길 바랐지만, 주인님은 킁 코를 풀 뿐이었다.
“너무해...”
주인님 이름이주인님이라고 한들, 내가 사람이고 주인님이 고양이인데, 이 취급은 도대체 뭘까.
흔히 말하는캔 따개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걸까.
만약 그렇다면 정말 슬플 것만 같았다.
관계를한 번쯤재정립해야 했다.
분명 우리의 첫 만남은 슬프고도 아련하고,목메는만남 아니었나?
그리고 재회 역시 남들이 어떻게 보든,꽤감동적이었다.
그런데, 예전의 그 감정은어디 가고이런 관계가 형성된 걸까.
무력 진압 후 서열정리를 잠깐 생각해봤지만, 내가 주인님에게 진다는 사실에 다시금 시무룩해질 뿐이었다.
이게 다예빈이때문이다.
간식을 하도 많이주다 보니간식에맛 들이고, 간식을 주는예빈이를나보다 더 잘 따르게 된 것 아닌가.
그리고간식을 안 주는나는 낮게 보는 것이 틀림없었다.
물론, 그 전부터 나를 막 대하는 느낌이 없진 않았지만, 최근 분명히 심해졌다.
“주인님!”
내버럭 소리에주인님이 귀를 쫑긋거렸다.
분명 들었음에도 고개를 돌리지 않는 것이 괘씸했다.
조만간 수를 쓰긴해야 할듯싶었다.
이대로라면인간의 존엄성이많이 사라질 것만 같았다.
물리적으로 이기진 못하지만, 인간은 머리를 써서인간인 것이다.
아무리 모자란 나라고 머리를쓸 줄모르는 것은 아니었고,꽤그럴듯한방법을 떠 올릴 수 있었다.
굳게 다짐했다, 서열을 역전시켜서 인간으로서의 자긍심을 되찾겠다고.
난 예전의 백서연이 아니었다, 예전의리에라가아니었다.
엄청나게 성장했다!
꾸르륵 배가 비명을 지른다.
위액이 속을 메스껍게 만들었다.
“...물이라도 조금 더 마실까?”
속이느글거린다라고표현해야 할까.
하지만 아직은버틸 만했다, 속이 쓰리긴 하되, 그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나흘째에 접어들면몸이 적응해서배고픔도 제대로 못 느끼게 되니까.
오늘만 어떻게든 참으면 된다.
그리고 그 후부턴 그냥 익숙해진 몸이, 죽을 위기가 아닌 이상 식욕을 당기지 않고 먹을 것을 보채지 않기에 그 후부턴 편안한 다이어트가 되리라.
“응,응...”
주린 배를 양손으로 감쌌다.
꾸르륵 이상한 소리가 울리고, 그와 동시에 살이 살짝 떨리는 것이 느껴진다.
그에 반에 주인님은 사료를 와작와작 먹고 있었는데, 고양이 사료가 맛있어 보이긴 처음이었다.
사흘째가 가장 고비인데, 고양이 사료를 보고 식욕이 오르다니, 이게 도대체 무슨 경우일까.
나는 가만히 보다가, 주인님이 흘린 사료 한 알을 바라보았다.
“...츄읍”
군침이 흘러나왔다.
내가 드디어 미쳤나 진지하게고민했지만 식욕은어쩔 수 없었다.
고작 사흘 굶은 것에 이 지경까지 되다니 정말로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도 모르게 손이 뻗어 고양이 사료 한 알을 주웠다.
갈색의 동그란 사료.
생김새는흡사초코볼시리얼 같았다.
주인님이 저번에 내가츄르한번 핥았다고 죽이려고 달려든 것을 떠올리면서 주인님의 눈치를 보다가, 뒤로 돌아 사료한 알을어금니에 넣고 씹었다.
바삭 한 소리와 함께. 맛이.
맛이.
맛이...
“맛없어...”
눈물이 핑 돌았다.
사료가 맛이 없어서 눈물이 맺힌 것이 아닌, 배고픔을 못 참고 고양이 사료를 먹었다는 것에 대한 자괴감으로 맺힌 눈물이었다.
“주인님...”
야옹 밥을 먹으면서도 부르지 말라는 듯, 말대답하는 주인님에게 다가가 꼭 끌어안았다.
주인님은 잠시 버둥거렸지만 이내 내 상태를살피더니볼을 몇 번 삭삭 핥아줬고, 손을 뻗어 내 머리에 젤리를 가져다 대었다.
그리곤꾹꾹이.
나름대로쓰다듬음이었다.
고양이 사료를 먹는 것도 모자라서 고양이에게 쓰다듬어지는 사람이 있다?
“우그읏...”
눈물이 맺히다 못해 뚝 뚝 흘렀다.
나 자신이 서럽고 바보 같았다.
* * *